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gethsemane
‘선생’이 중간 점검을 요청했다.
가이드는 그를 향해 샐쭉 눈을 접어 웃는 중년의 사내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의 웃음이 이렇게까지 불쾌할 수 있다는 걸 최태훈은 처음 알았다.
“D-15, 딱 보름이 남았을 때 지관영 씨와 최태훈 씨, 두 분을 만나 뵐까 하는데요.”
“……알겠습니다.”
지금 선생은 에스퍼 몇을 마치 자신의 호위처럼 두른 채 차를 홀짝이고 있다. 물론 그 에스퍼들은 센터 연구원들이다.
페어의 목숨을 저당 잡힌 그들은, 번갈아 불침번까지 서가며 ‘선생’을 지키고 있다. 그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힘을 가졌다 해도 가이드의 죽음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지는 것이 에스퍼였다.
연구원들은 자신의 동료를 그런 굴욕으로 몰아간 선생에게 적대감을 감추지 않았다. 중년 사내는 자신을 노려보는 눈을 향해 입술을 씨익 비틀어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최태훈 씨. 그래, 실험은 잘되고 있습니까?”
“보고 의무는 없던 걸로 압니다.”
“하하핫! 그래요, 그래. 자세한 건 그때 가서 이야기합시다. 지관영 씨도 오셔야 할 겁니다.”
갑작스레 흘러나온 연인의 이름에 저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하고 만 태훈이다. 선생은 그 모습에 작게 소리 내어 웃고는, 누구보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물론 선생을 지키고 있는 대여섯의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창백한 낯빛을 한 채로 마지막까지 최태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최태훈은 그 의미를 잘 안다.
<가이드 최태훈은 한 달 안에 에스퍼 지관영을 자신의 에스퍼로 삼아야 한다>. 이것에 실패할 경우, 저들의 가이드는 모두 죽는다. 태훈은 남은 시간을 셈해 보았다.
D-19. 선생이 말한 ‘중간 점검’은 딱 4일 남았다.
“……태훈 씨. 요새 식사는 제대로 하는 거야?”
“예. 그럼요. 정말 한심할 정도로 잘 지냅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던 이미현은 그 뻔한 거짓말에 한숨을 삼켰다.
요새 최태훈은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얼굴선은 훨씬 날렵해졌고 딱 보기 좋게 맞았던 옷의 품새도 확실히 넉넉해졌다. 가이드는 이미현을 향해 웃으며 꾸벅 인사하고는 급한 걸음으로 응접실 문을 밀고 나왔다. 완전히 생기를 잃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연구원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장 지관영 씨에게 가야겠다. 최태훈은 그날 이후 습관처럼 만지작거리게 된 손목의 가죽끈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응접실 문밖에서 최태훈을 먼저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
목에 붕대를 칭칭 두르고 왼쪽 팔에는 두꺼운 깁스를 한 이한솔이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아직 걷지도 못했을 중상이었지만,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그는 하루가 갈수록 빠르게 호전되었다.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표정을 찡그렸다가, 이내 이한솔을 모른 척하며 휙 지나쳤다.
“……잠깐만.”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는 최태훈을 잡아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태훈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들으라는 듯 길게 내쉬었다. 그건 답지 않게 한껏 짜증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궁금한 게 있어.”
“뭡니까.”
몸을 반쯤 돌린 최태훈은 순간적으로 ‘저건 몇 살인데 말을 놓는 건데?’라는, 나고 자란 문화권에 충실한 생각을 했다.
“어떻게 넌 그 에스퍼의 가이드가 될 수 있었어?”
이한솔의 눈에는 옅은 두려움이 배어 있다.
그는 믿었다. 페어 사이에 가장 절대적인 요소는 ‘매칭률’이고, 에스퍼는 그것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그렇게 굳게 확신했었다.
10년간 끌어안은 채 휘두를 수 있었던 오진우 역시 그 증거였다. 오진우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이한솔을 죽이려고 발버둥 쳤었지만, 숨을 부여하는 유일한 존재를 끝내 해치지 못했었다.
그래서 오진우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 방법을 바꿨다. 스스로 죽기 위해 부단히도 애쓰기 시작한 거다. 하지만 최강의 에스퍼로 꼽히는 그의 안에 숨어있는 생존 욕구가 어떻게든 질긴 삶을 이어가게 했다.
그렇게 에스퍼 오진우는 죽일 수도, 죽을 수도 없는 10년을 보냈다. 그게 에스퍼의 본능이다. 매칭률이 높을수록 자신의 페어를 지키고, 사랑하고, 아낄 수밖에 없다.
증오하되 먼저 손을 놓을 수 없는 게 그 강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지관영 그 에스퍼는 달랐다. 그는 가이드에 대한 단 한 줌의 애정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역시도 에스퍼기에 눈앞의 비틀어진 모든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고, 날이 섰던 사고가 잠잠해지는 감각에 반응하기는 했다.
얼마 안 가 그 완전한 행복을 내던지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걸 선택했지만.
“그 사람은…… 그러니까, ‘그건’, 정말…….”
“‘그거’라뇨. 지관영 씨 말합니까?”
“그래. 다른 게 더 있어?”
최태훈은 이한솔의 말에 이제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채다. 솔직히 가이드 그는 한솔의 말과 표현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한참을 이한솔을 냉랭한 눈으로 바라보던 최태훈의 입이 열렸다.
“저도 따지고 보면 이한솔 씨 그쪽 상황과 크게 다를 건 없을 겁니다. 매칭률이 도저히 거절할 수치가 아니길래, 그래서 페어가 된 거니까요.”
“…….”
“저라고 지관영 씨와 바로 화기애애하게 지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쪽처럼 얻어맞지는 않았습니다만.”
“잘난 척은!”
한솔은 태훈의 말에 발끈한 얼굴로 목까지 벌겋게 변한 채 소리쳤다. 매칭률을 넘겨받고도 이 몰골이 되었다는 건 그에게 꽤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사람은 내 차지가 될걸? 아버지는 에스퍼를 싫어하시거든!”
“이한솔 씨.”
최태훈은 눈앞의 청년이 한 말을 속으로 곱씹었다.
‘아버지는 에스퍼를 싫어한다’. 그건 다시 말해 선생이 에스퍼를 싫어한다는 뜻이다. 태훈은 이걸 연구원들에게 슬쩍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가이드의 그런 배려는 연구원들에게 불필요한 것이었다. 응접실에 있던 그들은, 콘크리트 벽 하나 너머의 목소리쯤은 처음부터 모두 듣고 있었다. 선생과 있으면서 바짝 오감을 긴장했던 탓이다.
“이한솔 씨, 그쪽은 잠깐 내 걸 빌려 간 상황이라는 걸 잊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윽, 너!”
“지관영 씨를 그런 식으로 부르는 것도 다시는 내 귀에 안 들리게 하십시오. 보아하니 그쪽은 빨리 낫는 거 빼곤 저랑 별다를 거 없는 거 같은데, 무슨 배짱이십니까?”
연구원 몇은 최태훈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예의 바를 것 같던 남자는, 요새 묘하게 지관영과 화법이 비슷해졌다.
“아. 그리고. 반말도 하지 마시고. 짜증 나니까.”
정말로 그렇다. 저기에 빈정대는 문장 몇 개만 더해진다면 영락없는 지관영이다. 연구원들은 긴 문장 대신에 조용히 시선을 교환하며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 * *
지관영의 매니저는 입술 밖으로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물론 그건 제가 담당하고 있는 배우와 그 연인 덕분이었다.
굉장히 말끔하고 단정한 얼굴을 한 남자의 입이 열렸다.
“지관영 씨.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돌겠군.”
“죄송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이상형 좀 말씀해 주십시오.”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사내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매니저는 이런 둘을 지켜보는 것이 퍽 즐겁다.
오늘 평소보다 훨씬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낸 최태훈은 계속 저런 상태였다. 살며 대시를 하기보다는 받는 것이 훨씬 많았을 것 같은 그는, 지관영의 옆에 앉자마자 끊임없이 온갖 종류의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고 있다. 그건 저 똑 떨어진 이목구비와 인상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 더욱 재미있었다.
물론, 제 담당 배우의 반응도 웃음이 났다. 대담한 선전포고 이후 지관영의 아침 스케줄부터 찰싹 붙어 따라다니던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자, 10분에 한 번씩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이제 와서 점잔빼고 있는 건 솔직히 좀 귀엽게까지 보였다.
‘귀엽다’.
이런 단어는 정말 딱 1년 전의 지관영에게는 절대 쓸 수 없던 거다. 지관영은 최태훈이 올 때마다 늘 잘만 걸고 있던 예의 바른 눈웃음과 다정한 말투도 싹 지우고는 다른 일에 정신을 집중하는 척하지만, 매니저는 잘 안다.
저 사내는 최태훈이 곁에 있는 정말 싫었다면 진작 제게 뭐라 말을 했을 거다. 아니, 아예 드라마 촬영 현장 때부터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저를 다그쳤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러지 않았다. 최태훈이 다른 일을 할 때면 조용히 시선으로 그를 좇고, 모습을 훑을 뿐이다.
언제나 빈틈없던 사내는 저 가이드의 앞에서만 조금씩 빈틈이 생긴다. 그건 실수투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평범해진다’는 의미다.
“최태훈 씨는 아닙니다.”
“…….”
‘그래도 저렇게 제 무덤을 파는 건 그만하면 좋겠는데.’
매니저는 생각했다. 최태훈은 지관영의 말에 딱 움직임을 멈추더니 단호하게 저를 거부한 남자의 얼굴을 빤히 봤다. 에스퍼는 속으로는 찔끔하면서도 평소 그다운 배배 꼬인 단어를 입에 담았다.
“왜, 이번에도 이거 사과받을 겁니까?”
“……아뇨. 그냥 잘 기억해 두겠습니다.”
4년 연애 끝에 결혼해서 올해로 결혼 3년 차인 매니저는, 방금 최태훈이 한 말이야말로 화내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것임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만났지만 ‘연애’ 경험이라고는 없는 저의 근사한 배우는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임이 분명했다.
지관영은 최태훈의 말에 작게 코웃음 치며 영화 시나리오 몇 개로 시선을 던졌다. 드라마가 끝나고 지관영 그는 정말 사방에서 쏟아지는 러브콜에 정신없는 상태다.
이번 드라마 촬영이 꽤 아슬아슬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사방에 소문이 났을 텐데도, 투자자들은 지관영 그 자체의 명성과 ‘에스퍼’라는 이능력에 더욱 매료된 듯했다. 최태훈은 저를 무시하는 연인에게 고개를 돌려 휴대폰 액정에 얼굴을 박았다.
솔직히 지금 최태훈 그는 약간 기분이 상한 상태다.
언제는 가만히만 있어도 맨날 관사로 찾아오면서 붙어있지 못해 안달이더니, 이제는 뭐? ‘최태훈 씨는 아닙니다’?
가이드는 열심히 말을 걸던 입을 꾹 다물고 휴대폰 액정만 노려보았다. 괜히 오늘 낮에 이한솔에게 들었던 말이 슬쩍 마음 한구석에서 머리를 들기까지 했다.
‘그래 봤자 그 사람은 내 차지가 될걸’.
저녁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이 함께 쉬고 있던 룸 안은 순식간에 적막에 찼다. 이제껏 대화가 이어지고 있던 게 누구 덕분인지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매니저는 그제야 흘깃거리며 최태훈의 안색을 살피는 지관영을 보면서 언젠가 반드시 다가올 제 담당 배우의 처참한 미래를 짐작했다.
“……흠.”
“…….”
“후우.”
“…….”
가이드는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관영 저 남자가 저와 연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정말 높은 매칭률이 다일까 싶어졌기 때문이다. 웬만해서는 늘 긍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 최태훈이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그것도 힘들었다. 태훈은 의도치 않게 제 연인이 내는 작은 헛기침 소리와 한숨까지 모조리 무시한 채 더욱 축 처진 표정이 됐다.
그때, 지관영은 그런 최태훈을 눈에 담다가 늦은 자각 하나를 했다.
‘집에 있는 사진들보다 조금 마른 것 같은데.’
요새 에스퍼는 저택에 혼자 있을 때면 멍하게 최태훈에 대한 것들을 읽고 또 읽는다. 이미 무엇 하나 빠짐없이 머리에 담고 있는 것들이지만 이제는 거의 버릇처럼 되어 버린 일과다. 제가 최태훈을 사랑했던 기억을 좇다 보면, 가끔은 ‘직접’ 겪은 일 같은 묘한 착각마저 들었다.
에스퍼는 제가 가지고 있는 최태훈의 가장 최근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바로 휴대폰에 남아 있는 어두운 사진이다. 태훈은 확실히 얼굴선이 뾰족해졌고, 슬쩍 드러난 쇄골도 도드라져 보였다. 손이나 팔목처럼 뼈 모양이 잡히는 부분 역시 유독 뚜렷한 게, 확실히 이전의 모습보다 전반적으로 야위었다.
‘실험’이 시작된 지 겨우 11일이고 제가 정신을 잃었던 기간까지 합치면 보름 정도가 흐른 건데, 그 2주 새 눈에 띄게 체중이 줄어 버린 거다. 그러고 보니 최태훈은 조금 전 저녁 식사도 제대로 못 넘기고 가볍고 소화가 잘되는 음식만 겨우 몇 점 먹었다.
그걸 깨달은 지관영은 속으로 욕을 삼키며 괜히 손에 쥔 시나리오 몇 장을 구겼다. 스스로가 판 무덤에 빠져 관 뚜껑을 닫기 시작한 거다.
그때였다.
한참을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던 최태훈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어.”
지관영은 제가 너무 재깍 대답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사실 지금은 그것보다 눈에 띄게 기가 죽은 얼굴이 된 최태훈이 더 신경 쓰였다. 눈앞의 남자가 저보다 여섯 살이나 더 어렸다는 게 실감 났다.
“혹시 나흘 뒤에 시간 되십니까? 금요일 2시입니다.”
“왜?”
“그…… 센터에서 일이 좀 있어서. 와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3주 안에 다시 연애할 거라고 엄포하던 기세는 어디 가고, 슬슬 눈치를 보며 말하는 모습이 영 조심스럽고 처져 보였다. 에스퍼는 살짝 혀를 차며 알았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입을 연 건 매니저였다.
“그날은 영화사 쪽이랑 미팅이 있습니다.”
“……아.”
“아마 낮에는 일 얘기하고 밤까지 쭉 시나리오 확인하면서 식사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떡하죠?”
매니저의 말에 가이드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툭 터져 나오고, 언제나 예쁘게 펴져 있던 어깨도 덩달아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살짝 시선을 떨구자 숨어있던 속쌍꺼풀이 보였다. 최태훈은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뭐.’ 하고 조금은 힘없이 대답하며 다시 한 번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보던 지관영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작게 두드리며 생각하듯 턱을 괴었다.
* * *
최태훈은 비어있는 제 옆자리를 흘끗 본 뒤 괜히 구두 앞 코로 바닥을 긁었다. 요새 기억을 잃은 제 연인은,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바빴었다.
그건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좀 여유롭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하루에 인터뷰도 몇 건씩 했고, CF는 물론이고 새로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살피는 것만 해도 하루가 훌쩍 갔다.
어제는 무슨 홍보 대사에 위촉됐다며 근사한 표정을 한 채 카메라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정말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지관영 씨는…… 오늘 힘드시겠죠?”
“예? 예. 오늘은 조금. 영화사 쪽과 일이 있다고 합니다.”
기억을 잃기 전에도 센터의 사람들을 몽땅 앉아 기다리게 한 남자다. 그때는 심지어 드라마 촬영이라는 그럴듯한 이유도 있었다. 그때도 영 비뚜름했던 사내가, 지금처럼 완전히 목줄이 풀린 상태에서 순순히 태훈의 말을 따르는 걸 기대하긴 어렵다.
최태훈의 말에 몇몇 연구원은 저도 모르게 노골적으로 실망한 얼굴을 했다. 계속해서 큰 기대를 말아야지, 선생을 막을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하고 스스로 다짐하듯 생각하지만 그들 역시 사람인지라 확 치미는 안타까움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덕분에 태훈은 제가 잘못한 것도 없건만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떨궜다. 미간을 찌푸린 채 다른 이들의 시선을 막듯 태훈 곁에 붙어 선 오연이 작게 속삭였다.
“……밖에 있다가 시작하기 직전에 이쪽으로 건너와도 됩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아직 보름이나 남았잖습니까. 잘 해 보겠습니다.”
오연은 저를 향해 밝게 말하는 태훈을 보며 조금 찡그리듯 웃었다. 저 잔뜩 타들어 갔을 속내가 채 다 그려지지 않아서다. 정말이지 평생 죽을 때까지 갚아도 다 못할 신세를 졌다.
요새 센터의 ‘선생’ 추적은 답보 상태다.
아니, 답보 상태라기보다는 일종의 패닉 상태다. 정말이지 산 넘어 산이다. 그저 평범한 가이드일 거라고 생각했던 선생의 ‘지금 얼굴’은,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데이터베이스에 입력되어 있던 학교도, 직장도 모두 조작된 것이었다. 대학의 졸업자 명단에는 있는데 그를 알고 있는 이는 하나도 없는 상황이라니, 덕분에 센터가 문의했던 학교 측에서 얼이 빠진 듯 놀란 반응을 했다. 자신들도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유령 학생이라는 거다. 결국 테이프를 감듯 뒤로 쭉 돌아간 추적은 고등학교 졸업에서 멈췄다.
“오, 최태훈 씨! 빨리 오셨습니다. 하하하!”
바리톤의 목소리를 한 주인공은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선생’이다. 오연은 태훈을 향해 활짝 눈을 접어 웃는 중년 사내의 얼굴을 서늘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선생이 걸고 있는 얼굴은 스무 살 이후로 모든 발자취가 다 만들어진 자다. 20여 년 넘게 이 사회에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구성원으로 살아온 거다. 그렇게 꾸며진 삶을 살던 ‘저 얼굴’은 딱 한 군데에서 진짜 꼬리를 보인다. 바로 군부대에서의 가이드 상담 이력이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의 기분이라니!
정말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피가 싹 빨려 내려오는 것만 같은 한기가 몰려왔다. 정말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가정 때문이었다. 연구원들은 머릿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그 물음을 막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혹시 만약에 저 얼굴을 한 사내가 그때부터 <카운슬링>을 해 왔다면?’
그렇다면 그때는, 정말 단순히 센터의 몇백 명 만의 문제가 아니다. 감히 그릴 수도 없는 참극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오연도, 이미현도, 그 어떤 연구원도 이 말을 최태훈에게 전하지 못했다. 아니, 전하지 않았다.
부담감에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야위고 있는 가이드에게 더 큰 무게를 지울 수는 없었다. 최태훈은 이 끔찍한 시간을 겨우 혼자 이겨내고 있는 사람이다.
저만치 뒤에 앉아 있던 센터장 권다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된 이상 저 얼굴의 주인과 선생 사이의 관계 따위는 제쳐 두고서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반드시 알아내야 했다. 바로 그 수많은 가이드를 죽음으로까지 움직이는 방법이다.
선생은 제게 쏠린 혐오 가득한 시선을 즐거운 듯 마주 보며 고개를 직각으로 꺾은 채 눈을 빛냈다.
“호오라. 옆자리가 비었습니다, 태훈 씨?”
“…….”
선생의 뒤를 따라오던 이한솔의 입에 비웃는 기색이 역력한 미소가 걸렸다. 이한솔 그는 지금 저 텅 비어있는 최태훈의 옆자리가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른다.
사실 한솔은 속을 끓이며 걱정했었다. 저를 향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구는 가이드의 자신감이, 마치 그 에스퍼를 이미 손에 넣은 사람의 태도 같아서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역시 최태훈도 저와 별다를 게 없었다.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붙어 앉아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던 연인 같은 건 없다. 최태훈, 저 가이드가 이 지독한 가시방석 위에 혼자 앉아 떨며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이한솔은 씨익 눈을 휘어 웃었다.
실험이 끝나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최태훈에게 매칭률을 넘겨줘야 하는 건 맞다. 제 아버지는 이런 실험에 굉장히 까다로운 터라, 별다른 일이 없다면 그걸 반드시 따를 거다.
이한솔은 그게 꽤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저 가이드가 실험에 실패하기만 한다면, 무심한 눈을 한 지관영 앞에서 최태훈의 심장을 내찔러 다시 빼앗으면 그만이다.
태훈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켠 후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냥 진행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이런, 이런. 같이 앉혀 두고 비교해서 물어볼 것이 참 많은데요. 뭐, 어쩔 수 없죠. 이것도 하나의 실험 중간 결과니까.”
최태훈은 이를 악물고 선생의 시선을 피해 눈을 굴렸다.
속이 일렁였다. 절대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혼자 앉아 있는 상황이 되니 마치 푹 꺼진 늪에 빠진 것처럼 숨이 막혔다.
언제나 함께였던 연인이다. 이럴 때면 옆에 앉아서 손을 꽉 잡은 채 휘청이지 않게 용기를 주었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제 곁에 없다.
이해해야 한다.
자신에게 지관영은 여전히 단 하나뿐인 에스퍼고 연인이지만, 그에게 저는 겨우 알게 된 지 보름밖에 안 된 낯선 가이드다. 아니, 사실 ‘가이드’조차 아닐지도 모른다. 저와 닿아 봤자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테니까.
최태훈은 스스로 떠올린 문장에 속이 저며지는 것 같아서 의자 팔걸이를 꽉 잡았다.
“자, 그럼 시작해 봅시다. 하하, 거기 관객분들은 자리에 앉아주시고.”
연구원들은 선생의 빈정대는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묵묵히 그 말을 따랐다. 선생을 호위하듯 둘러싼 제 동료들의 눈이 얼마나 괴로운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최태훈은 고개를 들었다.
잘 버틸 자신은 없지만 이 시간을 혼자 보내는 것도 지관영을 포기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완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니 시끄럽게 뛰던 심장도 다시 평소처럼 조용해졌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가이드는 스스로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선생이 무슨 말을, 무슨 질문을 하든지 그것에 휘둘려선 안 됐다.
센터의 모든 사람이 모인 거대한 중앙홀은 어수선함 대신 불편한 침묵이 깔리기 시작했다. 최태훈은 한때는 제가 참 자상하다고 생각했던 미소를 건 선생을 눈에 힘을 주어 바라보았다. 이제껏 승리욕 같은 건 절대 없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자에게만큼은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오늘, 그 어떤 방문객도 받지 않는 센터의 문이 열렸다. 선생의 이 ‘실험’은 완벽한 극비로, 센터 밖 누구도 알지 못한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다. 그렇기에 지금처럼 중요한 날은 그게 누가 됐든 센터로 발 디딜 수 없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시선이 모두 넋 나간 듯 그 장신의 인영에 꽂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잘 빠진 구두 밑창이 바닥에 부딪힐 때마다 경쾌한 소리가 났다. 거대한 중앙홀을 쭉 가로질러 걸어오는 사내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자신을 의심하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쓰고 있던 커다란 선글라스를 벗어 셔츠의 앞주머니에 대충 찔러 넣고는 곧바로 빈자리에 앉았다. 그건 조금은 멍하게, 또 조금은 울컥한 얼굴을 하는 가이드의 옆이었다.
이한솔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머리끝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는 지관영이다.
가이드 최태훈의 에스퍼, 지관영.
“왜?”
지관영은 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최태훈을 보며 살짝 인상 쓰듯 웃으며 물었다. 태훈은 그것에 뭐라 대답해 보려고 입을 달싹였지만, 제대로 된 문장보다 마치 확 올라온 감정을 참듯이 억눌린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 났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오늘 못 오신다면서요’, ‘영화사랑 일은 다 끝내고 오셨습니까’, ‘매니저분은요’……. 하지만 그 수많은 문장 대신에 최태훈이 선택한 건 지관영을 향해 작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오늘만큼은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왠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관영은 비스듬히 다리를 꼰 채 테이블에 팔을 기대며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저를 보며 기묘하게 눈을 번쩍이고 있는 선생을 향해 있었다.
“……와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금요일 2시’.”
에스퍼는 이번엔 늦지 않았다.
이미현은 홀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시계를 보며 슬쩍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꽉 깨물어 눌렀다. 몇몇 연구원은 여전히 눈앞의 에스퍼를 보고도 못 믿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아직도 중앙홀의 흰 대리석은 부서지고 박살 난 흔적이 여전하다. 지관영이 이한솔을 내다 박은 이후로 고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 흉포한 괴물이 자신의 목줄을 쥔 가이드를 어떻게 대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그런데 매칭은커녕 기억조차 못 하는 최태훈이 부탁해서 왔다고?
홀 안은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으로 찼다. 그걸 깨트린 건 선생이었다. 짝, 짝, 짝, 짝. 선생은 찢어질 듯 웃으며 박수를 쳤다.
“어서 오십시오, 지관영 당신이 오지 않을까 싶어 어찌나 마음 졸였는지 모릅니다.”
지관영의 맞은편에는 긴장한 얼굴의 연구원들이 급한 걸음으로 걸어와 앉았다. 덕분에 에스퍼는 이게 뭐냐는 듯한 눈을 했지만, 최태훈은 그들의 목적을 곧바로 눈치챘다. 오진우 때와 같은 이유인 거다.
어느새 최태훈의 곁에도 오연이 웬 기계의 줄을 들고 서 있었다. 최태훈의 신체 반응을 분석하기 위함이었다. 태훈은 괜찮다는 듯 옅게 눈을 휘고 팔을 내밀었다.
중간 점검의 세팅이 모두 끝났다.
이제 페어가 말하는 모든 대답은 다양한 방법으로 분석될 거다. 기계로 스캔할 수 없는 에스퍼 지관영에게는 지능계 에스퍼의 실시간 판독이, 가이드 최태훈에게는 생체 반응을 통한 확인이 이루어진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선생은 즐겁다는 듯 눈을 휘며 입을 열었다.
“최태훈 씨에게 묻겠습니다. 이 보름간,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실험에 충실하셨습니까?”
조금은 추상적인 선생의 말에 최태훈은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눈앞에서 빙글거리고 웃고 있는 사내는 그저 뭐든 말하라는 듯 고개를 찡긋할 뿐이었다. 가이드는 자신 없이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지난 보름간의 시간을 더듬었다.
“29일째에 지관영 씨를 만나러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갔고, 그다음……23일, 지관영 씨와 관사에서 만났습니다.”
“관사에서 만났다?”
최태훈은 불편한 기억을 정확하게 짚어 묻는 선생의 질문을 슬쩍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지관영은 그런 가이드의 태도를 분명히 인지했다. 그건 물론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까지 미팅이나 계약 현장에 같이 다니면서 할 수 있는 한…….”
“23일 이후부터 뭔가 달라졌네요. 역시 관사에서 뭔가 있었나 봅니다. 그렇죠?”
선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잇던 최태훈은 결국 순간적으로 그 번뜩이는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건 가이드의 동요만을 기다리고 있던 선생에게는 좋은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저도 모르게 꽉 힘이 들어간 주먹 위로 하얗게 손등의 뼈 모양이 그려졌다. 느긋한 눈을 한 중년 사내는 즐거워 죽겠다는 듯 큭큭대며 말을 이었다.
“하하,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거든.”
“…….”
“내가 알고 싶은 건 이겁니다. 그날, 최태훈 씨는 어떤 기분이었고,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흠칫하며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지관영은 그날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눈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던 가이드의 표정을 떠올렸다. 저 단정한 얼굴과 목소리로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장을 입에 담던 그때의 기분과 생각이 뭘까. 최태훈은 지관영이 떠올린 물음에 머잖아 답을 내려 주었다.
“포기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에스퍼는 그 대답에 반사적으로 제 옆에 앉은 사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불과 며칠 전 태훈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지금, 저 가이드는 사실 그때 저를 버릴 것을 고민했다고 말하고 있다. 홀 가운데에 있는 화면 위로 글자 하나가 떠올랐다.
/ T /
그걸 바라보는 지관영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하지만 이어진 최태훈의 말은 그의 표정을 더욱 경직되게 하기 충분했다.
“정말로 안 될 것 같다. 아니, 못 할 것 같다. 솔직히…… 무섭다.”
“…….”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이 들 줄은 몰랐는데. 모든 걸 후회했습니다. 다요. 그냥, 다.”
판독기 따위를 거칠 필요 없다.
지금 저 말은 무엇 하나 빠짐없는 진실이다. 오연은 그 말에 고개를 푹 떨구었고, 다른 연구원들 역시 차마 최태훈을 지켜보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선생은 안다. 지금 저렇게 말하는 최태훈의 목소리는 조금 작을지언정 전혀 흔들리거나 떨리고 있지 않다.
“딱 하루만 그렇게 보냈습니다.”
“왜요?”
선생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최태훈은 다시 용기를 내 선생의 눈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절대 자길 포기하지 말라고 했으니까요.”
“…….”
“본인도 순순히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 게 뻔하다는 거 잘 알았을 겁니다. 좀 괴팍해야죠. 지관영 씨는, 성격은 나빠도 자기 객관화는 꽤 괜찮습니다.”
당사자의 앞에서 물 흐르듯 이어지는 험담 가까운 표현이었다. 연구원들은 저도 모르게 에스퍼의 눈치를 봤다. 그들에게 지관영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사내였다.
엄청난 수치의 매칭률을 고스란히 가져간 이한솔이 팔을 붙잡고 다정스레 ‘내 에스퍼’라고 말했다는 이유 하나로 벽에 처박고 고문한 남자이니, 대체 무엇에 날 선 반응을 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조심스레 살핀 지관영의 얼굴에서는 불쾌함이 읽히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어떤 감정도 엿볼 수 없는 묘한 표정을 한 채였다. 최태훈을 향해 고정된 눈이 묘하게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에 특정한 이름표를 붙이기는 어려웠다. 선생은 최태훈의 말을 곱씹듯 흐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다.
“태훈 씨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과 한 약속을 지킬 이유가 있습니까?”
선생이 쭉 뻗어 가리킨 손끝이 태훈에게서 그 옆의 에스퍼에게로 움직였다.
“몇 주 전을 떠올려 볼까요. 그때도 최태훈 씨와 지관영 저 사람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었죠.”
“…….”
“그래. 그때의 저 에스퍼는…… 태훈 씨의 손을 어떻게 잡았더라. 이런 식으로 잡고 있던가요? 정말 한 번을 놓질 않던데. 하하. 끝까지 이 ‘실험’에 싫은 내색 한 번 안 했었죠.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선생은 제 손을 깍지 끼어 잡으면서 이죽이듯 말했다.
그제야 태훈에게 못 박힌 듯 멈춰져 있던 에스퍼의 고개가 천천히 중년의 사내에게로 움직였다.
“최태훈 씨. 잘 생각해보세요. 지금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센터에서 벗어날 기회 아닙니까? 원래 바랐던 삶은 이런 게 아닐 텐데요? 다른 가이드의 목숨이 달렸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자기 가이드 살리겠답시고 모든 걸 아무런 힘도 없는 최태훈 씨 하나에 지탱하고 있는 저 멍청해 빠진 얼굴들을 보세요.”
자그마하고 상냥한 여자를 만나서 대단하지는 않지만 예쁜 시간을 쌓다가 결혼하고, 아이는 둘에서 셋쯤. 연인이 되었을지도 모를 누군가가 싫어한다면 딱 한 명만 낳아서 정말 세상 모든 것을 다 안겨줄 정도로 사랑을 쏟는 것도 좋았을 거다.
최태훈은 선생의 말을 곱씹으며 한때 제가 상상했던 미래를 다시 그려보았다. 주말에는 사람들 많은 공원을 같이 거닐고, 가족끼리 영화관도 가고 외식도 가고. 그는 참 평범하지만 따뜻한 시간을 꿈꿔 왔다.
센터와 관사를 반복하며 사람 많은 곳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지금은, 정말 스물여덟 평생 단 한 번도 떠올린 적 없었다. 그것도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라는 수식어 아래 꼭 그 이름을 싣는 동성의 연인 같은 건 꿈에서라도 절대 사양이었다.
태훈은 그제야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는 연구원들을 눈치챘다. 눈에 익을 대로 익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다섯 살 때부터 꼬박꼬박 드나들던 센터는 놀이터보다 더 익숙했다. 철이 들었을 때부터 동생들을 돌보는 게 당연했던 태훈에게 센터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불렸다.
‘삼촌’, ‘이모’, ‘누나’, ‘형’.
최태훈이라고 선생과 같은 생각을 안 했던 게 아니다. 지독한 후회를 삼키던 며칠간, 몇 번이고 도망치는 선택지를 머릿속에 그렸다.
하지만 태훈이 그것을 선택하지 않은 건 대단한 영웅 심리도, 너무나 선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언제나 보아왔던 사람들이 모두 불행해졌을 때 홀로 행복할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가이드는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
“솔직히 다 때려치우고 싶습니다. 지관영 씨는 기억도 못 하고 맨날 싫은 소리만 하지.”
이제껏 작은 흔들림도 없던 에스퍼의 눈이 약간 동요했다. 하지만 조금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을 이어가는 최태훈은 사내의 그런 반응을 알지 못한다.
“저쪽, 이한솔 저 사람은 날이 갈수록 속 뒤집는 데 소질 보이지……. 솔직히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피가 마르는 기분입니다.”
가이드의 말에 선생의 옆에 앉아 있던 이한솔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지금 제 눈앞에 앉아 있는 페어를 아직도 인정할 수 없다. 솔직히 저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매칭률을 지닌 저는 내쳤던 사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내 옆에 앉아서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다. 이럴 순 없는 거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된다.
최태훈의 매칭 주도권을 넘겨받은 건 분명 저였다.
그러니까, 지관영의 가이드는 나인데!
“그런데요? 그런데 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겁니까?”
최태훈은 문득 제가 지금 선생과 이전처럼 ‘카운슬링’을 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와 참 비슷한 구도였다. 선생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은 대답한다. 태훈은 호기심이나 의문이라고 하기에는 좀 더 일렁이고 끈적한 감정을 얼굴 가득 담고 있는 선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지관영 씨를 꽤 좋아합니다. ……아직은, 정말 꽤. 그냥 그래섭니다.”
묘한 대답이었다. ‘아직은’.
지관영은 두 번째로 듣는 가이드의 고백에서 이전에는 없던 전제가 붙은 것에 살짝 눈썹을 치켜떴다. 그는 최태훈이 한 말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었다. 태훈에 대해 홀로 가지고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기억의 갱신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한다며. 정말 많이 좋아하고, 사랑한다며. 그런데 거기에 왜 ‘아직은’이 붙는데? 저번엔 없었잖아. 생각이 길어지는 것과 비례해서 지관영의 미간은 천천히 구겨지기 시작했다.
“하하. 그럼 에스퍼 쪽에게 한 번 물어볼까요. 비교를 해야지.”
최태훈은 그제야 조금 긴장한 채로 슬쩍 제 연인의 얼굴을 살폈다. 사실 최태훈 그도 제가 거슬릴 말을 꽤 많이 했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별 반응이 없길래, ‘오늘은 이 남자가 좀 얌전히 있어 줄 생각이구나’ 하고 안도했었다.
했, 었, 다.
지금 가이드는 조금은 멍하게 눈을 끔벅이고 있다.
최태훈은 지능계 에스퍼처럼 누군가의 신체 언어를 분석해서 거짓을 판가름하는 능력 같은 건 없지만, 지관영 한정으로 그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게 있다. 저 변덕 심한 남자의 언짢음이다.
가이드는 지금 제 모든 것을 걸고 단언할 수 있다.
제 연인은 지금 기분이 아주, 매우, 몹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을 초래한 최태훈은 사내의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의 이유가 뭔지 도통 짐작이 안 갔다. 제가 별생각 없이 말한 ‘아직은’ 세 글자가 원인일 거라고는 절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건 저 사내가 요새 하도 얄미운 말만 하길래 덧붙인 가정일 뿐이다. 정말 싫어할 거면 사실 8개월 전에 밀어내고도 남았을 거다.
최태훈의 시선을 깨달은 지관영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보기 좋은 입술에서는 머잖아 대본을 읽듯 낮고 또렷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름 최태훈, 나이 스물여덟. 생일은 5월 1일, 혈액형은 O형.”
뜬금없이 흘러나온 제 인적 사항에 가이드는 뭐냐고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말을 이어갔다.
“○○대 경영학과, 3학년 땐 과대표였고 광고 동아리에서 활동. 학점은 4.18, 4학년 2학기 때 ○○○○에서 인턴. 졸업 후 ○○에 입사. 동생은 다섯 명. 최우진, 최승유, 최지현, 최민아, 최정민.”
“……지관영 씨?”
“좋아하는 음식은 면 종류, 싫어하는 건 차가운 음식 전반. 그래서 면은 좋아해도 냉면류는 싫어하고 커피 취향이 꽤 까다로운 편. 농구를 좋아해서 관사에도 농구공을 몇 개나 쌓아 뒀지만 아직까지 하진 못했고, 은근히 사주팔자며 별자리며 하는 운세를 찾아보는 성격.”
“…….”
“그래. 어디 이제부터 사인회장에서 처음 본 이후로 8개월 동안 만난 날짜와 장소, 어떻게 쭉 읊어드릴까?”
널찍한 화면 위에 글자 하나가 떴다. 다들 최태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멍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지금 지관영이 말한 모든 것은 다 ‘진실’이다.
에스퍼는 뭐라 입을 열지 못하고 눈만 깜박이고 있는 최태훈을 보며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그린 듯한 입에는 짜증 어린 미소가 걸려있는 채다.
덕분에 태훈은 더욱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됐다. 사실 저 철저한 성격에 뭐라도 뒤져서 상황 파악을 했을 거라 짐작하기는 했었다. 일전에 사인회와 강남 테러 사건을 물어보는 걸 보고 그 정도는 눈치챘다. 하지만 이렇게 저와 함께했던 8개월을 모두 꿰고 있는 채였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최태훈은 그제야 마지막 날, 제 연인이 온종일 자취를 감췄던 것을 기억해 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대체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지금의 지관영’이 어떻게 저렇게 잘 알고 있는지까지 그리기는 어려운 일이다.
“내가 생각보다 최태훈에 대해 잘 알거든.”
이제 지관영의 날 선 화살은 이 상황을 만든 장본인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진심으로 울컥한 상태다. 물론 그 이유를 이성적으로 따질 여유는 없다.
“그러니까 짜증 나게 캐묻지 마세요. ‘선생’.”
“아하, 뭔가 수를 썼군요.”
“그럼 멍청하게 앉아만 있었을까.”
선생의 눈이 기쁜 듯 가늘어졌다.
새로운 변수가 등장했다. 그는 변수를 몹시 즐기는 사내다. 지관영 저 에스퍼가 아무리 최태훈에게 목맨다 하더라도 순순히 따라 주는 것이 의아했었건만, 역시나였다.
기억을 잃은 제 자신에게 줄 8개월의 정보를 남겼다니, 이건 퍽 귀여운 시도다. 허나 선생은 괴물을 분석한 지 오래다.
지관영 그는 태생적으로 잔인하고 흉포한 데다 에스퍼라면 응당 고개 숙일 가이드의 매칭까지도 무시하려고 드는 사내다. 그런 자가 기억도 없는 정보에 휘둘릴 리 없다.
선생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잘 외우고 있어 봤자, 얄팍한 시간대의 나열에 불과한 게 아닙니까? 기억에 비할 바가 못 되는.”
선생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실험에서 저 에스퍼는 확고부동한 절댓값이다.
변수란 없다. 없는 게 맞다. 선생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선생은 이어진 지관영의 반응에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이건 그가 의아하거나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곧잘 내보이는 행동이다.
그는 지금 지관영을 지켜보고 있는 센터의 연구원들보다 한 걸음 더 먼저 그의 ‘신체 반응’을 체크하고 있다. 불안하게 움직이는 시선, 꽉 쥔 주먹, 느긋하다기보다는 조금은 격앙된 목소리, 옅은 한숨.
이상했다. 모든 게 이상했다.
저건 나와서는 안 될 반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관영 저 에스퍼에게서는 절대로. 선생의 눈이 기묘하게 뜨였다. 지금 에스퍼의 고운 미간은 여전히 잔뜩 구겨진 채다.
최태훈은 넋 놓은 듯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태껏 기억을 잃은 제 연인은 늘 감정의 어떤 지점을 도려낸 것 같은 모습만 보여줬었다. 저를 바라보는 눈이 잔뜩 마르고 건조하게만 보여서, 그게 굉장히 힘들었던 태훈이다.
그런데 지금은 좀 다르다.
있는 대로 찌푸린 얼굴은 기분 좋거나 즐거운 쪽과는 거리가 먼데도, 괴물의 가죽을 벗고 편히 드러내던 과거의 표정과 꼭 닮았다.
지관영 그는 보름간 제 저택을 가득 채운 최태훈에 대한 기억 속에 서 살았다. 그것들이 이미 머릿속에 완전히 새겨진 내용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제 자신이 가이드를 사랑했던 기억을 따라 좇고, 좇고, 또 좇았을 뿐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꾹 힘주어 쓴 마지막 문장 앞이었다.
<난 이 사람의 에스퍼다>
에스퍼는 고개를 젖히며 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 자신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이상할 정도로 즐거운 눈을 하는 제 과거의 자신을 시기하고 있었다. 스스로가 새겨 외운 8개월이 그저 단순한 시간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알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다 탐이 났다.
빈 조각을 모두 다 맞추고 나면 저도 8개월 전의 스스로처럼 다른 모습이 되지 않을까. 언제쯤 저렇게 편안하게 웃을까 싶었던 느긋함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나도 조금쯤은 행복해지지 않을까.
저렇게, 8개월간의 모습처럼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잔뜩 일그러진 모습을 한 채로 과거의 행복에 열등감을 느끼는 꼴이라니,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관영의 입에서 옅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선생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지관영을 보며 괴물의 그런 고민을 간파해냈다. 절대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실험의 절대축이 무너졌다. 그걸 깨달은 선생의 눈이 기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지관영 씨?”
“…….”
“괜찮으십니까? 혹시 어디 뭐 불편한 거라도…….”
조심스럽게 떨어진 최태훈의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과의 대화에서 뭔가 뒤늦은 후유증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지관영은 의자의 헤드에 나른하게 목을 기댄 채로 눈 안 가득히 염려를 담은 최태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8개월간 이 가이드는 분명히 과거의 제 차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최태훈은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이 매서워서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난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게 있습니다.”
아주 느린 목소리였다.
선생은 입을 다물고 제 앞의 반응을 무엇 하나 빠짐없이 외우기 시작했다. 변수에, 변수에, 변수가 더해지고 있다.
지관영은 천천히 제 팔을 뻗었다. 뼈마디가 큼직큼직한 사내의 손이 가이드의 손등을 덮었다. 그 감촉에 놀란 태훈은 저도 모르게 작게 주먹을 쥘 뻔했지만, 에스퍼는 그걸 자연스럽게 풀어 제 손가락에 얽히게 했다.
따뜻한 온기가 어린 손바닥이 맞닿았다.
그건 선생이 조롱하듯 흉내 냈던 모습이었다. 가이드는 천천히 제 손을 힘주어 잡는 에스퍼의 행동에 화답해 주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었다. 실험이 시작되고 딱 보름 만에 닿는 접촉이었다.
“이렇게 잡았다고 했던가?”
감히 어느 누구도 입을 열거나 작은 탄성을 흘릴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 어떤 매칭도 되지 않을 텐데도 지관영은 그 미지근한 온기를 하나하나 되짚듯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제가 잡은 최태훈의 손을 그대로 잡아끌어 일으켰다.
태훈은 얼떨결에 일어나면서 왠지 꽉 막혀 버린 목소리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지, 지관영, 씨?”
“나갑시다.”
“……예? 아직 안 끝났는데.”
“필요 없습니다. 그냥 가죠.”
“어딜 말입니까?”
최태훈은 멍한 얼굴을 한 연구원들과 선생, 그리고 지관영을 번갈아 보면서 허둥둥 지물었다. 가이드가 물은 것은 정말 모두가 알고 싶은 것이었다. 허나 이제 완전히 느긋함을 찾은 에스퍼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호텔.”
짤막하게 떨어진 대답에 어디선가 ‘커헉’ 하는 소리가 났다. 최태훈은 순간 그게 제 마음의 소리가 아닌가 생각했다.
“거, 거, 거, 거길, 왜요!”
“서른넷, 스물여덟. 이 나이 먹은 성인 둘이서 호텔이라면 뻔한 거 아닙니까.”
뻔하긴 하다. 정말로, 뻔하디뻔하다.
하지만 최태훈은 지금 그 ‘뻔한 일’을 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관영은 여전히 저와 가이드를 기묘한 눈으로 보고 있는 선생을 향해 흘끗 시선을 돌렸다. 이제 에스퍼의 얼굴에는 빈틈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거 하나는 전혀 모릅니다.”
“…….”
“섹스할 때의 최태훈.”
최태훈은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얼빠진 얼굴로 제 눈앞의 근사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부끄럽지도 않다. 이 익숙하기 짝이 없는 뻔뻔함은 확실히 그가 사랑한 연인의 것이 맞았다.
지관영은 선생을 향해 눈썹을 휘어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참 재밌네요. 이 ‘실험’.”
* * *
최태훈은 지관영의 개인 자가용을 타는 건 처음이다.
사실은 이런 엉덩이 대기도 무서운 외제 차를 타는 게 처음이라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애초에 태훈은 비싼 차보다는 벌이에 맞게 적당한 중고차를 굴리며 운전대에 익숙해지려던 사회 초년생이었다. 가이드는 조수석에서 벨트를 맴과 동시에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저, 오늘 있다는 일은 어떻게 하고 오신 겁니까? 매니저분은요? 드라마 촬영도 굉장히 힘들게 끝나서 일정이 많이 밀렸다고…….”
“최태훈 씨.”
“예?”
“당신 지금 나랑 뒹굴러 가는 거야. 그런데 지금 그딴 것들이 신경 쓰여?”
절로 입이 꾹 다물어지는 말이었다.
사실 지금 최태훈이 이렇게 그답지 않게 산만한 건 정말 요 보름간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지금의 상황 때문이다. 태훈은 지금 그가 혹시 관사의 침대 위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정말이지 무엇 하나 현실성 있는 게 없다. 가이드는 지금 제 상황을 천천히 되새겨 보았다.
<‘선생과 이한솔 앞’에서 ‘기억을 잃은 제 연인’이 ‘자신의 손을 잡고’ 나와서 ‘차’에 태운 채로 가는 곳이 ‘호텔’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이 문장 요소의 그 어느 것도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두근, 두근, 두근.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가이드의 심장박동이 커졌다.
그건 왠지 바짝 목을 마르게 하는 소리여서, 지관영은 혀로 제 입술을 적셨다. 어느 순간 완전히 말수가 사라진 가이드의 침묵에서 팽팽해진 긴장이 전해졌다.
최태훈은 앞장선 사내와 저를 번갈아 바라보던 호텔 발렛과 데스크 직원의 표정을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예약조차 없이 갑작스레 동성의 남자와 찾아온 초대형 스타의 등장에 순간적으로 그 능숙한 얼굴마저 무너지는 모습이라니!
심장이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그 누구라도 알 만한 사내와 대낮에 그 목적이 분명한 뉘앙스를 풍기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지관영과 함께한 이후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는 건 정말로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최태훈은 그 어떤 때보다 지금이 가장 열이 올랐다. 하지만 그 뜨끈한 감각은 이전의 부끄러움과는 좀 색이 다르다.
깍지를 껴서 맞잡은 손이 빈틈을 남기지 않고 움직이며 온기를 더했다. 엄지손가락으로 살살 손뼈의 윤곽을 그리는 감각이 너무나 선명했다.
태훈은 저도 모르게 뻐근해지는 목을 젖혔다.
에스퍼가 좀 더 과감해진 건 사람들의 눈이 떨어지고 호텔리어와 함께 단둘이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였다.
손바닥에서 손등으로, 손등에서 뼈가 툭 튀어나온 손목으로. 가이드는 저를 자극하는 움직임이 주는 흥분을 이를 악문 채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을 채우는 듣기 좋은 클래식 같은 건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심장박동만이 곧이어 다가올 열기를 기다리듯 요란해졌을 뿐이다.
빈틈없는 옷차림을 한 호텔리어는 공손하게 문을 열며 입을 열었다. 최태훈은 이제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멍하게 들었다. 아니, 들으려고 했다.
“혹시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호출하시면…….”
문장이 다 끝마쳐지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가 나며 그의 말을 집어삼켰다. 가이드는 그 굉음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지만 그걸 도로 뜰 필요는 없었다. 지독히도 익숙한 체취였다. 태훈은 저를 덮친 사내에게 저항 없이 입을 벌리고 혀를 섞었다.
사실은 완전히 머리꼭지까지 열이 올라 적극적으로 매달렸다고 하는 것이 좀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단 한 번의 숨을 놓치는 것조차 아쉬웠다.
옷을 벗기는 손이 급했다. 누가 먼저일지 모를 열기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키스하며 셔츠의 단추를 풀고 얇은 티를 벗어 던졌다. 지관영은 훤히 드러난 가이드의 목덜미를 이를 세워 물었다. 그러자 태훈에게서는 싫은 내색은커녕 옅게 흥분이 어린 한숨만이 터져 나왔다.
최태훈은 제 연인의 목을 끌어안고 적극적으로 매달렸다.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을 쓸고, 모양 예쁜 귀며 뺨처럼 닿을 수 있는 모든 곳에 입을 맞췄다. 지관영은 그 미칠 듯이 보드라운 감촉에 이를 악문 채로 가이드의 바지를 벗겼다.
쭉 뻗은 다리는 여성의 것처럼 말랑이는 감촉 대신 빈틈없이 손에 잡히는 탄탄한 근육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
“하아…….”
속옷까지 쭉 끌어 내리자 이미 살짝 흥분의 기운이 보이는 성기가 보였다. 순식간에 나신이 된 몸을 손으로 훑자 가이드의 입에서 떨리는 숨이 토해져 나왔다. 성욕 따위 상상하기 힘든 단정한 얼굴이 귀 끝은 물론이고 목덜미까지 발갛게 변해 있었다. 그건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아랫배를 쭉 당기게 하는 자극이었다.
다시 한 번 혀를 깊게 넣어 키스하며 골반을 들어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허리에 다리를 휘감으며 얽히는 음란함이라니, 이건 정말 보름간 보았던 최태훈에게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에스퍼는 늘씬한 몸을 들어 올려 안은 채로 정신없이 입 맞추며 발걸음을 옮겼다. 매달린 남자의 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빠짐없이 눈에 담고 손으로 덧그려 확인하고 싶었다.
새하얀 이불 위에 눕힌 채 바라보는 최태훈의 몸은 정말 예뻤다. 지관영은 제가 ‘처음 보는’ 가이드의 모든 것을 삼킬 듯 확인하며 입술을 떨어트렸다. 살짝 마른 듯했지만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을 증명하듯 그 모양새가 잘 잡혀 있는 근육이 달았다. 쇄골부터 가슴께로 쭉 미끄러지듯 내려간 혀에 태훈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지관영은 벌써 단단해진 작은 유두를 이를 세워 깨물었다. 그러자 태훈은 예민해진 곳을 잡아 무는 게 싫다는 듯 제 연인의 머리를 끌어안은 채로 살짝 어깨를 짚었다.
가이드는 혀로 가슴께를 살살 핥고 부드럽게 누르며 그 주변을 빨아 주는 걸 좋아했다. 에스퍼는 제 허리에 꽉꽉 얽혀진 사내의 허리가 저도 모르게 튕기며 들썩이는 반응을 놓치지 않고 외웠다.
허리에서 골반, 그리고 쿠퍼 액을 흘리기 시작한 모양 좋은 성기까지 쭉 내려가자 수치도 모른 채 절로 벌어지는 다리가 야했다. 지관영은 그 순간 지금의 저에게는 처음인 이 섹스가, 8개월간의 제 자신과 최태훈에게는 익숙한 행위였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감각이었다.
순식간에 확 뭔가가 머리를 사로잡는 것 같기도 하고, 이 말끔한 얼굴을 한 남자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허리를 흔들도록 한 사람이 저라는 사실이 묘하게 만족스럽기도 했다.
“……다리 잡아 보세요.”
에스퍼는 열이 올라 낮아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숨을 헐떡이던 최태훈은 살짝 풀린 눈으로 지관영을 올려다보나 싶더니, 그 말을 순순히 따랐다. 노골적으로 쫙 벌어진 다리를 붙잡는 금욕적인 얼굴에 살짝 부끄러운 기색이 어렸다.
“나랑 섹스할 때 최태훈 당신은 뭘 좋아했습니까.”
“흐, 으으, 응. 관영 씨, 아.”
“손으로 해 주는 거? 아니면 입으로?”
벌어진 다리 가운데에서 단단해진 성기를 손으로 쭉 훑자 늘 적당히 듣기 좋게 낮았던 목소리가 조금은 높아진 채 흘러나왔다. 동성인 사내와 섹스하면서 좋은 점 중 가장 대표적인 걸 꼽는다면, 어디를 어떻게 자극해야 반응이 나오는지를 잘 안다는 것일 테다. 지관영은 귀두 끝을 살살 긁으면서 조금은 부어오른 젖꼭지를 혀로 괴롭혔다.
태훈은 가슴, 골반과 허벅지가 이어지는 깊은 안쪽, 그리고 음낭부터 두꺼운 기둥까지 흔들다가 그 끝을 문지르는 것을 특히 기뻐했다. 지관영은 가이드의 입에서 달큰한 반응이 나오는 지점들을 하나씩 거듭 확인하듯 건드렸다.
“앗, 아아, 잠깐만, 놔, 주십, 흐윽!”
“원래 이런 식으로 다리를 잘 벌리는 편인지도 궁금한데.”
조금은 짓궂은 말이었다.
덕분에 얼굴, 귀, 목은 물론이고 사내에게 잔뜩 괴롭혀져 가슴께까지 울긋불긋해진 최태훈의 눈썹이 절로 휘었다. 하지만 태훈은 그것에 반박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게 있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근질거리는 감각이 더욱 커지면서 절로 허리가 튕기듯 들썩이기 시작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이미 사내에게 꿰뚫려 휘둘리는 것을 잘 아는 구멍이 절로 움찔거리며 조였다, 풀어졌다가를 반복했다.
최태훈은 순간 스스로가 어떤 모습일지도 잊은 채 연인의 목을 끌어당겨 입 맞추면서 지관영 그가 좋아하는 귀를 만지고, 슬쩍 땀이 어린 등의 근육을 손끝으로 간질이듯 그렸다.
에스퍼의 하반신과 제 사타구니를 기꺼이 맞닿게 하는 움직임은 누가 봐도 마치 애정 어린 야한 연인 사이에나 할 만한 완연히 삽입을 조르는 것이었다.
덕분에 지관영은 저도 모르게 한숨 같은 헛웃음을 삼켰다. 이 남자는 색사 같은 건 전혀 관심조차 없을 것 같은 말간 얼굴을 한 채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음탕한 행동을 한다.
그래, 솔직히 이제 좀 알 것도 같았다.
이 잘 정돈된 이목구비의 가이드는 분명 8개월간 저를 그의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맘껏 휘둘렀을 거다. 잠자리에서나 나오는 간질거리는 애교라니, 베갯머리송사에 휘둘리는 바보들의 심정이 이해됐다. 정말 이걸로 뭔들 못했겠나 싶을 뿐이다.
지관영은 태훈의 허벅지 안쪽 깊은 곳을 지나 은밀한 곳까지 제 손을 쭉 움직였다. 가이드는 그 간지러운 감촉만으로도 날카롭게 숨을 삼키며 고개를 도리질했다.
꽉 닫힌 뒤는 쉬이 열릴 것 같지 않은 데다, 당장 달아오른 채로 몸을 움쩍이는 남자를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았던 에스퍼는 잠시 고민하듯 눈썹을 휘다가 천천히 그 깊은 사타구니에 제 고개를 처박았다.
부드러운 음낭을 살살 건드리다가 그 뒤까지 슬쩍 혀로 할짝이는 행위는 생각보다 꽤 거부감 없이 이어졌다. 최태훈의 입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으, 앗, 아, 관영, 씨, 그, 그런 거어, 하지 마십…… 힉, 흐아앙, 아!”
그 누구보다 오만하고 자존심 강한 남자다.
그만큼의 힘도 가졌다. 누군가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 따위가 존재치 않는 게 지관영이다. 태훈은 그런 사내가 기꺼이 제 아래에 머리를 묻고 이전의 섹스에서도 하지 않았던 행위를 시작한 것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흥분과 수치와 쾌감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머리를 가득 채웠다. 최태훈은 제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 모르고 한껏 높아진 교성을 흘렸다. 그건 평소의 그 다정한 기운 가득한 허스키한 목소리에선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였다.
“흐, 아아, 아, 히익, 으응, 제발, 아. 관영 씨!”
지관영은 다리를 오므렸다가, 움찔거렸다가를 반복하며 간질거리는 쾌락에 몸을 떠는 최태훈의 골반을 단단히 틀어잡은 채 꽉 맞물린 뒤를 한참 동안 희롱했다.
열이 올라 말랑해진 몸은 얼마 안 가 사내의 손가락 하나쯤은 어렵지 않게 물어 들었다. 하지만 점차 개수가 늘어나자 오랜만의 섹스에 놀란 구멍이 지관영의 손가락을 꽉 조이며 버거워했다.
“왜, 아픕니까?”
“……응, 조금…… 아, 흐응, 읏.”
나직한 물음에 조금은 어리광 같은 대답이 떨어졌다.
분명 반쯤 제정신이 아닌 채로 한 반응일 테지만, 지관영은 그 목소리에 뒷목마저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밑으로 동생을 다섯이나 둔 장남 아니랄까 봐 언제나 반듯하고 흔들림 없는 모습만 보였던 최태훈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과거에도, 또 지금도 제 앞에서만 다리를 벌리고 약한 소릴 내는 게 좋았다.
지관영은 그제야 입고 있던 것도 잊었던 바지를 벗어 던졌다.
집요할 정도로 알고 있는 모든 기억을 남긴 제 자신이 묘하게도 가이드와의 정사만은 조금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은 이유가 뻔히 그려졌다.
‘섹스할 때의 최태훈’. 이런 걸 알려주고 싶지는 않았을 거다. 완전히 흐트러진 채로 야한 소리를 내고, 다리를 벌리고, 나른하게 풀린 눈으로도 저를 사랑하는 것을 감추지 못하는 사내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을 테다.
설령 그게 본인 스스로라고 해도!
단단해진 지 오래인 기둥은 힘줄마저 툭 불거진 채로 꺼덕거렸다. 에스퍼는 제가 이렇게 순수하게 흥분으로 눈앞이 쨍하게 변했던 게 언제였던지를 가늠해 보다가, 가이드의 엉덩이골 사이에 제 것을 슬슬 문지를 때쯤엔 그 생각마저도 포기했다.
괴물의 본능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눈앞의 이 가이드는 ‘에스퍼’로서 필요한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자다. 에스퍼 지관영과 가이드 최태훈은 제로 포인트 이하의 매칭률을 가진, 페어로서는 함께 있는 것이 무의미한 상태다.
그렇지만 거기서 ‘에스퍼’라는 이름표를 떼면 그 관계의 정의는 완전히 달라진다. 지금 ‘지관영’은 눈앞에 있는 사내의 뒤로 제 것을 깊게 처박고 그 안을 헤집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 그건 정말로 낯선 감각이었다.
때론 벅차 무거울 정도로 넘치는 힘을 가지게 된 이후, 지관영 그는 가이드가 아닌 이와는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었다. 쓸모없는 불쾌한 접촉이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기대감 어린 숨을 헐떡이며 음란하게 뒤를 움찔거리고 있는 남자는 다르다.
지관영은 천천히 최태훈의 뒤로 제 것을 밀어 넣었다.
저절로 더운 숨이 터졌다. 가이드의 안은 부드럽고 따뜻했지만, 순간적으로 눈앞이 확 점멸했다가 다시 켜질 정도로 세게 조여들었다. 에스퍼는 천천히 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영은 어느새 손에 힘이 풀려 멋대로 늘어진 태훈의 늘씬한 다리를 붙잡아 확 눌러 젖혔다. 물론 그와 동시에 까슬한 음모가 닿을 정도로 제 성기를 콱 처박은 것도 함께다.
“아, 하악, 아아, 흐으, 응, 아, 아, 앗!”
최태훈은 사내의 기둥이 내찌르는 모든 것이 다 전립선인 양 제 뒤를 휘젓는 사내의 욕망에 충실히 반응했다. 천박하리만치 커진 교성은 이미 제대로 된 정신을 갖춘 목소리가 아니었다. 완전히 쾌락에 길들여진 본능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사내의 허릿짓이 점점 더 힘을 얻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어느 순간 정확히 전립선을 콱콱 짓누르기 시작한 사내의 성기에 사정까지 하며 쾌감에 벌벌 떨었다.
앞에서 주는 절정과 뒤의 깊숙한 곳을 정확히 내리찍으며 느껴지는 미칠 듯한 감각이 뒤섞이며 최태훈의 머리를 완전히 마비시켰다.
단정한 얼굴은 쾌락에 젖은 채로 완전히 풀린 지 오래다.
정도를 넘는 쾌락에 벌어진 입에서는 신음 대신 끊어질 듯한 급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발가락 끝이 곱을 대로 곱은 채로 바들거렸다. 이미 온몸을 완전히 휘감은 열기가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솜털까지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이성을 잃은 채 몸을 섞는 것에만 매달리는 건 최태훈뿐만이 아니다. 지관영은 발갛게 변한 근육이 촉촉하게 땀이 어린 채로 꿈틀거리는 모습에 더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지금 그는 제 복근까지 더럽힌 희뿌연 정액에 더 흥분한 채다. 에스퍼는 최태훈의 허리를 반쯤 옆으로 틀더니, 여전히 벌어진 채 벌름거리는 구멍으로 거세게 제 것을 밀어 넣었다.
퍽, 퍽, 몸이 닿을 때마다 살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났다. 최태훈의 내벽은 그렇게 사내의 성기를 받아먹고도 여전히 탐욕스러운 기세로 기둥을 조여 왔다.
“흐익, 힉, 하앙, 아, 아아, 그마안, 하으응, 아앗!”
“젠장…… 하, 최태훈 너, 진짜…….”
예의 바르고, 깍듯하고, 단정하기 짝이 없는 ‘금욕적인’ 가이드?
지관영은 최태훈과 몸을 섞기 전 제가 어렴풋이 그렸던 단어들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음란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한 채로 야한 교성을 내지르며 제 것을 뒤로 삼키는 남자의 어디에서도 그 보기 좋은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아마 이렇게 만든 건 8개월간의 제 자신일 터였다.
지관영 그는 지금 쾌락으로 머리 한구석이 어떻게 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 어디에 내놓아도 아쉬울 게 없을 장신의 사내가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애정을 갈구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감각이라니. 이건 확실히 완전히 취할 만했다.
에스퍼는 제 성기를 뿌리 끝까지 처박고는 최태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제 것을 잔뜩 쏟아 냈다. 물론 그러면서도 한 손으로는 도톰하게 부어오른 유두를 꾹 짓누르고 입으로는 태훈의 귀를 살짝 따끔하게 깨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섹스할 때’의 최태훈을 다 알려면 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좀 더.
* * *
가이드는 제 몸을 천천히 건드리는 간지러운 감각에 잠에서 깼다. 딱 ‘잠에서만’ 깼다. 한껏 나른한 눈이 떠진 건 그 뒤의 일이다.
지관영의 손가락은 태훈의 등 위에서 마치 그림을 덧그리듯 움직이는 중이다. 태훈은 저를 뒤로 끌어안은 연인의 팔에 무의식중에 입 맞췄다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지관영 그가 불쾌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관영은 별다른 반응 없이 고른 숨소리만을 냈다.
“그거, 흠, 흠, 지관영 씨…… 이름입니다.”
태훈은 뭣 모르고 입을 열었다가, 흘러나온 제 처참한 목소리에 급히 헛기침하며 어물어물 문장을 마쳤다. 이제 와 뒤늦은 민망함이 확 몰려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저와 지관영은 완전히 발가벗은 채 맞닿아 있었다.
최태훈은 지관영이 저를 뒤로 안고 있음에 안도했다. 만약 마주 보고 있기라도 했다면 지금처럼 벌겋게 변한 얼굴을 푹 숙일 수도 없었을 거였다.
하지만 그런 가이드의 눈은 얼마 안 가 크게 뜨였다.
제 등 뒤에서 느껴진 보드라운 감촉 때문이었다. 지관영은 제 입술이 닿자 예쁘게 자리 잡은 등 근육을 확 움츠리는 태훈의 모습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머리에 새기며 나직하게 말했다.
“압니다.”
“……예.”
최태훈은 꽉 막힌 목소리로 겨우 대답했다.
분명 몇 주 전만 해도 새삼스러울 게 없던 연인의 다정함이 이렇게 심장을 얽맬 듯이 다가올 줄은 몰랐다. 지관영은 묘하게 떨리는 태훈의 목소리와 불안해진 박동 소리를 듣고, 제 품에 있는 몸을 더욱 단단히 틀어 안았다.
누군가의 체온이 이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음을 에스퍼는 처음 알았다. 이건 8개월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던 지관영도 몰랐던 거다. 숫자의 지배에서 벗어나 서로의 살갗이 와 닿는 감각은 지금이 유일하다.
“원래…… 처음 같이 잠자리를 가졌을 때요.”
꽉 막힌 침묵을 헤치고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에스퍼는 조용히 그것에 집중했다.
“그때는 참 많이 힘들었습니다.”
“왜?”
“‘리바운드’라고, 제가 지관영 씨와의 관계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었거든요.”
저택의 그 어디에도 없던 정보다. 지관영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꿈틀했다. 하지만 최태훈은 지금 그런 제 연인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좀 고생을 했는데, 그다음에는 또 지관영 씨가 저를 밀어내서 문제가 생겼었습니다.”
“…….”
“리바운드-리젝션이었나. 네임까지 활약한 덕분에 두 번째에는 진짜 죽는 거 아닌가 싶었고요.”
가이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스퍼의 몸이 반쯤은 일으켜 세워졌다. 태훈은 제게 바짝 가까워진 연인의 얼굴을 보며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살짝 헝클어진 머리가 부스스하게 느껴졌을 텐데도, 지관영은 그마저도 근사하게 느껴졌다.
“지금은?”
“…….”
“지금은 괜찮은 건가?”
거만하게도 들릴 수 있는 사내의 반말이 이제 퍽 반갑기까지 한 태훈이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를 것 없는 반응 역시.
가이드는 대답 대신 부드럽게 눈을 휜 채로 푹신한 이불에 고개를 쓸었다. 그 나른한 반응에 순간적으로 확 힘이 들어갔던 지관영의 어깨에서 힘이 쭉 풀렸다. 태훈은 제 연인을 말갛게 올려다보며 묵묵히 있다가, 느리게 말을 이어갔다.
“지관영 씨는 괜찮으십니까.”
무슨 말이냐는 듯 지관영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최태훈은 요 며칠 절대 내뱉고 싶지 않던 문장을 천천히 꺼내 놓았다.
“그 가이드와…… 조금이라도 닿으셔야 하지 않냐는 말입니다.”
빙글빙글 돌려 말한 문장이지만 그 말을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관영은 제 앞에서 무례 떨던 가이드를 어렵지 않게 떠올렸다. 이한솔. 그는 어제 센터에서 저와 최태훈을 마치 찢어 죽일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았었다.
‘접촉’했을 때의 감각도 선명하다.
순식간에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이 선명하게 재조립되고 옅은 안개가 끼듯 늘 흐렸던 정신이 맑아졌던 순간은, 확실히 이제껏 그가 겪어 왔던 얄팍한 가이딩과는 차원이 달랐다.
확실히 지금 저는 이한솔을 제외한 어떤 가이드와도 매칭되지 않는다. 당장 페어였다는 최태훈도 미들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진다. 태훈은 아무런 대답 없는 관영을 바라보면서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힘드실 텐데. 저는 지관영 씨에게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지관영은 저를 바라보는 최태훈의 눈이 절대 고요하지 않음을 눈치챈 지 오래였다. 약간은 망설이는 듯한 태훈의 손이 천천히 연인의 손등을 덮었다. 지관영은 그것을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잖습니까. 이제는.”
“…….”
“필요한 일이면…… 해야 합니다.”
거짓말이다.
괴물은 가이드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 표정을 보면서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최태훈은 절대로 저를 떨어트리고 싶지 않다는 눈을 한 채로, 참 뻔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습니까, 최태훈 씨.”
“예?”
“내 불찰이네요. 아직도 모자라셨나 봅니다.”
에스퍼는 영문 모를 표정이 된 사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덕에 태훈의 눈은 더욱 휘둥그레 변했다. 몇 주 전의 관계에서나 기대할 법한 너무나 간지러운 입맞춤이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연인의 말에 최태훈은 깨달았다.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저 사내의 사고방식을 쫓아갈 수 없었다. 세상에, 그 문장을 ‘그렇게’ 해석할 줄은 몰랐다.
“……아니, 아니, 아니, 저기, 그게, 잠깐만요. 지관영 씨. 지관영 씨? 잠시만!”
허나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고 하기엔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가 너무나 노골적인 증거로 남아 있다. 관영은 가이드가 잘 덮고 있던 이불을 확 걷었다. 그러자 두 번째 증거가 곧바로 드러났다. 몸 여기저기에 정사의 흔적을 잔뜩 매달고 있는 몸이었다.
“한 2주 남은 거, 최대한 스케줄 줄이고 힘을 안 쓰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일정도 다 뺀 거고.”
지관영이 어제 올 수 있었던 이유가 밝혀졌다. 하지만 태훈은 그런 것을 되짚을 여유도 없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아 잠깐만! 제가 하려던 말은 그런 게 아니고…….”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최선을’ 다해 보죠.”
능숙하게 다리를 가르고 들어오는 몸은 누가 봐도 행위의 전초를 알리는 신호였다. 최태훈은 뭐라 반항의 말을 해보려고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거만한 남자는 그런 가이드의 문장을 어렵잖게 먹어 치웠다.
자고로 말은 조심해야 한다.
이런 계산조차 되지 않는 괴물 앞에서는 더더욱.
* * *
딱, 딱, 딱, 딱.
선생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지금 중년의 사내는 무언가에 깊게 몰입한 듯 진지한 얼굴이다. 이한솔은 그런 제 ‘아버지’를 조금은 초조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 기억이 시작하던 때부터 저런 표정을 한 ‘아버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배워 왔다.
센터의 지하, 그 어떤 기계와 통신장비도 닿지 않는 이곳은 이한솔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사실 이한솔 그는 이곳이 싫다. 제 시간 속에서 가장 더럽고 음습했던 이 공간은, 지금은 너무나 새하얗고 말끔한 채라 얼룩진 제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솔은 아직도 간간이 침을 삼킬 때마다 통증이 느껴지는 제 목을 만지작거렸다. 그 흉터는 이미 새살이 돋은 지 오래지만, 긴장 때문인지 묘하게 콕콕 쑤시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굳게 닫혀 있던 선생의 입이 열렸다.
“이한솔 씨.”
“네, 네에!”
이한솔은 태어나 눈앞에 있는 것들을 식별할 수 있던 그때부터 선생을 봐왔다.
‘아버지’.
어느 순간부터 이한솔은 선생을 그렇게 부르게 됐다. 그는 저와 함께 나고 자랐던 형제들이 하나둘 온몸이 뒤틀리고 찢겨 죽는 순간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그런 제 형제들을 참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었다. 그건 마치 지관영 그 에스퍼가 제 목을 그었을 때의 표정과 닮았다.
그 어떤 애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텅 빈 시선.
이한솔은 그것에 익숙하다.
아버지도, 오진우도, 지관영도. 모두 그런 눈을 했었다. 아니, 굳이 그들뿐만 아니라 여태껏 만났던 모든 이가 저런 표정을 했다. 한솔은 긴장으로 살짝 떨리는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웃는 낯을 만들었다. 선생은 흘깃 시선만 굴려 그런 이한솔을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당신은 실험의 29일 자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한솔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고 미소를 건 표정 그대로 굳었다. 지금 한솔은 제가 들은 말을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어 이해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것의 이해는 쉽지 않았다. 마치 고장 난 기계에 입력된 명령어처럼 계속 헛돌 뿐이다. 선생은 그런 이한솔을 향해 무심한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마치 일상을 묻듯 가벼운 어조였다.
“알겠나요?”
“그, 게, 무슨……?”
“물론 지관영과의 매칭 주도권은 당신이 그대로 쥔 채로.”
이제는 제 에스퍼가 된 사내의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 이한솔의 귀에는 그것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은 넋 놓은 듯 눈을 크게 뜬 이한솔을 향해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선생은 두 번 묻는 것을 싫어한다. 이한솔은 그걸 잘 안다.
“내 말 이해했습니까?”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한솔은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한솔 그는 태어나는 과정에서부터 저 사내의 말을 거스를 수 없도록 만들어졌다. 숨이 붙는 그 순간부터 이한솔의 선택지는 언제나 늘 하나였다.
‘수긍하고’, ‘따르고’, ‘납득한다’.
이한솔은 언제나 그렇게 살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저 사내는 아버지다. 아버지란, 제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고 또 아껴야만 하는 존재다. 이한솔은 제 머릿속에 있던 그 빛바랜 ‘보통의 상식’을 꺼내 들었다.
물론 이건 한솔 그에게 단 한 번도 적용되지 않았다.
“약속은 지켜야지. 한 달이 다 되면 넘겨줘야 하잖습니까. 그러니 그 전에 깔끔하게 정리하도록 합시다.”
“아, 아버지, 아버지, 잠시만, 요, 아버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저쪽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내를 쫓는 발에서 자꾸 힘이 빠졌다. 하지만 이한솔은 그렇게 휘청이면서도 기어코 선생을 따라잡아 그의 미색 가운을 붙잡았다.
“손!”
이한솔은 머리를 쩡하니 만든 그 호통에 흠칫 떨었다.
벽에 반사된 소리가 희미하게 울리며 한솔의 심장을 내찔렀다. 선생의 눈은 스산하게 번뜩이고 있다. 한솔은 제 아버지의 얼굴에 담긴 혐오를 읽었다.
“손 떼.”
“…….”
“더러운 그걸, 감히 어디서.”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청년이 무너졌다. 선생은 그 온전한 절망에 동정 한 조각 내보이지 않고 탐욕의 방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이한솔 그는 제가 잉태된 곳에서, 저를 태어나게 해 준 자에게 죽음을 선고받았다.
이제 이 실험의 카운트다운은 두 개다.
D-13.
이한솔은 멍한 눈으로 제게 남은 시간을 세었다.
이럴 수는 없다. 정말로 이럴 수는 없는 거다. 그는 한참을 그 텅 빈 곳에 혼자 주저앉아 있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일어났다. 한솔은 제가 ‘선생’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떨어진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을 잘 안다.
이한솔 그는 선생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
이제 한솔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두 가지다.
첫째, 지금의 에스퍼인 지관영의 마음을 얻는다. 이건 어떻게 보면 가장 쉬운 선택지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한솔은 제가 떠올린 이 첫 번째 가정의 실현 가능성이 정말로 희박하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도 없다.
그 냉랭한 눈을 한 괴물은 차라리 저를 죽이면 죽였지, 순순히 움직여 줄 사내가 아님을 상처로 배운 지 오래다.
그러면 이제 남은 길은 하나다.
이한솔은 거의 미친 사람처럼 센터 안을 가로질러 뛰었다. 그러자 눈 안 가득 짜증과 멸시를 담은 시선들이 가이드의 뒤를 따랐다. 이곳에서 이한솔은 마치 병균과도 같은 존재다. 그들은 한 에스퍼의 10년을 수렁으로 내다 꽂은 한솔에게 비난의 돌조차도 던지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진심 어린 거부만을 쏟아 낼 뿐이다.
하지만 지금, 이한솔은 제가 그 악몽으로 내몰았던 남자를 찾고 있다. 측정 불가의 두 번째 에스퍼. ‘힘’을 가진 사내인 오진우였다. 이한솔은 그렇게 한참을 찾아 헤매던 남자가 눈에 들어오자마자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 진우야!”
오진우는 이한솔이 저만치에서 눈에 들어올 때부터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채였다. 가이드 이한솔의 오묘한 기운은, 10년간 함께했던 지독히 어두운 그림자와 맞닿아 있었다.
“할…… 말이 있어. 꼭. 지금, 해야 해.”
그 말에 오진우보다 더 신경질적인 눈이 된 사람이 있었다.
오연이다. 센터 내에서는 아직도 오진우를 껄끄럽게 여기는 시선들이 많다. 그건 오진우가 제 가이드를 해치지 않은 정황을 짚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다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가시방석 위에 앉아 있는 오진우를 아는 체하는 이한솔이라니,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다. 오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제 동생의 앞을 막아섰다.
“무시해. 저거랑 이야기할 게 뭐가 있어.”
“형. 괜찮아.”
‘저거’.
이한솔은 저를 지칭하는 단어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날 선 반응을 내보이지는 못했다. 오진우는 제 형을 달랜 뒤 앞장서 걸었다. 그곳은 10년간 수없이 바뀐 센터 내부 중 오진우의 기억과 같은, 몇 안 되는 인적 드문 곳이었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였던 청년과 한참의 거리를 둔 채 벽에 기대고 섰다.
“용건이 뭔데.”
“으, 응. 그게…….”
이한솔이 말을 망설인다.
오진우는 10년간 몇 번 보지 못한 그 광경에 속으로 약간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솔은 간혹 저렇게 초조한 듯한 얼굴을 걸었다. 그건 대체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에스퍼의 그런 짐작은 머잖아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버지가 에스퍼를 찾고 있잖아. 너나 지관영 그 사람처럼 강한, 정말 강한 에스퍼. 알지?”
모를 수가 없다. 이한솔이 과거 제 가이드를 죽였던 이유는 단 하나다. 제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 긴 시간 동안 오진우는 지겨울 만큼 수없이 가정했었다. 만약에 내가 ‘측정 불가’의 에스퍼가 아니었다면? 내가 그저 평범한 에스퍼였다면, 그랬다면 가하는 죽지 않았을까. 가하의 부모님도, 내 부모님도 그렇게 비참한 선택을 하지 않으셨을까.
오진우의 가이드였던 김가하는 그보다 딱 한 살이 더 많은 남자이자 페어 면제자였다. 언제나 수십 개의 약을 달고 살았던 그는, 에스퍼와의 긴 매칭 테스트를 거치기에는 너무나 병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진우의 폭발적인 힘이 확인된 후 면제자들과의 매칭까지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오진우와 김가하는 페어가 됐다. 물론 거기에는 꽤 오랜 설득이 필요했다.
김가하와의 스킨십은 언제나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손을 잡을 때마저 그 작은 접촉마저 아플까 걱정될 정도였다. 김가하는 제 에스퍼의 그런 배려에 언제나 흐리게 웃었었다.
오진우는 그렇게 숫되고 약했던 제 페어를 지키지 못한 자신을 저주했다. 갑자기 찾아온 두통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묘한 불안감에 차서 페어를 찾아갔을 때, 김가하는 이미 죽은 뒤였다. 그리고 그 옆에 이한솔이 있었다. ……비틀린 웃음을 지은 채로!
“그런데 지관영은 안 될 것 같아. 그 사람은 날 너무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진우야.”
한솔은 제 말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 에스퍼를 보면서 횡설수설하는 수준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도 네 가이드…… 그러고 싶은 건 아니었어. 알잖아, 난 아버지 말을 못 어기고, 그래서, 아버지가 강한 에스퍼어야 한다고 해서.”
“…….”
눈앞의 사내는 무엇을 생각하듯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한솔은 그런 에스퍼의 표정에 더욱 조바심이 났다.
“10년…… 동안, 리바운드 심했던 거 아는데. 어쩔 수 없었잖아. 그렇잖아, 그래서 같이 있었던 거잖아. 그러니까 한 번만 도와줘. 아버지한테 가서, 말 좀 해 줘. 아버지가 정말로, 정말로 날 죽이려고 해. 응? 시간이 없어. 정말이야.”
교묘한 부탁이었다. 이한솔의 말에는 선생이 그를 죽이려는 때가 언제인지가 슬쩍 지워진 채다. 오진우는 그 다급한 문장을 느긋하게 곱씹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고 싶은 게 있어.”
“응? 으응, 뭐?”
“……가하가 그렇게 됐을 때, 나는 왜 정신을 잃었던 거야?”
이제껏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과거의 확인에 한솔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오진우는 페어와 지독히도 같은 감각을 전해 주는 이한솔을 보면서 차마 이 오랜 의문을 꺼내지 못했었다.
그 이유가 뭐가 됐든, 김가하를 지키지 못한 건 제 자신이라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한솔은 가라앉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거짓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온갖 생각이 머리를 떠돌았다. 이윽고 이한솔은 둘 모두를 뒤섞은 답을 선택했다.
“그, 가이드와의…… 매칭이 끊기면서.”
“…….”
“반동 때문에…….”
“이한솔.”
오진우는 이한솔의 문장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을 끊고 들어왔다. 한솔은 그 어떤 때보다 무감각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에스퍼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쭈뼛 소름이 돋았다.
“죽는 게 싫고 무서워?”
다그치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닌 담담한 물음이었다.
“그게……!”
“나는 너 때문에 10년 동안 그것만 바랐었는데.”
진심이다.
지금, 이 에스퍼는 진심을 말하고 있다.
이한솔은 순간 목구멍이 꽉 막힌 것만 같아 뭐라 반박도, 변명도 못 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10년간 하지 못했고 듣지 못했던 에스퍼의 생각은 그 세월만큼 무거웠다. 차라리 잔뜩 격앙된 채 터트리는 말이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양 받아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저 한 문장, 한 문장을 동요 없이 나직하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버지’ 핑계 대지 마, 이한솔. 가하, 가하의 부모님, 그리고 내 부모님까지…….”
“…….”
“모두 네가 죽인 거야. 그런데 너는 죽기 싫어? 왜?”
오진우는 저를 부들부들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한솔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시선에 담긴 건, 지나간 10년에 대한 질책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이해도, 용서도 할 수 없는 게 있어.”
긴 시간 동안 오진우 그가 가장 많이 원망한 건 눈앞의 청년이 아니다, 제 자신이다. 에스퍼의 입에서는 마지막 선언 같은 말이 떨어졌다. 있는 힘을 다한 증오였다.
“나한테는 그게 이한솔 너야.”
* * *
최태훈은 지금 묘한 과거의 반복을 느끼는 중이다.
“지관영 ○○○ 호텔 목격담.”
“…….”
“제발 꿈이라고 말해 주세요, 제발.”
“꿈 아닙니다.”
소속사 팀장의 고개가 툭 떨궈졌다. 최태훈은 그걸 보며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빙글 돌렸다. 확실히 이번에는 최태훈 그 역시 공범이었다. 그것도 말릴 생각이라고는 1퍼센트도 하지 않은 채로 시간까지 연장하면서 함께 뒹군, 죄인 중의 죄인이다.
대놓고 최태훈의 관사에 자리를 잡은 지관영은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매니저가 잔뜩 챙겨 준 시나리오를 훑고 있다. 스케줄을 모조리 뺀 뒤 힘을 아낄 거라고 하더니, 정말 거짓말이 아니었던 거다.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지관영 씨는 왜 본인 위치 자각을 못 하시죠? 대한민국에서 ‘톱배우’라고 하면 한 손가락에 드는 분이 동성과 호텔 스캔들이라뇨!”
“동성의 ‘가이드’라는 단어는 왜 쏙 뺍니까.”
최태훈은 에스퍼의 말에 눈만 끔벅였다. 사실 지금 저는 말이 가이드지, 지관영 저 남자와 전혀 매칭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섹스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에스퍼는 당연하다시피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 소속사 팀장이 쭉 힘이 풀린 손으로 쥐고 있는 건 오늘 갓 뽑은 지관영과 최태훈의 스캔들 찌라시다.
물론 그 내용은 뻔하다.
[톱스타 J모씨가 동성과 함께 호텔에 숙박, 체크아웃도 미뤄가며 뜨거운……]
참고로 최태훈은 ‘뜨거운’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다음을 읽는 걸 포기했다. 사실 몇 주 전만 하더라도 이런 일이 터졌으면 정말 몸 둘 바를 몰랐을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지금은 초연한 기분이었다. 자포자기가 좀 더 비슷한 색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사실 태훈은 지금도 골반이 좀 뻐근하다.
정말 근 이틀을 지관영과 먹고, 자고, 섹스하고, 섹스하고, 또 섹스했다.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내에게 꿰뚫린 채 울고 매달리고 신음했다.
아직 목소리가 깔끔하게 돌아오지 않은 게 그 증거다. 최태훈은 제 연인이 순간적으로 매칭률이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의심마저 들 정도로, 이틀간을 짐승처럼 뒹굴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지만 정말 그렇지 않고서야 기억도 없는 사람이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을 저를 향해 그렇게 쉴 새 없이 입 맞추고 허릿짓을 할 수는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섹스만 했다.
“기자들 전화가 빗발친단 말입니다! 직접 소속사 건물까지 찾아와서 그게 최태훈 씨가 맞는지 묻고 난리입니다! 호텔에서 사진 찍는 걸 잘 막아줘서 망정이지, 뭐라도 풀렸으면…….”
“풀리면, 뭐?”
“아아악!”
결국 상황을 중재한 건 최태훈이었다.
태훈은 파리한 안색으로 괴성을 내지르는 팀장을 살살 달래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거듭 약속한 뒤 관사에서 내보냈다. 하지만 그 약속 덕에 지관영은 영 마뜩잖은 얼굴이 됐다.
눈썹 하나를 슬쩍 치켜뜬 채 살짝 고개를 기울인 모습은 참 그린 듯이 근사했지만, 가이드는 저 표정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안다.
“왜 그러십니까?”
지관영 그는 지금 언짢다.
특히, 정말로 이유를 모른다는 저 말끔한 표정이 정말로 심히 언짢다. 하지만 에스퍼는 그런 제 기분과는 별개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연인 한정으로 그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가이드는, 한참을 눈치 보듯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지관영은 그런 가이드를 모르는 척하며 눈에 들어오지 않는 대본만 살폈다.
이윽고 태훈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진작 말하지, 뭔데 저렇게 뜸을 들여.
에스퍼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하지만 떨어진 문장은 그가 참 피하고 싶던 물음이었다.
“그, 저와 있었던 일 같은 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는 겁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이었건만, 지관영은 순간 쥐고 있던 종이 파일을 떨어트릴 뻔했다. 덕분에 최태훈은 더욱 눈을 빛내며 에스퍼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흑갈색 눈동자가 한껏 반짝이며 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걸 힘겹게 피하는 에스퍼의 노력이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완전히 다 꿰고 있던데. 전 지관영 씨 8개월간 만났어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는데요.”
제가 생각해도 참 얄팍한 거짓말이었다.
태훈은 제 시선을 피하는 연인을 따라서 고개를 기울였다. 그건 몸을 섞기 전까지만 해도 알아볼 수 없었던 옅은 애교 섞인 움직임이었다. 그걸 눈치챈 에스퍼는 속으로 혀를 찼다.
D-13, 이제 ‘실험’은 2주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2주나 남은 건데 자신은 벌써 저 가이드의 손아귀에서 쥐락펴락 휘둘리기 시작했다. 살짝 눈썹을 찡그리듯 휘며 바라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잠시간 그렇게 있던 태훈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말도 편하게 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지관영은 그제야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는 최태훈을 마주 보았다. 이틀간 자신은 저 말끔한 눈매를 몇 번이고 젖게 만들었다. 웃고, 화내고, 울고, 때로는 긴장하는 것까지 고스란히 드러나는 솔직한 표정은 침대 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태훈은 섹스할 때 숨을 할딱이며 입술을 깨물다가, 너무 느낄 때면 시트에 머리를 저으며 앓는 소리를 낸다.
“왜, 왜 그러십니까?”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가이드는 말갛게 뜬 눈을 깜박이며 더듬더듬 물었다. 기억을 잃은 연인은 때때로 저런 알 수 없는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는 했다.
“내가 그랬었나.”
“예?”
“최태훈 너한테 이렇게 말 놓았었냐고.”
자연스럽게 존대가 사라진 어투에 태훈은 마른 입술을 혀로 훑었다. 순간적이지만 기억을 잃기 전의 연인으로 돌아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사내의 물음에 답했다.
저를 빤히 눈에 담는 에스퍼를 마주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지난밤의 기억이 뒷머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완전히 머리가 흐물흐물해진 채로도 저 그린 듯한 이목구비만은 뚜렷이 보였었다.
최태훈은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연인과 더 가까워진 것만 같아서, 슬슬 두근거리기 시작한 제 속을 달랬다. 바보처럼 입가가 풀릴 것도 같았다. 관영은 그런 가이드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를 조용히 짚어 살폈다.
“관영 씨.”
“어.”
“진짜 어떻게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최태훈은 은근히 고집스러운 면이 있다.
“……정말 궁금한데.”
“…….”
심지어, 이제는 슬쩍 눈썹을 휘며 쳐다보는 것에도 기가 죽지 않고 꿋꿋하게 제 할 말을 다 한다. 관영은 턱을 괸 손을 풀어 팔짱 끼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뜻을 곧바로 눈치챈 태훈은 눈을 휘어 웃었다.
이 신경전 아닌 신경전은 가이드의 승리다.
* * *
두 번째로 방문하는 지관영의 저택이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무엇 하나 삐져나온 것 없이 다듬어진 정원은 언제 봐도 신기한 것이었다. 태훈은 여름의 냄새를 쭉 들이켰다.
제법 끈적이는 날씨인데도, 이 저택은 뭔가 묘하게 가라앉은 채다. 그건 습한 기운과는 다른 약간은 침체된 느낌과 비슷했다. 최태훈은 자신보다 몇 걸음 더 앞장서서 걷는 곧은 등을 바라보았다.
저 한 겹의 셔츠 뒤에는 제 이름이 새겨져 있다. 태훈은 남자의 잘 새겨진 근육 위에 자리한 네임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정신없이 몸을 섞고 일어난 다음, 마실 것을 가져다준다며 일어나 걷는 잘 뻗은 뒷모습은 가이드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나른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서 받는 그 지극한 대접은,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저 남자가 가장 아끼는 것이 저라는 엄청난 충족감을 주었었다. 그건 기억을 잃기 전의 연인도, 지금의 지관영도 모르는 비밀이다.
가이드가 그렇게 멍하게 생각에 잠긴 사이, 성큼성큼 앞장서던 에스퍼는 그 시원스러운 보폭과는 달리 여전히 고민에 빠져 있었다. 여기까지 데리고 오기는 했는데 여전히 마음이 오락가락해서다.
‘최태훈을 집에 들여서, 저걸 다 보여줘?’, ‘아니면 그냥 적당히 별채에 앉혀 두고 대충 말로 설명할까?’
지관영은 정말 그답지도 않은 망설임에 찼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장 제가 만든 기억이 없다뿐이지 결국 따지고 보면 저택 내부에 그 난리를 쳐 둔 건 ‘지관영’,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봐도 웃기고 황당한 그 광경에 최태훈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짐작도 안 갔다. 결국 지관영은 현관 앞에서 우뚝 멈춰 섰다.
“저 옆으로 가지.”
“왜요?”
최태훈은 지관영처럼 정보를 달달 꿰지는 못해도, 제 연인의 성격만큼은 너무나 잘 안다. 지관영이 누군가. 속전속결. 무언가를 할 때 망설임이라고는 없고 그것이 필요하지 않은 힘을 가진 사내다.
마음이 바뀌었으면 바뀌었지, 어떤 것을 ‘깜박했다’라든지 ‘착각했다’라는 단어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가이드는 제 질문에 에스퍼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슬쩍 미간을 찌푸리는 걸 보고 깨달았다.
저 거대한 저택 안에 뭔가 있는 거다. 자신에 대해서 모두 알 수밖에 없었던 비밀이!
그래서 최태훈은 제 에스퍼를 떠보기로 마음먹었다.
“저 예전에 여기 한 번 왔었을 때, 이쪽은 못 들어가 봤는데. 오늘도 안 됩니까?”
가이드의 말에 지관영이 눈썹을 곧바로 휙 치켜떴다.
최태훈은 방금 거짓말을 했다. 오히려 안 가본 건 저 옆의 작은 별채다. 이 앞의 주 건물은 일전에 지관영과 함께 차를 마셨던 곳이다. 태훈은 지극히도 고급스럽고 한편으로는 황량했던 그 내부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
반면 에스퍼는 최태훈이 방금 저를 실험해 봤다는 걸 곧바로 알았다. 친절하게도 기억을 잃기 전 제 자신은 태훈과 함께 저택에 와서 차를 마셨던 날짜와 시간, 찻잎의 종류는 물론이고 ‘최태훈은 여름이면 홍차로 냉침을 해 마신다. 여동생이 좋아해서.’ 같은 헛소리까지 미주알고주알 모두 적어두었었다.
“……최태훈, 거짓말은 어디서 배웠어.”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보십시오, 지관영 씨도 뭐 감추고 계시지 않습니까.”
살살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하지만 또 그게 틀린 소리는 아니라, 에스퍼는 팔짱을 낀 채로 고민하듯 눈만 굴렸다. 결론은 얼마 안 가 나왔다.
‘어차피 ‘내가’ 한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지관영은 현관에 카드키를 가져다 댄 후 비밀번호를 눌렀다.
사실 가이드는 문을 열자마자 뭔가가 곧바로 쏟아지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다. 지관영, 저 남자가 정말로 답지도 않게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관과 이어진 아이보리색 대리석은 이전처럼 말끔하기만 했다.
뭐야, 대체 뭘 그렇게 감춘 건데?
최태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슬리퍼를 신고 제 연인의 곁을 바짝 쫓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가이드는 보름도 더 전의 지관영이 했던 말을 그대로 내 읊었다.
“이게 다…… 뭡니까?”
“직접 봐.”
지관영은 한숨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최태훈은 집주인의 뒤에 서서 쉽사리 걸음조차 떼지 못하고 있었다. 가이드는 이곳이 이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나지 않던 공간을 보며 속으로 혀를 내두르기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넓은 거실부터 시작해서 눈에 보이는 모든 벽면은 거의 편집증에 가까운 종이 메모와 펜의 끄적임으로 가득 차 있다.
차마 가까이 갈 엄두도 못 내는 가이드를 빤히 보던 지관영은, 최태훈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 슬슬 앞으로 밀었다.
이 모든 기억의 시작점으로였다. 가이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XX월 XX일, ○○문고 팬 사인회]
조금은 날카로운 느낌의 필체였다.
살짝 기울어졌을 뿐 굉장히 정자에 가까운 각진 글씨는 분명 낯선 것이었지만, 누가 쓴 것인지 묻지 않아도 그 필적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최태훈은 그것만으로도 정말 한없이 반가워서, 멍하게 첫 문장만을 한참 눈에 담았다. 그 아래 잔뜩 붙여진 크고 작은 포스트잇과 보도 자료를 발견한 건 꽤 뒤의 일이다.
‘최태훈과 처음 만남. ○○○의 사원이었음.’
태훈은 그제야 놀란 표정으로 저를 둘러싼 것들을 훑었다. 이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의 정체를 드디어 이해한 거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저와 연인의 8개월이었다. 가이드는 그제야 제 에스퍼가 ‘마지막 날’ 별다른 말없이 뭔가를 준비해야 한다며 자리를 떴던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관영 씨, 설마 하루 만에 이걸 다 하신 겁니까?”
“이 미친 짓을 하루나 써 가면서 했다고?”
완전히 다른 시점의 표현이었다.
너무 놀라서 몇 초간이나마 제 연인이 기억을 잃은 상태임을 깜박했던 태훈은, 그 뾰족한 대답에 ‘아. 맞다.’ 하고 여전히 반쯤 넋 놓은 반응을 흘렸다.
덕분에 지관영은 잠시나마 질색이라는 눈이 됐지만 뭐라 날 선 말까진 하지 못했다. 최태훈이 천천히 제가 외운 기억들을 따라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8개월간의 기억이다.
그것도 지관영 그의 시점으로 구성된, 스스로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발자취다. 그걸 당사자인 최태훈이 살피는 건 왠지 깊은 속내를 헤집어 드러내는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괜히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기도 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작은 끄적임에 가까운 메모 한 장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살피던 최태훈의 입에서 희미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핫, 홍차 냉침!”
“……적당히 웃어.”
“아, 정말 별걸 다 기억하고 계셨네요.”
최태훈이 이곳에 왔을 때의 부분이었다. 가이드는 앞서 했던 제 거짓말이 들통 난 이유를 보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굉장히 따뜻한 눈을 했다. 에스퍼는 그 표정에 공연히 제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기억을 따라가던 가이드는 간간이 지금의 지관영이 모르는 이야기를 해 줬다.
‘이때는 사실 지관영 씨가 센터에서 너무 못되게 굴었던 겁니다’, ‘아, 이 장관한테 한 방 먹였었는데.’
물론 그런 나직한 설명은, 과거의 제 자신이 이 기억 속에 의도적인 빈틈을 남겼음을 확신하게 했다.
참 괘씸한 일이었다. 듬성듬성 이가 빠진 이 시간을 메울 수 있는 게 단 한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을 스스로다. 어차피 기억 못 할 거니까 남은 건 알아서 하라는 건지 뭔지, 에스퍼는 몇 주 전의 저를 욕했다.
그렇게 쭉 저택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최태훈의 옅은 웃음기가 살짝 경직된 건, 조금은 불친절한 설명이 적힌 기사 앞이었다.
지관영은 녹아 휘어진 쇳덩이와 물보라로 만들어진 대형 감옥이 멀찍이서 찍힌 사진을 눈으로 훑었다.
[최태훈과 이태원.]
이날의 설명은 이게 다다. 하지만 에스퍼는 기사 속 거대한 괴형체가 제가 만든 것임을 보자마자 알아봤었다. 그리고 지금, 가이드의 표정을 보면서 이곳에서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다는 것도 곧바로 눈치챘다.
태훈은 제 손목에 걸린 붉은 끈을 만지작거렸다. 이제는 정말로 익숙해진 감촉이다. 가이드는 한참을 망설이듯 입술만 꾹 다물고 있다가, 거의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이거…… 가죽 팔찌요.”
에스퍼의 시선이 흘끗 가이드의 손목으로 향했다.
검붉은 가죽끈은 섬세한 맛은 없는 투박한 디자인이지만 군더더기가 없어서 최태훈과 꽤 어울렸다. 하지만 지관영 그는 선이 예쁜 그 손목에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다.
가이드의 관사에 처음 갔을 때 제가 내뱉었던 날 선 조롱하는 조의 문장을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어서다. 겨우 잘 버티던 것으로 보이던 최태훈은 저것에 관해 물었을 때 완전히 무너졌었다.
최태훈이 말을 잇기도 전인데 저 별거 아닌 물건의 의미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솔직히 꽤 끔찍한 기분이었다. 그 문장이 당사자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는 더욱 더.
“지관영 씨가 사 주셨습니다.”
“…….”
“여기 왔던 거 빼고는 같이 밖에 나간 건 처음이었는데……. 저 날도 일이 많았었죠. 하하. 사실 관영 씨랑은 늘 그랬습니다.”
애써 밝게 말을 잇는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지관영은 문득 최태훈이 저를 향해 호기롭게 외쳤던 말을 떠올렸다.
‘엊그제 하신 말, 그것도 정말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잘 조각된 자존심을 내려놓고 순순히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지금 에스퍼는 그날 제가 내뱉었던 가시 돋친 말을 후회하고 있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의 자신이 가진 소중한 조각을 시기해서 내뱉은, 질 나쁜 독 같은 말들을 정말로 후회한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 못된 문장을 뻔히 떠올리고 있을 텐데도 그 어떤 타박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흐리게 웃으며 연인이 남긴 마지막 기억으로 발을 움직일 뿐이다.
지관영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그 완벽에 가까운 머릿속에서는 채 완성되지 못한 온갖 단어가 떠돌았다. 단순히 가볍게 지나가듯 그땐 심했다고, 미안하다는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흔한 단어로 용서를 구할 수 없는 것임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중간 점검 때 들었던 최태훈의 속내가 이제야 마치 무거운 추를 단 듯 버겁게 끌려 올라왔다. ‘안 될 것 같다’, ‘무섭다’, ‘이렇게까지 비참한 기분이 들 줄은 몰랐는데’.
속을 저미는 것 같은 표현들은 모두 제 혀가 만들어 낸 문장으로 다친 최태훈의 마음이다. 지관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고작 며칠 새로 모든 것을 잊은 채 온갖 날 선 말을 쏟아 내는 연인을 포기하지 않고 붙드는 힘은, 대체 저 약하기 짝이 없는 사내의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방은 뭡니까?”
무조건적인 애정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지관영은 그런 가이드의 얼굴을 잠시간 눈에 담다가 직접 제 침실의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잃어버린 8개월의 마지막이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간의 등장에 잠시 눈을 크게 뜬 태훈은, 이전처럼 얼른 걸음을 떼지 못했다. 가이드의 입에서는 더듬더듬, 조금은 조심스러운 물음이 흘러나왔다.
“……침실인데 들어가도 됩니까?”
참 최태훈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실은 어렸을 때부터 남의 집 침실은 함부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 배운 가이드다. 특히 어른이 쓰는 안방은 쳐다도 보지 말라고 들어왔고, 제 동생에게도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까다롭기로는 한 손 안에 드는 사내의 공간이다.
결국 지관영은 ‘호텔에서 옷 입었던 시간보다 뒹군 시간이 더 길었던 사이에 무슨.’이라는, 최태훈이 알면 목까지 벌겋게 변할 생각을 하면서 영 떨떠름한 얼굴인 가이드의 손을 직접 잡아끌었다.
* * *
에스퍼의 체취가 가장 깊게 남아 있을 방에서는 그가 자주 쓰는 향이 어려 있다. 최태훈은 그걸 깨닫자마자 저도 모르게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이전에도 와 보지 못했던 지관영 그의 가장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디뎠다는 생각에 가슴마저 뛰었다.
사실 최태훈은 제 연인이 만든 그 빽빽한 지도 같은 기억들을 보면서 몇 번이고 신경 써서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지금은 아니지만’, 제 옆에 있는 사내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를 사랑했던 흔적을 본다는 건 마음 한구석을 쿡쿡 찌르고 가끔은 이제껏 잘 참아 왔던 것들을 휘두르기 충분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저 조금은 재미있는 흔적을 좇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미 감정의 수위는 한계점까지 출렁인 지 오래였다.
<나는 이 사람의 에스퍼다>
정말이지, 그 순간처럼 약간은 잠겨 있는 목소리가 옆에 서 있는 에스퍼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란 적 없다. 최태훈은 유독 진하게 쓴 마지막 문장을 보고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입을 열었다.
“……솔직히 이건 좀 감동인데요?”
“내가 쓴 거 아냐.”
“그럼 제가 썼습니까?”
장난처럼 말하자. 가볍게 넘기자.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른다. 겨우겨우 여기까지 가까워졌는데, 만약에 다시 한 번 멀어지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견딜 자신이 없다.
최태훈은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에스퍼가 묘하게 의문스러운 눈으로 끈질기게 제 표정을 살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태훈은 그 시선을 모르는 척하며 가까스로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사실 지관영 그는 실제로도 꽤 긴가민가했다.
분명 가이드는 꽤 담담한 얼굴을 한 채로 농담을 던지는 중이다. 하지만 그 말끔한 모습과는 다른 반응들이 몇 가지 있었다. 예컨대 제 귀마저 울릴 만큼 커진 심장박동이나, 있는 힘껏 주먹 쥔 손이 그 예다.
최태훈은 혹시라도 제 마음이 들킬까 싶어 괜히 쪼그리고 앉아 두꺼운 서류들을 뒤적였다. 지관영이 정신계 에스퍼가 아님을 감사히 여기면서다.
저를 잊어버린 연인이 남긴 기억 하나하나를 따라갈 때마다 그 안에 담긴 애정이 자꾸 잘 버텼던 마음을 휘청이게 했다. 목구멍까지 좋아했던 기억이,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차서 당장에라도 그걸 모두 내뱉고 싶어지기도 했다.
지관영 저 에스퍼에게 8개월의 흔적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시간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아는데도 자꾸 욕심이 머리를 들었다.
그렇게 따뜻하게, 그렇게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주지만 않았더라도 잘 참을 수 있었을 텐데! 태훈은 입술이 아프도록 깨물고서는 눈에 힘을 줬다. 이걸 보겠다고 고집을 부린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제가 지관영을 포기하지 않았듯, 지관영 저 에스퍼도 저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기뻤다. 최태훈은 웅크려 앉은 채로 소리 죽여 심호흡한 뒤, 마치 바닥을 정리하려는 것처럼 어수선하게 흩어진 종이들을 모았다.
들키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 그 감정의 동요는 이미 진작 에스퍼의 눈에 들어온 지 오래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걸 꼬집어 묻지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종이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을까.
제법 말끔해진 침실 바닥 구석에 최태훈의 시선이 닿았다. 사실 그건 이제야 발견한 게 이상할 정도로 눈에 띄는 것이었다. 거의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이곳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붉은색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최태훈의 행동들을 모조리 눈에 담던 지관영은 그제야 조금 실수했다는 얼굴이 됐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상자를 한참을 보던 태훈은 그걸 천천히 기울여 열었다. 지관영은 조금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선수를 쳤다.
“……혼자 요란 떤 거니까 그냥 넘어가, 최태훈.”
빛에 따라 조금은 붉은 기운이 엿보이는 깔끔한 형태의 반지는 지관영 그가 처음 봤을 때 최태훈에게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거다. 아마 기억을 잃기 전의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저것을 준비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다른 사람이나 다름없는 저에게 반지를 받아봤자 헛웃음만 나올 거다. 지관영은 그답지 않게 왠지 좀 머쓱해져서 살짝 인상 쓰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열심히 뜯어 살피던 가이드의 얼굴을 차마 바라보지도 못했다. 최태훈은 반지를 보고도 말 한마디, 한숨 한 번 내쉬지 않고 있는 채다. 완전한 무반응이다.
‘멍청한 짓은 혼자 다 하지.’
지관영은 속으로 저 망할 반지를 다른 곳에 두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이제 바닥에 앉은 상태 그대로 고개까지 푹 숙인 가이드가 눈에 밟혔다.
에스퍼는 그런 태훈을 영 멋쩍은 목소리로 불렀다.
“……최태훈?”
하지만 웅크려 앉은 남자는 영 대꾸가 없다.
지관영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저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가이드의 표정을 살폈다. 사실 그 순간까지는 아주 조금,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민망함이 섞여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에스퍼는 고집스레 절 보지 않는 가이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순식간에 머릿속이 완전히 표백됐다.
최태훈이 운다.
소리도 못 내고, 그냥 눈물만 뚝뚝 떨어트리고 있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 잘 웃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도 했었는데. 지관영은 불안하게 뛰던 태훈의 박동 소리를 듣긴 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왈칵 울어 버릴 줄은 몰랐다.
지관영은 방울진 눈물을 서럽게 흘리는 여섯 살 연하의 남자를 보며 잠시 석상처럼 굳었다. 그는 겨우 보름 좀 넘는 시간 동안 최태훈을 두 번이나 울리고 말았다.
한 번은 모진 말로, 두 번째인 지금은…… 그래, 솔직히 이유를 모르겠다. 관영은 잘 굴러가던 혀가 얼어버린 사람처럼 멍하게 입만 달싹거리다가 허둥지둥 어설프게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겨우 형태를 갖춘 문장들이 조금은 더듬는 것처럼 자신 없이 흘러나왔다.
“최태훈. 잠깐만, 너 지금…….”
차라리 소리라도 내고 운다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사에서 눈 안 가득 고인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고 버티던 그때처럼, 최태훈은 어떤 흐느낌도 내지 않는다. 그냥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잔뜩 글썽이는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가게 내버려 둘 뿐이다.
“울지 말고, 아니 왜 이런 거 가지고. 최태훈?”
지관영은 입 밖으로 질문을 꺼내고 나서야 이 울음의 의미를 가까스로 짐작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반지 때문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뒤늦게 든 거다.
그건 완전히 파업을 외치는 머리로 힘겹게 이뤄 낸 성과다.
최태훈은 겨우 스물여덟이다.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끔찍하게 죽은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말도 안 되는 중압감 속에서 기억을 잃은 연인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마음 졸이는 시간을 버티기에는 너무나 적은 나이다. 아니, 이런 건 나이가 몇이라도 힘들고 버거운 일일 거다. 그것도 아무에게도 힘든 내색 하지 않고 혼자 꾹 누르고 버티기에는 더욱더.
가이드는 이 반지를 보는 순간 제 에스퍼가 이걸 언제, 어떻게 준비했을지가 뻔히 그려졌다. 아마도 지관영은 제가 김권석이 보여주는 반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을 때부터 이걸 생각했을 거다. 그때까진 평범한 상담사였던 ‘선생’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왔을 때도 제 에스퍼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다가 그걸 급히 끊었었다.
……직접 주지도 못할 반지를 위해서.
죽은 김권석에 대한 애도도, 기억을 잃은 연인을 바라보는 괴로움도, 너무나 막중한 짐을 짊어진 부담감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최태훈의 감정은 이제야 막 그 둑이 터졌다.
“……관영, 씨.”
“그래, 울지 마. 태훈아, ……이게 뭐라고 울고 그래. 최태훈.”
‘태훈아’.
가이드는 처음으로 제 성을 떼고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더욱 울컥해서 숨까지 헐떡였다. 그 반응에 더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건 에스퍼 쪽이다. 지관영은 울면서도 드문드문 말을 이으려고 부단히도 애를 쓰는 태훈의 어깨를 조심스레 다독였다.
아니, 사실 다독인다는 단어도 꽤 과격하다.
그는 정말 손가락 하나라도 잘못 닿으면 큰일 나는 것을 다루는 양, 뚝뚝 눈물을 떨어트리는 페어 앞에서 쩔쩔맸다.
“관영 씨, 정말 조금만…… 진짜, 흑, 조금만이라도.”
“응. 그래.”
지관영은 이제 숫제 바들바들 떨기까지 하며 말을 잇는 태훈을 보며 가이드의 어깨에 댔던 제 손을 주먹 쥐었다가, 폈다가, 다시 쓸었다가를 반복했다. 그야말로 최태훈의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라면 그 무엇이든 이루어질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못 해 줄 것이 없었다.
“절 좋아해 주시면, 후우, 안, 되겠습니까.”
최태훈의 마른 어깨뼈를 쓸던 에스퍼의 커다란 손이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순식간에 수백, 수천, 수만의 가정을 떠올렸던 두뇌에 완전히 제동이 걸렸다.
가이드는 그런 제 연인의 반응을 뭐로 해석했는지 이제 목까지 발갛게 변한 얼굴로 흐끅이며 거의 빌 듯이 문장을 이어갔다.
“진짜 조금이면, 조금이면 되는데. 많이 바라지도 않을 테니까…….”
“…….”
“저 조금만 좋아해, 주십시오, 예?”
사랑이라는 단어를 함부로 입에 담으면 눈앞에 있는 사내가 저를 싫어할까 두려워 애써 눌러 담은 표현이었다. 지관영은 그런 최태훈을 뜻 모를 시선으로 가만히 눈에 담았다.
덕분에 가이드는 혹시라도 제 연인이 저를 버릴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지관영의 셔츠 깃을 꽉 붙잡은 채로 이제 거의 엉엉 울면서 고백했다.
“제가 진짜, 흑, 진짜, 행복하게…… 해 드릴 수 있는데.”
역시 최태훈은 정말 바보다. 에스퍼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눈앞의 남자는, 지금 이 관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게 그 자신인 줄도 모르고 먼저 저렇게 약점을 드러내 버린다.
울면서 하는 말이 저를 탓하는 말이었다면 급히 그걸 닦아주며 달래 줬을 텐데.
최태훈 그가 말했던 것처럼 당장에 사과했을 거다. 무릎을 꿇라고 하면 꿇고 그 발등을 핥으라고 하면 기꺼이 그걸 따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사랑스럽고 또 바보 같은 가이드는 제가 먼저 백기를 들고 찾아와 울며 겨우 마음 한 조각만을 원할 뿐이라고 애원한다.
마치 그게 전부라는 것처럼 제게 목을 맨다.
교활한 괴물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관영은 흐느끼는 최태훈의 등을 손끝으로 간질이듯 쓸면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여전히 속으로는 가이드의 눈물에 쩔쩔맬지언정, 에스퍼는 그걸 꾹 눌러 감춘 채다.
“어떻게 행복하게 해 줄 건데.”
“진짜, 진짜 제가 잘하겠습니다, 하아, 흑…….”
“그러니까 어떻게. 최태훈 네가 나보다 돈을 더 잘 벌어, 아니면 더 뭐가 있기를 해?”
이 와중에도 무엇 하나 틀린 말이 없다.
태훈은 뺨 위로 도르륵, 맺힌 눈물을 떨어트리면서도 꾹 막힌 입술을 달싹였다. 사실 최태훈은 여전히 좀 무섭다. 이 물음에 답을 늦게 하면 제가 사랑하는 이 사람은 완전히 저와 멀리 거리를 두고 사라질 것만 같아서다.
결국 가이드는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떠오르는 말을 아무거나 마구 내뱉었다.
“……담배, 끊고.”
솔직히 지관영은 이때가 말쑥하게 걸고 있던 표정이 흐트러질 뻔한 가장 큰 위기였다. 하지만 짐짓 엄한 얼굴을 한 채로 살살 다그쳤다.
“또.”
“센터 편 안 들고, 흑, 지관영 씨 편들고.”
“더 불러.”
사실 이제는 더 할 말이 없다.
에스퍼의 말마따나 돈이 더 많은 것도 아니고, 영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관영 저 에스퍼의 마음을 가질 만한 방법 같은 건 더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껏 동생들 앞에서 단 한 번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든든한 장남이자 어디서든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는 바른 생활 가이드는 여기 없다.
그저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 한 줌을 얻고 싶어서, 그냥 그게 너무 가지고 싶어서 애가 달은 사내만 있을 뿐이다. 결국 최태훈은 그럴듯한 말을 찾지 못하고 울컥한 얼굴로 제 연인을 보면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바보 같은 고백을 했다.
“정말 손에…… 흐윽,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드릴 테니까.”
결국 지관영은 꾹 참던 웃음이 슬쩍 터져버렸다.
얼른 입술을 깨물어 안 웃은 척하기는 했지만, 까딱하면 들킬 뻔한 순간이다. 하지만 엉엉 울면서 말하는 가이드는 그런 걸 눈치채지도 못한 채 계속 빨라지는 숨을 참으려 애쓰기에 바빴다.
“저 좀, 조금만이라도, 진짜 조금만이라도 좋아해 주십시오, 관영, 씨.”
헐떡이면서까지 기어코 문장을 끝마치는 모습은 너무도 최태훈다웠다. 지관영은 눈가가 발갛게 변하고 숨을 너무 급히 쉬어서 옅게 콜록이기까지 시작한 제 가이드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차면서, 얼른 제 이름이 새겨진 등을 쓸었다.
물론 말만큼은 여전히 조금 한 발짝 물러난 채다.
“최태훈, 난 가이드 같은 거 관심 없어. 그딴 게 알 게 뭐야.”
“예, 예에, 압니다. 제가 진짜, 진짜 잘할게요. 정말 잘하겠습니다.”
급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울지 않으려고 끙끙대는데도 저절로 눈물이 나는 걸 연신 손으로 문지르는 것조차도 안쓰럽게만 보였다. 지관영은 그렇지 않아도 빨갛게 무른 눈가가 쓰라릴까 싶어 최태훈의 손에 제 손가락을 얽혀들게 하면서 느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저번처럼 촬영장에서 시시덕대고 있어 봐. 아주 볼만한 상황 만들어 줄 테니까.”
확실히 최태훈은 호언장담했던 것을 모두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이르게. 하지만 괴물로서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치 세뇌하듯 간교한 수를 쓴 과거의 제 자신과 당장에 뚝뚝 눈물을 떨어뜨리며 사랑해 달라고 우는 최태훈 사이에서, 더 못된 짓을 하기도 좀 그렇다.
지관영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한 얼굴을 하고서도 무조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최태훈을 보며 가늘게 눈을 접어 웃었다.
“예? 예, 예에, 알겠습니다, 안 그럴…….”
이어지는 문장을 삼키는 입맞춤은 유독 달았다.
살짝 벌어진 입 안으로 자연스럽게 혀가 밀고 들어가고, 고른 치열과 혀 아래의 말랑한 부분을 간질였다.
마치 아이들의 장난 같은 키스였다.
하지만 그게 순식간에 불붙은 듯 진하고 끈적이게 변한 건, 뒤늦게 눈을 크게 뜬 가이드 때문이었다. 지관영은 저를 밀어 넘어트려 올라탄 채 정신없이 입을 맞추는 최태훈의 침범을 기꺼이 환영했다.
더운 숨이 떨어지는 몇 초조차 아쉽다는 듯 매달리는 온기가 기분 좋았다. 에스퍼는 천천히 가이드의 허리춤 사이로 제 손을 밀어 넣어 곧은 등줄기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것에 가이드는 살짝 입술을 떼고 작게 히끅댔다. 에스퍼는 제 품 안에 기꺼이 떨어진 온기를 탐욕스레 쥐어 잡아당기며 열이 오른 귓가에 속삭였다.
“……최태훈. 그만 울어.”
작게 위아래로 젓는 고갯짓이 보였다.
이제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지관영은 제 손이 움직일 때마다 허리를 움찔거리며 급한 숨을 몰아쉬는 최태훈의 반응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조금 더 애를 태우게 해서 저 융통성 없는 머릿속을 제 생각으로만 가득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고, 아니면 과거의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마냥 예뻐하고, 아끼고, 사랑해주면서 아직은 약간 뻣뻣한 이 몸을 말 한마디로 혼자 녹아들게 하는 것도 좋을 거다. 그렇게 한껏 애정을 쏟아붓다 보면 이렇게 숨넘어갈 듯 울릴 일도 없어질 거다.
이제 가이드 최태훈은 확실히 ‘과거의 지관영’에서 ‘현재의 지관영’에게로 넘어왔다. 괴물의 입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 * *
연구원들은 지금 하나같이 긴장한 눈을 한 채 페어의 작은 움직임, 말 한마디에도 초긴장 상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페어 중 한 사내의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의 걱정을 한 몸에 받는 에스퍼는 그 염려보다 꽤 순순하다.
“……와. 정말 마이너스 수치가 뜨네요.”
최태훈은 센터의 매칭 페이퍼를 들여다보며 조금은 놀란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에 가장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 된 건 오진우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페어는 퍽 담담할 뿐이었다.
D-7, 정확히 일주일 남은 오늘 지관영과 최태훈은 센터로 나란히 등장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모습에 온갖 데이터 사이에 파묻혀 있던 연구원 몇은 손에 들고 있던 태블릿 PC까지 떨어트렸다.
문제의 페어는 그런 반응을 뻔히 짐작했다는 듯이 무던한 얼굴로 페어 매칭률 검토를 요청했다. 지관영의 팔과 손에 매칭률 테스트 기기를 달던 연구원 하나는, 그때의 긴장감을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마음을 고쳐먹은 지관영이 ‘어디 나에게 이딴 걸 달아’ 하며 목을 비틀어 내던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저 세 번째 측정 불가의 에스퍼는 그런 날 선 반응 대신, 테스트 결과 모니터를 긴장한 채로 노려보고 있는 최태훈을 눈으로 훑기만 했다.
에스퍼 지관영과 가이드 최태훈의 매칭률은 이전의 오진우 때와 같았다. ‘-999999’.
기기가 찍어낼 수 있는 가장 낮은 숫자였다.
“원래는 100 넘었었다며?”
“예. 그런데 지금은 그…… ‘주도권’이라는 걸 넘긴 상태입니다.”
굉장히 일상적인 어조로 흘러나온 최태훈의 말에 모두의 근심과 걱정 한가운데에 있는 사내의 눈썹이 슬쩍 휘어 올라갔다. 그 작은 변화에 동요한 건 연구원들이었다. 몇몇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잔뜩 긴장한 채로 불가능할 것이 분명한 제압 루트를 머릿속으로 그리기까지 했다.
눈앞의 저 에스퍼는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8개월간의 기억을 모조리 지운 사내이면서,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과 엄청난 매칭률을 이루는 이한솔을 벽에 내다 꽂고 아무렇지도 않게 고문한 남자다.
허나 그걸 보는 최태훈은 평온하기만 했다.
“이 한 달 동안의 실험이 끝나면 도로 준다고 합니다.”
“그걸 어떻게 믿지?”
“……그렇긴 하지만, 거절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 실험의 승낙을 두고 가이드의 목숨이 저울 위에 올라갔었다. 최태훈은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심장이 쿵 내려앉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다. 지관영은 그런 자신의 가이드를 잠시간 눈에 담더니, 평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같으면 이한솔인가 하는 그걸 죽였겠어.”
에스퍼의 말에 오진우는 꽤 묘한 얼굴이 됐다.
저를 찾아와 초조한 얼굴로 ‘아버지’가 죽이려 한다는 기묘한 말을 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금 이한솔은 센터 밖으로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24시간 어디든 정신계 연구원의 감시가 뒤따른다.
당장 지관영과의 매칭률을 고스란히 쥐고 있는 한솔에게 무슨 일이라도 난다면, 그때는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자신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에스퍼의 말에 최태훈은 살짝 찡그리듯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말렸습니다.”
“저 에스퍼 때문에?”
지관영의 시선이 약간은 건성으로 오진우를 흘끗 향했다.
그 덕에 생각에 잠겨 있던 오진우,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를 신중하게 듣고 있던 오연은 물론이고 다른 연구원 몇도 찔끔한 얼굴이 됐다. 태훈은 어떻게 보면 무례하기까지 한 그 턱짓에 슬쩍 곤란한 듯 눈썹을 휘었다.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닙니다.”
물론, 유일하게 매칭되는 가이드를 잃은 오진우가 미쳐 죽게 되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이기는 했다. 허나 그 형이자 저를 살뜰히 챙겼던 오연의 필사적임 때문이기도 했고, 괴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제 에스퍼, 지관영 때문이기도 했다.
가이드는 무슨 말을 덧붙여야 제 에스퍼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음이 편할까 싶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면서 눈을 굴렸다. 저와 지관영을 볼 때마다 세상에 다시없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는 오진우와 마치 상사에게 보고하는 것 같은 태도가 된 오연의 부담이 줄었으면 해서다.
‘선생’ 그자는, 이한솔이 없었더라도 어떻게든 이 실험을 만들어냈을 자임을 이제는 잘 아는 태훈이다. 지관영은 그런 연인의 반응을 느긋하게 살폈다. 그는 요 며칠을 온종일 제 가이드와 함께 보냈다. 그것도 관사나 호텔이 아닌 제 저택에서였다.
사실 처음에는 태훈을 잘 달랜 뒤 관사로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제 저택에서 다른 사람을 머물게 한다는 것 자체가 선택지에서 사라진 지 너무 오래였던 터였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 눈물로만 가득했던 고백 후 완전히 탈진해서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했고, 너무 울어서인지 언제나 단정하기만 했던 눈가는 퉁퉁 부어버렸다.
대체 얼마나 혼자서 속을 끓였었는지 손만 닿고 말 한마디만 건네도 다시 뺨 위로 눈물을 도르륵 굴리는데 이건 뭐 도저히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어영부영 품에 안고 달래다 보니 하루가 갔다.
한 번 물꼬를 트니 그다음은 더 쉬웠다. 아침에 조금은 부스스한 얼굴로 눈을 뜬 최태훈이 옆에 있는 저를 빤히 보다가 별안간 푹, 고개를 묻으며 끌어안는데 잠시 손 둘 곳을 몰랐던 지관영이다.
그건 호텔에서 이틀간 몸을 섞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일어나 같이 샤워를 하면서 간간이 입을 맞추자, 여전히 조금은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사내가 더욱 조르듯 제 목을 끌어당겼다.
더운물의 습기, 옅은 수증기의 먹먹함, 맞닿은 피부의 뜨끈한 감촉, 혀를 섞어 키스할 때의 찌릿한 감각.
매칭 가이드와의 접촉을 오랫동안 하지 않은지라 한껏 예민해졌던 오감이 최태훈과의 접촉 하나하나에 확 곤두섰다.
저에 대한 애정을 조금의 감춤 없이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람을 곁에 둔다는 건 정말로 묘한 일이었다. 에스퍼의 들끓는 본능이 찾는 감각이 아닌 지관영 그 자체가 휘둘리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이상했지만, 나쁜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 꽤 좋았다. 지관영은 제 저택에서 최태훈과 며칠을 보내면서 기억의 빈틈들을 하나하나 모두 맞춰 나갔다.
태훈은 듣기 좋게 낮은 목소리로 과거의 저와 보냈던 시간을 전해줬다. 오진우나 이한솔에 대한 것을 자세히 들은 것도 그때다.
편하게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최태훈의 가지런한 이가 살짝 보였다. 조금은 나른한 얼굴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지관영의 손이 살짝 헝클어진 최태훈의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둥글고 예쁜 이마가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란 최태훈은 순간 멍한 표정을 했고, 그걸 지켜보는 연구원들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내놓는 게 더 낫군.”
“…….”
“왜?”
이 남자는 기억을 잃든, 잃지 않든 정말 참 한결같다.
그건 성격에 국한된 게 아니다. 취향마저 같다. 최태훈은 모든 사람의 시선이 쏠린 민망함도 잊고 그렇게 생각했다. 센터 사람들은 둘 사이의 그 달짝지근한 공기에 절로 고인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그러니까 진짜로. 정말로?
모두의 의문에 대한 총대를 짊어진 건 센터장 권다희였다.
그녀는 직책에 충실한 얼굴을 한 채 약간은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최태훈 씨.”
“예, 센터장님.”
분명 두 사람을 향해 물었건만 대답은 한 명에게서만 돌아왔다. 심지어 대답을 안 한 쪽에선 시선을 돌려 바라보는 반응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센터장은 그 쌩한 반응에 말려들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지금 두 분은…… 다시, ‘페어’가 되신 건가요?”
최태훈의 눈이 말갛게 끔벅끔벅 움직였다. 곧장 열리던 입도 꾹 닫혔다. 중앙 연구실 안은 순식간에 펜 굴러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으로 찼다. 정적의 시작이 된 질문을 던진 센터장의 시선이 슬그머니 최태훈의 옆에 앉은 사내에게로 향했다.
<가이드 최태훈은 에스퍼 지관영과 논페어 상태에서 그를 자신의 에스퍼로 삼아야 한다. 기한은 한 달.>
이건 모두의 머릿속에 악몽처럼 남은 실험 목표다. 그리고 그 목표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최태훈은 슬쩍 눈치 보듯 고개를 돌려 지관영을 바라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시선이 마주치자, 이미 한참 전부터 제 가이드를 향해 고정되어 있던 에스퍼의 눈이 희미하게 휘었다. 태훈은 아직도 지관영의 저런 표정을 볼 때마다 속에서 울컥하고 뭐가 올라오는 것만 같다.
에스퍼의 모양 좋은 입술이 나직하게 열렸다.
“네, 그렇습니다.”
그 직업다운 또렷한 목소리와 발음으로 흘러나온 긍정에 누군가가 작은 탄식 같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건 정말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결과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관영이 ‘매칭 가이드’인 이한솔을 향해 지독히도 냉랭한 반응을 내보이는 것을 보고 괜히 지관영 저자의 근처로 다가갔다가 최태훈마저 그런 심한 짓을 당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저 흉포한 에스퍼를 다시 순순히 센터로 데려오다 못해 저리도 온순한 대답을 끌어내게 하다니. 몇몇 연구원들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가이드는 왠지 또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아서 눈에 바짝 힘을 줬다. 최태훈은 잘 안다. 제 에스퍼가 저에게도 비밀로 한 ‘반칙’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 대답이 나오기는 힘들었을 거다.
조금 전 에스퍼의 입에서 나온 긍정은 지관영 그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저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나올 수 있던 거다.
테이블 아래로 에스퍼의 손끝이 장난치듯 걸려들었다. 최태훈은 그 가벼운 손장난을 세게 맞잡는 것으로 대응했다. 지관영은 저를 잡은 가이드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혀를 차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약속된 날이 될 때까지 이건 저쪽엔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직 ‘그 방법’을 못 찾아냈지 않습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풀렸던 분위기가 다시 쑥 아래로 꺼져 들었다.
지관영의 말이 맞다. 아직 센터는 선생이 가이드를 휘두르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 이상, 당장 가이드들을 구해 낸다고 해도 나중에 어떤 것으로 또 빌미가 잡힐지 알 수 없다.
오연은 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요새 매일같이 센터장의 말을 곱씹는다.
선생은 너무나 월등하다. 아니, 사실 ‘월등하다’라는 단어는 그를 표현하기 한없이 모자라다. 절대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답에 가까운 말이다. 선생에게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눈앞에 또 다른 벽이 등장한다. 무슨 수를 써도 넘을 수 없는 거인을 앞둔 것만 같은 무력감이 매일매일 그 좌절만큼 자란다.
최태훈은 어두워진 연구원들의 얼굴을 보자니 저도 다시 속이 꽉 막히는 것만 같아서, 애써 밝은 얼굴을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음료수 하나 뽑아 올까 하는데.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신 분 계십니까?”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리려는 가이드의 말에 연구원 몇이 흐리게 웃으며 몇 개의 음료를 말했다.
“같이 가지.”
“괜찮습니다. 바로 옆 코너 자판기인데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굳이 자판기가 가까이 있어서 뿐만 아니라 최태훈은 잠시 혼자 숨을 고르고 환기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관영의 말에 쿵쾅대고 뛰는 심장과, ‘선생’이 주는 그 막연한 공포가 서로 뒤섞여 속이 울렁였기 때문이다.
태훈의 불안한 박동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지관영은 결국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최태훈은 무언가 심란한 것이 있으면 다른 이에게 털어놓지 않고 먼저 혼자 정리하는 성향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챈 탓이다.
커피 세 개. 콜라 하나. 레모네이드 둘.
최태훈은 자판기에 지폐 몇 개를 집어넣으며 저와 센터 사람이 함께 마실 음료를 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가시방석 위에 선 듯 불편한 건 여전했다.
‘선생’.
단 한 명의 에스퍼를 앞에 두고 저 수백이 넘는 이들이 절망을 떠올리고 있다. 최고의 엘리트답게 언제나 깔끔한 복장을 유지했던 연구원들의 모습은 더 찾아볼 수 없다.
당장 센터장 권다희만 해도 한 달이 채 못 되는 새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잔뜩 구겨진 티셔츠를 걸치고 머리를 질끈 묶은 차림은 약간 핼쑥하게도 보였다.
물론 다른 에스퍼 역시 별다를 바 없다.
몇몇은 이제 아예 연구실에서 자기 시작했는지 슬쩍 둘러본 내부에는 얇은 이불이며 접이식 침대까지 있었다. 그들 모두 자신의 가이드를 위해서, 혹은 옆자리 동료를 위해서 정말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는 거다.
……방법이 뭘까.
대체 어떻게 어떤 구애 없이 가이드에게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걸까. 태훈은 자판기의 버튼을 꾹 누를 때마다 우당탕, 하고 음료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자문했다.
하지만 저 많은 에스퍼도 알아내지 못한 것의 답이 그리 쉽게 나올 리 없었다. 최태훈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온 음료를 모두 꺼내 안았다.
차가운 캔이 맨 피부에 와 닿는 감각이 서늘했다.
사실 어쩌면, 그 싸한 감각은 곧이어 만날 불쾌한 이에 대한 경고였을지도 몰랐다.
“…….”
“…….”
역시 지관영 씨를 두고 오기 잘했지.
최태훈은 저를 보며 대번에 눈살을 찌푸리는 이한솔을 보며 생각했다.
* * *
“지관영 씨, 태훈 씨 없을 때 드릴 말이 있어요.”
비스듬히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지관영은 대답 대신 시선만 슬쩍 움직였다. 센터장 권다희다. 센터의 사람들은 조금 전 페어가 함께 있을 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센터장이 할 말을 짐작한 오진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숨을 한 번 삼키고는 문장 가득 힘을 주어 입을 열었다.
“선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자세히.”
오늘 내내 최태훈을 제외한 센터의 사람들은 있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하던 에스퍼가 처음으로 재깍 반응을 보였다. 센터장은 테이블에 기대앉은 채 조금은 수척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가이드 이한솔에게 선생이 무언가 지시를 내린 모양입니다. 그것도 굉장히 좋지 않은 방향인 게 틀림없습니다. 여기 오진우 씨에게 찾아와서 그랬다더군요. ‘아버지가 나를 정말 죽이려고 한다’.”
“…….”
“아시다시피 지금 지관영 씨의 ‘매칭 가이드’는 이한솔입니다. 다시 말해 태훈 씨는 물론이고 그 어떤 가이드와도 이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지관영은 조금 전 최태훈과 자신의 매칭률이 마이너스 포인트인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이한솔 그 가이드와 제가 ‘매칭’되는 상황이라는 것 역시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단 한 번 닿았던 그 접촉을 다시 바라는 에스퍼의 본능이 날이 갈수록 흉흉하게 머리를 들고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 지관영 본인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퍼 지관영, 그가 가지고 있는 욕구는 보통의 것과는 모양새가 좀 다르다. 그가 무엇보다 목마른 가정은 이거다.
뒤틀리고 일그러진 제 시야가 순식간에 맞춰지면서 환한 색을 가졌던 그 엄청난 감각을 ‘최태훈’이 되찾는다면, 그런 그와 닿으면 정말 어떤 기분일까?
관영은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이 바짝 말랐다. 센터장은 아무 말 없이 제 말을 듣고 있는 에스퍼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이한솔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아니, 이건 절대 일어나서도 안 되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이지만 가장 나쁜 가정을 한다고 하면…….”
“까딱하면 답 없이 미쳐 날뛰게 될 수도 있다 이거잖습니까.”
“……네. 그래서 이한솔을 24시간 마크하면서 지켜보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이전과는 좀 상태가 다릅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왠지 쫓기는 사람 같다고나 할까요.”
지관영은 제 머리를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역시 처음부터 거슬리고 마음에 들지 않던 ‘그건’, 이렇게 또 저를 귀찮게 한다. 정말 마음 같아서는 선생이니 이한솔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당장에 완전히 숨통을 끊고 싶을 정도다.
사실 최태훈이 없었더라면 정말 이 바보 같은 실험의 꼭두각시로 서 있는 것 대신 몇 번이고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을지도 모르는 그다.
“그래서 말인데요. 지관영 씨가 이한솔과 직접 이야기하면서 구슬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구슬려?”
센터장의 말에 지관영의 눈썹 하나가 대번에 치켜 올라갔다. 권다희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접촉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관영 씨가 마음을 돌리신 이상 그래 봐야 남은 일주일, 잘 버티기만 하면 이 ‘실험’은 태훈 씨의 성공입니다. 그건 600여 명의 가이드 목숨이 지켜진다는 의미예요.”
“…….”
“약속대로 실험이 끝나고 나서 곧바로 태훈 씨가 매칭률을 옮겨 받으면 지관영 씨 역시 문제가 없겠죠. 하지만 만에 하나 그게 아니라면요?”
센터의 연구원들이 지관영과 최태훈이 다시 페어가 된 것을 보면서도 마냥 기뻐하지 못한 채 컴퓨터 앞에 붙어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만약, 선생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이 가정 하나가 남는 한 그들이 안심할 겨를은 없다.
지관영과 최태훈은 일종의 보험일 뿐, 결국에는 선생의 그 알 수 없는 살인 방법의 비밀을 밝히는 게 최우선 목표일 뿐이다. 지관영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최태훈 역시 그 ‘선생’이라는 자의 카운슬링을 받은 이상, 이유도 모른 채 무작정 죽어 나갔다는 가이드와 같은 상황이 될 수도 있는 거다.
에스퍼는 미간을 구긴 채 비스듬히 팔짱을 끼었다. 센터장은 그런 지관영을 달래듯 말을 이어갔다.
“이한솔은 지관영 씨에게 굉장한 집착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걸 반대로 이용해 보죠. 오진우 씨에게 한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내는 것만이라도 목표로 해서요. 아마 선생에 대한 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테니까요.”
“……세, 센터장님!”
다급한 목소리가 센터장의 말을 끊고 들어왔다.
덕분에 제법 심각한 분위기였던 테이블의 시선이 그 부름이 시작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당황한 얼굴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정신계 에스퍼 하나가 있었다.
“네?”
“저, 이것 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신계 에스퍼는 기기의 버튼 몇 개를 조작하더니 중앙 연구실의 거대한 메인 창에 화면을 띄웠다. 덕분에 연구실 여기저기에 있던 수백의 에스퍼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하게 됐다. 그들이 지금 보고 있는 건 실시간 CCTV 화면이다.
연구실 안은 잠시간 멍한 침묵에 찼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던 지관영은, 머잖아 인상을 찌푸린 채로 헛웃음을 흘렸다.
“돌아 버리겠군.”
짜증이 한껏 묻어나는 목소리에 연구원들은 말없이 화면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건 최태훈의 모습이다. 좀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자신들이 함께 부탁한 음료수 캔 몇 개를 품에 안고 있는 최태훈과 그런 그를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이한솔의 모습이다.
원래는 이한솔만을 돌아가며 감시하던 정신계 에스퍼였다.
이한솔 그는 묘하게 뒤틀린 체계를 가진 터라 정확한 생각을 읽을 수는 없지만, 덕분에 영역을 열고 있으면 감정의 기복 정도는 어렵잖게 파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정신계 에스퍼는 그런 이한솔의 특징을 이용하여 그를 감시하면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한솔의 파장이 일그러지듯 날카로워지더니, 그와 동시에 상황실에서 핫라인으로 연락이 쏟아졌다.
물론 그 이유는 보다시피 화면 속의 모습 때문이다.
지관영은 신경질적인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오연은 그런 지관영을 말렸다.
“이미 에스퍼가 바로 옆에서 대기 중입니다. 잠깐 지켜보시죠. 지관영 씨가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띕니다.”
“봐서 뭐합니까.”
“어쨌거나 구슬리는 쪽은 최태훈 씨가 더 낫잖습니까. 저 가이드를 데리고 친절하게 이야기하실 자신 있으십니까?”
듣기만 해도 성질을 긁는 가정에 에스퍼는 헛소리 말라며 오연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입을 연 단정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다.
[센터 어디에서 지내시는 겁니까.]
[……뭐?]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 거 맞습니까?]
연구실 안의 누군가가 길게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났다. 지관영은 순간 저 역시 딱 그 한숨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헛소리를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제 가이드다. 세상에 지금 최태훈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한솔의 안부를 묻고 있다. 하지만 그 황당함에 찬 연구실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최태훈 그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최태훈은 제 앞에서 있는 대로 표정을 구긴 이한솔을 보며 말을 이었다.
“굶어 죽기라도 하실 겁니까?”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매칭도 안 되면서 잘난 척 마!”
이한솔은 제가 저번에도 최태훈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래서 더 속이 끓어 오른다. 화가 치민다.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 않을 저 가이드의 손을 잡고 나가던 에스퍼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아버지’가 저에게 그 믿을 수 없는 말을 한 것도 그날 이후다. 분명 아버지는 그날의 모습을 보고 저에게 실망한 게 분명했다.
이한솔은 으드득, 이를 갈면서 잔뜩 날을 세웠다.
하고 많은 표현 중에서 ‘죽는다’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버지는 눈앞의 저 가이드를 향해 이렇게 말했었다.
<가장 이상적인 가이드>!
그는 정말이지 알고 싶다.
저는 아주 약간의 매칭률이라도 그걸 넘겨받기만 한다면 그 어떤 빈약한 수치라도 가장 높은 수치로 이끄는 힘을 가졌다. 심지어는 다른 가이드와의 매칭은 꿈도 못 꾸게끔, 절대적인 존재마저 될 수 있다.
그런데 제 아버지는 눈앞의 저 별 볼 일 없는 가이드를 향해 온갖 극찬을 늘어놨다. 가장 이상적이고 또 완벽한 가이드는 나인데.
그것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당연히 걱정해야죠.”
하지만 날카로운 한솔의 반응과는 달리, 최태훈의 입에서는 너무나 담담한 문장이 흘러나왔다.
“전 이한솔 당신이 죽으면 정말 곤란합니다.”
“…….”
“돌려받아야 할 게 있는 사람이 곧 죽을 모습을 하고 다니면 누구라도 챙길 겁니다. 정신 차리세요. 꼴이 그게 뭡니까?”
이한솔은 이제는 목까지 벌겋게 변한 채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지금 최태훈의 말대로, 스무날이 좀 넘는 시간 동안 마치 큰 병에 걸린 사람처럼 야위고 다른 인상이 됐다. 최태훈 그도 꽤 마음고생을 하면서 제법 살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한솔은 단순히 좀 마른 정도가 아니었다.
보기 좋게 곱상한 인상은 사라져서 눈 안에는 독기만 남았고, 후덥지근한 날씨에 골라 입은 얇은 옷 너머로는 일그러진 흉터가 보였다. 잔뜩 거칠어진 피부며 부르튼 입술은 말할 것도 없다.
최태훈은 그런 이한솔을 보며 살짝 어깨를 으쓱하더니 할 말은 다 했다는 양 휙 스쳐 지나갔다. 지관영이 쓰는 향수 냄새가 났다. 한솔은 그걸 깨닫자마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관영, 그는 이한솔이 한평생 바라 왔던 최강의 에스퍼다. 정말로 이번만은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오진우는 끝까지 이전 페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지만, 이번처럼 원래 있던 가이드와의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선택할 여지없이 제가 선택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말도 안 되는 수치를 찍은 페어의 매칭률이 제 것이 되었으니, 그렇지 않아도 높은 그 숫자가 천정부지로 올라갈 일만 남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 어떤 것도 제 기대처럼 된 게 없었다.
드디어 제 손에 떨어졌다고 생각한 에스퍼는 자신을 보자마자 내치며 조롱했고, 단 1퍼센트의 매칭도 되지 않는 최태훈을 다시 한 번 택했다. 이번에도 저는 아니었다.
너무나 분했다. 왜 나는 언제나 ‘가이드’라는 것에 밀릴 수밖에 없는지, 속이 뒤집히도록 아팠다. 오진우는 10년이 넘도록 그 ‘거짓말쟁이’ 김가하만을 그렸고, 지관영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또 경계하면서도 결국엔 최태훈의 손을 다시 잡았다.
이한솔은 휘청이며 벽에 기대 웅크려 앉았다.
6일. 겨우 6일 남았다.
제 아버지가 자신에게 죽기를 명령한 때로부터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었다. 이 드넓은 공간의 수많은 이들 중 저를 걱정한다고 말하는 유일한 사람이, 하필 제 에스퍼어야 했던 사내를 빼앗아 간 가이드라니!
이한솔은 작게 웃었다. 그건 조금은 흐느끼는 소리로도 들리는 쉰 웃음이었다. 그 소리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려던 가이드의 귀에 정확히 꽂혀 들었다. 최태훈은 생각했다.
‘무시하자!’
하지만 생각과 달리 가이드의 걷는 속도는 느려진 지 오래다.
사실 최태훈은 이한솔을 보고 꽤 놀랐다. 태훈의 머릿속에 있는 이한솔은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해사하게 웃으며 지관영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던 모습도, 정말 화날 정도로 뾰족하게 빈정대던 모습도 어쨌든 얼핏 봐서는 꽤 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충 보고 지나갔다면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결 좋아 보였던 머리카락마저 뻗치고 엉켜 있고, 옷도 잔뜩 구겨진 채다.
……실험에서 지면 누구의 가이드도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인가? 최태훈은 제가 제시했던 실험 조건을 떠올렸다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이한솔, 저 막돼먹은 심보의 가이드는 결코 에스퍼와 페어가 되어선 안 된다. 오진우만 떠올려도 그렇다. 세상에, 페어 가이드를 죽이고 그 자릴 십 년이나 차지하다니. 그렇게 악랄한 짓이 어디에 있나 싶을 뿐이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렇게 깔끔하게 결론 내린 생각과는 다르게 걷는 중간중간 자꾸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머리로는 진작 성큼성큼 자리를 떴지만 현실은 영 그게 안 됐다. 결국 가이드는 얼마 못 가 멈춰선 채 긴 한숨을 쉬었다. 그 모습에 이한솔도, 그런 이한솔과 최태훈 근처에서 숨죽이고 대기하는 에스퍼도, CCTV를 통해 그런 둘 사이를 지켜보고 있는 연구원들과 지관영도 조금은 의아한 눈이 됐다.
최태훈은 그 한숨으로부터 딱 3초 뒤에 제가 걸어온 길을 다시 곧바로 거슬러 갔다. 머뭇거렸던 조금 전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이한솔은 쪼그려 앉은 채로 어느새 저를 조금 비뚜름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장신의 가이드를 올려다보았다. 살이 좀 빠졌다지만 키도 크고 골격 자체도 나쁘지 않은 최태훈은, 움츠리듯 앉은 이한솔이 위압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성인 남성이었다.
“……뭐, 뭐야!”
“그런데 몇 살인데 저번부터 반말이십니까?”
이한솔은 생각지도 못했던 최태훈의 말에 순간 당황한 얼굴이 됐다.
“민증 좀 봅시다.”
“뭐, 뭐어? 뭐 그딴 걸……!”
“그딴 거 중요하게 생각하는 성격은 아닙니다만, 말본새가 좀 좋으셔야지.”
이한솔은 주민등록증이 없다.
한솔과 10년간 생활했던 오진우는 그걸 잘 안다. 최태훈은 제 말에 우물쭈물하는 이한솔을 보며 슬쩍 눈썹 하나를 휘었다. CCTV로 지켜보던 연구원들은 그 단정한 이목구비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표정을 보며 반사적으로 한 에스퍼를 향해 눈을 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최태훈은 쑥 제 팔을 내밀었다.
“드십시오.”
“…….”
“아, 먹기 싫음 말든가.”
엉겁결에 받은 음료였다. 한솔은 조금은 멍한 얼굴로 그 별거 아닌 콜라캔 하나와 최태훈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그 콜라는 최태훈 제가 마시려고 뽑은 거다. 한솔은 제 손에 쥐어진 캔을 한참을 만지작거리다가 조금은 어색하게 그 뚜껑을 땄다. 탄산음료 특유의 청량한 소리가 났다.
이한솔은 그 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머뭇머뭇 그 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질색하듯 외쳤다.
“우웩. 이게 뭐야?!”
“콜라잖습니까.”
묘한 표정이었다. 자그마한 캔을 손에 쥐고 데룩데룩 눈을 굴리는 모습은 조금은 낯설게도 보였다. 덕분에 처음엔 저건 또 뭔가 싶어 살짝 미간을 찌푸리던 태훈이다.
하지만 이한솔 그가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알고 있는 가이드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믿기 힘든 가정이 툭 떠올랐다. 최태훈은 설마 하는 마음에 그걸 입 밖으로 내뱉어 보았다.
“……혹시 콜라 마셔 본 적 없습니까?”
“없어.”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내뱉은 말에 순순히 따라온 인정에 저도 모르게 잠시 말문이 막혔다. 눈앞에 있는 이한솔, 이 가이드가 살아온 삶이 얼마나 일반적인 것과 떨어져 있었는지를 깨닫는 데에는 콜라 한 캔이면 충분했다.
태훈은 머뭇거리면서도 제가 준 콜라를 할짝이듯 마시는 한솔을 보며 속으로 온갖 단어들을 떠올렸다가 가라앉혔다.
“이한솔 씨.”
나직한 목소리였다. 이한솔은 딱 부러진 말투로 제 목소리를 입에 담는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그가 준 음료가 혀와 목구멍을 따끔거리게 했다.
“전 이한솔 당신, 이해 못 합니다.”
“…….”
“오진우 씨에게 그런 것도 용서 안 되고요. 그쪽 아버진가 뭔가라는 선생도 마찬가집니다. 당신들 진짜 벌 받을 겁니다.”
이한솔은 아무 말 없이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그건 무언가를 조금은 고민하는 것도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애매한 색이 걸려있던 얼굴에 확실한 감정이 덧씌워진 건 최태훈의 이어진 말 때문이었다.
“그런데 참 불쌍하다는 생각은 합니다.”
느리게 흘러나온 말에 한솔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말갛게 깜박이는 눈은 정말로 태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뭐가?”
“이한솔 씨요. 이한솔 씨가 불쌍하다고요.”
“내가? 왜?”
얼핏 보면 순수하게 들리는 물음은, 마치 어린아이가 내놓는 것 같은 의아함 그 자체다. 최태훈은 그걸 보며 괜한 말을 꺼냈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조금 후회했다. 하지만 빤히 바라보는 연한 눈동자는 저를 처음 봤을 때처럼 날 서 있지 않아서,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원래는 에스퍼이셨다고 들었습니다.”
말갛던 얼굴은 태훈의 숨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무표정해졌다. 최태훈은 그 밀랍 같은 얼굴을 확인하고는 거의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정말이지 손에 쥔 콜라캔을 제게로 집어 던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솔의 분위기는 그 몇 초 사이에 완전히 달라졌다.
괜히 ‘선생’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섬뜩함을 주는 얼굴이었다.
“에스퍼로 살아보신 적은 있습니까?”
“…….”
“보통 사람처럼 살아보신 적은요.”
기괴한 기운에 짓눌린 채 겨우 토해 낸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한솔은 그 스산해진 표정과는 달리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최태훈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뿐, 별다른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없잖습니까.”
“…….”
“그래서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정은 아닙니다. 동정은 가엾고 안타까운 사람들이 받는 거지, 이한솔 씨 당신이나 선생은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적어도 전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제껏 했던 말 중에서 가장 화낼 만한 것인데도 이한솔은 묘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다. 가이드는 왠지 손가락 끝까지 저리는 것 같아서, 조금은 급하게 말을 잇고는 원래 생각했던 것처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잔뜩 뽑은 음료수들이 체온으로 조금은 미지근해져 있었다.
이한솔은 혼자 남은 뒤로도 한동안 웅크린 그대로 앉아서 더러워진 제 신발 앞코에만 시선을 고정하더니, 최태훈이 남기고 간 콜라 몇 모금을 느리게 삼켰다.
* * *
실험에 변수가 생겼다.
선생은 의자에 걸쳐 앉은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이 실험을 계획했을 때 절대 변하지 않을 실험축 두 가지를 확신했었다. 첫 번째는 ‘괴물’, 지관영이다.
<기억을 잃은 지관영은 다시는 최태훈을 바라보지 않는다.>
이게 바로 그의 첫 확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게 깨졌다. 지관영은 기억도 나지 않고 매칭조차 되지 않는 최태훈을 자신의 가이드로 삼았다. 무언가 대비책을 마련할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것을 따로 제재하지 않은 건, 매칭률을 잃은 괴물은 그 어떤 감정놀음에도 휘둘리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라면 최상의 매칭률을 이끌 이한솔을 택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에게 있어 가장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방법과 손을 잡았다.
“……아버지.”
선생은 의자에 기댄 고개를 뒤로 쭉 꺾어서 저를 부른 목소리의 주인을 눈에 담았다. 이한솔이다. 선생은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끼익, 끼익, 끼익, 끼익. 의자에서는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이한솔은 그게 왠지 웃음소리처럼 들린다고 생각했다.
“이한솔 씨. 저는 제가 집중할 때 방해받는 걸 굉장히, 아주 굉장히 싫어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이제껏 한솔은 제 아버지의 시간을 방해한 적 없다. 단 한 번도. 언제나 묵묵히 선생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이한솔은 그걸 의심하거나 거절할 수 없다. 애초에 그럴 수 없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궁금한 게 하나 있어서요.”
“뭡니까?”
“아버지는, 혹시 한 번이라도 제가 불쌍한 적 있었어요?”
선생의 고개가 직각으로 기울어지며 빛에 반사된 안경알이 번뜩였다. 이한솔은 제 아버지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제 의도를 탐색하듯 살피고 있다는 것쯤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선생은 모든 것을 분석하고, 예측해서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을 좋아한다.
이윽고 선생의 입이 열렸다.
“없습니다.”
“그럼 미안했던 적은요?”
“없는데요.”
두 번째 답은 처음보다 더 빨리 흘러나왔다.
아니, 사실은 전혀 고민 같은 것 없이 바로 흘러나왔다고 봐도 좋다. 오히려 그 대답에 무언가를 생각하듯 조용해진 이한솔이었다. 사물을 보고 지각할 수 있던 순간부터 제 아버지만을 따랐던 아들은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일직선으로 그 어떤 호선도 그리지 않고 있던 선생의 입술이 처음으로 위로 쭉 올라갔다. 이한솔은 제 아버지가 저를 보고 웃는 것이 참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이한솔 씨는 오로지 ‘그걸’ 위해서 만들어진 거니까.”
이한솔은 제가 어떻게 태어나고,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고 또 사용되었는지 잘 안다. 가이드 최태훈의 말대로 이한솔 그는 한때 에스퍼였다. 하지만 지금 또 완전히 ‘가이드’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도 완전치 않다.
한솔은 그 개인으로는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지 않지만, 누군가의 주도권을 가지고 올 수만 있다면 반대로 그 누구의 가이드도 될 수 있다. 그것도 그 매칭률의 원래 주인보다 반드시 높은 수치를 찍으면서다.
사실 지금 이한솔은 최태훈이 매칭률을 가졌을 때보다 더 높은 매칭 포인트를 낼 수 있다. 그의 모든 세포가 저와 페어링 된 에스퍼에게 무조건적인 호응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사이 조금은 앙상한 느낌이 들 정도로 야윈 청년의 얼굴에 흐린 웃음이 걸렸다. 선생은 그런 이한솔을 보며 조금 재미있다는 듯 낄낄댔다.
사실이다. 그는 지금 저를 아버지라 부르는 청년이 처음으로 ‘그 자신의 말’을 꺼낸 것이 꽤 흥미롭다.
이한솔은 그 어떤 방법을 써도 선생을 거역할 수 없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면 거스를수록 세포와 장기 하나하나가 천천히 돌처럼 굳어 결국에는 그 어떤 말도, 생각도, 행동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그이기 때문이다.
한솔은 천천히 선생의 곁으로 걸어갔다. 선생은 그런 한솔의 행동을 보며 머리를 굴렸다.
뭘 하려는 걸까?
저 실패작이, 무슨 일로 이러는 걸까?
하지만 이한솔 그가 하려는 건 대단한 게 아니었다. 한솔은 조심조심, 제 아버지의 책상 위에 빈 깡통 캔 하나를 두었다.
선생은 그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콜라 같은 탄산음료는, 완전한 무균 배양실과 같은 이한솔의 몸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에스퍼와의 높은 매칭률만을 위해 만들어진 그에게 좋지 못하다. 이제껏 이한솔이 먹을 수 있던 음식은 몇 개 되지 않는 제한된 것뿐이다.
언제나 가장 최상의 세포를 구성할 수 있는 것만 섭취하게 했었다. 이건 저 만들어진 청년에게 불순물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걸 마셨습니까?”
“네.”
한솔은 느리게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진짜 이상했는데요.”
“…….”
“나중 되니까 꽤 괜찮았어요.”
센터의 뼈와 피와 살을 만들고 마침내 눈앞의 청년마저 만든, 이 공간의 절대자는 아직 제 아들이 먹은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 자신이 본인의 피조물에 무관심한 탓이다.
최태훈은, 정말로 의도치 않게 뱀이 됐다.
그가 건넨 작은 호의는 이한솔에게 있어선 언제나 참 탐나고 보기 좋았던 예쁜 빛깔의 사과다.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이 값싼 콜라 한 캔은 언제나 궁금하고 또 알고 싶었지만 제 아버지가 만든 정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나무의 열매다.
한솔은 아버지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는 지하를 빠져나갔다.
* * *
지관영은 요새 잠이 늘었다.
매칭 가이드와의 접촉이 뚝 끊긴 것을 어떻게든 버텨 보려는 듯, 정말 모든 스케줄을 다 취소하고 저택에만 틀어박혔다. 최태훈 역시 그와 함께다. 태훈은 가볍게 짐 몇 개를 싸서 아예 지관영의 저택으로 들어왔다. 저에 대한 정보로 가득 찬 이곳은, 여전히 귓가로 열이 오르게 만든다.
사실 최태훈은 처음엔 이걸 꽤 망설였더랬다.
보수적인 편인 그는 ‘아무리 동성 간의 관계라고 해도 동거는 동거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제 슬슬 밖에서도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지관영이 계속 제 관사에 직접 오게 할 수는 없었다.
이전에도 한 달여간 몸을 섞지 않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나마 가벼운 키스나 포옹 같은 거라도 했었다. 아예 그 어떤 가이드와도 논매칭인 상태로 보내는 건 완전히 처음인 거다.
이제 나흘만, 딱 나흘만 더 버티면 된다. 그러면 된다.
하지만 태훈은 이게 제 이기심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자꾸 들었다. 머리로는 안다. 이한솔과 정말 가벼운 스킨십이라도 한다면 지금처럼 힘들지 않을 거라는 걸, 가이드인 그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이성적인 판단을 잘라내고 본다면…….
솔직히 정말 싫다.
지관영이 눈을 떴던 첫날, 이한솔이 이 사내의 손을 깍지 끼어 잡는 것을 봤을 때만 떠올려도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속이 따끔따끔하고 아팠다. 그때였다. 보기 좋게 닫혀 있던 입술이 작게 열렸다.
“……왜.”
“언제부터 일어나 계셨습니까?”
지관영은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희미하게 떴다. 완전히 나른하게 풀린 얼굴은 맹수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줬다.
태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지관영의 흐트러진 머리를 예쁘게 정리해 주었다. 같이 지내면서 좋은 건, 제 연인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 모습을 이렇게 언제든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거였다.
지관영은 제게서 떨어지는 태훈의 손을 잡아다 손가락을 얽게 한 뒤 그것에 이마를 기댔다. 결국 최태훈은 종일 망설이던 말을 한숨을 내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더듬더듬 꺼내기 시작했다.
“……저. 지관영 씨.”
말하라는 듯 느슨하게 기울어진 고개와 살짝 초점이 맞지 않는 듯한 검은 눈동자는 확실히 지관영 그답지 않은 거다. 최태훈은 잠시 숨을 삼켰다가 말문을 뗐다.
“정말 이한솔, 그분한테 안 가보셔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최태훈은 그 순간 느슨했던 사내의 눈에 순식간에 확 제정신이 깃드는 걸 확인했다. 그건 뭐랄까, 고마움과 안타까움이 묘하게 교차하는 모습이었다.
“전혀. 절대.”
“……예.”
“최태훈 너는 그거랑 잘 놀아날 생각이 있다고 해도, 난 아니거든. 불쌍하기는 무슨.”
지관영 그가 말하는 건 며칠 전의 일이다. 머쓱하게 웃는 가이드의 얼굴에 에스퍼의 고개가 바짝 가까워지면서 조금은 혼내듯 키스했다. 입술을 깨무는 따끔한 감각에 최태훈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눈을 휘자, 지관영도 그제야 할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간단하게 먹을 거라도 챙겨 오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이건 원래 지관영이 해 주던 거다.
하지만 최태훈은 매칭률을 되찾을 때까진 기꺼이 제가 도맡을 생각이었다. 제 가이드가 침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눈으로 훑던 지관영은, 그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침대의 헤드 쿠션에 기댄 채로 긴 한숨을 흘렸다.
태훈의 짐작대로 그는 지금 딱 넘쳐흐르기 전의 물컵과도 같다. 솔직히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상태까지는 와본 적 없던 그다.
머릿속에 있는 모든 것이 마치 파도를 타듯 일렁거리고 눈앞의 모든 이미지가 어지럽게 엉키고 꼬인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 최태훈의 얼굴까지도 가끔 흐리게 보이다 못해 구조적으로 나뉜 질서 없는 정보로 머릿속에 내리꽂힌다.
그때마다 지관영이 매달릴 수 있는 건 몇 개 없다.
최태훈의 숨소리, 피가 흐르는 소리, 심장 박동, 맞닿은 살갗의 온기, 저를 쓰다듬는 손길의 부드러움. 그는 정말 온전히 가이드에게만 의존하게 됐다.
지관영은 사실 그런 제 자신이 좀 놀라웠다. 기억을 잃기 전의 저는 최태훈과의 8개월이 있었다지만, 지금만 놓고 보자면 그는 사실 최태훈을 알게 된 지 아직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 낯선 사내에게 하루, 한 시간, 일 초가 지날 때마다 조금씩 더 마음을 열고 풀어지고 마는 스스로가 믿기지 않았다. 정말 ‘가이드’라는 건 이런 게 아닐까. 에스퍼는 최태훈 그를 보며 종종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
정말 황당할 정도로 속도 조절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제가 상대에 대해 꿰고 있고 최태훈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애정을 쏟아 내며 호응한다지만, 분명 시간을 두고 알아 갈 것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완급을 도저히 맞춰 잡을 수가 없다.
지관영은 살짝 늘어진 채로 앉아서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 순간, 요 며칠 잠잠했던 에스퍼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소속사에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엄포하듯 말해 둔 터라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 연락처로 전화할 사람은 없었다. 관영은 눈을 감은 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손을 뻗어 작은 기계를 손에 쥔 채로 잠시 고민했다.
‘그냥 끊어버릴까.’
아마 평소라면 발신자를 확인하기도 전에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따라 그는, 묘하게도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언제나처럼 생각대로 행동했다.
발신자는 센터였다. 지관영은 눈썹 하나를 휘었다. 차라리 눈치 없는 소속사의 전화, 아니 하다못해 스팸 전화가 더 나을 뻔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걸 바로 끊을 수는 없는 그다.
지관영은 조금은 귀찮은 내색을 감추지 않은 채로 전화를 받았다.
“……네. 무슨 일입니까.”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조금은 급했다.
말이 길어질수록, 에스퍼의 표정은 더욱 언짢게 변해 갔다. 관영은 다시 한 번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한숨을 잘 쉬지 않던 성격인데 요새 그게 꽤 늘어 버렸다. 지관영은 살짝 뻣뻣한 몸을 쭉 기지개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센터는 귀찮다. 그는 놀랍게도 기억을 잃기 전과 똑같은 생각을 했다.
토스트와 리코타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 약간의 과일, 그리고 우유까지. 수많은 동생을 챙기면서 최태훈은 이 정도로 차리는 건 정말 뚝딱 한다. 자고로 다인 가족인 집안에서는 전쟁 같은 아침마다 누구 한 명이라도 빨리빨리 먹고 자리를 비워주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접시를 들고 걷는 건 잘하지 못 하는 태훈은, 조심조심 발을 디뎌서 침실로 들어왔다. 하지만 테이블이나 침대 위에서 쉬고 있어야 할 사내는 어찌 된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지관영 씨?”
태훈은 의아한 목소리로 제 에스퍼를 찾았다. 화장실로 간 건가 싶어서 슬쩍 귀를 기울여 봐도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가이드는, 머지않아 협탁에 놓인 작은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
-잠깐 일이 생겨서 나갔다 올게. 금방 오니까, 먼저 먹어.
확실히 지관영 이 사람은 약간 고전적인 면이 있다.
최태훈은 그 깔끔한 필체를 보며 슬쩍 웃었다. 이런 건 메시지를 보내놓거나 할 수도 있는데, 꼭 새하얀 메모지 위에 또박또박 만년필로 글을 남긴다. 아직 손댈 엄두가 안 나서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도 가만 보면 굉장히 고전적인 방법으로 스크랩한 거다.
최태훈은 제가 차려 온 음식들 앞에 씩씩하게 앉았다. 문득 침대 한구석을 차지한 연인의 마지막 기억이 보였다. 저것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가이드는, 살짝 웃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한편, 지관영이 도착한 곳은 센터의 중앙 연구실이었다.
에스퍼는 조금은 나른한 제 뒷목을 주무르며 어깨를 곧게 폈다. 그는 제 가이드가 아닌 이들에게 약한 모습 같은 건 절대 내보이지 않는 사내다. 연구실 앞의 버튼을 누르자 커다란 문이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고 옆으로 갈라졌다.
지관영은 그 안에 빼곡히 앉거나 선 연구원들의 긴장한 눈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삐딱한 목소리가 절로 흘러나옴은 물론이었다.
“……무슨 대단한 소릴 하려고 최태훈까지 떼 놓고 오라는 겁니까.”
하지만 지관영 그는 얼마 안 가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가장 큰 이유로 짐작되는 이를 발견했다. 에스퍼의 입에서 신경질이 섞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흰색 가운 차림의 이들이 모인 거대한 방 안, 그 가운데에는 조금은 파리한 안색의 가이드, 이한솔이 있다.
“뭡니까, 저건?”
“이한솔이 지관영 씨가 있는 곳에서만 입을 연다고 말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매칭에 관련된 거라고 합니다.”
“아주 정신이 나가셨군.”
조금은 경직된 오연의 목소리에 지관영은 오만한 웃음을 건 채로 비어있는 의자 하나를 집어다 앉았다. 느슨하게 다리를 꼰 모습은 지금 있는 장소가 마치 그가 늘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이게 했다.
이한솔은 그런 지관영을 약간 묘한 눈을 한 채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말을 잘 들어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장이었다.
아니, 조금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덕분에 지관영의 눈썹 하나도 위로 휙 치켜떠졌다. 하지만 이한솔은 제법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을 뿐이었다.
“정말 잘, 들어야 할 거예요.”
“뭐?”
“‘이해해야’ 해요.”
마치 선문답 같은 말이었다.
오진우는 저도 모르게 긴장한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표정을 한 이한솔은 처음이었다. 10년을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해야 했던 가이드다.
그는 조금은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표정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침착해 보이기도 했다. 한편, 이한솔의 말에 묘한 위화감을 느낀 사람도 있었다. 센터장 권다희였다. 그녀는 언제나 매일 같이 선생이 내뱉은 문장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는다. 그렇기에 빠르게 깨달은 것이기도 하다.
“지관영 씨와의 매칭에 관한 이야기를 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이한솔은 수수께끼를 시작했다. 권다희 그녀는 제가 떠올린 가설을 확신하기 위해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선생이 가이드를 조종하는 방법은 뭔가요?”
“……‘이해할 수 없어요’.”
이한솔은 센터장의 질문에 살짝 미간을 꿈틀하더니 느리게 대답했다. 한솔이 다시 한 번 그 단어를 담는 순간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 같은 소리가 터졌다. 오연의 눈 역시 크게 뜨였다. 저 말의 가려진 의미를 모르는 건, 정확히는 기억하지 못하는 건 지관영뿐이다.
그들은 저 ‘이해’에 대한 표현을 이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은 적 있다. 최태훈의 제안으로 새로운 연구 조건을 제안했을 때다. 절대적인 신인지, 악마인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던 그는 이한솔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이한솔 씨, 이해했죠?’
한솔은 제 손을 주무르면서 말을 이었다.
그는 방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제 혀가 잠시 둔해진 것을 분명히 느꼈다. 선생에게 반발하는 행동을 한 대가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묻지 마세요. 그럼 말하고 싶어도 말 못하게 되거든.”
지관영은 지금의 분위기를 대충 파악했다.
저 반복되는 ‘이해’라는 단어가 무언가의 키워드인 거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센터의 사람들이 초조한 침을 삼키며 말을 이어가는 것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지관영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저들 역시 이 일에 제 가이드들의 목숨이 달렸다. 거의 한 달 전의 그가 최태훈 하나를 위해 그렇게 쩔쩔맸던 것처럼.
오연은 긴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제 같은 거라도 있는 겁니까?”
이한솔은 이번에는 아예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말하는 바는 너무도 선명하다. 그들은 그 고요 속에서 다시 한 번 선생의 거세된 인간성을 엿봤다.
‘이해할 수 없다’니!
이한솔은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닐지언정, 그 이전에 분명 여느 평범한 이들과 다름없는 사람이다. 자신이 직접 사고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인 거다.
그런데 그런 이한솔이 금지된 말을 할 때 허락된 유일한 말이 ‘이해할 수 없다’라는 건, 선생이 이한솔 그를 어떻게 보아왔는지를 알려주는 증거다.
이한솔이라고 선생이 저에게 한 짓을 이해하지 못했을 리 없다. 이해했지만, 그걸 이해하지 못한 걸로 스스로 세뇌하기를 요구받았을 뿐이다.
“그럼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이한솔 씨와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센터장은 작게 물 한 모금을 삼키는 이한솔을 보며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야위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선이 고운 청년인 이한솔은 살짝 눈을 내리깐 채로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경은 읽어봤어요?”
“성경?”
“그 얘기를 좀 할까 하는데요.”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한숨 같은 헛웃음이 흘렀다. 이건 이한솔 그의 잔꾀에 대한 순수한 탄성이다. 보통 정신 조작으로 특정 정보를 말할 수 없도록 금제를 거는 원리는 이렇다.
우선 실험 대상의 머릿속에 있는 일부의 키워드와 사건을 잡아내서 그것에 마치 막을 치듯 블록을 만든다. 조금 더 섬세한 능력을 가진 자라면 직접적인 단어가 아닌 은유와 비유를 통해 말하는 것마저 완전히 틀어막는 게 가능하다.
분명 선생이라면 그렇게 해 뒀을 거다.
하지만 그게 정보나 키워드가 아닌 ‘지식’이라고 하는 정돈되지 않는 영역에 존재하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식은 손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블록을 걸어야 할지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까지 하느니 차라리 죽여 입을 막는 게 수월한 일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이자, 수많은 숨은 코드와 컨텍스트로 이루어진 오래된 지식. ‘성경’. 이건 제아무리 선생이라고 한들 어느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잘라낼 수 없는 영역이다.
센터장은 이한솔의 뒤에 서 있던 연구원 하나에게 작게 눈짓했다. 그러자 이한솔의 뒤에는 거대한 화이트보드 하나가 펼쳐졌다.
이제부터 시작될 이한솔과의 대화에 참여할 에스퍼는 엄밀히 말하면 네 명이다. 그들은 각각의 역할을 맡았다.
첫 번째로 오연, 그는 이한솔에게 질문을 던진다.
“성경의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까?”
“겟세마네부터 시작할까요.”
한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보드 앞에 서 있는 지능계 에스퍼 하나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이한솔이 말한 문장 그 자체를 해석한다.
/<겟세마네> :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과 함께 신에게 기도한 장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죽음을 두려워하며 신에게 살려줄 것을 토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군병들에게 잡힘./
그리고 남은 두 에스퍼는 그 정보를 바탕으로 컨텍스트를 분석하며 가설을 세운다.
/아버지=선생. 아들=이한솔.
가설 하나. 선생은 이한솔에게 죽기를 명령했나? 가설 둘. 이한솔은 선생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가?
의문 : 이한솔이 말하는 겟세마네는 어디인가? 군병들은 가이드 상담을 진행했던 군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
지관영은 보드 위에 빠르게 쓰이는 문장을 별다른 동요 없이 읽으며 살짝 뻐근한 목을 짚었다. 오연은 보드에 적힌 모든 정보를 눈으로 훑은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겟세마네라면 로마 군사에게 잡힌 곳이 아닙니까?”
“네. 하늘인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던 곳이기도 하죠. ‘아버지, 당신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이한솔의 말에 보드 앞에 서 있던 연구원들은 ‘가설’이라고 적었던 글씨를 지우고 그것을 ‘사실’이라는 단어로 바꿨다.
그것을 본 오진우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아마도 그날이었을 거다. 자신을 찾아와 아버지가 죽이려고 한다고 토로하던 그날. 그렇게 말한 이후 겨우 며칠 사이에 이한솔은 완전히 앓은 사람처럼 변했었다.
한솔의 말을 생각하듯 곱씹던 오연은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하늘은 왜 자기 아들에게 죽기를 명령했을까요?”
“……낸들 알겠어요!”
이한솔에게서 처음으로 조금 뾰족한 반응이 나왔다.
“예수가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많았던 거지.”
“거부할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요.”
“거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오연은 그런 이한솔의 행동 하나하나를 뜯어 살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 개인의 가정이 기정사실이 됐다. 한솔은 선생을 거부할 방법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좀 좋았을까. 태어나는 것부터 죽는 것까지 대체 그중 뭐 하나라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마치 이한솔 그 자신에게 하는 듯한 말에, 권다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잠시 바닥으로 떨궜다. 수많은 아이가 태어나고 또 죽게 한 것에는 이 센터가 중심에 있다.
센터장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의문’이라는 단어 옆에 쓴 질문의 답 하나를 깨달았다. 이한솔이 살고 싶다 외치고 고뇌했던 장소 겟세마네는 바로 이곳, 센터다.
연구실 안의 분위기는 더 냉랭해질 수 없을 정도의 정적에 찼다. 정말로 선생이 이한솔에게 스스로 죽는 걸 명령한 게 맞다면. 그리고 이한솔이 그걸 거부할 수 없고, 매칭률을 최태훈에게 다시 넘기는 것마저도 그의 자유의지로 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떠올린 마지막 답은 너무도 참혹하다. 지관영은 그 순간 제 연인을 이곳에 데리고 오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솔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속이 쓰라리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교묘한 수를 써서 문장을 만들어 내뱉는 것까지는 어떻게 가능했지만, 애초에 근육과 뼈와 세포 마지막 하나에까지 선생에게 절대복종하도록 만들어진 그의 신체가 반응하기 시작한 거다.
이한솔은 오진우에게 저를 살려달라 말하면서 이미 꽤 많은 금제를 깼다. 이제는 이런 작은 반항마저도 부담이 된다. 시간이 얼마 없다. 이한솔은 다시 한 번 짧게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양옆에는 두 도둑이 있었어요.”
겟세마네에서 순식간에 골고다 언덕으로 장소가 바뀌었다.
그곳에서 ‘아들’, 즉 이한솔의 곁에 있는 두 명의 도둑은 선한 도둑 디스마스와 악한 도둑 게스타스다.
디스마스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알아보고 그와 신에 대한 믿음을 목 놓아 외침으로 끝내는 구원받았고, 신을 믿지 않고 비웃고 조롱했던 게스타스는 회개하지 못한 채 죽었다.
사실을 정리한 그 내용에 문맥을 파악하는 두 에스퍼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짤막한 문장 하나를 힘주어 적었다.
/가설 하나. 디스마스=최태훈. 게스타스=지관영./
“디스마스는 회개해서 구원받았다고들 하잖아요. 그런데 난 늘 게스타스에게 시선이 가요.”
이한솔이 조금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별로 길게 말하지도 않았는데도 벌써 약간 지쳐 보였다. 지관영은 가이드와 함께 나란히 적힌 제 이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섭니까?”
“게스타스는 왜 그저 ‘악한 도둑’으로만 불릴까요? 대체 그 잘난 회개가 뭐라고, 왜 게스타스만 늘 돌을 맞죠?”
“…….”
순간 연구원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게스타스를 향해 돌을 던진 자들이, 마치 이제껏 측정 불가의 에스퍼를 대해 왔던 그들 자신의 모습처럼 느껴져서다.
이한솔은 어떻게 보면 괴물의 본성 그 자체를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이들 중 하나다. 그 자신 역시 언제나 괴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그 당사자인 지관영은 지금 그런 말들이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조금 초조해졌다. 이한솔의 말이 이어질수록 묘한 불안감이 그의 마음속에 싹텄다.
묘하게 최태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그의 말이 불길할 뿐이다. 그렇다면 선한 도둑은? 선한 도둑, 디스마스는?
……최태훈은?
“언제나 비난받던 게스타스가 디스마스처럼 구원받을 방법은 하나예요.”
이한솔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디스마스가 예수를 포기하면 돼요. 게스타스와 같은 악한 도둑이 되면. 그러면 돼요.”
“지금 그게 무슨…….”
오연은 조금은 멍하게 한솔의 말에 대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살벌하다 못해 흉흉한 눈을 한 지관영이 벌떡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다가와 이한솔의 멱살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한솔을 붙잡은 에스퍼의 손이 옅게 떨렸다.
이한솔과 닿자마자 순식간에 일그러졌던 시야가 정리되는 감각이 끔찍했다. 분명 그건 그에게 숨을 불어넣는 접촉임에도, 마치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지금 그 자신이 이해한 문장에 완전히 압도되어 있다.
한솔은 저를 향해 서늘하게 눈을 빛내는 지관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확언하듯 말했다.
“게스타스는 그래야 살 수 있어요.”
화이트보드 앞에서 한솔의 말을 분석해 그것을 공유하던 연구원들의 손은 이미 뚝 멈춘 지 오래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이한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이는 아무도 없다.
지관영 입에서 거의 잇새로 흘러나오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헛소리하지 마.”
한솔은 두려움이 엿보이지 않는 눈으로 잠시간 에스퍼를 바라보았다. 덕분에 지관영은 머잖아 깨달았다. 지금 이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 사실이다.
“다행히도 예수는 그 빌어먹을 겟세마네에서 모든 준비가 다 끝났어요.”
“…….”
“하늘은 언제나처럼 대답이 없었거든.”
‘아들’이었던 청년은 조금은 울 것 같은 눈가를 찡그렸다.
“아버지는 귀가 밝으니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거예요. ‘나는 당신보다 시간이 하루 모자라’.”
가까스로 덧붙인 그 자신의 문장이었다.
물론 그 후유증은 상당했다. 한솔은 에스퍼를 탁, 밀치고 다시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해진 제 모든 눈앞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는 어느 한 곳에 시선을 집중하지 못하고 조금은 넋 나간 듯 주변을 살피다가 곧바로 발길을 돌려 연구실을 빠져나갔다. 그건 마치 제가 들은 사실에서 도망치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에스퍼가 살기 위해서는 그 가이드가 이한솔을 죽여야만 한다. 다시 말해 최태훈은, 지관영과 같은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지관영이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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