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will
최태훈, 최태훈, 최태훈.
괴물은 그를 생각했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내였다. 그 단정한 얼굴을 한 남자는, 사랑하는 것은 제 몫이니 그저 자신을 조금만 좋아하기만 해 달라고 고백했었다. 단어 한 글자, 한 글자에 마음이 넘쳐흘렀다. 기꺼이 제 품에 안겨 급한 숨을 삼키며 우는 모습을 기억한다. 그건 지금의 괴물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억이다.
최태훈은 소파에서 선잠이 들어 있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사진 속에 남아 있는 모습보다 확실히 눈에 띄게 마른 얼굴선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없다며 에어컨을 틀지 않고 버텼는지, 피부가 겹치는 목 언저리가 살짝 땀이 어린 채 젖은 듯 보였다.
살짝 축축하게 이마로 들러붙은 최태훈의 머리카락을 정리하자, 감겨있던 눈꺼풀이 느리게 열렸다.
약간 잠에 취한 채로도 곧바로 저를 향하는 고동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는 건 쉬웠다.
이제껏 괴물로 살아왔던 그가 줄곧 해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잃기 저는 저 남자의 페어이자 연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최태훈’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지 겨우 26일째인 남자다.
최태훈과는 매칭도 되지 않는다. 그와 입을 맞춰도 일렁이는 시야는 정돈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당장 모르는 사람처럼 생판 뒤돌아 갈라선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겨우 한 달도 못 되게 만난 동성의 사내가 저에게 가진 마음 따위, 무시하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한솔 그 가이드의 손을 잡고 선생을 찾아가는 게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이다. 지관영은 조용히 그렇게 제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셈했다.
수많은 단어가 머릿속을 채웠다가, 사라졌다가, 또다시 머리를 드는 것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에 겨우 완성된 문장이 있었다.
‘최태훈이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까?’
지관영은 제가 센터에서 보았던 지능계 연구원들의 방식을 따라해 보았다. 가설 하나. 최태훈이 이한솔을 죽이지 않는다면?
“오셨습니까.”
여전히 잠기운이 어린 목소리가 조금은 나른하게 들렸다. 하지만 가이드는 얼른 몸을 일으키며 제 페어를 자리에 앉혔다. 지관영 그의 몸 상태를 배려해서였다.
하지만 지관영 그는 걱정과는 달리 센터로 가기 전보다 꽤 나아진 상태다. 미약하게나마 ‘매칭 가이드’인 이한솔과 접촉했기 때문이다.
“……그래.”
“식사는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최태훈이 이한솔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은 반드시 죽게 된다.
그것도 고운 모양새는 아닐 거다. 언제 그 이성의 둑이 완전히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천천히 미쳐 가다가 이윽고 완전히 괴물로 추락할 거다.
조심스레 묻는 얼굴에는 상냥한 온기가 가득했다. 괴물은 그 눈을 보며 두 번째 가정을 떠올렸다. 가설 둘, 최태훈이 이한솔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잘 챙겨 먹었어. 괜찮아.”
“다행입니다. 그래도 남은 며칠은 쉬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정스레 팔을 쓰다듬는 몸짓에는 애정이 흘러넘쳤다. 인간의 온기였다. 괴물은 제 연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나를 위해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까?’
자신을 위해 담배를 끊고, 제 편을 들어주고,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도록 하겠다는 사내다. 제가 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따를 최태훈이다.
게다가 이한솔, 그 가이드는 어차피 스스로 죽는 것을 명령받은 상태다. 효율을 따져 봐도 자신까지 죽어 나갈 필요는 없다.
“빨리 좀 쉬십시오.”
“……최태훈.”
“예?”
어차피 죽을 사람을 해하면 그만인 것이라면, 그래, 그렇게 하면 된다. 빌어먹을 ‘매칭률’이라는 것이 최태훈에게 원래대로 돌아오고 나면 그 선생이라는 자의 뼈를 발라서라도 이 지겨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으면 될 거다.
지관영은 눈동자 가득 신뢰를 담고 저를 올려다보는 페어의 턱선을 쓸었다. 그 모습은 묘하게 가라앉아 보여서, 태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고 조금은 의아한 얼굴이 됐다.
이한솔을 죽여야 해.
괴물은 그 짤막한 한 문장을 내뱉지 못했다. 제가 사람을 해하지 못하도록 막아섰다는 사내의 앞에서, 에스퍼는 입에 자물쇠를 채운 듯 고요해졌다. 관영은 그런 자신의 망설임을 애써 그럴듯한 변명으로 포장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그때가 되면 최태훈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기꺼이 그 행동을 하도록 도와주면 될 거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 세뇌하듯 떨어트린 말에도 계속 주렁주렁 온갖 물음이 따라 들었다.
최태훈이 그걸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최태훈을, 나와 ‘마찬가지인 것’으로 만들어도 되는 건가? 괴물은 저를 끌어당겨 마치 아이를 달래듯 품에 어르는 페어의 온기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다음 날, 페어는 나란히 센터의 호출을 받았다. 어제 가이드 모르게 움직인 것과는 대조되는 공식적인 부름이었다. 지관영은 센터의 연구원들이 제 연인인 남자에게 오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짐작했다.
“무슨 일일까요. 뭐라도 알아낸 걸까요?”
센터로 향하는 최태훈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지관영은 센터 중앙 연구실로 향하면서 그 이유를 모르는 척하며 그 티끌 없는 물음을 가볍게 받았다.
“글쎄……. 어쨌든 실마리가 잡히면 좋은 거니까.”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괜히 조금 무섭습니다.”
최태훈은 자신의 약한 감정을 숨기는 데 괜한 허세나 요령을 부리지 않는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조금은 심란해진 관영이었다. 효율적이고 또 당연한 방안을 떠올려 상상하던 이성 대신 답답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제법 이른 시간에 도착한 센터의 중앙 연구실은 얼마 전과는 꽤 다른 모습이었다. 거대한 원형의 둥근 벽면 전체가 마치 별이 수놓아진 것 같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이드는 긴장 대신 놀람이 어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와. 이게 다 뭡니까?”
태훈의 물음에 일에 집중하던 연구원 몇의 얼굴에 조금은 머쓱한 기운이 슬쩍 스쳤다. 저만치에서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던 센터장 권다희의 입이 열렸다.
“에스퍼-가이드는 필수적으로 센터에 등록되어 있어요. 태훈 씨만 해도 어렸을 때부터 쭉 정기 검진을 받았었잖아요?”
“예. 그랬었죠.”
에스퍼-가이드 발현 검사는 성인이 되기 전까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갓난아기일 때에는 마치 예방접종을 하듯, 좀 나이가 들었을 때는 정규 교육 과정의 필수 코스처럼 해마다 포함되어 있다.
정규 교육을 거치지 않더라도, 출생신고조차 하지 않은 유령이 아닌 이상 성인이 되기 전까진 반드시 해마다 한 번씩 발현 검사를 받아야 한다. 주민센터마다 그걸 담당하는 부서가 있을 정도로 에스퍼-가이드의 등록 관리에는 많은 돈이 투자된다.
사실 지관영처럼 성인 이후 발현되는 케이스는 논문에나 실릴 정도로 극히 드물고, 혹여 뒤늦게 발현한다고 하더라도 가이드와 접촉이 없으면 당장 이상 증상이 오는 에스퍼가 센터에 찾아오지 않고 버티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시피 한다.
센터장은 청색과 녹색빛이 뒤엉켜 빛나는 벽면의 빼곡한 점으로 눈을 돌려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저기, 저쪽은…… ‘선생’이 센터에 들어와 상담한 가이드들이고.”
“…….”
“이쪽, 진한 연두색은 선생이 군부대에서 상담했던 가이드들이에요.”
센터장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태훈은 멍하게 눈을 끔벅였다. 대체 저 작은 반짝이는 점들이 어떻게 그 가이드들을 뜻하는 건지 퍼뜩 머릿속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였다.
반면, 지관영은 센터장의 말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눈앞에 보이는 그 수많은 점을 하나하나 새기듯 바라보았다. 그는 지금 이 연구실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막 알아챘다.
얼핏 보면 참 예쁘게 반짝이는 빛으로 보이는 이것들은 일종의 생체 신호 데이터다. 단순히 건강상태 정도를 원격으로 확인하는 정도가 아니다. 저 범위 안에 있는 가이드들이 지금 하고 있는 말과 행동은 물론 생각마저 모두 강제 스캔하고 있는 거다.
지관영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질린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조금은 뾰족하게도 들리는 문장에 최태훈은 제 연인과 센터장, 그리고 연구원들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권다희는 그런 최태훈을 향해 쓰게 웃었다.
“모든 가이드의 데이터가 이곳 중앙에 있고, 그걸 바탕으로 한 분원과 담당 서버가 구마다 위치하는 상황에서……. 전국에 흩어진 센터의 에스퍼가 총동원되면 천 명 조금 넘는 숫자의 스캔은 어렵지 않죠.”
“한두 번 해 본 솜씨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지시가 있을 땐, 가끔.”
이렇게 된 판국에 무엇을 감추겠냐는 태도였다. 힘을 가진 것이 에스퍼라면, 그 힘을 턱 끝으로 부릴 수 있는 건 가이드다. 소위 권력을 가진 이들은 오랜 시행착오 끝에 그 사실을 잘 알게 됐다. ‘힘’을 차지하기 위한 약점을 찾는 방법으로 가이드 사찰만큼 쉬운 방법은 없었다.
센터는 그 필요가 요구될 때마다 끊임없이 이용되어왔다. 국가의 지원과 온갖 이익 관계로 연결된 사기업의 후원으로 자라는 기관의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지관영은 지금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를 것을 보면서도 기가 차다는 표정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이 수많은 사찰 대상 중 제 가이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삐쭉 머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 최태훈은 두 에스퍼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지금 제가 보고 있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눈치챘다. 센터장은 긴장한 눈으로 벽면의 신호를 바라보는 가이드를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다들 별다른 동요 없이 평범한데, 일전에 ‘선생’에게 희생된 가이드의 신호는 그것과 달랐어요.”
“……센터장님 집무실에 있을 때를 말씀하십니까?”
“네. 김권석 씨 이후로 선생에게 카운슬링을 받은 센터 가이드는 모두 확인하고 있었거든요.”
최태훈은 순간 쭈뼛하니 소름이 돋아서 제 팔을 쓸었다. 새삼스러운 무력감 역시 다시금 떠올랐다. 상황을 알고서도 막을 수 없었다면, 정말 선생을 막을 방법 같은 건 없는 게 아닐까?
가이드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을 밀어내려고 애써 보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선생이 어떤 방법을 통해 명령을 내리는 순간, 곧바로 저 신호가 한계치를 넘어 제멋대로 움직여 버려요. 생각 자체가 읽히질 않죠.”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이의 묘한 절망감과 굴욕감이 동시에 배어 나왔다. 최태훈은 그런 권다희의 표정과 점점이 반짝이는 빛무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언가를 입으로 중얼거리고 있는 연구원들을 번갈아 살폈다.
왠지 심장이 쿵쾅대고 뛰면서 입이 바짝 말랐다. 끝까지 비밀스럽게 가져가던 이 행위를 밝히면서까지 저를 부른 이유가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센터장은 긴 한숨을 쉬더니 누가 봐도 한참을 망설였을 법한 문장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천천히 속도가 붙기 시작한 최태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는 에스퍼의 눈이 가늘어졌다.
“태훈 씨, 제가 오늘 태훈 씨를 부른 건요.”
“……잠깐.”
단어 하나하나에 걱정이 가득하던 센터장의 말을 끊은 건, 그 가이드의 에스퍼인 지관영이었다. 최태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 낮은 목소리에 어깨까지 튀며 놀란 눈을 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제 눈앞에서 빛을 내는 누군가의 ‘지금’을 보면서 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센터장은 수척해진 얼굴을 한 번 손으로 쓸더니 힘없이 말했다.
“관영 씨. 이해해요, 이해하는데. ……아시잖아요. 태훈 씨도 뭐라도 준비를…….”
“아니까, 잠깐만 시간을 달라는 겁니다.”
최태훈은 지금만큼은 이 두 에스퍼의 대화를 따라갈 수 없었다. 특히 자신이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은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는 그다.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던 연구실 내의 에스퍼는 어느새 모두 움직임을 멈춘 채로 숨을 죽였다.
“아직 이틀이나 있으니까.”
지관영의 손이 천천히 최태훈의 손가락에 걸려들었다.
태훈은 그 익숙한 온기에 뭐라 입을 떼지도 못하고 지금의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눈을 했다. 하지만 에스퍼는 그 대답 대신 제 가이드의 손을 더 꽉 쥐는 것을 택했다.
“나가지.”
최태훈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제 연인의 말에 저절로 머릿속에 물음표가 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요 한 달간 카운트다운에 지겨울 정도로 익숙해진 태훈이다. 가이드는 잠시 날짜를 셈해 보았다.
이틀이 아니다. 사흘이어야 한다.
지관영이 말한 것보다 하루의 시간이 더 있어야만 이 실험은 끝난다. 하지만 에스퍼는 의아한 눈을 한 연인에게 그 어떤 답도 하지 않고 희미하게 눈을 휠 뿐이었다.
가이드에게는 사흘이, 에스퍼에게는 이틀이 남았다.
손을 잡고 반 보 정도 앞서 성큼성큼 걷는 남자의 발걸음은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덕분에 최태훈은 뭉게뭉게 떠오른 제 의문을 얼른 내놓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르기 바빴다. 결국 가이드는 익숙한 제 공간에 도착해서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 수 있었다.
“관영 씨. 혹시 센터에서 저에게 하려던 말이 뭔지…….”
“나중에.”
“그럼, 제가 준비해야 하는 건 또 뭡니까?”
180cm인 최태훈보다도 눈높이가 살짝 높은 장신의 에스퍼가 향한 건 거실 구석에 장식품처럼 놓여 있는 농구공들 앞이었다. 그는 제 연인의 말을 흘리듯 받으며 살며 제대로 다뤄본 적 없던 공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그것도 나중에.”
태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보아하니 지금 제 연인은 왜 이틀이냐는 말에도 같은 답을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듣지 못할 대답 대신, 곰곰이 머리를 굴리는 쪽을 택했다.
오늘, 지관영 저 에스퍼는 컨디션이 꽤 괜찮아 보였다.
그린 듯한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모습은 얼핏 보면 참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농구공은 왜요?”
“해 볼까 하고.”
“……지금요? 오늘?”
육백여 명의 생사가 달린 살벌한 실험이 오늘로 딱 사흘 남은 시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한가하게 농구라니. 최태훈은 잠시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지관영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기만 했다.
“최우진이랑 최승유 불러서 2대 2로 하면 되지 않아?”
“……저희 집은 여동생들도 합니다. 그런데, 관영 씨. 지금은 농구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할 때야.”
피트니스 클럽에서 근육을 단련하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농구공을 들고 있는 모습은 영 현실감이 없었다. 최태훈은 갑자기 영문 모를 고집을 부리는 연인을 보며 턱을 긁적였다.
지금 지관영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로 최태훈이 제일 좋아하는 운동이라는 농구를 할 참이다. 갑자기 이런 마음을 먹게 된 건, 역시 센터에서였다.
최태훈은 저와 페어가 된 이후 쭉 사찰을 받아왔을 거다.
센터장 권다희의 순순한 대답은 그것의 증명이나 다름없었다. 센터를 손아귀에 쥔 머리 꼭대기에서는 가이드를 감시해서라도 저를 무릎 꿇릴 방법을 원했을 터다.
8개월간의 기억이 없어도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조금은 짜증이 치밀었다.
“동생들한테 연락해.”
“후우, 지관영 씨.”
“내가 할까?”
이제껏 센터와 관사만을 반복하는 지루한 시간마저 반발 없이 받아들였던 최태훈이다. 그는 제가 남겨 놓은 기억 덕에 그 8개월을 이제 제법 잘 알고 있다.
‘이제 곧, 저 성격으로 살며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일을 해야 할 텐데.’
지관영은 남은 이틀 안에 그가 전해야 하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조금은 씁쓸해진 혀를 찼다. 그는 적어도 남은 시간 동안 최태훈이 좋아하는 것을 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 속을 모르는 태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을 한 채로 한숨을 푹 쉬다가, 조금은 미적미적 제 휴대폰을 들었다.
* * *
여름밤의 운동장은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함께 산책이나 운동을 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운동장 가장 으슥한 구석에서 열에 받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 진짜! 완전 트롤러네!”
상의며 머리카락까지 땀에 절여진 한 청년은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바닥에 벌렁 주저앉았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정신없이 뛰고 달린 탓이었다.
청년, 최승유를 보던 말끔한 얼굴이 살짝 비스듬히 기울여졌다. 지관영이다. 그는 지금 제 주변을 둘러싼 남매와는 영 다른 동요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그게 뭡니까.”
최씨 가문은 혈육끼리라도 게임 앞에서는 가차 없이 움직이는 가풍을 자랑한다. 관영의 물음에 함께 게임에 참여했던 두 숙녀는 확 퍼지는 듯한 웃음을 터트렸다.
“에스퍼라는 거, 완전 똑똑한 거라며! 그런데 왜 룰 이해를 못 해?”
“트롤?”
저를 향해 날 선 비난을 하든지 말든지, 지관영은 꿋꿋이 자기 할 말만 했다. 에스퍼 특별 규칙이 필요하다는 의견 아래 ‘어?’ 하는 순간 4대 2로 지관영과 단둘이 팀이 됐던 최승유는, 씩씩 열이 오른 얼굴로 외쳤다. 심판을 보고 있던 막내 정민 역시 진지한 얼굴로 조언을 더했다.
“고의로 게임 판 깨는 사람이요! 아, 큰형 공 못 뺏을 거면 왜 저랑 같은 팀을 하냐고요.”
“맞아요. 그러면 안 돼요.”
최태훈에게 일부러 져 주는 게임을 한다는 말을 부인하지 않은 에스퍼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얼굴을 했다. 기분 좋게 흘린 땀을 수건으로 닦던 최우진의 입에서 낄낄대는 웃음이 터졌다. 발갛게 변한 얼굴로 물을 마시던 최민아 역시 한마디 보탰다.
“그래도 진 팀이 주스 사는 건 변함없어.”
“난 한 푼도 안 낼 거야! 난 진짜 개열심히 했다고!”
삼남 최승유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억울함이 가득했다.
사실이다. 그는 정말로 열심히 했다. 제법 승리욕이 있는 편인 그는, 사실 영 마뜩잖은 지관영과 단둘이 한 팀이 되었을 때 ‘그래도 뭐 지지는 않겠네’ 하고 생각했더랬다.
제법 촉망받는 유도선수이자 내로라하는 대학의 체대생인 최우진과 가볍게 몸싸움까지 하며 공을 빼앗는 모습을 봤을 때만 해도, 꽤 흥미진진했던 게임이다. 여동생이 달려들 때면 불필요한 접촉 대신 곧바로 덩크슛으로 연결하는 걸 보고 ‘아, 괜히 에스퍼가 아니구나’ 하고 그 감각에 놀라기도 했다.
정말 그때까지는 이렇게 열 받을 일이 없었다.
“……최승유, ‘개열심히’가 뭐냐.”
에스퍼 손에 쥐어진 공을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빼앗을 수 있던 최강자의 입이 열렸다. 다른 동생들과 마찬가지로 땀에 흠뻑 젖은 최태훈이었다.
“나 돈 안 낼 거야아! 억울해서 알바비 못 써, 진짜!”
“그래. 형이 낼게.”
최태훈은 저 앞으로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뛰어가는 동생들을 눈으로 훑으며 제 연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두운 그늘 가에 서 있는 지관영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교묘하게 벗어나 있었다.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뭘?”
거친 숨을 완전히 다스리지 못한 목소리가 조금은 야살스럽게 들렸다. 태훈은 저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거는 에스퍼를 보며 반쯤 확신에 차서 물었다.
“학교 다닐 때 이런 거 같이할 친구 없으셨죠.”
“어.”
너무 빠른 긍정이라 뭐라 더 대꾸할 말도 없었다.
지관영은 다른 사람들이 농구를 하는 걸 몇 분 보더니 곧바로 위화감 없이 게임에 참여할 정도로 적응이 빨랐다. 아니, 사실 그 정도의 표현으로 묘사하기는 좀 모자라다.
그는 최태훈의 깔끔한 동작을 흉내 내다가 얼마 안 가 그 자신에게 맞는 방법까지 찾아낼 정도의 엄청난 운동신경을 보였다.
하지만 게임을 잘하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건 완전히 다른 범주의 문제였다. 지관영은 룰을 따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게 제 가이드이자 연인, 최태훈에 관한 것이면 더욱이.
에스퍼는 저와 같은 팀이던 최승유가 치를 떨 정도로 가이드 한정 물러 터진 플레이를 했다. 태훈의 어깨라도 스치면 공을 넘겼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제대로 된 수비를 포기했다. 귓가와 뺨이 벌게진 이유를 뛰어다녀서 그렇다고 변명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태훈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만치에서 오늘따라 유독 어린아이처럼 노는 동생들 때문이었다. 다섯 중 셋은 성인이고 나머지 둘도 완전히 꼬마는 아니건만, 요란하게 공을 튀기고 노는 모습은 꼭 초등학생들을 모아 둔 것 같았다.
사실 동생들이 저렇게 하나같이 붕 떠 있는 건 태훈 탓이 크다. 남매의 구심점이나 마찬가지였던 맏이가 관사로 들어가고 나자 이렇게 모여 웃고 떠드는 시간을 가질 기회가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관영은 부드럽게 풀린 얼굴을 한 제 가이드의 표정을 무엇 하나 빠트리지 않고 눈에 담았다. 그는 최태훈의 저런 느긋한 얼굴이 처음이었다. 잠시나마 무거운 걱정과 걱정을 놓은 최태훈은 저런 얼굴을 했다.
여태껏 에스퍼는 과거의 온기를 쫓는 것에 취해, 눈앞에 있는 남자의 행복에 다소 무뎠다. 웃고, 떠들고, 반짝반짝한 생기로 가득한 최태훈. 지관영은 그 모습을 반쯤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관영 씨 학생 때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한동안 제 가족을 보며 눈을 휘던 연인의 입이 열렸다. 지관영은 그 말에 나직하게 물었다.
“언제?”
“음…… 중고등학교 때?”
“중학교 때 부모님께서 일찍 돌아가셨지. 열네 살인가.”
“…….”
“다들 ‘운이 없었다’라고 하던데. 평소에는 그렇게 헬기 타는 걸 싫어하셨던 분들이, 그날따라 일정이 밀렸다고 먼저 준비시켰다면서.”
최태훈이 기대했던 학창시절의 가벼운 에피소드들과는 정반대로 무거운 대답이 담담한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관영은 정말 이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그에게 청소년기는 부모의 부재와 그런 저를 향해 다가오던 사람들을 피해 웅크리고 있던 기억이 전부다.
“……중학생이면 진짜 어린데. 힘드셨겠습니다.”
“그때부터 혼자 지냈던 것 같아. 여유도 없었고.”
담담한 인정이었다. 일상적인 느낌으로 토해 낸 고백에서는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최태훈은 지금 제 앞의 사내가 하는 말이 이제껏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지관영 그의 깊은 이야기임을 잘 알고 있다.
“저는 중학교 땐 동생들 돌보느라 바빴습니다.”
“막내까지 다 있을 때네.”
“예. 뭐, 어떻게 보면 동생들이 저랑 놀아준 거나 마찬가집니다. 사실 전 친구들이랑 많이 어울리는 것보다 동생들이랑 노는 게 더 좋았습니다.”
“보통은 또래랑 있는 걸 좋아할 나이 아닌가?”
태훈의 동생들은 저만치에서 새로운 내기를 시작했는지, 서로 번갈아 슛을 던지고 있다. 이번에는 심판이었던 막내 정민도 함께다.
“예나 지금이나 어린애들을 너무 좋아해서요. 물론 그때는 정말 애가 애를 키우는 모습이었겠습니다만. 민아나 정민이가 웅얼거리면서 오빠, 형아, 하는데 진짜 너무 귀엽더라고요. 손도 요만하고.”
어린애를 좋아하는 최태훈이라. 참 어울렸다.
지관영은 가끔 휴대폰으로 어린아이나 작은 동물 동영상을 보고 있던 태훈을 기억해 냈다. 사실 그는 때때로 ‘저걸 왜 보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태훈이 너무 사랑스럽다는 눈을 한 채라, 그저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뿐이다.
“그런데 친구는 왜 없으셨던 겁니까?”
“얼굴값을 했어.”
“하하핫! 진짜 그러셨을 것 같습니다.”
“농담이었거든?”
최태훈은 제 페어가 혼자 지내는 걸 선택한 이유를 이미 잘 안다. 저 얼굴값 하는 도련님은 그때부터 천천히 혼자가 됐을 거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걸 무서워하면서, 언제라도 저를 떠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차라리 사람들과 동떨어져 사는 것을 택했을 거다. 그런 약함을 사랑스럽다 여겼었으니까.
괴물은 저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짓는 연인을 눈에 담았다. 막 운동을 끝내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상기된 뺨에 여름밤의 습기 가득한 더위가 더해져 묘한 감각으로 치환되었다.
슬쩍 손을 얽어 잡아당기자 약간은 의아한 표정으로 따라오는 순진함에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의 눈을 피한 그늘 뒤에서 입맞춤이 시작됐다.
마치 정사 후의 나른한 후희처럼 떨어진 입술에 가이드는 잠시 망설이다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열이 오른 거친 숨을 완전히 삼키는 키스였다. 혀가 가볍게 얽히고 또 풀어졌다가, 볼 안쪽의 살을 살살 긁기도 했다. 어찌나 간지러운 감촉인지 저절로 목 안에서 울리는 소리가 나고 무릎이 움찔하고 튀었다.
마음에 드는 대답에 만족스러운 반응까지.
“잠깐만. 땀 냄새…… 날 겁니다.”
“괜찮아.”
진심이었다. 눈앞의 사내라면, 어떤 몰골로 뒹군다 한들 문제 될 게 없었다. 귀를 살짝 깨물고 여린 피부가 있는 목을 이를 세워 깨물자 약간은 교성 같은 신음이 흘렀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티셔츠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손이 확연한 의도를 띠고 있었다. 충분하게 예열된 몸은 평소보다 더 빠른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에 걸린 작은 돌기를 사이에 끼고 살살 굴리자 태훈은 살짝 앓는 소릴 내며 몸을 움찔거렸다.
솔직히 지관영과 만나기 전까지는 가슴으로, 그것도 유두로 느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태훈이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저 자그마한 살덩이를 살살 굴리고, 꼬집고, 짓누르는 것만으로도 입 밖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게 됐다.
최태훈은 열기와 불안이 함께하는 눈을 한 채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버텼다. 아무리 사람들을 피해 들어온 으슥한 곳이라지만, 겨우 몇 분 거리에 제 동생들과 낯선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열이 오르는 숨과 함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따뜻했다.
“실험이 끝나면요. 같이 하고 싶은 게 많습니다.”
“……뭐가 하고 싶은데.”
‘실험’이 끝나면.
연인의 목에 고개를 묻고 그것을 이를 세워 물던 괴물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이 실험이 끝난 후로도 저 남자와 함께하기 위해서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색스러운 움직임 대신 상대의 온기를 찾기 위한 느슨한 움직임으로 바뀐 커다란 손에, 태훈은 긴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이어갔다.
“평범하게……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된 데이트도 하고 싶고.”
“응.”
“어차피 관영 씨 가이드인 거 다 알려졌으니까, 친구들한테도 소개하고 싶고. 또…….”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사랑스러운 욕심이었다.
그래, 조금은 궁금해지기도 했다. 늘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제 가이드가 바라는 데이트도, 끼리끼리 논다는 말처럼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렸을 최태훈의 친구들도 알고 싶어졌다. 지관영은 지금 제가 얼마나 오랜만에 제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관영 씨 부모님도 같이 만나러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
“늘 혼자 챙기셨을 것 같아서요.”
지관영은 순수한 애도 대신 온갖 이익 관계가 꿈틀거렸던 날을 기억한다. 수도 없이 늘어진 화환들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사실 그들 중 정말로 서글픈 표정을 한 사람들은 몇 없었다.
친척 중 누군가는, 슬퍼하는 모습조차 눈이 많은 곳에서는 함부로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조언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망 속에서 빨리 일어나서도 안 됐다. 그 누구도 앞에 서 줄 수 없는 열네 살짜리 꼬마는, 조실부모한 어린아이답게 굴면서 동정표를 얻는 카드로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지관영은 궁금했었다.
혼자 남은 괴로움에 무너지는 모습도, 어떻게든 행복을 꿈꾸는 시도도, 곁에 사람을 두며 생존을 배워 가는 것도 안 된다면 대체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물론 그것에 답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볼 수 있던 것은 언제나 의심하고, 거리를 두고, 상대가 제게 약점을 드러냈을 때 그 목줄기를 뜯어 짓밟으며 기뻐하는 어른들이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몫을 양보하거나 희생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 자신이 살아남는 것이었고, 그것을 배운 어린아이는 이윽고 괴물로 자라났다.
에스퍼로 발현한 것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기를 가지게 된 셈이었으니까.
“……태훈아.”
괴물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예.”
지관영이 망설인다. 가이드는 거의 직감적으로 지금 제 연인이 꺼내는 말이 온종일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센터에서의 일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를…… 해쳐야 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봐.”
태훈은 대답 대신 땀으로 젖은 것 하나 없는 연인의 등을 쓸었다.
“하고 싶든, 하고 싶지 않든…… 내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어.”
“…….”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을 거다. 누군가의 죽음을 입에 담는 일 같은 건 여느 때처럼 쉬워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 말이 쉽사리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제 근육을 손으로 덧그리듯이 살살 움직이면서 무언가를 생각하듯 입을 다물고 있는 가이드의 속내가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 최태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왠지 모를 긴장으로 입이 말랐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최태훈이 뭐라고 대답할지 쉽게 답이 그려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살인은 안 된다고 하지 않을까. 아니면, ‘누구’를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해야 하냐고 물을까. 혹시라도 후자라면, 이한솔을 최태훈 네가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다고 말해야 하나? ……하지만.
지관영은 분명 확신했었다.
어렵지 않게 삶의 가치를 매기기도 했었다. 어차피 죽게 될 가이드 한 명쯤, 지금 당장 연인의 손을 통해 그 끝을 보는 게 뭐가 문제인가 싶었다.
하지만 지금 괴물은 아주 오래전 그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말았다. 제게도 삶의 가치를 알고 살아 숨 쉬는 온기와 따뜻함을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해 내고 만 거다.
인간으로 남고 싶어 발버둥 치다 끝내 저 아래로 떨어졌을 때의 참담한 적막이 머릿속을 채웠다. 괴물은 제 연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빠르게 뛰던 박동은 어느새 안정적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제 말을 듣고도 별다른 동요도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최태훈의 입이 작게 열렸다.
“관영 씨. 제가요.”
최태훈이 가이드여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가 귀에 들어오는 순간, 잔뜩 긴장한 제 심장에 속도가 붙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매일 같이 누군가를 죽이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단정하고 말끔한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의 말이었다. 지관영은 잠시 제가 들은 문장을 얼른 이해하지 못하고 사고를 멈췄다가, 멍하게 되물었다.
“……뭐?”
선한 도둑 디스마스의 고백이라고 치기에는 너무나 과격했다. 하지만 최태훈의 표정은 정말 오랜 생각을 꺼낸 것인 양 무던하기만 했다.
“후회했거든요.”
느리게 시작된 말은 그게 이어질수록 천천히 속도가 붙었다.
“매일 잠들기 전에 몇 번이고 생각했었습니다. 이한솔 그 사람이 어떻게 되든 말든 그냥 내버려뒀으면, 그랬으면 당신이 날 기억하고 있었을 텐데. 날 잊지 않았을 텐데.”
“…….”
“적어도 지금 내 옆에 서 있어주기는 했을걸, 왜 막았을까. 대체 왜 그랬을까. 다른 사람들 같은 거, 다 알 게 뭐라고…….”
한 글자, 한 글자 오랜 인이 박인 듯한 문장이 쏟아졌다. 지관영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한때 고민 수준에 그쳤던 선의 순간은 어느새 완전히 후회로 가득 차 있었다.
최태훈은 그만큼 아팠었다. 저를 보고 냉랭한 눈을 하는 연인이, 단 한 점 사랑을 느낄 수 없는 말들이 두려웠다. 저도 모르게 움직인 에스퍼의 손이 살짝 마른 연인의 뺨을 쓸었다.
가이드는 그 온기가 마냥 기쁘다는 듯 눈을 살짝 휘더니, 조금은 한숨 쉬듯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또 웃긴 건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물만 마셔도 체할 것 같고, 어느 순간 매일매일 누군갈 해치는 상상만 하는 제가 정말…….”
고집스럽게 날 선 말들을 했던 때가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최태훈을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던 제 자신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또 시기했다. 모든 기억을 잃고 눈을 떴을 때조차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던 저 남자를 상처 입혔었다. 지관영은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자 태훈의 눈썹이 조금은 곤란한 듯 아래로 휘더니, 제 뺨에 닿은 에스퍼의 손을 위로 꽉 덮어 잡았다. 전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하지만 그런 상상이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의 저는요.”
누구보다도 선하고, 또 누구보다도 바른 디스마스.
자신이 지은 죄를 기꺼이 고백하고 회개한 도둑. 게스타스는 제 연인을 바라보며 숨을 죽였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원치 않은 일을 했을 때……. 그땐 꼭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
“같이 후회하고 같이 힘들어해 드릴 테니까요. 절대 혼자 짊어질 생각은 마십시오.”
디스마스는 게스타스를 향해 돌을 던지지 않는다. 신조차 외면했던 그를 온전한 애정으로 감싸줄 뿐이다.
“아시겠습니까?”
곧고 바른 눈이 보였다.
지관영은 문득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아마도 과거의 저는 최태훈의 이런 모습에 빠져든 게 시작이었을 거다. 마치 지금의 자신이 그렇듯이.
에스퍼는 과거의 제 자신이 눈앞의 남자에게 빠져들었던 순간 같은 건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그 남은 흔적만 겨우 짚어 살필 뿐이다. 과거의 제 자신도 이랬을까. 지관영은 저도 모르게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자신과 지금을 비교하려다가 쓴웃음을 흘리며 그만뒀다.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건.
정말로 중요한 건…….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서 뭐 해?”
“우우, 진짜 너무한다. 맨날 둘이 같이 있으면 됐지!”
최태훈의 동생들이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맏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빼꼼하게 내밀었던 어두운 건물 뒤에서 최태훈을 발견했다.
“……아니, 그게. 너희가 놀길래……!”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관영은 귓가까지 붉게 변한 가이드를 보며 그 자신에게 한탄하듯 생각했다. 바보같이 흘려보낸 한 달의 시간이 이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최태훈이 원하는 일들로 날을 모두 채워도 모자랐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았다.
“완전 핑계다, 뭐. 이런 데서 둘이 뭐했어어~?”
“……최우진!”
“걱정하지 마, 오빠. 우리 알 거 다 알아.”
당차게 말하는 열여덟 여동생의 말에 최태훈은 금방이라도 펑 하고 터져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새빨갛게 익어버렸다. 가이드는 후다닥 제 연인에게서 떨어져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관영 씨, 저 저쪽에서 짐 정리하고 있을 테니까요. 천천히 오십시오.”
맑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지관영은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태훈은 제 동생들을 이끌고 허둥지둥 저만치 밝은 곳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지관영은 그 곧은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최태훈이다. 새로 사랑에 빠진 지금도 그리고 어떻게 될지 모를 미래도 마찬가지일 거다. 자신은 몇 번이고 다시, 연거푸 최태훈을 사랑하게 되고 말 거다.
여름의 그늘 속에 숨은 괴물은 왠지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벽에 기댄 채 버텼다. 환한 곳에서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을 다 지우지 못한 채 웃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어떻게든 서 있으려고 했던 에스퍼의 무릎이 꺾였다. 분명 더운 여름날인데도 연인의 온기가 떠난 손끝이 차가웠다.
살고 싶다.
살고 싶어졌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간절히 바란 적 없던 욕심이 머리를 들었다. 저렇게 밝은 곳에서 웃고, 떠들고, 또 행복해하는 연인의 곁에서 함께 있고 싶다. 최태훈이 말했던 평범하고 사랑스러운 데이트도, 이제껏 저를 빼고 그 누구도 찾아가지 않던 부모님도 함께 찾아가고 싶어졌다.
목 안으로 뜨거운 것이 꽉 들어찬 것처럼 먹먹해졌다. 괴물은 그제야 제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자각하자마자 마치 부끄러운 것을 감추듯 얼굴을 감싼 손이 벌벌 떨렸다.
숨소리가 급해졌다. 마음껏 우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었던 남자는 이제야 그 감정을 쏟아 내는 것을 허락받은 사람처럼 그늘 속에 숨어 울었다.
환한 빛이 제 피부에 와 닿는 감촉을 다시 알고 싶었다. 이제야 무겁게 쌓아 왔던 이 일그러진 가죽을 버리고 인간이 되어 그들 사이에서 행복할 기회를 얻은 것만 같았다.
최태훈, 저 사람이. 자신의 유일한 페어인 저 사내가 곁에 있다면 제 죽은 시간들이 다시 흐를 수 있는데.
남아 있는 시간이 없다.
오늘이 지나면 고작 하루. 하루뿐이다.
지관영은 헐떡이는 것처럼 변하려는 제 숨을 누르고 주먹을 꽉 쥐었다. 선한 디스마스는, 누군가의 생명을 밟은 채로는 살 수 없다. 디스마스의 연인인 게스타스는 그것을 잘 안다.
에스퍼는 조금은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연구실 안은 간간이 터지는 한숨 말고는 별다른 소리가 없었다. 제 페어를 데리고 나간 에스퍼는 그 후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몰라 가이드에게만 슬쩍 연락을 해 보니 ‘같이 제 본가에 왔는데 혹시 무슨 일 있으시냐.’는, 정중하고 또 걱정 가득한 문장만 되돌아왔다.
그걸 듣는 순간 센터장은 마치 속이 체한 듯 답답해졌다.
말하지 않은 거다, 그 에스퍼는.
감히 먼저 입을 뗄 수 없었던 권다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빠르게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두 가지의 생각이 자꾸 안개처럼 떠돌았다.
‘이한솔이 어떻게 하든 선생이 지시하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거라면, 태훈 씨가 힘들더라도 지관영 씨를 살리는 게 맞는 일이야.’
이성적인 판단은 그것을 열렬히 지지한다. 하지만 다른 한쪽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속삭임도 있다. ‘이곳 센터에서 태어나 이제껏 그 어떤 선택도 그 바람대로 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이기적으로 굴 권리가 있어?’
그녀는 무엇이 맞는 것인지 아직 선뜻 택하지 못했다. 그때, 조금은 쉰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센터장님.”
“네?”
센터장은 멍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곧바로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연구원 몇도 하던 일을 다 던져두고 벌떡 일어났다.
이미현의 부축을 받으며 등장한 여자 때문이었다.
“세상에나! 몸은,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유진영이다.
김권석의 에스퍼, 유진영. 그녀가 드디어 눈을 뜬 거다.
유진영은 아직 완전히 오감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조금은 부정확한 발음으로 대답했다. 한 번 폭주를 거친 신체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벌써 눈을 뜬 것도 기적에 가깝다. 어떤 에스퍼는 폭주 후 제압당했을 때 뇌사 판정을 받기도 한다.
이미현은 유진영을 연구실의 가장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그러자 주변에서 무릎 덮개니 뭐니 하는 것들을 한가득 들고 왔다. 유진영은 그걸 보며 정말 희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름인데 무슨. 됐어요.”
유진영은 김권석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동료였다.
센터 소속 에스퍼였던 그녀는, 물리계로서 꽤 주목받는 위치에 있었다. 새침한 얼굴만큼 콧대 높은 유진영. 사실 그런 그녀가 크게 못나지도, 또 잘나지도 않은 김권석과 연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은 펄쩍 뛰었었다.
아무리 페어라고 한들, 저 평범한 가이드가 무슨 수로 그 잘난 에스퍼 유진영의 옆에 설 수 있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방법은 머잖아 확실하게 드러났다.
김권석은 유진영을 정말 세상에 다시없을 보석처럼 대했다.
때로 어떤 이들이 이 페어를 보면서 빈정거리기라도 하면, 권석은 ‘우리 아가씨가 참 잘났지, 암!’ 하며 오히려 그걸 기뻐하는 사내였다.
유진영은 저를 만날 때마다 기름때가 묻은 옷 대신 가장 좋고 깔끔한 옷을 챙겨 입으려고 애쓰는 가이드를 참 좋아했다. 가끔 손끝에 남은 얼룩을 깜박하고 달려왔다가 미안해하며 스킨십을 피하면,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며 품에 쏙 안기던 그녀였다. 김권석과 유진영은 정말로 예쁜 한 쌍이었다.
그날 전까지는, 행복한 미래도 함께 꿈꿨다.
“……그 새끼가 한 짓이라면서요?”
“…….”
“안경잡이 상담사 새끼.”
유진영의 입에서 순식간에 온기가 사라진 냉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구원들은 그 살벌한 기운에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떨궜다.
어떻게 막을 새도 없이 일어난 김권석의 자살과 그걸 본 유진영의 폭주까지. 그들은 아직도 한 달여 전의 그때의 악몽이 생생했다.
“사지를 찢어 버렸어야 했는데.”
“…….”
“오빠가 이상하다고 했었을 때, 그때 죽여버릴걸.”
그 끝을 알 수 없는 독기 어린 목소리였다.
연구원들은 마치 기계가 움직이듯 동시에 고개를 들고 유진영을 바라보았다. 센터장은 긴장으로 소름까지 돋은 팔을 쓸면서 마른 입술을 혀로 적셨다.
“진영 씨. 정말 미안하지만…… 권석 씨가 했던 말을 좀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요?”
유진영은 제 동료의 시선이 하나같이 저를 향한 것을 보면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는 보이지 않는 몇 명의 연구원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
‘선생’을 지키는 임무를 강제로 맡은 거다.
그들은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싫은 잔혹한 굴욕과 수치의 시간을, 자신들의 가이드를 위해 버티고 있다. 똑같은 비극이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일렁이는 속을 달래며 한 번 심호흡을 한 유진영의 입이 열렸다.
“그 사람에게 상담을 받고 난 후는 항상 뭔가 찝찝하다고 했어요.”
“찝찝하다?”
“왜, 꼭 몽유병 환자하고도 비슷한데요. 가끔은 점심때 뭘 먹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일 끝나고 집에 도착하기는 했는데 어떻게 뭘 하다가 왔는지도 모르겠다고요.”
연구원들은 유진영의 말을 방해할까 싶어서 차마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정신 차려보면 뜬금없는 곳에 가 있기도 했댔어요. 왜, 전산실이라던지, 한참 떨어진 보일러 룸이라던지……. 하여튼 이상한 곳이요.”
“거기서 뭘 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났다고 하던가요?”
“네. 꼭 자다 일어난 것처럼 멍하기만 하다고. 그래서 스트레스 때문인가 싶어서 약도 몇 번 먹었는데 그게 다…….”
유진영의 말이 마치 삼켜지듯 작아졌다.
다들 그 의미를 너무나 잘 아는 채로 함께 침묵했다. 유진영은 천장을 바라보며 울컥한 눈에 꾹 힘을 줬다. 그녀는 울지 않을 작정이다. 제 연인의 이 억울한 죽음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약해지지 않을 거다.
묵묵히 말을 듣고 있던 이미현은 그런 그녀를 한 번 꽉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다 문득, 유진영이 생각났다는 듯 약간은 먹먹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어. 그런데. 지관영 씨는 어디에 있나요?”
“네?”
“사실 그날…… 어렴풋이 기억나거든요.”
그날이라고 하면, 유진영 그녀가 폭주했던 날이다.
센터장은 쭉 제 걱정 어린 한숨을 부르던 사내의 이름에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다른 연구원들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에 들리는 이름에 약간은 멍한 표정이 됐다.
“보통 제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잘 알아요. 제가 하던 건데요.”
미쳐 날뛰는 힘을 향해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전력으로 대하지 않으면 그 빈틈을 타고 곧바로 역습이 쏟아진다. 그래서 폭주한 에스퍼의 제압에는 굉장히 노련한, 높은 랭크의 에스퍼만이 투입됐다. 물론 그것도 꽤 많은 이들이 거절하고 남은 몇 안 되는 풀 안에서다.
“뼈 몇 개 부러지는 건 우습고, 팔이나 다리 하나쯤 없어졌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죠.”
“…….”
“그런데, 저를 한 번도 공격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
유진영 그녀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미현의 부축 하나만으로 이곳까지 걸어올 수 있던 이유도, 사실은 그 측정 불가의 에스퍼라는 사내가 저와 단 한 번도 부딪히지 않아서다.
장기 손상도, 골절도, 작은 찰과상조차 없다.
지관영 그 에스퍼는 제가 내던지는 것을 피하거나 막기만 하면서 저를 제압했다. 그건 완벽할 정도의 힘의 우위가 전제되어서이기는 했지만, 강남 현장에서 폭주한 에스퍼를 완전히 난도질해 죽였다는 에스퍼의 행동을 돌이켜 보자면, 그가 얼마나 저를 신경 써 준 것인지 뻔히 그려진다.
유진영은 상처 하나 나지 않은 제 손을 쭉 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 느린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모두의 시선이 닿았다. 그 왼손에 끼워진 반지 때문이다. 조금은 헐거운 반지는, 아마 한 달여 전만 해도 보기 좋게 딱 맞았을 거다.
“이 반지. 오빠가 가지고 있던 건데……. 지관영 씨가 끼워주면서 그러더라고요.”
“……아.”
“‘최태훈한테 해야 할 걸 그쪽한테 하고 있으니, 제발 좀 정신 차리시라고’. 아니다, 어지간히 하라고 했던가?”
한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두 사내의 애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가장 먼저는 이 반지를 준비했던, 가이드 김권석의 애탈 정도로 예쁜 마음이다. 그들은 저 작고 예쁜 반지를 준비하며 씨익 웃었을 김권석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주인 잃은 반지를 대신 끼워준 에스퍼 지관영의 스쳐 지나가는 고백이다. ‘어지간히 하라’니. 저렇게 생채기 하나 안 나게 제압할 거면서도 말하는 거 하나는 참 그다웠다. 연구원들은 유진영의 손가락 위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보면서 작게 한숨을 삼켰다.
“……여튼, 눈 뜨자마자 기억이 나던데요. 그래서 꼭 만나고 싶었어요. 페어 두 분 다.”
유진영은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가이드 김권석이 늘 입버릇처럼 말했듯이 너무 예쁜 그 웃음은 많은 이들의 입을 꾹 다물게 했다. 이미현은 유진영을 다시 부축해서 의료실로 되돌아가는 일을 맡았다.
연인을 잃은 에스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동료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사실 누구보다 이 자리에 남아 있고 싶은 유진영이다. 하지만 홀로 움직이는 것조차 힘든 상태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제 복수를 동료들에게 위임했다.
지관영과 이한솔에게는 나란히 이틀이, 그리고 최태훈에게는 사흘이 남았다. 사실 유진영이 아니었다면 연구원들은 이 턱 끝까지 차오른 시간 동안 무력함과 패배감에 젖어 있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센터의 연구원에게는 선생과 가까워졌다 자부할 만한 자그마한 성과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들은 무슨 수를 써도 센터의 보안을 선생처럼 손쉽게 뚫을 수 없었고, 씨익 웃으며 가이드를 죽어 나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지금 선생이 내건 얼굴에 대한 정보마저 어느 시점에서 마치 완전히 소거한 것처럼 뚝 끊긴 채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구원들의 표정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들에게는 드디어 최초의 힌트가 주어졌다.
그건 이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게임의 막바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다. 센터장 권다희는 제가 수장으로 선 이들의 앞에 서서 느린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그 곁에는 오연이 서 있다.
“이전부터 쭉 전제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선생은 왜 하필 센터로 돌아와야 했을까’.”
저도 모르게 포기할 뻔했었다.
선생은 정말 이한솔 그의 말대로 절대적인 신이라, 이 철저하게 계획된 동산에서 꼼짝없이 숨죽여야 하는 게 아닌가 절망도 했었다.
하지만 드디어 뭔가 빛이 보인다.
“센터로 오는 건 아무리 다른 모습을 했고, 기계에서 ‘가이드’로 잡히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너무나 리스크가 큰일입니다. 그 용의주도한 성격에 괜한 도박을 했을 리가 없지요.”
너무나 온화하기 짝이 없던 얼굴이 순식간에 악마로 변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마치 뱀처럼 가늘게 찢어지는 눈이, 씨익 올라가는 입꼬리가,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죽어 가는 이들 때문에 겁에 질렸었다.
아니, 사실 지금도 두렵다. 하지만 살아 있는 이들이 있고, 살아남은 이가 있다. 또 앞으로 살아 나가야 할 사람들도 있다.
센터장은 잠깐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갔다.
“이한솔이 말한 ‘겟세마네 동산’은 여기 센터입니다. 전 그가 금제까지 걸린 상태에서 정확하게 짚어 표현한 이유를, 이걸로 짐작해 보려고 합니다.”
센터장은 어절 하나하나를 힘주어 토해 냈다.
“선생은 ‘센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라고요.”
센터장의 눈짓에 오연이 버튼 몇 개를 눌렀다. 그러자 잠시 내려놓은 프로젝터 스크린 위로 센터의 도면이 떴다. 생각지 못했던 것에 두 사람을 지켜보던 다른 연구원들의 눈이 의아하게 변했다. 오연은 그런 동료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선생이 센터의 서버에 마음대로 접속할 수 있었다는 건, 진우가 가이드 관사의 보안을 뚫을 수 있던 것만 봐도 뻔히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 중 하나다. 턱을 괸 채 말을 듣던 연구원 몇 명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터졌다.
“선생이 알려준 방법을 썼을 뿐인데 가장 삼엄한 보안이 우습게 열려버린 겁니다. 우리는 그걸 파악조차 하지 못했었고요.”
“…….”
“인정해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도 모두 그와 같은 지능계 에스퍼이지만, 단순 능력으로는 절대 선생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말만 들으면 앞으로 남은 며칠 안 되는 시간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이 들린다. 연구원들은 입을 다물고 무겁게 침묵했다. 하지만 아직 낮은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부터 센터의 모든 골조를 뜯어 확인해 볼 생각입니다. 이건 선생의 능력 밖의 일이었으니까요.”
“골조라니요?”
한 에스퍼의 입에서 영 상황을 모르겠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건 지능계 에스퍼인 그들에게는 몹시 드문 일이었다. 오연은 기기를 조작해서 센터의 특정 부분을 확대했다.
“표현 그대롭니다. 첫 번째 희생자 김권석은 에스퍼 훈련장의 엔지니어였습니다.”
김권석이 생전 담당했던 A구역이었다. 그와 절친했던 에스퍼 몇의 얼굴에 다시 한 번 애도의 시선이 걸렸다.
“김권석은 사고 직전, 최태훈 씨에게 선생이 이상하지 않냐고 물었었다 합니다.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한 겁니다.”
“……최초의 의심이었다?”
“예. 그리고 그만한 것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똑같이 카운슬링을 받은 다른 가이드는 별다른 이상을 호소하지 않았었으니까요.”
사건 직후 선생에게 ‘카운슬링’을 받았던 가이드를 대상으로 했던 조사에서도 그 어떤 이상 호소가 발견되지 않았었다. 저 의심을 말한 건, 김권석이 처음이다.
그때, 단순한 이미지인 줄 알았던 A구역의 화면에서 움직이는 한 사내가 포착됐다. 얼마 안 가 그것이 누구인지 알아챈 몇몇 연구원들은 스크린을 곧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렸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 김권석의 생전 모습이었다.
하지만 오연은 그것에서 멈추지 않고, 3년분의 데이터를 잘게 쪼개어 동시 재생시켰다. 이는 지능계 에스퍼기 때문에 가능한 판독 방법이었다.
“사실 이전엔 저 움직임이 이상한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김권석은 엔지니어고, 그가 접근한 곳은 실제로 모두 기기를 만지는 곳들이었으니까요.”
“…….”
“하지만 에스퍼 유진영의 말대로라면, 이제 저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행동반경을 나타내는 붉은 선이 센터의 도면 위를 지그재그를 그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저절로 마른침이 꿀꺽 삼켜지는 광경이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선들은 두 방향으로 다시 나뉘었다.
김권석 그가 원래 일하던 A구역의 움직임은 매우 일정한 모양새를 보인다. 같은 곳으로 수없이 반복되는 그 정리된 선 뭉치는, 김권석이 얼마나 꼼꼼하고 성실한 시간을 보냈는지 알려주는 흔적이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푸른 선으로 바뀐 것들이 있다. 바로 담당 구역과는 한참 떨어진 채 기묘하게 움직인 움직임들이다. 그건 이전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거다. 엔지니어라는 직종 특성상 다른 팀을 돕는 건 전혀 의심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저 움직임을 선생과의 상담 직후로 특정하여 파고들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알 수 없는 용무로 몇 시간 동안이나 센터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이유가 분명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퍼 훈련장 A섹션을 제외한 모든 곳. CCTV도 없고, 엔지니어의 출입증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에 뭔가 있습니다. 쉽게 눈에 띄지는 않을 겁니다.”
센터는 거대한 기계가 유기체처럼 숨 쉬는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자동화되어 있는 이곳에서, 엔지니어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그들은 센터의 어디든 갈 수 있다.
“먼저 기계에 정통한 엔지니어들을 총동원, 김권석의 움직임을 쫓습니다.”
에스퍼 하나가 엔지니어들을 부르기 위해 연구실을 달려나갔다. 오연은 그 뒷모습을 흘끗 보면서 말을 이었다.
“우리는 엔지니어가 말하는 모든 정보를 습득한 뒤, 투시가 가능한 에스퍼와 2인 1조로 흩어집니다.”
“혹시 골조를 뜯어 확인한다는 게…….”
“예. 엔지니어만으로는 시간이 없습니다.”
광대한 센터 전체의 점검이다. 이 엄청난 크기의 공간에서, 원래와는 모습이 달라진 퍼즐 조각들을 찾아야 한다. 그건 마치 사막의 모래알에 떨어진 바늘을 찾는 일과 비슷할 거다.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과정이 벅차서가 아니다. 에스퍼인 그들은, 정말 최소한의 휴식만으로 며칠이고 날을 샐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하루가 아쉽다.
지관영에게 남은 시간은 단 이틀이다. 아니, 이제 그것도…….
“30시간.”
하루 하고도 여섯 시간. 그게 에스퍼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적어도 30시간 안에는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선생이 센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게 있었고 그걸 반드시 ‘센터의 가이드’를 통해 진행해야 했다면…… 지금 우리가 확인하지 않은 건 단 하납니다.”
“……후우.”
“‘여기 센터의 건물, 그 자체’.”
에스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어디론가 급하게 연락을, 또 누군가는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갔다. 30시간 안에 뭐라도 결판을 내야 그들의 가이드들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그 카드를 지관영의 매칭률을 두고 선생과 겨루는 선택지로 올릴 수도 있을 거다.
“만약 선생이 세뇌한 가이드를 이용해 3년간 센터에 무언가의 조치를 취했고, 거기에 이미 마음대로 네트워크에 접속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가정하면 나오는 가설은 하납니다.”
오연의 말을 듣고 있는 센터장의 눈이 저절로 연구실 전체를 환하게 수놓고 있는 작은 원형의 빛무리들을 향했다. 지금 그들이 24시간 동안 추이를 지켜보며 스캔하고 있던 가이드의 분포다.
저 빛은, 아직 가이드들이 살아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센터가 가이드들을 조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인일 수 있다>.”
센터는 그들의 자부심이었다. 이곳은 연구원들이 이제껏 일궈 낸 에스퍼-가이드에 대한 모든 지식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만 한다.
선생이 만든 땅 위에 나무를 심고 꽃을 피워 왔었으니 도저히 그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당연했다. 이제 그걸 베어 잘라내야 할 때다. 센터장은 작게 숨을 삼켰다. 선대 센터장에게 이 자리를 물려받을 때의 기억이 났다.
‘위에서 하라는 말을 대충 받아 주면서 아래로는 각자 따로 노는 에스퍼를 적당히 둥글게 대하면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평탄한 임기를 보내지 않을까 싶었었는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연구원 중 그 누구도 그런 만만한 얼굴을 한 사람은 없다.
권다희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선생의 카운슬링을 받았던 다른 센터 가이드들의 3년간의 움직임을 체크함과 동시에 김권석과 같은 증상을 단 한 번이라도 보인 적 있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세요.”
“네!”
“필요하다면 벽을 뜯어내든, 기둥을 잘라 내든…… 무슨 짓을 해도 좋습니다. 각 지방 거점 분원에도 연락해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합니다. 물론 그 기간에 CCTV 서버는 완전히 내리세요. 선생이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없앱니다.”
CCTV는 이 거대한 센터의 곳곳을 한 번에 살필 수 있는 눈이다. 이걸 끈다는 건, 한눈을 가린 채 거리를 가늠하는 항해사나 다름없다. 하지만 선생이 틀어박힌 곳이 CCTV가 없는 지하 깊은 곳인 이상, 저 자랑스러운 눈은 이제 약점밖에 되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킬 수 있는 시간이.
* * *
페어는 오지 않는다.
한솔은 멍하게 누운 채 흰 천장을 눈에 담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짐작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지관영, 그 에스퍼가 자신의 가이드를 어떤 눈으로 담았었는지를 기억한다. 선생이 실험을 제안하는 그 순간마저도 최태훈의 손을 놓지 않고 있던 남자다. 심지어는 기억을 잃은 뒤에도 결국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했다.
사실 이한솔은 아직도 지관영이 제가 아닌 최태훈을 택한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매칭조차 되지 않는 가이드를 두고 무조건 버티기로 했다니,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짓 같을 뿐이다.
사실 당장에 저를 찾아올 줄 알았다.
최태훈 그 가이드를 다그쳐서라도 저를 죽일 거라고 상상했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본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바보 같을 줄은 몰랐다.
이대로 가면 끝은 뻔하다. 저도 죽고, 지관영 그 에스퍼도 언젠가는 완전히 제어를 잃고 미치고 말 거다. 힘이라도 끌어 쓴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이없어. 도와줘도 이러냐?”
이한솔은 제 팔을 쭉 펴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말을 내뱉은 혀도, 움직이는 손가락의 관절 하나하나도 감각이 둔하다. 한솔은 제게 남은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그는 자신이 지시받은 ‘그날’,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면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도저히 상상이 가질 않았다.
단순히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금제를 어긴 반동이 심한데, 절대적인 명령을 어겼을 땐? 10분이나 견딜 수 있을까? 아니면, 5분? 아니 사실 그 정도도 힘들지 않을까.
조금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이한솔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그러고는 짐짓 느긋한 물음이 떨어져 나왔다.
“웬일이야?”
오진우였다.
이한솔이 자리를 잡은 센터의 한편, 그곳으로 오진우가 찾아왔다. 한솔은 반갑다는 듯 눈을 접었다. 그건 오랫동안 페어였던 사내를 향한 순수한 감정이었다.
페어였던 오랜 시간 속에서도 오진우는 여전히 김가하의 것이었다. 눈앞의 에스퍼는 단 한 순간도 그 가이드의 손아귀를 벗어난 적 없었다. 그리고 이제 와 생각해보니 저 역시 그랬던 것 같다. 한솔은 자신을 향해 뭐라 말하고 싶은 듯한 사내의 얼굴을 보며 작게 소리 내 웃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진우 너도 꽤 물렀지.”
“…….”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 년이다.
십 년을 그렇게 지냈으면 다시는 꼴 보기 싫다고 근처에도 안 올만 한데, 오진우는 저렇게 망설이는 얼굴을 한 채로도 자신을 찾아왔다. 당장의 증오보다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지관영을 위해서일 거다.
아버지는 오진우의 저런 면을 좋아하지 않았었다.
한솔은 누운 채로 살짝 팔을 괴고는, 자신의 에스퍼였던 사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뭐가 궁금한데.”
어떻게 보면 다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오진우는 잠시 망설이는 입술을 깨물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태훈 씨가 매칭을 다시 돌려받을 방법이 정말 널 죽이는 것뿐이야?”
“아니. 다른 것도 있기는 했었지. 아버지가 날 실험 종료일까지 살게 해 줬더라면, 그때 돌려줬으면 됐을 거야.”
이미 완전히 죽음을 가정하고 있는 말투에 오진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건 이한솔이 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대답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죽는 것을 명령했고, 이한솔은 그걸 피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다른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가 절 죽이는 걸 막아 달라고 한다면 그땐 정말 이 얼마 남지 않은 남은 시간조차 없어질 거다.
정말로 어떻게든 피하고 싶던 죽음이었는데, 한 번 받아들이고 나니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아니, 사실 한편으로는 묘하게 설레었다.
그 답답했던 금제!
한솔은 해서는 안 될 말과 행동과 생각들, 무엇보다 절대적이었던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재미있었다. 몸의 고통 따위 비할 바가 못 되는 쾌감이었다. 이제껏 시작부터 항상 누군가의 계획과 의지에 순종해야 했다면, 머지않은 최후만큼은 제가 선택하고 말 거다.
한솔은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은 뒤 기지개를 쭉 켜고는 입을 열었다.
“최태훈이 그러더라, 나 불쌍하다고?”
“…….”
“웃겨, 진짜. 지금 더 불쌍하게 된 게 누군데. 봐. 오지도 않잖아.”
이한솔의 말에 에스퍼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오진우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이한솔을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 한 사람이면서, 한편으로는 그 누구보다 지관영과 최태훈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어 할 사람이었다. 이한솔은 그걸 잘 알았다.
“있잖아, 진아. 나 뭐 하나만 도와줄래.”
페어였던 때나 들었던 귀여운 애칭이었다. 오진우는 그것에 살짝 눈썹을 휘었지만, 뭐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이한솔은 그런 에스퍼를 보며 작게 웃더니, 오랫동안 생각했던 제 계획을 하나씩 입에 담았다.
나직한 말이 계속될수록, 건조한 표정이었던 에스퍼의 눈이 천천히 커지기 시작했다.
* * *
무릇 평범한 사람이라면 얼굴도 좀 붓고 부스스할 것이 당연할 주말 아침에도, 톱스타 지관영은 참 말끔한 모습이었다. 지관영은 잠을 더 자겠다며 아침 식사를 거부한 최씨 집안의 두 공주님과 어린 왕자님 대신 식탁에 같이 앉아 있다.
어젯밤 에스퍼는 이곳 가이드의 본가에서 함께 잠을 잤다.
그것도 우진이 사용하면서 원래 주인의 깔끔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된, 태훈의 방에서였다.
“토스트랑 밥 중에서 뭐 드실 겁니까?”
“커피면 됩니다.”
“토스트 드리겠습니다.”
나직한 존대로 떨어진 지관영의 의사는 곧바로 깍듯하게 거절당했다. 그걸 들은 승유의 입에서 작게 푸흡, 하는 웃음이 터졌다.
사실 가이드는 어제까지만 해도 제 페어와 한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는 것조차 부끄러워했었다. 함께 침실을 공유하고 또 연인이라는 것도 공공연히 알려진 상태라지만, 그걸 가까운 가족들 눈앞에서 보이는 건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민망함은 지관영의 뻔뻔함 앞에서 얼마 안 가 완전히 상쇄됐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가정집을 배경으로는 서 있지 않았던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씻고 나와서 상의는 최우진, 하의는 최태훈의 것을 빌려 입고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헷. 형이랑 같이 식탁 앉으니까 좋당.”
“……자주 올게.”
우락부락한 몸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둘째 우진의 목소리에 태훈의 부모님 역시 희미하게 미소를 걸었다. 사실 그들은 하나뿐인 장남이 동성과 관계를 갖는 페어가 된 것을 이만저만 걱정한 게 아니었다.
오랜만에 본 큰아들의 살이 쪽 빠져 있는 것을 봤을 때만 해도, 이건 뭐 당장 센터에서 데리고 와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니 큰 걱정을 안 해도 될 것만 같았다.
그건 이제껏 깐깐하고 어려운 톱스타라고 생각했던 지관영의 태도 덕분이었다.
“앉아서 식사하세요.”
“괜찮습니다. 먼저 드십시오. 여기 정리만 하고 가겠습니다.”
지관영은 최태훈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
그건 태훈의 부모님 앞임을 의식해서 한 행동이지만, 원래 그런 작은 배려에 사람이 달리 보이는 법이다. 게다가, 태훈이 자리에 앉지 않고 부산히 움직이는 것을 부산히 눈에 담다가 결국 저도 일어나는 모습은 평소의 생활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했다.
“손님인데 그냥 계시지.”
“먹고 정리해. 괜찮으니까.”
눈을 접어 웃으며 귓가에 나른하게 속삭이는 모습은, 누가 봐도 연인 사이의 그것이다. 태훈은 결국 할 수 없다는 듯 제 에스퍼의 손에 끌려 의자에 앉았다.
삼남 최승유는 그걸 보고 조금은 머쓱한 얼굴이 됐다. 사실 최승유, 그는 제 형의 에스퍼인 저 남자를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했었다. 느긋하기 짝이 없는 태도도 그렇고, 하나뿐인 형의 목에 잔뜩 이런저런 자국을 남긴 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저 둘을 연인이 아닌 단순한 에스퍼-가이드 페어 사이로 봤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겠거니 했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아, 이건 조금 탄 것 같네요. 다시 구워 드리겠습니다.”
지관영은 대답 대신 맛깔스럽게 구워진 식빵을 연인의 접시 위로 올렸다. 물론 얼룩덜룩한 쪽은 그의 몫이었다. 그 별거 아닌 행동에 태훈은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었다.
별것 아닌 행동에도 그 안에 다정함이 뚝뚝 넘쳐흘렀다. 사실 이런 모습은, 지관영이 기억을 잃었을 때는 몰랐던 거다. 관사에서 만났을 때 요리를 하는 건 손 맵시가 좋고 입맛이 까다로운 에스퍼 쪽이었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고소한 빵 한 조각을 입에 밀어 넣었다. 물론 그런다고 한들 붉게 변한 귓가가 감춰지지는 않았다.
그걸 본 가족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했다.
‘와. 저건 무슨 신혼이냐?’ 하는 달큰한 문장은 동생들의 것이었고, ‘그래도 좀 야윈 것 같은데, 보약이라도 한 첩 지어 보내야겠다.’ 하는 걱정은 태훈의 부모님이 한 것이다.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당장 내일이면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언제나 이렇게 행복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온기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지관영은 지금의 순간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새겼다.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가볍게 흩어지는 햇살도, 사람들의 온기도, 분명 낯선 곳인데도 묘하게 안락한 기분이 드는 집안도, 가볍게 부딪히는 연인의 어깨도, 모두 다.
관영은 저와 슬쩍 눈이 마주치자 얼른 속눈썹을 내리까는 연인의 행동에 살짝 입꼬리를 올려 소리 없이 웃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주어진 완전한 행복이었다.
그린 듯한 미소에 왠지 속이 더워진 태훈은 괜히 말을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흠. 흐흠, 주말인데 집에만 있을 거야, 다들?”
그 말에 곧바로 입술을 삐죽인 건 최승유 쪽이었다.
“아, 좀. 형은 오늘은 우리랑 놀아. 양보 좀 하십쇼. 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냥 물어본 건데……!”
지관영은 자신을 향해 눈을 흘기는 최승유의 말에 작게 웃으며 양보 대신 저도 끼워달라는 온화한 말을 건네려고 했다.
그때였다.
각자 흩어져 있던 휴대폰이 일제히 동시에 진동했다. 덕분에 말문이 막힌 지관영은 약간 의아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기울였다. 식탁에 앉아 있는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건 이른 주말 아침에 들릴 소리로는 영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휴대폰을 확인한 건 차남 최우진이었다. 태훈은 제 동생에게 물었다.
“최우진, 뭐야?
“어…… 뭐냐. 무슨 긴급재난문잔데.”
“……긴급재난문자?”
느긋한 일상에서 ‘에스퍼 지관영’과 ‘가이드 최태훈’의 현실로 확 끌려오는 순간이었다. 지관영은 깜짝 놀랄 정도의 반사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그 움직임에 다른 가족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의아한 눈이 됐지만, 최태훈만은 달랐다.
태훈은 머그잔을 내려 두고 조금은 급한 손으로 제 동생의 휴대폰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 문장을 다 읽었을 때쯤, 가이드의 시선은 TV 앞에 서 있는 연인의 뒷모습을 향해 있었다.
-[국민안전처] 경기도 XX 현재 군부대 탈영 폭주 에스퍼 다수 대치 중. 외출을 삼가고 자택 및 대피소에서…….
* * *
가이드는 그저 에스퍼의 부속품 정도로 여겨지던 꽤 오래전의 이야기다. 한 남자가 있었다. 굉장히 부유한 집안의 가장 밑바닥 사생아였던 그는, 제법 어렸을 때 가이드로 발현했다.
일상에 낯선 이름표 하나가 더 따라붙었을 뿐인데, 그의 삶은 그때부터 불행해졌다. 그는 그때부터 이름 대신 가이드로 불렸다.
그의 부모조차 ‘이 아이는 가이드랍니다’라는 문장으로 그를 불렀고, 누군지 모를 이들은 마치 감별사 같은 눈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딱 스무 살이 되었을 때부터는 주먹구구식으로 에스퍼와 몸을 섞기를 강요받았다. 그 상대는 배가 튀어나온 동성의 사내일 때도 있었고, 나이가 훌쩍 많은 중년의 여성이거나 비슷한 나이의 폭군도 있었다.
그 악몽 같은 시간을 끝마치고 난 후에는 마치 그 육질을 판단하는 것 같은 평가가 오갔다.
‘이번에는 좀 별론데.’
‘페어로는 모자라지만, 뭐 나쁘지 않아. 계속해도 돼?’
그는 모든 에스퍼를 혐오했다.
에스퍼가 가졌다는 힘을 증오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싫어하던 남자를, ‘선생’은 꽤 오래전 처음 만났었다. 갓 에스퍼로 발현해서 흐린 눈앞에 그가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이를 부모로 여기는 어리고 멍청한 생명처럼, ‘선생’은 그 남자를 자신의 주인으로 착각했었다.
이제는 다 쓸모없어진 이야기다.
선생은 거울 속 약간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과거의 흔적을 더듬었다. 이 육신은 착실히 노화하고 있지만, 그래도 처음 이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던 순간의 모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찬물에 한 번 세수한 뒤 대충 안경을 걸쳐 쓴 선생은 남은 시간을 가늠했다.
이제 실험은 이틀이 남았다.
내일 이한솔이 죽고 나면, ‘그 페어’는 그 순간부터 정확히 시한부의 연인이 된다. 선생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지관영은 매칭 가이드인 이한솔과의 접촉 없이도 제법 잘 버텨내고 있다. 그 노력은 참 가상하다. 그 어떤 가이드와도 이어지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감안하면 박수라도 쳐 주고 싶다.
하지만 선생은 시간 낭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보다 더 싫어하는 건 지루한 실험이다. 지관영 그가 최태훈을 일찍 선택하면서 이 실험은 꽤 늘어지게 됐다. 또다시 사랑에 빠진 연인을 바라보는 흐뭇한 시선들이라니, 참 우스웠다.
선생은 지하 한편에 있는 낡은 고물이나 마찬가지인 컴퓨터를 켰다. 부팅 속도도 턱없이 느리고 거대한 굉음을 내는 이것은, 가장 상층에서 선생을 쫓는 연구원들이 쓰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고철 덩어리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은, 때로는 큰 절망을 주기도 했다. 선생의 눈에 재미있다는 듯한 이채가 흘렀다.
“……호오.”
CCTV 서버가 막혔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는 완전히 차단됐다. 기계 덩어리를 광신하는 센터의 사람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 걸까, 선생은 잠시 생각하다가 머지않아 그건 아닐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마도 저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덜떨어진 실패작과 저를 의심한 대가로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가이드의 에스퍼가 뭔가를 지껄일 걸 거다. 선생은 의자를 등으로 쭉 늘리며 제 책상 한쪽에 있는 살짝 찌그러진 콜라캔을 바라보았다.
이한솔이 했을 이야기는 뻔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가이드 최태훈이 저를 스스로 죽이면 매칭률을 다시 받아 갈 수 있다고, 온갖 금제를 깨 가면서 이야기를 전했을 거다. 거슬릴 정도로 매일같이 찾아오던 그 야윈 얼굴이 어느 순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만 봐도 뻔히 그려지는 일이다.
참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이드 최태훈이야말로, 진정으로 변수가 없는 사낸데!
곱게 마지막을 장식할 기회를 걷어차고 스스로 끔찍한 고통 속에 가는 선택을 하다니. 역시 ‘실패작’다운 생각이었다. 선생의 눈이 가늘게 휘었다.
그때 지하의 문이 열렸다. 기다렸던 이들의 등장이었다.
“……선생!”
“오, 오오, 기다렸어요. 기다렸어. 언제쯤 찾아오나 했거든.”
“지금 하고 있는 짓, 당장 멈추세요!”
선생은 센터장을 보며 히죽 눈을 접었다.
그는 제 앞의 핼쑥한 안색의 여자가 저를 왜 찾아왔는지 잘 알고 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심어 두었던 암시가 막 발현됐음이 분명했다.
<실험이 끝나기 이틀 전, 선생의 카운슬링을 거친 군부대 가이드의 3분의 1은 일제히 목숨을 끊는다.>
이건 선생이 실험이 시작함과 동시에 심어 두었던 작은 폭탄이다. 선생은 권다희의 눈이 희번덕거리며 빛나는 것을 보며 재밌다는 듯 가지런한 이를 보이며 웃었다.
이제는 센터장이 된 저 여자도, 한때 저런 표정 같은 건 절대로 못 지을 것만 같던 신입이었던 때가 있었다. 저 안의 들끓는 감정을 보는 건 언제나 신기한 일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건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틀리지 않았습니다.”
선생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나는 센터 가이드를 데리고 약속을 했지, 군부대 가이드는 단 한 번도 협상 테이블에 올린 적이 없는데요.”
권다희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선생은 그 옆에서 그녀를 호위하듯 서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오진우를 보며 작게 히죽거렸다.
“오진우 씨. 여기 계셔도 되겠습니까?”
“…….”
“군부대의 에스퍼는 가장 중요 거점을 빠르게 파괴하는 걸 끊임없이 학습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해 올 곳이 어디일까요?”
선생의 말이 맞다.
지금, 폭주한 군부대의 에스퍼들은 수도인 이곳 서울을 직선으로 향해 오고 있다. 복사한 듯 똑같은 힘을 가진 에스퍼 둘이 맞붙는다고 했을 때 승기를 잡기 쉬운 건 당연히 폭주한 쪽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이들을 제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범죄를 저지르다 폭주한 에스퍼였다면 좀 더 거칠게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가이드를 잃은 슬픔에 잠겨 폭주한 이들을 함부로 대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김권석의 연인인 유진영 역시 그랬다. 오진우의 주먹이 힘이 꽉 들어갔다. 그걸 보는 선생의 표정은 마냥 즐겁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얼마 안 가 경기도 방위선이 뚫리겠지요.”
센터장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눈앞의 남자가 ‘카운슬링’한 가이드를 조종하는 방법. 그것만 확실해지면 됐다. 지금 그것을 위해 센터 이곳저곳 수많은 연구원이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다.
다행히 한 가지 조건은 확실해졌다. 선생은 직접 만나 암시를 심은 가이드만을 조종할 수 있다. 권다희는 표정의 동요를 감추려고 애썼다.
“자.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이게 수락되지 않을 경우 실험이 남은 이틀간 한 번씩 더 가이드들이 죽을 겁니다. 그 이후의 상황은 아시겠지요.”
한 달 전과 똑같이 반복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사악한 뱀의 혀가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권다희는 빛에 반사된 안경알 뒤에 숨은 선생의 휘어진 눈을 보며 속으로 온갖 욕을 삼켰다.
“에스퍼 지관영, 그자를 구속해 주십시오.”
선생의 말에 센터장의 눈이 서서히 커지고 잔뜩 힘이 들어간 잇새가 보였다. 허나 더 격렬한 반응이 나온 건 오진우 쪽이었다.
“무슨 소립니까!”
“하하. 말이 구속이지, 사실 그 사람을 막을 방법이 없단 건 오진우 씨가 가장 잘 아는 일 아닙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저 상징적인 의미일 뿐입니다.”
오진우는 급한 눈으로 센터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 혼란한 순간 누구보다 필요한 인재이면서 남은 삶을 한 페어에게 빚진, 무엇보다 강한 에스퍼 중 하나였다.
“누구를 위한 상징인가요, 선생.”
권다희는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먹는 것 같은 목소리로 선생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선생은 다시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로 다리를 올린 채 기지개를 쭉 켜더니, 크게 소리 내 웃었다. 모두가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지는 미숙함이 역했다.
선생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누구겠습니까?”
* * *
[현재 군의 에스퍼들이 폭주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며, 에스퍼들은 각각 동두천과 수원 근처까지 접근한…….]
TV를 보고 있던 최태훈은 긴장한 얼굴을 한 아나운서의 말을 끝까지 다 듣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에 띄게 초조한 얼굴을 한 태훈을 보는 가족들의 표정도 덩달아 창백하게 질렸다.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있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서울까지도 금방이었다.
벌써 많은 사람이 다치고 또 죽었다. 브라운관 안에서는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하고 또 따뜻한 일상을 보냈을 이들이 끊임없이 쓰러져 나가고 있었다.
“최태훈. 괜찮아, 침착해. 괜찮을 거야.”
“관영 씨, 그러니까 이건……. 이건 그거잖습니까. ‘선생’이…….”
“태훈아.”
이렇게까지 패닉 상태에 빠진 태훈을 처음 보는 가족들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지관영은 제 연인의 말을 부드럽게 끊었다. 태훈은 제 에스퍼의 목소리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손이 벌벌 떨렸다. 최태훈은 TV에서 말하지 않는, 아니 말하지 못하는 저 폭주의 원인을 잘 안다.
가이드들이 죽은 것이다.
선생의 그 알 수 없는 힘 때문에!
태훈은 두려워졌다. 앞으로 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잔혹한 힘을 가진 절대자의 손아귀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이 슬금슬금 머리를 들었다.
딱 이틀 남았는데. 이틀만 잘 버티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최태훈은 자신의 그 달짝지근한 상상이 얼마나 태평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고는 아무런 죄 없는 자신을 탓했다. 그런 태훈을 울먹이는 얼굴로 꽉 끌어안은 건 최민아였다.
지관영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파리한 안색을 한 태훈의 두 동생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최우진, 최승유.”
“……예? 예에?!”
“가능한 간단하게 짐 싸. 늦기 전에 센터 대피소로 가야 하니까.”
승유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대피소’. 그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컸다. 반면 최우진은 그 말을 듣자마자 빠르게 방으로 들어갔다. 지관영은 최승유를 달래듯 천천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마 태훈이는 정신없을 테니까…… 제대로 중심 잡아. 이해해?”
“……예.”
“그래. 됐어, 그럼.”
에스퍼의 손이 살짝 최승유의 머리를 스쳤다.
운동을 오래 한 시간만큼 수없이 합숙훈련을 다녔던 최우진은 정말로 빠른 속도로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 나왔다. 태훈은 그걸 보고 나서야 지금의 상황이 실감이 났다. 눈앞에 펼쳐진 이 지옥 같은 상황은 분명 현실이었다.
태훈은 그제야 어떻게든 침착해지려고 혼자 심호흡을 했다. 집 밖을 빠져나오니 마찬가지로 급한 모습으로 뛰쳐나오는 사람이 많았다. 주말 아침의 느긋함 같은 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같이 공포에 질린 얼굴들뿐이었다.
지관영은 불안하게 쿵쾅대는 연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커다란 SUV와 오토바이 한 대가 남는 사람 하나 없이 꽉 찼다. 짐을 옮기는 걸 도운 에스퍼는 몇 걸음 뒤에서 그들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건 참 묘한 얼굴이어서, 가이드는 얼른 입을 열어 물었다.
“관영 씨는요?”
“상황 보고 따라갈게. 걱정하지 마.”
“어떻게 그럽니까!”
가족들이 듣고 걱정할까 싶어 크게 소리 내지도 못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지관영은 제 가이드의 어깨를 쓸며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한번 떨어트렸다. 불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흑갈색 눈동자가 보였다.
“에스퍼잖아. 그것도 ‘측정 불가’?”
조금은 농담처럼 덧붙인 문장이었다. 하지만 태훈은 그런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도 전혀 안심되지 않는 듯한 얼굴로 급히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요, 지금은!”
“걱정 안 해도 돼.”
최태훈은 그 확신에 찬 목소리를 들으며 지관영이 폭주한 에스퍼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제압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과 다른 상황이었다.
그때는 일대일이었지만 지금은 몇인지도 모를 군의 에스퍼가 폭주한 채 몰려들었다. 완전히 다른 범주의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지관영은 이한솔을 제외한 그 어떤 가이드와도 매칭이 되지 않는다. 힘을 써도 그것을 회복할 수가 없다.
에스퍼는 자기도 같이 남겠다며 버티는 연인을 한참 달래서 차 안으로 도로 밀어 넣었다. 오랜 시간 장남으로 살아온 그답게, 가족들의 안전이 먼저라고, 금방 갈 거라며 달래자 그나마 설득이 됐다. 하지만 그 단정한 얼굴은 꼭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을 한 채로 끝까지 지관영을 좇았다.
아. 저 표정에 약한데.
덕분에 지관영은 조금 찡그리듯 웃었다.
승유가 모는 오토바이에 헬멧까지 단단히 맨 정민이 꽉 붙어서 출발하는 것이 시작이었다. 지관영은 제가 사랑하는 연인과 또 그 연인이 사랑하는 이들이 멀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아직도 사람들의 온기가 남아 있는 집에 혼자 남았다. 다시 켠 TV 속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들이 귓가를 맴돌았다. 집 안은 최태훈이 내린 커피향이 났다. 손때 묻은 농구공 몇 개도 눈에 들어왔다.
어제는 제대로 보지 못했었는데, 들어오는 길에 눈에 담은 태훈이 오랫동안 오갔을 동네 역시 참 예뻤다. 이 모든 것들은 최태훈이 좋아하는 풍경이다.
그렇다면 지킬 가치가 있다.
지관영은 시시각각 변하는 브라운관 속 상황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편 최태훈은 대피소로 가는 차 안에서도 라디오 소리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주먹만 꽉 쥐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온갖 끔찍한 모습이 머리를 떠돌았다. 폭주한 에스퍼, 이름도 모를 죽은 이들, 질린 얼굴로 대피하는 사람들, 오늘따라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차의 냄새. 그 모든 것이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져야 한다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잘 아는데도,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그렇게 멍하게 생각에 빠져 있던 태훈은, 가족들을 일제히 움찔거리게 한 진동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몇 초간의 침묵 끝에 입을 연 건 최지현이었다.
“오빠.”
“…….”
“큰오빠!”
최태훈은 정확히 저를 지칭하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치 뒤늦게 전원이 들어 온 인형처럼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어, 지현아.”
“전화 오는 것 같은데.”
최태훈은 그제야 차의 손잡이 홈에 대충 집어 넣어둔 자신의 휴대폰을 발견했다. 액정 위를 밝히는 숫자 조합은 낯설었다. 등록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최태훈은 혹시 센터일까 싶어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최태훈입니다.”
[……나예요.]
최태훈의 짐작은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그 전화는, 센터에서 발신된 것이 맞기는 했다.
이한솔이었다.
* * *
센터 사람들의 시선은 일제히 커다란 모니터에 집중되어 있다.
꽤 처참해 보이는 영상들은 끊임없이 군 에스퍼들의 폭주를 속보로 알리는 뉴스들이었다. 권다희는 그것을 보면서 조금은 초조한 모습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함께했던 또각거리는 힐 소리는 나지 않는다. 지금 센터장은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는 데 부담이 되지 않는 운동화를 신은 채다. 연구원들은 그런 그녀와 화면을 번갈아 보면서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누군가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면서 긴 한숨과 함께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때 한참을 기다렸던 전화 한 통이 권다희의 휴대폰을 울렸다. 혹시 모를 도감청에 대비해, 센터의 직통 전화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녀다.
권다희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이드들은요?”
모두가 묻고 싶어 안달이었던 질문이 권다희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얼마나 긴장했는지 약간 갈라진 채 흘러나왔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차마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하고 권다희의 말이 이어지는 것만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주먹을 꽉 쥔 채로 덜덜 떨었고, 누군가는 작게 성호를 그었다.
이윽고 센터장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뭔가 쭉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네. 네에. 알겠습니다.”
툭, 어디선가 펜이 데굴데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걸 줍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지금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성공했습니다. 선생의 ‘범위’는 국내로 한정된 걸로 보입니다.”
“아, 젠장! 미친! 정말입니까?!”
누군가가 거의 반은 욕설에 가까운 고함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탓하는 이는 없었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선생의 눈을 가리고 진행한 그들만의 실험에서 방금 막 작은 성공을 거뒀다.
권다희의 표정은 지하를 나옴과 동시에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그건 그 옆에 있는 오진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진우는 제가 빠져나온 방을 보며 슬쩍 역겹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권다희 그녀는 선생의 앞에서 마구 날뛰려는 제 심장을 달래려고 정말 끔찍할 정도로 노력했었다.
저절로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CCTV 서버를 내리고 난 이후의 좋은 점은 이거다. 저와 같은 지능계 에스퍼인 선생이 제아무리 센터의 서버를 해킹한다고 한들 자신의 이런 얼굴을 엿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방송사랑 군부대와는 계속 연락하고 있는 거죠? 각 병원은요?”
“현재 각 수도권 중환자실 쪽에는 상황을 알린 상탭니다. 방송사에서는 지금 서울-경기도 지역을 타깃으로 군의 도움을 얻은 영상을 송출하고 있고요. 각 지역 공항에서는 센터 가이드들이 대기 중입니다.”
“출국시키세요, 당장! 영공을 빠져나가는 즉시 지하를 포위합니다. 선생이 지하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하세요.”
오랜 야근으로 온종일 붙어있어도 모자를 가이드들이다. 하지만 지금 센터의 연구원들은 그런 자신들의 페어가 1초라도 당장 비행기에 오르길 바랄 뿐이었다.
오연은 묘하게 상기된 표정을 한 동료들을 눈으로 훑으며 살짝 뻣뻣해진 목 뒤의 근육을 주물렀다. 저절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구원들은 센터장 권다희의 지시를 따라 정신없이 뛰며 움직이는 중이다. 그런 그들의 얼굴에는 묘한 일렁임마저 깃들어 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지 딱 22시간. 드디어 도박에 가까웠던 제1 가설이 증명됐다.
<센터가 가이드를 조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원인일 수 있다.>
물론 이건 아직 완벽한 모양새는 아니다.
큰 가설은 맞았지만 아직 그 정확한 수법까지 파악하진 못했다. 하지만 연구원들은 선생이 센터 자체에 모종의 조치를 취한 뒤 어떤 방법을 통해 이 일을 저질렀을 거라는 자신들의 짐작이 적중했다는 것만으로도 한 달간의 미칠 것 같은 시간이 보상되는 것만 같을 뿐이다.
선생에게 카운슬링을 받았던 센터의 가이드 중 알 수 없는 행동을 지속한 건 김권석뿐만이 아니었다. 다만 김권석 같은 경우는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 움직이며 시간을 쏟아야 했던 통에 문제 인식이 가능했던 거였다.
나머지 가이드는, 모두 교묘하게 자신의 영역 안에서 3년간 비밀스럽게 움직여 왔다. 선생을 거친 가이드는 마치 각자의 역할을 분담받은 개미처럼 움직였다.
그건 한두 명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곁에서 함께 일하는 가이드뿐만 아니라 지방 분원으로 발령받거나 심지어는 퇴사한 이들까지 가득했다.
육백 명이 넘는 가이드의 3년간 움직임을 분석한 뒤 그 안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는 건 부족한 시간 속에서 지독한 참을성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지능계 연구원들은 그때처럼 자신들이 그게 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에 감사한 적 없었다.
꼬박 열 시간을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매달린 끝에 나온 결과는 놀라웠다.
당장 그들의 동료이자 또 연인이었던 가이드들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새 끊임없이 센터와 분원의 네트워크를 번갈아 접속하며 묘한 지시들을 내리고는 했었다. 그중에는 각 지방 거점 분원에 묘한 기기들을 설치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의 힌트는 또다시 김권석이었다.
그는 3년간 한 번에 눈에 띄지 않도록 아주 조금씩 센터의 주요 기기들을 바꾸어 나갔었다. 절대로 주요 프로세스를 건드리지 않는 치밀함이 여태껏 다른 엔지니어들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특히 그는 센터의 정문에서 오가는 에스퍼를 스캔하며 그 위험도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는 기기를 손대는 것에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을 쓴 것으로 나타났다. 센터장은 오연의 곁에 바짝 붙어서며 물었다.
“가두 스캐너가 에스퍼뿐만 아니라 가이드도 같이 분석했다고요?”
“예. 여길 보십시오.”
선생이 카운슬링 하지 않은 가이드 연구원 하나가 재빠르게 스캐너 앞에 섰다. 그러자 비에스퍼는 그저 스치기만 해야 할 가두 스캐너는, 빠르게 그의 모든 정보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그걸 보는 권다희의 눈이 번득였다.
서서히 짜 맞춰지고 있는 이 악몽 같은 퍼즐의 새 조각이었다.
그동안 위의 지시가 있을 때마다 비밀리에 행해 왔던 생체 신호 분석이 에스퍼의 힘을 중심으로 한 가이드의 ‘생각’을 파악하는 쪽이었다면, 이 스캐너가 남기는 정보들은 거의 신체 성분 분석 쪽에 가까웠다. 골밀도는 물론이고 세포 단위의 데이터까지 파악해 버리는 거다.
“이 데이터가 저장되는 곳이 어디죠?”
“원래 지정된 정식 루트가 아니어서 복잡하게 꼬여 있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확인하는 대로 말해 주세요.”
선생이 이한솔에게 스스로 죽을 것을 명령한 건 내일이었다. 왜 하필 내일인가를 두고 가설을 세우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설 하나. 지관영은 힘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가설 둘. 그렇기에 지관영은 원하든 원치 않든 살기 위해서는 이한솔과 접촉해야만 한다. 가설 셋. 그런데 만약에 그 상황에서 이한솔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극단적으로 힘을 아끼고 있는 지관영마저 움직여야 할 정도의 사건은 하나뿐이다. 바로 겟세마네로 예수를 포위하러 온 ‘로마의 군병’들이 칼을 휘두르는 일이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이한솔이 남긴 마지막 힌트를 끝까지 허투루 놓치지 않았다.
여기까지 접근하고 나자 남은 건 이제 폐쇄된 곳에서 마치 자신이 모든 것을 손에 쥔 양 움직이는 선생을 향한 배팅뿐이었다. 그 뱀 같은 사내가 제 시야가 가려졌다는 사실조차 모르게끔, 그렇게 눈앞에 장막을 치기 위해서는 이 무모할 정도의 ‘새로운 실험’이 필요했다.
지금의 상황은 그 가설을 그림과 동시에 긴박하게 준비된 일이다.
선생이 카운슬링 했던 군 소속의 가이드에게 연락해 국외로 출국시키는 것부터가 큰 난관이었다.
위치 파악이야 생체신호를 비밀리에 체크하고 있던 덕분에 어렵지 않았지만, 난데없이 당신의 목숨이 위험하니 당장 센터의 감시망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센터의 명함을 보여줘도 미친 사기꾼 취급을 당했을 정도다.
덕분에 지방의 분원은 물론이고 동마다 있는 네트워크 담당자들마저 완전히 뒤집어진 채로, 가까스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내보냈다.
지금의 이 가짜 폭주 스캔들은 그러고 나서야 겨우 시작된 거다. 이건 말 그대로 목숨을 건 내기였다. 혹시라도 선생이 생각한 시기와 다르기라도 한다면, 또 그 모양새가 어설프기라도 하면 겨우 다가간 진실이 순식간에 어그러졌을지도 모른다.
권다희는 제 휴대폰 위로 끊임없이 떠오르는 소위 높으신 분들의 번호를 보다가 그것을 그냥 꺼 버렸다. 쉴 새 없이 방송을 타고 있는 이 사건은 센터와 군의 에스퍼들이 입을 맞춰 단독으로 벌인 일이다. 쓸데없는 결재 라인을 타고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그녀는 어느새 반쯤 풀린 머리를 도로 꽉 묶으며 말했다.
“이거 끝나고 나 경질당하면 다들 탄원서나 써 줄래요?”
그녀 말에 긴장으로 굳었던 이들의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기가 스쳐 지나갔다.
‘이거 끝나고’!
정말이지 모두가 바라는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웃기보다는 끊임없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바로 오연의 가이드인 박승원이었다.
“……연아. 난 이제 옷 벗어야 해.”
“너 하난 먹여 살려.”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휙 다시 모니터에 고개를 처박는 오연의 말에 박승원은 설레어야 하는지 막막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했다. 군 장교인 박승원 그는, 이번 일을 꾸미는 데 가장 중대한 공헌을 했다.
‘선생’, 혹은 지금 선생의 얼굴인 ‘누군가’가 카운슬링 한 가이드의 에스퍼에게 직접 접근한 게 그다. 그는 그 살랑거리는 얼굴로 제 가이드의 안전에 누구보다 민감한 군 에스퍼의 약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어 이 일에 동참하게끔 했다.
사상자는 무슨.
박승원은 이제 반쯤 느슨하게 턱을 괸 채로 다시 한 번 푹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연기력을 가진 군 에스퍼들은 어색하게 ‘와아아’ 하면서 겨우 차 몇 대를 부수면서 행진하고 있을 뿐이다.
그나마 도움이 되는 건 개중 극단적인 성격을 지닌 몇 명의 에스퍼인데, 그들은 당장 이걸 뉴스로 내보내지 않으면 더 나쁜 짓을 하겠다며 방송국에서 열심히 인질 놀이를 하고 있다.
박승원은 완전히 늘어진 채 테이블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는 이 상황을 만들면서 가장 많이 긴장했던 사람 중 하나다. ‘만약 군 가이드들이 국외로 빠져나갔는데 가설이 틀려서 거기서도 선생의 영향권 안이었더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다. 오연은 그런 제 연인을 흘끗 보더니 수고했다는 듯 그 연갈색 머리카락을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다시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센터는, 아직 전혀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게 있다.
‘선생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했는가?’
권다희는 벽면의 시계를 보며 입을 열었다. 마지노선으로 정한 시간에서 이제 겨우 여덟 시간이 남았다.
“지관영 씨와는 연락되나요?”
“아직입니다. 하지만 방송 영상을 본다면 금방 이상한 걸 눈치챌 겁니다. 코드를 심었으니까요.”
센터장의 말에 연구원 하나가 급히 대답했다. 저만치 뒤에 서 있던 오진우는 그 말에 바닥으로 살짝 제 시선을 떨궜다.
* * *
연구원들의 짐작대로, 지관영 그는 TV 속 화면에 뚫어지게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한 뒤 머잖아 그 안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답지 않게 분명히 스스로가 뭔가를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생각하다 못해 확신에 가깝게 믿었다.
그렇기에 지관영은 텅 빈 최태훈의 본가 소파에서 못 박힌 듯 앉아 긴박하게 이어지는 뉴스 속보를 지켜봤다.
하지만 역시나 이상했다. 아나운서들이 말할 때만 해도 서울의 목전까지 밀려온 폭주 에스퍼들에게 쫓기는 것 같은 긴박함이 보이는데, 현장 영상이랍시고 나오는 것들이 스쳐 지나갈 때면 저절로 눈썹 하나가 위로 휘었다.
영상이라는 건 프레임의 모임이다.
운동감이 깃든 장면 하나하나가 모여서 종국엔 하나의 움직이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런데 에스퍼들이 차를 뒤엎고 아스팔트를 깨부수는 모습 속에서 찰나이긴 했지만 분명 이질적인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지관영은 결국 어느 순간부터 다리를 꼬고 앉아 제가 봤던 부분이 다시 뉴스에 나오길 기다렸다.
얼마 안 가 아나운서의 비장한 목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그 순간이 재생되는 순간, 에스퍼는 TV 화면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자 그 잠깐의 이미지가 그제야 제대로 눈에 박혔다.
하지만 지관영은 제가 본 것을 바로 믿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지도?”
그랬다. 에스퍼 그가 본 건 지도였다. 그것도 특정 부분에 붉은 마크가 찍힌. 지관영은 그게 어디인지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판교 근처, 경기도와 서울을 잇는 경부고속도로의 나들목 바로 인접한 부근이다.
에스퍼는 살짝 나른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현관을 나섰다.
이게 무슨 의미가 됐든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정해진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순식간에 지도 속의 장소로 이동했다.
물론 머릿속으로는 온갖 상황을 짚어 보면서였다.
‘이전에도 강남에서 폭주 에스퍼를 이용해서 테러를 했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상황일까’, ‘숨어서 움직이는 에스퍼 범죄자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하지만 그런 이어지는 걱정과는 달리, 도착한 지도 속 장소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
“…….”
“…….”
이미현은 세상에서 가장 싸늘한 표정으로 등장한 톱스타의 등장에 잠시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요 몇 달간 참 자주 본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익숙해지지 않은 거였다. 미현은 손에 불꽃을 걸친 채로 잠시 머뭇거렸다.
피난길에 올라 고속도로를 채우고 있던 차 안 여기저기에서 놀란듯한 시선이 따라왔다. 물론 군 에스퍼들도 순간 연예인을 직접 본 상황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실 그들은 제 가이드의 무사를 확인한 후부터는 이제 전과는 좀 다른 의미로 필사적인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첫 번째는 생계를 지키기 위해서고, 두 번째는 영창행을 피하기 위해서다.
지금 선생에게 카운슬링을 받은 가이드를 둔 군 에스퍼들은, 위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날뛰는 중이다. 가이드들을 살리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그 어떤 곳보다 상명하복의 구조를 갖춘 군대에서 이 절차를 건너뛴 행동이 온전히 이해받기는 어려울 게 뻔하다.
아니, 누가 뭐래도 이건 초대형 징계감이다.
때문에 에스퍼들은 제 가이드들의 안전이 확보된 순간부터 결심했다. 기왕에 사고 친 거, 확실하게 판을 벌이고 센터를 도와 그 선생인가 뭔가 하는 새끼를 낚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하자!
하지만 앞뒤 상황 설명 없이 무작정 TV 뉴스 속 신호만 보고 찾아온 한 성격 나쁜 사내의 경우는 좀 달랐다.
지관영 그는 지금 날뛰는 에스퍼가 어떤 모습인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지만, 적어도 저를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는 저 얼빠진 얼굴들은 절대 폭주한 게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 근거 역시 뚜렷했다. 제가 보이자마자 슬쩍 눈치부터 보는 연구원들의 표정은 암만 봐도 이 상황이 실제 상황이 아님을 증명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내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제정신입니까?”
물론, 금방이라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살벌한 눈을 한 채다. 하지만 그 듣기 좋은 목소리에 연구원들과 군 에스퍼들은 깜짝 놀라 이어질 말을 속삭이듯 뜯어말렸다.
“쉬잇! 쉿!”
“큰일 날 소릴!”
지관영 그가 살며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식의 힐난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겁에 질려 차 안에서 창문을 꽉 닫고 있는 시민들은 그 대화를 모조리 듣지 못했다. 그들이 멀리서나마 볼 수 있는 건 지관영의 표정이 심히 좋지 않다는 것뿐이다.
결국 그런 관영에게 상황을 설명해 준 건, 애초에 침착한 성정이 아니면 도저히 힘을 제어할 수 없다고 알려진 정신계 에스퍼였다. 그는 지관영에게 텔레파시로 상황 설명을 했다.
덕분에 이미현을 위시한 연구원들은 시시각각 지관영의 얼굴에 짜증이 깃드는 걸 보면서 지금 그가 어디쯤 듣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군 에스퍼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날 선 유명 배우의 반응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미현은 정말 수틀리면 여기에 있는 자신들을 모조리 찢어발길 것만 같은 살벌한 기운을 두르고 있는 지관영을 향해 조심스럽게 소곤댔다.
“여하튼 지금 그렇게 됐어요.”
처음에는 솔직히 짜증이 확 올라왔었지만 어쨌거나 유의미한 결과가 있다는 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드디어 선생이 에스퍼들을 휘두를 권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가이드의 신변 확보에 성공했다.
물론 가이드들을 평생 국외에만 둘 수는 없으니, 이 거짓 행진으로 만든 판을 시작으로 선생의 비밀을 밝혀내야만 할 거다.
하지만 에스퍼는 그보다 더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최태훈은?”
“예?”
“최태훈도 내보내야지.”
‘최태훈’.
이걸 기획하면서 가장 많은 이들이 먼저 떠올렸던 이름이기도 하다. 태훈은 이 요란한 행진에 동참시키자니 그 연기력이 한없이 바닥에 수렴하고, 속이자니 죄책감부터 몰려오는 가장 큰 난코스였다.
이미현은 지관영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했다.
“내보내다뇨, 어딜…… 아, 설마. 지관영 씨!”
“…….”
“진짜 쓸데없는 생각 하고 있어! 당신 미쳤어요?”
‘최태훈을 국외로 내보낸다’. 그건 얼핏 들어서는 당장 선생의 카운슬링을 받은 다른 가이드처럼 태훈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게 하는, 꽤 괜찮은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현은 그 이면의 의미를 잘 안다.
하나뿐인 가이드를 떨어트려 놓겠다는 건 얼마 남지 않은 이 실험에서 매칭률을 돌려받는 걸 포기하겠다는 의미다. 즉, 그것은 다시 말해 최태훈에게 살인을 요구할 수 없으니 언젠가 반드시 찾아올 최후의 순간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현은 잔뜩 화난 얼굴로 지관영에게 바짝 다가섰다. 그 살벌한 기세에 군 에스퍼들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나 싶은 어영부영한 얼굴로 어설프게 팔을 허우적댔다. 저만치에서 그들을 보고 있는 시민들의 눈 때문이었다.
“이래서 부잣집 도련님들은 안 된다니까!”
관영은 금방이라도 손에 걸린 불꽃을 제게 쏟아낼 것 같은 눈을 한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댁은 어떻게든 정신 똑바로 붙잡고 있기나 해요! 알겠어?!”
“…….”
“세상에, 세상에. 어떻게 태훈이한테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지도 말라고, 결혼하면 죽이겠다고 했던 사람이 무슨 자기가 휙 내빼겠대?! 한 번만 더 그 말 했다간 진짜 내 손에 죽어요!”
이미현의 말에 지관영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마도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8개월의 일 중 하나였으리라 생각되는 것들은 참 알면 알수록 신기한 게 많았다. 군 에스퍼들은 어느새 대립점이 바뀐 듯한 두 사람을 보며 콘크리트 바닥을 괜히 쪼개 부쉈다.
지관영의 눈썹이 가볍게 휘었다.
“이미현.”
“왜요?!”
짤막하게 부르는 목소리는 기억을 잃기 전과 별다를 바 없었다. 미현은 이 오만해 빠진 남자를 반드시 살려야겠다 다짐했다. 이 사람이 최태훈과 좋아 죽는 걸 보고 혀도 차보고, 예뻐 죽는 걸 보며 뿌듯해하기도 하면서, 제멋대로인 성격 그대로 살게 하고 말 거다.
“저쪽도 일행인 건가?
기묘한 표현이었다.
미현은 관영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은, 당장은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시야가 넓은 군 에스퍼 몇의 입에서 뒤늦게 놀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연구원님, 진압 부대입니다!”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열을 지어 오고 있는 건, 선생의 카운슬링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페어를 가진 군의 사람들이었다. 지관영은 살짝 나른한 얼굴로 목을 풀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 행동의 우선순위를 정하기도 쉬워졌다. 다른 다수의 가이드가 안전해진 이상, 매칭률을 잃은 최태훈은 선생과 이한솔 같은 특이 능력을 가진 이들 대신에 버리는 패로 쓰기 딱 좋은 카드가 됐다.
최태훈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이 연극이 거짓이라는 게 알려져선 안 된다. 지관영은 천천히 앞으로 나서며 눈을 가늘게 떴다.
* * *
이한솔은 살짝 늘어진 채 침대 위에 누운 채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금제를 깬 후유증이 제법 생생해서였다.
그는 지금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누군가’는 연락한 지 거의 한 시간 반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금방 올 줄 알았는데. 이한솔은 괜히 발을 통통 굴렀다.
하지만 그 ‘손님’은 정말이지 늦고 싶어서 늦는 게 아니다. 그가 늦는 건 모두 다 이한솔 그가 전화로 말한 것들 때문이다.
가이드 최태훈은 전화 통화에서 두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등장했다. 최대한 급하게 왔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목이며 뺨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고, 이마며 옷까지 땀으로 흠뻑 젖은 채였다.
한솔은 그 이유 같은 건 궁금하지도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아니, 세상에 어떻게…… 후우, 지금 같은 상황에서……!”
가이드는 기가 찬 얼굴로도 따지는 듯한 목소리를 잃지 않았다. 정말 그는 죄가 없다. 진짜 할 수 있는 한 가장 빨리 센터로 도착한 거다.
이한솔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성큼성큼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나무 원목 위를 두드렸다. 그 뻔뻔한 모습에 태훈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요 몇 시간 동안 제 에스퍼와의 매칭률을 건 협박에 시달리다 막 도착한 참이다. 그 협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당장 만나요. 급한 일이에요. 그런데 올 때 <이것들> 안 사오면, 매칭률 안 돌려줄 거야.’
가이드는 저 역시 발을 쿵쿵 굴리며 테이블로 걸어갔다. 어찌나 급하게 왔던지 온몸에서 힘이 쫙 풀리는 기분이었다.
“자. 말한 거 다 사왔습니다.”
“…….”
“됐습니까?”
태훈의 양손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온갖 봉투와 종이 박스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가이드는 이걸 다 사 오느라 혼이 나갈 뻔했다. 당장 폭주 에스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데, 정말이지 진짜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여기부터 ○○치킨, ○○○피자, 탕수육, 케이크, 젤리…… 그리고 이건 뭐, 뭔 과자. 아 진짜, 이렇게 치사하게 구는 게 어딨습니까!”
사실 처음에는 전과는 다르게 꼬박 존댓말을 써 가며 전화를 했길래, 무슨 일인가 싶었더랬다. 정말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 연락한 건가 싶어서 긴장도 됐다. 하지만 휴대폰 스피커 너머로 들리는 이한솔의 말은 진짜 헛웃음만 나오는 것이었다.
세상에, 다들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대피소로 가기 바쁜 상황에서 장사를 하는 곳이 몇 군데나 있다고 이런 앞뒤 없는 요구라니.
태훈은 저도 의자에 걸터앉으며 다시 한 번 열이 오른 숨을 길게 토해 냈다. 하지만 그러고도 여전히 울컥한 마음이 채 가라앉지 않았다.
“지금 상황이 얼마나 급한 줄 알긴 합니까? 휴대폰만 있으면 상황 파악 할 수 있잖습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요.”
최태훈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것을 빤히 보면서 눈을 굴리는 이한솔의 목소리는 태평하기 짝이 없었다. 가이드는 그제야 땀으로 들러붙은 제 앞머리를 위로 훑으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 당신이 센터에 왔는데도 아무도 찾으러 안 올까요.”
“……예?”
“저어기 봐요. CCTV도 꺼지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 안 해요?”
한솔의 손을 따라 태훈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러자 정말 그 말대로 불이 꺼진 채 미동도 않는 CCTV가 보였다. 가이드는 여전히 빠르게 요동치는 숨을 고르며 뒤늦게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여기까지 정신없이 올라오는 길에…… 다른 연구원 분들을 봤던가?’ 이한솔은 그런 최태훈의 생각이 뻔히 보인다는 듯한 얼굴로 봉투를 하나하나 풀면서 말을 이어갔다.
“최태훈 당신은 지금 본인 걱정이나 하는 게 좋아요.”
이한솔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말만을 늘어놓았다.
가이드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속이 타는 듯한 긴 숨이 흘러나왔다. 지금 여기서 알 수 없는 정보를 쥔 건 한솔 쪽이다. 결국 태훈은 속으로 참을 인을 그리며 달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우. 예. 알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대체 뭐길래 매칭률까지 걸고 그러는 겁니까?”
“이거 나랑 같이 먹어요.”
“……예?”
“같이 먹자고요.”
발랄하기까지 한 제안이었다.
어찌나 태연하게 내뱉은 말이던지, 사실 최태훈은 곧바로 반응하지도 못하고 눈만 끔벅였다. 아직 뛰어온 몸의 열이 채 식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야말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저랑 이한솔 씨 둘이서요?”
“네.”
이건 뭐, 원수와의 만찬이다.
하지만 태훈은 황당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그걸 완고히 거부하지 못한 채 땀에 젖은 제 머리만 쓸어 올렸다. 사실 그는 이한솔의 전화를 받고 반쯤 정신이 나갔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보는 가족들도 모두 뒤로한 채 이 음식들을 바리바리 사 들고 온 것만 봐도 그렇다. 당장 페어 가이드를 잃고 폭주한 에스퍼들이 몰려오고 있다는데도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지관영 그 사내밖에 남지 않았었다. 한솔이 말한 ‘급한 일’이라는 단어와 ‘매칭률’ 이 두 가지가 복잡하게 섞이면서 온갖 종류의 최악의 상상만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아슬아슬한 모습이던 제 연인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려서, 사실 이한솔이 문자로 찍어 보낸 음식들이고 뭐고 다 내던진 뒤 당장 센터로 오고 싶었을 정도다.
“이거 먹으면 말해줄 겁니까?”
최태훈은 새삼 제 자신에게 놀랐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이를 잃고 정신을 놓은 채 괴로워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금 최태훈 그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건 지관영 단 하나였다.
진짜 위선 떨고 살았구나, 나.
태훈은 자신을 욕했지만 그게 표정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제 페어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음을 막 깨달은 차였기 때문이다.
이한솔은 뭔가를 생각하는 얼굴을 하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네.”
최태훈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이드는 이한솔을 도와 단단히 매어져 있던 포장 봉투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실로 상황과 장소와 사람에 맞지 않는 진수성찬이었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어린 취향의 음식들이기도 했다.
한솔은 아직도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는 기름진 요리들을 조금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건 먹음직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기대감 찬 눈이라기보다는 낯선 것을 살피는 호기심과 비슷했다. 최태훈은 그 표정에 왠지 마음이 답답해져서 속으로 혀를 찼다.
저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지만, 제 앞의 청년은 딱 막냇동생인 정민을 앉혀 둔 것처럼 눈높이를 낮춰 대해야 했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면 저렇게 되는지 잘 감도 오지 않았다. 가이드는 최대한 목소리를 급하지 않게 내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드셔 본 적은 있습니까.”
망설이나 싶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그런데 어떻게 콕 집어서 사오라고 하신 겁니까?”
“……맛있다길래.”
태훈은 이렇게 된 거 답답한 속이라도 달랠 맥주라도 몇 캔 사올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제일 먼저 피자부터 집었다. 치즈가 쭉 늘어지는 모습은 확실히 먹음직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이한솔은 그마저도 놀란 듯한 표정으로 보았다.
그걸 시작으로 최태훈이 먼저 먹고, 이한솔이 그걸 따라 하는 기묘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가이드는 뭔가를 입에 넣을 만할 기분도, 상태도 아니었지만, 어설프게 저를 따라 하는 야윈 얼굴의 청년 때문에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었다.
심지어는 중간에 훈수도 뒀다.
“아니, 그건 뼈 그렇게 잡고 먹으면 불편합니다. 줘 보세요.”
이건 무슨 어미새와 아기새 놀이도 아니고!
최태훈은 속으로는 지금 상황에 답답해하면서도 이한솔을 챙기는 것을 멈추지는 못했다. 그는 누군가를 챙기는 것이 익숙한, 어쩔 수 없는 장남 체질이었다.
거기에 저를 향해 항상 비틀린 웃음을 걸거나 어떻게든 거슬리는 말만 하던 이한솔이 잠잠히 제 말을 따르기까지 하니, 거리낄 것도 없었다.
“체합니다. 천천히 드세요. 안 먹던 거 많이 먹으면 탈 납니다.”
“이거 조금 짠데.”
“식어서 더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따뜻하게 먹을 때가 맛있다고 하는 거고요.”
사실 상황만 제하고 보면, 이한솔은 정말이지 사다 먹이는 보람이 있는 쪽이었다. 도저히 목구멍으로 음식이 넘어가질 않아서 겨우 한 번씩만 손 댄 태훈과 달리, 한솔은 그 많은 음식을 번갈아가며 여러 번 맛봤다.
가이드는 힘을 빼고 앉아 그런 이한솔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누군가가 씩씩하게 잘 먹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긴장감이 풀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한솔은 콜라캔 하나를 따서 한 모금 마셨다. 따끔따끔하게 목을 자극하는 탄산의 감각이 좋았다.
“저기요.”
이한솔의 입이 툭 열렸다. 그 덕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태훈은 화들짝 놀라 급히 반응했다.
“예?”
“그 에스퍼,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최태훈은 제가 뭔가를 먹고 있는 상황이 아님을 감사히 여기기로 했다. 망설임 없이 직구로 내던져지는 질문은, 정말이지 체하게 하기 딱 좋은 내용이었다. 눈앞의 청년은 그런 가이드를 보며 작게 덧붙이기까지 했다. ‘진짜 성격 별로던데.’
거짓말은 아닌 표현이었다.
제 연인이기는 하지만, 지관영은 속이 백만 번은 꼬인 사내였다. 최태훈은 조금은 머쓱한 얼굴로 대답 대신 턱만 긁적이다가, 문득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닿았다. 붉게 아문 흉터가 있는 이한솔의 목이었다.
“……저도 뭐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한솔은 그렇게 하라는 듯 콜라를 홀짝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가이드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 흉터, 혹시 이태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생긴 겁니까?”
사실 지관영이 기억을 잃고 이한솔과 처음 마주쳤을 때 했던 말이 쭉 마음에 걸렸던 태훈이다. 관영은 이한솔의 목부터 가슴께까지 쭉 이어진 저 흉터를 보며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이건 아마도 내가 한 것 같은데. 기억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한솔은 조금 긴장한 얼굴인 최태훈을 보며 눈을 뒤룩뒤룩 굴리더니 작게 입을 열었다.
“네.”
“……세상에.”
“나도 대답했으니까, 그쪽도 해야죠.”
정말로 제가 보는 눈앞에서만 발톱을 감추고 있었던 게 분명한 에스퍼의 비화에 황당한 얼굴을 하고 있던 태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저것만큼 쉬운 듯 또 어려운 질문이 없었다.
“아니 뭐 그냥.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얼굴 보고?”
“그런 이유로 같은 남잘 좋아했으면 굳이 지관영 씨가 아니어도 진작 다른 사람을 만났을 겁니다. ……아시잖습니까. 그 성격.”
지관영이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눈썹 하나를 휘며 ‘내 성격이 뭐?’ 하고 으름장을 놓을 대화였지만, 이 비밀스러운 대화 현장에 그는 없다.
이한솔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럼, 페어 에스퍼라?”
최태훈은 두 번째 질문에는 조금 움찔했다. 사실 마음 한편으로는 대체 이런 대화를 왜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이한솔이 입을 열었다는 게 중요했다.
이렇게 말을 하나씩 시작하다 보면 저에게 연락한 목적인 ‘급한 일’도 알게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가이드는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괸 채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확실히 영향이 있었을 겁니다. 애초에 페어가 되지 않았더라면 같이 만날 일도 없었을 사람이니까요.”
“…….”
“지금은 그저 계기 정도로 생각합니다. 지관영 씨가 에스퍼인 건 중요하지 않은 문젭니다.”
“에스퍼가 아니어도 된다?”
이한솔 그는 10년 전의 어느 날을 회상하며 눈앞의 사내에게 질문을 던지는 중이다. 최태훈은 제 앞에 앉은 청년의 눈이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연인을 떠올릴 때면 여느 사람이 그렇듯 그도 잠시 눈이 멀어버리는 탓이었다.
“예.”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이한솔은 그 말끔한 얼굴 속에서 보이는 자신감에 조금 놀랐다. 덕분에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지관영의 생각도 조금은 읽을 수 있게 됐다. 저렇게 의심 없이 사랑에 빠진 눈을 한 사람이라, 저를 죽여야만 함께할 수 있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느새 콜라 한 캔을 다 비운 한솔은 텅 빈 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짐짓 느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떤 가이드가 있었어요.”
일상적인 대화의 서두처럼 시작된 말이었다. 최태훈은 조용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누구의 이야기일까? 혹시 선생의 이야기인가?
“그 사람은 자기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끔찍하게 싫어했어요.”
“…….”
“가이드라는 이유로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고스란히 책임져야 할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고나 할까.”
최태훈은 그 말에 잠시 제 삶을 돌이켜 보았다. 사실 그는 이제껏 가이드로서의 정체성에 큰 의심을 가져본 적 없었다. 기억의 시작점부터 자신은 가이드였고, 타인을 돕고 또 살릴 수 있는 무형의 힘을 가졌다는 것을 뿌듯해 했던 것도 같다.
물론 그건 십 년 넘게 매칭되는 페어를 만나지 못하며 꽤 많이 무뎌졌었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런데 그 사람한테 어느 날 갑자기 에스퍼 하나가 배정됐어요.”
이한솔은 제 손을 가볍게 주무르며 말을 이었다. 오랜 과거의 그날도 지금처럼 조금은 무더운 날이었다. 그는 지금 기억과 금제 사이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가이드 따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버텨도 봤지만, 결국에는 페어가 되어야만 했다고 해요. 싫다는 내색조차 금지당한 채로.”
“왜……입니까? 가이드도 에스퍼를 선택할 수 있는데요.”
최태훈은 조금은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조금은 퀭하지만 그 고운 낯이 완전히 가려지지 않은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최태훈 당신은 거부권이 있었어요?”
“…….”
“없었을 텐데?”
이한솔의 말이 맞다.
가이드의 거부권이라는 건 대개의 일반적인 경우에나 발휘되는 것이다. 상대 에스퍼의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리고 그 매칭률이 높으면 높을수록 가이드의 발언권은 약해진다. 모든 관심은 끝도 모를 힘을 가진 에스퍼의 능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건 가이드가 아무리 과거보다 사회적으로 나은 위치가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가이드의 존재 의의를 힘을 컨트롤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거다.
가이드로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
최태훈은 이제껏 제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가정에 조금은 긴장한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가이드여서 지관영을 만날 수 있었고, 그걸 정말 다행으로 여기고 있다지만, 완전히 이와 반대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살며 떠올리지 못했었다.
“그 가이드는 상대 에스퍼를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온갖 협박에 시달리며 입막음을 당했어요.”
“…….”
“덕분에 접촉이라도 한 날에는 리바운드 때문에 침대에서 꼼짝도 못하고 앓으면서 하루하루 말라만 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네요.”
태훈의 이마에 절로 주름이 졌다.
‘리바운드’. 그 완벽하게 무기력한 감각은 몇 달이 훌쩍 지난 지금도 생생했다. 마치 온 근육이 늘어난 고무줄처럼 처져서, 일어나 거동하는 평범한 것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그 끔찍한 상태는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순간 중 하나다.
최태훈은 문득 김권석이 지나가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알고 보면 생각보다 서로 죽지 못해 같이 붙어있는 페어들도 있단 거 아니냐.’
“아. ‘저 사람도 나처럼 불행해졌으면 좋겠다’.”
“…….”
“그래서 그 가이드는 어느 날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에스퍼를 가장 괴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러.”
한편, 이한솔은 아버지의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잠시 혀의 모든 감각이 확 오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잠시 말을 끊었다. 하지만 멍한 얼굴을 한 가이드는 그런 묘한 더듬거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안갯속에서 쥐고 있던 낯선 퍼즐 하나가 맞춰졌다. 이건 선생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솔 씨. 지금 이거 누구 이야깁니까?”
“…….”
“이한솔 씨.”
급하게 묻는 목소리는 늘 아버지가 저를 향해 말하는 것과 그 내용이 같은데도 참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이한솔 씨’. 언제나 조금은 움츠러들게 했던 네 글자였는데, 지금은 그것이 온전히 자신을 부르는 호칭으로 들렸다.
이한솔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하려고 애쓰며 입을 열었다.
“김가하.”
저를 보는 짙은 고동빛의 눈동자가 천천히 크게 뜨이는 게 보였다.
김가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금제인 적 없었다. 아버지가 그 가이드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탓이다. 하지만 한솔은 이제껏 이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정말로 불행에 떨어질 한 에스퍼 때문이었다.
“그리고, 오진우.”
절대로 아니기를 바랐던 말을 들은 태훈의 입에서 눌린 숨이 터져 나왔다. 이한솔은 그 탄식에 드디어 제대로 ‘동정받게 된’ 에스퍼의 얼굴을 떠올렸다.
“김가하는 오진우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고, 오진우는 김가하를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어요.”
“…….”
“참 웃기는 일이에요. 그쵸? 진우는 아직도 김가하뿐인데.”
에스퍼를 싫어했던 아버지는 김가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아주 쉽게 냈었다. ‘당신이 죽으면 됩니다. 여기, 이한솔 씨에게 당신의 매칭률을 넘기고요.’ 이한솔은 제가 태어나고 또 자랐던 센터의 깊숙한 지하에서 김가하를 처음 만났다.
그는 그때 저를 바라보던 김가하의 검은 눈을 또렷이 기억한다. 마치 이미 죽은 사람 같았던 얼굴도.
김가하에게서 매칭률을 넘겨받는 건 꽤 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상대 가이드를 죽이는 게 매칭률을 빼앗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임을 알게 된 것도 그때다. 그건 최태훈 저 가이드가 했던 말처럼 제가 불쌍할 수는 있지만 동정받을 수는 없는 이유다. 한동안 꾹 닫혀 있던 태훈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이거…… 오진우 씨도 아는 얘깁니까?”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했다.
태훈은 갑자기 입이 바짝 마르고 속이 답답해져서, 제가 마시다 남긴 콜라를 한 번에 쭉 들이켰다. 하지만 약간 김이 빠진 콜라는 청량감 대신 묘한 텁텁함만을 안겼다.
가이드는 마주 앉은 청년이 이 이야기를 제게 꺼낸 이유를 아직 모른다. 그저 너무도 갑작스럽게 알게 된 무거운 진실에 버거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그런 가이드를 바라보던 이한솔의 시선이 마치 무언가를 따라가듯 살짝 문밖을 향했다. 금제를 건드린 탓에 한껏 곤두선 오감이 끝없이 높은 ‘매칭’으로 이어진 이를 찾아낸 거다.
“잠깐 마실 거 하나 뽑아 올게요.”
이한솔은 저를 어찌할 바 모르는 눈으로 쳐다보는 최태훈을 향해 말했다.
* * *
지금 센터는 완전히 전쟁터가 따로 없다.
지능계 에스퍼들은 엔지니어들과 함께 가이드의 생체 정보가 저장된 회로를 찾아 센터 여기저기를 말 그대로 뜯어내고 있고, 물리계 에스퍼들은 반으로 나뉘어 각자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다. 아니, 차라리 선생이 있는 지하를 포위 중인 이들은 정신 사나울 일이 없다.
문제는 센터의 정문 입구가 있는 중앙홀이었다.
“감히 어디서 이런 해괴한 짓을! 제정신인 건가?!”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는 일이라서요. 딱 하루만이라도 시간을 주시면…….”
“대체 무슨 사정 따위로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이오! 당장 방송을 멈추게 하지 못해?!”
센터장은 저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군 장성과 정부 고위관계자들의 서슬 퍼런 목소리에 한숨을 삼켰다. 이럴 때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다.
당장 침착한 척 상황을 꾸미고 선생과 거래를 해도 모자랄 판에, 저 목에 힘만 들어간 이들을 설득할 여유같은 건 없었다.
“권 센터장, 정히 그렇게 나온다면 내 어쩔 수 없지!”
으름장 같은 목소리였다. 그 말에 권다희는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군 고위 관계자들의 표정은 묘하게도 의기양양해 보였다. 그 표정에 왠지 순간 불길해진 그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우리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 있단 말이지! ……끌고 와!”
선생이 인질 삼고 있는 가이드들은 센터의 특별 권한을 핑계 삼아 빠짐없이 해외로 출국한 지 오래다.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목에 힘을 준 채 잘난 듯 굴 수 있는 게 뭐지? 센터장은 순간적으로 여러 가정을 떠올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은 얼마 가지 않아 풀렸다.
긴장한 얼굴을 한 군인들 사이에서 끌려 나오는 무리를 확인한 연구원들의 눈이 커졌다. 특히, 그 가운데에 있는 사내를 확인했을 땐 어디에선가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까지 났다.
마치 죄인처럼 포박되어 온 건, 이미현을 비롯한 센터 연구원 몇 명과 군 에스퍼 그리고…….
“맙소사.”
“뭐. ‘측정 불가’? 대단한 것도 아니더군!”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모르지 않을 사내였다. 센터장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를 넋이 나간 표정으로 보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이미현에게 눈짓했다.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을 한 미현의 고개가 작게 좌우로 움직였다. 군에서 진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충돌하여 사상자를 낼 수 없었다는 거다.
그때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까?”
조금은 나른하게 흘러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물론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각자 달랐다. 센터 연구원들은 불안함이 뚝뚝 넘쳐흐르는 표정이었고, 군 장성을 비롯한 이들은 하나같이 조금은 얕보는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실 지금 꽤 목에 힘이 들어간 상태다.
그렇게 대단하다고 손꼽히던 에스퍼 지관영을 군부대의 힘으로 완전히 제압했다며 약간은 기고만장해진 채다. 보통 군대보다 상위 랭크로 분류되는 것이 센터 소속의 페어들인데, 그중에서 가장 으뜸간다는 자를 손에 쥐게 된 거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관영을!
‘그래 봤자 얼굴 좀 번드르르한 광대인 게지.’
군 고위 관계자 중 하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실룩였다. 사실 그는 저 작은 동요조차 보이지 않는 톱스타의 매끈한 얼굴이 조금 전부터 꽤 거슬렸던 차다.
하지만 지금 센터의 연구원들은 그런 비뚜름한 반응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당장 힘을 눌러 아껴도 모자를 지관영의 알 수 없는 태도가 걱정일 뿐이었다.
괴물은 주위를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내로라하는 군 장성들이 모두 몰려 있는 터라 호위의 숫자가 빼곡하니 가득했다. 그 여유롭다 못해 조금은 거만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에, 결국 간부 중 하나는 태도를 들먹이며 뭐라 호통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움직인 게 있었다.
“뭐, 뭐야! 대체 이게 무슨……!”
경악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정복 가득 온갖 종류의 배지와 휘장을 달고 있는 몇 명의 군 장성을 제외한 모든 호위가 마치 찌그러진 것처럼 머리부터 처박힌 채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물론, 그 움직임마저도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잠잠해졌다. 일제히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단 몇 초 만에 일어난 상황에, 군 사령부는 창백해진 얼굴로 뭐라 따지듯 입을 열었다.
“이게 어찌 된 일인…… 컥!”
괴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건 조금은 권태롭게도 보였고, 또 한편으로는 약간은 피곤한 기색이 걸려있기도 했다. 지금 군 장성들은 딱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만 헐떡이는 호흡을 허락받았다.
“지금 난 별로 참을성이 없으니까, 여러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잘 들어요.”
그걸 지켜보던 센터장은 저도 모르게 머리를 짚어 버렸다.
당장 죽더라도 성질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저 근사한 괴물은, 손목에 무거운 쇳덩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사실 그건 그가 이전에 오진우를 향해 ‘웃기는 꼴’이라고 말했던 모습과 퍽 비슷했다. 지관영은 살짝 짜증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는 입을 열었다.
“알아들었으면 반응을 해야지?”
황급히 주억거리는 얼굴들은 새하얗게 됐다가, 시퍼렇게 됐다가, 또 벌겋게 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괴물은 그들을 보며 짐짓 친절한 미소를 건 채로 말을 이었다.
“그래. 줄거리를 요약해 주겠습니다.”
“…….”
“지금, 저쪽. 나랑 같이 있던 군 에스퍼들이 폭주해서 날뛰고 있다는 게 주 내용입니다. 이유는 자기 페어가 죽어서고. 어떻습니까, 비극적이죠?”
지관영의 시선이 흘끗 닿은 군 에스퍼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 가이드들이 인질로 잡혔다는 소리에 사고를 치기는 했지만, 그들은 군인이었다. 지관영이 무형의 힘으로 압도한 채 숨을 꼴딱이게 하는 고위 관계자들을 리더로 둔 이들이라는 거다.
“그럼 어떤 얼굴로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크, 커헉, 허억!”
“꽤 비통해해야겠지? 그 짓을 벌였다는 사람한테 적당히 호통도 치고. 네?”
힘을 억누르며 칭칭 동여매졌던 사슬을 어느새 완전히 풀어낸 이미현은, 군 장성들에게 한껏 화풀이하는 성격 나쁜 사내를 보며 작게 한숨을 삼켰다.
사실 그녀는 조금 전 진압 부대와 마주쳤을 때 무력을 쓰지 않고 순순히 잡혀 드는 지관영을 보면서 조금은 애잔한 마음이 들었었다. ‘저 사람도 위험한 상황이 되자 다른 이들의 신변이 다시 보이나 보구나’ 하면서, 꼭 태훈과의 매칭률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뭐든 해야겠다 다짐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제 보니 순순히 잡혀 든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선생의 의심을 잘라 낼 배우 섭외’!
지관영 저 남자는 군 고위 관계자를 완전히 제 꼭두각시 삼아 선생이 지금의 상황을 믿도록 만들고는, 센터 사람들을 그 뒤에서 움직이게 할 참인 거다.
“눈치 봐서 잘들 행동하세요. 안 그러면 진짜 그땐 목을 비틀어 버릴 테니까.”
행동하는 성질머리로는 죽여도 죽지 않을 것 같은데. 미현은 이어진 관영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눈앞의 에스퍼가 고분고분했던 이유가 자신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임을 그제야 깨달은 군 고위 관계자들의 표정은 참 볼만했다. 연구원들은 정신을 잃고 늘어진 군의 사람들을 빠르게 다른 곳으로 옮겼다.
센터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지관영의 안색을 살폈다.
힘을 쓴 후유증 탓인지, 사내는 눈에 띄게 느슨해진 얼굴이었다. 약간은 초점이 또렷하지 않은 것처럼도 보였다. 지관영은 그제야 제 손목에서 움직이는 쇠사슬을 내려다보았다. 거추장스러운 쇳덩이었다. 하지만 관영은 그것을 끊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는 지금 스스로가 천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안다.
그 순간, 조금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시간 남았네요.”
덕분에 연구원 하나에게 선생을 데리고 올라올 것을 지시하던 센터장은 물론 많은 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한 쪽으로 움직였다.
실은 꽤 전부터 그 관람객의 시선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던 지관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한솔은 제 손에 있던 콜라캔 하나를 따며 눈을 접어 웃었다.
하지만 지금 지관영은 그 모습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미 그의 시야는 옅은 성에가 낀 것처럼 뿌옇게 변했다가, 또다시 각자의 구조로 나뉘어 분해되는 것을 반복하는 중이다.
한솔은 평소보다 조금은 쉰 듯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이제 그냥 포기했나 봐요?”
콜라를 홀짝이며 묻는 이한솔의 질문에 지관영은 눈썹 하나를 꿈틀하더니, 배우다운 정확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연인의 앞에서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오만한 사내다.
“도와준 건 고맙지만, 혹시 모르니 그쪽은 눈에 안 띄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금 저쪽에 최태훈 씨 있는데.”
옅게 절그럭대는 소리가 나던 쇠사슬끼리의 마찰이 딱 멈췄다. 이한솔은 저를 올려다보는 지관영을 향해 키득대고 웃으면서 마치 춤추듯 가볍게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사실 지금 이한솔의 이런 비뚜름한 태도는 의도된 게 맞다. 저에게 지독히도 모질었던 사내에게 내키는 대로 해 보는 것이다.
“어떻게, 불러다 드릴까요.”
“……최태훈이 왜 거기 있지?”
“제가 불렀거든요.”
지관영은 저를 향해 빈정거리듯 말하는 어조에 익숙하지 않다. 에스퍼의 입에서 짜증 섞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지관영은 이번엔 이한솔을 향해 드센 공격을 퍼붓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선생의 계획을 미리 알려 준 건 이한솔이다. 지관영은 그걸 배려하고자 굉장히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다.
“절대, 아무 말도 하지 마.”
에스퍼는 제 코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온 이한솔을 향해 작게 경고했다. 한솔은 그 냉랭한 반응에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네. 왜, 내가 악역이든 뭐든 해 주겠다니까요? 그쪽 좋다고 헤실거리는 사람이랑 같이 있게 해 준다고요.”
“…….”
“뭐가 문제인데요?”
연구원들은 숨을 죽인 채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지관영은 제 코앞까지 다가온 이한솔의 앞에서도 속내를 모를 표정을 하고 있다. 그건 어찌나 냉랭한 분위기인지, 상황을 모르는 군 관계자들마저 입을 다물고 식은땀을 흘리며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에스퍼의 눈이 희미하게 휘었다. 그것에 이한솔은 의아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관영은 제 매칭 가이드이자, 동떨어진 괴물의 삶을 이해하는 유일한 동료를 향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최태훈이 나처럼 될 필요는 없으니까.”
다른 이들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이한솔은 다르다. 게스타스를 향해서만 돌을 던지는 이들을 비난했던 그는, 최태훈을 같은 괴물로 만들지 않겠다는 지관영의 결심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진짜 짜증 나네.”
약간은 헛웃음 섞인 문장이었다.
하지만 한솔 그도 이제 안다. 최태훈, 그 가이드는 누군가를 해한 뒤 차지한 자리에서 행복을 찾기에는 너무 물러 터졌다. 오진우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던 얼굴을 기억한다. 그 순간 조금은 부러웠던 것도 같다. 그것이 동정이라 한들, 불순물 따위 없는 그 순수한 감정의 대상이 되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이한솔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야위어서 마디마디가 툭 튀어나온 손끝에, 지관영의 관자놀이가 닿았다. 사실 지관영은 그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매칭 가이드’와의 접촉에 목마른 본능이 이한솔을 밀쳐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은 채 힘을 휘둘렀던 지관영에게 그 작은 접촉은 정말로 단비와도 같은 거였다.
괴물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쇳덩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지금, 에스퍼 지관영의 눈은 조금 놀란 듯 크게 뜨인 채다. 한솔은 그 표정을 보며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드디어 저 오만한 남자에게 한 방 먹인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관영의 입에서 조금은 자신 없이 떨어지는 문장이 흘러나왔다.
“잠깐, 너…….”
물론 그 고소함의 대가는 컸다. 이한솔은 순간 목구멍으로 울컥 넘어오는 비린 맛을 느끼며 정말로 제게 여유가 없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이제 ‘시간’도, 남은 ‘금제’도 몇 개 되지 않는다.
저만치 뒤에서 가까워지는 구두 굽 소리가 익숙했다. 긴장한 얼굴을 한 에스퍼 사이로 번뜩이는 안경알이 보였다.
선생의 시선이 가장 먼저 꽂힌 건 지관영이었다. 그는 지관영의 손목을 감고 있는 검고 두꺼운 족쇄를 보며 히죽 웃었다. 저런 쇳덩이가 지관영을 억압할 수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는 그다. 허나 저 괴물은 뻔히 잘라낼 수 있는 쇳덩이를 끊어 내지 못하게 될 거다. 에스퍼란 참 어리석어서, 자신의 가이드가 걸리면 이성적인 판단 따위는 내던져 버린다.
선생은 그게 퍽 만족스럽다는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어떻게 준비는 거의 끝난 것 같은데……. 표정들이 안 좋으십니다?”
“…….”
“무슨 일이신지 눈도 다 가려 놓으시고 말입니다. 하핫!”
CCTV를 말하는 거다. 권다희는 이제껏, 정말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오랜 기간 선생의 손아귀에 놓여져 있었음을 새삼스레 깨달으며 이를 악물었다.
주변의 사람들을 쭉 훑던 선생은 느긋하게 고개를 직각으로 기울였다. 그러자 두두둑, 하고 뭉친 근육이 풀어지는 소리가 났다.
“처음 보는 얼굴들도 계십니다?”
“흠, 크흠, 자, 자네가 그, 군 가이드들을…… 해, 해쳤다는 자인가!”
지관영의 눈치를 보며 터져 나온 목소리에서는 옅은 떨림이 느껴졌다. 그걸 짚어 낸 선생은 고개를 비스듬히 한 그대로 실눈을 떴다. 눈앞의 사람들은 분명 군의 사람들이 맞았다.
주렁주렁 무겁게 달린 것들은 조작되어 만들어진 것들도 아니었고, 저 중 몇 명은 그가 군의 상담센터에 있었을 때 그 이름을 보았던 자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도가 이상했다. 저건 단순히 겁에 질린 얼굴로 보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선생의 얼굴에서 의심을 발견한 연구원 몇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버지.”
처음으로 선생의 눈이 자기 아들에게 향했다. 이한솔은 담담한 표정으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제 아들의 의중을 살피려는 듯 가늘어진 시선을 이한솔에게서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뭡니까?”
그는 제 자신이 저 청년에게 무엇을 명령했었는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잘 안다.
선생은 이 공간에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그의 오감이 사방으로 꿈틀거리는 벌레처럼 들끓었다. 그는 센터, 이곳의 신이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일렁이는 것이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다.
센터장 권다희는 순간 다급한 눈으로 지관영을 봤다. 이한솔이 무슨 말을 할지는 모르지만, 우선은 그를 막고 지관영의 매칭률을 두고 새로운 판을 짜야 하지 않냐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관영은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얼굴이었다. 아니, 조금은 기억을 더듬듯 생각에 빠진 눈을 하고 있었다.
“센터 사람들이 가이드를 빼돌렸어요.”
“잠깐, 지금 무슨……!”
“군의 가이드도, 센터 소속 가이드도 마찬가지예요. 모두 국외로 빠져나갔어요.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아군이라 믿었던 이한솔이다. 센터 연구원들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의 계획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내뱉을 줄은 몰랐다. 권다희는 순간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가, 황급히 안색을 가다듬었다.
당황한 건 오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온갖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진우를 10년간이나 붙잡고 있던 녀석을 믿어서는 안 됐는데’, ‘태훈 씨는? 어떻게 하지. 시간이 없다. 지관영 저 사람을 구해야 하는데……!’
그때였다. 오연의 정신을 확 현실로 잡아채는 차분한 시선이 있었다. 지관영이었다. 오연은 저를 바라보는 그린 듯한 얼굴과 눈이 딱 마주쳤다.
선생의 말 한마디면 최태훈이 죽을 수도 있다. 그건, 최태훈에게 끔직한 저 사내라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상황이다. 헌데, 지관영은 묘할 정도로 차분했다.
오연은 그제야 이성을 되찾고 선생을 ‘관찰’했다. 언제나 포식자의 위치에서 배부른 눈을 하던 신을 살피기 시작한 거다. 선생의 눈은 기괴할 정도로 크게 뜨인 채다.
선생이 동요하고 있었다. 그건, 이제껏 여유롭기만 했던 저 사내에게는 처음 보는 빈틈이었다. 선생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최태훈도?”
“그럴 리가요.”
선생은 일생 온순하기만 했던 저 눈먼 어린양이 이전에는 없던 얼굴을 하고 있음을 안다. 그는 집요한 눈을 한 채로 제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이한솔은 제 아버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투명한 안경알 너머로는 스산할 정도의 안광이 흘렀다.
“이한솔 씨.”
“……네. 아버지.”
“최태훈 씨를 모셔 오세요.”
이한솔은 살짝 고개를 꾸벅하고 제가 왔던 길을 따라 다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걸 지켜보는 연구원들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렀다.
그리고 그 순간, 오연은 깨달았다.
‘선생’은 최태훈을 죽이지 못한다. 이한솔은 그것을 실험하기 위해 선생에게 남은 패가 최태훈뿐이라는 사실을 직접 상기시켰고, 그걸로 선생의 눈 밖으로 벗어날 여유를 얻었다.
오연은 이한솔이 남긴 퍼즐 조각을 머릿속에서 굴리면서 슬쩍 뒤로 몸을 뺐다. 삼엄했던 선생의 경계가 오로지 최태훈만을 향해 있는 지금은, 다시금 주어진 기회다.
그는 이 센터에서 딱 한 곳을 제외한 모든 장소를 살폈다. 작은 부품 하나까지도 오연 그의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오연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천천히 텅 빈 지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편 한솔은 발걸음을 떼는 한 발짝마다 시끄럽게 뛰는 제 숨을 삼키고 있었다. 담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건, 몇 번을 상상했던 것이니만큼 사실 그 순간이 되면 꽤 시시하지 않을까도 짐작했었다.
하지만 역시 떨렸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저만의 선택을 하는 건. 이한솔은 천천히 문을 열었다. 단정한 얼굴을 한 가이드는 나갔을 때와 별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늦으셨습니다.”
“……뭐어. 그냥.”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말갛게 바라보는 눈을 보자니 속이 간질거렸다. 이한솔은 그런 가이드를 향해 느릿한 목소리로 오늘 그를 부른 이유를 말하려고 했다.
‘지관영을 살릴 방법’!
만약, 최태훈이 이것을 거부한다면 억지로라도 저 손을 붙잡고 제 심장을 찌를 각오까지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입을 뗀 나직한 목소리가 있었다.
“이한솔 씨.”
“어?”
“저에게 오진우 씨와 김가하 씨의 이야기를 한 이유가 뭡니까.”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그려왔던 상황이 완전히 반전된 것에, 한솔은 잠시 말문이 막힌 채로 멍하게 눈만 끔벅였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먼저 입을 여는 최태훈은 그리지 못했던 거다.
한솔은 제가 들은 질문을 느리게 곱씹었다.
‘오진우와 김가하의 이야기를 한 이유’. 그건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머지않아 답을 찾아 떠올렸다.
죽기 전에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었다. 분명히 물러 터진 저 가이드라면 들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솔은 그걸 곧바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작게 입술만 달싹였다. 최태훈은 그런 이한솔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하나 더 있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가. 최태훈은 그걸 막 확신했다. 그에게 이한솔은 저의 어린 남동생과 참 닮아 보였다. 그 본심을 대신 말하는 가이드의 입이 나직하게 열렸다.
“이한솔 씨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습니까?”
“…….”
한솔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정확히 정곡을 찔린 탓이었다.
그랬다.
최태훈이라면, 저 가이드라면 이제껏 누구도 들어 준 적 없는 어리광을 받아 줄 것 같았다. 아직도 테이블에 제법 많이 남은 음식들은 그걸 증명한다.
태훈은 슬쩍 제 시선을 피해 바닥을 바라보는 야윈 얼굴의 청년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소리에 이한솔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가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옅은 온기가 전해질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한솔은 저보다 조금 높은 눈높이에서 떨어지는 시선에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최태훈은 기다렸다는 듯 조금은 한숨 섞인 문장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이한솔 씨. 한솔 씨는요, 오진우 씨…… 일 말고도, 선생과 함께해서는 안 될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건 다그치는 문장은 아니지만, 봐주거나 달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또 조금 엄한 어조였다.
“강남 사건만 봐도요. 거기서 다치고 죽은 사람들은 다 무슨 죕니까.”
이한솔의 눈썹이 조금은 찡그려졌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최태훈은 더욱 단호하게 말을 이어 갔다.
“그건 잘못된 겁니다. 김가하 씨에게도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도와주고 싶다고요. 궁지에 몰린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하면, 잡아줬어야 합니다. 그분도, 오진우 씨도 그리고 한솔 씨도 이게 뭡니까. 지금.”
“…….”
최태훈은 이한솔의 눈에 어린 억울함을 읽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왜 다 내 잘못인 건데.’ 그것도 맞다. 모든 게 이 사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이한솔 역시 그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그걸 보는 가이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조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주 느리게, 하지만 분명히.
최태훈은 작게 한숨을 흘렸다. 제 에스퍼가 알면 길길이 날뛸 거라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가이드이기 전에 인간 최태훈은 이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제가 이한솔 씨를 돕겠습니다.”
또박또박 떨어지는 문장에는 많은 힘이 담겨 있었다. 이한솔은 그 말을 속으로 되풀이했다.
“하고 싶은 말들이 많죠?”
“…….”
“하십시오. 들어 드리겠습니다.”
최태훈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긴장했던 무릎에서 힘이 쭉 풀렸다. 가이드는 깜짝 놀라 그런 이한솔을 부축했지만, 저보다 체격이 조금 작긴 해도 절대 가냘픈 쪽은 아닌 청년을 완전히 붙잡진 못하고 결국 그를 따라 어영부영 맨바닥에 주저앉았다.
확 올라오는 찬 기운에 이한솔은 반사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30분. 아니, 그보다 좀 더 모자란 시간이 남았다. 그 순간 깨달은 것도 있다. 지관영, 그 에스퍼가 왜 마지막까지 이 사내에게 저를 해하는 걸 털어놓지 못했는지 이제야 완전히 알게 됐다.
아마도 그 오만해 빠진 사내는 이렇게 또렷한 시선으로 저를 마주 보는 눈을 흐리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꾹 닫혀 있던 입에서 천천히 울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 사람들, 다 싫어.”
어느 순간 존대가 다시 사라진 이한솔의 말에 최태훈은 찡그리듯 웃었다. 그건 형식도, 내용도 참 익숙한 문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지관영 씨도 맨날 그러더군요.”
최태훈은 모른다.
이제껏 제 말에 이렇게 웃어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라는 걸. 한솔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제 눈에 새기면서 이제껏 단 한 번도 하지 못했던 투정을 시작했다.
“김가하도 싫어. 오진우도 바보 같아. 김가하, 김가하…….”
“예. 이해합니다.”
오진우는 매일같이 단 하루도 제대로 잠들지 못하고 악몽을 꿨다.
10년 간, 늦은 새벽마다 이미 다 큰 성인이 된 사내가 낮게 오열을 삼키는 소리를 듣는 건 정말로 지독한 경험이었다. 오진우는 저와 관계 후에 갖는 리바운드에 제대로 숨을 삼키지도 못하고 헐떡이면서도 이성을 잃은 목소리로 김가하를 찾고 또 빌었다.
‘미안해’, ‘사랑해’, 그리고 또다시 ‘미안해’.
열아홉 살에 처음 만나 스무 살에 헤어진 연인을 그렇게 잊지도, 삭이지도 못한 채 그리는 마음이 이한솔은 차마 다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은 그렇게 늦은 밤 내내 꿈속에서마저 울던 사내를 지켜보기도 했다.
오진우는 그렇게 앓고 일어난 아침이면 아주 먼 옛날 저를 만나러 왔던 김가하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소위 ‘최강의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바라던 죽음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진우는 스스로 죽을 수도 없는 존재였다. 그걸 허락받기에 그는 너무 강했다.
……물어봤어야 했구나. 김가하한테. 살고 싶지 않냐고.
이한솔은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 코를 박았다. 최태훈은 눈가가 흐리게 떨리는 이한솔의 등을 가볍게 달래듯 두드렸다.
“채소 맛없어. 퍽퍽한 고기도 싫어. 약도 싫고.”
“그랬을 것 같습니다. 그건 저도 싫어합니다.”
“잘못한 것인 줄도…… 몰랐단 말이야.”
투정하듯 쏟아 내는 이한솔의 말을 하나하나 받아주던 최태훈은, 그 마지막 문장에는 잠시 곧바로 입을 떼지 않고 그도 작게 고개를 떨궜다. 감히 자신이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그것을 가늠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제부터 배우고…… 또 사죄해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용서받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고요.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오진우도 그렇게 말했었다.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는 게 있다고.
이한솔은 저를 온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이드를 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다른 방법이…….
눈앞의 사내에게 칼을 들도록 강요할 수 없었던 지관영 그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그 순간, 무언가를 알아챈 듯 이한솔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한솔 씨?”
최태훈은 그 낯선 얼굴에 조금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눈앞의 청년을 불렀다. 하지만 그 이름의 주인은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허둥지둥 시계를 다시 한 번 살피더니 최태훈의 어깨를 양손으로 꽉 붙잡았다.
저절로 미간이 조금 찌푸려질 정도의 악력이었다.
“최태훈. 시간이 없어.”
“무슨 시간이 말입니까?”
“내 말을 잘 들어. 꼭, ‘잘 들어야 해’.”
“한솔 씨?”
어찌나 절박하게 외치는 말이던지, 가이드는 놀란 눈으로 어설프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태훈은 갑자기 돌변한 이한솔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말갛게 눈을 깜박였다.
“다들 반대로 알고 있어.”
“예?”
“……나는, 에스퍼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야.”
못 박히는 느낌이 이런 걸까. 다들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한솔은 단어 하나하나가 입 밖으로 토해질 때마다 천천히 저를 옥죄는 감각에 작게 눈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가이드’ 때문이야. 실패해서 그 반대가 된 거고.”
최태훈은 멍하게 그 말을 곱씹었다.
센터장은 분명 예전에 이렇게 말했었다.
‘그 어떤 에스퍼와도 잘 맞는 가이드를 만들기 위한 실험 끝에 태어난 게 이한솔이었다.’라고. 하지만 그 반대라고 하면…….
한솔의 입에서 조금은 떨리는 긴 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지금 스스로 죽음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 최태훈은 절대 모르게. 끝까지 저를 불쌍하게 여겨 준 눈앞의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한솔 그 나름의 사죄다.
“아버지는 어떤 가이드의…… 에스퍼가 되고 싶어했……거든.”
한 단어, 한 단어 꼭꼭 씹어 삼키듯 말하는 목소리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조금은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최태훈은 그제야 이한솔의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떨리고 갈라진 채임을 눈치챘다.
“……한솔 씨, 어디 불편합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에스퍼를 다…… 싫어해.”
어느새 제 어깨를 꽉 붙들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쭉 빠져있었다. 태훈은 희미하게 경련하기 시작한 이한솔의 사지를 보며 놀란 숨을 삼키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연구원분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내 말, 끝까지…… 들어!”
거의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최태훈은 어찌할 바 모르는 얼굴을 한 채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도로 이한솔과 가까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한솔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것쯤은 이미 진작 눈치챈 태훈이다.
그렇기에 더욱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한솔의 눈이 다시 한 번 시계를 향했다. 시곗바늘은 천천히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정말로, 시간이 없다. 지금을 놓치면 안 된다.
전지전능한 제 아버지를 속일 유일한 기회다. 그리고 지관영, 그 에스퍼에게는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리고, 대답해야 해.”
이한솔은 인정하기로 했다. 최태훈은 제 아버지가 말했던 대로 가장 ‘이상적인 가이드’가 맞을지도 모른다.
“꼭. 꼭, ‘대답해’. 알겠어?”
약간은 겁에 질린 것 같은 표정이 된 태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벌벌 떨리는 이한솔의 팔을 주물렀다. 하지만 그 옅은 경련은 줄어들기는커녕 한솔의 말이 이어질수록 더욱 격렬해지기만 했다.
“최태훈 너는,”
하지만 이한솔은 고집스레 문장을 이어갔다. 마치 마지막으로, 이걸 꼭 물어야만 하는 사람처럼.
“내가…… 죽었으면…… 좋겠어?”
“아뇨. 절대……. 절대로요. 절대 아닙니다.”
최태훈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재깍 대답했다. 마치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좌우로 젓고, 어느새 식은땀까지 이마에 맺히기 시작한 이한솔의 이마를 쓸면서. 이한솔은 그 온기에 그제야 희미하게 눈가를 휘어 웃었다.
부들대고 떨리는 제 몸 같은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됐다. 성공했다.
이한솔은 최태훈 몰래 속삭이듯 말했다.
“……너는 늘 그렇네. ……늘.”
한 달 전, 최태훈은 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던 지관영의 앞을 막아섰었다.
그때는 참 이해할 수 없는 바보 같은 사내라고도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는 그 마음이 이상하게만 보였다. 사실 지금도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제게 음료를 건넸던 그날도 그랬다.
최태훈은 얼굴 가득 불편해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웅크려 앉은 저를 결국 무시하지 못했었다.
마지막 금제가 깨졌다.
지금, 에스퍼 이한솔은 가이드 최태훈을 선택했다.
마치 무언가에 숨이 막힌 사람처럼 꾹 다물고 있던 한솔의 입에서 더운 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처음이었다. 가이드라는 건 이런 거였구나. 그래서, 진우도, 지관영 그 사람도 그랬던 걸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나.
최초로 가이드와 맞닿은 에스퍼에게서는 기쁨인지 고통인지 모를 신음이 끊어지듯 떨어져 나왔다.
“한솔 씨?”
가이드가 에스퍼의 연약한 정신을 위한 마지막 기제라면, 에스퍼가 할 일은 하나다. 그런 가이드를 지키는 것.
지금 에스퍼 이한솔은 가이드 최태훈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이기적이고 또 조금은 잔혹한 방법이다. 이한솔은 저를 바라보는 가이드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한솔……씨. 이한솔 씨!”
최태훈은 천천히 힘이 풀리는 몸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거의 소리 지르듯 이한솔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는 그것에 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에스퍼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태어나 처음으로 온전한 자신의 선택을 한 그의 표정은, 그 가득할 게 분명한 고통과는 달리 묘하게도 편해 보였다.
이제 이한솔의 입에서는 살아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무엇도 흘러나오지 않는다. 최태훈은 넋 나간 얼굴로 제 품에서 잠이 든 것처럼 꼼짝 않는 청년을 바라보다가, 그 늘어진 몸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하지만 곱게 눈을 감은 그에게서는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가이드는 차마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최태훈의 어깨를 짚었다. 가이드는 그 감촉에 발작하듯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풀린 눈을 크게 떴다. 저 깊은 수렁에 빠졌던 최태훈의 정신을 확 끌어 올린 건 조금은 흐린 표정을 지은 오진우였다.
정말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얼굴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닐까. 최태훈은 오진우를 보며 생각했다.
그는 조금 슬픈 듯도, 화난 듯도, 또 안타까운 듯도 한 기묘한 눈으로 최태훈의 품에서 완전히 숨을 거둔 제 가이드였던 에스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얼마 가지 않아 아주 조심스럽게 야윈 몸을 안아 올렸다. 최태훈은 그 광경을 멍하게 지켜보았다. 그건 마치 약속된 행동을 하는 것처럼 익숙하고 또 담담한 움직임이었다.
아직 채 식지 않은 온기가 천천히 떨어져 나가는 감촉에 가이드의 입에서 떨리는 숨이 토해져 나왔다. 오진우는 그런 최태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12시 20분.
허락된 시간이 지난 그때, 센터의 중앙홀로 돌아온 건 두 사람이 아니었다. 예상했지만 그렇기에 더욱 끔찍한 그 모습에 어디선가 작은 탄식이 터졌다. 연구원들은 휘청이면서도 기어코 힘을 주어 걸어오는 최태훈을 마주 보지 못했다.
감히 어느 누구도 입을 뗄 수 없다.
선생은 가이드의 눈가에 가득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보며 확신했다. ‘저건 절망이다.’
하지만 지관영은 달랐다. 짧은 시간이나마 이한솔과 닿았던 것으로 흐린 시야가 트인 그는, 선생과는 다른 생각을 했다.
저 표정은…… 최태훈의 저 표정은.
“역시 말을 잘 듣는다니까요. 이한솔 씨는.”
선생의 입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태훈은 선생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고 동요했다.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로 안경알을 번뜩이는 악마의 얼굴은 즐거워 보였다.
“센터 여러분은 자리를 비워 주셔야겠습니다.”
“뭐라고요?”
“<실험 조건>을 먼저 어긴 건 당신들이 아닙니까?”
빙글거리고 웃는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 태도에 기가 찬 연구원 몇 명이 반쯤은 튀어나와 선생을 향해 이를 갈았다.
“허어, 이렇게 무섭게 구시면 안 되지요. 아직 제게는 한 명의 가이드가 더 남아 있습니다.”
“…….”
“지관영을 살리는 건 실패했으니, 최태훈 씨라도 살릴 방법을 찾으러 달려가 봐야 하지 않습니까?”
낄낄대는 목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문장에서 그의 자만이 뚝뚝 넘쳐 내렸다. 센터장 권다희는 창백한 안색의 가이드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태훈의 옷자락은 조금 주름이 져 있을 뿐 그 어떤 얼룩도 남아 있지 않다.
이한솔이 자리를 비운 건 고작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이 전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저 선한 남자가 이한솔을 향해 날 선 칼을 집어 들 수 있었을 리 없었다.
실패했다!
자신들을 위해 너무나 많은 걸 걸고, 또 포기한 저 페어를 지키는 데 실패하고 만 거다. 센터장은 조금은 꽉 막힌 채로 터지려던 숨을 눌러 참았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다.
선생의 말대로, 최태훈을 지켜야 한다. 그리고 저 에스퍼가 바랐던 대로. 권다희는 페어와 선생을 둔 채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인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따랐다. 물론 그건 이전처럼 선생의 말에 겁에 질린 채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센터장의 입에서 갈라진 것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선생을 거친 가이드 중 남아 있는 건 최태훈 씨뿐인가요.”
“……네.”
코를 훌쩍이며 대답하는 주인공은 이미현이었다. 미현은 시뻘겋게 변한 얼굴로 분해 죽겠다는 듯 두 눈 가득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한 페어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순수한 슬픔을 드러내고 있는 그녀는, 어떻게 보면 센터의 그 누구보다 지관영과 사이가 나빴던 사람이다. 지관영, 그의 거만함에 치를 떨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주 충돌했던 만큼 지관영이 기꺼이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최태훈을 지키는 것을 선택한 것에 크게 동요했다.
지킨다는 것은, 때로는 단순히 그 일신의 안위를 보호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되고는 한다. 지관영이 택한 건 누군가를 해하고는 살 수 없는 연인의 남은 시간이다.
그때였다.
“……세, 센터장 님!”
잔뜩 기름때 묻은 옷을 입고 뛰어오는 이들은 지능계 연구원 몇과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들은 식은땀인지 뭔지 모를 것에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였다.
“빨리 와 보셔야겠습니다. 오연 연구원님께서……!”
선생은 실험이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센터를 빠져나간 적 없다. 정확히 그는 줄곧 지하에 처박혀 있었다. 선생이 그 어두운 공간을 비운 순간은, 지난 지관영-최태훈 페어의 ‘중간 점검’이 유일했다. 그렇기에 이제껏 계속 의심스러운 눈으로 선생의 주변을 살피면서도 그곳만은 가까이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센터장과 연구원 몇은 그 어두운 지하로 향하고 있다. 권다희는 왠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주먹을 꽉 쥐었다.
땀에 전 엔지니어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지하에서 호출이 왔을 때는 뭔가 오류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선생은 중앙홀에 있지 않습니까?”
지하로 가까워질수록 묘하게 공기가 탁해졌다. 그걸 느낀 연구원 몇은 옅게 헛기침했다. 긴장한 얼굴을 한 연구원들의 발이 급한 걸음으로 앞장서는 엔지니어의 뒤를 바짝 쫓았다.
얼마나 그렇게 내려왔을까. 지하의 가장 깊숙한 곳, 코어 엔진과 바짝 붙은 최하층에 다다르자 그곳에서 전해지는 열기에 저절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에스퍼 몇이 조금은 초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연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권다희였다. 그녀는 거대한 엔진 앞에서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뒷모습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오연은 센터장을 발견하고 작게 묵례했다.
“오셨습니까.”
“오 연구원, 이게 다 뭐죠?”
“가이드의 생체 정보를 찾아냈습니다.”
엔진 가까이 다가가자 마치 뜨거운 불구덩이에 머리를 밀어 넣은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이제 보니, 오연 그의 셔츠도 완전히 땀으로 젖어 달라붙은 지 오래였다.
“선생이 ‘가이드’로 판독되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계를 조작해서 내놓은 결과가 아닌가 의심했지만, 지하를 제외한 센터 전체를 스캐닝하고도 끝내 그 방법을 찾지 못했던 술수다. 오연은 눈을 따갑게 하는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고는 빠르게 타자를 이어 쳤다.
“네. 하지만 그게 지금 상황과 무슨 연관이…….”
이어지던 센터장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오연이 모니터 위에 떠오르게 한 정보 때문이었다. 그 뒤에 있던 다른 지능계 연구원 역시 자신들의 시야에 담긴 데이터를 급히 훑었다.
“이게 대체 뭐죠?”
“센터 기계가 선생을 가이드로 인식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선생의 생체 정보도 스캔되어 저장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건, 선생의 것이고요.”
이제껏 센터 사람들은 선생이 김권석을 이용해 수집한 가이드의 생체 정보 저장소를 찾기 위해 헤맸었다. 센터장은 자신의 눈에 들어온 선생의 생체 정보를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가이드라고 하기에는, 거의 지능계 에스퍼 정도로 신체가 발달했군요.”
“예. 하지만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시력과 청력만 봐도, 비슷한 연령대의 미들 수준에, 두뇌 활성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약물을 이용한 흔적도 있습니다. 저 약물 때문에 정신계 에스퍼를 스캔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센터장의 눈썹이 조금은 의아한 듯 꿈틀했다. ‘약물’? 그녀가 아는 완전무결한 에스퍼인 선생은 그런 것 따위 필요 없던 사람이다.
“게다가…… 여길 보십시오.”
오연이 연이어 보여준 것에 센터장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오연 그가 띄운 것은, 일종의 마인드맵과 같은 ‘기억’들이었다. 센터장은 겨우 몇 초 만에 그것이 선생의 3년임을 알아보았다. 거기에는 지금의 실험에 대한 분석들도 함께 있었다.
지관영의 잔인성에 대한 평가와 최태훈의 가이드적 가치에 대한 부분까지 시선이 닿았을 땐, 약간 헛웃음마저 나왔다.
“정말이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 사람이군요.”
“이상하지 않습니까?”
“네?”
나직하게 떨어진 목소리였다. 센터장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오연의 얼굴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걸려있었다. 그건 정말로 조금은 재미있다는 투여서, 지금의 상황에도, 오연 그에게도 어울리지 않았다.
“센터장님은 이런 걸 작성해 보신 적 있으십니까.”
“…….”
“저는 에스퍼로 발현한 뒤로 단 한 번도 기억을 위해 이런 일지를 작성해 본 적 없습니다. 보고서도 아니고, 잊지 않기 위해서 쓰는 건 더욱요.”
당연한 말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무슨 수를 써도 알게 된 모든 것들이 옅어지지 않는 것이 지능계 에스퍼, 그들이었다. 권다희는 방금 제가 본 것들을 다시 되짚으며 천천히 입을 뗐다.
“눈속임이 아니라…… 정말로 에스퍼가 아니다?”
“굉장히 발달하기는 했지만, 저 몸의 뿌리가 가이드였다는 건 확실합니다.”
오연은 생각에 잠긴 듯한 센터장을 보며 말을 이었다.
“가이드의 데이터와 전국망으로 연결된 센터의 서버. 그리고 특정 신호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확장 기계. 선생은 이 세 가지를 이용하기 위해 가이드가 된 채로 돌아왔습니다.”
“…….”
“이미 센터는 가이드의 위치와 생각까지 스캔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 거기에 지도처럼 그려진 생체 정보까지 있다면.”
한번 말을 끊고 느리게 입을 여는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전국 어디든 센터의 영향권인 상태에서 타깃이 된 가이드만이 들을 수 있는 독특한 음파를 만드는 게 가능해집니다.”
“……기존에 심어 놓은 암시를, 확장된 음파 신호를 써서 실행시켰다.”
“그렇습니다.”
센터장 권다희는 저 자신이 중얼거린 결론에 저도 모르게 짜증 섞인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녀가 수장으로 있는 이 공간이 선생에게는 그저 몇십 년 간 그의 입맛대로 잘 만들어 둔 도구에 불과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지하는 선생이 이한솔을 비롯해 다른 실험체를 만들고 또 그들을 누구보다 잔인하게 대했던 공간이다.
센터장은 잠시 오랜 과거의 그늘진 기억이 파도처럼 덮쳐오는 것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더는 그것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권다희에게 공포가 되지 못한다.
선생은 전능하지 않다.
너무나 당연했지만 이제껏 넘어설 수 없었던 가정이 깨졌다. 그건 센터의 연구원들에게 큰 의미였다. 가이드의 생체 정보가 저장된 이 거대한 기계는 수많은 선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연결되어 있다. 수백이 훌쩍 넘어가는 숫자의 그것들은 마치 사람의 혈관처럼도 보였다.
“오 연구원.”
“예.”
“저 기계가 선생을 ‘가이드’로 인식하고 있고…… 더 이상 ‘측정 불가’의 힘을 가진 에스퍼도 아니라면 말예요.”
센터장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는 지하의 엔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완전히 땀에 젖은 채였지만, 전혀 지쳐 보이지 않았다.
“수없이 암시를 걸면서 그것에 완전히 노출됐을 선생 역시 저 음파의 대상이 될 수 있지 않나요?”
기다렸던 지시였다. 오연은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그렇습니다.”
“필요한 시간은요?”
“거의 다 끝났습니다. 30분 정도만 더 벌어 주시면 됩니다. 단, 그 전에…… 선생의 것을 제외한 다른 가이드의 모든 생체 정보를 파괴해야 합니다.”
오연의 말에 엔지니어들의 표정이 일렁였다. 그들이 쩔쩔매는 얼굴로 센터장을 찾아갔던 이유와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오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데이터와 바로 연결된 기폭 장치입니다. 센터 전체와 이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거듭 살피고 시도했습니다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녀의 눈이 조금은 놀라 커진 채로 오연이 가리킨 쪽을 향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제 안색을 살피는 엔지니어 뒤편으로 지문과 홍채를 인식하는 스캐너가 보였다.
권다희는 오연이나 엔지니어의 설명 없이도 저것의 의미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센터 최고 보안의 스캐너를 작동시켜 기폭 장치를 가동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다.
센터장 권다희는 깨달았다.
이건 조롱 섞인 경고다.
몇십 년간 제가 만든 토양과 나무에서 달콤한 과육을 훔쳐 먹던 이들을 향해, 이곳의 절대자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지독히도 친절한 푯말이기도 하다.
이제껏 단 한 번 미끄러진 적 없이 센터에 승승장구하고 올라와 지금의 자리까지 앉은 에스퍼. 오랜 시스템 안에서 충성스럽게 길들은 터라, 비밀스럽고 또 비뚤어진 사찰도 적당히 수긍하고 또 가끔은 형식적인 거절을 내걸었던 중도주의자.
그렇기에 선생은 권다희 그녀가 절대로 스스로 이름 앞에서 센터의 60년 역사가 불길 속으로 들어가게 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다.
그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한껏 모욕당한 그녀의 이마에 시퍼런 힘줄이 돋았으니까.
센터장은 여전히 저를 20여 년 전의 그때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는 선생이 이죽거림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아 이를 갈았다.
공포는 똑바로 직시했을 때 작아진다.
지능계 에스퍼임에도, 그것을 이제야 깨달은 권다희였다.
“……어디서 ‘신입’이래?”
“센터장님?”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말을 건너들은 연구원 하나가 살벌한 얼굴을 한 그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확실히 권다희는 한 달 전만 해도 선생이 계획하고 생각한 모든 것에서 한 치의 오차 없이 벗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센터장은 살짝 흘러내린 제 머리를 풀어 다시 묶으며 입을 열었다.
“이 기폭 장치는 어디부터 시작하죠?”
“센터 상층 중앙 연구실부터 폭발, 한 시간 내에 센터 전체로 붕괴가 번질 것으로 보입니다.”
“최태훈 씨의 안전은?”
“폭발과 동시에 확보됩니다. 국외에 있는 가이드 역시 마찬가집니다.”
오연은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들 전체의 자긍심이었던 공간의 붕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모습에 조금은 당황한 얼굴이 된 건 엔지니어들 쪽이었다. 사실은 조금은 더 놀라고 또 절망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퍼 연구원들은 그 섣부른 생각보다 훨씬 더 침착한 반응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한 달간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건 최악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동안 뼈아프게 몇 번이고 새겨 깨달은 사실도 있다.
“저어. 센터장님. 정말로……!”
이 모든 것은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던 것이다. 선생이 계획하고, 만들고, 또 무성히 자라나게 한 센터의 풍족함은 이미 충분할 만큼 누렸다.
센터장은 제 손바닥 지문을 찍으며 조금은 뻑뻑한 눈을 가볍게 꾹꾹 눌렀다. 요 며칠 그녀는 정말이지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내지르고 있다.
이건 어릴 적부터 지독히도 꼼꼼한 성격이던 그녀가 에스퍼로 발현한 뒤로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권다희 그녀는 언제나 영리한 두뇌로 자신의 미래를 점치고 가장 훌륭하다 보이는 길만을 골라 왔다.
그건 언제나 지당하고 또 옳은 삶이었다.
머리 한구석을 좀먹은 기억은 풍족하고 명예로운 직함 앞에서 적당히 뭉개져 흐려졌었다. 센터의 높다란 곳에서 눈을 감기만 하면 그 모든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선 선생이 그 어떤 가설로도 그려낼 수 없었던 몹시도 심각한 오류가 발생했다. 그건 소위 측정 불가라고 불리며 센터의 모든 연구원을 농락한 그가 차마 떠올리지 못한 변수였다.
센터장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탄원서 정도로는 날 구하긴 힘들 것 같네요.”
한 달 전, 그 누구보다 행복했던 페어가 너무나 일방적이고 또 가혹했던 실험에 그들 자신을 걸어야 했다면 이번에는 그걸 반대로 갚아 줄 차례다. 이건 그 누구의 명령도 뜻도 아니다.
이 비뚤어진 토양 위에 뿌리를 내린 기구의 책임권자인 권다희 그녀 자신의 의지고, 결정일 뿐이다.
거침없이 스캐너에 제 얼굴을 가까이하는 센터장을 보며 연구원 몇이 급하게 발을 옮겼다.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챙기고 또 기억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드높은 곳에서 건조한 눈으로 제 피조물을 내려다보는 절대자 따위가 결코 알 수 없는 작은 움직임이 시작됐다.
* * *
침착하자. 침착해야 한다, 최태훈.
태훈은 자신에게 속삭이며 고집스레 정면만 노려보았다.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연인이 똑바로 눈에 들어오기라도 한다면, 이렇게 애써 다독이는 보람 없이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아서였다.
가라앉은 목소리를 한 오진우는 선한 디스마스가 알지 못했던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휴대폰 너머 한숨을 삼키던 센터장도, 마지막까지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 같았던 이한솔도, 그리고…… 몇 번이나 의미 모를 다정한 눈으로 그를 살폈던 연인도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모두 다.
“이한솔 씨는 어떻게 됐습니까.”
짐짓 예의 바른 껍질을 뒤집어쓴 중년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참 감정을 다스리려 애쓰던 것이 무색하게, 마치 실험용 쥐의 생사를 묻는 듯 평이한 물음에 마음 한구석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죽었나 봅니다. 그렇지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태훈의 눈가가 다시 천천히 새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관영은 그런 제 가이드를 아무런 말없이 눈에 담았다.
그는 직감적으로 제 연인이 모든 것을 알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저런 표정을 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죄책감에 허덕이고 또 후회하도록 두고 싶지 않아서 모든 것을 그가 끌어안으려고 했다.
최태훈의 사랑은 돌이킬 수 없는 순간 곁에 함께 서서 후회하고 또 힘들어해주는 것이라면, 에스퍼 지관영 그의 방법은 자신이 서 있는 황폐한 땅의 그을음이 연인의 고운 발치에 닿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그 방식에 무엇이 더 옳고 그름은 같은 건 없다.
에스퍼는 눈물을 꾹 참기 위해 허공을 한 번 바라보는 최태훈의 흑갈색 눈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저 한껏 약해진 가이드는 이 순간마저 저를 위해 강해지려고 한다.
지관영의 그런 짐작은 정확했다.
지금 최태훈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자신을 붙잡아 버티고 선 이유는 단 하나다. 제 연인과 함께할 순간을 단 하루라도, 아니 찰나라도 더 벌기 위해서다. 그걸 위해서는 약해져서는 안 됐다.
즐거워 죽겠다는 듯 빠르게 숨을 삼키며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단 셋만 남은 중앙홀을 가득 채웠다. 태훈은 그 웃음소리에 다시 한 번 무너질 뻔한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가이드의 입에서 조금은 쉬고 경직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 말대로입니다.”
“…….”
“이한솔 씨가…… 죽었습니다.”
찢어질 듯 올라간 교만한 입꼬리가 보였다. 최태훈은 그 기쁜 듯한 표정에 미간을 찡그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써야 했다.
“지관영 씨라도 살릴 방법이…… 있습니까?”
연인이 눈에 들어오면 꼭 울 것만 같아서 고집스레 관영의 시선을 피했던 태훈이었다. 하지만 태훈은 그 물음과 동시에 저도 모르게 제 에스퍼를 바라보고 말았다. 손목에 주렁주렁 매달린 육중한 쇳덩이들도 함께다.
지관영은 최태훈과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덕분에 겨우 눈물을 참던 태훈은 제 두 손으로 잠시 얼굴을 가려 버렸다. 달짝지근한 광경을 조금은 지루한 눈으로 보던 선생의 입이 열렸다.
“뭐, 이건 저라도 별다른 수가 없군요. 매칭률이 아예 사라져 버린 거잖습니까? ……게다가 좀 의외군요.”
태훈은 제 눈가를 거칠게 쓸어서 운 흔적을 지우고는 고개를 들어 선생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속이 메스꺼웠다.
“지관영 저자는 이제 시한폭탄이나 마찬가집니다. 반드시 미쳐 죽을 수밖에 없어요. 군 에스퍼의 폭주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게 저쪽일 텐데요?”
선생의 말에 홀 구석에서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키던 군 관계자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변했다가, 이윽고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은 지관영의 힘을 아주 조금이나마 엿봤다.
그런데 그런 에스퍼가 폭주한다고? 놀란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에서는 공포가 뚝뚝 떨어져 나왔다. 선생은 그걸 보고 낄낄대며 말을 이었다.
“지금 최태훈 씨가 걱정해야 할 건 에스퍼 지관영이 아니라, 다른 것들 아니겠습니까. 폭주한 지관영을 막다가 죽거나 다칠 센터 연구원이나…… 그래, 소중한 가족이요.”
최태훈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제 연인이 저 무거운 족쇄를 풀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잘 안다. 보자마자 눈치챘다. 혹시 모를 상황에서 그 자신을 막아 구속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실 선생의 말에 틀린 건 없다. 매칭 가이드가 없는 이상 간신히 버텨 왔던 지관영은 며칠, 길어야 일주일 내로 폭주하고 말 거다.
‘측정 불가 에스퍼’의 폭주.
그게 얼마나 큰 비극을 불러올지 상상도 어렵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지관영 저 사람과 하고 싶은 게 많았다. 최태훈은 저를 향해 히죽대는 선생을 보다가 꽉 다문 잇새로 입을 열었다.
“‘실험 대상은 언제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셨죠.”
사실 큰 기대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첫 번째로는 언제나 유유자적한 미소가 걸려있는 주름진 눈가가 싫어서였고, 두 번째로는 이한솔이 마지막에 숨을 헐떡이면서까지 고집스레 말을 이어갔던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어 떠올린 문장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가이드가 있습니까, 선생?”
지관영은 떨리는 목소리를 한 채로도 선생을 똑바로 노려보는 제 가이드 최태훈을 보며 조금은 감탄했다. 물론, 태훈의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선생의 얼굴에 보란 듯이 걸려있던 호선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도 빠짐없이 눈치챘다.
‘아버지는 어떤 가이드의 에스퍼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에스퍼를 다 싫어한다’. 이한솔의 이 말들은 다시 뒤집어 보자면, 단 하나의 의미로 귀결된다.
최태훈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페어가 되고 싶었던 가이드라던가…… 말입니다.”
선생의 미간이 작게 경련하듯 꿈틀거렸다.
얼핏 봐서는 너무나 유한 인상인 얼굴이건만, 모든 감정을 도려낸 것 같은 표정을 한 채 눈썹만을 일그러트린 모습에서는 조금의 인간적인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최태훈이 선생에게서 이끌어낸 첫 균열이었다.
“하. 하하하. 하, 하하하!”
끊어질 것 같은 발작 같은 웃음이 터졌다. 그건 앞서 선생이 조롱하듯 쏟아 냈던 낄낄대는 소리와는 좀 다르다.
“아주,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는…… 쓸데없는 소리. 그 실패작이 별것을 다 떠벌렸군요, 하하, 네에,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요. 이건?”
선생은 벌겋게 변한 목을 쓸면서 미친 듯이 키득거렸다. 그건 일종의 광증으로도 보였다. 군 관계자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선생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선생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모습에서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태훈은 처음으로 제가 붙잡은 선생의 빈틈을 움켜쥐듯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실패작’이라니!
가이드는 선생의 입에서 나온 그 무신경한 단어에 순수하게 분노했다. 에스퍼로 태어나 가이드로 살면서 무엇이 옳은지, 또 그른지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이한솔이다. 죄를 지었지만 모든 잘못을 그에게 묻는 건 너무나 가혹했고, 살며 단 한 번도 그 죄를 누군가에게 고할 기회조차 없었다.
만약 이한솔을 죽여 매칭률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 불쌍한 사람을 죽일 수 있었을까. 최태훈은 머리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할 수 없었다.
마지막 순간 저를 찾아와 기댄 이한솔도, 끝내 제게 칼자루를 쥐게 하지 않은 연인도 모두 배신하는 것만 같은 죄악감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최태훈은 조금은 지친 눈을 한 채로 입을 열었던 오진우의 말을 떠올렸다.
군 가이드들은 죽지 않았다. 에스퍼의 폭주는 모두 꾸며진 것으로, 선생의 카운슬링을 거친 가이드를 국외로 내보낼 시간을 벌기 위한 일종의 연극이었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도 지금 필요한 건, 센터의 사람들이 남은 선생의 비밀을 파헤쳐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벌어 주는 걸 거다. 지금처럼 선생을 뒤흔들며 저자의 빈틈을 계속해서 찾아내는 게 맞는 선택이다.
그래야만 목숨을 걸고 진실을 알린 이한솔과 지금도 어디에선가 애쓰고 있을 연구원들, 그리고 희생당한 이들의 고통이 헛되지 않게 된다.
‘선량하기 짝이 없는 가이드 최태훈’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음속 저 밑바닥에서는 그와 정반대의 낮은 목소리가 소곤대며 흘러나왔다. 그건 지금 필사적으로 감춰 숨기고 있는 최태훈 그 자신의 절망과 분노였다.
기뻐해야 했다.
수백의 사람들이 살아남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저만 연인을 잃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게 억울했다. 화가 났다. 슬펐다. 괴로웠다. 지금 당장에라도 엉엉 울며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에게 따지고 싶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나면, 곧바로 질식할 듯한 죄책감이 밀려들어왔다. 연구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한 달 동안 얼마나 매달려 왔는지 잘 안다. 수많은 사람이 이 빌어먹을 ‘실험’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졌다. 그건 분명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지관영 씨는 어떡하지?
최태훈은 제 자신이 떠올린 이름에 순간 목이 멨다.
아니,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돼? 난 이제 가이드도 뭐도 아닌데. 관영 씨가 천천히 미쳐 가는 걸 어떻게 지켜보라는 거지?
하지만 최태훈의 그 들끓는 감정이야말로 지관영이 제 가이드에게서 남겨 지켜 주고 싶었던 거였다. 고민하고, 연민하고, 한없이 약해졌다가도 또다시 강해지는 그 작은 마음. 괴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지고 있을 그 따스한 시선은 에스퍼 그가 기꺼이 제 목숨을 내걸 수 있었던 귀하고 소중한 가치다.
최태훈은 아직 그걸 모른다.
“……태훈아.”
나직한 목소리였다. 그것에 가방을 뒤적이던 선생의 손도, 불안하게 떨리던 최태훈의 어깨도, 주춤대며 한 발짝씩 뒤로 향하던 군 장성들의 움직임도 동시에 뚝 멈췄다.
지관영은 제 연인이 있는 쪽을 향해 정확하게 고개를 튼 채다. 그건 평소의 꼿꼿한 모습과 별다를 바 없이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마치 물 안에서 눈을 뜬 것처럼 시야가 흐렸다.
연인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저 쓸데없는 말 다 듣고 있을 필요 없어. 센터장이나, 그래. 오진우 있는 쪽에 가 있어.”
“…….”
“걱정하지 마. 저건, 너한테 손 못 대니까.”
확신에 찬 말이었다. 그 말에 선생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직 최태훈은 선생의 ‘카운슬링’ 범위 안에 있다. 그럼에도 지관영은 선생이 최태훈에게 죽음을 명령할 수 없으리라 확언하고 있었다. 선생은 저 오만한 에스퍼의 자신감이 거슬렸다. 분명 부드러운 인상이건만, 무표정한 얼굴을 할 때면 그 속내를 파악할 수 없어지는 사내의 얼굴이 기괴할 정도로 비스듬히 꺾였다.
지관영은 흐릿한 시야로도 저를 향해 꽂히는 그 살의 가득한 기운을 짚어 냈다. 에스퍼의 입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지금 한 가지 미끼를 막 던진 참이다.
“‘가장 이상적인 가이드’를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선생은 거의 천 명에 가까운 가이드의 목숨이 제 손을 빠져나갔다는 사실보다, 최태훈 한 명의 부재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게 뜻하는 바는 하나다.
지관영의 약점이 최태훈이듯, 선생의 약점도 최태훈이다.
게다가 에스퍼 그는 제 연인을 위한 힌트 하나도 넌지시 흘렸다. 하지만 선생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지금 두뇌’는 이전처럼 사소한 모든 것까지 다 새겨 기억하지 못하는 탓이다.
한편, 최태훈은 연인의 말에 울컥한 얼굴이 되어 목구멍까지 올라온 문장을 삼켰다.
‘……제가 살면, 지관영 씨는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제게 끝까지 이한솔을 해치라는 말을 하지 않은 페어를 향해, 그런 뻔한 답이 나와 있는 질문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태훈은 중앙홀을 빠져나가는 것 대신 고집스레 제 연인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택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지관영은 천천히 가까워지는 제 가이드의 흐릿한 인영에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그걸 지켜보는 선생의 입에서 혼잣말 같은 물음이 흘러나왔다.
“모든 ‘힘’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조심스럽게 걸어가던 최태훈의 발이 우뚝 멈춰 섰다.
태훈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선생을 보며 긴장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저 서늘하다 못해 기이한 눈만 보자면, 당장에라도 목 뒤에 칼을 꽂아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로 여깁니다.”
선생의 손이 제 관자놀이를 검지 끝으로 툭, 쳤다. 태훈은 긴장한 얼굴로 그 서늘한 시선을 견뎌 냈다.
“이곳에서 온갖 화학반응이 극대화된 다음, 온 세포와 혈관으로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그게 계속되면 어느 순간 완전히 발달한 육체를 가지게 되는 거고요.”
“…….”
“뭐. 확실히 애초에 그걸 타고난 에스퍼는 운이 좋은 것이죠. 난 이 거추장스러운 몸을 꽤 쓸 만하게 만드는 데 7년이나 걸렸거든요.”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태훈은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된 채 미간을 희미하게 찌푸렸다. 하지만 그 연인인 에스퍼 쪽은 달랐다. 그는 선생이 말한 문장의 이면을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모든 방향으로 그려보았다.
‘거추장스러운 몸을 쓸 만하게 만드는 데 7년’.
선생의 문장은 기묘한 거리감을 품고 있다. 게다가, 선생은 제가 슬쩍 던졌던 힌트에 반응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는 그것이 승기를 쥔 자의 여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혹을 떠올린 지관영의 눈썹이 살짝 치켜떠졌다. 하지만 선생은 그런 에스퍼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최태훈이 끄집어내 건드린 그 자신의 오래되고 해묵은 이야기에 꽤 빠져든 채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한 가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선생은 오래전 지금 제가 걸치고 있는 얼굴을 가졌던 사내가 말했던 문장을 떠올렸다.
<……날 도와줘요. 그럼 당신의 가이드가 되어 줄 테니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린 듯이 기쁜 문장이었다. ‘그때’는 지켜지지 않았었지만! 선생은 테이블에 느슨하게 기대앉은 채로 안경을 들어 올렸다.
“꽤 낡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조금은 먼 이전의 기억을 꺼내 놓는 듯 약간 흐려진 바리톤의 목소리였다.
“금과 재물을 두른 집안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뭐, 진부하게도 축복받은 인생은 아니었습니다. 하룻밤 장난으로 천출에게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게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어느 날 그 쓸모없는 삶에도 한 가지 가치가 더해집니다. 최태훈 씨 당신과 같은 이유로요.”
최태훈은 누군지도 모를 이의 일생을 들으며 묘한 표정이 된 선생의 눈을 살폈다. 한솔의 말대로라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것만 같은 선생이 이제껏 행한 모든 것의 중심에는 저 가이드가 있다.
‘그 어떤 가이드와도 페어가 될 수 있는 에스퍼’를 만들기 위한 실험! 그것이 선생이 저 가이드의 페어가 되기 위해 이한솔에게, 그리고 얼굴 모를 수많은 이들에게 행했던 거다.
담담한 문장을 듣는 태훈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직도 제 품 안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가던 이한솔의 온기가 생생했다.
“그런데 그 무렵, 가이드가 태어난 집안에서는 한 가지 실험에 투자하고 있었습니다.”
최태훈은 익숙한 단어에 살짝 떨구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뇌에 극도의 자극을 줘서 원하는 형태의 힘을 가진 에스퍼를 발현시킨다는, 꽤 성공 확률이 희박한 실험이었는데요.”
“뭐라고요?”
“하하, 태훈 씨는 에스퍼의 가치에 꽤 무지한 편이었죠.”
짐짓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온화한 웃음이었다. 선생은 홀 구석에서 딱딱하게 얼어붙은 표정을 한 채 잔뜩 목에 힘을 준 군 관계자들을 느긋하게 눈에 담았다.
“저기 저쪽…… 군부대와 센터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결국 에스퍼를 가진 자들끼리의 알력 싸움입니다. 서로 잡은 줄이 다르다고나 할까.”
선생의 말에 군 장성의 입에서 작게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났다. 공포에 질린 눈을 한 채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 제법 흉했다. 차라리 최태훈처럼 그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버티려고 하는 쪽이 훨씬 낫다. 선생은 작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뭐. 그 덜떨어진 머리들이 모여서 하나라도 결과물을 낸 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과물이라니…….”
“요 몇 주 내 뒤를 캔답시고 온갖 궁상을 떨어도 별 소득이 없었을 겁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 이름도, 과거도 알 수 없었던 사내.
어느 날 갑자기 센터로 홀연히 찾아와 명목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다름없던 에스퍼-가이드 센터의 기반을 다지고, 그 위에 완벽에 가까운 도면을 짜 맞춘 천재. 이 거대한 기관의 절대적인 창조주.
그리고 그 마지막 이름은…… ‘성공작’.
선생은, 성공작이었다.
지관영은 그제야 눈앞의 저 사내가 끊임없이 모든 것을 실험과 결과물로 바라보며 사람들을 몰아갔던 이유를 이해했다. 이한솔이 선생이 만든 금제 속에 살 수밖에 없었다면, 선생, 저자는 자신의 바탕이 되는 단어 속에 갇혀 있던 거다.
잠시 얼빠진 얼굴로 선생을 보던 태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허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이 센터 가장 상층, 저 위의 중앙 연구실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을 태훈 씨도 알지요?”
태훈의 시선이 조금은 눈치 보듯 슬쩍 군 관계자들을 향했다.
“……가이드 감찰 말입니까.”
“네에. 나의 성공으로 제법 고무받은 멍청이들이 힘을 모아 만든 겁니다. 뒤늦게 깨달았거든요. 에스퍼를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손에 목줄이 없다는 걸. 정신이 번쩍 든 거지요.”
최태훈은 중앙 연구실의 벽을 마치 별처럼 수놓고 있던 생체 신호를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 선생이 말하는 건, 그 현실감 없는 광경의 시작이었다. 태훈은 이제껏 제 이름 석자 앞에 달린 분류를 그리 중요하게 여겨본 적 없었다.
철이 든 이후로, 태훈은 제가 가이드인 게 좋았다. 별다른 특별한 것 없는 저에게 길 잃은 누군가를 도울 힘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하지만 그건 어떤 자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의미였던 거다.
가이드는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이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채로, 눈짓 몇 번으로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었다.
최태훈은 그 순간 김가하가 떠올랐다.
누구보다 강하다는 에스퍼를 가졌지만, 그와 제대로 된 말 한마디, 숨 한 번 섞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채 말라가다가 결국에는 그 독에 파묻혀 버린 가이드.
지관영의 손목에 무겁게 달린 추가 바닥에 끌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거슬리는 쇳소리는 왠지 모를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심장 박동을 빨리 뛰게 했다.
“그런데……. 아, 그래. 이야기를 풀기 전에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군요.”
짐짓 과장스러운 몸짓이었다.
“지관영. 그쪽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아직 버틸 여유가 있으십니까?”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접힌 눈꼬리는 정말로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사실이었다. 선생은 천천히 달아오르는 제 이야기의 온도에 입이 말랐다. 뻣뻣하게 몸에 힘을 주고 있지만, 저를 바라보는 에스퍼의 시선이 살짝 초점을 잃은 채 흔들리는 것을 확인했을 때의 유쾌함이라니.
태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한 연인을 바라보았다. 에스퍼는 대답 없이 있나 싶더니, 선생이 아닌 최태훈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흘끗 돌린 채 나직하게 말했다.
“‘얼마든지’.”
선생이 자신의 과거로 가득 차 있던 건, 어떻게 보면 정말 다행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에스퍼의 대답에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가, 천천히 눈이 크게 뜨이는 가이드를 눈치채지 못했다.
태훈은 저를 향해 희미하게 눈가를 휘는 연인을 넋 나간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는 지관영이 넌지시 던진 힌트를 눈치챘다.
이건 한 달 전의 평온하기 짝이 없던 때라면 알지 못했을 거다. 그때는 함께했던 한순간, 한순간이 아쉬워서 몇십 번, 몇백 번 돌이켜 떠올려야 할 필요가 없었다. 몰래 숨을 삼키고, 뿌옇게 변하는 시야를 힘을 주어 버티지 않아도 먼저 입을 맞추고 손을 걸어 잡아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남자는 과거의 기억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말을 입에 담았다. ‘가장 이상적인 가이드’라는 표현, 그리고 저 짤막한 대답. 이 모두가 선생에게 실험을 제안받았던 그날의 조각이다.
‘기억이 돌아왔나? 어떻게? 무슨 수로?’
최태훈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면서 황급히 표정을 고쳐 지었다. 선생에게 제 동요가 들켜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선생이 지관영의 손목에 걸린 쇠고랑을 쥐어흔들자 쩔그럭대는 소리가 났다.
“여유가 있다니 다행입니다. 이제껏 쭉 당신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을 자주 상상했었거든.”
“…….”
“재벌 총수의 가엾은 외아들. 단 하룻밤 사이에 고아가 된 불쌍한 어린 꼬마. 몸을 기대고 믿을 만한 친척 하나, 친구 한 명 없던 불행의 상징.”
느슨한 온기와 의아함이 동시에 걸려있던 지관영의 눈에서 그 모든 감정이 확 지워진 건 그때다. 그걸 눈치챈 선생이 입술이 비틀어 올라갔다. 태훈은 급히 선생의 말을 끊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그게 가이드 감찰과 무슨 관련이 있어서요!”
이어지는 대화에 군 관계자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센터에서 불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던 가이드 감찰은 그들에게 금시초문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잘만 하면 눈엣가시였던 센터의 힘을 약화하고 좋은 인재들을 군으로 빼내 올 건수였다.
“관련이 있지요. 아주 깊은 관련이.”
“……똑바로 말해.”
지관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에게 부모님의 화제는 꽤 민감한 주제다. 최태훈의 앞에서야 겨우 흉한 허물을 벗고 한껏 약한 소리를 하며 기대는 게 다다.
세상과 단절된 첫 시작점이자 괴물로 향해 가는 길을 걸어야 했던 그날의 기억은, 지관영 그를 휘청이게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선생은 그것을 정확하게 짚어 냈다.
“가이드 감찰에는 엄청난 돈이 쏟아부어집니다. 전국에 스캔을 위한 기계를 심고, 그것을 비밀리에 유지 보수 하는 것만 해도 천문학적인 투자가 필요하죠.”
선생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에스퍼의 동요를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즐기겠다는 듯 바짝 다가선 그의 눈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돈’. ‘돈’이 있다는 건, 투자자가 필요하다는 얘기겠지요? 일정한 권리를 파는 대가로 말입니다.”
지관영은 순간 제 친척 중 몇이 자신의 몫을 가져간 것을 투자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럴 법도 했다. 그들은 충분할 정도로 역겨운 자들이었다. 겨우 열넷, 아무런 힘도 없던 제 목깃을 움켜쥐고 온갖 서류들을 들이밀던 얼굴에 가득했던 탐욕이 아직도 선한 그였다.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돈 있는 자들이 다 모였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누군들 솔깃하지 않겠습니까. 에스퍼가 권력이 된 지금인데요.”
선생의 목소리에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섞였다.
최태훈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선생의 말을 막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대단한 이유는 없다. 왠지 저 뱀과 같은 자의 입에서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올 것만 같아서였다.
가이드의 그런 불길함은 머잖아 적중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감히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니, 끔찍한 위법이니 뭐니 하면서 반대하며 날뛰는 녀석이 등장합니다.”
“…….”
“아, 그날을 떠올릴 때마다 여기. 그래, 이쪽 부근이 찡하게 아려오지 뭡니까.”
가슴께를 짚으며 쏟아 내는 문장에는 조롱이 가득했다.
“얼마나 거슬리는 일이었겠습니까? 자기네들은 신체 발달 수치가 조금만 높다 싶어도 모조리 잡아와 발현 실험을 했는데. 그 가이드를 감시하는 것도 용납 못 하는…… 크윽!”
유순하게 말을 이어가던 선생의 목이 콱 움켜쥐어졌다. 고개를 비스듬히 튼 채인 에스퍼는, 퍼런 힘줄이 툭 불거져 나올 정도로 힘주어 붙잡아 올렸다. 선생의 입에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컥컥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 목을 완전히 비틀 수 없었다.
“관영 씨!”
놀란 듯한 최태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괴물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아직. 아직이다. 아직 최태훈의 안전이 확실하지 않다. 선생 저자는 오랫동안 함께했을 이한솔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명령했다. 아무리 최태훈에게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모종의 이유가 있다 한들,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도 그러리란 보장이 없다.
그리고…… 아직, 저 말을 다 듣지 못했다.
꽉 다문 잇새로 목 깊은 곳에서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군 장성들은 그 모습에 자신들이 저 에스퍼에게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음을 실감했다.
선생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벌겋게 변한 얼굴로도, 흰자위의 색이 천천히 변해 가는 괴물을 향해 히죽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자영그룹의 총수였던, 큭, 지영훈 회장이라고.”
왠지 숨을 쉴 수가 없어서 꾹 다물었던 입에서 뒤늦게 꽉 막힌 탄식이 흘러나왔다. 최태훈은 벌벌 떨리는 손을 감추며 세게 주먹 쥐었다. 하지만 연인 쪽은 그것에 실패했다.
“들어는, 보셨으려나, 크, 흑, 하하, 모르겠습니다?”
괴물의 손이 떨렸다.
아니, 손뿐만 아니라 언제나 흔들림 없던 어깨도, 팔도, 눈동자도. 모든 것이 흔들렸다. 최태훈은 힘없이 선생을 놓쳐버린 에스퍼를 보며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들 운이 없었다고 하던데.’
‘평소에는 그렇게 헬기 타는 걸 싫어하셨던 분들이, 그날따라 일정이 밀렸다고 먼저 준비시켰다면서.’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하며 차곡차곡 흉하게 일그러진 외피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던, 괴물의 시작이자 거대한 저택에 혼자 남아 웅크리고 잠들어야 했던 시간의 이유가 밝혀졌다.
지관영은 철저히 혼자가 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쇠사슬이 공기를 찢어 가르는 소리가 났다. 육중한 크기의 쇳덩이 따위, 지관영 그에게는 조금의 불편도 끼칠 수 없었다. 에스퍼는 그것을 어렵잖게 증명해 보였다.
목을 조르던 힘에서 벗어나 옅게 콜록이며 숨을 들이마시던 선생은, 순식간에 그 사슬에 사지가 결박됐다. 금방이라도 온몸의 뼈를 부러트릴 듯 죄어오는 힘에 선생은 끅끅대는 숨을 토해냈다.
“크, 흐윽, 무섭게, 왜 이러십니까. 제가…… 큭, 한 일도 아닌데. 큭, 크큭, 안타까운 헬기사고였을…… 뿐이잖습니까? 전 그저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일, 뿐입니다.”
“입 다물어. 정말 찢어버리기 전에.”
지관영은 힘을 써서는 안 된다. 그에게 남은 여유분이 얼마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태훈이다. 하지만 가이드는 제 에스퍼를 적극적으로 말릴 수도 없었다. 목까지 시뻘겋게 변한 채 핏발까지 선 눈으로 선생을 바라보고 있는 연인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가, 아니, 분노라는 가벼운 단어로는 채 다 설명할 수 없는 그 온갖 감정의 소용돌이에 입이 말라서였다.
에스퍼의 능력이라는 게 정재계의 모든 권력이 모이는 지점이라는 말은 어릴 적부터 익히 들었었다. 그 ‘힘’이 있으면 좋기는 하겠다, 하고 가볍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비뚤어진 뒷면이 있을 거라고는 살며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가이드였지만 가이드의 삶을 살지 않았기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 변명일지도 모른다. 그저 관심이 없었던 것뿐이다. 최태훈은 손등 위로 하얗게 뼈가 올라올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선생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후우, 제안을…… 하나, 하죠.”
괴물은 제가 사슬로 올려 처박은 중년 사내를 벌겋게 변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미 시야에 담기는 모든 것들이 제멋대로 일그러지고 분해되기 시작한 지 오래다. 뇌로 들어오는 정보는 자료가 되지 못하고 쪼개져 각자의 단어로 떠돌며 그 고유의 의미를 상실해갔다.
세게 악문 입술에서 타고 올라온 비릿한 맛이 혀를 타고 올라와, 마치 입 안 가득 피를 머금은 것 같은 구토감으로 바뀌었다.
“당신은 어차피 곧, 완전히 의식을…… 잃고, 폭주, 하겠지요?”
최태훈은 선생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명단을 넘기지요.”
“……뭐?”
“당신의, ……후우, 부모님을, 죽인 자들의, 명단 말입니다. 그, 대신, 당신은 날 잡지 않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바닥과 벽의 대리석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끔찍한 소리와 함께 선생을 얽맨 사슬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선생은 긴 한숨을 쉬면서 그걸 풀어 내던졌다.
에스퍼를 가운데로 둔 채로 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두 손으로도 들 수 없을 무거운 쇳덩이들이 마치 종잇장처럼 펄럭이며 서로 긁히는 소리를 냈다. 가볍게 살랑이는 미풍처럼 보이는 움직임은 닿는 그 무엇이든 완전히 찢겨 나갈 날 선 칼을 숨기고 있다.
지관영은 지금 폭주의 시작점에 섰다.
가이드는 그 사실을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은, 지금은 아니었다. 더는 매칭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다.
최태훈은 새하얗게 질린 채로 제 연인의 곁으로 가까이 붙다가 순식간에 뺨과 어깨에 면도칼로 베인 듯한 상처가 났다. 하지만 가이드는 그것에 머뭇거리기는커녕 순간 찌릿하게 찾아오는 고통에 신음을 삼키며 소리쳤다.
“지관영 씨! 관영, 씨! 정신 차리십시오! ……누구 없습니까?! 제발, 지관영!”
애원과도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센터의 사람들에게서는 그 어떤 신호도 없다. 언제나 돌아가며 24시간 센터를 감시하던 CCTV는 꺼진 지 오래다. 지관영은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사람처럼 주먹을 꽉 쥐고 있다. 붉게 변한 얼굴과 꽉 쥔 주먹 위로는 푸른 힘줄이 돋아 있다.
금방이라도 쇠사슬을 끊으려는 듯한 힘과 그것을 잡아 버티는 힘이 서로 대립하는 광경은 정말로 기묘했다. 군 장성들은 그것을 기둥 뒤에서 숨을 죽이고 보다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중앙홀을 빠져나가기 위해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지혈되지 않는 팔을 누르고 있던 가이드의 시선이 선생과 마주쳤다. 번뜩이는 안경알 너머로 곱게 호선으로 휜 눈이 보였다. 본능에 가까운 공포가 밀려왔다.
“보아하니 이한솔 씨가 꽤 많이 떠든 것 같은데. 오진우의 이야기는 들었습니까?”
어느새 태훈과 가까워진 선생의 손이 날카로운 상처가 난 뺨을 살짝 쓸었다. 최태훈은 마치 더러운 게 닿은 것처럼 세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떨리려는 걸 꾹 참으면서다. 선생은 그게 재밌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드디어 그 힘이 극에 달한 자연 발현 에스퍼가 나타났다며 기뻐하던 꼴이 눈에 선합니다. 특히 제일 가관이었던 건 김가하와 처음 만났을 때였죠. 어깨 끝만 닿아도 귀 끝까지 벌개져서 눈도 못 마주쳤답니다. 정작 그 가이드가 자길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여길 만든 건 당신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벽을 긁는 소리가 갈수록 소음을 넘어 머리를 멍하게 할 정도로 심해졌다. 최태훈은 그 소리가 마치 제 연인이 내지르는 울음소리처럼 들려서, 순간 울컥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했다.
“당신이었다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습니까?! 적어도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래.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런 짓을 시키면 안 되는 거지. 그렇죠?”
너무나 순순히 떨어진 정답과도 같은 대답에 가이드의 말문이 막혔다. 선생은 빙글대고 웃으며 흘끗 지관영의 상태를 봤다. 그는 이제껏 수많은 에스퍼를 폭주 상태로 이끌며 이성을 잃은 그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수많은 데이터를 보아왔다.
지관영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원치 않은 이야기까지 하며 저 에스퍼가 가지고 있는 오랜 약점을 잔뜩 휘저은 보람이 있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태훈 씨. 그래서 그 방법을 계속 고민했었고요. 내 목표는 처음부터 그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어떤 가이드와도 매칭되는 에스퍼’.
만약 그게 가능해진다면, 끝없는 ‘힘’의 생살여탈권을 쥐었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받을 가이드는 없어진다. 그건 일순 정말 듣기 좋은 이야기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 그럼 대체 왜! 왜, 아무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 겁니까!”
“언제나 실험엔 약간의 희생은 필요한 법입니다. 게다가 저는 샘플의 소중함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진우나 지관영 같은 희귀한 것들은 함부로 손대지 않았잖습니까?”
팔을 적시는 붉은 얼룩이 점점 커지는데도 선생의 앞에서만큼은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빨리. 빨리. 제발, 빨리.
최태훈은 속으로 간절하게 센터의 사람들을 찾았다. 제 에스퍼가 완전히 이성을 잃기 전에, 그 의식을 차단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매칭률은 그다음의 일이다.
제 연인이 김권석을 잃은 유진영처럼 스스로를 잃고 괴로워하는 걸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미 한계까지 차오른 마음의 무언가가 무너져 버리고 말 거다.
모든 것이 힘들고, 무섭고, 아팠다. 견디고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지관영 그 하나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뿌리가 흔들리고 있었다. 선생은 떨면서도 끝까지 그 시선만은 지관영을 향한 최태훈을 보며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가이드’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배신하지 않는 완전한 가이드.
무엇보다 완벽한 가이드의 조건을 갖춘 최태훈. 선생은 너무도 오래 찾아 헤매고 기다렸던 그것을 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있습니다.”
가이드는 피가 엉겨 붙은 제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건드리는 선생의 행동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저절로 덜덜 떨리는 이를 감추고 싶었다.
선생은 그런 가이드를 달래려는 듯 짐짓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건 어찌 보면 너무나 태평하게까지 보여서, 조각나 무너지기 시작한 홀이 내는 굉음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최태훈 당신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합니까?”
“…….”
“별거 없습니다. 하루하루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다 이곳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따르는 것일 뿐이고, 그 행동이 하나하나 축적된 게 기억입니다. 인간은 기억을 통해 학습하고, 학습한 것을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이 단순한 구조가 다입니다.”
기억.
최태훈은 그 지겨울 만큼 낯익은 단어에 선생을 겨우 바라보며 말을 받았다.
“선생, 당신의 가이드는 분명히 죽었다고…….”
“네에. 좀 더 정확히는 죽였지요. 내 손으로 직접. ‘매칭 가이드’였던 자를요.”
선생은 제 앞에 선 가이드가 자신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눈을 한 것을 눈치채고 작게 혀를 찼다. 그는 관대한 편은 아니었지만, 상담사라고 하는 명함을 달고 있던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던지라 누군가의 의문을 달래 주는 것엔 익숙했다.
“’이 몸’은 나의 페어입니다.”
“대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난 이 머리에 내 기억을 모두 심었습니다. 또 그러면서, 여기에 원래 있던 기억도 함께 가지고 있지요.”
차분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나직하게 내뱉어진 선생의 말에 최태훈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 모든 기계에서 선생은 분명 ‘가이드’였다.
하지만 그 결과와는 달리 이상할 만큼 완전에 가까운 에스퍼의 모습 역시 함께 보였었다. 분명 기계가 짚어 내는 그의 모든 것은 가이드의 영역을 향해 있는데도, 선생은 그들이 알고 있는 측정 불가의 첫 번째 에스퍼만이 할 수 있는 문장을 입에 담았었다.
이제 드디어 그 모든 조각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에스퍼의 모든 능력은 두뇌를 기반으로 한다.’ ‘이 몸을 쓸 만하게 만드는 데 7년이 걸렸다.’, ‘기억을 옮기고, 또 가졌다.’
난해했던 퍼즐 조각이 모두 맞춰진 그림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가이드도, 에스퍼도, 또 인간조차 아닌 <저것>은 의지를 잃은 몸에 기생하는 선생의 기억이다.
그건 결단코 공존이 아니다. 공생조차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몸은 아무리 발달시킨다 한들 그 근본이 가이드인 자라, 노화가 진행될수록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맙니다. 제법 거추장스러운 일이지요.”
“말도 안 됩니다. 어, 어떻게…….”
저 몸의 본래 주인의 모습은 무엇이었을까. 최태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분이 그걸 원하던가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약속을 지키느냐, 아니냐가 중요하지요.”
온화하기 짝이 없는 미소는 옅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선생은 고통스러운 실험의 끝에서 온전해진 채로 눈을 떴을 때를 기억한다. 지금은 제법 세월이 보이는 이 육신에 아직 숫된 기운이 남아 있었던 시절이다.
일종의 각인효과였을지도 모른다.
완성된 시각이, 청각이, 촉각이, 새롭게 구성된 몸 안의 모든 세포가 눈앞의 남자를 주인 삼아 따랐다. 주인.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참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지금의 몸은 한때 선생의 주인이었다.
선생은 제 ‘주인’을 위해서 무엇이든 했다. 낡아빠진 센터의 벌레 같은 이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새로 만들었고, 주인이 바라는 모든 것에 순응했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와 페어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복종하는 개와 주인의 관계가 아닌, 에스퍼와 가이드로. 페어로. 그리고…… 그래, 연인으로.
하지만 선생은 제게 주어진 숫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온몸과 정신이 바라는 상대와 에스퍼의 본능이 갈구하는 상대가 다르다는 건 제법 끔찍한 일이었다. 높은 매칭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주인’은, 바닥을 친 숫자를 확인하자마자 선생의 곁을 훌쩍 떠났다. 선생이 자신의 주인을 볼 수 있는 건 무언가 명령받을 때뿐이었다.
선생은 제 주인의 페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다.
기계가 찍어내는 숫자 놀음 따위가 그리 중요하다면, 완성된 두뇌가 그걸 뛰어넘을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었다. 비뚤어진 결과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한솔은 그 가능성에 다가간 흔적이었다. 아니, 선생은 당시 이게 어쩌면 더 좋은 발명일지도 모른다고 여겼었다.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는 가이드 이한솔이라면 원하지도 않는 페어와의 시간에서 ‘주인’이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선생은 이한솔을 만들어 낸 날 허겁지겁 주인을 찾아갔다. 제법 달콤한 상상을 하면서였다.
‘나를 향해 웃어 주겠지? 그래, 분명히 이번에야말로 나를 선택해 줄 거야. 매칭률 따위 뭐가 중요하겠어!’
하지만 주인의 태도는 상상과는 달랐다.
“최태훈 씨. 당신은 정말 완벽한 가이드임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당신이라면, 절대 에스퍼의 손을 놓지 않지요.”
최태훈은 선생의 손이 제게 닿을 때마다 진저리치듯 그를 피했다. 하지만 선생은 그런 가이드를 더욱 단단히 붙잡고는 조금은 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심지어 매칭률의 숫자 놀음에도 휘둘리지 않고요. 바로 그겁니다! 나는 그걸 원했어요. 당신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완전한 가이딩이 가능하다는 걸 기꺼이 보여줬습니다!”
“그게…… 그쪽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이거, 놓으십시오!”
선생은 저를 바라보는 최태훈의 눈에 가득한 혐오를 읽었다. 그건 꼭 과거 저를 바라보던 ‘주인’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선생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주인’을 찾아갔던 그 날.
그의 곁에는 한 에스퍼가 서 있었다. 이제껏 주인은 꽤 많은 에스퍼를 거쳤었다. 성인이 된 그날부터 기계처럼 몸을 섞으며 생기를 잃어가던 주인을 지켜봐 왔던 선생이다. 선생은 그 창백한 얼굴을 보며 몇 번이고 제가 저 사람을 꽃피우는 순간을 상상했었다.
주인의 약속을 믿었었다. 원하는 대로만 해 주면 자신의 가이드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던 그 달콤한 약속에 매달렸었다. ‘주인’이 낯선 에스퍼의 곁에서 눈을 접어 웃는 것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주인은 저를 떠난 게 아니라 매칭률 때문에 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페어가 되어 주기로 했었으면서!
“중요합니다. 아주,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최태훈 씨, 당신은 나를 떠나면 안 되거든. 매칭률이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태훈의 눈에 공포와 경악이 깃들었다. 선생은 그런 가이드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짐짓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과 지관영 저 에스퍼가 했던 예쁜 호르몬 장난질도, 가이드니, 에스퍼니 하는 것들을 만들고 없애는 것도……. 다 여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다른 건 없어요. 절대.”
‘주인’은 제가 아닌 숫자에 취해 한 줌 애정을 구걸하는 이의 손을 잡았었다.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겠다는 뻔하고 멍청한 사탕발림 하나에 이제껏 그를 위해 뭐든 해 온 자신을 버리고 만 거다.
버림받은 돌연변이가 못할 짓 같은 건 없었다.
선생에게는 이미 그가 만들어 그 몸집을 불려 놓은 센터가 있었고, 과거에는 참 드높아 보였던 ‘주인’은 재벌가의 치부에 불과한 힘없는 가이드였다.
‘주인’을 붙잡아 약에 취하게 한 뒤, 페어 에스퍼라는 자를 찾아가 죽기를 명령했던 날은 나날이 그 기능이 떨어지는 이 두뇌로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다.
만약 스스로 최후를 선택하지 않는다면, 주인을 해치겠다 늘어놓은 허풍에 하얗게 질렸던 사내의 얼굴은 다시 생각해도 우스웠다.
‘주인’이 눈을 뜬 건 그의 페어 에스퍼가 숨을 거둔 창백한 몸뚱이 앞에서였다. 선생은 충성스럽고 또 갸륵했던 저와의 약속을 배반한 주인의 몰락을 무엇 하나 빼먹지 않고 눈에 담았다.
공들인 선물에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에스퍼의 연약한 정신을 붙잡아 주는 가이드가 그 자신을 놓아버리는 순간은 참 묘했다. 멍하게 풀린 눈은 그 무슨 말을 해도 처음 만났던 그 순간처럼 빛나지 않았고, 헛된 약속을 담았던 목소리는 다시 울리지 않았다.
완전히 그 자신을 잃어버린 ‘주인’을 차지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때의 일이다. 선생은 기억을 가진 육신이 망가지기 전에 빠르게 움직였다.
재벌가의 지우고 싶은 사생아라는 위치는 참 여러모로 편리한 거였다. 그림자처럼 살 것을 강요받았었기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찾을 이 하나 없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 하나조차 없어진다.
물론 그것에는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풋내 나는 증오에 찬 가이드 김가하를 살살 부채질하자 <센터가 가진 가장 강한 무기>가 저절로 손에 떨어졌다. <실패작>은 그 과정에서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카드였다.
센터의 추격에서 벗어난 뒤는 더 쉬웠다.
한평생 가이드의 삶을 산 주인의 몸으로 자신의 기억을 옮기는 건, <실패작>을 만들 때보다 몇 배는 더 쉬웠다. 선생은 에스퍼 때와는 달리 둔하게 움직이는 세포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최대한으로 끌어 올리는 데 몇 년을 썼다.
완벽에 가까운 에스퍼의 모든 정보를 가진 채 가이드로 산다는 건, 정말로 부족함 없는 것이었다. 페어와 닿아야지만 해소되던 갈증도, 정보가 넘쳐나서 시야가 휘어 일그러지는 일도 없었다. 선생은 때때로 제 원래의 몸이 썩고 부패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약간의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건 육신의 영역이었다.
에스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머리는, 마치 관성처럼 자신의 페어에 목말라 했다. 그건 일종의 결핍 호소와 비슷했다. 분명 이 몸은 드디어 완전해졌는데도, 계속해서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며 떼를 썼다.
하지만 이제 그건 다 먼 과거의 추억 같은 이야기다.
드디어 그 지긋지긋한 감각에서 졸업할 때에 도달한 거다. 선생은 금이 가 무너지는 벽을 눈으로 훑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저 역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이 몸에 원래 있던 기억이 점점 흐려지고 있거든.”
지관영이 일으킨 바람에 살짝 흠집이 난 제 안경을 벗어 살피던 선생은, 이내 낄낄대고 웃으며 그걸 내던졌다. 언제나 한 겹의 간유리 너머로 비치던 흐릿한 욕망이 순식간에 그 형체를 뚜렷이 했다.
“보아하니 이한솔 씨에게 꽤 애착을 가진 것 같은데, 그게 그렇게나 불쌍하다면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고려해주길 바랍니다. 그게 죽은 건 모두 최태훈 씨 당신 때문이니까.”
“……뭐라고요?”
최태훈은 선생의 말에 처음으로 날을 세워 달려들었다.
“대체 내가, 또 다른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합니까! 대체 왜요! 왭니까?!”
언제나 올곧고 흔들림 없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고 그 감정을 폭발하듯 터트리는 모습은 분명 낯선 것이었지만, 선생은 그게 마음에 들었다.
그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던 이한솔의 앞을 지키더니 결국엔 어설픈 호의의 손길마저 내민 태훈의 아둔한 선량함이야말로 그가 바라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말했잖습니까. 최태훈 당신은 완벽에 가까운 가이드라고요. 심지어 이번에 그걸 훌륭하게 증명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군부대를 거쳐 센터까지, 선생은 정말로 수많은 가이드를 만났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그’의 기억을 담을 만한 가이드는 없었다. 매일이 너무나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사실 처음엔 최태훈 역시 지루하고 따분한 위선 덩어리 중 하나가 아닐까 가늠했었다.
그런데 그때, 지관영이 나타났다.
가장 고급이면서도 가장 저질의 삶을 살아온 괴물과 단 한 번도 누군가의 목숨줄을 쥐어 본 적 없는 약하디약한 사내의 페어는 수많은 이들을 지켜본 선생 그에게도 꽤 흥미로운 조합이었다.
선생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페어를 지켜봤다.
물론 그 관찰은 매일같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저 위에 홀로 서서 느긋한 혐오로 지상을 내려다보던 괴물이 차츰 숨을 쉬는 법을 배우고, 기꺼이 그 고운 발에 진흙을 묻히며 인간 흉내를 내는 것을 보았을 때의 유쾌함이라니!
“난 당신에게 이 몸의 주인이었던 가이드의 기억을 옮겨 심을 겁니다.”
‘주인’의 기억을 담을 완벽한 가이드의 조건을 지닌 그릇.
그게 최태훈이었다.
* * *
쇳덩이가 말 그대로 잘려 쪼개지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그건 지관영의 힘을 간신히 버티던 쇠고랑 하나가 날아가 벽에 처박히며 낸 소리였다. 일렁이는 힘이 제어되지 않았다.
지관영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들끓는 무언가를 억누르다가 문득 멍하게 사고했다.
‘내가 이걸 참고 있는 이유는 뭐지?’
검게 좀먹은 지 오래인 이성은 쉽사리 그 답을 내놓지 못하고 그저 습관처럼 폭주를 억누르려 버둥거렸다.
‘이유는?’, ‘왜?’, ‘갑갑해.’, ‘그냥 놓아버리자.’
정돈되지 않은 단편적인 욕망이 이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의 한쪽 편에 몰려서기 시작했다.
지관영은, 아니 지관영의 이름을 잃은 에스퍼는 명령어를 잃은 기계처럼 느리게 고개를 꺾었다. 모든 정보가 와해하고 조각나 뒹군다. 제대로 된 형태를 갖춘 건 아무것도 없다.
검었다가, 희었다가, 또다시 그 중간 어디쯤의 칙칙한 빛깔이 되었다가. 에스퍼는 제가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 자신이 누구인지도 잊은 채 멍하게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순식간에 홀의 한 편이 거대한 낫에 쓸린 듯 잘려 그어졌다. 최태훈은 그걸 깨닫고 급히 제 에스퍼를 돌아보려고 했지만, 선생은 그런 가이드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미 제법 깊게 베인 상처가 있는 탓에, 태훈의 미간은 저절로 찌푸려지며 앓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최태훈 씨. 최태훈 씨. 당신은, 정말로 누구의 가이드라도 될 수 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마지막 실험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그’의 기억을 전해 받고도 지금처럼 완벽할 수 있을지. 당신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실험을 하는 겁니다. 당신과 제가요.”
마치 뱃고동이 울리듯 뭉개진 소리가 나는 쪽으로 에스퍼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무표정한 얼굴에 처음으로 작은 찌푸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모양을 지니지 않은 시야에 떠오른 기묘한 문양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곧바로 읽을 수는 없었다. 머릿속의 모든 체계가 무너져, 그 안에서 저 단어의 뜻을 찾아 헤매야만 했다.
검붉은 그것은 마치 불이 붙은 것처럼 선명하게 일렁였다.
에스퍼는 그 문양을 빤히 바라보며 제 머릿속의 수많은 자료 중 저것과 일치하는 것을 찾아 대조했다.
‘지관영’.
에스퍼는 가까스로 그 문양을 읽어냈다.
“헛소리하지 말고, 이거…… 놔! 완벽한 가이드, 그게 다 뭔데! 그딴 거 한 번도 바란 적 없습니다, 무엇보다-”
힘겹게 선생을 밀쳐낸 최태훈의 팔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 붉은색은 에스퍼가 볼 수 있는 유일한 색이었다.
‘지관영’, ‘지관영’.
에스퍼는 제가 읽어낸 세 글자의 의미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뜻을 찾아낸 그의 주먹에 힘에 꽉 들어갔다.
“당신 따위의 가이드가 될, 생각 같은 건, 더…… 없어!”
“나야말로 당신의 본질을 본 겁니다! 저 에스퍼처럼 매칭률 따위에 휘둘리지도 않아요. 우린 완벽한 페어가 될 겁니다. 이제 당신이 가이드로 남을 수 있는 건 나뿐입니다.”
최태훈의 에스퍼, 지관영. 그건 제 이름이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최태훈이다. ‘최태훈’이다. 나는 저 사람의 에스퍼이고, 저 사람은 나의 가이드다. 최태훈. 나는 저 이름을 안다. 모든 것을 잊어도, 모든 것을 놓아도 단 하나 남을 유일한 것이 있다면 분명히 저 사람의 온기다.
지관영은 두 손으로 제 시야를 가렸다.
그의 이름은 새카만 암흑 속에서 끊임없이 저 아래로 가라앉던 자신을 깨웠다. 멈추자. 멈춰야 한다. 어떻게든. 이미 붕괴되어 날뛰는 본능과 얼마 남지 않은 의식의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하지만 그렇게 기억의 조각 몇 개를 끄집어내자 들끓는 분노가 다시금 그의 머리를 좀먹기 시작했다. 그를 오랜 시간 불행하게 만든 이들에 대한 격렬한 거부 반응이었다.
최태훈이 있는 지점을 제외한 홀의 전체가 마치 거대한 갈고리로 긁히는 소리가 났다.
“으, 으아악! 악!”
홀을 빠져나가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던 군 관계자들의 입에서 겁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워낙 피를 많이 흘린 터라 잠시 시야가 멍하게 흐려졌던 최태훈의 눈이 부릅떠졌다.
“날 봐요. 응? 난 당신이 그렇게나 걱정하던 우스운 숫자 때문에 당신을 택한 게 아닙니다!”
선생은 최태훈이 지관영의 페어로 있으면서 무엇을 가장 두려워했는지 안다. 최태훈 그가 직접 자신의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 내보였던 탓이다. 선생은 최태훈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다시 한 번 그 약점을 내보이길 기대했다.
하지만 최태훈은 예전의 그 말갛던 내담자가 아니었다.
“……젠장, 놓으라고!”
제대로 서는 것조차 힘겨워했던 몸에서 어떻게 나왔을지 모를 힘이었다. 선생은 저를 거칠게 밀친 뒤 휘몰아치는 바람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발을 딛는 가이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깊은 의문과 약간의 분노가 함께 일렁이고 있다.
“괜찮으십니까?”
“아, 아니…… 우리야, 뭐어. 괜찮네만.”
사방에서 폭발음이 터지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안부 확인이었다. 최태훈은 제 연인이 정신을 잃은 채로 누군가를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긴장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군 장성들은 옷 여기저기가 핏물이 진 채로도 자신들의 안전을 확인하러 온 가이드를 보며 마른 혀를 찼다. 그들은 오랜 시간 자신들의 위치에 젖어 교만해지기는 했지만, 결국에는 군인인 자들이다. 민간인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우선된 사명이었다.
“자네야말로 괜찮은……. 응?”
최태훈을 향해 조심스레 말을 건네던 군 관계자의 말이 천천히 줄어들었다. 그는 어느새 사지를 갈기갈기 찢을 듯이 달려들던 무형의 바람이 묘하게도 자신들이 있는 곳만 비켜나가고 있는 것을 눈치챘다.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든 눈앞에 있는 사내만은 다치게 하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였다.
―콰아앙, 쾅!
잠시나마 귀를 먹먹하게 할 정도의 굉음이 천장 전체를 울렸다. 그건 거슬리는 이명이 남을 정도로 울린 엄청난 소리였다. 태훈은 물론이고 군 관계자들까지 깜짝 놀라 크게 뜨인 눈을 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소리는 지관영이 만든 것이 아님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최태훈 씨! 거기 계십니까?!]
조금은 급한 목소리로 전해진 대규모 음파였다. 그걸 들은 태훈의 눈이 멍하게 변했다가, 이윽고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태훈은 제 목소리가 닿기를 바라며 크게 소리쳤다.
“예, 아직 중앙홀입니다! 여기 다른 분들도 계시고, 또, 관영 씨가…….”
가이드는 절대로 담고 싶지 않았던 단어에 숨을 잠시 참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지관영 씨가, 폭주를 시작했습니다! 지원 부탁드립니다!”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심장 한 편이 쇳물로 꽉 찬 듯 답답해졌다. 들끓는 힘을 자신이 발 디딘 곳만을 정확하게 피해 움직이고 있는 연인의 노력이 보일 때마다 속이 아렸다.
최태훈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식은땀과 핏물이 섞여 눈가가 따끔거렸지만, 연인을 보는 걸 방해하지는 못했다. 그 누구보다 빛났던 사내는 지금 붉게 충혈된 눈과 푸른 힘줄이 여기저기 불거져 나온 괴물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최태훈은 어떻게든 저를 지키려 온 힘을 다해 애쓰고 있는 그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 근사하고 또 아름답게 느껴졌다.
지관영 그는 최태훈에게 괴물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 설령 괴물이어도 상관없었다. 태훈은 쇠사슬 너머로 눈이 마주친 연인에게 울지 않으려 애쓰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선생은 이번에도 제가 아닌 다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에스퍼를 향하는 가이드의 미소를 지켜보며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안경 유리로 가려지지 않은 눈동자 너머로 그 색이 뚜렷한 시기가 일렁거렸다. 언제나 그 무엇보다 이성적인 판단을 우선했던 머리는, 제가 ‘또다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지 오래다.
그 누구보다 완벽한 가이드인 최태훈은 어리석게도 제대로 된 에스퍼 구실을 할 수 없이 망가진 것을 선택했다. 선생은 저 멍청하기 짝이 없는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겨우 숫자 놀음 따위에 무너지는 나약한 에스퍼을, 세상에 다시없을 소중한 것을 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역겨웠다. 최태훈의 선택은 제가 되어야 했다.
그 누구보다 최태훈의 생각을 잘 이해해 주는 것은, 매칭률 따위에 불안해하지 않도록 품어 주는 것은…… 지관영이 아니라 제 쪽이었다. 지관영 저 에스퍼가 최태훈을 지켜봐 온 시간만큼 그도 최태훈의 곁에 있었다. 아니, 오히려 지관영이 모르던 깊은 속내까지도 기꺼이 들어주며 고민을 함께했었다.
그런데도 최태훈은 여전히, 얼마 안 가 완전히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다 죽을 게 분명한 괴물을 향해 웃었다. 이번에도 저를 배신했던 ‘주인’과 마찬가지였다. 옅은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는 선생의 입이 열렸다.
“……지관영.”
괴물의 고개가 제 이름이 들린 곳을 향해 고장 난 태엽 시계처럼 끼익, 하고 비틀려 움직였다. 괴물은 자신의 이름을 안다. 그 이름 하나에 겨우 버티고 서 있던 차였기 때문이다.
“당신 정도 되는 에스퍼라면, 아직 내 말이 들리지요? 자.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겁니까!”
태훈은 저 악의 가득한 혀로 만들어지는 문장이 제 연인에게 닿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일그러진 웃음을 건 중년의 사내는 천천히 열리는 문을 향해 시선을 흘끗 돌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저기 당신을 그렇게 만든 첫 번째 죄인들이 오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초점이 맞지 않던 괴물의 눈이 순간 분명한 의미를 가지고 번뜩였다.
* * *
“센터장님, 예상보다 붕괴 속도가 빠릅니다!”
투시 능력을 가진 연구원 하나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센터장은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고는 긴장 어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신계 에스퍼가 전한 소식 때문이었다.
‘지관영의 폭주가 시작됐다!’
최태훈은 분명 그렇게 전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수많은 연구원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잠시 할 말을 잃고 낮은 탄식만을 흘렸었다.
“오진우 씨는 어디에 있죠?”
“아직 센터 내에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 제법 되었습니다.”
“연락하세요. 우리가 먼저 진입하되, 오진우 씨에게 후방을 맡깁니다.”
센터장 권다희의 지시에 정신계 연구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앙홀로 들어서는 출입구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굳게 닫힌 지 오래다. 이미현을 중심으로 한 전투 특화 에스퍼들은 그 앞에 서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 그들은 ‘측정 불가’의 에스퍼와 맞서기 위해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첫 번째 우선순위는 최태훈과 저 안에 있는 다른 이들의 안전이다.
“눈 까딱하는 사이에 팔다리 하나씩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 쉴드 믿지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요, 다들.”
이미현은 약간 먹먹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지관영과 직접 무력으로 맞선 적 있는 유일한 연구원이다. 미현은 왠지 눈시울이 붉어지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 에스퍼의 앞에서 감상 떨었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
두 번째 목표. 에스퍼, 지관영의 진압! 미현은 그 목표를 머리에 새기려고 애썼다.
“……진입을 시작합니다.”
제각각의 힘을 내건 연구원들이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작은 구호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홀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와 동시에 온갖 종류의 힘이 한 곳으로 향했다. 시야에 목표 대상이 들어올 필요조차 없었다.
연구원들은 두꺼운 특수 소재 문이 열리는 순간 숨을 턱 막히게 하는 무형의 압력에 솜털까지 곤두선 채로 본능적으로 자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최태훈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이미현이었다.
“태훈 씨!”
태훈은 그 잠깐 사이에 완전히 만신창이가 따로 없었다. 말끔했던 뺨에는 크고 작은 생채기가 나 있고, 팔에는 긴 자상마저 나 있었다. 미현은 셔츠가 완전히 붉게 변한 태훈을 황급히 부축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린 가이드가 그제야 휘청이며 기댔다.
“미현, 누나.”
“응. 그래, 잠깐만 정신 붙들어요. ……그쪽들도 짐짝은 되지 말고요!”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는 최태훈만을 위한 것이었다. 뒤에서 눈치 보듯 서 있던 군 관계자들은 제법 사납고 뾰족한 미현의 목소리에 알겠다는 듯 하얗게 질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이었다.
“이미현 연구원!”
“……아, 씨이, 진짜!”
정확히 한 대상만을 향한 공격이었다. 미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욕을 삼키며 제게로 쏟아진 날카로운 쇳바늘을 불길을 내질러 막았다. 하지만 그 공격을 시작한 누군가는, 제가 목표로 삼은 대상을 끝까지 죽이려는 작정인 듯했다.
태훈을 등지고 선 미현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온갖 종류의 공격을 내치면서 이를 악물었다. 다른 연구원들이 그녀가 있는 쪽을 보호하려 하는 것도 소용없었다. 그들은 무형의 힘에 한번 높게 떠올랐다가 바닥으로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이미현은 힘이 부딪히면서 생겨난 희뿌연 안개 너머로 보이는 인영을 눈에 힘을 주고 노려보았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시력을 가졌지만, 이렇게 인위적으로 힘을 통해 만들어진 방해막 너머로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내가 뭐 어쨌다고, 왜 또 나야?!’
미현은 속으로 온갖 욕을 삼켰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지관영을 공격하는 것이 마음 쓰여서 울먹였던 것이 흔적도 없이 쏙 들어갔다.
폭주했다는 저 에스퍼는, 다른 이들은 제쳐 두고 저에게만 살의를 품은 채 공격을 퍼붓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쳐낸 돌덩이가 불길과 부딪혀 귀를 찌르는 파열음을 냈다.
이미현은 그 순간, 뿌옇던 안개 너머로 저를 향해 번뜩이는 무언가의 눈을 분명히 보았다. 그건 그녀가 잘 알고 있던 근사한 사내의 것이 아니었다. 미현이 공격을 막으며 난 찢어질 듯한 소리는, 폭주한 채라 시야가 극도로 왜곡된 괴물에게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행위였다.
미현은 순식간에 저를 덮친 괴물의 손에 부지불식간에 목이 졸리고 사지가 쇳덩이에 결박됐다. 잠시의 여유도 없이 밀려오는 그 둔탁하고 빈틈없는 힘에 이미현은 몸을 허우적댔다.
“미현 누나!”
최태훈의 비명 같은 외침에도 미현은 입을 뗄 수 없었다. 신음조차 나오지 않는 입이 힘없이 벙긋거려졌다. 늘어진 채 벽에 기대있던 가이드는, 언제 다쳤는지 뻣뻣하게 아픈 발을 절뚝이며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제 연인 지관영에게로 향했다.
미현은 벌겋게 변하는 눈으로도 생각했다.
‘……안 돼. 오면 안 돼!’
최태훈은 가이드다. 저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몸은, 많은 에스퍼도 상대하지 못하는 이 괴물의 손짓 하나에 완전히 바스러지고 말 거다.
하지만 가이드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집스럽게 괴물의 등 뒤까지 다가왔다. 이미현은 당장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고통보다 제가 보게 될 비극이 끔찍해서,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잠시 뒤 그녀의 귀에 들려온 건 고통에 찬 비명도, 피부가 찢기는 끔찍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조금은 귀여울 정도로 작은 타격음이 다였다.
“하지 마십시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
“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다들 이렇게…… 도와주러 왔는데. 조금만 더, 더 참으면…… 다른 방법을 찾을지도 모르는데!”
군 고위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장면을 차마 믿지 못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눈을 끔벅였다. 물론 그건 초반 투입 부대가 완전히 제압당한 것을 보고 2차로 진을 꾸려 들어온 다른 연구원들과 센터장 권다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센터의 내로라하는 물리계 연구원들은 모두 제압당하고 쓰러져 있는 와중에, 측정 불가의 폭주 에스퍼를 공격하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아니, 사실 그건 공격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너무 부실했다.
최태훈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쥔 채로 제 이름이 새겨진 단단한 등을 세게 때렸다. 이미 과할 정도로의 피를 흘린 그의 몸짓은 작게 허우적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저기서 옅게 콜록이는 소리가 났다. 괴물의 통제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이들이 연구원들이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거세게 목이 졸렸던 이미현 역시, 어느 순간 느슨하게 힘이 빠진 괴물의 손 덕분에 헐떡이며 급히 심호흡했다. 하지만 뿌옇게 변한 채 여러 잔상을 남기는 시야가 하나로 뚜렷해지는 것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못된 짓, 하지 말고. 제발, 그만, 지관영! 하지…… 말라고!”
주변 연구원들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태훈은 금방이라도 뚝뚝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얼굴로 제 연인을 때렸다.
“관영…… 씨.”
꽉 쥐어진 주먹이 자꾸 풀렸다.
잔뜩 피딱지가 지고 엉망이 된 얼굴을 찡그리며 흐느낌을 애써 눌러 참는 소리가 급했다. 연인에게 투정하듯, 또 조금은 혼내듯 움직이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결국 최태훈은 얼마 가지 않아 연인의 옷깃을 움켜쥔 채로 제 이름이 새겨진 등에 울며 기댔다.
센터장은 순간 뒤를 덮치려던 연구원 하나를 막아섰다. 그녀는 괴물의 이상 증상을 포착했다.
“관영 씨. 지관영 씨. 그러지 마십시오, 제발. 응? 그만 해. 하지 말고, 제발…….”
두서없는 문장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에스퍼 중 그것을 듣지 못한 이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최태훈에게 폭주한 에스퍼를 앞에 둔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의식을 잃은 채 불과 며칠 전까지 함께했던 사람들을 향해 이를 드러낸 페어에 대한 연민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위로 쳐올려졌던 이미현의 몸이 아래로 쭉 미끄러져 떨어졌다. 별안간에 자유로워진 그녀는 똑바로 지탱해 서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덕분에 태훈의 입에서는 서러움이 가득 찬 울음에 숨이 부족해 끅끅 대는 것과, 순식간에 눈높이가 낮아진 이미현을 보며 놀란 눈이 된 것이 더해져 작게 딸꾹거리는 소리가 터졌다.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갸름한 얼굴선을 타고 떨어졌다.
가이드에게 신나게 얻어맞은 괴물의 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최태훈은 저를 바라보는 연인의 얼굴에 멍한 표정이 됐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자, 애써 눌러 참느라 가득 고인 채로 겨우 매달려 있던 남은 눈물이 또 뚝뚝 흘러넘쳤다.
기침 소리가 서서히 멎어 들었다. 괴물의 힘에 억눌려 포박당했던 이들이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고개를 들 수 있었을 때쯤, 그들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한 연인의 눈물을 천천히 손가락으로 그리고 있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탄성 같은 한숨이 터졌다.
최태훈의 입술이 벌벌 떨리며 움직였다.
“지관영 씨?”
반신반의하는 물음이었다. 괴물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붉은 기와 함께 옅은 핏대가 선 이마와 목은 아직 폭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살짝 터진 실핏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괴물의 입이 열리기 기다리는 몇 초간, 센터장 권다희는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다 했다. ‘지관영이 정신을 차린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게 내 착각인가?’, ‘저러다가 곧바로 최태훈 씨를 공격해버리면 어떡하지?’…….
그런 고민은 이미현 역시 마찬가지였던지라, 그녀는 흐리게나마 정신을 차리자마자 곧바로 손에 불꽃을 내걸고 괴물이 최태훈을 덮치기 전에 공격을 쏟아 낼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괴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최태훈은 안다. 지관영은 지금 확실히 저를 보고 있다. 저 새까만 눈동자에 담긴 건 분명히 자신이었다.
관영의 손이 눈물이 방울져 떨어진 턱 선을 그렸다. 태훈은 그 간지러운 움직임에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에스퍼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응.”
평소보다 약간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최태훈은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었다가, 조금은 크게 헐떡였다. 어찌나 급하게 떨어지는 숨이던지, 그건 약간은 애처롭게마저 보였다.
“정말…… 지관영 씨, 맞습니까? 정말로, 진짜?”
연인의 목소리를 음미하듯 곱씹어 삼킨 지관영은 제대로 흐느끼지도, 숨을 쉬지도 못하는 연인을 달래며 그 말에 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토해진 물음이 있었다.
“……어떻게?”
선생이었다. 흐린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살벌할 정도의 안광이 흐르는 선생의 표정에 군 관계자들은 잔뜩 얼어서 평소라면 끔찍하게 싫어했을 센터 연구원들 사이로 허둥지둥 발을 옮겼다.
그들은 오늘 이 시간을 모두 함께한 참관객들이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어떻게? 무슨 수를 썼지?”
선생은 고개를 초조하게 좌우로 삐걱이며 스스로 자문했다. 최대한으로 발달시킨 두뇌이기는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에스퍼의 것이 아닌 이것은, ‘선생’의 기억이 가지고 있는 지적 정보에만 의존하는 터라 완전한 빠른 연산을 내놓지는 못했다.
“최태훈!”
선생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커졌다.
태훈은 마치 저를 혼내는 듯한 그 목소리에 놀라 어깨를 움찔했다. 지금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대체 왜 제 연인의 폭주가 멈췄는지, 어떻게 정신을 차린 건지 가이드 그 자신도 영문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지관영이, 제 에스퍼가 다시 저를 바라보는 눈이 기뻤다. 제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좋았다. 최태훈은 엉겁결에 연인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제게 돌아온 페어를 혹시라도 다시 놓칠까, 본능적인 공포가 싹텄기 때문이다.
선생은 그런 태훈을 보며 실핏줄이 선 눈을 기괴할 정도로 크게 뜬 채로 달려들 듯 질문을 던졌다.
“최태훈, 죽였나?!”
“예?”
“이한솔을, ‘그걸’ 네 손으로 죽였나? 죽인 거야? 네가, 그걸 직접 죽였어?”
변수. 변수. 변수. 변수. 변수!
선생의 머리는 그 단어로 가득 찼다.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닌…….”
“그렇지 않고서야 매칭률을 돌려받을 방법은 없어!”
발달한 중년 사내의 손이 가이드를 향해 거칠게 내뻗어졌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에스퍼의 눈에는 아이의 장난처럼 보일 뿐이었다. 선생의 손은 ‘반드시 제 가이드가 되어야 했던’ 최태훈의 어깨에 닿기도 전에 곧바로 내쳐졌다.
조금은 나른한 눈을 한 지관영이었다.
최태훈은 꿈을 꾸는 것 같은 멍한 눈으로 제 연인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가이드는 연인이 돌아온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선생은 그 눈에 가득한 애정을 엿봤다. 그건, 저는 감히 단 한 번도 꿈꿀 수 없던 조각이었다.
“……하, 하하, 하핫, 하.”
애써 평정을 가장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능계 연구원들은 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F’! 지금, 선생은 완전히 동요하고 있다.
“이것 봐.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선생은 초조한 발걸음으로 폐허가 된 홀의 중앙을 왔다 갔다 하며 말을 이어갔다. 승기가 기운 판을 어떻게든 다시 제 손에 떨어트리려는 발악이었다.
“아직 나한테는 패가 하나 더 남았습니다.”
“…….”
“저 가이드!”
선생의 날 선 시선이 닿은 태훈이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물론, 그것에 불쾌한 듯 지관영의 눈썹이 꿈틀한 것도 함께였다. 선생은 대단한 카드를 꺼내는 노름꾼처럼 낄낄댔다. 그 웃음은 완전히 광인의 그것이었다.
“최태훈을 죽이겠습니다.”
‘주인’의 기억을 옮길 최고의 가이드. 절대 제 에스퍼의 손을 놓지 않고, 숫자 놀음에도 지지 않으며 열렬한 애정을 쏟아붓는 가장 이상적인 페어.
하지만, 그렇기에 최태훈은 절대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그릇이었다. 저 가이드는 무슨 수를 써도 제 에스퍼의 품에 안겨 있을 거다. 선생은 스스로가 깨달은 사실에 당장에라도 사방에 욕을 퍼붓고 싶은 속내를 꾹 누르며 씨근거렸다.
“최태훈을 죽이겠다고! 저 가이드를, 지관영 저자가 보는 앞에서 끔찍하게 죽게 할 겁니다! 하, 하핫, 하하!”
악에 받친 채 터지는 목소리에 그 저주의 대상인 가이드의 어깨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갔다. 지관영은 그런 연인을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태훈은 너무나 익숙하지만 한편으로는 감히 다시 상상하지도 못했던 온기에 놀란 눈을 했다가, 이윽고 그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다시 움켜잡았다.
선생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정말로 ‘죽음’을 선언할 때였다. 저 그릇을 놓치는 건 아깝고 또 아쉽지만, 제가 아닌 다른 페어를 택한 가이드는 예전도, 또 지금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열린 것은 거친 쇳소리 같은 음성이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오연이었다.
그는 물에 빠졌다 나왔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땀에 젖고, 뺨까지 붉게 상기된 채였다. 선생은 그의 낮은 목소리에 담긴 여유가 거슬렸다. 핏대가 선 고개가 삐걱거리며 돌아갔다. 그러자 머잖아 오연의 뒤를 말없이 따르는 이들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선생이 아는 자들이었다.
가라앉은 표정을 한 오진우, 그리고…….
“하하, 핫! 하하! 하, 그래. 저렇게!”
선생의 충혈 된 눈이 오진우의 품 안에서 축 늘어져 있는 청년에게 닿았다. 최태훈은 차마 이한솔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게! 혼자 괴로워하고,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죽게 할 겁니다. 죽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 치다가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도록!”
목청껏 저주하는 모습에 센터장 권다희는 눈 안 가득 노골적인 혐오를 감추지 않고 선생을 노려보았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선생은 다시 제게로 돌아온 승기에 의기양양하게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선생은 제가 발견한 것에 잠시 멈칫했다.
지금 그는 사람들의 시선에 깔린 조소를 읽었다.
하나같이 냉랭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겁에 질리고 두려워하며 제발 저 가이드를 살려 달라 빌어도 모자란 상황에서, 저들은 분명 웃고 있다.
뭔가…… 이상했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눈이 기묘할 정도로 빠르게 상하좌우로 움직이며 정보를 읽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살펴도 센터 연구원들의 얼굴에서는 공포가 보이지 않았다.
왜?
선생은 그 답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다. 이상했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분명 제가 만든 이곳에서 배양하던 소모품들이다. 언제나 자신을 경외하고, 두려워하고, 또 찬미해야만 했다. 저런 눈과 표정을 할 수는 없었다.
그 동요를 읽은 센터장의 입에서 작은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곳은 10분 내로 완전붕괴할 겁니다. 잿더미만 남겠죠.”
“……뭐?”
“들었을 텐데요. 당신이 날 위해 준비한 소리 아니었나요?”
선생은 센터 전체를 울렸던 엄청난 굉음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는 권다희의 말과 자신이 들었던 소리를 서로 이어서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아니, 실제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권다희가 말한 건 그에게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럴 수는 없어.”
“…….”
“‘넌’ 그럴 수 없는데. 권다희, 권다희…… 넌?”
선생의 커다란 계획안에서 센터장 그녀는 절대로 홀로 움직일 수 없는 작은 부품에 불과했다. 권다희는 절대로 자신의 그림을 망칠 수 없는 작은 벌레였다.
커다란 캔버스 위를 자그마한 개미 하나가 색을 묻히고 걸어간다 해서 그 흔적이 남을 리 없다. 그에게 센터장은 딱 그 정도의 위치였다.
자신의 위치와 직위를 내던지기에는 인위적으로 잘 만든 길만 걸어왔던 눈먼 인형이 그녀였다. 물론, 감히 저를 깔보듯 흘기는 눈을 한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이건 아니다. 이건!
지금 이 상황은 수천수만 가지의 가정 중 단 한 번도 그려지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이 공간 안에서 제가 미리 엿볼 수 없는 것 따위가 있을 리 없었다. 이들은 제가 만든 그림 속에서 움직이는 비극적 서사의 일부여야 했다.
하지만 저 작은 병정들은 눈 안 가득 조롱을 품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다. 분명 무언가가 어그러졌다. 그러나 선생은 그 독이 어디에서부터 퍼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다.
오연은 땀에 젖은 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10초면 되겠습니다.”
“……뭐라고?”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다 몸부림치면서……”
오연 그가 이제껏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무더운 지하에 처박혀 있던 이유는 하나다. 단 하나의 데이터만을 남겨 두기 위해서였다. 그건 바로 ‘가이드’인 선생의 생체 정보다.
<암시의 타깃이 된 가이드만 들을 수 있는 음파!>
지금 오연의 얼굴에 걸린 웃음은, 연인인 박승원이 본다면 퍽 좋아할 것이 분명할 정도로 또렷했다. 그는 선생이 최태훈을 향해 걸었다고 확신한 암시를 천천히 ‘실행시켰다’.
“죽는다.”
선생은 제 말을 곱씹는 저음에 잠시 의아한 표정을 했다가, 천천히 눈을 크게 부릅떴다. 주름진 눈꺼풀이 부들거리고 사지가 경련하듯 옅게 진동했다. 선생은 마치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빠른 속도로 제 머릿속을 잠식하기 시작한 공포를 밀어내려는 듯 떨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야?”
성공을 확인한 오연의 입에서 정말 그답지 않은 옅은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윽고 선생의 무릎이 툭, 구부려졌다. 자신이 만든 정원에 웅크린 신의 모습은 초라하고 역겹기 짝이 없었다.
‘암시’도, 그것의 ‘실행’도 성공했다.
오연은 무릎 꿇은 선생을 지나쳐 제 동료들이 있는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최태훈의 눈이 공포와 의아함을 함께 담은 채로 선생을 향했다.
그걸 깨달은 지관영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끝났습니까?”
한 글자, 한 글자 귀에 박히는 완벽한 발음으로 흘러나온 목소리였다. 완전히 녹초가 된 오연을 격려하던 권다희는, 그제야 여전히 믿기지 않는 다는 듯 되물었다.
“지관영…… 씨?”
“밖에 구급 대원들은 있습니까?”
“네? 네에. 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빨리 정리합시다.”
이 거대한 중앙홀을 완전히 난도질해 둔 사내는, 마치 언제 폭주했었냐는 듯 태연하기 짝이 없는 태도를 보였다. 그 덕분에 긴장을 놓지 않고 빳빳하게 힘을 주고 있던 센터장 권다희의 몸에서 힘이 쭉 풀렸다.
사내는, 아니 지관영은 완전히 감각이 돌아오지 않은 목을 가볍게 좌우로 꺾으면서도 제가 당겨 안은 사내만은 힘주어 지탱했다.
“태훈아.”
“……예, 예에?”
“먼저 나가 있어. 위험하니까.”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한 붕괴음에 빠르게 움직이던 연구원들의 발이 멈칫했다. 아직도 꿈인지 생신지, 제게 돌아온 행복을 자각하지 못하던 최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이드는 제가 들었던 말을 곱씹더니 뒤늦게 그걸 이해하고 쉰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로 듣기 힘든 최태훈의 고함이었다.
“싫습니다!”
“5분 안에 나갈게.”
아직도 곁에 서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 연인을 위험천만한 곳에 두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최태훈은 수많은 이들이 보는 눈앞에서 지관영을 꽉 끌어안아 그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정말로 꿈일까 무서웠다.
이 온기가, 나직한 목소리가, 옅은 웃음기 섞인 한숨이. 모두 사라져 버릴까 두렵기만 했다. 지관영은 덜덜 떨리기까지 하는 팔로 저를 세게 붙잡는 태훈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연인에게 트라우마를 하나 더 안긴 것 같아서였기 때문이다.
에스퍼는 가이드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3분 안에 나갈게.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부모님 일이야.”
이마 위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입술을 이길 장사는 없었다. 게다가 위장된 사고사로 죽은 가족에 대한 것이라면, 무작정 말릴 당위도 없었다. 최태훈은 정말 자신의 페어가 돌아온 게 맞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려는 듯 지관영의 팔을 쓸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꼭……!”
“3분.”
“진짜 3분 안에, 아니 가능하다면 더 빨리 나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정말, 진짜로요…….”
가이드는 연구원들이 급한 걸음으로 부축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제 연인에게 약속을 고쳐 받았다. 에스퍼는 나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페어를 말없이 눈에 담는 이가 있었다. 오진우였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청년, 이한솔은 세 사람을 살렸다.
매칭률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반드시 미쳐 죽을 수밖에 없던 지관영, 그런 연인을 잃고 행복할 수 없었을 가이드 최태훈. ……그리고, 죄책감에 살 수 없었을 자신까지. 오진우는 연인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한솔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제 오랜 페어에게 유언을 하나 남겼다.
오진우는 다른 이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먼저 센터를 빠져나갔다. 거대한 균열이 시작되고 저 멀리에서는 불꽃까지 튀기 시작한 중앙홀은 이제 단둘만 남았다. 선생과 지관영이다. 지관영은 고개를 삐뚜름히 하고 몸을 웅크린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선생의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그는 스스로가 선언한 죽음으로 걸어가고 있다.
음파를 이용한 암시의 실행. 그건 선생이 직접 고안한 것이었던 만큼, 효과 역시 확실했다. 선생은 자신이 죽였던 두 가이드와 마찬가지로 밀려드는 한기를 막을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선생은 그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불행과 비참함에 빠졌다. 자신이 만든 센터에서, 그가 가장 하찮게 여겼던 이들에 의해 못 박혔다.
선생의 눈이 빙빙 돌면서 움직였다.
“……최태훈이, 이한솔을, 죽, 였, 나?”
드문드문 떨어지는 문장이었다.
“‘최태훈’이. 저, 최태훈이?”
대답 없는 에스퍼를 보며 선생은 홀로 말을 이어갔다.
“그럴 수는, 없는데. 그건 불가능해.”
“……”
“최태훈은, 죽이지 않아. 아니, 그럴 수 없어. 그 누구도. 나조차도!”
쿠구궁, 하고 천장의 어딘가가 무너지고, 창문 밖으로는 헬기 여러 대가 급히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관영은 그걸 흘끗 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렇지. 그게 최태훈이니까.”
그는 지금 완전한 컨디션이 아니었다.
거의 분열 직전까지 갔던 정신은 제법 신경질적으로 곤두서 있다. 사실 지관영 그도 제가 어떻게 다시 ‘돌아올 수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뒤섞였던 눈앞에 제 이름이 걸려들었고, 그걸 계속 되풀이하며 어떻게든 스스로를 잃지 않으려 버텼던 것만 흐리게 기억날 뿐이다. 하지만 이게 누구의 도움인지 추론하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건 아마 그쪽 ‘아드님’의 선물이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그 대답은 선생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임이 분명했다. 선생은 사지를 떨면서도 악다구니를 쓰며 눈알을 번뜩였다.
“‘그건’, 안 돼. 불가능, 해, 그게, 그거야말로, 불가능……!”
“글쎄. 확신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스퍼는 천천히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한 선생을 보며 한숨 쉬듯 말했다. 지관영 그는 이한솔에게 꽤 많은 빚을 졌다.
마지막으로 만났던 이한솔은, 가이드라기보다는 에스퍼였다. 그것도 정말 훌륭한 능력치의 정신계 에스퍼였음이 분명했다. 사실 관영은 한솔의 손이 뺨에 닿았던 그 순간에는 매칭 가이드가 주는 목마른 감각에 제 머릿속 무언가를 건드린 것도 눈치채지 못했었다.
뒤늦게 묘한 위화감을 깨달은 건, 저를 향해 키득거리는 이한솔의 얼굴을 보면서였다. 한솔은 괴물의 깊숙한 곳에 눌려 있던 기억의 상자를 열었다. 자료에 불과했던 기억이 8개월의 시간이 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간의 폭주가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다.
덕분에 에스퍼는 지금, ‘모든 것을 기억한다’.
“‘그건’ 내가! 내가, 만든 거라고! 내가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 따윈 없어!”
의문이 남아있다!
선생은 그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진저리쳤다. 제가 만든 피조물이 스스로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박제된 신의 목소리가 갈라진 채 반파된 홀을 울렸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없어. ‘그건’ 내가 만든, 나의……!”
선생은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머리끝까지 붉게 변한 채로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천천히 죽음의 공포에 질려가는 선생의 눈은 아직도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지관영 그가 선생에게 해 줄 말은 의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괴물은 선생과 이야기하면서도 착실하게 시간을 세고 있었다. 최태훈과 약속했던 3분에서 1분 40초가 남았다.
“선생, 나한테 해 줄 말이 있을 텐데.”
“……뭐?”
“명단.”
난데없는 단어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선생의 눈동자가 팽팽 돌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잠시나마 초점이 또렷해졌다. 무너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 단어가 스스로가 꺼냈던 말임을 확인해서다.
선생은 온몸을 비틀고, 웅크리고, 또다시 퍼득이면서도 괴물을 향해 낄낄대고 웃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그 소리에, 괴물은 눈썹 하나를 휘었다.
“하, 하하하, 핫! 웃기는, 군, 흐, 흐흐, 핫!”
다행이었다. 죽어 가는 순간에도, 우스울 수 있는 마지막 유희거리가 생겼다. 선생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아둔한 착각이었다.
그의 앞에 있는 건 배우 지관영도, 에스퍼 지관영도 아니다.
괴물이다.
“……크, 아, 아아악, 악!”
순식간에 선생의 다리 하나가 뒤로 확 틀어 꺾였다. 선생은 밀려오는 고통에 벌겋게 변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괴물은 자신의 의지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있다. 상상 따위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다 몸부림치면서 죽는다.’ 선생은 저를 내려다보는 괴물의 아름다운 눈을 보며 그 문장을 다시 떠올렸다.
“똑딱, 똑딱, 똑딱. 시간이 간다. 시간이 가.”
도톰하니 보기 좋은 입술이 곱게 호선을 그린 채 열렸다.
조금은 장난 같은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나. 선생?”
* * *
이한솔의 유언은 참 마지막까지도 그다운 거였다.
‘최태훈에게 매칭률을 돌려줄 테니까, 날 그 누구도 찾을 수 없게 만들어 줘. 이제 실험은 질렸어.’
오진우는 그 말에 충실히 따랐다. 그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이한솔의 장례를 치렀다. 이한솔 그가 자기의 죽음을 맡아 줄 이로 오진우를 고른 건 정말이지 현명한 일이었다.
선생의 존재와 함께 그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던 가이드 이한솔이 알려진 후, 사방에서 벌떼같이 달려든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건 소위 측정 불가의 에스퍼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60년 역사의 센터가 순식간에 화염 속으로 사라진 것도 벌써 다섯 달이 지났다. 최태훈은 침대에 누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다가, 꽤 깊은 흉이 남아 있는 팔을 천천히 뻗었다. 그러자 움직이기가 무섭게 따라오는 나직한 목소리가 있었다.
“최태훈. 하지 마.”
“……운동인데.”
“아침에 했잖아.”
요 근래 지관영의 과보호는 도를 넘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에스퍼는 하루 종일 땅에 발을 닿지 않는 삶이 가능할 정도로 제 연인을 챙긴다. 사실 챙긴다는 단어도 좀 모자란 표현이다. 완전히 받들어 모시고 산다.
최태훈은 팔에 길게 남은 자상 말고는 자잘한 상처들은 모두 나은 지 오래다. 이렇게까지 중환자 취급을 받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관영은 페어에게 남은 상처가 제 자신 때문이라는 걸 정말 끔찍하게 못 견뎌 했다. 몸의 흉터든, 그 마음속 어딘가에는 남아 있을 독설이 낳은 흉터든. 그 어느 쪽이든지 쩔쩔매며 힘들어했다. 그걸 아는 최태훈은 연인이 속에 쌓아 둔 빚을 갚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에스퍼가 해 주는 것 중 가이드가 제일 좋아하는 건, 며칠에 한 번씩 꼬박꼬박 해 주는 기분 좋은 마사지였다. 커다랗고 마디마디가 단단한 손가락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빠트리지 않고 굳은 근육을 풀어 주는 건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최태훈은 나른한 눈으로 제 발의 딱딱한 부분을 누르고 있는 연인을 바라보았다.
톱스타에게 받는 발 마사지라니.
정말 어디 가서 얘기도 못 할 일이었다. 괜히 발가락 끝을 꼼지락거리며 장난치듯 건드리자, 조금은 진지한 표정이었던 근사한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음, 어제 미현 누나한테 연락 왔었습니다. 시간 나면 만나서 밥이라도 먹자고요.”
“어지간히 한가하나 보군. 센터 날려 먹고 일 안 해?”
“주민센터에 테이블 하나씩 빌려서 일하느라 정신없다는데요. 연이 형은 새로 서버 짠다고 자비로 사무실까지 빌렸다던데.”
지관영은 그런 건 제 알 바 아니라는 얼굴이기는 했지만, 연인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최태훈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졌다. 타고난 성정을 누르며 어떻게든 제 기분을 맞춰 주려는 연인의 노력이 가상해서였다.
한 시간이 꼬박 넘는 마사지가 끝나고, 가이드는 침대 한 편으로 살짝 몸을 움직였다. 요새 최태훈은 확실히 어리광이라면 어리광이랄까, 살살 속을 건드리는 애교가 늘었다.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신을 차린 뒤, 한두 달 정도는 종종 말수가 확 준 채로 멍해지던 얼굴보다야 이쪽이 훨씬 나았다. 에스퍼는 연인의 옆에 붙어 누워 잘 뻗은 몸을 끌어안았다.
최태훈은 제가 굳은 근육을 풀어 줄 때마다 귀찮지 않냐고 늘 묻고는 하지만, 사실 그건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다. 페어 가이드와 가까이 접촉할수록 좋은 건 오히려 제 쪽이다. 지관영은 연인의 머리카락에 제 고개를 묻었다. 저절로 느긋하게 풀린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관영 씨. 있잖습니까.”
“어.”
“……음. 아닙니다.”
가볍게 감겼던 눈이 뜨였다. 지관영은 제법 많이 자란 태훈의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리며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제 연인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정확히 눈치채서다.
“태훈아. 뭔데.”
“진짜, 그러는 거 완전 반칙.”
최태훈은 지관영이 저렇게 다정스레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약하다. 결국 가이드는 살짝 찡그리듯 웃으며 제 어깨선을 만지작거리던 에스퍼의 손을 꽉 맞잡았다.
하지만 그러고도 바로 대답이 나온 건 아니었다. 꾹 닫힌 채 망설이던 입술이 열린 건, 몇 분 뒤의 일이었다.
“그게 말입니다.”
“응.”
“……매칭률이요.”
근 다섯 달간 한 번도 가이드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던 단어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지관영은 그것에 놀라 반응하지도, 그렇다고 또 너무 무심하게 바라보지도 않는 담담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돌아왔을까요?”
최태훈이 페어 매칭률을 돌려받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원래의 <실험 조건>처럼 실험이 끝난 뒤 돌려받거나, 이한솔을 향해 칼을 들어 강제로 취하는 것이었다. 최태훈은 그 둘 중 무엇도 하지 않았다.
가이드는 그 두 개의 선택지를 알게 된 이후, 한솔과의 대화를 틈만 나면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혹시라도 또 다른 제3의 방법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 무엇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한솔을 만든 선생조차도 알지 못하는 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무서웠다. 혹시라도 제 자신이 저도 모르는 새 이한솔의 삶을 빼앗은 게 아닐까, 그래서 다시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지관영은 그런 제 어린 연인의 생각이 뻔히 그려져서, 조금은 고민 같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
“지금 최태훈 너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돌아온 걸 고마워하는 정도가 다일 것 같은데.”
에스퍼는 머릿속으로 하는 진실에 가까운 추측과는 달리, 정석에 가까운 대답으로 최태훈을 달래는 것을 택했다.
직접적인 행동은 아니었을 거다. 성경을 통해 말을 전했던 그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보아, 분명 최태훈이 눈치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몇 번이고 꼬아서 제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도록 했을 게 분명하다.
모든 말을 다 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묻어 둬서 좋은 것도 있는 법이다. 태훈은 연인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웅크리듯 품에 안기며 생각했다.
‘고마워하자’. 그 말이 맞았다.
지관영에게는 기억을, 자신에게는 매칭률을 돌려준 그 사람에게 고마워하자. 최태훈은 이한솔을 기억한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최태훈. 이따 나가면 조금 늦을 것 같은데. 혼자 있을 수 있겠어?”
마치 어린아이에게 묻는 것 같은 말에, 느슨하게 풀렸던 태훈의 눈이 옅게 휘었다. 티셔츠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는 에스퍼의 손이 간지러웠다.
“대체 절 몇 살로 보시는 겁니까.”
“스물여덟.”
분명 대하는 건 다섯 살짜리 아이를 대하듯 마냥 어린데, 하는 행동은 또 한없이 야살스러웠다. 태훈은 제 목덜미로 기분 좋게 떨어지는 지관영의 입술에 작게 더운 숨을 토해 냈다가 살짝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오랜만이긴 하네요. 급한 스케줄이신가 봅니다.”
에스퍼는 대답 대신 최태훈이 가장 좋아하는 고운 눈웃음을 지은 채로 오뚝한 콧대에 살짝 입술을 맞췄다. 가이드는 흐린 웃음기가 어린 단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오십시오’.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연인의 체온을 완전히 새기려는 듯, 늘씬한 몸을 한 번 세게 끌어안은 에스퍼는 침실에서 빠져나와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급한 스케줄. 확실히 가이드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오늘은 지관영 그가 최근 몇 달간 준비한 일이 있는 날이었다.
무려 20년을 해묵은 일이니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엇보다 선하고 바른 제 최태훈이 다 알 필요는 없게, 조용히 움직이는 것도 필요했다.
에스퍼는 쭉 기지개를 켜며 전신을 휘감는 힘을 빠짐없이 확인했다. 머릿속에 있는 ‘명단’을 지울 때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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