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D-30
오진우를 살리는 방법은 간단했다.
오연은 이한솔의 복부를 정확하게 주먹으로 찍어 누른 후, 고통으로 끅끅대는 청년을 제 동생의 품으로 내던졌다. 다른 연구원들은 그런 과감한 행동에 숨을 삼켰지만, 오연 그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손댈 수 없는 건 선생이지, 이한솔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형, 잠깐……!”
“살고 싶으면 그대로 있어.”
엄하게 떨어지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에 오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형제로서 하는 10년 만의 대화였다. 동생은 언제나 제 형을 거스르지 못했다.
이한솔은 저를 제대로 끌어안지도, 떼어놓지도 못한 채 손 둘 곳을 모르는 에스퍼를 보며 고통에 얼굴을 찡그린 와중에도 웃었다.
“하, 하하, 후우, 진우 너, 정말 너랑 정반대인 형님이 있네?”
“그쪽은 머리에 바람구멍 나기 싫으면 입 다물고.”
살벌한 경고의 주인은 오연의 몇 걸음 뒤에서 벽에 비스듬히 서 있는 박승원이었다. 이마가 살짝 땀에 젖어있는 그는 옷차림마저 정복 그대로다. 얼이 빠진 듯한 목소리를 한 부대 담당 센터 직원의 전달을 받고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모른다.
“난 우리 연이랑 달리 오진우가 죽든 말든 상관없거든.”
이한솔은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버지’는 실험에 푹 빠져있다. 이럴 때의 아버지는 함부로 건드리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 한솔은 그것을 아주 잘 안다. 그에게 아버지의 뜻은 무엇보다 절대적인 코드다. 오연은 제 동생이 있는 연구실에서 나와 살짝 한숨을 쉬며 벤치에 앉았다.
지끈대며 찾아온 통증이 심했다.
지능계 에스퍼이어서일까, 오연은 스트레스가 심할 때마다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걸 잘 아는 가이드의 손이 제 페어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고 주물렀다. 오연은 그 손에 기대 눈을 감고 작게 심호흡을 했다. 페어는 길게 제 감정을 늘어놓지 않아도 그것이 전달된다.
에스퍼는 잠시간 그렇게 긴장을 푸는가 하더니 얼마 안 가 도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박승원은 제 에스퍼의 굳은 표정을 보며 조금은 안쓰러운 미소를 건 채 말했다.
“……다녀와.”
“그래.”
오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센터 내 중앙 연구실이었다.
그곳에는 센터장 권다희를 필두로 한 모든 지능계 에스퍼가 모여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뒷머리가 확 당겼다. 중년 에스퍼 하나가 자신이 정리한 자료를 대형 모니터에 띄우며 입을 열었다.
“3년간의 CCTV 영상을 바탕으로 선생의 센터 내 모든 동선을 정리했습니다.”
얼핏 보면 신경질적인 빨간 선의 엉킴으로 보이는 그것은, 지능계 에스퍼에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그들은 0.01밀리도 되지 않는 크기로 중간마다 적힌 날짜와 시간까지 동시에 분석할 수 있다.
이번에는 다른 에스퍼의 차례였다.
“이제껏 선생을 거쳤던 모든 가이드의 명단입니다. 총 671명입니다.”
“젠장. 더럽게 많네. 미친 새끼…….”
연구실 구석에서 작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센터장 권다희는 그 정보를 모두 확인한 뒤, 단호하고 힘 있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금 그녀는 평소의 우아한 차림 따위는 내던진 채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고, 느슨한 티 하나에 청바지를 걸친 모습은 마치 20년 전 신입 연구원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 달입니다.”
“…….”
“우린 그 30일 동안, 선생이 어떻게 가이드에게 암시를 명령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아내야 합니다. 그가 가이드 없이 버틸 방법도요.”
무력감에 지고 있을 시간은 없다. 그들에게는 단 한 달의 여유가 주어졌다. 그건 지관영과 최태훈이 가까스로 벌어준 시간이다. 오연은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힘주어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최태훈은 저도, 제 동생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지관영이 문을 열고 나간 그 뒷모습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더니 작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그게 다였다.
차라리 최태훈에게 욕을 듣고, 원망을 듣고,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마음이 무거울지언정 이렇게 아프지는 않았을 거다.
센터의 모든 ‘힘’을 휘어잡은 선생의 제안은 아주 간단했다.
한 달. 그는 지관영과 최태훈의 한 달을 요구했다.
* * *
센터장의 집무실은 지금 더없는 침묵으로 가득 차 있다.
그건 내부에 제법 많은 사람이 앉아있는 것과는 제법 대비되는 고요함이었다. 소파 한쪽에는 이미현과 오연, 그리고 오진우의 순서대로 자리를 차지했고, 그 맞은편엔 느슨하게 다리를 꼬고 있는 선생과 이한솔이 있다.
센터장과 마주 보는 정면에 앉은 건 센터 사상 최고의 매칭률을 이룬 페어, 지관영과 최태훈이다. 최태훈의 손을 마치 놓칠세라 꽉 잡은 에스퍼의 얼굴이 약간은 창백하게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우리 다희는, 센터장 오르면서 입맛이 꽤 괜찮아졌네. 이거 꽤 좋은 원두 아냐.”
“……요구 조건을 말하세요.”
“딱딱하기는.”
센터장은 찻잔을 내려놓는 선생의 행동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달라졌지만 움직임은 여전히 제가 기억하고 있는 그 과거의 ‘선생’이 맞았다.
대체 저 얼굴은 누구의 얼굴일까. 그리고 또 누구의 목소리를 훔쳐온 걸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며 동요를 감추려 애썼다. 하지만 번뜩이는 안경알 너머로 보이는 뱀 같은 눈은 그 모든 것이 다 읽힌다는 듯 빙긋 미소를 걸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나는 아주 간단한 실험 하나를 원해요. 사실 꽤 싼값이지, 저 많은 가이드를 살려주는 대가치고는. 가이드뿐이야? 가이드가 죽으면, 에스퍼도 같이……”
“-어떤 실험입니까.”
“좀 높은 자리 오르더니 말 끊는 버릇이 생겼나 봐?”
“선생!”
센터장 권다희의 외침에 중년 사내는 살짝 미간을 찡그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안 가 유순해 보이는 눈웃음이 대번에 걸렸다.
최태훈은 그 웃음에 어깨를 흠칫했다.
“태훈 씨.”
“…….”
“난 태훈 씨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말했잖습니까. 최태훈 씨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이드라고.”
선생의 말에 이한솔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했다. 오연은 그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전 최태훈 씨가 내 실험을 좀 적극적으로 도와줬으면 하는데.”
“내가 하지.”
다시 한 번 말이 끊긴 선생의 고개가 여전히 미소 걸린 채 살짝 기울어졌다. 이번에 선생의 말을 끊은 건 지관영이었다. 최태훈은 멍하게 뜨인 눈으로 제 페어를 바라보았다.
실험실 안의 멍청한 연구 대상이 되는 걸 그 무엇보다 싫어하는 가장 고고하고 품위 있는 괴물이 눈앞의 연인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관영은 자진해서 그 대상이 되겠다 말하고 있다.
“뭐가 됐든 내가 하지.”
“관영 씨.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최태훈. 넌 가 있어.”
“어떻게 그럽니까!”
태훈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커졌다.
하지만 에스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는 듯 눈 하나 깜짝 않고 선생만을 노려볼 뿐이다. 그는 김권석과 그 연인 유진영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본 사람이다.
훈련장의 모든 사람이 보는 눈앞에서 높다란 천장의 기계에 제 몸을 걸어 자살한 가이드와 그리고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본 에스퍼. 그 비참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걸 피할 수 있다면, 지관영 그는 못할 게 없었다.
심지어 만약 정말 저 사내가 바라는 게 ‘실험’이라면, 아무런 재생 능력이나 면역력도 없는 연인보다 제가 더 나을 거라는 생각마저 했다. 그건 몇 달 전의 에스퍼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각오였다.
선생은 제 말을 잘라먹은 페어의 대화가 퍽 마음에 드는지 환하게 눈을 접으며 짜악, 짜악, 짜악, 과장된 박수를 쳤다. 그 박수 소리 한 번 한 번이 모두 저를 찌르는 비수처럼 느껴진 태훈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겁니다. 태훈 씨.”
괴물은 저 선생의 입에서 제 연인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 불쾌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불쾌함을 함부로 드러내 보일 수 없다. 선생은 시선으로는 금방이라도 제 목줄기를 뜯고 싶다는 표정을 한 지관영을 보며 눈을 반달로 휘었다. 저 독기 어린 시선마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이쪽의 진우 역시 강한 에스퍼이라지만, 사실 여러모로 지관영 쪽이 좀 더 낫죠. 지관영 저 에스퍼는 쓸데없이 감정팔이에 휘둘리지 않거든. 원한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는 점이 아주 강점입니다.”
“…….”
“그런데 저런 지관영이 본인 페어한테는, 그러니까 최태훈 씨에게는 이다지도 지극정성이란 말입니다. 걱정 마세요, 태훈 씨. 지관영은 아주 조금만 수고해 주면 되는 실험이니까.”
가이드는 선생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선생은 제 사랑스러운 내담자의 저 표정을 잘 안다. 감정을 감추고 누르려는 최태훈이다. 센터장은 그런 선생을 보며 눈살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선생. 똑바로 본론을 말하세요. 실험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난 가이드가 어디까지 그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힘이요?”
“그래요, 힘. 저 강한 에스퍼도 절대 가지지 못하는 가이드의 힘.”
선생은 눈을 찡긋하며 말을 이어갔다.
“여기 이한솔 씨도 사실은 원래 있던 가이드의 매칭을 빼앗는 게 다거든. 진짜배기 가이드는 아닌 셈이지.”
이한솔의 표정이 확실하게 경직됐다.
지금 오연은 제 눈과 귀에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을 빠짐없이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다. 그는 선생의 말에 이한솔의 눈꺼풀이 몇 번 떨렸는지조차 정확히 말할 수 있을 거다.
“자. 최태훈 씨. 당신이 가장 두렵게 여기는 가정을 해 볼까요. 이게 바로 이번 실험의 주제니까.”
가이드 최태훈이 가장 두려워하는 가정.
센터장은 감히 예측조차 되지 않는 물음에 희미하게 인상을 썼다. 다른 에스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관영 그는 선생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대전제, ‘에스퍼 지관영과 가이드 최태훈은 더는 매칭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제 감정의 흔들림을 들키지 않으려던 태훈의 표정이 대번에 눈에 띄게 무너졌다. 그는 최태훈이 기꺼이 드러내 보였던 깊숙한 곳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둥글게 호선을 이룬 선생의 눈이 안경 너머로 번뜩였다.
“그리고 난 여기에 몇 가지 실험 조건을 더할 겁니다. 그래야 재미있으니까요.”
“……실험 조건이라뇨?”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최태훈 대신 이미현이 조금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예컨대…… ‘에스퍼 지관영은 가이드 최태훈에 대한 모든 정보를 상실한 채, 8개월 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센터장의 입에서 말도 안 된다는 듯한 헛웃음이, 이미현에게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탄식이 터졌다. 하지만 그걸 듣고 있는 최태훈은 그런 반응조차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가이드는 지금 선생이 늘어놓는 실험 내용을 이해하는 것조차 벅찼다.
“정말 궁금했거든요. 가이드 최태훈이 과연 수치상 완전한 논페어 상태에서도 저 최강의 에스퍼를 턱 끝으로 부릴 수 있을지. 이 지겨운 기계가 찍어내는 숫자 조합을 이기고 가이드 본연의 힘으로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퍽 로맨틱해 보이는 가정이었지만, 그건 다시 말하면 최태훈이 유일하게 인정받았던 가이드로서의 증표를 완전히 상실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다.
매칭률이라는 이름의 뻔한 숫자들이 없다면 최태훈은 지관영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신경이 극한에 달해 결국엔 천천히 미쳐가는 그를 제대로 붙잡을 수도, 살릴 수도 없다.
가이드는 뭐라도 말해보고 싶어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목구멍 밖으로 빠져나가는 건 작게 숨을 들이켜는 헛된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래. 뭘 한다고 했더라. ……연애? 그래요, 그래. 두 분은 연애를 한다고 들었어요.”
선생의 입에서 낄낄대는 비웃음이 터졌다.
“참 불필요한 호르몬 장난질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호한 실험에서 그런 것만큼 기준 삼기 편한 것도 또 없죠. 자아. 내가 내걸 실험 목표는 이겁니다.”
온화해 보이는 얼굴을 한 중년의 사내는 고개를 기괴하게 옆으로 기울인 채로 선포했다.
“<가이드 최태훈은 에스퍼 지관영과 논페어 상태에서 그를 자신의 에스퍼로 삼아야 한다. 기한은 한 달.>”
선생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최태훈은 느리게 그 끄트머리를 따라 했다.
“……한 달이라니, 대체 무슨…….”
“뭐, 논페어 상태이니 그 귀여운 호르몬 놀음을 시작해야 한다로 바꿔 해석해도 되겠습니다. 그 기간에 주도권은 이쪽의 이한솔 씨에게 넘기는 걸로 하죠. 좀 귀찮긴 하겠지만 최태훈 씨가 잠시 포기해 주기만 한다면야 한솔 씨가 잘 가져갈 겁니다.”
주도권을 넘긴다는 말에 가이드의 반응은 정반대로 나뉘었다. 최태훈은 목까지 시뻘겋게 변한 채로 선생을 노려보았고, 이한솔의 입에서는 옅은 키득거림이 터졌다.
반면 지관영은 무엇을 생각하듯 묵묵히 입을 다무는 중이다. 센터장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질타가 쏟아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요! 지금 그런 걸 실험이라고……!”
“실험입니다! 그것도, 그냥 최태훈 씨만 증명해 보이면 되는 더없이 간단한 실험! 심지어는 오진우도 살고, 지관영도 살지 않습니까?”
선생의 말에 오진우의 고개가 바닥으로 푹 숙여지고 오연의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결국 오진우가 겪던 끔찍한 나날을 지관영에게 떠넘기는 것과 별다를 바 없는 가정이 기쁠 리 없었다.
선생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최태훈 씨가 실험에 성공하면 제가 ‘카운슬링’한 가이드 모두를 풀어주겠습니다. 약속하죠. 나는 허언을 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 달콤한 제안에는 당연히 이면이 있다.
“뭐, 실패하면 그때는 모두 죽습니다. 다 죽고 나면 누군가가 나도 죽이려 들겠죠? 하핫, 내 목숨도 최태훈 씨에게 달렸군요!”
20년 전에도, 10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선생은 최고의 실험결과를 만드는 데에만 집중한다. 권다희는 그 신난 듯 빨라진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만약 내 연구 제안을 거절한다면 최태훈 씨가 승낙할 때까지 하루에 한 명씩 가이드를 죽이겠습니다. 오늘은 김권석이었으니…… 그래. 내일은 누굴 죽일까요.”
선생의 말에 목소리가 커진 건 이미현이었다.
그녀의 가이드는 선생의 ‘카운슬링’을 몇 달간 받아왔다. 미현은 제 자신의 가이드는 물론이고 최태훈까지 선생과 연결시켜 준 장본인이다. 지적이면서 밝은 인상이었던 그녀는 고작 몇 시간 사이에 완전히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당신! 지금 조금 전부터 자꾸 다른 가이드를 다 어떻게 해 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데, 대체 그쪽을 뭘 믿고……!”
“아. 김권석 하나로는 신뢰가 안 가신다?”
선생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미현은 그 표정에 순간 말을 멈추고 자신 없이 ‘그게 아니라.’ 하는 중얼거림만 반복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비굴함에서는 측정 불가의 에스퍼 앞에서도 기죽지 않던 모습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에스퍼인 이상 자신의 가이드를 걸고 하는 도박 같은 건 불가능했다. 그것도 당장 가이드 김권석의 죽음을 보고서 그런 짓을 하는 건 더욱 못 할 터였다.
“미현 씨의 가이드는 제가 꽤 예뻐하는 편이니까요. 그래, 그렇다면 제 말을 증명할 겸 연구실에서 이미현 씨의 옆자리에 앉는 에스퍼의 가이드로 할까요.”
선생은 이미현의 말에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흥얼거리며 말을 이어갔다.
“……자, 잠깐. 잠깐! 잠깐만요!”
“그 가이드는 이미현 씨 때문에 죽는 겁니다. 하하하!”
“하지 마, 하지 마세요, 선생, 선생님, 잠깐만!”
처절할 정도로 그 태도를 바꿔 애원하는 이미현의 말에도 선생의 입에서 시작된 카운트는 멈추지 않았다.
그건 너무도 연극조의 말투라 사실 그가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10에서 시작된 숫자는 차곡차곡 줄어들어갔다. 선생의 말이 만약 허풍이라면 이렇게 매달리고 있는 이미현의 모습은 꽤 우스울 터였다.
하지만 에스퍼인 그들은 가이드가 걸린 이상 속절없이 줄어드는 숫자 앞에서 선생을 말리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센터장은 선생을 붙잡고 황급히 외쳤다.
“선생, 지금 무슨 짓이에요! 멈추세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선생’이 가이드를 통제하고 있는 방법이 뭔지 알아내야 한다. 오연은 눈을 부릅뜬 채 ‘선생’의 모든 것을 스캔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의 수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선생은 그저 태연하게 숫자를 세고 있을 뿐이다. 정신계 에스퍼 여럿이 선생의 머릿속을 스캔해보려고 했던 시도가 모두 무산된 지금, 오연이 할 수 있는 건 오진우 때와 같이 선생의 행동에서 보이는 특이점을 찾는 것밖에 없었다.
선생은 정말 평범하게, 그저 숫자를 거꾸로 세고 있는 게 다다. 별다른 특징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선생의 입에서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최태훈은 지금 제가 악몽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윽고 선생은 찢어질 듯이 환하게 입술 끝을 올려 웃으며 말했다.
“자. 방금 막 끝났습니다. 확인하셔도 좋습니다, 이미현 씨.”
이미현은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차마 집무실을 바로 빠져나가지는 못한 채 부들부들 떨면서 선생을 노려보는 게 다였다. 그녀는 제발 그의 말이 허풍이기를 빌고 있다.
……말도 안 돼. 거짓말.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떨리며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한 가이드의 죽음을 알리는 연락이 집무실의 핫라인으로 전해졌다.
이번에는 센터 안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불안해진 에스퍼가 제 가이드를 자신의 집으로 대피시키듯 보냈고, 가이드는 그 욕실 안에서 손목을 그어 목숨을 끊었다. 마치 삼류 호러영화의 죽음처럼 한 사람의 생명이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바스러진 것이다.
미현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완전히 풀린 눈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파에 도로 앉을 생각조차 못하는 그녀의 몸이 마치 사시나무처럼 후들대고 떨렸다. 본능적인 공포가 그녀의 이성을 사로잡았다.
센터장은 그런 제 연구원의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사실 선생이 장난치듯 숫자를 셀 때 권다희 그녀는 물론이고 오연과 지관영, 심지어는 오진우까지 ‘선생’이 가이드를 죽이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모든 감각을 열고 살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선생의 방법을 간파해 내지 못했다. 그녀는 이렇게 제가 수장으로 있는 이곳의 일원을 또 한 번 잃었다. 제발 그만두라는 그 무력해 빠진 말 외에는 그 어떤 다른 방법조차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센터장은 희미하게 떨리는 손을 주먹을 쥐어 감추며 이를 갈았다. 선생은 그런 그녀가 퍽 귀엽다는 듯 눈을 휘었다. 최태훈은 그 모습을 보며 언젠가 센터장이 했던 말을 멍하게 떠올렸다.
[감히 어느 누구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천재……. 그래요, 그게 그 ‘선생’이었어요.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아무리 에스퍼라도 사람인데…… 사람이 저러는 게 가능한가?]
어떻게. 대체 어떻게? 최태훈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찼다. 선생은 그런 태훈의 생각을 읽은 듯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태훈 씨. 지관영 그쪽은 뭐 당연히 받아들이시겠고?”
가이드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제 페어이자 연인인 사내를 바라보았다. 집무실에 들어선 이래로 에스퍼는 대화 초반에 잠시 입을 연 이후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꽉 잡은 태훈의 손을 엄지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듯 만지며 그 온기에 집중하고 있을 뿐으로 보인다.
지관영은 저를 바라보는 선생을 흘끗 바라보면서 짤막하게 대답했다.
“……얼마든지.”
최태훈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잠시 숨을 참았다.
“아아, 시간이 없네. 시간이 없어. 그래도 조금 전에 한 사람 앞당겨 죽었으니 생각할 시간 하루를 벌었네요. 다행인 일입니다.”
선생의 입에서 낄낄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똑딱똑딱똑딱. 시간이 간다. 시간이 가.”
* * *
센터는 전에 없던 공포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선생’의 손에 완벽하게 놀아났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파악할 수도 없었다. 최고의 지성이 모였다는 센터의 패배였다.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던 일이다.
그들이 센터에서 당연하게 여겼던 모든 것의 세포와 골조와 근육을 만든 건 ‘선생’이었다. 에스퍼-가이드 매칭 시스템부터 에스퍼 훈련장과 훈련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보안의 큰 갈래까지 선생의 손이 닿지 않은 게 없다.
선생이 센터를 떠난 지 십여 년이 지났음에도 그가 만든 보안 체계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 간단했다. 센터의 난다 긴다 하는 연구원 그 누구도, 선생이 만든 보안보다 더 훌륭한 보안 체계를 구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센터의 철옹성은 완벽하게 느껴졌었다.
그것을 고안한 자의 손에서 허무하게 박살 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뒤늦게 시스템을 모두 점검하며 선생이 파고든 빈틈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조차도 실패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시스템을 뚫을 수 없었다. 그건 이 모든 것들을 만든 ‘선생’만이 가능했다.
끔찍할 정도로 처절한 무력감이었다. 센터의 연구원들은 그 참패 속에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들은 절대적인 공포에 휩싸여서 숨을 죽였다.
물론, 자신의 가이드가 운 좋게 선생을 거치지 않은 에스퍼 몇이 선생에게 반발하려는 움직임을 잠시나마 보이기도 했었다. 허나 그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거의 실전 전투에 가까운 날 선 반응이 돌아왔기에 그 시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관영과 최태훈은 김권석의 목숨으로 하루, 그리고 얼굴조차 모르는 한 가이드의 목숨으로 또 다른 하루를 얻었다. 최태훈은 첫날엔 관사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연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두 번째 날, 지관영은 자신도 준비가 필요하다며 자리를 비웠다. 최태훈은 그의 부재를 순순히 이해했다.
페어에게는 각자 할 일이 생겼다.
지관영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최태훈과의 8개월을 지울 각오를 해야 했고, 최태훈은 제가 가지고 있는 페어 주도권을 포기하는 연습이 필요했다.
관영은 늦은 밤에야 관사로 돌아왔다. 연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시 말해 기억을 가진 마지막 밤이었다. 에스퍼는 베란다에 수북이 쌓여 있는 담배꽁초를 보며 살짝 찌푸린 웃음을 흘렸다.
8개월간 이어온 태훈의 금연이 물거품이 되는 날이었다.
“최태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처음 만났을 때.”
생각보다 훨씬 낮게 갈라진 목소리로 평소보다 짤막하게 대답하는 문장은 묘하게 야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안색이 어두운 것만 빼면 참 좋을 터였다.
지관영은 베란다에 비스듬히 기대 최태훈의 말을 받았다. 습하고 더운 여름 기운이 확 올라오는 밤은 평소에는 꽤 싫어했던 것이었지만 이상하게 지금을 기념하기에는 퍽 어울렸다.
“사인회?”
“예.”
그래, 그랬던 때도 있었지.
지관영은 제 가이드가 한가득 피운 담배꽁초를 둥둥 떠오르게 해서 정리하며 생각했다. 저와 악수를 한 뒤 화들짝 놀라 도망치던 동그란 뒷모습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제 자신의 페어 가이드와 손이 닿았을 때의 감각은 정말이지,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너 정말 눈치 없었어.”
“……제가요?”
“등에 내 이름 떠올랐는데도 이상한 사람들만 골라 건드리고 다녔잖나. 아냐?”
태훈은 그제야 제가 만났던 70대와 10대 초반의 동명이인들을 떠올렸다. ‘지관영’의 이름을 가진 이들이었다. 특히 70대 노인은 죽기 전에 자신과 이름을 나눈 사람을 만난다고 기뻐하며 코를 훌쩍이면서 자식까지 데리고 나왔다가, 네임의 모양이 다른 걸 보고 혈압이 올라 119까지 불렀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참 재미있는 추억 같은 일이지만, 가이드는 그다음 곧바로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최태훈은 깊게 들이켰던 담배연기를 반대쪽으로 내뱉으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그랬다는 거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현이가 그럽니까?”
“아니. 사인회 이후에 최태훈 네 조사를 했지.”
에스퍼의 입에서는 담담한 범죄 사실 고백이 흘러나왔다. 태훈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황당하다는 기색이 섞여들었다.
“정말입니까?”
“어.”
지관영은 제가 연인에 대해 알아봤던 것을 줄줄 읊었다.
“나이, 학교, 직장, 가족, 에스퍼 매칭…… 알 수 있는 건 전부.”
순간적으로 담배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태훈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관영은 조금씩 타오르는 필터를 보며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무슨 배우가 스토킹을 다 합니까.”
“동생이 다섯 명인 것도 그때 이미 알았지. 강남 현장에 바로 찾아간 것도 그 덕이고.”
“진짜?”
“진짜.”
모든 기억을 잃기 전에야 펼쳐지는 진실 고백이었다.
정말이지 살벌한 로맨스가 아닐 수 없었다. 저는 감히 톱스타 지관영과 이름을 공유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 당사자는 사람을 풀어 제 신상을 낱낱이 꿰고 있었다니, 정말 꿈에도 그린 적 없다.
“왜 이제까지 말 안 했습니까.”
“해서 뭐하는데.”
너무도 당당하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정말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어조라 조금은 뻔뻔하게까지 느껴졌다. 태훈은 저도 모르게 ‘그럼 왜 이제까지 하지 않았던 말을 지금 하느냐’라고 물으려다가 얼마 안 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묻기도 전에 그 이유가 그려져서다.
지금 이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저와 눈앞의 남자는 내일 페어가 끝난다.
정확히는 제가 지관영과의 관계에서 가진 주도권을 이한솔에게 넘겨야 한다고 했다. 대체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감조차 오지 않지만 이한솔 그 가이드는 그런 힘을 가졌다고 한다.
최태훈은 어느새 짤막해진 담배를 마지막으로 쭉 빨아들였다가 그걸 비벼 껐다. 페어 사이에는 옅은 한숨 섞인 숨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지관영 씨.”
“……어.”
“죄송합니다.”
“뭐가.”
지관영은 항상 정확한 이유를 묻는 버릇이 있다.
무엇이 왜 그런 건지 확실히 말해주기를 원한다. 처음에는 그런 에스퍼의 빈틈없는 성격이 조금은 곤란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태훈은 이제 저런 되물음을 들을 때마다 그를 위해 정확한 답을 내기 위해 노력하게 됐다.
“그 가이드 이한솔을…… 그렇게 하는 걸, 막은 거 말입니다. 계속 생각해봤습니다. 솔직히 아직은 좀 마음이 오락가락합니다.”
“…….”
“말리지 말았어야 했나? 눈 딱 감고 모른 척했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까지는 안 왔나? 아니다, 그런 실험 운운하는 선생이 다른 방법을 못 찾았겠나. 해도 어떻게든 했을 사람이다. 차라리 이게 나은 거다. 아, 정말 온갖 생각이 다 듭니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의 저런 솔직함을 좋아한다.
혼자서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고, 고민한 것들을 제게 털어놓는 순간이 좋다. 그럴 때의 최태훈은 저를 늘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관영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눈 밑이 거뭇거뭇한 연인의 뺨을 쓸었다. 종일 경직된 얼굴로 있던 최태훈은 그 간지러운 감각에 처음으로 찡그리듯 눈을 휘었다.
“그런데 저는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 같고 그렇습니다. ……자신은 없지만요.”
최태훈의 말에 지관영은 정말로 순수한 의문이 묻어나는 눈이 되었다. 지금이야 선생의 ‘실험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제가 오연을 무시하고 그 가이드를 죽이려는 순간으로 돌아갔을 때 다른 선택을 한다면 적어도 지금 같은 상황은 안 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다.
태훈은 그게 뻔히 보인다는 듯 살짝 마른 입술을 혀로 쓸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 역시도 온종일 생각했던 거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리며 가정하는 게 쓸모없는 짓이라는 것 정도는 잘 알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이드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에스퍼는 누굴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는 거랍니까?”
“…….”
“정말 잘못한 인간은 따로 있는데 왜 당신이 그런 짓을 해야 합니까. 오진우 씨가 폭주해서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때 또 원망이라는 원망은 대신 다 받으시겠죠.”
거실에서 흘러들어오는 빛에 비치는 얼굴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하는 모습이 좋았다. 눈앞에 있는 사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게 자각하는 순간이 모든 것을 잊기 하루 전이라니.
그 사실이 꽤 얄궂어서 에스퍼는 찌푸리듯 흐리게 웃었다.
“지관영 씨는 그런 일을 해도 괜찮을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지관영 그는 이제껏 딱 두 사람을 죽여 봤다.
빙글 웃는 낯으로 홀로 남은 저를 배신하고 뒤로 칼을 심고 있던 집사와 최태훈을 위협하던 강남 테러 현장에서의 에스퍼다. 그들을 죽이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거나 힘들었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전혀 아니다.
그에게 그건 별것 아닌 해프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두 사건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그 두 죽음은 인간 지관영이 괴물이 되었던 순간을 의미한다.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힘 그 자체인 괴물.
최태훈은 언제나 지관영을 평범한 사람이자 하나뿐인 연인으로 대한다. 괴물의 가죽 뒤에 숨어있는 약함을 가장 먼저 꿰뚫어 본 것도, 평범하게 소파 위에서 TV를 보다 잠들고 아침에 눈 떠서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식사하는 삶을 알려준 것도 최태훈이었다.
에스퍼는 그런 제 연인의 얼굴을 묵묵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또 이렇게 될 텐데도?”
단정한 입술이 꾹 닫혔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듯 베란다 밖을 빤히 바라보던 최태훈은 베란다 한쪽에 있던 테이블 위의 담뱃갑에서 다시 막대 한 개비를 꺼내 들었다.
지관영은 최태훈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그것에 불을 붙이는 걸 보았다. 벌써 몇 개비일지 모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말릴 분위기가 아니었던 터라, 지관영은 약간 고개를 비스듬히 한 채 말없이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눈썹을 내리깐 채로 볼이 움푹 파였다가 연기를 내쉬는 모습은 참 묘한 그림으로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방금 한 3초 또 후회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런 것 같았어.”
옅은 웃음기 어린 대답이었다. 가이드는 제 에스퍼의 그 느긋하면서 나른한 눈웃음이 좋았다. 최태훈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실은 무섭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토로하듯 느리게 내뱉은 문장이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던 가이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에스퍼는 그 표정이 반가웠다. 그는 지금 최태훈이 필사적으로 담담한 얼굴을 꾸미고 있다는 걸 잘 안다. 혹시라도 제가 걱정할까 봐, 마음이 무거워질까 봐 애써 불안을 감추고 있는 거다.
“지관영 씨가 절 못 알아보고 매칭조차 되지 않는 상황이 상상이 잘 안 갑니다. 그래서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내일이 어떨지.”
“…….”
“그런데 만약에, 정말 만약에…….”
“최태훈.”
지관영은 느리게 이어지던 제 가이드의 말을 뚝 잘랐다. 태훈은 제 에스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날 절대 포기하지 마.”
이번에는 최태훈의 차례다.
에스퍼가 가이드에 대한 것들을 먼저 아는 채로 시작했던 것이 처음이었다면, 이번에는 가이드가 먼저 다가가야 하는 때가 온 거다. 최태훈은 담배 연기를 깊게 삼키고는 내뱉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가이드가 이 수십 대의 담배를 홀로 피우면서 내린 결론은 하나다. 그는 고민은 최대한 짧고 깊게 하고 행동으로 바로 옮기는 성격이다.
날이 밝았다. 페어는 나란히 센터로 향했다.
오진우가 포박되어 있던 센터의 홀에는 이제 거대한 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건 오로지 지관영을 마취시키기 위한 목적 하나로 마련된 것이다. 최태훈은 센터장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 그것을 보고 지나치면서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그 주변에 있던 연구원들은 너무나 오랜 시간 봐왔던 가이드의 눈을 차마 마주 보지도 못했다.
선생은 페어를 보며 눈을 활짝 접어 웃으며 이한솔과 함께 날 듯이 걸어왔다. 센터장 권다희는 제 의자에 조금은 초췌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태훈은 슬쩍 이미현을 찾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센터장의 뒤로 오연과 오진우가 있을 뿐이다.
“하하하!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기다렸잖습니까.”
태훈은 저를 향해 빙긋이 웃어 보이는 선생을 잠시 보다가, 조금은 거만한 표정을 한 채인 이한솔을 물끄러미 눈에 담았다. 이한솔은 최태훈과 시선이 마주치자 마치 자신이 이겼다는 양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걸 보고 언짢아진 건 지관영이다.
그는 이한솔의 저 건방진 태도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말이지 최태훈과는 짜증 날 정도로 정반대인 가이드다.
선생은 흥분된다는 듯 상기된 얼굴로 손바닥을 비볐다. 그는 지금 아주 설레었다.
“자아. 지관영 씨의 ‘정보 제거 작업’은 마취 후에 진행할 겁니다.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은 완전히 가드가 풀리지 않으면 도저히 손을 댈 수가 없거든.”
비스듬하게 앉아 턱을 괸 지관영은 ‘선생’의 앞에서는 하고 싶은 말을 꽤 많이 참는다. 기분대로 했다가는 정말 한껏 빈정대고 조롱할 것 같아서다. 그는 긴장으로 살짝 축축해진 태훈의 손바닥을 쓸고, 손가락 끝으로 그리면서 대충 고개만 까닥였다.
“그리고 최태훈 씨는 여기 이한솔 씨와 함께 주도권 작업을 진행할 겁니다. 처음엔 좀 힘들 거예요. 메스껍기도 하고요. 센터에서 친히 준비해 주신 조용한 방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
“아! 물론 실험이 끝나면 그 결과와는 관계없이 지관영 씨와의 매칭률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때도 그게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매칭률에 대한 얘기에도 별 반응이 없는 지관영과는 달리, 최태훈은 다시 한 번 나온 자신의 약점에 이를 악물었다. 그건 그가 가장 확인하고 싶었던 문제이기도 했다.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 겁니까?”
“실험에 성공하면 ‘카운슬링’한 가이드를 다 살려준다는 말은 어떻게 믿을 수 있고요?”
선생의 안경알이 기묘하게 번뜩이며 그 안의 접힌 눈을 가렸다. 센터장은 밀려오려는 한숨을 꾹 삼켰다. 선생이 어떻게 가이드를 죽이는 건지 그 방법을 알아내지 않는 한 이 판 위의 장기짝은 철저히 선생의 손에 쥐어져 있다.
정말로 분하고, 정말로 열이 오르지만 지금 그들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하핫, 당신과 제 사이에는 신뢰가 필요합니다. 최태훈 씨. 하지만 정말입니다. 난 나의 소중한 실험 대상에게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늘 거짓말을 하는 건 당신들이지.”
‘실험 대상은 늘 거짓말을 한다’.
센터장 권다희는 그 익숙한 문장에 떨궜던 고개를 들고 선생을 바라보았다. 선생은 20년 전에도 이 말을 버릇처럼 했었다. 가로로 찢어질 듯 길게 벌어진 웃음이 역겨웠다.
최태훈은 그런 선생을 말없이 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긴장한 손을 잡은 지관영만이, 페어의 옅은 떨림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선생님.”
“네에?”
“……그렇다면 저도 실험 조건 하나를 제시하겠습니다.”
흥얼거리듯 손가락 끝을 까닥거리던 선생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선생은 고개를 기괴할 정도로 옆으로 튼 채 무표정한 얼굴로 최태훈을 바라보았다.
“제 조건이 수락되지 않으면 전 이 실험에 응하지 않을 겁니다. 저도 보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최태훈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관영은 공포에 떨면서도 기죽지 않으려 애쓰며 말하는 제 가이드가 사랑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은 근사하기는 했지만, 어느 한 명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긴장하고 있는 지금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오연은 사내의 그 그린 듯한 얼굴에 입이 다 말랐다.
한동안 말이 없던 선생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다 죽을 텐데?”
최태훈은 급히 숨을 삼켰다.
누가 봐도 긴장과 두려움으로 얼어 있는 반응이었다. 눈에 띄게 떨리는 눈가는 그 마음의 동요를 채 감추지 못했다. 지관영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그런 연인의 손을 꽉 잡았다. 태훈은 그것에 용기를 얻었다는 듯 작게 심호흡한 뒤 힘주어 되물었다.
“……실험을 하지 못할 텐데요?”
싸늘할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이한솔조차도 제 ‘아버지’ 선생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미간을 찌푸린 채 최태훈을 흘겨보았다. 선생은 여전히 그 소름 끼치는 무표정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뜬 채 최태훈을 담고 있을 뿐, 어떤 반응도 없다.
가이드는 그 시선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제가 또 한 번 후회할 행동은 한 게 아닌지 두려웠다. 하지만 그런 침묵을 깬 건 순식간에 다른 얼굴을 뒤집어쓴 선생이었다.
“하, 하하하, 하하하하! 하! 하! 하하!”
미친 듯이 웃는 선생을 보며 센터장은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팔을 쓸었다. 에스퍼로 발현한 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보며 위축된 적이 있었던지, 그녀는 그 생각마저 평범하게 잇기 어려웠다.
“그래, 그래. 그래. 들어봅시다. 해 봅시다. 하하하! 하! 변수는 언제나 즐겁지.”
선생의 입에서 끅끅대는 소리가 터졌다.
그는 이제 정말로 유쾌해졌다. 고작 몇 시간 뒤면 모든 것을 잊게 될 에스퍼와 가이드로서의 증명을 완전히 상실할 페어가 제게 제시하는 ‘실험 조건’이라니.
이보다 더 즐거운 건 없을 터였다. 선생은 최태훈의 코앞까지 다가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뭐죠? 뭡니까, 최태훈 씨. 가이드 최태훈이 내거는 실험 조건이 뭡니까?”
긴장으로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던 태훈은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며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한때는 푸근하고 따뜻하게만 보였던 중년 사내의 얼굴이 지금은 이렇게 완전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게 참 믿기 어려웠다.
최태훈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작은 숨이 흘러나왔다. 태훈은 저를 향해 눈을 크게 뜬 선생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저 가이드에게 ‘카운슬링’을 해 주십시오.”
센터장은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최태훈의 말에 집중했다. 그건 오연도, 오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보다 비교할 바 없이 약하디약한 가이드가 공포에 떨면서도 선생과 대립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는 건, 왠지 모르게 마음 한편을 일렁이게 했다.
“예컨대…… 이렇게 말입니다.”
선생은 어제 제가 했던 말을 흉내 내는 가이드를 눈을 번뜩이며 바라보았다.
“<가이드 최태훈이 실험에 성공할 경우, 가이드 이한솔은 이후 그 누구의 가이드도 될 수 없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윽고 떨어진 최태훈의 말에 이한솔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졌다.
하지만 태훈은 그런 한솔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선생만을 바라보았다. 최태훈은 이한솔과 처음 대화했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 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조금 많아 보이는 이 청년은, 묘하게 아이 같은 화법을 썼다. 그럴듯한 존대를 사용하는 껍질과는 별개로 그 안의 알맹이는 꽤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기까지 했다. 상대의 기분이나 반응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당장 욕망에 충실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이건 내 거다’라고 하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소유욕이다. 나이 터울 많은 동생을 거의 제가 기르다시피 했던 최태훈에게 그건 꽤 익숙한 거다. 지금도 허락 없이는 자신의 볼펜 한 자루 마음대로 쓰는 걸 싫어하는 여동생 민아만 봐도 그렇다.
어제 온종일 관사에서 혼자 담배를 피우던 최태훈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한솔의 최우선 목표가 가장 강한 에스퍼의 가이드가 되는 거라면, 어쩌면 반대로 가장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것도 그게 아닐까?’
“카운슬링으로 죽이는 것도 가능한데 설마 이 쉬운 게 안 될 리가 있습니까?”
최태훈이 선생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을 때, 오연의 시선이 향한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이한솔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선생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하핫, 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마치 연극 대사를 토해내듯 웃는 그의 목소리는 한껏 과장되어있었다.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이것 참! 이렇게 재미있을 데가!”
“……아버지!”
이한솔은 필사적이다.
늘 여유롭게 키득이며 웃던 청년이 저렇게까지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이는 건 처음이다. 오연은 그 둘의 관계에서 일종의 권력관계를 읽을 수 있었다. 앞선 이한솔의 모습과 저 태도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 이한솔은 ‘가이드’의 정체성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 실험이 얼마 만이지? 하하! 하하하! 이한솔 씨,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이해했죠’?”
선생의 말에 이한솔은 어깨까지 부들대고 떨면서 최태훈을 노려보았다. 오진우는 살짝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눈까지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한 가이드를 지켜보았다.
저렇게 일그러진 채 동요하는 모습은 이한솔을 10년간 지켜보았던 오진우 역시 처음이었다. 오연은 선생의 말에 아무런 이의조차 제기하지 못하는 이한솔을 보며 두 번째 가설을 확신했다.
둘, 이한솔은 선생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일종의 권력관계로 묶여 있다. 그건 선생과 이한솔의 호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선생은 저 가이드를 ‘이한솔 씨’라고 하는 제법 거리감 있는 단어로 부르지만, 이한솔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른다.
“하하, 하핫. 하……. 이번 실험은 정말 기대됩니다. 자. 지관영 씨, 따라오십시오.”
때가 됐다. 지관영은 마지막까지 제 가이드의 손을 잡고 뼈대가 올라온 그 위를 살살 그리고 있다가 선생의 말에 큰 표정의 변화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태훈은 제게서 떨어진 사내의 온기에 잠깐 숨을 들이켰다.
“이따 보자고. 최태훈.”
“……예.”
눈물 어린 마지막 인사 같은 건 없었다.
지관영은 그 어떤 때보다 미친 듯이 쿵쾅대고 뛰기 시작한 제 가이드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어떻게든 감정 동요를 숨기려고 애쓰고 있는 제 가이드를 끌어안고 눈물 흘리게 할 순 없다.
혼자 남을 최태훈이다.
고작 몇 시간 뒤에 어떤 모습일지 그려지지조차 않는 저를 견뎌야 하는 태훈에게 다정함보다 더 잔인한 마지막 기억은 없을 터다.
태훈은 저도 모르게 제 에스퍼를 잡으려고 했던 자신의 손을 힘주어 눌렀다. ‘지금의 지관영’이 기억할 제 마지막 모습이 혹시라도 연인을 속상하게 만들까 걱정이었다. 지관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곧은 자세로 뚜벅뚜벅 센터장의 집무실을 걸어 나갔다.
가이드는 연인이 열고 나간 문을 한참 동안 눈에 담았다.
다른 이를 향한 그 어떤 원망도, 분노도 없이 시끄러운 속을 혼자 삭이는 모습은 조금은 위태롭게도 보였다.
오연은 이를 악물고 천장을 몇 초간 보다가 조금은 급한 걸음으로 지관영을 뒤따라갔다.
세 번째의 측정 불가. 모든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사내. 그 긴 별명다운 모습을 한 근사한 남자는 홀 중앙에 설치된 시트에 누워서 자신에게 온갖 기계들을 주렁주렁 매다는 이들을 가만히 눈으로 훑고 있었다.
그는 참 묘하게 느긋한 태도였다.
당장 제 가이드 최태훈과 페어가 끊기고 8개월간의 기억을 모조리 잃을 상황을 앞두고도 긴장이나 불안감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관영의 팔에 두꺼운 주삿바늘을 꽂는 연구원 뒤에 말없이 서 있던 오연은, 살짝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불안하지 않으십니까.”
“글쎄.”
지관영에게는 보통 사람이라면 치사량을 훨씬 넘을 양의 마취제가 필요하다. 그것도 점점 강도를 높여가며 그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져 기계적 접근이 가능할 때까지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일반인이라면 십여 분이면 끝날 기억 조작이지만 그에게는 꽤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 확률이 크다. 그걸 알고 있는 오연은 지관영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에스퍼는 그런 오연을 보며 평소의 그 오만한 어조 그대로 말했다.
“뭐. 최태훈이 조금 고생하기는 하겠지만, 이건 그쪽의 동생을 살리겠답시고 짜증 나는 가이드 하나를 살려 둔 교훈을 배우는 과정으로 쳐야지.”
“…….”
“물론 그런 최태훈한테 휘둘리는 나도.”
기계의 전원이 켜졌다. 거대한 기계의 모터가 천천히 예열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표정 집어치우세요. 나름대로 꽤 준비를 하고 왔으니까.”
‘준비’. 그건 지금처럼 막막한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귀여울 정도로 단정한 단어였다. 지관영은 의아한 표정이 된 오연에게 대답 대신 눈가에 옅은 웃음기를 띄우는 것으로 말을 대신했다. 사실 그는 지금 농담이 아니라 정말 꽤 즐거워졌다.
겁에 질려 떨면서도 선생에게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가던 제 가이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최태훈은 아마 그 말을 하기 위해 어제 하루를 담배와 함께 보냈을 거다.
제가 한 가이드의 목숨으로 얻은 시간을 놀지 않고 보내며 ‘준비’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 그렇게 죄책감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면 위선 떨지 말고 그 좋다던 머리나 굴리세요. ‘센터의 두뇌’ 오연 씨.”
지관영 그도 이제 제법 이 실험의 끝이 궁금해졌다. 최태훈에 대한 기억도, 에스퍼와 가이드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지표라는 매칭이 없는 상태에서 제가 다시 한 번 최태훈을 눈에 담을 수 있을지 알고 싶다.
물론 최태훈을 순순히 포기할 마음도 없다. 어떻게 제게 떨어진 사내인데, 저 정신 나간 에스퍼가 하라는 대로 순순히 움직이는 건 꽤 불쾌한 일이다.
그래서 지관영 그는 약간의 반칙을 준비했다.
그건 몇 시간, 그게 아니라면 며칠 뒤에 눈을 떴을 저를 위한 것이다. 지관영은 제 자신이 그 ‘반칙’을 보고 어떤 반응을 할지 정말 알고 싶다. 그걸 못 본다는 게 아쉬울 정도다. 에스퍼는 천천히 물기가 번지듯 흐려지는 시야를 느끼며 낮은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저 많은 지능계 에스퍼가 같은 에스퍼 하나를 못 이겨 쩔쩔매면서 최고의 지성이니 뭐니 떠드는 거, 꽤 민망한 일 아닙니까.”
“……예. 죄송합니다.”
오연은 주먹을 움켜쥔 채로 허리를 90도로 꾸벅 숙였다.
* * *
주도권을 포기하는 건 선생의 말대로 꽤 끔찍한 경험이었다.
최태훈은 제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감각을 통제하고 휘몰아치는 것 같은 이한솔의 능력 앞에서 몇 번이고 기절하고 헛구역질했다. 그때마다 이한솔은 ‘이래서 죽이는 게 가장 쉽다’며 이를 갈았고, 태훈은 그런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다행히도 가이드가 내건 실험 조건은 꽤 효과적이었다. 이제 이한솔 그에게서도 여유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잦은 구역질로 스물일곱 시간 동안 겨우 물만 마시며 진행된 그 지독한 작업이 끝난 건 스물세 번의 시도 끝이었다. 최태훈은 완전히 식은땀에 젖어 탈진한 채 의무실에 누워서도 그 익숙한 숫자에 헛웃음 쳤다.
스물세 번이라니. 다섯 살에 가이드로 발현한 후 23년간 그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지 못했던 제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숫자였다.
주도권을 넘기는 작업은 그 과정이 힘들었을 뿐, 오히려 완전히 이한솔의 손에 떨어지고 나자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편안해졌다. 무언가가 제 안에서 떨어져 나간 느낌조차 나지 않았다. 그저 이한솔이 이제야 됐다며 즐거워하는 것을 보며 정말 나는 지관영 그 사람과 페어가 아닌 건가 하는 생각을 멍하게 했을 뿐이다.
최태훈은 침대에 누운 채로 입을 열었다.
“……저, 지관영 씨는.”
“아직 의식 회복 중이에요. 태훈 씨도 좀 더 쉬어요.”
이미현이었다.
하루가 훌쩍 넘게 완전히 자취를 감췄던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다시 센터에 복귀했다. 미현은 텅 빈 제 옆자리를 보며 몇 번이고 꽉 막힌 숨을 눌러 참았다. 스산하게 빛나는 눈에서 느껴지는 분노와 자책에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뭐라 말을 걸기 어려웠다. 그녀가 유일하게 그 날 선 기운을 죽이고 상냥하게 대하는 사람은 최태훈뿐이었다.
“원래는 몇 시간 정도로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거의 이틀째인데요.”
“그 정도 되는 에스퍼의 기억을, 그것도 8개월간의 기억을 다 지우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원래는 태훈 씨에 대한 기억만 지우려고 했었는데 완전 마취된 상황에서도 저항이 커서 도저히 그렇게 섬세하게 접근할 수 없었다네요.”
미현은 어두운 표정의 태훈에게 달래듯 말했다.
“위로는 안 되겠지만…… 작업 자체는 지관영 씨에게 부담 없이 잘 끝났어요.”
“……예.”
최태훈은 제 연인을 꽤 먼발치에서 겨우 한 번 봤다.
연구원들 사이에 둘러싸인 사내는 그토록 싫어했던 센터에서 온갖 기계를 주렁주렁 매단 채 누워 있었다. 중간중간 연인의 입에서 옅게나마 앓는 소리가 들렸을 때는 심장이 철렁해져서 의무실로 서둘러 도망쳐 왔다.
정말로 내가 이제 지관영 씨와 페어가 아닌 걸까.
정말 지관영 씨는 나를 완전히 잊었을까.
태훈은 새하얀 천장을 보면서 멍하게 생각했다. 말수가 줄고 물조차도 쉽게 마시지 못하는 최태훈의 곁을 오연과 이미현, 그리고 종종 센터장 권다희가 지켰다. 가장 마지막에 찾아온 건 오진우였다. 최태훈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입을 다물고 살짝 야윈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진우는 그 시선에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있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내용은 그가 관사로 찾아왔던 때와 같았다.
“죄송합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태훈은 그 말에 답할 적당한 문장을 찾지 못해서 가만히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가이드와의 페어는…… 이제 확실히 끊어졌습니까?”
“……네.”
오진우는 다시 한 번 진행된 가이드 박승원과의 테스트에서 17.9의 매칭률을 찍었다. 그는 제가 받게 된 매칭 페이퍼를 몇 시간이고 빤히 바라보며 그 숫자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절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눈앞에 보이는 숫자가 사실인지 의심된다는 듯이.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차곡차곡 쌓이는 시간만큼 최태훈은 천천히 기력을 회복해 나갔다.
사흘 하고도 아홉 시간 뒤, 오랜 기다림 끝에 지관영이 눈을 떴다.
“지관영. 지관영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중앙 연구실 한 쪽에 앉아서 에스퍼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던 최태훈은 마치 튕겨 오르듯 급하게 일어났다. 요 며칠간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던 얼굴에 그 어떤 때보다 선명한 표정이 올라왔다.
사실 최태훈은 이 사흘간 정말 매일매일 피가 바짝 말랐다.
지관영이 저를 잊고 한 달의 기한이 주어졌다는 사실보다 만에 하나 제 연인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닌지, 그게 걱정됐었다.
최태훈은 연구원들보다 몇 걸음 앞서 서둘러 제 에스퍼가 있는 중앙홀로 향했다. 어렸을 때부터 오갔던 건물인데도 오늘처럼 센터가 넓게 느껴진 적이 있었나 싶다. 저 멀리 새하얀 대리석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지금만큼 스스로가 에스퍼가 아닌 게 아쉬웠던 적이 없다.
빨리, 정말로 빨리 보고 싶었다. 제 에스퍼면서 연인인 남자가. 심장이 쿵쾅대며 뛰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
홀 한가운데에 준비된 의자에 앉아있던 지관영은 기다렸다는 듯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은 나른한 표정을 걸고 있는 얼굴은, 최태훈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내가 분명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는지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이 아니다.
지관영의 시선이 천천히 중앙홀로 몰려 들어온 이들을 훑었다. 하나하나, 그들 중 자신의 눈에 익은 이가 있는지 확인하겠다는 듯한 눈이었다.
최태훈은 제 연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고 몇 초간 머물렀을 때 정말이지 말 그대로 심장이 내려앉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불과 며칠 전에 저에게 입 맞추던 이의 것과 그 색이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에스퍼의 권태로운 눈은 얼마 안 가 태훈의 옆으로, 그 옆으로 느리게 움직였다.
태훈은 제 연인이 눈을 뜨길 기다리는 며칠간 수없이 스스로 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믿기지도 않고 실감도 나지 않겠지만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이것에 휘둘리거나 휘청거리면 그 선생과 가이드에게만 좋은 일을 하는 거라고.
하지만 참 그 새삼스러운 사실을 직접 체감하는 순간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서늘하게 심장을 옥죄여왔다. 최태훈은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 * *
“에스퍼-가이드 국립연구센터…… 맞습니까?”
한참을 기다린 낮은 목소리였다.
그건 며칠간 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조금은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울 만큼 담담한 음성이기도 했다. 덕분에 최태훈은 물론이고 센터장 권다희와 다른 연구원들까지 모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 침묵은 모두가 자각하게 된 한 가지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
‘지관영은 다시 괴물이 됐다.’
연구원들을 한 명, 한 명 살피는 시선에서는 약간의 혼란도, 그 어떤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저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아. 그게.”
센터장 권다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조금은 빠르게 말문을 열었지만 안타깝게도 까칠한 입술 밖으로 나오는 문장은 없었다.
설명할 것이 너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지능계 에스퍼인 그녀로서도 감이 오질 않았다. 사실 아직 채 떨치지 못한 공포가 컸다는 게 깊은 곳의 진실이다.
지관영을 많이 대해보지 않은 그녀는 어떤 단어를 쓰고 어떤 표현을 써야 저 완전한 감시자의 눈을 한 사내를 거스르지 않을지 확신이 안 섰다. 그런 망설임을 읽은 지관영이 눈썹을 치켜떴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저 표정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선생은 저만치 뒤에서 연구원의 일부처럼 서서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고 입술 끝을 올렸다. 그는 자신이 기획한 이 ‘실험’에 어떤 영향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저, 실험 대상들이 뛰노는 그대로 그들이 향해 갈 결말을 지켜볼 작정이다. 그래야만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상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저는 센터 소속 연구원 오연입니다.”
오연은 제 센터 신분증을 내밀며 살짝 묵례했다.
오만한 눈빛을 짐짓 여유로운 태도로 덧칠해 감춘 포식자는, 아무래도 지금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기 전까지는 본색을 드러내지 않을 작정으로 보였다.
어느새 중앙홀로 도착해 합류한 이미현과 오진우는 최태훈의 곁에 섰다. 만에 하나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제 집무실로 자릴 옮기죠.”
센터장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무실의 모습은 며칠 전과 거의 비슷한 그림이 됐다. 지관영과 최태훈이 나란히 앉지 않았고, 이한솔이 빠졌다는 걸 제외하면 크게 별다를 바가 없었다. 선생은 마치 최태훈이 알던 그 상냥한 상담사인 것처럼 부드러운 인상을 한 채 웃고 있을 뿐이다.
오연은 한번 숨을 들이켰다가 천천히 그의 ‘8개월’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지관영은 제가 지금 기억을 잃은 상태라는 부분에서 살짝 미간을 꿈틀했을 뿐, 오연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물론 그 설명에는 약간의 검열이 가해졌다.
지관영 그가 강남 테러 현장에서 ‘가이드 최태훈’을 구했고 현재 연인이라는 사실과 지금 눈앞에 앉아있는 중년 사내가 이 실험을 주도한 사람이라는 것이 대표적인 삭제 내용이다.
오연은 모든 걸 다 말하는 것보다 ‘당신은 180대에 가까운 매칭률의 페어 가이드가 있었고, 지금은 그 매칭의 주도권을 다른 가이드가 가져간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교묘하게 요약하는 걸 택했다.
그는 지금 제 앞의 지관영이 8개월 전 처음 만났던 그 괴물임을 잘 알고 있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도 조심해야 했다.
지관영은 그런 묘한 생략을 뻔히 눈치채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이곳에서 선생에게 ‘실험’에 대해 들었을 때처럼 나른하게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한 달간 진행되는 실험에서 만약 당신이 기존의 가이드와 다시 페어가 된다면…….”
“…….”
“‘선생’이라는 자에게 위협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에스퍼는 물론이고요.”
차분하게 이어진 긴 설명이 끝났다. 오연은 그제야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최태훈은 제 연인이 말 한마디 내뱉지 않았는데도 손바닥이 축축해질 정도로 긴장해서 소리 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너무 뛰어서 왠지 속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페어 가이드가 누구냐고 물어보지 않을까? 뭐라고 소개하지?’ 태훈은 머릿속에서 많은 문장이 빙빙 도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가이드의 고민은 영 쓸모없는 것이었다. 한동안 생각하듯 묵묵히 있던 에스퍼의 입에서는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나왔다.
심지어는 선생조차도 짐작치 못했던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되겠습니까?”
“……예?”
“더 알아야 할 사항이 있나요.”
술술 말을 이었던 오연의 말문이 턱 막혔다.
더 설명할 것이 있냐고 묻는다면, 사실 더 이상은 없다. 하지만! 오연은 저도 모르게 그 순간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최태훈을 바라보았다. 지관영은 그 침묵을 무엇으로 해석했는지, ‘그럼.’ 하고 작게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성큼 일어났다. 그런 그를 말리듯 따라붙은 건 이미현이었다. 그녀는 며칠 전 이곳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시간이 숨 막힐 듯 생생하다.
“잠시만요. 지관영 씨! 지금 정말 급한 상황이라고요. 600명이 넘는 가이드가 죽는지 사는지 문젠데!”
이미현이 절박하게 외쳤다.
곧바로 집무실의 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던 지관영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에스퍼의 얼굴에는 드디어 처음으로 감정이라 이름 붙일 만한 무언가가 떠올라 있었다.
“아주 명쾌한 해설이었습니다. 오연 연구원님.”
“…….”
“그러니까 난 지금 어떤 실험에 참여하는 중이고…….”
선생과 오진우를 제외한 남은 세 명의 에스퍼는 순간 크게 숨을 들이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치 세포 하나하나를 분해해 뜯어 살피는 것 같은 감각이 그들을 덮쳤다.
오연과 이미현은 일전의 지관영과의 첫 대면에서 겪은 바 있는 그 집요한 스캔에 입술을 깨물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에게 제 모든 능력을 헤집어 내보이는 감각은 그 언제라도 끔찍한 거였다. 지관영은 제 ‘시선’으로도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선생과 오진우를 보며 살짝 고개를 기울인 채 눈썹 하나를 치켜떴다. 그의 눈에는 선연한 불쾌감이 어려 있었다.
“연구실 생쥐처럼 관찰해야 하니 허락해 달라 이거 아닙니까.”
미현은 그게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목구멍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 나오질 않았다. 완전히 제압당한 듯한 무력감과 공포가 스멀스멀 머리 한편을 물들이는 것만 같았다. 오연은 이미현의 어깨를 짚으며 그녀를 말렸다. 한시가 급하다고 한들 채근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거절합니다. 알아서들 하세요.”
에스퍼는 교만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걸고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오진우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최태훈은 정확히는 모르지만, 지금 제 연인이 같은 에스퍼만 자각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했었음을 눈치챘다. 그는 에스퍼의 모든 표정이 참 낯설었다. 저런 얼굴과 저런 태도를 한 지관영은 본 적이 없었다.
제 기억 속에 있는 에스퍼는 센터를 싫어하기는 했지만, 저렇게까지 날을 세우지는 않았었다. 페어라는 이유로 참 많은 배려를 받았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태훈은 이미 집무실을 빠져나간 제 연인을 뒤쫓아 나갔다.
뭐라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그가 이곳을 나가기 전에,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다. 갑작스러운 가이드의 돌발 행동에 다른 에스퍼는 눈을 크게 뜨고 그 뒤를 급히 따랐다.
태훈은 중앙홀과 이어지는 복도에 조금은 숨을 헐떡이면서까지 와서야 제 연인을 겨우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지관영은 마치 연구원들의 물결을 가르며 꼿꼿한 자세로 걸어 나가는 중이다.
‘지관영’.
너무나 좋아하는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걸 입에 거는 이가 있었다.
“지관영 씨!”
최태훈의 얼굴은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굳었다. 태훈은 제 에스퍼에게로 달려가 안기듯 팔을 거는 청년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정신 들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
“정말 기다렸잖아요!”
지관영은 손을 잡는 걸 좋아했다.
특히 손바닥을 딱 맞닿게 해서 깍지를 끼어 잡는 것을 가장 좋아해서, 같이 있을 때면 불편할 텐데도 꼭 손을 맞잡고는 했다. 가끔 긴장으로 손바닥이 축축해질 때, 민망함에 그걸 빼려고 해도 절대 허락해주지 않던 사내다.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슬쩍 비릿한 맛이 날 정도로 세게 입술을 깨물었다. 가이드를 뒤따라 온 에스퍼는 그 모습에 시선을 푹 떨구고 말았다. 태훈이 어떤 심정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아서였다.
이한솔은 저만치 위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가이드를 눈치채고는 키득대는 웃음과 함께 제법 다정스럽게 지관영의 손을 꽉 잡았다. 매번 최태훈과 이렇게 붙어 있는 걸 보는 게 정말로 눈꼴시던 터다.
“기분은 좀 어때요. 여기 좀 지루하지 않아요? 나갈까요?
지관영은 작게 고개를 기울여 저보다 눈높이가 낮은 이한솔을 바라보았다. 이한솔과 닿은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온기 그 이상의 어떤 것이 그의 시야를 완전하게 만들어 주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관영은 조금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가이드입니까? 매칭률을 넘겨받았다던가 하는.”
“네, 당신은 내 에스퍼예요!”
익숙해져야 한다. 익숙해져야만 한다.
적어도 한 달간은 저 모습을 보아야 한다.
최태훈은 조금 거칠어지려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렇게 눈앞이 새까맣게 변했던 순간, 센터의 중앙홀은 엄청난 충돌음으로 가득 찼다.
-콰앙!
최태훈은 잠시 그 소리가 제 심장이 쾅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멍한 표정으로 눈을 뜨고도, 제가 놓친 그 몇 초의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다. 홀 안은 살벌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말 한마디, 움직임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막 속에 누군가의 숨이 헐떡이는 소리만이 간간이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태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면서 중앙홀의 높다란 벽에 마치 마네킹처럼 처박힌 청년을 바라보았다. 연구원들은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안이 벙벙하다.
지켜보는 선생의 얼굴이 옆으로 쭉 휘었다. 그는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실험 과정’을 분석하는 중이다.
“……허, 허억, 헉, 컥…….”
부딪힌 벽의 일부가 완전히 으깨질 정도로 완전히 처박힌 이한솔은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사지를 뒤틀었다. 한솔의 얼굴은 지금 목부터 점점 붉게 변하는 중이다. 무언가 막힌 듯 숨을 쉴 수가 없는 거다.
지관영은 제가 높다란 벽으로 내다 박은 가이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훤히 드러난 한솔의 목부터 어깨까지 나 있는 흉터에 지관영의 시선이 닿았다.
새살이 돋은 지 얼마 안 된 터라 아직 진한 붉은빛을 띤 흉터는, 굉장히 예리한 무언가로 베인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에스퍼 그 자신이 했던 것이다.
“이건 누가 만든 겁니까?”
지관영은 제가 대답을 할 수 없게 만든 이한솔을 향해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수많은 인터뷰에서 듣던 톱스타 지관영의 다정함과 꼭 닮았다.
“아마도 내가 한 것 같은데. 기억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흐, 크윽, 아, 아아아악!”
“……이런 식으로. 맞습니까?”
에스퍼는 제가 만든 자국을 잘 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그 위를 무형의 힘으로 내리그을 때도, 이전과 마찬가지인 깔끔한 모양새로 잘라낼 수 있었다. 그걸 지켜보던 오연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도권을 이한솔이 가져간 이상 한솔이 죽으면 지관영도 죽는 거나 마찬가지다. 지관영과의 매칭을 포기할 가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진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훌쩍 뛰어올랐다.
정말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한솔을 다시 한 번 구해야 했다. 지관영은 제가 벽에 내리꽂아 박은 이한솔을 부축하는 오진우를 방해하지 않고 묵묵히 바라보았다. 의도치 않게 과거의 한 장면이 그대로 재현된 셈이다.
하지만 최태훈은 이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었다. 제 에스퍼가 정말로 누군가를 공격하는 걸 이제야 눈앞에서 직접 목도하게 된 거다. 이한솔의 붉은 피가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잠시 넋이 나갔던 연구원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그제야 여기저기서 뒤늦게 터져 나왔다.
“말했잖습니까! 저 가이드가 죽기라도 하면, 지관영 당신도……!”
중앙홀로 단숨에 내려간 오연은 지관영을 향해 조금은 거칠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오연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소름 끼칠 정도로 갈라진 목소리가 그 문장을 끊고 들어왔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이한솔은 고통으로 이마에 핏대가 설 정도로 거칠게 숨을 쉬면서도 이를 갈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나, 의, 에스퍼, 인데.”
“…….”
“대체, 왜, 애…….”
지관영은 치료를 위해 몰려든 연구원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인 이한솔을 향해 흘끗 시선만 움직였다. 한편 최태훈은 제 에스퍼가 이 피라미드에서 최강의 포식자임을 피부로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거다.
관영은 뚜벅뚜벅, 구두 굽이 대리석에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이한솔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스퍼 연구원들은 이한솔의 상처를 지혈하면서도 그의 접근에 긴장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가이드라고 밝힌 청년을 내려다보는 에스퍼의 눈에서는 단 한 점의 애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이한솔은 그걸 깨닫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이드 최태훈의 ‘매칭’은 분명히 제 것이 됐다.
분명히, 제 것이 되었는데도 저 에스퍼는…….
“그렇다고 한들 당신 따위가 내 목숨줄을 쥐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지관영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웃음기가 걸렸다. 하지만 그건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
“두 번이나 살려 드린 셈입니다. 몸소 깨달으셨다시피 나는 가이드랍시고 설치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러니……”
에스퍼는 먼지 한 점 묻지 않은 구두 굽으로 저를 잡았던 이한솔의 손등을 짓밟았다. 한솔의 입에서는 고통에 찬 비명이 흘렀다. 언제나 비릿한 웃음을 걸고 있던 곱상한 얼굴은 찾아볼 수도 없이 일그러졌다.
“크, 헉, 허억, 악!”
“다시는 날 ‘그따위’ 단어로 표현하지 마세요. 재밌는 실험을 정 하시고 싶거든 좀 더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거야.”
지관영은 축 늘어져 정신을 잃은 이한솔을 눈썹 하나를 치켜뜬 채로 몇 초간 더 내려다보더니, 제게로 시선이 몰린 센터의 사람들을 느긋하게 한 바퀴 쭉 훑었다.
괴물의 눈은 딱딱한 얼굴로 굳은 최태훈에게도 잠시간 닿았다. 완벽하다는 수식어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근사한 사내의 얼굴은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 지 오래였다.
태훈은 긴장으로 후들대는 무릎에 힘을 꽉 줬다.
D-30, 한 달간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 * *
이한솔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사실 이번에는 그가 회복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생명을 부지하기 힘들었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덧그어진 흉터와는 별개로 각종 골절과 장기 손상까지, 정말이지 쇼크로 즉사했어도 놀랍지 않았다.
그 덕에 센터는 ‘선생’이 가이드를 통제하는 방법을 알아내야 하는 숙제 외에도 큰 근심거리 하나를 더 안게 됐다. 바로 그 흉포한 에스퍼와 가까워져야 하는 가이드 최태훈의 안전이었다.
150대가 훌쩍 넘는 최태훈의 매칭률을 그대로 가져간 이상 손끝만 닿아도 눈앞의 모든 게 새로 정립되는 기분이었을 텐데, 그런 가이드를 벽에 내다 박고 고문하는 에스퍼라니!
꿈에서도 상상한 적 없는 경우였다.
매칭 가이드에게도 저 정도인 사내가 아무런 감각도 전해지지 않는 이름뿐인 가이드에게는 어떨지 뻔히 그려졌다. 연구원들은 모두 침울한 분위기로 그 당사자 최태훈의 눈치만 살살 봤다.
하지만 ‘전’ 지관영 가이드, 최태훈은 잠시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고 나자 생각보다 금세 의연한 얼굴이 됐다.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습니다.”
“예?”
최태훈에게 제 동생 오진우라도 가드로 붙여야 하나 고민하던 오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최태훈은 그런 놀란 반응에도 덤덤하게 말을 이어갈 뿐이었다.
“이한솔 그 가이드는, 궁지에 몰리고 나면 일부러 저 보란 듯이 급하게 행동할 것 같았습니다.”
“…….”
“지관영 씨는 누가 멋대로 구는 걸 싫어하니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솔직히 저렇게 싫어할 줄은 몰랐습니다.”
쉽게 표현하자면 지관영의 성격이 저 정도로 나쁠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는 거다. 최태훈은 아직도 긴장감이 남아 있는 한숨을 길게 쉬며 말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도 그 가이드가 죽을까 진짜 놀랐습니다.”
적어도 이번 한 달간 이한솔의 죽음은 반드시 찾아올 지관영의 폭주와 동의어로 사용된다. 최태훈은 생전 처음으로 본 누군가의 중상에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아직도 파편이 굴러다니는 센터의 중앙홀 어딘가에는 이한솔의 피가 몇 방울 정도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잃기 전의 지관영이 자신의 앞에서는 얼마나 얌전하게 발톱을 감춘 맹수였는지 이런 방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태훈은 바짝 마른입을 물 한 모금으로 축이며 식은땀이 나는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그런데 아무리 좀 무례했다고 하더라도…… 매칭률은 태훈 씨와 다를 게 없을 텐데. 너무 반응이 다른 게 아닌가요?”
센터장 권다희였다.
그녀의 눈에는 정말로 순수한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사실 지관영-최태훈 페어를 전담 관리했던 오연과 이미현도 지금의 상황이 완전히 이해되는 건 아니었다.
최태훈 때문에 강남 테러 현장 한복판에 등장해 폭주한 에스퍼를 완전히 넝마로 만들어 버리고는 순순히 투항까지 했던 지관영이다. 그 뒤에 잠시 리젝션 반응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건 정신적인 거부였지 지금 같은 극단적인 반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최태훈은 그 말에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영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는 절 강남 현장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차이가 아닐까요?”
지관영 그가 이한솔에게 한 행동은 일면식이 없는 사람이 저에게 친한 체하며 ‘내 에스퍼’라고 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랬다고 보기엔 너무나 잔혹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있는 연구원 중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아. 지관영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강남 테러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다니. 대체 언제부터요?”
“지관영 씨랑 제가 처음 만난 게 사인회였거든요.”
“……태훈 씨 지관영 팬이었어요?”
“아, 아뇨! 전혀요. 제 동생이 좋아하는데 하필 회사 근처에서 해서…….”
만약 기억을 잃기 전의 에스퍼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제 연인의 격렬한 부정에 언짢은 표정을 했을 거다. 이미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더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지금은 지관영에 대한 모든 걸 다 알아둬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센터의 사람들이 모르던 지관영과 최태훈의 첫 만남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드디어 풀리기 시작했다.
“그때 악수를 했었습니다. 지관영 씨가 갑자기 하자고 그러더라고요.”
“네에.”
“그런데 손이 닿으니까…… 뭐라고 해야 하죠. 갑자기 손이 닿은 곳부터 시작해서 등까지 확 불이 붙는 것처럼 열이 오르고 쓰라리기에, 너무 놀라서 그냥 얼른 나와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최태훈의 등 위에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네임이 떠오르는 순간이 바로 그때였던 거다. 태훈은 조금은 머쓱한 듯이 말을 이었다.
연구원들은 새삼 지관영과 최태훈, 저 두 사람은 정말 얽힐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서 이어진 사이임을 실감했다. 말도 안 되는 수치의 매칭률로도 모자라서 네임 공유라니. 한 명은 삼십 대 중반, 한 명은 이십 대 끝자락이 되어서야 겨우 만났다는 게 놀라울 정도였다.
“사실 저는 그날 이후에 제 등에 관영 씨 네임이 올라왔어도 그게 설마 ‘그 지관영’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뭐. 그렇죠. TV만 켜면 나오는 사람이랑 이름을 나눠 가졌을 거라고 생각하긴 어렵겠죠.”
“예. 그래서 다른 사람들만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지관영 씨는 그 사인회에서 절 바로 알아봤던 모양입니다. 가이드라는 것도, 네임 상대라는 것도요.”
정말이지 뻔히 그려지는 그림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허둥지둥 자리를 뜨는 최태훈을 보며 저 영악한 괴물이 얼마나 군침을 삼켰을지, 말만 들어도 훤했다. 연구원들은 속으로 작게 한숨을 삼켰다.
애초에 네임은 에스퍼-가이드처럼 신고가 필요한 것도 아닌, 조금은 기묘한 특수 현상 중 하나로 여겨진다. 상대의 이름이 신체의 한 부위에 문신처럼 떠오르는 그것은, 몇몇 예민한 사람이 상대의 상태에 따라 반응한다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위협을 끼칠 위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제 뒤를 몰래 살펴봤다고 합니다. 학교, 직장, 가족관계, 매칭된 에스퍼가 있는지 없는지…….”
“말도 안 돼. 지관영 씨가요?”
“저도 이거 며칠 전에야 처음 들었습니다. ……그, 바로 전날에요.”
말간 얼굴을 한 채 말하는 가이드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연구실에 있는 에스퍼 중 태훈의 말 이면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특히, 센터에 순순히 들어온 지관영을 처음으로 취조했던 이미현과 오연은 과거 그 난폭한 에스퍼를 보며 종종 느꼈던 그 묘한 의문들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만 같았다.
사실 퍽 궁금했었다.
다시없을 만큼 강하고 또 난폭한 ‘힘’ 그 자체인 사내가 최태훈에게 순순히 제 목숨을 맡기고, 십여 년을 넘게 꺼렸던 센터까지 기꺼이 들어왔다는 게 좀 앞뒤가 안 맞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아무리 매칭률이 높다 한들, 그렇게 가이드에게 바로 순응할 사내였다면 진작 센터로 찾아와 매칭 테스트를 받지 않았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헌데 지금 가이드의 말로 이 어긋났던 아귀가 모두 맞물리기 시작했다.
지관영 그 의심 많은 에스퍼는 자신이 사냥할 상대에 대해 모든 것을 완전히 알고 그게 제 손바닥 위에 올라와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자였을 거다.
그리고 아마도, 그는 강남 테러 현장에서 기꺼이 포박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제가 최태훈을 원하는 대로 구슬려 움직일 수 있으리란 자만에 젖어있었을 테다.
최태훈에게 가이드로서 취할 수 있는 건 기꺼이 취하면서 건조하게 마른 호감을 바탕으로 자신의 목숨줄을 쥔 주인을 무릎 꿇리고 귀여워하는 것. 한때는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걸 완벽하게 이룰 자신도 충분했을 거다.
그는 최태훈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니 대뜸 주인인 척 구는 게 곱게 보일 리가 있나.”
“예?”
“아니, 아니에요. 태훈 씨.”
미현은 작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껏 속수무책으로 선생의 계획안에서 놀아나기만 했었는데, 그것의 연쇄를 처음으로 끊어준 것이 그렇게나 저와 치고받고 싸웠던 지관영 그 사내라는 것이 참 묘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가능성도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센터의 사람 중 최태훈이 겨우 한 달 동안 논페어 상태인 지관영을 제 에스퍼로 삼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관영이 매칭률을 이어받은 이한솔을 지독하게 대하는 것을 본 이후로는 마치 기정사실처럼 그걸 포기하고, 선생의 비밀을 밝히는 데 집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지관영, 그 괴물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는 최태훈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혹시, 하는 기대감이 싹튼다. 정말 만약이기는 하지만…….
이 빌어먹을 실험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그동안 센터는, 센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있어야 할 거다. 이미현은 자신의 가이드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 * *
지관영의 매니저는 백미러 너머로 보이는 사내의 얼굴을 슬쩍 훑었다. 제법 오랫동안 지관영을 담당해 온 그는, 회사 내에서도 굉장히 다루기 힘든 사람으로 꼽히는 저 톱스타와 꽤 잘 맞는 편이다.
그럴 수 있던 것엔 다른 대단한 비법이 있던 게 아니다. 그는 그저 눈치가 조금 빠르고, 제 담당 배우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하는 말수 없는 남자일 뿐이다.
“저어, 이제 오늘 스케줄은 끝입니다. 내일은 조금 추가 촬영이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거의 종일 붙어 있는 관계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삭막한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매니저는 이것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요 며칠 지관영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드라마 촬영 현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절대적인 면제권이 부여된 센터에서의 긴급 호출 때문이었다. 덕분에 결국 저번 주 목요일에는 본방 대신 스폐셜 편집본이라는 이름을 붙인, 재탕 영상이 나가기까지 했다.
지금 인터넷은 물론이고 투자자, 방송사, 심지어는 그 뒤에 편성된 작품 관계자까지 불만이 말도 아닌 상황이다.
이렇게 된 이상 지관영은 차기작부터는 드라마는 쭉 거르고 다시 영화 위주로 활동해야 할 거다. 매니저는 머릿속으로 주판을 굴리며 차를 몰았다. 그러자 얼마 안 가 유려한 눈썹을 슬쩍 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예? 센터 가이드 관사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뇨. 앞으로는 바로 성북동으로 갑니다.”
매니저는 별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관영의 말에 토를 달지는 않았다. 그런 조용함이 그가 지관영과 오래 일할 수 있는 이유였다.
백미러로 보이는 제 배우의 표정은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다. 매니저는 조심스럽게 제 뒷자리에 앉은 사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해온 매니저의 짐작대로, 지금 지관영 그는 꽤 저기압이었다. 제 머릿속에서 말끔하게 사라져 버린 8개월의 기억 때문이다. 드라마 촬영 정도야 고작 며칠 전, 기억이 있었던 제가 대본 여기저기에 작게 표시해 둔 것만 봐도 따라잡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유독 대사가 길고 복잡하기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지만, 에스퍼인 그에게 그 정도의 암기는 대충 한 번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외의 모든 것들이었다.
그는 자신이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바로 제 앞에서 밴을 몰고 있는 남자에게까지도 철저히 함구했다. 기꺼이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구경거리가 되는 직업을 선택하고 그 껍질을 뒤집어쓴 것과 호기심 어린 관찰거리가 되는 건 완전히 별개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8개월. 기억나지 않는 8개월 동안의 제 자신.
지관영은 그 기간의 스스로가 정말 궁금해졌다.
제 자신은 최근까지 굉장히 얼빠진 행동을 하고 다녔음이 분명했다. 그는 오늘 촬영장에서 원래 제 가이드였다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같이 촬영하는 동료 배우 하나가 ‘관영 씨, 저번에 같이 왔었던 가이드 분이요. 왜 그 키 크신. 이제는 또 같이 안 와요?’ 하는데, 괜히 말을 길게 섞으면 무언가 앞뒤가 안 맞는 문장이 나올까 싶어 대답 대신 흐리게 웃어야만 했다.
물론 속으로는 황당함에 차서 제 자신에게 자문했다.
‘촬영 현장에 가이드를 데리고 와?’
아무리 에스퍼라는 게 알려졌다고 해도 뭐 하나 물어뜯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아예 약점을 전시할 생각이었나? 정말이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스스로가 했다는 행동이 납득되질 않았다.
“내일 아침 7시 반에 오겠습니다.”
“예. 들어가세요.”
지관영은 매니저를 향해 대충 인사하며 밴에서 내렸다. 온갖 친척들의 아귀다툼 끝에 남은 이 저택은, 그의 부모님이 남긴 거의 제대로 된 유일한 유산이나 마찬가지다. 이곳은 지관영 그만의 작은 세계다.
매니저조차 대문 안으로 발 한 걸음 들여 본 적이 없다. 이곳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된 몇 명의 사람들뿐이다. 이 집을 아주 예전부터 관리했던 나이 든 정원사와 그의 아들, 마찬가지로 아주 예전부터 집 안을 관리했던 몇몇 사람들 정도만 아주 조심스럽게 오가는 게 허락됐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한 가지 규칙이 있다.
‘이 저택의 주인인 지관영과 절대로 마주치지 말 것’.
그건 다른 이들보다 배는 많은 돈을 주며 그들을 고용한 지관영이 내건 가장 상위 규율이었다. 관영은 살짝 뻣뻣하게 굳은 듯한 제 뒷목을 주무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온종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지라, 제아무리 그라도 약간 피곤한 감이 없지 않았다. 에스퍼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며 곧바로 씻고 잠자리에 들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약간은 나른했던 그의 표정은 집 안으로 들어서고 몇 걸음 안 가서 딱 멈춰 서게 됐다. 현관과 이어진 길쭉한 복도를 지나, 시원스럽게 탁 트인 거실로 이어지는 곳에 다다르자 지관영의 눈은 서서히 크게 뜨이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작은 혼잣말까지 툭 튀어나왔다.
“……뭐야, 이게.”
그 누구의 침입도 허락하지 않았던 괴물의 은신처다.
별다른 물욕도 소유욕도 없는 지관영 그가 딱 한 가지 집착하는 것으로 이곳만큼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 언제나 완벽한 장벽에 둘러싸인 채였던 이 공간은, 분명히 그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한 사내에 대한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지관영은 답지 않게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마치 거대한 자료의 맵처럼 만들어진 것들을 훑었다.
거실 벽부터 시작해서 연결된 모든 복도가 시간대별로 정리된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다. 아마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 방도 이 모습과 비슷할 거다. 그의 시선이 이 모든 시간의 가장 처음인 거실 벽 구석에 닿았다.
조금은 급하게 쓴 듯한 글씨는 제 필체가 맞다. 에스퍼의 입에서 작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8개월.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8개월이 모두 이곳에 있다.
* * *
두 번 올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제아무리 신기한 경험이어도 한 번이면 족했다.
하지만 지금, 최태훈은 이곳에 제 발로 다시 찾아와 있다. 바로 지관영의 드라마 촬영 현장이다. 이제 슬슬 종영을 앞둔 현장은 어느 때보다 바빠 보였다. 가이드는 더는 깊게 쓸 수도 없게 눌러 쓴 모자의 챙을 더욱 힘주어 내렸다.
“자, 다시 촬영 들어갑시다. 지관영 씨! 준비 다 됐나요?”
“네.”
조금은 낮게 가라앉은 지관영의 목소리는 최태훈이 너무나 좋아하는 울림을 그대로 품고 있다. 가이드는 살짝 긴장한 채로 구석에서 숨을 죽이면서도 제 연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실 처음에 최태훈은 단 하루도 아까워하며 지관영의 집으로 곧바로 찾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걸 뜯어말린 건 당장 제 페어의 목숨이 이 실험에 달린 에스퍼 연구원들이었다.
그들은 실험 성공 이전에 진심으로 최태훈의 안위를 걱정했다. 농담이 아니라, 페어도 끊긴 이상 지금 상태의 지관영이라면 심기를 거슬렀다가 정말로 죽을 수도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결국 태훈은 그렇게 귀한 첫날을 초조하게 담배와 함께 날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든 지관영과의 거리를 좁혀야 했다. 심적인 거리는 둘째 치고서라도, 물리적인 거리라도 줄이지 않는다면 이 절박한 30일, 아니 이제는 29일이 된 이 시간이 그냥 날아갈 것이 뻔히 그려졌다.
고민 끝에 떠오른 방법은 하나였다.
최태훈은 지관영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것도 대담하기 짝이 없게 지관영의 연인으로서 연락했다. 매니저는 ‘절대 방해하지 않을 테니 지관영 씨 근처에 있어도 되냐’라고 묻는 말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왠지 그걸 순순히 허락해주었다.
태훈은 매니저의 그 태도에서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역시 제 연인은, 자신이 8개월간의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애초에 마음을 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약점을 보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거리를 두던 사내다. 철저한 성격에 프라이드도 넘칠 듯 강한 그가 제 자신에게 생긴 일종의 결핍을 인정할 리가 없었다.
절 보고도 여전히 기억하는 척하고 말지, 지난 시간을 잊었다는 말은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사람이 바로 지관영이다.
최태훈은 마치 엑스트라라도 되는 것처럼 촬영장 구석에 몸을 숨긴 채로 제 에스퍼를 관찰했다.
정말로 새삼스러운 말이지만, 그는 이곳의 어느 누구보다 눈에 띄었다. 분명히 지관영 저 사람과 마주 보고 있는 남자는 제법 인기 있다 일컬어지는 배우가 맞는데도 감히 그 무게감을 비교할 수 없었다.
지관영은 에스퍼와의 힘의 우열에서도, 사내로서의 겨룸에서도 최상위이자 최고급의 완성형 같은 존재다. 한때는 태훈도 저 사내를 보며 자격지심과 그 색이 비슷한 열등감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건 서로 페어로 엮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같은 사내에게 다리를 벌리고 뒤를 여는 게 껄끄러운 수치심을 남기기만 했던 때의 이야기다.
언제부터 관영 씨를 보면서 순수하게 감탄하게 됐을까.
가이드는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빠져 조금은 멍해졌다.
“어? 어어?!”
조금은 놀란 듯한 스태프의 목소리에 최태훈은 순식간에 쭉 현실로 끌려 올라왔다. 할 수 있는 한 기척을 죽이고 숨으려고 했지만, 그 유명한 ‘지관영 가이드’를 모두가 놓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최태훈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안녕하십니까. ……저, 정말 죄송합니다만 몰래 온 거라.”
“아아! 그렇구나! 세상에. 알겠어요!”
뭘 알겠다는 걸까.
최태훈은 왠지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는 스태프의 목소리에 어색하게 눈을 접어 웃으면서 생각했다. 왠지 귀로 피가 몰리는 것도 같았다. 결국 태훈은 지관영과 더욱 멀찍이 떨어진 촬영장 외곽으로 조용히 발길을 옮겼다.
슬슬 안 보는 척 저에게 향하기 시작한 사람들의 시선이 짚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누구보다 예민한 제 연인이 눈치챘을까 걱정인 태훈이었다.
최태훈은 옷이 걸려 있는 행거 뒤에서 몸을 굽혀 숙이고는 눈만 뱅글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관영은 물을 몇 모금 마시며 대본을 훑고 있을 뿐이었다. 가이드는 긴 한숨을 내쉬며 빠르게 뛰기 시작한 제 심장께를 꾹 눌렀다.
‘……얼굴 보니까 좋긴 한데. 말을 어떻게 걸어야 하지.’
오늘의 가장 큰 난제가 문득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실 이곳에 온다고 하자 센터의 연구원들 몇은 난리가 났었다. 오연은 제 동생을 끌고 와서 같이 가라고 성화였고, 이미현은 오진우가 불편하면 제가 같이 가겠노라 먼저 나섰다.
하지만 그건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지관영은 제 ‘범위’ 안에 에스퍼가 들어오면 곧바로 눈치채고도 남을 사내다. 옷 틈새에 몸을 숨긴 태훈은 다시 촬영에 들어간 에스퍼의 뒷모습을 훔쳐봤다.
저 쭉 뻗은 어깨부터 등허리까지에는 제 이름이 새겨져 있다. 몸을 섞기 전후로, 때로는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봤던 그 문신 같은 흔적이 지금처럼 보고 싶은 적이 있었던가 싶은 그다.
‘이름’.
지금 제 에스퍼와 자신 사이에 남아 있는 유일한 페어의 흔적은 그 아무런 힘도 없는 이름 세 글자뿐이다.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꾹 눌렀다. 하지만 ‘이름’을 두고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 있는 건 최태훈뿐만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이름!’
지관영은 단 하루 이틀 사이에 집 안뿐만 아니라 제 머릿속까지 강박적으로 채워진 단 세 글자의 이름에 이를 갈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미친 짓을 해 둔 건 ‘제 자신’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진심으로 짜증 나기 힘들었다. 한때는 미래였고 이제는 과거가 된 제 자신은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집요하게 이 저택 전체를 오로지 한 사내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두었다.
정말이지 어딜 가든 ‘그’에 대한 것들이 있다. 사실 처음에는 이 지도의 끝이 제 침실인 데다가 그 옆에 건방지기 짝이 없는 메모까지 남겨진 것을 보고 욱해서 바로 사람을 시켜 치워버리려고도 생각했었다.
아니, 다른 누군가 이걸 보기 전에 그 스스로 완전히 찢어발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딱 짜증 어린 생각까지였다.
시선을 어디로 돌리든 간에 눈에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정보들 때문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쳐도 그걸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 모든 것들이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8개월의 기억을 지닌 스스로가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해 가는 게 단 하나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 미친 실험에 순순히 응했다던 며칠 전의 제 스스로가 납득이 안 갔다. 지금의 그에게 ‘실험’은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수락할 수 없는 거다.
‘8개월의 기억을 모두 잊은 채로 제 가이드였다는 남자와 다시 한 번 페어가 되어야 한다고’?
대체 이런 헛소리가 어디 있나 싶을 뿐이다.
다른 가이드가 죽든 말든, 그건 그들의 사정일 뿐이다. 제가 기억 조작에 순순히 응하는 쇼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저보다 딱 8개월의 기억을 더 가지고 있던 제 자신은 그 정신 나간 제안을 꽤 진지하게 받아들였음이 분명했다.
절대로 함부로 손대지 않을 이 저택을 한 가이드에 대한 것들로 가득 채워 둔 것만큼 분명한 증거가 없다. 심지어는 고용인들에게 연락해서 ‘저택에 있는 것 중 그 무엇도 건드리지 마라’라는 지시까지 내렸을 정도이기까지 하니, 상태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8개월분의 기억을 더 가지고 있는 제 자신은 완전히 미쳤거나, 완전히 진심이었거나, 혹은 그 둘 다다.
솔직히 ‘페어 가이드’라는 것의 힘이 지관영 그가 이제껏 알아왔던 모든 가이딩보다 월등했던 건 사실이다. 건방지게 눈을 접어 웃던 가이드의 손이 닿았을 때, 저도 모르게 몇 초인가 숨 쉬는 것을 잊었을 정도로 눈앞의 모든 것들이 완벽하게 재정립됐었다.
하지만 지관영 그는 제가 이한솔의 접촉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에서 더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내 에스퍼’라니.
가이드라는 이유 하나로 마치 제 목줄을 쥔 주인인 양 구는 건 그에게 일종의 무례함이자 모욕으로 다가왔다. 그깟 것에게 고개를 숙이느니 차라리 그 어떤 피아식별도 없이 날뛰는 쪽이 훨씬 마음에 드는 마지막일 거였다.
지관영은 거실의 소파에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이고 앉아 집요할 만큼 꼼꼼하게 정돈된 자료들을 눈으로 훑었다. 어딜 가나 단 한 사람의 이름뿐이다.
최태훈, 최태훈 최태훈!
에스퍼는 그 이름을 잘 알고 있다. 그 세 글자는 꽤 오래전부터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대충 나뒹굴고 있었다. 제 등 뒤에 그렇게 무식할 정도로 커다랗게 자리하고 있는데,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지관영은 저와 8개월간 페어 가이드였던 주제에, 아무것도 아닌 양 점잔 빼고 앉아있던 단정한 얼굴을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연구원이나 직원 정도 되는 줄 알았건만 저 말간 얼굴을 한 남자가 제 가이드였던 거다.
결국 ‘지금의’ 지관영은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대체 미래이자 과거인 제가 대체 뭐 때문에 이런 정신 나간 짓을 벌였는지 확실히 아는 쪽이 더 개운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자 가장 먼저 황당하게 다가온 건 이거다. 지관영은 제 휴대폰 액정 위를 짜증 섞인 눈으로 흘끗 바라보았다. 작은 화면 위에는 누군가의 이름이 저장되어 있다.
[남친]
이런 돌아버린 단어를 입력한 게 제 스스로라고 생각하면 진짜 뒷골이 다 당겼다. 그 망할 ‘남친’과의 대화 내역도 제정신이 아니다. ‘최태훈, 어딨어?’, ‘최태훈, 식사는?’, ‘최태훈, 센터로 데리러 갈게’.
그랬다.
이 정황상 자신은 저 페어 가이드와 무언가……의 관계였다. 도저히, 정말 도저히 믿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
휴대폰에 입력된 사람의 숫자도 늘었다.
모조리 최씨 성을 달고 있는, 이 낯설지만 강제로 익숙해진 이름들은 제 가이드였다는 남자의 가족들이다. 지관영은 제 자신이 남긴 정보에서 이들에 관한 내용을 읽었다.
최태훈은 동생이 다섯 명 있다. 대학은 ○○대를 졸업했는데 성적도 꽤 나쁘지 않았다. 교우 관계도 좋았고, 과대표도 했었다. 가이드로 발현한 건 다섯 살 때부터인데 이제껏 계속 그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지 않다가…….
“……젠장.”
에스퍼는 스스로가 이 저택에 심은 거미줄 같은 정보를 하나씩 머릿속으로 따라가다가, 순간 제가 하고 있는 짓을 깨닫고 작게 욕을 삼켰다. 완전히 놀아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 자신이 한 짓이라고 해도 누군가가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가 용납이 안 되는 사내가 바로 지관영이었다.
괴물은 하루 동안 제 머리를 점령하다시피 한 정보들의 늪에서 겨우 빠져나와 촬영장에 도착했다. 저택이 아니라 촬영장이 더 마음 편한 순간이 오다니 정말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에스퍼 지관영은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가이드 최태훈을 발견했을 땐 순간 제가 잠깐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의심마저 했다. 잠을 설칠 정도로 난장판이 된 집에서 시달리다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고, 정말이지 진지하게 생각했었다.
“지관영 씨?”
“아닙니다. 뭐라고 하셨죠?”
하지만 저쪽에서 눈을 뒤룩뒤룩 굴리며 저를 몰래 훔쳐보고 있는 건 누가 봐도 ‘최태훈’이다. 에스퍼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제 주변을 보란 듯이 얼씬대는 저 바보가 정말 제 가이드였는지 의심됐다.
뇌가 있고 지능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저럴 수가 있나 싶다.
‘아니 왜, 센터에서는 잘만 모르는 척하더니?’
그래서 지관영은 이번엔 제가 최태훈을 무시했다.
그랬더니 저 바보 가이드는 정말로 제가 못 알아봤다고 확신했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반 발짝씩 제 곁으로 다가왔다. 지관영은 이미 뻔히 알고 있는 대본에 시선을 집중하며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눌렀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여기까지 온 건가 싶었다.
결국 최태훈은 얼마 안 가 한 스태프에게 걸렸다.
애초에 최태훈 그는 아무리 모자를 눌러쓰고 구석에 있다고 한들 장신의 키 때문에 눈에 안 띄기 힘든 사람이었다. 지관영은 후다닥 촬영장 한 쪽에 있는 행거 뒤로 숨는 최태훈을 보며 진심으로 저 가이드가 어디 모자란 게 아닌가 의심했다.
타조도 아니고, 머리만 숨으면 안 보인다고 생각하는 지적 수준이 의심될 뿐이었다. 하지만 지관영 그가 본격적으로 열 받은 건 그다음의 일이었다.
“헤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십니까. 일전에는 감사했습니다.”
‘일전에는’?
에스퍼의 눈썹 하나가 위로 휘었다.
그는 제가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는 최태훈과 한 여자 스태프의 목소리를 그 숨소리까지 놓치지 않은 채 모두 듣고 있다. 정확히는 ‘엿듣고 있지만’, 지관영은 제 행동에 그런 단어를 붙일 만한 사람이 아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세요? 저어기, 지관영 씨 때문에?”
“……아, 아뇨. 아닙니다.”
한껏 속삭이는 목소리이기는 하지만, 그 정도를 놓치면 측정 불가 에스퍼의 이름에 오명이 될 일이다. 지관영은 저도 몰래 작게 헛웃음 쳤다.
지금 저 가이드는 행거 뒤에서 그 자신의 어깨에 겨우 올까 말까 한 자그마한 키의 스태프와 함께 정답게 소곤대는 중이다. 600명이 넘는 가이드의 목숨이 걸렸네, 어쩌네 하면서 짜증 나게 굴더니 드라마 촬영장 구석에서 노닥거리려 온 거라면 정말로 대단한 일이다.
지관영은 이미 읽지도 않는 대본을 노려보며 최태훈의 허스키한 목소리에 청력을 집중했다.
두근, 두근, 두근. 가이드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정말이지 가관도 아니다. 저는 지금 엊그제부터 저택 안을 가득 채운 온갖 정보들에 시달리다 왔는데 제 눈앞에서 어색하게 히죽이고 있는 가이드의 웃음소리가 굉장히 거슬렸다.
에스퍼의 입에서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관영은 제 휴대폰 속에 입력된 ‘남친’의 이름을 꾹 눌렀다.
그로부터 딱 5초 뒤, 에스퍼 그가 귀를 기울이고 있던 행거 뒤에서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헉.”
역시 이 ‘남친 최태훈’은 저 정신 나간 가이드 최태훈이 맞다.
지관영은 앉아있던 제 의자에서 느긋하게 일어섰다. 신나게 진동하는 휴대폰을 꼭 쥔 ‘남친’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표정을 한 채로 저를 보고 있었다. 놀라 벌어진 입마저 한심하게 보였다.
게다가 지관영 그를 더욱 짜증 나게 했던 건, 그와 가이드의 시선이 딱 마주치자마자 흐뭇하기 짝이 없는 눈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한 주변의 사람들이다.
지관영은 그 어떤 사람이라도 녹일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태훈 씨.”
“컥, 아니, 후우, 예에에?”
“따라오세요.”
주변의 스태프와 배우들은 연인의 대화에 눈을 휘며 이 한창때인 두 남자의 연애를 응원하겠다는 표정을 걸었다. 하지만 세상에서 ‘지관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그의 유일한 연인 최태훈의 생각은 그런 달짝지근한 생각과는 좀 다르다. 아니, 그는 확신마저 할 수 있다.
지금 에스퍼는 꼭 제 목을 비틀고 싶다는 눈으로 웃고 있다. 저건 절대로, 절대로, 정말 절대로 기분 좋은 웃음이 아니다. 하지만 저 사내의 말을 거절할 방법도 이유도 없다.
가이드는 눈을 크게 끔벅이면서 성큼성큼 앞서 걷는 지관영의 뒤를 주춤주춤 따라가다가, 한 박자 늦게 제가 들은 것을 상기하며 생각했다.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 * *
최태훈의 막냇동생 최정민은 그 얌전한 인상과는 다르게 범죄 수사물을 좋아한다. 아무래도 나이 터울이 한참 나는 형제인 터라, 맏이인 태훈은 그런 제 어린 동생을 꽤 귀여워하며 같이 드라마도 몇 편 봤다.
그런 영상물에서 대개 미제로 남는 사건들은 CCTV도, 목격자도 없어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는 했다. 덕분에 이 순간 가이드는 생각했다. ‘다행이야. 목격자가 많잖아.’
“…….”
“…….”
자신을 촬영장 한편으로 데리고 온 지관영은 뭐라 말이 없다. 태훈은 살벌한 눈으로 저를 빤히 응시하는 에스퍼의 시선을 피해 죄지은 사람처럼 땅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 지금 서 있는 곳이 저번에 제 에스퍼와 몰래 입 맞추며 웃었던 장소임을 깨달았다.
장소도 같고 함께 온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그때와 분위기는 정반대인, 우스운 상황이었다.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나올 뻔한 한숨을 겨우 삼켰다.
그때, 지관영의 입이 열렸다.
“센터 소속 가이드 최태훈 씨.”
“예, 예에!”
“여기 온 이유를 내가 먼저 물어야 합니까? 염탐이라고 치기에는 너무 허술하던데요.”
저 나직한 목소리도, 얼굴도 같은데.
이전과는 판이한 말에 태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제껏 최태훈은 단 한 번도 지관영의 빈정거리는 문장의 대상이 된 적 없었다.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던 에스퍼는 제 페어에게만은 한 수 접으며 서슴없이 자신의 의견을 꺾었다.
물론 지금은 완전히 지워진 과거의 이야기지만.
“죄송합니다. 불쾌하게 해 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가 갈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소란스럽게 해 드린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최태훈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것에 지관영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지금 가이드는 의도치 않게 이 까다로운 에스퍼의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사실 지관영은 기억을 잃기 전에도 최태훈의 저런 깍듯한 태도를 참 좋아했었다. 그랬기에 제 목줄을 더욱 순순히 쥐여 줄 수 있었다.
최태훈은 지관영의 생살여탈권을 쥐고도 오만 떨거나 그의 머리 위에 앉으려 들지 않았다. 연인이 된 이후로는 좀 다른 의미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빤히 들여다보며 살살 굴렸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평소 태도만 보면 지관영은 제 연인에게 흠잡을 데 없는 대우를 받았었다.
“왜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있다 갈 생각이었습니까?”
느긋하지만 뼈 있는 문장에 가이드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에스퍼는 그것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내게 접근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내 ‘페어 가이드’였던 최태훈 씨.”
“……그걸, 어떻게…….”
“인터넷에 본인 이름 안 쳐봤습니까?”
“아아……. 맞다.”
바보다. 확실히 바보다.
지관영은 멍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말끔한 인상의 사내를 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저는 가이드가 저렇게 덜떨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정확히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어제오늘 손끝에 박힌 가시인 양 굉장히 껄끄럽고 불편했던 팩트 체크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태훈 씨.”
“예.”
“최태훈 씨와 전 무슨 사이였습니까?”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이드의 입이 꾹 닫혔다.
에스퍼는 저 침묵이 엄청나게 신경 쓰였다. 하지만 지금 가이드 쪽은 그 질문에 몇십 배는 더 심란해진 상태다. 지금 지관영은 제가 했던 질문을 똑같이 했다. 기억을 완전히 잃고도 이럴 수 있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최태훈은 저를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는 지관영의 시선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게…… 음, 별로 믿어지진 않으시겠지만.”
“말씀하세요.”
“교제 중이었습니다.”
“누가 누구랑 말입니까.”
지관영은 기억을 잃어도 문장 요소를 정확히 채운 대답을 원한다. 이 순간에도 그게 신기한 태훈이었다.
“그……. 지관영 씨랑, 제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근사한 남자로 꼽자면 한 손가락 안에 들어올 사내는 하늘이 무너져도 그 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됐다.
그는 제 휴대폰에 최태훈이 ‘남친’ 따위로 저장되어 있고, 인터넷에 자신과 저 사내의 기사가 마치 퍽 흥미로운 주간 뉴스 소재로 난무하고 있다 한들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체 페어 가이드가 뭐라고 저택 전체를 ‘최태훈’에 대한 정보로 가득 채우고 그 난리를 치고 다녔는지 이해가 안 갔다. 뭐, 경리단길 데이트?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다.
지관영은 제 오랜 고민 끝에 나온 답을 입 밖으로 내었다.
“가이드랍시고 협박이라도 했습니까?”
“아닌데요. 지관영 씨가 먼저 사귀자고 했습니다!”
최태훈은 정말로 억울해 보였다.
크게 목소리도 안 내고 조용히 말하던 남자가 미간까지 찌푸리고 소리 높여 하는 말에서는 거짓이 엿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눈에 빤히 보이는 헛소리였으면 좋았을 거다. 지관영은 그런 가이드를 잠시간 말없이 보다가, 각오가 되었다는 듯 물었다.
“내가 정확히 뭐라고 했습니까.”
“…….”
“뭐라고 했냔 말입니다.”
시선만 빙빙 돌리며 말을 피하는 얼굴에서 느껴지는 망설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히, 분명히 답지도 않은 헛소리일 거다. 그래서 대답 못 하는 걸 거다.
지관영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썹 하나를 치켜떴다. 최태훈은 그 표정에 결국 절대 열고 싶지 않던 입을 뗐다. 그건 기어들어갈 듯 작은 목소리였지만 에스퍼인 관영에게는 충분히 큰 성량이었다.
“……‘나랑 하자고, 그 망할 연애’.”
왠지 모르게 저 빌어먹을 문장이 제 입에서 나왔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는 건 정말 끔찍한 기분이었다. 에스퍼의 입에서 짜증 어린 헛웃음이 터졌다.
거기에는 긴 한숨도 섞여 있다. 기억에 없는 8개월간 할 수 있는 머저리 같은 짓이란 짓은 다 하고 다닌 게 분명한 스스로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그런 연인의 반응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눈치를 살살 보며 한 걸음 물러서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저는 회복 능력이 없습니다.”
“네?”
“때리면 죽습니다, 전.”
진짜 죽일까. 죽이는 게 마음 편하지 않을까.
따지고 보면 지금 저게 다 그 중심에 있는 거 아닌가. 지관영은 ‘정말 한 방에 갑니다.’라고 엄숙하게 덧붙이는 최태훈을 보며 생각했다.
* * *
선생은 온종일 센터의 지하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곳은 사방이 CCTV로 가득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감시의 눈을 벗어난 곳이다. 십 년 전 선생이 행방불명되면서 폐쇄되었던 그 음습한 공간은 센터의 도면에도 나와 있지 않고, 이한솔과 같은 수많은 ‘가이드 실험체’들을 만들었던 비인간적인 흔적도 남아 있지 않지만 센터장 권다희 그녀는 여전히 그 어두운 그림자를 떨치지 못한 채다.
그건 선생이 모습을 드러내고부터 더 심해졌다.
“……좀 쉬신 후에 오십시오. 한숨도 안 주무셨지 않습니까.”
오연은 권다희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온갖 해묵은 서류에 갇혀 있던 그녀는 몇 초간 그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멈췄다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건 단 하나뿐이다.
‘D-23’.
벌써 그 한 달의 실험에서 거의 일주일이 갔다. 센터장은 창백한 안색으로 입꼬리만 들어 올렸다.
“고마워요. 선생의 행동반경 분석 결과는 나왔나요?”
“예. 하지만 별다른 특이점이 없습니다. 근 3년간 선생이 시스템에 입력했던 모든 상담일지 역시 더블체크했습니다만, 미심쩍은 단어 하나 보이질 않습니다.”
센터장은 오연이 전산을 통해 넘긴 파일들을 빠르게 확인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행방불명되었던 사람이 3년 전부터 센터로 들어와서 가이드에게 암시를 심기 시작했다면, 분명히 그 이유가 있을 텐데…….”
3년 전.
에스퍼 연구원들은 선생이 등장한 그 시기에 집중했다. 지금 갑작스럽게 시작된 지관영-최태훈 페어의 ‘실험’은 원래 그의 계획에 없던 것일 터다.
아무리 선생이라고 한들 한창 주가를 올리기 시작하던 톱스타와 단 한 명의 에스퍼조차 매칭되지 않던 이름 모를 가이드를 엮어 생각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가 센터에 비밀스럽게 들어온 목적은 따로 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와서 자신이 만난 모든 가이드에게 잔혹한 암시를 심은 건 목적에 따라오는 이유였음이 분명하다.
“3년 전을 전후로, 길게는 5년 전까지 잡아서 국내외에 있었던 모든 에스퍼 관련 이슈를 확인했습니다. 급진적 종교단체까지도요. 그렇지만 600여 명이 넘는 가이드를 학살하고 뒤이어 폭주할 에스퍼가 일으킬 테러를 바탕으로 둘 건 없습니다.”
“지금이야 600여 명이지, 그 페어로 흥미가 옮겨가지 않았다면 정체를 감춘 채 계속 카운슬링을 진행했겠죠.”
“예. 그래서…….”
오연은 커다란 모니터에 선생의 실종 전후 사진과 이력을 띄웠다. 센터장은 갑작스레 떠오른 선생의 진짜 얼굴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조금은 볼이 푹 꺼지고 눈이 가늘게 찢어진 인상은 왠지 모르게 냉혈동물의 인상을 준다. 그건 20년 전부터 행방불명되기 전까지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잔혹한 일들을 행하던 악몽 속 그림자였다.
선생. 선생이 관련된 일이기만 하면 자꾸 움츠러들고 위축되는 그녀다. 마치 20년 전 신입 연구원이었던 그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권다희는 제 자신의 이성이 이렇게 공포에 억눌릴 때마다 최태훈의 생각을 했다. 제대로 된 힘 한 줌 없는 그 가이드가 눈에 보일 정도로 벌벌 떨면서도 끝까지 말을 이어나갔던 그때를.
지금 제 곁에는 최소한의 수면과 휴식만을 취해가며 선생의 비밀에 매달리고 있는 수많은 에스퍼가 있다.
그들 모두가 선생에게 인질 잡힌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상황에 불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가이드의 죽음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이상, 더욱 절박해질 뿐이다. 권다희는 주먹을 꽉 쥐었다.
20년간 계속된 악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선생’ 개인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지 않는 한, 지금의 사건 역시 풀기 어렵다는 것이 저희 관측입니다.”
“선생은 센터에 처음 왔을 때도 그저 ‘선생’이었습니다. 개인 정보는 무엇도 밝히지 않은 채, 곧바로 연구실에 처박혔다고 해요.”
과거의 기억을 더듬듯 말을 잇던 센터장의 말이 뚝 끊겼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뜬 채 오연이 띄운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오연은 조금 의아한 표정이 됐다. 하지만 센터장의 알 수 없는 행동은 그 후로도 쭉 이어졌다.
“……저 얼굴과 목소리는 누구 것일까요?”
“예?”
“저건 누구죠?”
권다희의 손이 ‘지금’의 선생에게로 닿았다. 과거와는 달리 따뜻한 표정과 부드러운 인상을 한 중년의 남성의 얼굴이다. 오연은 그녀의 질문에 침착하게 대답했다.
“센터로 들어왔을 때의 신원이 있습니다. 사실 그것도 조작한 게 아닌가 했는데, 실존하던 사람이고요. 굉장히 오래전부터 군부대 위주로 가이드 상담을 해 오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변인들에게는 3년 전부터 행방불명된 상황인 걸로 보입니다.”
“프로필 띄우세요.”
선생이 얼굴을 훔친 이는 오연의 말대로 정말 평범한 삶을 살아온 중년의 남성이었다. 권다희는 화면 위에 떠오른 사내의 이력을 쭉 훑으며 물었다.
“이 사람도 가이드인가요?”
“예. 페어 에스퍼는 없었습니다. 몇 차례 정도 있기는 했지만 전부 매칭이 종료된 상황이었습니다. 상대 에스퍼가 더 높은 매칭률의 가이드를 찾았거나, 사고를 당한 것이 그 이유입니다.”
센터장은 무엇을 생각하듯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가, 몇 번 손바닥을 부딪치며 중앙 연구실 전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다들 지금 하는 일 잠시 중단하고 이 사람에 대한 모든 것들을 수집하세요. 특히 선생이 처음 센터에 모습을 드러냈던 때부터 행방불명되기 직전의 시기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세하게요.”
오연은 모니터 위에 있는 온화한 얼굴을 다시 한 번 뜯어 살폈다. 저건 지금 이 모든 이들에게 끔찍한 시간을 선사한 이의 얼굴이면서, 선생이 훔친 얼굴이기도 했다.
한편, 센터장의 말에 연구실 한편에 있던 에스퍼 하나가 슬쩍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저, 센터장 님. 지금 ‘선생’ 같은 경우는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라 정보를 받는 게 어렵지 않습니다만, 저 사람의 경우는 완전히 민간인입니다.”
“…….”
“군부대 쪽에 자주 나갔던 사람이라 그쪽도 몰래 접근해야 하고…….”
지관영 그는 기억을 잃기 전에 이 많은 연구원이 선생 하나를 못 이겨 쩔쩔매면서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것을 조소했었다. 하지만 그 신랄한 표현과는 별개로, 선생을 떼어놓고 보면 이들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이는 정말로 없다.
설령 그게 독자적으로 에스퍼를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해도, 능력 발현의 끝을 달리고 있는 연구원들의 우위에 서는 건 불가능하다.
제 자리에 돌아가 앉은 오연은 느긋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센터장의 얼굴에도 조금은 오만한 미소가 걸렸다. 오연의 조금은 낮게 쉰 듯한 거친 목소리가 센터장의 대답을 대신했다.
“안 걸리면 그만이잖습니까.”
끔찍할 정도의 무력감과 굴욕은 선생에게 당한 것으로만 쳐도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연구원들은 일제히 다중 화면을 띄우고 빠른 속도로 자신들의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중앙 연구실 한쪽에서 낮은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건 지금처럼 바쁜 상황에서도 손가락을 움직이던 연구원들의 행동을 멎게 하기 충분한 위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 알림은 심지어는 다시금 선생의 흔적에 머리를 파묻고 있던 센터장 그녀의 시선까지 사로잡았다. 센터장은 작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 작은 알림 소리는 분명히…….
센터장은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오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 연구원.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서 오진우 씨를 최태훈 씨의 관사 근처에 대기시키세요.”
“예.”
지관영이, 최태훈의 관사로 찾아왔다.
* * *
지관영은 모르는 번호로 오는 전화는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날은 이상하게도 이른 오전부터 낯선 번호가 휴대폰 위로 떠올랐다. 지관영은 그것을 흘끗 보더니 곧바로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 전화는 꽤 집요했다.
드라마 촬영 중간의 쉬는 시간, 처음 보는 몇 자리의 번호는 다시 한 번 그를 거슬리게 했다. 두 번은 없다. 지관영은 그 번호를 차단 목록에 올렸다. 정 급한 일이라면 소속사나 매니저를 통해 연락이 올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받을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고됐던 드라마 촬영은 오늘로 끝이 난다.
정말이지 스태프들은 물론이고 방송 관계자까지 마음을 졸였던 몇 달간의 일정이었다. 물론 그 이유는 다 한 사람 때문이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어유, 관영 씨만 하겠어요.”
“하하.”
느긋하게 눈을 접으며 웃는 표정은 드라마 속의 표정보다 더욱 근사하게 보였다. 요 일주일간, 지관영 그는 센터의 호출도 그 자신의 개인 스케줄도 없이 드라마 촬영에만 집중했다.
또 분량 부족으로 특별 영상을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하던 이들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종방연은 내일모레고요. 오늘은 일정 되는 분들끼리 회포 풀까 하는데. 관영 씨는 시간 되시나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좀 힘들겠네요.”
지관영다운 부드러운 거절이었다.
촬영 일정을 엉망으로 만들어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한 저 사내를 탓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된 것도, 바로 저 특유의 목소리와 태도 때문이었다. 갑자기 에스퍼로 발현한 건 정말 힘들 일이겠지만, 급박한 현장에서 그런 개인 사정까지 하나하나 배려하기는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었다. ‘주연배우가 너무 하는 거 아냐?’ 그러나 그런 불만 어린 말들은 지관영이 다시 촬영장에 복귀할 때마다 말끔하게 사라졌다. 저 그린 듯한 눈썹을 휘고 나직하게 사과하는 얼굴에 도리가 없던 거였다.
하지만 그렇게 만인이 사랑하는 얼굴을 건 사내는, 발걸음을 돌려 밴으로 들어가 앉음과 동시에 그 위에 떠올랐던 웃음기를 싹 지웠다. 매니저는 제가 담당한 배우의 저 변화를 수도 없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끔은 마음 한구석이 차가워졌다.
“바로 자택으로 갈까요?”
조심스럽게 묻는 매니저의 말에 조금은 나른하게 창밖을 보고 있던 지관영이 시선을 흘끗 돌렸다. 지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있을 땐 정말이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또 어떤 기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에스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뇨. 오늘은 센터의 가이드 관사로 갑니다. 길은 아십니까?”
“예, 예에. 그럼요.”
백미러에 비친 매니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근 일주일간 지관영 그는 이전까지는 틈만 나면 매일 같이 출근도장을 찍던 가이드 관사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었다. 어떨 때는 한 주에 성북동 자택보다 가이드 관사로 데리러 가는 날이 더 많던 제 배우가 갑자기 그곳에 발길을 뚝 끊은 게 내심 걱정됐던 매니저는 허둥지둥 차에 시동을 걸었다.
저번에 보니 그 둘은 조금 싸운 듯도 싶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는 게 아쉽다는 듯이 촬영 현장에서 틈만 나면 휴대폰을 붙잡고 있던 행동이 싹 사라진 것도 아마 그 이유일 거다.
매니저는 그때야 뒤늦은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리 좀 다퉜다지만, 그렇게 싸고돌더니 너무 단칼에 잘라내는 거 아닌가.’
사실 매니저는 최태훈이 퍽 마음에 들었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지관영의 페어라는 그 남자는 매니저인 저에게도 놀랄 만큼 공손한 말투를 썼다. 그건 최태훈과 페어가 되기 전에 종종 지관영과 함께 있는 것을 마주쳤던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오늘은 좀 화해하면 좋을 텐데. 과묵한 매니저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관영과 최태훈은 지금 화해할 일조차 남아있지 않은 상태다.
주어진 한 달간의 실험에서 오늘로 딱 일주일이 됐다.
지관영은 제 드라마 촬영 현장으로 찾아온 최태훈에게 냉정할 만큼 딱 부러지게 거리를 두며 말했다.
‘드라마 끝내고 내가 직접 찾아갈 테니까, 그전까지는 귀찮게 하지 마세요. 나도 궁금한 게 더 있으니 그때 봅시다.’
최태훈은, 그 말에 뭐라고 더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지관영은 그걸 말끔히 무시했다. 한 달간의 시간제한 같은 건 제 알 바 아니었다.
센터를 오간다며 한껏 귀찮게 만들어 둔 일 때문에 촬영도 제법 밀렸고, 여기저기서 불만 어린 말들이 많았다. 지관영의 우선순위는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600여 명의 목숨보다 더 중요했다. 지금 당장 가이드가 필요한 상태도 아닌데 그깟 것에 순순히 따라 주는 것도 싫었다.
그렇게 며칠이 더 흘러, 마침내 그날이 왔다.
지관영은 삼엄한 바리케이드 앞에서 내리며 살짝 눈썹을 치켜떴다. 가이드 관사라고 해서 평범한 아파트 같은 곳을 상상했건만 이건 무슨 요새 수준의 크기였다.
그는 제 매니저에게 두 시간쯤 뒤에 오라고 말한 뒤 밴의 문을 닫았다. 가이드 관사는 들어가는 과정도 복잡했다. 갑자기 흰 가운을 걸친 연구원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오더니 들어가는 방법을 하나하나 짚어 주는데, 원래 늘 이런가 싶을 정도였다.
지문에 홍채 인식까지.
대체 가이드가 뭐라고 이렇게 귀찮은 짓을 하나 싶었지만 지관영은 그런 불만을 입 밖으로 표현하는 대신 눈썹 하나를 살짝 치켜뜨는 걸로 그쳤다.
‘가이드 관사’.
사실 이곳은 지관영 그도 꽤 많은 호기심이 일었던 장소였다.
제 자신이 만들어 둔 그 거미줄 같은 기억 속에서 이곳은 참 여러 번 등장했다. 지관영은 몇 층으로 움직이는지 그 작은 표시조차 되지 않는 엘리베이터를 한참 탄 뒤에야 자료로만 보던 관사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최태훈은 제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는지 현관 근처에 어설프게 서 있었다. 살짝 물기가 남아 있는 머리카락이며 옅은 열기가 짚어지는 얼굴을 보자니, 아무래도 그가 씻고 있을 때 제가 찾아온 듯도 싶었다.
가이드는 말없이 저를 빤히 보고 있는 에스퍼를 향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
“어, 음. 커피라도 드릴까요? 식사를 안 하셨으면 뭐 요기할 거라도……. 아니, 뭐 필요하신 건.”
“커피면 될 것 같습니다.”
최태훈의 심장이 빠르게 뛴다.
청력을 고스란히 열고 있으려니 오히려 다른 소리가 묻힐 정도로 요란하게 뛰는 그 박동에, 지관영은 의도치 않게 제 능력을 막았다. 그러고 보니 저 무던한 얼굴을 한 가이드는 저와 연인 관계였다는 사내였다.
지관영은 허겁지겁 커피포트에 물을 붓는 최태훈의 뒷모습을 슬쩍 훑었다. 그제야 붉어진 귀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느슨하게 걸친 루즈한 핏의 옷 너머로 등과 딱 벌어진 어깨의 근육의 흐름이 짚어졌다.
최태훈은 일주일 새 살짝 마른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은 그 촘촘하게 만든 8개월간의 기억에 의도적인 빈 조각을 만들었다. 그것이 일부러 만든 공백임을 눈치챌 수 있었던 건 그 모든 것들을 만든 게 스스로였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정보들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직접 확인하라는 거다. 기억을 잃은 그 자신이 한 짓이지만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가이드는 에스퍼의 앞에 조심스럽게 머그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커피 향이 꽤 좋았다. 관영은 그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제 가이드였던 사내의 취향이 제법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최태훈 씨.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예.”
“당신과 나는 ○○문고 사인회에서 처음 만난 후에 강남 테러 현장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맞습니까?”
긴장으로 굳었던 가이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난 당신에게 설명하러 온 게 아닙니다. 할 말 없으면 전 이만 가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맞습니다. 사인회에서 처음, 강남에서가 두 번쨉니다.”
이제 이 대화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지관영이다.
에스퍼는 긴장한 얼굴로도 순순히 대답하는 최태훈을 향해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태훈은 제가 너무 좋아하는 그 옅은 눈웃음에 왠지 심장 한쪽이 따끔거렸다.
눈앞의 근사한 남자와 함께했던 이 공간도, 저 웃음도 무엇 하나 변한 게 없는데 눈앞의 남자가 제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곳에서 당신과 나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폭주한 에스퍼의 테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 있었고…… 지관영 씨가 절 구했습니다.”
“내가 구했다?”
“예. 지관영 씨는 저를 사인회에서 처음 만난 후에, 저에 대해 알아보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강남 테러 현장 때도 찾아올 수 있었고요.”
이제는 ‘과거가 된 지관영’이 제 가이드에게 남기고 간 기억 조각이었다. 최태훈은 다행스럽게도 그 비어있는 홈에 제가 쥔 퍼즐을 잘 맞춰 넣었다. 에스퍼는 머릿속으로 그 상황을 어렵잖게 그리며 눈썹 하나를 휘었다. 저는 최태훈을 구하기 위해 힘을 쓰고, 그때부터 에스퍼라는 게 알려졌던 거다.
지관영의 질문은 느긋하게 이어졌다.
“‘151.2’, 이 숫자는 뭡니까?”
가이드는 그제야 ‘아, 지관영 씨가 무슨 일기라도 썼었나.’ 하는 완전히 틀린 건 아닌 짐작을 했다. 에스퍼가 말한 숫자는 지관영 그와의 첫 매칭 테스트에서 나온 최고치다.
최태훈은 몇 초간 말을 고르더니 느리게 입을 뗐다.
“지관영 씨와 저의 매칭률입니다. 가장 첫 번째 매칭 테스트 때 나왔던 결과입니다.”
“……페어 매칭률은 60에서 80퍼센트가 일반적일 텐데?”
“예. 나중에 측정한 최대치는 180대까지 올랐습니다.”
“정말 난리도 아니군.”
오연은 지관영 그에게 정확한 수치를 말해주지 않았었다.
그저 ‘센터 사상 최고의 매칭률’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묘사했을 뿐이다. 지관영 그는 제대로 된 매칭 테스트를 받아 본 기억은 없다지만, 일반적인 매칭 수치 정도는 알고 있다.
일반적인 케이스의 두 배라! 이 정도쯤 되니까 그 건방진 가이드가 제게 접촉했을 때 그런 감각이었나 싶을 정도다.
‘사상 최고의 매칭률’.
지관영은 그 단어를 곰곰이 되짚었다. 그가 에스퍼인 이상, 그 높은 매칭률을 두고 떠올릴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다. 지관영은 머잖아 제 생각을 곧바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문장은 그렇지 않아도 긴장하고 있던 최태훈을 완전히 얼어붙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최태훈 씨는 나와 섹스 한 적 있습니까?”
최태훈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눈만 끔벅였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턱을 괸 채로 지관영의 눈은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가이드는 그 시선에 왠지 등줄기로 쫙 소름이 돋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관영은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안 가 그 사실을 떠올린 태훈은, 뻣뻣하게 굳은 혀를 움직여 대답했다.
“예.”
“그래. 엄청난 매칭률의 페어이니.”
느슨한 웃음을 걸고 있는 눈빛이지만, 그 안에 달짝지근한 온기 같은 건 없었다. 태훈은 제 연인의 저런 표정을 볼 때마다 목구멍까지 긴장으로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사실 가이드의 그런 짐작은 과연 그 본래 페어답게 꽤 예리한 것이었다.
지금 지관영은 확실히 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귀찮게 일을 벌인 이 과거의 ‘제 자신’이, 절대 예상하지 못했을 행동을 떠올렸다. 이건 저택 안을 모두 저 사내로 가득 채우고 그 기억들의 끝에 아주 건방진 글을 남겨 둔 스스로에 대한 조롱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지금은 어떻습니까.”
“…….”
“나랑 같이 뒹굴 수 있겠습니까?”
창백한 얼굴이 된 가이드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에스퍼는 그런 표정 하나하나를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모두 새기듯 바라보았다. 저와 8개월간 페어였고, 또 연인이었다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예.”
어떻게 보면 참 의외의 대답이었다.
왠지 최태훈은 그 딱 부러지는 말투와 말끔한 생김새처럼 이런 말은 냉정하게 내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관영은 수치심을 안겨주되 그 예의 바른 껍질을 내버리지 않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기 시작했다.
“안 그럴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의외의 반응을 다 하네. 왜요. 그쪽이랑 나, 속궁합이라도 잘 맞았습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라.”
“아니라?”
힘겹게 대답하는 것 같은 목소리는 잘 나오지 않는 것을 일부러 쥐어짜듯 그 끝으로 향할수록 희미해졌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지관영은 그런 것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에스퍼기 때문이다.
사실 지관영은 잃어버린 8개월간의 제가 저 남자에게 꽤 미쳐 있었음을 잘 안다. 그건 스스로가 저택을 가득 채운 기억들만 좇아도 알 수 있었다. 시작부터 꽤 급하게 보였던 글씨는 그 뒤로 갈수록 시간이 모자랐는지 조금은 휘갈긴 채 쓰였다.
하지만 정말 우스운 건, 그런 와중에도 최태훈을 의심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애쓴 흔적들이었다. 스스로가 저 남자에게 빠져있던 시간을 증명하려는 듯, 그 감정의 증거들을 빠짐없이 엮어둔 것을 보는 건 참 기가 차는 경험이었다.
지관영은 기억의 후반부에서 저 가이드와 함께 있는 사진을 보았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눌러 쓰고 있던 자신은, 어느 순간 그걸 아예 포기한 듯 맨얼굴을 한 채로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참 바보 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저는 그런 꼴을 하고도 옅게 웃고 있다. 최태훈의 손을 힘주어 깍지 낀 채 잡고, 거리를 살펴보는 모습은 그 사진 속 등장인물이 제 자신이 아니라면 너무 평범한 연인의 일상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자그마한 종이 위에 남겨진 행복에 젖은 사내가 낯설었다.
분명 자신의 사진인데도 그 안의 행복을 공유할 수 없음은 꽤 기묘한 기분이었다. 사진 속 남자는 단지 8개월, 정말 그 몇 달의 시간을 더 가졌을 뿐인데 지금의 저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최태훈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제가…….”
“…….”
“제가, 지관영 씨를 많이 좋아합니다.”
굳은 어깨와 피부가 얇은 눈꺼풀이 긴장으로 파들거렸다. 지관영은 희미하게 떨면서도 저를 똑바로 담는 흑갈색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정말, 아주 많이. 정말 많이 좋아해서, 그러니까…….”
잠시 입을 달싹이자 그 안의 선홍색 혀가 보였고, 그다음으로는 가지런한 하얀 이가 눈에 들어왔다. 꿋꿋하게 말을 잇는 사내의 눈이 아주 잠깐은 묽게 변했던 것도 같다.
톡 튀어나온 목울대가 작게 움직였다.
“사랑해서.”
최태훈이 사랑을 고백한 ‘지관영’은 지금의 제가 아니다.
이미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과거의 그림자에 대고 외치는 고백일 뿐이다. 괴물은 제 앞에 앉은 사내의 그 착각이 우스웠다. 조금은 짜증도 났다. 에스퍼의 입에서 작게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에 작게 움츠러든 태훈은 속삭이듯 문장을 끝맺었다.
“……그래서 할 수 있습니다.”
지관영은 사랑을 말하면서도 당장 제 눈조차 마주 보지 못하는 최태훈을 슥 훑었다. 차라리 방금처럼, 벌벌 떨면서라도 저 고개를 들었다면 좀 더 기분이 나아졌을까. 그는 짐짓 느긋한 척 소파에 등을 기대 보았다. 하지만 분명 편안하기 짝이 없을 푹신한 쿠션은 불편해진 지 오래였다.
“옷이라도 벗어 보세요, 그럼.”
놀라 멍하게 커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가이드가 보였다. 에스퍼는 왠지 속이 답답해졌다.
“그 대단한 사랑으로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니까.”
지관영은 최태훈이 못 할 거라고 생각했다.
저를 보자마자 마구 뛰는 심장을 감추지 못하고 귀를 붉히던 저 반듯한 얼굴을 한 사내는, 이 짓궂은 말에 질색하며 화를 내고 말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최태훈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주먹을 꽉 쥐더니, 작은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그가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의 끝단을 잡아 한 번에 들어 올렸다.
긴장으로 숨을 들이켜자 꽤 모양 좋게 새겨진 근육이 쑥 꺼지며 흉곽의 큰 모양이 잡혔다. 옷 위로 대충 그렸을 때보다 훨씬 보기 좋은 완연한 남자의 몸이었다.
가이드는 제가 벗은 티셔츠를 소파 옆자리에 두더니 다시 한 번 심호흡했다. 분명히 청력을 줄였는데도, 더욱 커진 심장박동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됐습니까?”
낮고 단정한 목소리에 그 시끄러운 박동만큼의 떨림이 섞여 나왔다. 이런 일 같은 건 절대 못 할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내가 잔뜩 떨면서도 제 말을 따르는 모습이 거슬렸다.
며칠 전, 지관영은 제 휴대폰에서 이전에는 없던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에스퍼인 그는 이제껏 사진을 찍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었다. 언제나 완벽에 가까운 두뇌의 어딘가에 남겨 두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 자신은 8개월을 잃기 전 마지막 날에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이번에는 기억하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진은 이곳, 관사에서 찍은 거다.
지관영은 관사에 발 디딘 순간, 창문 너머 베란다의 모습이 그 사진 속의 배경임을 깨달았다. 조금은 어둡게 찍힌 사진 속의 최태훈은 옅게 웃고 있었다.
지금처럼 얼어붙은 채 떠는 얼굴 따위가 아니었다.
8개월 전의 자신과 눈앞의 최태훈 사이에 지금의 자신이 서 있을 자리는 없다. 괴물은 제가 깨달은 사실을 곱씹으며, 정말로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에게 스스로 묻고 싶어졌다.
대체 저 남자와의 시간을 남긴 이유가 대체 뭐냐고. 겨우 8개월의 시간을 더 가졌을 뿐인데 너무나 다른 눈을 하는 그 자신을 부러워하기라도 하라는 거냐고, 정말이지 기억을 잃기 전의 저를 붙잡아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다.
에스퍼는 제 앞에서 옅게 떨고 있는 남자를 집요할 정도의 눈으로 뜯어 살폈다. 숨을 들이켜고 내쉴 때마다 움직이는 근육 하나하나가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남자의 시선이 희롱하듯 몸을 훑자 최태훈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연인의 침묵이 의미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다. 가이드는 다시 한 번 크게 숨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는 눈에 띄게 부들거리는 손이 바지의 훅을 잡았다.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툭, 바지가 떨어지자 딱 붙는 드로어즈와 함께 유독 잘 뻗은 긴 다리의 선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에스퍼는 그걸 보며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기꺼이 벗고 뒹굴고 싶어서 벗는 건지, 아니면 그 대단한 사랑 때문인지 그 선후 관계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 재미는 있네요.”
지금, 지관영은 제 자신이 남긴 기억이 아닌 그 자신의 판단으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상처받지 않은 척하려는 최태훈은 저런 표정을 한다’.
가이드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몇 번이고 빠르게 깜박이며 평정을 가장하고 있다. 확실히 지금 자신은 저 가이드에게 상처를 주고 있다.
아니, 사실 지관영 그는 확신이 안 섰다.
지금 제가 뾰족하게 가시 돋친 단어를 입에 담는 대상이 눈앞의 남자인지, 아니면 저 남자와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인지 잘 모르겠다.
“뭐 하십니까. 날 사랑하신 나머지 기꺼이 뒹굴 수도 있다며?”
가이드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렀다.
지관영은 최태훈의 눈에 그 어떤 굴욕감도 비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누구보다 뻣뻣할 것 같은 얼굴을 한 사내는, 그저 조금…… 슬퍼 보일 뿐이다. 그게 다다. 결 좋은 피부가 숨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반복했다. 최태훈은 고개를 들어 제 에스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천천히 제 남은 속옷을 밀어 내렸다.
누군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서 있는 것을 감상하듯 보는 건 지관영 그에게도 몹시 낯선 경험이었다. 지관영의 시선이 태훈의 얼굴부터 쇄골, 가슴, 보기 좋을 정도의 근육이 새겨진 복근부터 훤히 드러난 성기를 지나 길고 늘씬한 다리까지 느리게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을 가이드의 몸을 훑던 에스퍼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그건 뭡니까?”
왠지 시야가 뿌옇게 보이는 것 같아 숨을 삼키던 태훈은 제 연인의 말에 그의 턱짓이 향하는 곳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붉은 가죽으로 만든 팔찌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느낌보다는 조금은 투박하고 단순한 느낌이 드는 그것은, 선물 받은 날 이후로 태훈이 언제나 제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이기도 했다.
이제껏 잘 버텨왔던 가이드는 그 물음 하나에 순간적으로 완전히 표정이 흔들렸다. 기실 따지고 보면 별것 아닌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잡아오던 균형을 무너트리는 건 아주 작은 울림 하나면 충분하다. 최태훈에게 그건, 방금 제 연인이 담은 말이었다.
“또 뭘 하면 됩니까.”
지관영은 저를 똑바로 눈에 담으며 말하는 가이드의 말에 입 안에서 굴리던 날 선 단어들을 삼켰다. 목 안이 쓰리고 따끔거렸다.
가이드는 흑갈색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그것을 떨어트리지 않고 겨우겨우 버티고 있다. 그건 너무도 담담한 표정을 한 지독한 감정의 토로다. 부러 못된 말을 고르던 혀에 갑자기 무거운 추가 달린 것만 같아서, 괴물은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가이드의 시선을 피해 버렸다.
“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뭐든지, 하라는 대로 할게요.”
연인이 기억을 잃은 지 일주일, 그걸 기다리던 사흘까지 합치면 열흘. 최태훈은 그동안 어떻게든 참아왔던 마음을 이제야 토해내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기억을 잃어 다행이었다.
다행히도, 정말 다행히도 제 연인은 멋대로 내뱉는 말에 상처받지 않을 거다. 지관영의 입 안에서 만들어진 문장에 찢기는 건 최태훈 하나뿐이다.
“다리라도 벌릴까요?”
에스퍼는 영화나 드라마를 찍으며 제가 맡은 역할을 자주 비웃었었다. 매번 쏟아지는 달짝지근한 이야기들은, 결국 그 모습만 조금씩 다를 뿐인 지루하고 뻔한 감정 소모일 뿐인데도 사람들은 언제나 그가 만들어 낸 표정에 열광하며 푹 빠져들었다.
괴물은 제가 사람의 그것을 잘 따라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실망, 동정, 선망……. 그가 흉내 내지 못할 마음은 없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지관영은 제가 감히 따라 그릴 엄두조차 내지 못할 감정에 말문이 막혔다. 이제야 그 예쁜 단어의 껍질 속에 숨겨진 온전한 어떤 것을 마주하고 있는 거다.
저런 눈과 표정을 하고 있는 것도 사랑일 줄은 몰랐다.
달콤한 눈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적당히 서글픈 얼굴을 만든 채 적당히 만들어진 문장을 말하는 것이 그 어여쁜 단어의 전부라고 생각했었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괴물은 저와 비교할 바 없이 약한 사내의 시선이 따가워서,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급한 걸음으로 관사를 빠져나왔다. 태훈은 연인이 제게서 도망치듯 떠나고 나서야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에어컨조차 틀어져 있지 않은 여름의 머리인데도 뼛속까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손끝까지 벌벌 떨려서, 태훈은 그제야 옷가지 하나를 겨우 걸쳐 입고 몸을 웅크렸다.
예상보다 조금 빨리 나온 터라 매니저의 밴은 보이지 않았다.
관영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남자도 이렇게 쿵쾅대는 소리를 쭉 듣고 있었던 걸까 싶었다. 최태훈의 심장 박동은 청력을 닫는 걸로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자신의 것은 무슨 수를 써도 피할 수 없는 거였다.
에스퍼는 매니저를 기다리는 그 잠시간의 시간 동안 그럴듯한 얼굴을 만들어 걸기 위해 애썼다. 얼마나 있었을까, 익숙한 검은 밴이 눈에 보였다. 작게 숨을 들이켠 관영은 그것에 올라탔다.
저택으로 돌아가는 풍경은 언제나처럼 익숙했다.
지관영은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잘 안다. 제가 만들어 둔 8개월이 있다. 처음에는 그저 자료에 불과했던 그 나열은 어느 순간 정보가 됐고, 그다음에는 기억으로 이름표를 다시 붙였다. 지관영은 홀로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다가 백미러를 통해 저를 흘끗대며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을 놓쳤다.
“저어. 관영 씨.”
괴물은 대답 대신 시선만 흘끗 돌렸다.
매니저는 그 매서운 눈에 괜히 쭈뼛 긴장해서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배우는 지금 굉장히 저기압이다. 그는 그걸 단박에 눈치챘다. 사실 이런 때는 절대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관영 씨와 연락이 안 된다고, 제 편으로 전화가 왔더라고요.”
에스퍼는 그제야 이른 시간부터 저를 귀찮게 했던 알 수 없는 발신자를 떠올렸다. 지관영은 뭐냐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매니저는 허둥지둥 옆 좌석에 두었던 것을 내밀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해 달라고 하셨대서…… 제가 대신 받아왔습니다만.”
매니저가 건네는 것을 몇 초간 받지 않고 관찰하듯 눈에 담던 관영은, 머뭇거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괴물은 텅 비어있는 것이 당연한 제 공간으로 돌아왔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다 ‘그 가이드’였다. 그는 제가 방금 울게 한 그 남자고, 잃어버린 8개월간 지독히도 사랑했던 남자이기도 했다.
왠지 족쇄를 찬 듯 무거운 발을 겨우 움직여 침실에 도착했다. 옷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로 바로 그 위에 눕는 건 평소의 그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모두 귀찮기만 했다.
지관영은 침대에 누운 채로 매니저가 건넨 자그마한 쇼핑백을 들어보았다. 그건 크기만큼 참 가벼웠다. 에스퍼는 그 안에 담긴 리본으로 묶인 작은 박스에서 눈을 떼질 못하다가 한참 뒤에야 포장을 풀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붉은색 케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쇼핑백에, 박스에, 그다음에는 또 작은 케이스까지. 매니저가 건네 준 이것은 소중하고 귀하게 지키고 싶다는 것처럼 몇 번이고 보호되어 있었다.
지관영은 그 케이스의 뚜껑을 위로 올렸다.
가운데에 평평하게 박힌 다이아가 말하는 의미는 그 빛깔만큼 선명했다. 에스퍼는 그 은백색 반지에 감히 손끝 하나 대지 못하고 눈에만 그 모습을 겨우 담았다.
제게는 조금 딱 맞을 듯한 반지였다. 하지만 그라면 잘 맞을 거다. 조금은 단호하게 떨어지는 선 역시 저보다도 그에게 잘 어울린다.
8개월간 이어진 기억의 마지막은 이 침실로 이어져 있다. 지관영은 반지를 손에 건 채로 또박또박 힘주어 쓰인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난 이 사람의 에스퍼다>
제가 마지막까지 자료도, 정보도 아닌 기억이 되길 바랐던 단 한 줄의 문장이다. 에스퍼는 팔로 제 눈을 눌러 가려버렸다.
* * *
3주, 21일.
남은 시간은 이제 3주다. 30일 중 벌써 9일이 갔다.
이 공간에서 가장 완벽한 모습을 한 남자는 조금은 그답지 않게 멍하게 앉아있다. ‘지관영’이 누군가! 언제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로 유명한 사내다. 하지만 오늘 그는 이상할 정도로 경계가 풀려있었다.
덕분에 스태프들의 눈이 흘깃거리며 마치 조각상 같은 얼굴을 한 사내를 향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있던 그는 얼마 안 가 휴대폰을 들어 그 액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금 지관영은 넋 놓은 듯 앉아있다가, 휴대폰을 한 번 봤다가, 또다시 뭔가를 생각하듯 느슨한 눈을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CF 촬영 현장의 스태프 하나는 나른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남자의 주변만 한참을 얼쩡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
“관영 씨?”
“아, 네.”
오늘 지관영의 상태는 정말로 이상했다.
지관영을 담당한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 가는 매니저는, 그 모습에 입술만 달싹였다. 저 남자의 알 수 없는 행동이 시작된 건 엊그제 관사를 다녀오고 나서부터다.
‘그 가이드’ 때문인 거다.
매니저는 턱을 긁적였다. 매니저는 이틀 전 제가 대신 찾아온 반지의 의미를 아주 잘 알고 있다. 누가 봐도 프러포즈를 위한 것을 직접 매장에 전화해서 달달 볶아 내놓게 한 탓에, 어제오늘 증권가 찌라시 몇 개엔 지관영의 이름이 오르내리기까지 했다.
호사가들의 짐작대로라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부족할 남자가 대체 왜 저 모양인지 영문 모를 일이다.
‘……설마 차인 건가?’
나른하게 목 뒤를 주무르며 고개를 휘는 관영을 보며 매니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요 반년 넘는 시간 동안 저 사내는 참 많이 바뀌었다.
매니저는 언제나 손 닿지 않는 곳에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던 남자가 드디어 땅에 발을 딛고 주변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기쁨이 생생하다.
그는 제가 담당한 배우가 다시 촬영에 들어간 것을 보며 슬쩍 휴대폰을 들었다. 매니저의 덕목에는 자고로 배우의 심신 안정도 포함되는 법이다.
거의 온종일 진행된 광고 촬영이 끝났다.
단 1분도 안 되는 짤막한 영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달라붙고, 또 시간이 투자되는지 모른다. 지관영은 언제나 이 작업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CF에 얼굴을 비추는 숫자로 배우의 급을 따지기도 하기에, 그는 이 지루한 작업도 몇 개 정도는 견뎌보고는 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지관영은 짤막하게 대답하며 옅게 눈을 접었다.
지금 에스퍼는 가까스로 표정을 지어내는 중이다. 엊그제, 그 가이드의 표정을 보고 난 이후로 관영은 제 자신이 사람들의 얼굴을 잘 흉내 내고 있는 건지 자신이 없어졌다.
‘자신 없다’.
이건 참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지관영은 현장을 정리하느라 정신없는 사람들 사이를 눈으로 쭉 훑으며 매니저를 찾았다. 괴물은 지금 자신의 어두운 은신처로 빨리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곳에는 ‘그’가 있다.
저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그가.
하지만 조금은 지루하게 움직이던 에스퍼의 눈은, 머잖아 한 곳에 못 박힌 듯 멈춘 채로 크게 뜨였다. 지관영의 시선이 멈춘 곳에는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약간은 퀭한 안색을 한 사내가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인데도 축 늘어진 모습이 아니라 어깨를 쭉 편 곧은 자세를 취하는 것은, 정말 최태훈 그다운 모습이었다. 셔츠 하나에 청바지를 간단하게 받쳐 입은 모습은 조금 급하게 나온 것도 같았다.
최태훈은 지관영의 시선이 제게 닿은 걸 깨닫자마자 곧바로 성큼성큼 에스퍼의 코앞까지 걸어왔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한 차림새를 한 에스퍼는 저와는 영 다른 모습을 한 남자를 멍하게 바라보다가 느리게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는…….”
“21일.”
온종일 지관영이 떠올렸던 숫자가 보기 좋은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3주, 21일 남았습니다.”
지관영과 바짝 붙어있는 남자를 반신반의하면서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제야 확신을 얻고 술렁임으로 바뀌었다.
‘그 가이드’다.
저 무엇 하나 모나거나 부족한 것 없는 에스퍼의 유일한 페어다. 최태훈은 놀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연인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남은 21일 안에 지관영 씨와 다시 연애할 작정입니다.”
“…….”
“지관영 씨는 모르시겠지만 제 별명이 ‘지관영 남친’이거든요.”
안다. 아주 잘 알고 있다.
당장 제 휴대폰에 등록된 것만 해도 저 빌어먹을 이름이었다.
지관영은 가이드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가이드는 에스퍼의 저 얼굴을 잘 알고 있다.
오만하고 프라이드 강한 연인은 속내를 감추고 싶을 때 저런 얼굴을 했다. 최태훈은 이미 저 괴물의 안쪽 가장 깊숙한 민얼굴까지 모두 마주한 유일한 사람이다. 저 정도의 거짓말은 우습다.
태훈은 저와 관영을 향해 쏠리는 시선에 한번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었다. 이건 어딜 가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저 에스퍼를 제 것으로 삼으려면 견디고 감당해야 한다. 최태훈은 그제야 지관영이 왜 기자회견을 그렇게 바랐는지 좀 알 것 같았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 앞에 못을 박아야 빠져나올 구멍이 없는 거다.
“절대 포기 안 합니다. 지관영 씨 성격 끔찍하게 나쁜 거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솔직히 8개월간 지겨울 정도로 겪었습니다.”
지관영이 성격이 나쁘다고?
기자재며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던 손까지 멈춘 사람들은 가이드의 그 믿기 힘든 증언에 눈만 끔벅였다. 에스퍼는 굳어 버린 혀를 겨우 움직이며 답지 않은 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저번에도…….”
지관영의 눈이 그제야 제 매니저에게 꽂혔다. 저만치에서 상황을 엿보고 있던 매니저는 그 싸늘한 표정에 움찔해서 시선을 피했다. 그 반응에 황당한 얼굴이 된 관영이다.
세상에 저 가이드는, 이런 말끔하고 단정한 얼굴을 한 채로 온종일 저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남자를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완전히 기막힐 노릇이었다.
“시작이 반이라고들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지관영 씨는 이미 반은 넘어오신 겁니다.”
“돌아버리겠군. 당신 진짜 생각이라는 걸 포기했어?”
언제나 유려하고 젠틀하기 짝이 없는 단어만을 담던 목소리가 이제껏 들을 수 없는 표현을 품은 채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건 듣기 나쁘기보다는, 오히려 묘하게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던 근사한 남자를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최태훈은 연인의 물음에 살짝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지관영 그의 버릇을 흉내 내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엊그제 하신 말.”
흔들림 없이 오만한 남자의 어깨가 살짝 움찔했다. 곱게 뻗은 눈썹도 살짝 휘었다.
“그것도 정말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뭐?”
“3주 안에 사과받겠습니다. 사과 방법이나 생각해 두십시오. 어설프게 하시는 걸로는 소용없습니다.”
최태훈은 멍한 표정을 한 에스퍼를 제 시야 안에 똑똑히 담은 후 처음으로 눈을 접어 활짝 웃어 보이더니, 언제 소란을 피웠냐는 양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유유히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지관영은 제 페어 가이드이자 연인이었던 사내의 뒷모습을 황당한 얼굴로 보다가 허리에 손을 얹고 긴 헛웃음을 흘렸다.
완전한 선전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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