외전 02. < pair >
[남우주연상 수상자는 ○○○의 지관영!]
“으와아악! 악! 아악!”
브라운관 속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온 집 안을 가득 채우는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건 최씨 가문의 차남, 우진의 목소리였다. 최우진은 그걸로 멈추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쿵쿵대며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 진짜 대박! 완전 대애박!”
“오빠. 나도 기쁘기는 한데, 바닥 내려앉겠다.”
민아는 붕붕 날아다니는 제 둘째 오빠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런 모기만 한 목소리가 최씨 가문 다혈질 중 으뜸가는 그를 막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우진은 TV에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하게 꾸며진 사내의 얼굴이 잡히자마자 더욱 흥분하여 환호성을 내질렀다.
“우워어어! 잘생겼다아!”
“큰형. 형도 저 상 받는 거 몰랐어요?”
반짝반짝한 목소리는 막내 최정민의 것이었다.
멍한 얼굴로 제 연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최태훈이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건 그때다. 어느새 가족들의 시선은 모두 그들의 장남을 향해 있었다.
태훈은 그제야 머쓱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목덜미로 슬슬 열이 오르고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아하핫, 왜 오빠 얼굴이 빨개지냐?”
“야, 야. 조용.”
남우주연상 지관영!
최태훈은 화면 가득 떠오른 제 연인의 모습을 보고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저 남자는 정말 상에 대한 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농담 삼아 ‘이번에 받는 거 아닙니까?’ 하고 물었을 때만 해도, 영 시큰둥한 반응을 하며 저를 끌어안기만 했다. 시상식 일정들 때문에 연말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것이 성가시다는 게 그 이유였다.
[후우. 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과분한 상을 받게 되어서……. 정말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앗. 연기다.
가이드는 제 연인의 ‘격앙된 척’하는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함께한 3년의 세월 동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지관영 저 남자의 근사한 얼굴 뒤에 숨겨진 속내만큼은 엿볼 수 있게 된 태훈이다.
[참 고된 촬영이었습니다. 긴 시간 함께 애쓴 영화 ○○○의 일원 한 분, 한 분 덕분에 이 상을 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 대표님, 언제나 절 아껴 주시는 팬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정석’.
저런 무대 위에서의 지관영을 보고 있을 때 떠오르는 단어다. 최태훈은 매끄럽게 말을 이어가는 연인을 보며 열이 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감췄다. 센터 연구원으로 들어가서 가이드를 대상으로 한 강의를 시작한 지도 1년째, 태훈은 제가 강단 위에서 행동하고 말하는 모든 것을 저 남자를 통해 배웠다.
“모르고 올라 간 사람 맞아? 완전 기계인데?”
최승유가 작게 헛웃음 치며 말했다. 태훈은 제 동생의 말에 동의했다. 지관영은 정말, 너무 흠잡을 데가 없다.
결점이 없다는 건 다시 말해 수상자로서의 재미는 좀 떨어진다는 말과도 같다. 그래서 가끔은 트로피를 거머쥔 그보다 다른 파격적인 신인들의 기사가 더 많이 쏟아지기도 했다. 최태훈은 조금은 부루퉁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하던 매니저를 떠올렸다.
[하하. 네, 시간이 없는 것 같네요. 그럼 마지막으로…….]
시선을 카메라 옆으로 살짝 비스듬히 던졌던 지관영이 조금은 곤란한 듯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연말 시상식 특성상, 1분 1초에 쫓기는 듯했다.
최태훈은 커피를 홀짝이며 긴장으로 마른 입술을 적셨다.
[가이드 최태훈 씨.]
“혀엉! 컵, 컵 잡아!”
손에 쥔 머그잔 안의 커피가 미지근한 상태여서 천만다행이었다. 태훈은 제 이름을 또박또박 입에 담는 TV 속 남자를 보며 순간 모든 사고 회로를 정지한 채 손을 삐끗했다. 깜짝 놀란 동생들의 목소리에 얼른 잔을 움켜쥐었지만, 이미 여러모로 때는 늦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맨날 외박하고 연락 안 되어서 화났던 거, 이 트로피 그대로 안겨 드릴 테니 화 푸셨으면 좋겠습니다.]
“꺄아악! 어쩜 좋아!”
“후우…….”
최태훈은 아예 잔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완전히 눈까지 홧홧한 열이 치미는 것 같아서였다. 부모님이 부부 동반 모임으로 이 자리에 없는 게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없는 그였다.
사실 지관영과 최태훈 페어는 저 작품을 촬영할 즈음에 제법 크고 작은 다툼을 몇 번 했었다.
[사인회장에서 만난 이후로 벌써 3년이네요. 시간이 생각보다 참 빨리 갑니다.]
지현이 깔깔거리고 웃으며 ‘저거 내가 부탁한거지롱!’ 하고 외쳤다. 이제껏 단 한 번도 알려진 적 없던 지관영과 그 가이드의 연애사에 상기된 얼굴로 놀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이 잠시 잡혔다.
[태훈 씨.]
잠시 숨을 삼켰다가 나직하게 떨어진 이름이었다. 그 목소리는 누가 듣든 간에 작은 한숨이 터질 만큼 여러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담백하고 깔끔한 모습만을 보이던 배우 지관영에게는 너무도 드문 모습에, 시상식장에서 그를 재촉하던 이들마저 잠시 숨을 죽였다.
그건 최씨 가문의 일원들 역시 마찬가지다.
태훈은 얼굴을 가렸던 손을 슬쩍 내려 부끄러움에 시린 눈으로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보기 좋은 입술을 혀로 살짝 적신 사내는,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결혼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가이드는 잠시 생각했다.
‘저 목소리의 희미한 떨림도 거짓말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얼마 가지 않아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인이 최태훈에게만 짓는 눈웃음을 걸고는, 귓가에 속삭이듯 덧붙인 달콤한 목소리 덕분이었다.
[저 청혼하는 겁니다, 지금.]
살짝 붉은 물이 들어 있는 귓가가 보였다.
가이드 최태훈은, 에스퍼 지관영에게 청혼받았다. 정말로!
* * *
“뭐 받고 싶은 거 있어요? 말만 해요, 뭘 못 사줄까.”
“……아, 제발요.”
“신혼여행지도 중요한데. 안정적으로 몰디브나 발리 쪽으로 가도 되고, 아니면 아예 유럽 쪽도 좋고.”
최태훈은 제 능력으로는 잔뜩 신이 난 두 여자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닫고 고개를 푹 떨구었다. 지금 그는 권다희와 이미현의 연구소에 와 있다.
사실 태훈은 어느 정도는 놀림감이 될 각오를 하고 왔었다. 요 며칠 센터 출근까지 면제받을 정도로 난리가 났었으니,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의 주인공이 되는 것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왜 그리 울상이에요. 뭐, 조금 면은 팔렸겠다만 지관영 씨 옆에 있으면서 하루 이틀 겪은 일도 아니고.”
권다희는 센터에서 물러난 이후 자신의 개인 연구소를 차렸다. 사실 그녀의 연구소는, 처음엔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센터장에서 물러난 그녀를 고문 위원으로 삼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고안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권다희 그녀는 시간을 허투루 보내기에는 너무나 부지런한 워커홀릭이었다. 집 주소로 신고했던 이름뿐인 연구소가 정말 사무실을 빌려 간판을 거는 데까지 반년, 센터의 블라인드 기술 입찰 공고에 서류를 내기까지 일 년.
권다희는 자신의 능력에 센터에서 근무하며 얻은 수많은 경력까지 더해서 엄청난 속도로 제 연구소를 불렸다. ‘그 사건’ 이후 사사건건 위와 충돌하던 이미현이 센터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들어온 것도 그때쯤이다. 권다희의 연구소에는 그녀를 가까이에서 따랐던 센터 출신 연구원들이 상당하다.
“저, 그래도 우선 둘 다 남자고…….”
“설마 지관영 씨 두고 다른 여자 찾아서 결혼할 생각이에요? 그럼 ‘셋 다 끽!’ 기억 안 나?”
웃음기 가득한 미현의 말에 가이드는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나 두고 결혼하면 셋 다 죽는다’. 정말 다시 들어도 참 달콤 살벌한 고백이었다.
“아, 아뇨!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지관영 씨랑 만나고 있는데요, 무슨.”
“그런데 뭐가 문제야. 동성 결혼, 뭐 아직 법제화는 안 됐다지만 정부 바뀔 때마다 매번 말 나오고. 호적에 올라가든 말든 하는 사람 널렸는데.”
조곤조곤 결혼을 부추기는 이미현의 말에 최태훈은 찔끔한 얼굴이 되어 입술만 꼭 깨물었다. 그런 가이드를 보며 마지막 한 타를 날린 건 권다희였다.
“지관영 씨, 올해 서른일곱 아닌가요? 애인도 있겠다, 나이도 찼겠다, 결혼 생각날 나이일 것 같은데요.”
서른일곱과 서른하나.
흔히들 연애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다.
태훈 역시 오랜 친구들의 청첩장에 놀라지 않고 축하한다는 말을 먼저 건네며 빈 일정을 확인하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평생 남을 엄청난 청혼에 입을 떡 벌리고 놀랐던 가족들도, 얼마 가지 않아 씩 웃으며 눈앞의 두 여자 같은 말을 했었다.
지관영과의 결혼.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내와 함께하는 약속. 다 좋다. 싫지 않다. 아니, 사실은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어떤 때보다 근사하게 꾸민 남자가 모두의 선망을 받는 트로피를 손에 든 채 저를 향해 또박또박 사랑을 말하는 모습은 다시 생각해도 꽤 뿌듯했다.
최태훈은 ‘톱배우 지관영의 시상식 프러포즈’ 기사의 끄트머리마다 주렁주렁 달려 있는 부러움 가득한 댓글들을 모두 읽었다. 그들은 언제나 멀찍이 거리감을 유지했던 사내가 ‘제 가이드’의 앞에서는 순식간에 그 모든 경계를 풀고 달콤한 연인이 된다며 놀라워했다.
저택으로 돌아오는 차 안이 유독 답답하게 느껴졌다. 여느 때 같았으면 오랜만에 휴식기에 들어간 제 에스퍼를 혼자 둘 틈 없이 재빠르게 움직였을 태훈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가이드는 최대한 운전대를 빙글빙글 돌리며 시간을 때우다가 해가 진 뒤에야 관영의 자가용 옆에 제 차를 나란히 세웠다. 하지만 그러고도 곧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간 건 아니다. 그는 공연히 가을 정원을 산책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속을 달랜 뒤에야 연인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관영 씨, 저 왔습니다.”
“……그래.”
제법 다정하게 전해진 말에도 딱 벌어진 사내의 뒷모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가이드는 멋쩍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최태훈은 지관영의 청혼을 거절했다.
* * *
‘시상식 프러포즈’.
사실 이건 지관영 그도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였다. 관영은 애초에 요란 떠는 것도 싫어했고, 제 가이드, 그리고 그와 관련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귀찮아했다.
결혼이니 뭐니 하는 제도권 가치에 대한 인식도 흐렸다.
오히려 ‘내가 최태훈과 있는 걸 허락받기라도 해야 한다는 거야?’ 하며 비뚜름한 태도를 보이는 게 지관영이었다.
하지만 그런 에스퍼의 머릿속에 달짝지근한 프러포즈가 싹트게 된 건, 그에게 남우주연상을 안겨 준 작품을 촬영할 때였다.
올 초부터 중순까지 지관영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작품을 과하게 받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별생각 없이 출연을 수락했던 영화의 감독이 굉장히 편집증적인 사람이었고, 덕분에 배우들은 물론 전 스태프가 몇 달간 죽기 살기로 고생했을 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에스퍼인 관영은 체력적인 문제는 겪지 않았다. 며칠간 꼬박 밤을 새우고 서늘한 빗속에서 촬영을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냐고 묻는다면 그건 절대 아니다. 지관영은 그 나름의 고역을 질릴 만큼 겪었다.
지관영 그는 10년도 넘게 제대로 맞는 가이드 없이 지냈었다. ‘페어’라는 단어 아래 엮인 남자와 함께하게 된 건, 그 오랜 시간에 비하면 형편없을 정도로 짧은 3년 정도가 다다.
하지만 그 3년 간 괴물의 세계는 완전히 바뀌었다.
홀로 있는 것이 당연했던 저택에 슬리퍼 하나가 더 늘었다.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면 제게로 고개를 향한 채로 새근새근 잠든 사내가 있었고, 품으로 끌어당기면 기다렸다는 듯 안겨드는 체온이 날 선 정신을 나른하게 했다.
그 감각은 가이드인 태훈은 절대로 상상하지 못할 거였다.
지관영은 종종 생각했다.
감히 그 누구도 들일 수 없었던 제 흉한 가죽 뒤를 알아보고 먼저 사랑해 준 건 최태훈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맹목적이고 가끔은 아둔할 정도로 빠져드는 건 제 쪽이었다.
그는 스케줄을 하러 나설 때부터 저녁에 다시 만나게 될 연인을 그렸다. 홀로 저택에 있을 때 하는 일은 더욱 없었다. 괴물은 그저 제 연인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관영은 그런 저 자신이 마치 집을 지키는 짐승처럼 느껴져 헛웃음이 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최태훈이 차를 대고 걸어 들어오는 구두 굽 소리만 들려도 멍하게 그쪽을 바라보게 됐고, 들어오기 직전의 몇 초엔 귀가 울릴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절대, 이보다 더 좋아하게 될 수는 없다.
더 사랑할 방법 같은 건 없어. 매일같이 하는 생각은 정확히 그다음 날 저녁마다 깨졌다. 에스퍼는 이렇게 누군가를 마음에 담게 된 스스로가 신기했다.
그런 상황에서 몇 달간 지옥 행군 수준으로 진행된 영화 촬영이 무던했을 리 없다. 통화는 시간이 맞지 않아 힘들었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텀은 최소 두세 시간 간격이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지관영은 ‘에스퍼’이다.
다시 말해 제 페어 가이드와의 접촉이 필수적인 존재라는 거다. 결국 몇 주에 한 번, 겨우 얼굴을 마주한 페어가 거의 의무적으로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몸을 섞는 것이었다. 태훈은 몇 번쯤은 오히려 그걸 안쓰러워하며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찾아온 에스퍼와 제대로 된 안부를 물을 새도 없이 섹스를 하고 얼마 안 가 곧바로 그를 배웅해야 하는 일이 반복되면서부터 그 단정한 얼굴에 차츰 냉랭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때는 태훈도 꽤 힘든 시기였다.
알력 관계로 복잡하게 꼬인 센터 협의회 일과 새로 시작한 강의 일정이 주는 긴장은 물론이고, 유도 선수인 동생 우진의 부상으로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가이드 역시 유일하게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연인이 너무나 필요했던 시기였던 거다.
촬영 막바지, 거의 삼 주간 접촉 없이 강행군했던 에스퍼가 새벽녘에 찾아와서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가이드의 맨 피부에 고개를 묻었을 때. 결국, 최태훈은 폭발했다.
“저 보러 오신 겁니까, 아니면 섹스하러 오신 겁니까?”
지관영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멍하게 멈춰 섰다. 완전히 태엽을 풀었다가 다시 삐걱이며 움직이는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최태훈?”
“오늘은 또 몇 시간 여유 잡고 오신 겁니까. 두세 시간?”
빠르게 뛰는 심장박동이 들렸다. 벌겋게 변한 채로 핏줄이 선 목도. 에스퍼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다 하고 나면 씻고, 잘 갔다 오라고 배웅하고……. 또 기다리고. 관영 씨는 이게 뭐 같습니까?”
지난 몇 달, 관영이 제 연인을 찾아왔던 모습이다.
에스퍼는 정말 이때처럼 제가 다른 것들을 무관심하게 대했던 걸 후회한 적 없다. 이런 감독인 줄 알았다면, 시나리오가 좋든 말든 무조건 내쳤을 텐데.
하지만 그런 지관영의 생각은 평소처럼 매끄러운 문장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괴물은 제 목숨줄을 쥔 주인의 분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을 말을 고르다가 어설프게 대답했다.
“……후우, 최태훈. 그런 게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가이드 연구원이니까요?”
태훈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뭐라 말을 더 이어 보려던 에스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신체계가 예민한 에스퍼의 심리적 지지가 되어야 한다’. 예에, 알아요. 아는데요!”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눈시울이 약간은 촉촉하게 변한 게 보였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 감정을 격렬하게 토해 내는 것 대신, 깊게 삼켰다가 천장을 보며 한동안 입술만 꽉 깨물었다.
“몇 달째 얼마나 끔찍한 기분인지 아십니까?”
“태훈아.”
혹시라도 저 몸을 끌어안으면 또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건 아닐까. 관영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초조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건 이어진 말이 줄 덜컹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꼭…… 섹스만 하는 관계 같아서.”
한숨처럼, 자조처럼 흘러나온 문장에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지관영은 조금 멍한 얼굴로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가이드는 그 시선을 피해 몸을 돌려 한참을 애꿎은 벽을 봤다가, 침대 이불보를 괜히 우그러트리는 것을 반복했다.
일렁이는 속을 어떻게든 달래 보려고 떠는 모습이 대번에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괴물은 곧바로 제 주인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한참을 망설이다가, 가까스로 그 옆에 앉았다.
빠르게 쿵쾅대던 박동이 천천히 안정을 찾는 것을 몰래 훔쳐 들으며 지관영은 수천, 수만 가지의 단어를 떠올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가이드였다.
태훈은 제 에스퍼의 쪽으로 몸을 확실하게 돌리고 또렷하게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덕분에 그 순간마저도 참 ‘최태훈답다’라는 생각을 한 관영이었다.
“죄송합니다. 화낼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말이 험하게 나왔습니다.”
“……아니. 내가 부주의했어.”
자연스레 안겨드는 몸의 온기에 솜털까지 바짝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에스퍼는 제 페어의 얼굴이며 보드라운 피부 여기저기에 입술을 떨어트리며 몇 번이고 작게 사과했다.
그날, 최태훈이 말했던 것처럼 고작 ‘두세 시간’ 동안 페어는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중간중간 서로 입을 맞추고 살짝 몸을 들뜨게 하는 페팅을 하면서도, 그간 이어지지 않았던 시간을 맞춰 나가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관영은 그제야 제 가이드가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건 최태훈 역시 마찬가지였던지라, 가이드는 제가 했던 뾰족한 말을 자꾸 미안해했다.
에스퍼가 촬영장에서 잠시 짬이 날 때마다 멍하게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다. 현장에서는 절대 자신의 사적 영역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한숨을 내쉬면서 휴대폰을 확인하고, 가끔은 초조한 듯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시작한 거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무거운 총대를 든 건 넉살 좋기로 유명한 동료 배우였다. 그는 지관영의 곁으로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이밀어 앉은 뒤 괜히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관영 씨. 무슨 일 있어요?”
그린 듯한 얼굴을 한 사내는 조금은 느지막이 반응했다. ‘거봐, 거봐.’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닙니다. 일은요.”
“에이. 온종일 같이 붙어 있는 처지에, 그렇게 슬쩍 빼 봤자 다 눈치챘네요.”
에스퍼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빈틈을 파고드는 말이 거슬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별거 아니라며 흘려 말하기는 싫었다.
최태훈은 그에게 ‘별거’다.
입을 꾹 다문 에스퍼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관영은 참 별꼴을 다 겪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제 휴대폰에 등록된 몇 안 되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던 가이드가 떠올랐다.
‘친구 좀 만드십시오. 나이 들수록 그게 얼마나 중요한데요.’
이건 저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연인이 늘 하는 말 중 하나다. 잠시 고민하듯 시선을 굴리던 지관영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은퇴할까 생각 중입니다.”
나직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대형 폭탄에 사람들의 말문이 일제히 막혔다. 누군가의 입은 그 안의 목구멍까지 보일 정도로 떡하니 벌어졌다. 몇 초 뒤, 뒤늦은 반응들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어, 어어억?! 뭐라고요? 예?”
“왜요?! 무슨, 무슨 일입니까! 은퇴요?”
감독, 주연 배우들은 물론 까마득한 막내 스태프까지 경악에 찬 채로 목소리를 높였다. 동년배의 배우 중 독보적인 흥행성과 개런티를 자랑하는 지관영은, 영화판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탐을 내는 사내다. 단지 그의 이름 석 자를 보고 찾아오는 투자자들과 관객들 때문이다.
지관영은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느리게 말을 이었다.
“……촬영 때문에.”
“어, 어어. 그래요. 촬영? 촬영이 왜요?”
많은 사람이 일제히 동시에 꼴깍 침을 삼키는 모습은 그 나름의 명장면이었을 것이다.
“자꾸 집에 못 들어가다 보니, 가이드가 불안해해서요.”
‘가이드’!
사람들은 그 익숙하면서 또 낯선 단어에 눈을 크게 떴다.
그랬다. 지관영 저 남자는 에스퍼였다. 그것도 촬영 중간 잠시 쉴 틈이 날 때마다 휴대폰부터 먼저 손에 쥘 정도로, 제 페어에게 지극정성인 사내다. 에스퍼는 느긋한 어조로 퇴직 의사를 이어갔다.
“굳이 그렇게까지 이 일을 계속해야 하나 싶던데요.”
“안 돼요! 아니, 그러니까……. 뭔가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이 생활도 할 만큼 했고, 차라리 가이드랑 같이 일할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감독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두 손으로 짚었다.
전혀 나은 방법이 아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관영이다. 사내로서도, 배우로서도 완전하게 무르익은 저 남자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연기를 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온갖 영감이 치솟는데, 은퇴라니!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하지만 그런 감독과는 달리 지관영은 예행연습 삼아 꺼낸 이 은퇴 선언 덕분에 복잡했던 생각이 꽤 정리된 기분이었다. 눈치 빠른 스태프들은 그런 지관영의 표정을 읽었다. 눈앞의 주연배우가 당장 내일이라도 기자회견을 열 것 같은 개운한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그때, 얼굴의 반을 가리는 커다란 뿔테안경을 쓴 연출부 막내의 입이 다급하게 열렸다.
“겨, 결혼!”
현장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연예계 생활을 그만두고 최태훈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향으로 마음이 기울던 지관영의 눈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출부 막내는 그 수백 개의 눈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결혼하면 좀 낫지 않을까요?”
“……결혼?”
살며 단 한 번도 입에 담아 본 적 없는 단어를 말하는 듯 다소 어색한 되물음이었다. 지관영은 제가 말한 단어를 속으로 몇 번 더 곱씹었다. 결혼. 결혼.
“그으래, 가이드 분 나이가 몇이에요?”
살벌하게 눈을 빛내는 감독이 제 주연배우 곁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서른하나입니다.”
“어유, 주변에서 다들 가정 꾸리고 살기 시작할 때잖아. 애초에 독신으로 살 생각 없던 사람이라면 불안할 법도 하네!”
“맞아요. 그거네, 그거.”
지관영은 저를 향해 쏟아지는 급한 목소리들을 들으며 입을 다문 채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결혼. ……최태훈과, 결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짙은 먹색의 턱시도를 입은 제 페어였다. 팔다리가 유독 길고 잘 뻗은 최태훈은 무엇을 입어도 잘 어울릴 테지만, 그 깔끔하고 잘 들어맞는 옷을 입으면 정말로 근사할 것 같았다.
최태훈과 제 사이를 잇던 ‘페어’라는 단어에도 새로운 의미가 추가될 거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을 맹세하고, 입을 맞추고, 또…….
그때부터였다. 지관영이 최태훈과의 결혼을 상상하게 된 건.
연인이라는 이름표 위에 슬쩍 덧붙일 그것은,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하자 끝도 없이 그 몸집을 키워 갔다. 최태훈과 부부라는 단어로 불리게 된다면 지금의 생활에서 무엇이 바뀔지를 그려보는 것도 좋았다.
‘최태훈에게 추파를 던지는 사람들은 확실히 뚝 잘리겠지?’ 하는 조금은 유치한 생각은 기본이었다. 3년간 들어왔던 ‘관영 씨’라는 호칭이 바뀐다면, 과연 최태훈은 그 수많은 애칭 중 어떤 것을 고를지 상상하다가 식사까지 거른 날은 솔직히 헛웃음도 좀 나왔다.
누군가와 결혼하고, 부부라는 단어로 이어지는 달짝지근한 상상에 그 자신이 이렇게까지 빠져들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욕심과는 달리, 지관영은 제 연인에게 ‘결혼’이라는 단어 같은 건 단 한번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못 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말을 삼킨다니. 지관영 그에게는 어울리지도 않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관영은 저를 보며 눈을 접어 웃는 가이드를 보며 결혼의 기역도 꺼내지 못했다.
이상하게 그 이야기를 꺼내려 마음먹을 때마다 입이 바짝 마르고 답지 않게 심장이 시끄러워졌다. 에스퍼는 처음에는 제가 긴장하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었다. ‘이깟 게 뭐라고!’ 하며 그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애써 자기 위안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달, 최태훈과 부부가 된 미래를 온갖 형태로 다 상상한 다음에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자신은 분명 청혼을 앞두고 떨고 있었다.
그걸 깨달은 다음에는 솔직히 황당했다. 머리 한 편에서는 ‘최태훈이 거절할 리 없는데, 무슨.’ 하고 애써 안도를 소곤거리는 목소리도 났다. 적어도 관영은 그때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최태훈의 사랑을 확신했다. 지관영 그가 불안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제 연인이 마음에 품은 사람이 저 자신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연인을 위한 시계도 하나 준비했다. 새로 반지를 맞출까도 생각했지만, 태훈은 관영이 몇 년 전 그를 위해 마련했던 반지를 끔찍이도 아끼는 터라 다른 걸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노미네이트 된 이상 얼굴을 비치는 것이 좋다고 성화였던지라 참석한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상을 받았다. 그럴듯한 문장을 내거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몇 개의 훌륭한 교과서를 두고 그대로 따라 읊는 사람처럼 입을 벙긋거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관영이 멈칫한 건 수상소감의 끝에서였다. 보통 가족과 신에 대한 은총을 말하고는 하는 그 부분에서 에스퍼는 잠시 멈춰 섰다. 그에게는 가족도, 신도 최태훈이었기 때문이다.
태훈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부터 심장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지금 저를 보고 있을 것이 분명할 단정한 얼굴이 그려졌다. 몇 달을 신중하게 고민했던 순간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건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흘러넘쳐 버린 것에 가깝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사방이 난리였다. 사회를 맡은 동료 배우 하나는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생방송 사고를 냈고, 시상식이 끝나고 나서는 금방이라도 딱 혀 깨물고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한 소속사 홍보 팀장과 매니저가 있었다.
“이거 꿈 아니죠? 그렇죠?”
“피곤합니다.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뒤풀이는 나중에 합시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안 피곤하면서!”
소속사 사람들이 불만을 쏟아 냈지만 그런 것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지관영은 제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전원을 켜기가 무섭게 수백 통의 문자가 쏟아졌고, 화면이 꺼질 일 없이 계속 반짝였다.
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제 연인의 이름도 있었다.
정확히는 애칭이었다. ‘남친’. 관영은 아주 오래전부터 태훈을 이렇게 입력해 두었다. 하지만 태훈과 전화 연결은 쏟아지는 연락들 덕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메시지를 먼저 보낸 건 가이드였다.
[관영 씨, 어디십니까?]
심장이 귀를 멍하게 울릴 정도로 뛰었다. 슬쩍 머쓱하게 시선을 빙글 돌리다가 본 백미러에 비춘 제 얼굴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붉어져 있었다. 이런 한심한 얼굴을 최태훈이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관영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매니저의 눈이 들어오지 않는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꾹꾹 힘주어 답장했다.
[성북동 가고 있어.]
[저도 지금 거의 다 왔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공개청혼을 받은 사내치고는 너무나 깍듯한 대답이었지만, 그래서 또 최태훈다웠다. 피곤한 척 눈을 덮어 가리는 건, 사실 붉은 물이 든 얼굴을 가리려는 속임수였다.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돌았다. 최태훈이 뭐라고 할까? 어떤 표정일까? 아니다, 그 전에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어야 하지. ……아. 젠장. 정말 해 버렸다.
정말로 에스퍼이어서 다행이었다. 매니저에게도, 연인에게도 이렇게 요란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들킬 일이 없었다.
에스퍼는 겨우 속을 다스렸다. 저택에 도착하자 그 근처부터 눈에 익은 기자 몇이 보였다. 관영이 탄 밴의 번호를 알아보고 달려드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능숙하게 차를 몰아 그들을 따돌리고 관영이 바로 저택으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안채에 가까워질수록 속이 일렁여서, 지관영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이게 뭐라고 떨리나’라는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최태훈인데, 당연히 떨릴 수밖에 없다고 깨닫자마자 모든 것이 명료해졌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빨리 왔네. 더 있다가 올 줄 알았는데.”
본심과는 다른 표정을 흉내 내는 것에 익숙해서 다행이었다. 관영은 옷을 갈아입는 척하며 온 신경을 제 연인에게로 집중했다. 담담한 목소리와는 달리 최태훈의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건 왠지 듣는 것만으로도 입이 바짝 말랐다.
“관영 씨. 그…… 시상식, 잘 봤습니다.”
“아, 응.”
언제나 다정스러웠던 연인 사이에는 묘하게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둘 다 어쩔 줄 모르고 있다는 게 좀 더 맞는 표현이었다. 지관영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제가 들고 온 푸른빛의 케이스를 태훈과 저 사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최태훈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그것을 열었다. 짙은 황동빛이 흐르는 트로피 하단에는, 가이드 그 역시 가지고 있는 이름 석 자가 새겨져 있었다. 가이드의 시선이 한동안 트로피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을 보면서, 지관영은 속으로 괜히 숫자를 셌다. 사실 에스퍼는 제 페어가 무슨 이런 유난스러운 짓을 하냐며 화내는 것까지 상상했었다. 아니면 몇 년 전의 어떤 날처럼, 이불을 둘러쓰고 토라지는 모습까지 그렸었다.
에스퍼 그 자신도 대책 없이 고백을 쏟아 냈다는 자각이 있었다. 사실 욕심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이왕 하는 거, 정말로 프러포즈를 하게 된다면 좀 더 멋진 곳에서 근사한 단어를 곱게 엮어서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건 어떻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지관영은 자신의 페어가 저에게 어떤 표정을 하든지 이번에야말로 좀 더 제대로 다시 말해 볼 생각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몇 달 동안 지켜보기만 했던 시계도 슬쩍 챙겼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건 최태훈이었다.
“관영 씨.”
에스퍼는 순간 제 귓가에 걸리는 소리가 자신의 박동인지 아니면 연인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긴장했다. 긴장이라니, 센터의 다른 연구원들이 들으면 이건 연구감이라며 달려들 표현이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최태훈 역시 센터의 연구원이다. 관영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고동색 눈동자가 살짝 떨리는 것을 눈치챘다. 최태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관영은 제 연인을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말을 기다렸다.
그는 정말 어떤 반응이든 겸허히 받아들일 각오를 했었다.
에스퍼의 능력이 준 완벽에 가까운 두뇌로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가지의 수를 다 그려냈었다.
딱 한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말로 그랬다.
“죄송합니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던 것 중 단 한 번도 떠오른 적 없는 문장이었다. 지관영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연인이 말한 단어의 대상을 찾기 위해 모든 세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씀하신 거…… 생각해본 적 없는 거라서. 그래서…….”
최태훈이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떨궜다. 살짝 입술을 깨물고 여린 눈꺼풀을 떠는 것이 대번에 시야에 잡혔다. 에스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짐짓 여유로운 척 입을 열었다.
“미안. 너무 갑작스러웠지.”
저를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 가이드는 꽤 낯선 것이었다. 관영은 그제야 제가 떠올리지 못했던 연인의 반응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제 청혼은 분명 거절당할 수도 있는 거였다.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 당연해서, 미래를 구상하는 달콤한 생각에 취해서 그리지 못한 선택지에 에스퍼의 입이 말랐다.
“후우, 최태훈. 그런데,”
“결혼하지 않아도!”
관영의 말을 조금은 초조한 목소리가 끊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꼭 그걸 하지 않아도.”
최태훈이 누군가의 말을 끊고 들어오는 건 사실 유래가 없는 일이다. 지관영은 그 익숙지 않은 행동에 말을 이어갈 타이밍을 놓쳤다. 그 순간에도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왼손 약지에 걸린 반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괜찮지 않겠습니까. 사실 법적으로 뭔가가 가능한 것도 아니고.”
“…….”
“굳이 거창하게 그…… 결혼식이라든지, 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관영은 잔뜩 긴장한 것이 뻔히 보이는 제 가이드를 더 떨게 해서는 안 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다. 하지만 가이드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이유로 시작되었던 생각은 어느 순간 잔뜩 몸집을 불려 그 자신의 바람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이성과 감정이 따로 노는 건 정말로 이상한 경험이었다. 최태훈은 언제나 그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겪게 했다. 관영은 약간은 뻣뻣해진 혀를 부드럽게 굴리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나도 거창한 의미는 아니었어.”
“…….”
“그냥 네 가족만 있어도 상관없어. 아니, 그냥 최태훈 너랑 둘이서만 해도 상관없고.”
최태훈은 한때 ‘제가 가이드여서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었다. 사실 당시 지관영은 연인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가이드여서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에스퍼는 이제 와 그 말의 뜻을 조금이나마 되짚어 깨달았다.
에스퍼-가이드 페어가 아니라, ‘지관영’과 ‘최태훈’ 페어가 되고 싶다는 스스로의 욕심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연인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태훈이 긴 한숨을 쉬면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저는, 후우,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 한 편이 쿵 하고 요란하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관영은 제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간 줄도 모르고 애써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뭐가 어려운 건데. 동성 결혼이라?”
“그건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같이 지낸 지가 얼만데요.”
“그런데?”
조금은 뾰족하게 물어 놓고는 곧바로 후회한 관영이다. 하지만 계속 슬슬 제 눈을 피하는 가이드에게 아주 조금…… 정말 조금쯤은, 어울리지 않는 섭섭함이 머리를 들었다. 에스퍼는 속으로 그 자신을 한껏 욕했다. 애초에 살며 단 한 번도 기대하거나 상상하지 않았던 것을 꿈꾼 제 탓인데 싫다는 사람을 붙들고 참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사귀는 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말하면서도 영 자신 없는 얼굴을 하는 가이드였다. 에스퍼는 그 순간 제가 정신계 에스퍼가 아닌 것이 아쉬웠다. 저 생각의 한 조각이라도 엿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관영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던 단어를 끄집어냈다.
“시간 낭비 같나?”
“아,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
최태훈은 더는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미안하군. 상황은 내가 정리하지.”
연인의 달콤한 말보다는 나직한 보고 같은 문장이었다. 가이드는 제 에스퍼의 목이 붉게 변한 것을 뒤늦게 눈치챘지만, 성큼성큼 다시 저택 밖으로 발을 돌리는 살벌한 기세를 막아서지 못했다.
아. 진짜 이게 아닌데.
가이드는 혼자 남은 저택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제 얼굴을 두 손을 가려 버렸다.
* * *
“싸워? 대체 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연의 가이드인 박승원이었다. 승원은 마시려던 음료까지 도로 내려놓고 황당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최태훈은 오연에게로 피신 온 상태다.
본가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온갖 기대로 가득 찬 눈을 하고 있을 테고, 가이드 관사로 들어가자니 제게 쏟아질 동료들의 시선이 껄끄러웠다. 물론, 한없이 어색한 분위기가 되어 버린 연인의 저택은 더더욱 가시방석이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 도망 올 수 있는 건 오연의 집뿐이었다. 이제 직장 동료도 됐겠다, 완전히 말을 놓기로 한 이후로 오연과 최태훈은 더욱 가까워졌다. 승원과 친해진 것도 그때부터다.
“뭐야. 놀러 온다길래 축하주라도 살까 했는데.”
조금은 아쉽다는 듯 들리는 말이었다.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으어어’ 하는 괴성을 내며 쿠션을 끌어안은 채 소파에 고개를 묻었다. 다리를 꼰 채 앉아서 함께 차를 마시던 오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거절했구나.”
그 낮디낮은 목소리에 최태훈은 작게 움찔했고, 박승원과 오진우는 순간 그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했다. 물론 이해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진우는 작게 ‘헉’ 하면서 입까지 벌렸고, 박승원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휙 돌려 문제의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지관영…… 차인 거야?”
“…….”
“진짜 ‘그 지관영’이?”
“아, 혀엉.”
최태훈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가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승원은 제 에스퍼의 관찰력에 감탄하면서도 전혀 상상조차 못 한 전개에 놀란 헛웃음을 흘렸다. 솔직히 최태훈이 지관영의 청혼을 거절할 줄은 몰랐었기 때문이다.
에스퍼가 한 청혼은 상황이 놀라운 거였지 내용이 새삼스러운 게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쯤은 ‘아, 이제야.’ 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었다. 오진우는 조금 놀랐다는 얼굴로 말했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시는데요. 전 그래서 ‘그거’ 보고 솔직히 꽤 기대했는데.”
태훈보다 두 살 많은 오진우는 여전히 가이드에게 존댓말을 쓴다. 몇 번인가 태훈이 편히 말을 놓아도 된다고 권한 적이 있지만, 오진우는 빙긋 웃으며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태훈에게 그럴 수는 없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도 간만에 턱시도 보나 했어. 소개해 줄 만한 괜찮은 곳도 많다고.”
박승원과 오연은 1년 반 정도 전에 작게 결혼식을 올렸다. 이쪽 커플의 결혼을 주도한 건 오연 쪽이었다. 박승원이 계속되는 군대 내부의 마찰에 지쳐 제대를 고민할 때, 오연은 그 성격만큼 담담하게 프러포즈했다. 겉모습과는 다르게 철저히 군인 체질인 자신의 가이드를 잘 알던 오연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지지로 결혼을 택한 거였다.
‘거기서 더 버티면서 자리 잡아도 되고, 정 아니면 때려치우고 나와서 천천히 생각해. 너 먹여 살릴 만큼은 벌어. 결혼하자.’
결국에는 끈질기게 살아남는 쪽을 선택한 그이지만, 승원은 아직도 프러포즈를 받았던 순간만큼 제 연인이 근사하게 보였던 날이 없다고 회상한다. 아직 법으로 묶이지 못한다는 것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소위 ‘엘리트 에스퍼-가이드 페어’로 만났던 오연이, 제가 어떤 상황이든 곁을 지킬 것임을 먼저 말해 준 것만으로도 넘칠 듯 기뻤기 때문이었다.
“제가 놀라서 약간 실수하는 바람에……. 관영 씨가 화났습니다.”
“뭐라고 했는데?”
태훈은 제게 꽂힌 세 사람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는데, 대답을 잘 못 했습니다.”
“……그건 좀 세다, 야.”
“그런데 진짜 그런 뜻은 아니었거든요. 정말입니다.”
다시 생각해도 심장이 마구 뛰었다. 최태훈은 애꿎은 쿠션을 세게 끌어안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에스퍼가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이 가이드 박승원의 입을 통해 다시 흘러나왔다. 태훈은 순간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바닥에 깔린 러그로 떨어트렸다.
지금 가이드의 머릿속에는 제 페어이자 연인인 사내, 단 한 사람뿐이다. 그 누구보다 근사한 모습으로 저를 향해 사랑을 고백하던 목소리, 붉게 변한 목덜미와 귀를 한 채로 저택을 빠져나가던 서늘한 얼굴, 저택에 들어설 때면 조금은 머쓱하고 또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검은 눈동자까지. 정말 무엇 하나 사랑하지 않는 게 없었다.
하지만, 최태훈은 가족들과 함께 보던 시상식에서 저를 향한 청혼이 떨어지고 나자 겁부터 덜컥 났었다. 그래서 지관영이 무대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허둥지둥 차를 몰아 그의 저택으로 갔었다.
태훈은 저를 향한 시선들을 마주 보지 못하고 한참을 공연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최태훈을 타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섯 동생을 둔 최태훈은, 이곳에서만큼은 가장 어린 막내가 된다. 이윽고 꾹 다물린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에스퍼는 일반적으로 가이드보다 훨씬 더 노화가 느립니다.”
마치 고백처럼 떨어진 문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을 품고 있었다. 최태훈의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의아한 시선을 공유했다. 애초에 무뚝뚝한 오연과 다정하기는 해도 말수가 적은 오진우 대신 최태훈을 받아 주는 역할을 맡은 건 싹싹한 승원 쪽이었다.
“으응, 그렇지.”
“그리고 지관영 씨는 배우고요.”
“그래. 그것도 또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거머쥔 배우지.”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태훈은 조금 용기를 얻었는지, 이전보다 훨씬 더 풀린 표정이 됐다. 서로를 끔찍이 아끼지 못해 안달인 연인의 불화라니, 이런 건 빨리 빨리 해결되는 게 모두를 위해서도 좋다. 승원은 목이 타는지 차를 꿀꺽꿀꺽 삼키는 태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태훈의 말은 역시나 짐작지 못한 방향으로 쭉 전개됐다.
“결혼했다가 질리면 어떡합니까?”
승원은 물론이고 연과 진우 형제 두 사람마저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하지만 최태훈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사실이다. 지금 최태훈은 요 며칠 누구에게도 하지 못하고 꾹 누른 채 끙끙 앓기만 했던 제 고민을 털어놓고 있다.
아니, 사실 좀 더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겨우 며칠 묵은 정도의 생각이 아니다.
“……어?”
“아무리 그래도 사귀는 거랑은 다를 텐데.”
최태훈 그라고 이제껏 결혼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로 넘어오는 사이, 태훈은 꽤 많은 친구와 선배들의 결혼식장을 찾았었다.
특히 박승원과 오연의 결혼은 태훈에게도 꽤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던 일이었다. 그 당시 결혼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던 지관영은 몰랐었지만, 태훈은 나란히 몸에 딱 맞는 턱시도를 입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저와 제 연인의 미래를 몇 번 그리고 상상했었다.
하지만 그 마음 정리는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센터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되면서 이제껏 몰랐던 사례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다.
태훈은 그 자신의 행복한 페어 생활과는 달리, 끝없이 마찰하며 얼음장 같은 생활을 이어가는 사례들을 보며 충격과 겁을 동시에 집어먹었다. 그건 절대치로 보자면 한없이 작은 것이었지만, 신입 연구원인 그에게는 언젠가 제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무섭게 느껴지는 장벽이었다.
특히 서로 좋아 죽으며 식장으로 들어갔던 페어가 몇 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이혼한 뒤 한 달에 한 번씩 원치 않는 관계를 맺는다는 보고를 봤을 때에는, 결혼 따위 완전히 포기해 버렸다.
“이미 환상 같은 거 남아 있지도 않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완전히 살림 합쳐서 같이 살게 됐다가 정 떨어지면, 그땐 어쩌죠.”
승원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정이…… 떨어져?”
“지금처럼 가끔 날 잡고 며칠 같이 지내는 걸로는 모르잖습니까.”
“…….”
최태훈의 말은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승원 그도 연과 결혼하고 완전히 한집에서 살게 된 후, 몰랐던 연인의 버릇을 꽤 많이 알게 됐다.
“맨날 근사하고 예쁜 사람들만 보는 게 지관영 씨인데요. 결혼해서 보기 싫은 것까지 다 알게 되고 어느 순간 아, 이건 진짜 아니다 싶어지는 순간이라도 오면…….”
언제나 단정 반듯했던 눈매가 아래로 슬쩍 처졌다. 태훈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오연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쇳소리가 섞인 중저음은 얼핏 들으면 냉랭하게 느껴질 수도 있건만, 묘하게도 따뜻한 느낌이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게 될까 봐 걱정이야?”
“예? 아뇨, 제가 그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지관영 씨인데요.”
순간 세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이걸 지관영이 들었어야 했는데.’ 지관영과 최태훈은 참 그 시작부터 요란하고 소란스럽더니, 사랑싸움의 규모도 전국구다. 생중계되는 영화제 시상식장에서 공개 청혼을 한 에스퍼나, 그런 에스퍼를 ‘혹시라도 제게서 정떨어질까 봐’ 찬 가이드나 정말 보통은 아니다.
박승원은 한숨 쉬듯 웃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아, 결혼하고 나서 나한테 정떨어진 적 있어?”
솔직히 진심은 아니었다. 분위기 환기를 위해서 던진 가벼운 농담이었다. 하지만 오연은 살짝 눈썹을 휘더니, 평소처럼 장난기라고는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그것 보세요!”
훅 터진 웃음을 참지 못한 진우가 뒤늦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가이드의 태도는 극과 극이었다. 최태훈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역시 결혼은 무서워.’ 하는 표정을 했고, 정떨어진 당사자가 된 박승원은 기가 막힌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왜! 언제! 며칠 몇 시 몇 초에!”
유치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웃어넘기기는커녕 조금은 진지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는 무표정한 얼굴은, 당장에라도 머릿속에 있는 순간을 낱낱이 꺼내 놓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말하지 마.”
“그래.”
두 형의 달짝지근한 사랑싸움에 오진우에게서 낮은 웃음이 연거푸 터졌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 안에 담긴 오연의 장난기를 읽어 내기에는 영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오진우는 그런 가이드를 보고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태훈 씨.”
“예.”
“정말 그런 이유라면 고민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이냐는 듯, 태훈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센터의 연구원으로 들어가 가이드의 생태에 대해 직접 부딪히며 알아 가는 연구원이 된 탓일까. 가이드 최태훈은 ‘에스퍼’라는 특이 변종에 대해 가끔 저렇게 무뎌지고는 했다.
“에스퍼라는 건 최태훈 씨 생각보다 훨씬 더 맹목적이라서요.”
“맹목적……이요?”
어떻게 보면 지관영의 생각을 가장 잘 알 만한 사람인 오진우다. 하지만 오진우는 제가 말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라는 듯, 좀 더 부드러운 미소를 더할 뿐이었다. 한편, 박승원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제 연인을 향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북에서 대포 쏘지 않는 이상 칼같이 집에 들어와서 조신하게 밥 해 놓고 기다리는데, 어떻게 정이 떨어져!”
“제 쪽은 지관영 씨가 훨씬 요리 잘하는데요.”
“여섯 살이나 어린 연하들 꿰찼으면 된 거지, 이 아저씨들이 진짜!”
승원은 ‘정떨어진다’라는 말이 어지간히 서운했는지, 끝까지 매서운 기세를 누르지 않고 거실을 쩌렁쩌렁하게 울릴 말을 마지막으로 쏟아내었다.
“심지어 난 섹스도 잘하고, 크잖아! 좋으면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어른들의 세계에 잠시 멍해진 최태훈은 생각했다.
‘난 섹스 잘하나? 평균은 넘는데. 근데 그렇게 치면 관영 씨는…….’
물론, 망상이 제 연인의 성기 크기를 되짚는 것까지 향했을 때는 뒤늦게 얼굴에 화르르 불이 붙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형들의 성생활에 오진우는 질겁하는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박승원은 제 말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무뚝뚝한 얼굴에 선명한 냉랭함과 기묘한 열기가 함께 깃든 에스퍼의 입이 열렸다.
“이럴 때 정이 떨어진다는 거다, 박승원.”
* * *
접촉이 부족한 건 아니다. 최태훈은 오늘도 저택을 나서기 전 뺨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치고 나갔다. 지난주, 섹스도 머리 한구석이 나른하게 녹을 정도로 충분히 했다. 사실 지관영은 지금 당장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트린다고 해도 거리낄 게 없는 상태다.
하지만 ‘힘’이 넘치는 것과 ‘기운’이 없는 건 달랐다. 관영은 침대에 늘어져 누운 채로 멍하게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정말도 어울리지도 않고, 그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한심하지만 증상의 이유는 하나다.
청혼을 거절당하고 우울해졌다. 관영은 머리로는 저 자신을 욕하면서도 그 이성에 맞춰 몸과 마음을 가눌 의욕까지는 없었다. 최태훈이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지금처럼 지내자고 한 것일 뿐인데, 혼자 잔뜩 부푼 풍선처럼 떠다니다가 이 모양이 됐다.
그렇게 멍하게 누워 있던 관영의 귀에 익숙한 차의 엔진 소리가 걸렸다. 최태훈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관영은 그마저도 반갑지 않았다. 며칠 전처럼 정원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며 최대한 저를 피하다가 들어온다면, 또 그것을 신경 쓰며 가라앉을 저 자신의 미래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늘, 가이드는 일전과는 달랐다. 곧장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기척을 짚어 낸 에스퍼는 침대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제 연인이 쓸데없이 걱정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만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바보 같은 생각에 빠져드는 것을 멈춰야 하는 건, 오로지 저 하나뿐이었다.
“지관영 씨,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생각을 완전히 정리한 최태훈은 꼭 저렇게 놀랄 정도로 단호한 얼굴을 하고는 했다. 가이드의 눈 안에 담긴 옅은 긴장을 읽은 에스퍼는, 최대한 가벼운 표정을 하려고 노력했다.
거실의 소파에 나란히 마주 본 채 앉고 나서야 관영은 제 연인의 얼굴을 이렇게 똑바로 바라보는 것이 꽤 오랜만이라는 자각을 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요 며칠 간의 제 투정이 더욱 멍청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괴물의 목줄을 단단히 틀어쥔 사내는 그 정도로는 모자란다는 듯, 그를 더욱 제 발치에 무릎 꿇게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응.”
“……죄송합니다. 관영 씨 청혼 거절한 건 정말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는데, 그날 너무 놀라서 제대로 말을 못했습니다.”
지관영은 최태훈의 저런 곧은 모습을 사랑한다.
시상식 날 밤, 가이드는 분명 제 눈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말을 흐렸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고 같은 장소, 같은 시간의 최태훈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저렇게 변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또 준비했을지 뻔히 그려지는 일이었다.
무기력하게 늘어졌던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확실히 ‘마음’ 쪽은, 가이드 쪽이 훨씬 더 믿음직스럽다. 관영은 속으로 저 자신을 욕하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사과할 거 없어. 내가 너무 멋대로였으니까. 나야말로 혼자…….”
“관영 씨,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그래야 해서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사실 머리꼭지까지 차올랐던 며칠간의 어리숙한 생각 같은 건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였다. 관영은 살짝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제가 내년에 적금 두 개 만기입니다.”
적금. 지관영은 영 익숙하지 않은 그 단어를 입으로 한 번 굴려 봤다. 하지만 아직 가이드의 말은 다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년부터 연봉도 조금이나마 더 오르고요, 센터 협의회나 강의 나가는 것도 좀 더 자리를 잡을 것 같습니다.”
“응.”
관영은 조금 얼떨떨한 채로 대답했다. 눈앞의 연인이 너무나 진중한 얼굴을 한 채라,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가이드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켜더니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딱 일 년 뒤에, 제가 다시 한 번 청혼하겠습니다.”
“…….”
“물론 관영 씨가 하신 것 같은…… 뭐라고 해야 하죠, 근사한 영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모양새는 아닐 겁니다. 그래도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관영은 살며 청혼할 생각도 해 본 적 없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었다. 그것도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사람에게 받는 이런 예고제 청혼은, 사실 그 누구라도 예상할 수 없을 거였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한 태훈과는 달리 작게 웃음이 터질 뻔한 관영은 애써 입술을 한 번 깨문 뒤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
“지금은 왜 안 되는데?”
“제가…… 별로 괜찮은 신랑감이 아니어서요.”
한참을 망설이다 나온 대답이 품고 있는 사랑스러움이 달았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관영을 향해 난 지금 당신에게 괜찮은 ‘신랑감’이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최태훈뿐일 거다.
태훈은 기어코 작게 눈을 접어 웃고 만 연인을 보면서도 묘하게 경직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를 달래듯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관영의 이런 모습은 오로지 최태훈만 볼 수 있다.
“그건 최태훈 네가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잖아.”
“그래도, 좀 준비가 필요합니다.”
“무슨 준비?”
이번에야말로 정말 대답하기 어려운 속내에 접근한 게 분명했다. 관영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고 제 시선을 빙글 돌려 피하는 태훈의 눈을 끈질기게 따라갔다.
얼마나 그렇게 대치했을까. 결국, 백기를 든 건 가이드였다. 최태훈은 평소에는 볼 수 없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옆에 있는 다른 분들보다…… 조금이라도 덜 꿀릴 수 있는 준비요.”
관영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완벽에 가까운 그의 두뇌로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 때문이었다. 의문은 참지 못하는 그는, 곧바로 입을 열어 물었다.
“내 옆에 누가 있는데?”
“……같이 영화 찍은 □□□ 씨?”
“…….”
“아, ○○○ 씨도 있고요.”
최태훈의 입에서 내로라하는 톱스타들의 이름이 술술 흘러나왔다. 그들은 모두 지관영의 상대역을 맡았던 사람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진짜 연인이었으면 좋겠다.’라며 인터넷 여기저기를 달궜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최태훈.”
“……예.”
“설마 이런 생각을 하느라 내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청혼을 대번에 걷어찬 건 아니겠지?”
세상에 최태훈은 저 말끔한 얼굴을 하고서, 에스퍼의 두뇌로도 도저히 그 뒤를 쫓아갈 수 없는 상상을 했다. 한없이 달콤했던 관영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뚝 떨어져 묘한 음산함을 품었다.
그걸 눈치챈 태훈은 눈을 팽팽 굴리며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아, 아닙니다! 또 있습니다.”
“또 뭐.”
이제는 완전 ‘어디까지 말하는지 들어나 보자’ 하는 태도였다. 가이드는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훑고는 최선을 다해 자신의 단점을 피력했다.
“관영 씨는 잘 모르시지만…… 저 진짜 같이 살면 엄청 피곤한 스타일일 수도 있습니다.”
“뭐가?”
“은근히 잔소리가 심합니다, 제가. 동생들 챙기는 버릇이 들어서요.”
“그게 뭐. 나만 좋으면 됐지.”
최태훈은 왠지 속에서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초조한 한숨을 토해냈다. 눈앞의 사내는 그 시큰둥한 대답이 얼마나 설레는 것이었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저 그린 듯한 얼굴에 무덤덤해질 때도 됐는데, 아직도 이렇게 떨림이 확 치고 올라올 때가 있었다.
“그리고 빨래도 잘 못 개어서 옷도 구겨질 수 있고요.”
“…….”
“아, 또 피곤한 날에는 가끔 코도 곤다고 그럽니다.”
다 말했냐는 듯, 조금은 심드렁한 눈을 한 에스퍼의 눈썹이 휘었다. 태훈이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관영은 그 틈을 타서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옷 정리 못 하는 거 알아. 내가 하면 되잖아. 그리고 돈 뒀다 뭐해, 사람 써. 그리고 코 고는 거 이미 들었어.”
“정말요?! 언제 말입니까?”
“저번에 며칠 워크숍 갔다 왔을 때.”
애초에 최태훈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얌전하게 자는 타입이다. 가끔 코를 곤다고 해 봐야, 마치 어린아이가 고롱대는 것 같은 작은 소리가 다다. 처음 그걸 들었을 땐, 오히려 귀여워서 꽤 웃음을 참기까지 했던 관영이다.
하지만 태훈에게는 그게 꽤 부끄러운 일이었는지, 보기 좋은 피부는 귀 끝까지 익은 채로 벌게졌다. 에스퍼는 그걸 눈으로 훑으며 부끄러움 타는 연인을 즐겼다.
“그런 거 보면…… 되게 정떨어지지 않습니까?”
조심스럽게 입을 열길래 무슨 말을 하려나 했더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분명히 이 대화의 시작은 가이드가 연 것이었지만, 어느새 주도권은 에스퍼 쪽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차라리 너무 놀라고 당황해서 거절했다고만 했어도 기꺼이 발등에 입을 맞췄을 관영을 골리게 만든 탓이다.
“지금 그런 거로 날 찼다 이거지.”
“아, 아니이, 저는 되게 중요한 일이었는데요!”
“정이 떨어져? 최태훈, 넌 그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분명 굉장히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대답이기는 한데, 묘한 언짢음 역시 함께 남았다. 그 무슨 상황이든 저를 사랑한다는 말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럼 나는 그런 인간이라는 뜻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냥, 그냥…… 걱정이 되어서…….”
에스퍼는 말꼬리를 말며 기가 죽는 어린 연인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는 정말 근사하고 완연한 사내로 완성된 것 같은데, 이렇게 가끔 여린 모습을 보일 때마다 속이 일렁였다. 관영은 여전히 조금은 뚱한 얼굴을 한 것과는 달리 태훈의 머리카락이며 말랑한 귓불, 딱 떨어진 턱선을 부드럽게 쓸었다.
“……죄송합니다.”
“내 청혼 걷어차고 얼마나 잘하는지 기다려야지, 별수 있어?”
조금은 뾰족한 말과는 달리 닿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또 다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사실 지관영 그는 지금 약간 마음이 상했다. 제 옆에 있는 건 이전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최태훈 저 사내일 게 분명한데, 이미 휴대폰에서 번호마저 삭제된 지 오래인 사람들의 이름을 대는 모습이라니!
정이 떨어질 수도 있지 않으냐고 물었던 건 정말 순간 머리를 멍하게 만들 정도로 황당했다. 그 예시들이 하나같이 귀여워 빠진 것들이 아니었더라면, 아주 조금쯤은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정말이다.
“그런데 관영 씨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이제 와 저를 살살 달래듯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묻는 것을 보니, 확실히 제 머리꼭지 위에 앉아서 눈짓하는 가이드다웠다. 지관영은 많은 말을 하기에는 낯부끄럽다고 생각하며 아주 잠시만 더 자존심을 세워보기로 마음먹었다. 일생일대의 청혼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거절당한 사내라면, 잠깐은 이래도 된다고 자신을 다독이면서였다.
“그냥. 연애 다음이 결혼이라고들 하잖아. 그래서.”
여전히 약간 부루퉁한 채 흘러나오는 대답에, 최태훈은 곤란하다는 듯 잘 뻗은 눈썹을 아래로 휘었다. 그는 제가 청혼을 약속한 사내가 아무래도 쉽게 마음을 풀 생각이 없음을 눈치챘다. 손으로는 자신의 어깨선을 쓸고, 이름이 새겨진 등을 한없이 부드럽게 그리면서 말로만 뾰족하게 구는 게 귀엽기도 했다.
결국 가이드의 입에서는 제법 관대한 문장 하나가 흘러나왔다.
“제가 소원 하나 들어 드리겠습니다.”
“소원?”
“기껏 먼저 청혼해 주셨는데 거절해서 미안하니까요.”
여기에 가볍게 목을 끌어안으며 떨어지는 달콤한 키스까지. 어찌 됐든 눈앞의 까다로운 사내와 연인이 된 지 3년 차인 최태훈은, 제 아름다운 괴물을 다루는 방법을 잘 알았다. 가이드와의 접촉에 약한 에스퍼의 특성 역시 그것에 한몫했다.
관영은 괘씸하긴 한데 또 예쁘기는 너무 예쁜 자신의 페어를 보면서 괜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가, 문득 제가 몇 달 전 떠올렸던 미래의 일상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기.”
“예?”
“여보.”
“…….”
가이드가 당황한 채 데굴데굴 눈을 굴리는 모습을 보는 에스퍼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걸렸다. 최태훈은 그것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해 봐.”
“……정말로?”
“‘지관영 씨’는 언제 졸업할 생각인데.”
열 받았을 때 몇 번 이름만 불렀던 것을 제외하고, 태훈이 제 연인을 부르는 단어는 대체로 하나로 고정되어 있었다. 바로 ‘지관영 씨’다. 그건 연인 사이에 쓰는 것이라기에는 확실히 조금 뻣뻣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관영이 제 페어를 ‘태훈아’라고 부르는 것보다 배는 사무적이다.
가이드는 이제 기대마저 엿보이는 눈으로 저를 보는 에스퍼를 보며 크게 한숨을 삼켰다. 살며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간지러운 단어에 입이 다 말랐다.
“후우, 하아아, 후. 자!”
최태훈은 행동력이 좋다.
“자아…….”
“…….”
하지만 그 넘치는 행동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벽은 있기 마련이었다. 최태훈은 ‘자기’가 주는 그 엄청난 긴장감을 넘지 못하고 첫 글자만 몇 번 힘주어 말하다가 고개를 푹 떨궜다. ‘여보’는 더 심했다. 아예 입을 동그랗게 만 다음 바람 빠진 소리만을 낸 게 전부다.
“남은 일 년간 연습해야겠네, 자기?”
“으으으…….”
“여보 힘내.”
소름 돋을 정도로 듣기 좋은 목소리로 흘러나온 애칭에 최태훈은 작게 앓는 소리마저 냈다.
그런 반면에, 관영은 제 연인에게 한껏 달콤한 장난을 치고 나자 애초에 태훈에게는 감히 내세운 적도 없었던 자존심 같은 건 완전히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저 깍듯하고 보수적인 면마저 있는 사내가 자신에게 어떻게 청혼할지를 예상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바보 같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졌다.
발갛게 물이 오른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얼굴선도 예뻤다. 관영은 습관처럼 그 위로 입술을 떨어트리려고 고개를 숙였다. 그보다 먼저 입을 연 건 태훈이었다.
“……형.”
지관영, 제 에스퍼에게 댈 수 있는 호칭을 필사적으로 그러모으던 최태훈이 찾아낸 짤막한 단어였다. 태훈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나 싶더니, 꾹꾹 힘이 가득 들어간 이름을 뱉어냈다.
“형, 관영 형.”
“…….”
“형은 할 수 있습니다. 관영 형……. 형! 이건 됩니다. 이걸로 좀 봐 주십시오. 다른 건 일 년간 연습하겠습니다.”
듣는 데만 익숙했던 단어를 도톰한 입술이 몇 번이나 곱씹었다. 형, 관영 형. 입이 벌어지고 그 안의 붉은 혀가 움직이며 만들어내는 목소리가 조용한 거실을 울렸다.
“아, 이것도 조금은 부끄럽네요.”
최태훈은 조금 머쓱한 듯 턱을 긁적이며 슬쩍 제 페어의 눈치를 봤다. 그보다 살짝 시선이 높은 사내는, 가이드가 고른 호칭에도 별다른 반응 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침묵이 조금은 민망해진 태훈의 입에서 드문 어리광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관영 씨, 아니, 관영 형?”
“……잠깐만.”
“예? 예에.”
갑자기 전원이 들어온 로봇처럼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걸어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조금은 놀란 표정이 된 가이드의 눈이 좇았다.
‘화장실이 급했나, 아니면 무슨 볼일이라도 생각났을까?’
최태훈은 어떻게 보면 참 태평하기까지 한 짐작을 하며 소파 위의 푹신한 쿠션을 끌어안았다. 어느 쪽이 됐든, 관영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지관영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그는 최대한 거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뒤 찬물에 급히 제 얼굴을 세수했다.
“최태훈, 진짜…….”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정말 최태훈이 보지 못해서 다행일 정도로 우스웠다. 귀는 물론 목까지 붉게 변한 몰골이라니. 관영은 차라리 얼음물을 제 머리에 끼얹고 싶은 심정이었다.
놀리려다가 정말 배로 한 방 먹었다.
그것도 자각조차 없는 연인이 던진 말에 완전히 KO패를 당했다. 에스퍼는 벌겋게 된 제 얼굴을 차가운 두 손으로 꽉 누르고 있다가, 태훈이 또박또박 입에 담던 제 이름을 상기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어렵지 않게 입에 담았던 뻔한 단어들은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는 최태훈이 들고 나온 한 글자에 완전히 침몰했다.
다시 생각해도 참 황당하고 또 바보 같지만 언제나 깍듯했던 목소리에 옅은 애교가 섞여서 ‘관영 형’ 하는데 순간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로 열이 올랐다. 당장 저걸 또다시 들으려니 속이 달음박질 치고, 그렇다고 해서 또 하지 말라고 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아하고, 이보다 더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어 하나로 더욱 반하게 됐다. 이쯤 되면 병이 분명하다. 관영은 찬물로 다시 한 번 제 얼굴을 적시고는 흐트러진 머리를 대충 쓸어 올렸다.
최태훈의 청혼까지, 일 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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