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많은 사람의 시선이 넓은 단상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는 사내를 좇았다. 그는 조금 목이 마른지 작은 텀블러에 얼마 남지 않은 물을 모두 털어 마셨다. 길고 예쁘게 뻗은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약지에 자리 잡은 백금의 링이 빛을 받아 옅게 반짝였다.
“자. 여기까지가 저의 이야기였습니다.”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가 연단 위를 울렸다.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사실 저도 여러분을 가르친답시고 이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올해로 겨우 3년 차인 새내기 가이드여서요. 어떤 분들은 저보다 훨씬 선배님이실 겁니다.”
사내의 말에 어디선가 작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사내는, 그러니까 최태훈은 그 웃음에 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작게 덧붙였다. ‘진짜 스물여덟까진 에스퍼 손도 못 잡아봤다니까요.’
사실 이런 작은 농담들은 몇 년 전의 최태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런 말들이 꽤 익숙해졌다. 저를 따라오는 사람들의 시선도, 환하게 쏟아지는 핀 라이트도 어느새 삶의 일부가 됐다.
“아직도 종종 생각합니다.”
혼잣말처럼 가볍지만, 정확하고 또렷한 발음이었다.
태훈은 갈수록 ‘페어 분과 말투가 굉장히 비슷하시네요.’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건 긍정적인 의미로도, 또 가까운 이들만 아는 조금은 곤란한 표현으로도 모두 해당하는 칭찬 아닌 칭찬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문장 중간중간 힘을 주고 또 잠시 멈추는 지점의 숨소리까지, 말하는 모든 것을 제 연인에게 배운 탓이다. 가이드는 제 왼손 약지의 반지를 다른 손으로 살살 굴리면서 말을 이었다.
“난 과연 내 에스퍼에게 어떤 가이드일까.”
단정한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는 종종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한 채로 저 반지를 만지작거린다. 제법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그걸 진작 눈치챈 지 오래다.
그건 무의식중의 생각을 훔쳐보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을 들게 했지만, 최태훈은 아직 이런 제 버릇을 모른다.
“만약 이상적인 가이드가 되기 위한 조건 같은 게 정말로 있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맞을까. 아니, ‘가이드가 아니더라도’ 난 정말로 필요한 사람일까?”
최태훈의 말을 듣는 가이드들의 눈 위로 조용한 공감이 스쳤다.
“물론 그건 각자의 페어에게 물어야 할 일이겠지만요.”
옅은 웃음기가 어린 말과 함께 몇 개의 질의응답이 이어지는 걸로 강의는 끝났다.
이른 아침부터 오후까지 쭉 이어지는 장시간의 스케줄은 제아무리 꾸준한 운동으로 단련된 삼십 대 초반의 성인 남성이라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조금은 고전적으로 하나하나 프린트해서 정리한 자료들을 정리하던 가이드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온종일 곧게 펴져 있던 어깨에서도 힘이 쭉 풀렸다. 가이드 집체 교육은 처음으로 맡아보는 거라 제법 긴장했던 탓도 있다.
태훈은 살짝 뻣뻣하게 굳은 제 팔을 쭉 펴면서 조금은 소란스레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쭉 눈으로 담았다. 가끔 시선이 마주치면 가볍게 웃으며 인사하기도 했다.
오늘은 최태훈 그에게도 꽤 긴 날이었다.
가이드는 제 휴대폰을 슬쩍 확인했다. 하지만 액정 위는 그 어떤 알림도 없이 시간을 알리는 숫자 몇 개만 떠올라 있을 뿐이다. 그건 왠지 약간은 맥이 빠지는 일이라, 태훈은 살짝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건 성급한 판단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저 입구 앞에서부터 천천히 탄성과 열에 들뜬 빠른 말소리로 바뀌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대강당 가장 안쪽에 있던 최태훈은 사람들의 동요를 제법 늦게 깨달았다.
단상과 바로 연결된 중앙 통로를 따라 성큼성큼 걸어오는 사내를 눈치챘을 땐, 이미 호기심과 기대 가득한 시선들이 잔뜩 술렁이며 따라오는 중이었다.
최태훈은 가이드 인권 헌장을 공식화한 일원 중, 가장 급진적이고 거침없는 발언을 쏟아낸 걸로 이름을 알린 젊은 연구원이다.
하지만 그 전에 가이드를 더욱 유명하게 해 준건 바로 그의 페어 에스퍼다. 그럴듯한 얼굴을 내거는 법을 배웠지만 여전히 감정표현만은 솔직한 가이드는 제 심정을 숨기지 않고 곧바로 드러냈다.
“……말도 없이 오시지 좀 마십시오!”
종일 깍듯하고 빈틈없는 모습만 보였던 사내가 순식간에 누군가의 연인이 되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최태훈은 정말 진심이다.
웬만하면 강의실 근처 다른 조용한 곳에서 기다려 주는 것이 베스트고, 적어도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다음에 들어왔으면 싶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 뭇 여인들을 녹이고, 거기에 느슨한 미소가 걸린다면 성별을 떠나 옅은 한숨을 터트리게 한다는 남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 말에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입장을 바꿔서요, 제가 지관영 씨 촬영장 막 말도 없이 가고 그러면 좋겠습니까.”
촬영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한 톱스타는, 연인의 말에 살짝 눈썹 하나를 휘더니 곧바로 대답했다.
“꼭 와 줘, 최태훈.”
“아, 진짜. 그게 아니잖습니까.”
“난 언제나 환영이거든.”
언제나 완벽에 가까운 정제된 단어와 문장만을 담는 목소리가 한없이 달큰하게 흘러나오는 것에 어디선가 ‘우와아’ 하는, 부러움 반 놀림 반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최태훈은 그제야 저와 제 연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있는 이들에 대한 자각이 퍼뜩 들어서, 허둥지둥 사람들을 내보냈다.
말끔하게 나가다가 마지막에 삐끗한 셈이다.
“저 오늘 완전 잘했는데! 이게 뭡니까. 모양 빠지게.”
최태훈은 제 연인을 보며 작게 투정하듯 입을 삐죽였다.
이런 태훈의 모습은 그 연인인 지관영만이 볼 수 있는, 아니 사실 지관영 그도 보기 어려운 몹시 드문 광경이다. 관영은 낮게 웃으며 제 연인의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날이 갈수록 지관영의 얼굴에 약해지는 최태훈은 결국 오늘도 그 근사한 미소에 먼저 백기를 들었다. 아무런 마음이 없을 땐 그저 담담하게만 볼 수 있었던 사내가, 사심이 깊어질수록 더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게 됐다.
“봤어. 명강연이던데.”
“오래 기다리셨던 겁니까? 피곤하실 텐데 먼저 들어가 쉬시지.”
지관영은 금세 얼굴 가득 걱정을 담고 저를 살피는 태훈의 눈가에 괜찮다는 듯 다시 한 번 입술을 쪽, 하고 떨어트리며 말했다.
“여기 꼭 예전에 거기 같지 않나? 왜 그 커튼 뒤에서.”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니까 말도 마십시오.”
“다 예행연습이었던 거지.”
불 타 없어진 잔해를 밟고 새로 세워진 센터다.
그 위에 만들어진 만큼, 사소한 것은 달라졌어도 용도를 따라 큰 틀은 비슷할 수밖에 없다. 뻔뻔하게 흘러나온 에스퍼의 말에 결국 최태훈의 입에서도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관영은 그런 연인을 보며 눈을 나른하게 휘었다.
‘바른 생활 가이드, 최태훈’.
최태훈은 요 몇 년 새 그가 가지고 있던 이 타이틀을 반쯤은 깨고 또 반쯤은 충실히 따랐다. 깬 것은 뭔가 하면, 언제나 얌전했던 저 도련님이 가이드의 발언권 문제에 그 누구보다 매달리고 또 앞장서 의견을 토로하는 공격수가 됐다는 거다.
센터와 다른 이의 눈에 모난 점 없이 순하기만 했던 태훈은, 사안에 따라서는 피아 구분 없이 제 의견을 쏟아 내고 또 가끔은 호전적으로도 돌변했다.
그건 가끔은 너무 가이드 위주의 사고방식이 아니냐는 볼멘소리를 나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최태훈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제가 가이드인데 뭐 어떡합니까.’ 하는 비뚜름한 태도까지 보였다. 덕분에 센터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성격 나쁜 에스퍼의 그림자를 봤다.
“밖에서 식사하고 들어갈까.”
“좋죠. 대신 사람 없는 곳으로.”
지관영은 언제나 조용히, 때로는 적극적으로 최태훈을 지지한다. 연인의 짐을 제가 옮겨 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자연스럽게 잘 뻗은 허리를 감싸는 지금도 그렇다.
참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스킨십이건만, 최태훈은 제 에스퍼가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에스코트를 할 때마다 화려할 것이 분명한 연인의 과거를 상상하게 된다.
이건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관영 씨.”
“어.”
“강의 언제부터 들으셨습니까?”
“중후반 정도부터 쭉.”
그제야 뭔가 묘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가이드를 눈치챈 에스퍼는,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하지만 단정한 눈은 얼른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조금은 뜸을 들이듯 가늘어졌을 뿐이다.
성큼성큼 걸던 에스퍼의 발이 딱 멈췄다.
지관영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제 숨을 모조리 쥐고 있는 이 남자의 생각과 고민뿐이다. 관계의 주도권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모든 건 가이드의 손에 달렸을 뿐이다.
에스퍼는 제 연인을 마치 가벼운 인형을 들 듯 쉽게 안아 올려 살짝 시선이 높은 테이블 위로 앉혔다. 어서 말하라는 듯, 조금은 찌푸린 미소도 함께였다.
그러자 쭉 별 반응 없이 있던 가이드의 눈이 드디어 슬쩍 휘어졌다. 제게서 시선을 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내의 잘 다듬어진 머리카락부터 이마, 그리고 날렵한 얼굴선까지를 나른하게 손끝으로 훑는 것도 함께였다.
에스퍼는 그런 움직임 하나하나를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제 눈에 새겼다.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적신 가이드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럼, 대답은?”
그건 정말 작은 목소리였지만, 관영에게는 충분했다. 에스퍼는 불친절한 물음의 뜻을 되묻기보다는 연인의 속내를 파악하는 걸 선택했다.
‘대답’.
그건 이전에 또 다른 질문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또, 최태훈은 강의를 얼마나 들었는지를 먼저 확인했었다. 그렇다면 이 물음의 문제는 제가 머물렀던 시간 속에 숨어있다.
에스퍼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조금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물음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왠지 속으로 더운 열이 훅 치고 올라와서다.
함께 한 지 3년.
숫된 반응을 보이던 여섯 살이나 어린 연인은 어디 가고, 어느 순간 저를 입 안의 혀처럼 살살 굴리고 녹이는 재주를 익힌 사내가 앞에 있다. 그건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참 앙큼한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에스퍼 그는 그걸 감히 거부할 여력이 없었다.
지관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최태훈 그가 가장 좋아하는, 나직하고 또 다정한 온기를 띤 목소리를 한 채로.
“단 한 순간의 의심 없이 완벽해.”
“…….”
“그러니, ‘제발’……”
그 누구보다 오만하고 또 강한, 에스퍼 그를 아는 누군가가 듣는다면 절대 믿지 못할 단어가 망설임 없이 흘러나왔다. 태훈은 그걸 들으며 눈을 접어 웃었다.
“옆에 있어 줘.”
‘이상적인 가이드’ 같은 표현은 무의미하다.
이미 지관영 저 에스퍼에게만큼은 절대로 깨지지 않을 완벽한 가이드의 조건이 성립된 지 오래다. 하지만 그걸 알아도, 가끔은 이렇게 확인받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최태훈은 제 연인의 넥타이를 쭉 잡아당겨 벌어진 입술을 조르듯 부딪쳤다.
가끔 정신없이 오가는 숨이 떨어질 때는 작은 장난 같은 키득거림이 흘러나왔다. 관영은 발갛게 변한 뺨을 한 채 나른하게 눈이 풀린 가이드의 귓가로 잘게 키스했다.
“최태훈.”
“……하아, 예?”
살짝 열이 올라 갈라진 한숨이 야했다.
그건 조금 전까지 이곳에서 수백 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정갈한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좀 너무한 감이 있다. 에스퍼는 조금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가이드 관사 빌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가이드의 조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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