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blind
눈을 떠서 가장 먼저 본 천장은 티끌 하나 없이 희었다.
이한솔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다시 느리게 내뱉었다. 여전히 누군가 목을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묘한 답답함이 뒤따랐다.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은 손끝이 벌써 아물어 여린 새살이 돋은 상처를 더듬었다.
목부터 쇄골까지 길게 난 흔적은 ‘그 에스퍼’의 경고다. 보통 가이드였다면 아직 숨 쉬는 것조차 불편했을 것이지만 이한솔은 그들보다 몇 배는 빠른 재생 능력을 가졌다. 그의 시작이 에스퍼였던 탓이다.
이한솔은 저를 저만치에서 보고 있는 시선을 뒤늦게 눈치채고 나른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핼쑥해진 인상의 사내가 서 있다.
“안녕. 진우야.”
갈라진 가이드의 목소리에 오진우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시뻘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이한솔을 들쳐 안고 그 아수라장과도 같은 현장을 필사적으로 빠져나왔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화나?”
“…….”
“죽었으면 해서 그 사람 막지 않은 거잖아. 그치.”
이한솔의 말은 정확했다. 죽게끔 내버려 둔 것도, 새하얗게 질려가는 가이드를 살린 것도 모두 오진우다. 에스퍼는 까칠해진 입술을 꽉 깨문 채로 이한솔을 바라보았다.
스물두 살 때부터 10년.
10년을 온전히 증오로만 보냈다. 제 가이드를 죽이고 그 더운 피가 식지도 않은 채로 미소를 걸던 저 얼굴을 매일같이 저주했다. 몇 번이고 직접 깨부수려고도 시도했었다. 하지만 언제나 마지막 순간, 에스퍼로서의 그의 본능이 ‘자신의 가이드가 된 남자’를 죽이는 것을 거부했다.
오진우는 죽지 못해 몸을 처음으로 섞었던 그날을 기억한다. 이한솔은 최강의 신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마르고 나약해진 제 위에 올라타서 고운 눈을 반달로 휘어 접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며 끝까지 밀어내고 또 거부했던 원수의 손끝이 닿았을 때 느꼈던 환희는, 오진우 그에게 절망만을 남겼다.
제가 사랑했던 연인을 죽인 자와 입 맞추는 것에 기뻐하는 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악에 받친 시간이 그렇게 차곡차곡 쌓여 갔다.
오진우는 이한솔과 몸을 섞을 때마다 지독한 리바운드를 겪었다. 하지만 그 극한까지 다다른 모든 신체 감각이 뒤틀리는 고통만이 그를 유일하게 살게 해주는 것이었다.
덕분에 10년의 세월 동안 이한솔의 곁을 지키면서 숨을 부여받는 자신의 삶이 얼마나 치욕스러운 것인지 끊임없이 잊지 않고 자각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난 이제 네 가이드 안 할 거야.”
이한솔은 오진우를 향해 웃어 보았다.
과거 그 붉었던 날과 똑 닮은 미소였다.
“‘그 에스퍼’ 때문에?”
“응. 그러면 너도 다른 가이드를 만날 수 있고, 나도 더 강한 에스퍼를 가질 수 있고. 서로 좋잖아.”
에스퍼는 미간을 구긴 채로 그 천진한 문장에 대한 혐오를 감추지 않았다. 한솔은 그 익숙한 멸시의 시선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다리가 몇 번 휘청거렸지만, 똑바로 움직이는 데에는 큰 이상이 없었다. 가이드는 조금 어색하게 걸으면서도 어떻게든 제 에스퍼의 앞까지 혼자 힘으로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이한솔은 저보다 시선이 높은 사내의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치만 진우 넌 날 또 죽게 내버려두면 내버려뒀지,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고…….”
“…….”
“자. 그러니까 우린 이제 여기서 안녕.”
독을 품은 채 보내왔던 세월의 마침표는 장난과도 같은 통보가 다였다. 이한솔은 저를 말없이 내려다보는 지친 눈을 한 사내에게 마치 걱정하듯 덧붙였다.
“웬만하면 힘 사용하지 말고, 진우야. 나도 없는데 그랬다가 정말 큰일 나. 알겠지?”
“……어디로 갈 건데.”
페어로서의 마지막 대화였다.
이한솔은 오진우의 물음에 방긋 웃더니 창백한 입술에 부드럽게 입 맞췄다. 가이드의 마지막 호의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에스퍼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간지러운 접촉을 피하지는 않았다.
에스퍼는 가이드를 버릴 수 없지만 가이드는 에스퍼를 버릴 수 있는 일방적인 관계 속에서, 오진우는 드디어 버림받았다. 이한솔은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죽이고 싶어 하는 이 사내가 붙잡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안다. 가볍게 혀를 주고받는 키스 후, 이한솔은 살짝 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야.”
* * *
지금 최태훈은 ‘차마 고개를 들 낯이 없다’라는 말이 어떤 것에서 유래된 건지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언제나 바른 자세로 상대의 말을 듣던 그가 고개를 푹 떨군 채 한숨을 쉬고 있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 지금의 심정을 잘 표현하는 것일 테다.
가이드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말쑥한 차림의 중년 사내는 조금은 피폐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희, 정말 그렇게 꽉 막힌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
“자사 소속 배우 프라이버시 철저하게 보장해 주는 걸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래라저래라 터치도 없고요. 정말입니다.”
“……예에.”
사내의 입에서 피 끓는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덕분에 최태훈의 바로 옆에 붙어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홀짝이던 지관영의 시선이 흘끗 사내를 향했다가, 다시 제가 들고 있는 책으로 떨어졌다. 중년의 사내는 그것에 더 분통 터진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지금 지관영 씨 드라마 끝나고 나면요. 기다리고 있는 시나리오가 정말 과장 않고 한 트럭입니다. 고르고 골라 ○○○감독 작품 들어갈 예정인데요. 아니 그 전에, 지금 중국이며 일본에 드라마 수출된 건 아시죠? 벌써 매화 방송하고 나면 다음 날 새벽부터 자막 붙은 영상이 돌아다니는 상황입니다, 지금.”
“…….”
“그뿐입니까? 배역의 폭도 이전보다 몇 배는 넓어져서요, 요새 해외에서도 에스퍼 역할로 캐스팅하고 싶다는 연락이 하루에도 엄청 쏟아집니다. 정말 지금처럼 커리어를 독보적으로 만들 수 있는 시기가 없습니다.”
최태훈은 더는 사내의 말에 대답할 염치조차 찾지 못해서 그저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끝없는 밤샘으로 눈가가 거뭇거뭇해진 중년의 사내, 다시 말해 지관영의 소속사 관리팀장은 그런 가이드의 태도에 용기를 얻고 더더욱 목소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연애?! 좋다 이겁니다. 그것도 서른 줄 들어선 성인 남성이 누구 좀 만나겠다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런데에! 그런데에에!”
최태훈의 입에서 작게 쿨럭이는 헛기침이 터져 나왔다.
망할 ‘연애’!
찢어발기고 싶은 단어가 드디어 등장했다.
연애. 연애. 젠장할 연애. 빌어먹을 연애. 씹어 먹을 연애. 최태훈은 얼굴로 피가 몰리는 걸 느끼며 깍지 끼어 잡은 제 손에 힘을 주었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의 시작은 저 달짝지근하기 그지없는 단어 때문이다.
“대체! 왜! 공개 연애를 하겠다고! 그것도오!”
“…….”
“게이라고 커밍아웃을 하겠다고 저 난린지! 제발! 좀! 최태훈 씨가 말려주십쇼오! 아주 그냥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뛰다 못해 사표 내고 잠적하고 싶습니다아!”
“사표 쓰세요.”
“아아아악!”
다섯 글자로 속을 뒤집어 놓는 지관영의 말에 과로한 업무에 지친 사내의 입에서 괴성이 흘러나왔다. 결국 최태훈은 소속사 팀장에게 잠시 고개를 꾸벅한 뒤 제 에스퍼를 다른 방으로 질질 끌고 들어왔다. 물론 지관영은 제가 잘못한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말끔한 얼굴을 하고 있다. 최태훈은 그 느긋한 표정에 뭐라 다그치려던 문장의 말꼬리가 묘하게 흐물흐물해졌다.
“게이 아니셨잖습니까!”
“이제 너도 나도 게이야.”
28년간 휘둘린 적 없는 성 정체성을 단박에 정의 내린 그 오만한 선언에 태훈은 뭐라 할 말을 잃고 벌겋게 변한 목을 쓸었다.
최태훈은 지금 저 말을 부정할 방법이 없다. 저게 싫었다면 ‘그날, 그때’ 말했어야 했다. 저는 지관영이 자신과 연애하자고 외칠 때 바보같이 버벅거리다가 ‘어떻게 그래요?’라고 얼빠진 녀석처럼 물었고, 에스퍼는 ‘안 될 건 뭔데.’라고 대답했었다.
이제 완전히 승기를 잡은 지관영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는 제 페어를 보며 못 박듯 말을 이었다.
“기자회견까지 해서 못을 박아야 최태훈 네가 그 미친 소리를 또 못하지.”
“……아, 좀!”
정말이지 저 성격 나쁜 에스퍼 앞에서는 욱해서 하는 말도 조심해야 했다. 지관영은 ‘다른 에스퍼’와 ‘다른 사람과 결혼’ 같은 단어에 지독할 정도의 뒤끝을 보이며 사사건건 그 예시를 들먹였다. 태훈은 여전히 분이 안 풀린다는 듯 눈썹 하나를 치켜든 채 빈정거리는 사내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이제 정말 그런 말 안 할 테니까요, 기자회견이나 그런 거 없이 그냥 몰래…… 만나면 안 됩니까?”
“왜?”
“저만 좀 피곤하면 모르는데 제 가족들은요. 특히 동생들은 나이도 어려서 바깥에서 사람들 만날 일도 많은데, 그렇지 않아도 지관영 씨가 제 에스퍼라고 알려져서 한바탕 난리였댑니다.”
……이것 봐라?
지관영은 맞잡은 손을 손가락 끝으로 살살 덧그리며 말을 잇는 최태훈을 보며 속으로 헛웃음 쳤다. 그는 다시없을 깍듯한 얼굴을 한 채로 저를 입 안의 혀처럼 구슬리려고 하는 가이드의 행동이 빤히 보였다.
사실 최태훈이 이렇게 말린대도 멋대로 행동하면 그만인 일이긴 하다. 지관영의 문자 한 통으로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고 뛰어올 기자는 널렸다. 문제는, 훤하게 짚어지는 그 얕은수를 두고도 별다른 저항을 할 의욕이 들지 않는 스스로다.
지관영은 고개를 느슨하게 기울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툭 입을 열었다.
“그럼 지현이한테는 말해도 되나?”
“……지현? 최지현? 저희 넷째?”
“그래. 최지현. ○○대학교 영문과 1학년 최지현.”
말한 적도 없는 동생의 프로필이 예쁜 모양을 한 도톰한 입술에서 술술 흘러나왔다. 태훈은 멍한 얼굴로 눈을 끔벅이다가 더듬더듬 물었다.
“지, 지현이한테 어떻게 말씀하시려고요?”
“휴대폰 번호 알거든.”
“어떻게 말입니까?”
“저번에 관사 놀러 왔을 때 번호 교환했어. 참고로 최우진 연락처도 알아. 매주 드라마 모니터링 해 주던데.”
가이드는 말 그대로 입을 작게 벌린 채로 딱 굳었다.
제 동생들과 에스퍼 사이에 이런 비밀스러운 커넥션이 있을 것이라곤 전혀 상상도 못했던 태훈이다. 지관영은 약간 벌어진 입으로 보이는 가지런한 하얀 이를 보면서 혀를 넣어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안 됩니다.”
“왜 안 돼?”
“절대, 절대, 절대 안 됩니다. 절대로요!”
“기자회견도 안 된다, 가족도 안 된다. 되는 게 뭐야. 안 되는 이유를 납득시켜.”
지관영은 고개까지 저으면서 절대 안 된다고 외치는 최태훈을 보며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어찌나 여유로운 태도이던지 얄밉기까지 한 그 근사한 얼굴에, 태훈은 이제 연인이 된 남자를 울컥한 눈으로 노려보며 단어를 골랐다.
“굳, 굳이 동생들한테 다 말하면서까지…… 그래야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부족해. 더 그럴듯한 핑계로 대 봐.”
이게 진짜 사귀는 사이에 하는 대화 맞아?
지관영의 눈가에 희미하게 걸린 웃음기를 볼 때마다 늘 제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태훈이다. 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저런 남자에게 반한 제 탓이다.
에스퍼는 이제 제법 장난스러운 미소를 건 채로 가이드가 맞잡은 손을 바닥이 온전히 와 닿게 걸고는 작게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태훈은 그 간질간질한 스킨십에 왠지 모를 쭈뼛쭈뼛한 소름이 돋는 것 같아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렇지 않아도 센터 분들도 다 아는데 가족한테까지 알려지는 건…… 좀 싫습니다.”
“싫은 이유가 뭔데.”
“아니, 후우, 그러니까…… 싫다기보다. 그게 좀. 좀 그렇잖습니까. 예?”
미안한 말이지만, 사실 최태훈을 곤란하게 하는 건 꽤 재밌다.
늘 말끔했던 눈매가 살짝 아래로 휘고, 찡그림 없이 곧았던 표정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된다. 워낙 그린 듯한 정석의 사내라 이런 돌발 상황에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거다.
에스퍼는 태훈의 손을 쭉 잡아끌어 그 끝에 입술을 떨어트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기자회견은 가족들 곤란해질 것 같아서 싫고.”
“…….”
“동생들에게만 말하는 건 또 부끄러우시다, 이건가.”
꼼꼼한 성격만큼 예쁘고 단정한 모양새로 잘린 손톱 위로 따뜻한 온기가 올라왔다. 그저 입술이 닿았을 뿐인데 귀가 울릴 정도로 빨라진 최태훈의 심장박동 소리가 에스퍼를 퍽 유쾌하게 만들었다.
“아냐? 넘어가 주려고 했는데 아니면 다른 이유 대던가.”
“……그거 맞습니다.”
기어코 가이드의 입에서 긍정의 문장을 뽑아낸 에스퍼에게서 낮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최태훈은 이 괴팍한 성미를 가진 사내와의 연애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을 직감하며 열이 오른 한숨을 푹 쉬었다.
* * *
“나 당분간 1연구실에서 살까 해.”
한 에스퍼 연구원은 진지한 얼굴로 선포했다. 그 덕에 제법 기분 좋게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이미현의 얼굴이 빠른 속도로 일그러졌다. 지금, 센터의 수많은 연구원이 미현과 오연의 부서가 협력하는 제1 연구실을 참새가 방앗간을 기웃거리듯 오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세상에. 어떻게 그 좋은 걸 자기들끼리만 들어?”
“제 말이요. 지관영이 태훈이한테 청혼했다잖아요.”
“어어?! 진짜? 아냐, 아냐. 내가 듣기론, 태훈이가 지관영한테 울면서 고백했더니 지관영이…….”
미현은 그 허구 가득한 대화에서 멀어지기 위해 바닥을 보인 용기 안을 빨대로 쪽쪽 빨면서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에스퍼 지관영과 가이드 최태훈 주연의 미니 시리즈는 이미 각자의 입맛에 맞게 변형된 지 오래다.
늘 사건 사고를 달고 다니던 페어의 관계에 새로운 이름이 붙여졌다는 소식이 센터 전체에 퍼지기까지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늘 연구와 프로그램 개발, 협동과정만 계속하며 나태와 지루함에 젖어있던 센터의 사람들에게 이 듣기 좋은 연애담은 농담 않고 10년은 우려먹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다. 아니, 적어도 최소 3년은 가장 뜨거운 화제일 것이 분명하다.
이 신선한 커플 탄생의 소식을 두고 센터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이미현과 같은 ‘커플 꺼져. 지관영은 더 꺼져.’다. 이 세력은 지관영이 친 사건 사고로 치를 떠는 홍보팀과 대외 협력팀 사람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미현은 아예 매점에서 주전부리까지 사 들고 온 옆 연구실의 에스퍼를 가차 없이 제 공간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다.
“아, 일해요. 일. 이 사람들이 진짜. 이래서 공무원들이 놀고먹는다는 말이 나오는 거 아냐. 3연구실 근태 관리 왜 이래요?”
“우리 쪽 오늘 좀 쉬기로 했어. 일본이랑 협동과정 어제 끝났거든. 미현 씨. 그러지 말고 얘기 좀 더 해 줘요.”
“뭘요.”
“지관영이랑 태훈이요! 오늘 와요? 아, 둘이 진짜 사귀는 거 맞지? 그날 어땠어요?”
두 번째는 이렇게 눈을 빛내며 지관영과 최태훈의 연애를 응원하는 극성 지지파다. 미현은 3연구실의 사람이 저를 채근하든 말든 ‘아아, 몰라 몰라.’ 하면서 대충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저쪽에서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스퍼 하나가 슬쩍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그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컹컹대는 소리를 내며 기뻐했던 드라마광 에스퍼였다. 그는 제가 들었던 순간을 몇백 번이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전달할 수 있다.
“그러니까요 그게…….”
에스퍼는 목을 가다듬고 제 능력 발휘를 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어제 말했던 자료 입력 끝났습니까.”
“아, 아뇨! 조금 남았습니다.”
“오전 중으로 끝내고 보고 부탁합니다.”
이곳에서 가장 무뚝뚝한 얼굴과 목소리를 한 남자의 개입에 3연구실의 에스퍼의 얼굴은 울상이 됐다. 하지만 오연은 그런 표정에 넘어갈 정도로 말랑말랑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3연구실로 프로젝트 하나 넘겼습니다. 확인하시죠.”
“정마알~?! 아, 진짜. 연 씨 너무해.”
이미현은 든든한 지원군의 등장에 작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오연에게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해 보였다. 그저 연구실의 분위기가 산만해지는 게 싫었던 무뚝뚝한 에스퍼는 그 반응에 대충 고개를 까닥였다. 사실 뭐 여기까지는 괜찮다. 주연배우 지관영이 가장 짜증 나게 여기는 건 바로 이 세 번째 케이스다.
“후후.”
“…….”
“좋을 때네요, 좋을 때.”
센터장은 제 앞에서 오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사내를 보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방긋방긋 깃털 같은 웃음을 걸고 있다. 연애 소식을 껄끄럽게 여기는 파와 극성 지지파도 아닌, ‘어유 젊은 애들이 예뻐 죽겠어’와 같은 흐뭇한 시선을 내보이며 마냥 귀여워하는 세 번째 세력.
그게 바로 센터장을 위시한 센터 중장년층의 반응이었다.
센터장 권다희는 마치 드라마 속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한 지관영을 보며 곱게 눈을 접었다. 보아하니 지관영은 촬영이 끝나자마자 의상까지 그대로 입고 곧바로 센터로 온 듯했다.
골치 썩이며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거만한 에스퍼라고 생각했는데 센터에서 사랑싸움이라니,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지관영은 그 미소에 미간을 찌푸리며 인상을 구겼다.
제 가이드의 교육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나 때울 겸, 센터장이 호출하는 것을 순순히 따라 올라와 줬더니 층이 올라갈수록 사방에서 저런 미적지근한 얼굴이다.
차라리 이럴 줄 알았다면 그 소란스러운 연구원들의 같잖은 설문조사나 해 주는 게 나을 뻔했다.
“뭡니까, 그 표정은.”
“세상에 자기밖에 모를 것 같은 남자가 이 듣는 귀 많은 데에서 큰 소리 내며 사랑싸움했다니까 너무 예뻐서요.”
상상 이상으로 흘러나온 대답에 지관영의 입에서 드문 한숨이 터졌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솔직히 그때 저와 최태훈의 대화를 온 사방의 에스퍼가 다 듣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평소처럼 예민하게 기척을 세우고 있었더라면 바로 눈치채고도 남았을 터지만, 사실 그때 지관영은 제 눈앞에서 다른 사람과 교제하겠다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하는 말을 하는 가이드를 두고 다른 것에 전혀 신경을 못 썼다.
응접실을 나와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최태훈과 함께 연구실의 문을 열었을 때 쏟아졌던, 그……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시선들이라니.
지관영은 이미현이 뭔가 굉장히 떨떠름한 눈과 켕기는 목소리를 한 채로 ‘어, 음, 예쁜 사랑해요. 두 분 다.’라고 했을 때 가이드와 저의 대화가 조금은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자각을 했고, 그 다음다음 날 오후에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한 최태훈이 ‘요새 한강 물 온도 어떻답니까?’라고 물었을 쯤엔 이 빌어먹을 센터에 자신들의 이야기가 쫙 퍼졌다는 걸 확신했다.
애초에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이 직업인 사내는, 연구원들이 저와 가이드를 놓고 쑥덕대는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게 마음에 걸렸으면 복도에서 대놓고 혀를 섞으며 키스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지관영 그는 이렇게 동물원 우리에서 사육되는 기분을 참기 어려워한다. 결국 에스퍼는 손도 대지 않은 차를 내버려두고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된 거 기다릴 거 없이 가이드 교육에서 최태훈만 빼내오면 그만이었다. 기껏 밤샘 촬영을 끝내고 시간을 쪼개서 나온 건데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썼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어머. 그러고 가면!”
센터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발을 옮겨 곧장 제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지관영을 향해 뒤늦은 헛손질을 했다. 하지만 이미 떠난 이는 말이 없다. 센터장은 텅 빈 제 집무실을 공연히 한 번 쭉 훑더니 작은 미소를 흘렸다.
“……태훈 씨한테 더 안 좋을 텐데?”
그 형태는 마치 걱정처럼 하는 말이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센터장은 작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따끈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센터장 권다희는 지금 퍽 즐겁다.
분명 오늘, 센터를 배경으로 한 미니 시리즈의 후속편이 나올 게 분명하다. 여러모로 잘된 일이다. 넘치는 능력을 주체 못하고 세상 사는 걸 지루해하는 연구원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각성제는 없을 거다.
젊은 사람들의 연애는 언제나 귀여운 법이고,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이 함께 즐거우면 그걸로 됐다. 그녀는 자신의 예상이 맞아떨어질까 궁금해하며 오랜만에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딱 한 시간 뒤.
센터장은 전산망의 연구원 자유 게시판을 휩쓸기 시작한 새로운 에피소드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사건은 에스퍼 지관영이 제 페어 가이드에게 직행하면서 시작됐다.
* * *
아프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최태훈은 오늘 아침 스스로 양심을 이기지 못했던 제 자신을 탓하며 시선을 땅에 고정했다. 그는 지금 두세 달에 한 번 있다는 센터 소속 가이드 전체 집체 교육에 와 있다. 이건 일전에는 테러 후유증 치료 등을 이유로 면제받았던 교육이다.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성향이 강한 센터 가이드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자리인 이곳은, 많은 이들의 친목과 자료 공유의 장이면서 온갖 소문이 만들어지는 근원이기도 했다.
가이드는 푹 내쉬려던 한숨을 겨우 눌러 참았다.
괜히 사람들의 이목을 더 끄는 것은 절대 사절이었다. 넘치는 관심은 오늘 아침으로도 족했다. 강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이 수많은 사람이 하던 말을 천천히 멈추면서 숨을 죽이는 그 정적이라니!
지금 최태훈의 머릿속엔 여기를 어떻게 도망칠까 하는 생각뿐이다. 하지만 한평생 다섯 동생의 모범이자 바른 생활의 끝만 달려왔던 그로서는 땡땡이 같은 단어를 쉽사리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발목이라도 삐끗할 수 있을까.’
요령 대신 시작된 상상의 나래는 제법 가학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그렇게 온갖 가정을 떠올리던 태훈의 낯빛이 점차 어두워질 때였다.
“저기요.”
“예?”
최태훈은 오늘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낸 자신의 목소리가 조금은 바보처럼 들렸다고 생각했다. 서글서글한 인상을 한 사내는 태훈을 보며 입가에 씨익 미소를 걸었다.
“여기 옆자리, 사람 있나요?”
“아뇨. 비었습니다.”
“하하핫! 늦잠 잤지 뭐예요! 이거 출석 중요하답니까?”
“들어올 때 지문 찍은 걸로 확인한다고만 했습니다.”
뒤늦게 눈에 들어온 사내의 몰골은 참 볼만했다. 뒷머리는 눌리고 여기저기 뻗친 산발은 누가 봐도 관사에서 늘어지게 자다가 뛰쳐나온 모습이었다.
몇 시간 동안 계속 굳은 얼굴로만 있던 태훈의 입가에 그제야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사내는 손 부채질을 하며 의자 위로 한껏 늘어졌다. 급하게 온 것이 역력한 이마 위에 희미한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태훈은 용기를 내어 가지고 있던 티슈 몇 장을 건네며 먼저 입을 열었다.
“최태훈이라고 합니다.”
“알아요, 알아. 모르는 사람 없을걸?”
“…….”
“전 김권석입니다. 하하. 유명하잖아요, 태훈 씨. 무려 지관영 남친!”
살짝 귓가가 붉어진 채로 생수병을 따던 태훈은 실수로 그걸 떨어트릴 뻔 했다.
“지관영, 뭐요?”
“지관영 남친.”
최태훈에게는 지관영 가이드에 이어 새로운 별칭이 생겼다. ‘지관영 남친’. 김권석은 굉장히 기묘해진 가이드의 얼굴을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그 웃음에도 한동안 왠지 모르게 이건 아닌데 싶은 얼굴을 하던 태훈은, 권석이 제 어깨를 호탕하게 두들기며 위로 아닌 위로를 하는 것에 뒤늦게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아, 왜. 요새 제일 인기 많은 연예인이랑 사귀는 건데. 계 탄 거지. 거기에 페어에, 세상에 네임까지 연결됐다면서요?”
“……뭐.”
“세상에 지금이라도 만난 게 참 용해. 재수 없었음 평생 못 만날 수도 있는데요.”
태훈은 멋쩍게 턱을 긁적이며 내심 혹시라도 제 얼굴이 붉어지지는 않았을까 걱정했다.
김권석의 말이 맞았다.
운 좋게 사인회장에서 만나지 않았더라면 페어는 서로를 평생 모르고 살아갔을지도 몰랐다. 이름 역시 지관영만이 가지고 있는 반쪽짜리 공유로 끝마쳐졌을 확률이 컸다.
물론 무엇보다 문제인 건 지관영이다.
언론에는 최근 갑작스레 에스퍼로 발현한 것으로 알려졌다지만, 사실 그는 십 년도 넘게 페어 가이드 없이 지냈다. 삐끗 잘못했다가 무슨 사고가 났다고 해도 놀라울 일이 아니다. 김권석은 제 옆에 앉은 가이드의 단정한 얼굴에 비친 부끄러움을 읽고 씨익 눈을 접으며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아, 나도 지관영 한 번 보고 싶은데. 왜 이렇게 보기 힘들어. 센터 주로 몇 시에 와요?”
“스케줄 빌 때 오는 거라 꼭 정해져 있지는 않습니다.”
“사인 한 장만 받아다 줘요. 울 자기가 지관영 팬이야. 얼마나 지관영, 지관영 노래를 부른다고요.”
“예.”
알겠노라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모습은 암만 봐도 이런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났다. 솔직히 김권석은 그런 최태훈을 보며 꽤 놀랐다.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 한 명 없는 톱스타의 가이드, 그것도 네임까지 연결된 말도 안 되는 페어라기에 왠지 좀 거들먹거리는 이미지를 상상했던 그다.
몇 달 전 가이드 전체 교육에도 코빼기도 안 비친 데다 센터에 오는 건지, 안 오는 건지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도 그런 편견을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목에 힘이 들어가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저 너무 깍듯하고 또 평범한 사내일 뿐이다. 김권석은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지는 가이드를 향해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저. 혹시 그 애인분이 에스퍼이십니까?”
“옙.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아가씨.”
자랑스레 내미는 휴대폰 바탕화면에는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예쁘죠? 완~전 예쁘죠?”
“예. 굉장히 미인이시네요.”
“지관영이랑 사귄다니까 보여줄 수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넘볼까 봐 겁나서 어디 소개라도 시키겠어.”
잠시 방심하나 싶으면 곧바로 연인의 이름을 꺼내는 짓궂은 문장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그건 얼굴을 벌겋게 만드는 것이기는 했지만, 뻣뻣하게 굳어있던 가이드의 마음을 퍽 느슨하게 해 주기는 충분했다. 온종일 이어지는 교육을 어떻게 몰래 내뺄까만 고민하던 태훈이 점심시간까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버틸 수 있었던 건 모두 김권석 덕분이었다.
“점심은요? 여기 밥 맛있는데.”
“잠깐 쉬려고 합니다.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
“하하. 그럴 만도 해. 올라올 때 뭐 커피라도 하나 사 올게요.”
최태훈은 다른 이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나가는 김권석을 향해 조금은 어색하게 손짓했다. 가이드가 드디어 몇 시간 만에 혼자가 되는 순간이었다. 대강당이 텅 비는 순간, 태훈은 제 의자에 거의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이 넓은 곳을 차지하고 있는 게 저 홀로라는 것이 안도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가이드는 왠지 모르게 뻐근하게 뭉치는 몸을 쭉 기지개 켰다. 뻣뻣해졌던 목이며 허리에서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지관영 남친’.
문득 김권석에게 들었던 별명이 떠올랐다. 덕분에 바람 빠진 웃음이 가이드의 입술을 피식 비집고 나왔다. 제 페어가 이 말을 들으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지관영 그의 성격대로라면 어이없다는 듯 웃을 것도 같았다.
가이드는 희미하게 키득거리며 눈을 감은 채로 몇 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었던 팔을 늘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곳에서 절대 들려서는 안 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건.
“뭐가 그렇게 재밌어.”
최태훈은 순식간에 얼음물이 끼얹어진 것 같은 얼굴로 허겁지겁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지금 제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믿기 싫다.
“……이거 꿈입니까?”
“최태훈, 교육 안 듣고 졸았나?”
지관영이었다.
그것도 방금 막 수목 드라마의 이야기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근사한 차림을 한 ‘톱스타 지관영’이었다.
경쾌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대강당 중앙을 쭉 가로질러 걸어오는 모습은 마치 오늘 그가 이곳 강당에 설 주인공처럼도 보였다. 몇 달간 수도 없이 봐온 사내이지만, 장담하건대 오늘이 가장 완벽한 모습일 것이었다.
가이드는 저도 모르게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 * *
지관영이 한 걸음을 내디디면, 최태훈은 세 걸음을 앞서 뛰어간다.
“지관영 씨. 제발, 정말 제발 당장 나가십쇼. 애초에 여기에 온 적이라곤 없는 사람처럼 완전히 사라지세요.”
“내가 왜? 조르는 건 침대에서나 해.”
강당 단상 위에 올라서서 태평한 얼굴로 복잡한 기계들을 살펴보는 사내의 목소리는 태연하기만 했다. 최태훈은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음담패설을 시작한 에스퍼 덕분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다시 지지 않고 부탁과 협박을 이어갔다.
“안 가시면 저 진짜 관영 씨 다신 안 볼 겁니다!”
“정말 하지도 못할 말은 꺼내지 마. 그런 엄청난 카드를 아무 데나 써야 되겠어.”
“……윽, 제발요. 좀!”
시계를 확인한 최태훈의 마음이 급해졌다.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건 곧 얼마 안 가 이곳에 가이드가 한가득 몰아닥칠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아도 오전 내내 저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다. 거기에 그 주인공인 지관영까지 더해진다면, 정말 오늘 하루는 완전히 끝장일 거다.
에스퍼가 버튼 몇 개를 만지자 마치 연극무대처럼 단상 위가 환해졌다. 덕분에 더욱 초조해진 태훈의 입에서 약간은 뾰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차라리 관사에 계시지 왜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말을 유순하게 돌리던 에스퍼의 눈썹이 휙 치켜떠진 것도 그 순간이었다. 지관영은 고개를 살짝 비뚜름하게 기울이고는 제 페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다른 빛이 섞여들지 않은 새까만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최태훈은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코앞까지 얼굴을 가까이 한 것에 저도 모르게 헛숨을 삼켰다. 만인의 사랑을 받는 배우 지관영. 그게 바로 제 에스퍼이자 연인인 남자였다.
그건 참으로 새삼스럽기까지 한 자각이었다.
“최태훈. 설마 내가 불청객인건가?”
“……후우, 아니, 그게 아니고…….”
“밤샘 촬영하고 잠깐 짬 내서 보러 온 ‘애인’한테 하는 태도치고는 놀라워.”
‘애인’.
지관영이 고른 그 단어는 뭐라 불만 섞인 말을 늘어놓던 최태훈의 입을 꾹 다물게 하기 충분했다. 에스퍼는 순식간에 귀 끝까지 확 붉은 물이 드는 가이드를 보며 눈을 반달로 접어 웃었다.
새로 생긴 이름표를 상기시켜 줄 때마다 저렇게 부끄러워하는 태훈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그다.
연애, 그리고 애인.
에스퍼는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무게를 두지 않았던 그 달짝지근한 단어들이 최태훈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눈꺼풀을 희미하게 떠는 사내를 잡아끌어 입 맞추자 긴장한 어깨가 움찔하고 튀는 게 느껴졌다.
침대 위에서 뒤를 벌린 채 조르는 걸 보면 이제 사내를 받는 법을 알게 된 야한 도련님이 따로 없으면서, 이런 사소한 스킨십은 손등의 뼈가 하얗게 올라올 만큼 부끄러워하는 태훈이었다. 지관영은 그런 제 연인을 여유롭게 녹여나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어 치열을 더듬고, 그 아래의 부드러운 부분을 건드릴 때마다 슬슬 힘이 풀리는 몸이 귀여웠다. 입천장을 살살 긁을 땐 또 얼마나 숫된 반응을 보이는지, 누가 보면 키스라고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사람으로 알 거다.
“……하아, 음…….”
혀가 깊어질수록 작게 뭉개진 신음을 흘리는 목소리가 야했다. 지관영은 살짝 웃음이 났다. 당장 가라고 화낼 땐 언제고, 또 금방 이렇게 노곤하게 안겨드는 몸이라니, 누가 문제인지 모를 일이다.
에스퍼의 손이 천천히 연인의 허리를 더듬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잡히는 꽉 찬 사내의 근육은 이제 그 무엇보다 그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이대로 쭉 타고 올라가 어깨까지 이어졌을 문양을 상상하는 것도 좋았다. 소유권을 알리듯 탐욕스럽게 자리한 이름이 제 것이라는 건 정말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잠시 입술이 떨어지자 발갛게 상기된 얼굴을 한 태훈에게서 꽉 억눌린 숨이 흘러나왔다.
지관영 그는 요새 가이드의 존재에 대해 꽤 의문을 품게 됐다. 분명 가이드는 에스퍼를 제정신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들 하는데, 제 연인을 보고 있자면 왠지 그 반대로 흘러가는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저렇게 단정한 눈가가 젖어드는 모습에 홀리지 않을 방법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페어 사이에는 이제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거창한 연인 선포 때와도 같이 그들은 한 가지 망각한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였다.
지관영은 다른 이들의 기척이 저 멀리에서 짚어지자마자 곧바로 고개를 들었고, 몇 박자 늦게 그것을 눈치챈 최태훈은 순식간에 핏기가 질렸다. 애초에 기자회견까지 생각했었던 에스퍼는 뭐 어떠냐 싶은 표정이었지만, 가이드 쪽은 달랐다.
하필 지금 이 소란스러운 페어가 있는 곳은 보란 듯이 불이 켜진 단상 위였다. 총알처럼 제 에스퍼를 밀쳐 내고 입술을 문지른 최태훈은, 당장에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커지는 목소리에 반쯤 패닉에 빠졌다.
지관영은 그런 제 가이드를 달래려고 뭐라 말을 떼려고 했다. 하지만 태훈은 제가 먼저 선수를 쳤다.
“망했다. 진짜 망했다. 아, 씨발!”
제 연인이 욕하는 걸 처음 본 에스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언제나 깍듯한 문장만 담던 입과 깔끔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실린 상소리는 정말이지 묘한 조합이었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하지?”
“……최태훈.”
지관영은 저를 보는 최태훈의 눈이 순간적으로 희번덕 빛났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난데없는 멱살잡이였다. 에스퍼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로 단상의 끄트머리로 질질 끌려갔다. 너무도 쉽게 뿌리칠 수 있는 미약한 힘이건만, 언제나 제 연인 한정으로 끝도 없이 물러지는 그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었다.
최태훈의 발이 멈춘 건 강단의 한쪽 구석이었다.
“들어가시죠.”
강단 뒤의 검붉은 암막 커튼 뒤는 잡동사니와 먼지가 가득한, 누가 봐도 고개를 저을 법한 지저분한 곳이었다.
“농담해?”
“아, 빨리! 구겨져서 숨소리도 내지 말고 계십시오!”
지관영은 센터의 마크가 요란하게 새겨진 그 커튼에 손도 대기 싫다는 얼굴을 한 채로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히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에스퍼를 떠미는 가이드의 손이 더 급했다.
물론 그건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며 뭇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드라마 속 모습을 한 사내를 다루는 것이라고 하기엔 제법 무례한 것이었다.
“빨리! 빨리요!”
“최태훈 너 진짜!”
지관영은 불쾌한 듯 눈썹을 치켜떴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올 리 없는 태훈이다. 지금 그는 한시가 급하다. 지관영이 이곳에 점심시간 내내 저와 같이 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정말 오늘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가이드 교육 때마다 두고두고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에스퍼는 정말 간발의 차이로 그 어둡고 퀴퀴한 암막 뒤로 숨어들었다.
“어머. 저쪽, 누가 손댔나요?”
강사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지금 그 질문에 답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식사를 끝마치고 돌아온 가이드가 하나둘 자리에 앉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강사는 교육을 이어갈 준비를 하며 왠지 모르게 어질러진 제 서류들을 정리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거대한 강당은 강사의 움직임을 따라 정숙을 찾았다. 암막 뒤에 숨은 에스퍼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진 것도 그때였다.
-최태훈, 너 지금 심장 엄청 뛰어.
-……조용히 하십시오, 좀!
가이드는 혹시라도 밖에 그 소리가 들릴까 전전긍긍하며 제 에스퍼의 가슴팍을 콩콩, 하고 쥐어박았다. 세상에, 그 찰나의 순간에 저를 잡아당겨 숨을 줄은 몰랐다. 덕분에 태훈은 완전히 달음박질치는 제 심장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두려울 정도가 됐다.
하지만 그런 연인의 상태를 뻔히 알고 있을 에스퍼는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정말 드물게 흐린 미소 대신에 또렷한 호선을 띤 웃음을 걸고 있을 뿐이다.
두꺼운 암막 커튼 바로 너머에 서 있는 강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태훈은 그게 너무 가깝게 느껴져서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지금 사람이 몇이나 줄은 거죠? 쉬는 시간 드릴 때마다 한 분씩 도망가시더니! 저쪽, 가방이랑 휴대폰까지 두고 슬쩍 몸만 사라지신 분은 누구예요?”
강사의 손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센터를 배경으로 한 가장 소란스러운 스캔들의 주인공 최태훈의 자리였다. 가이드는 모두 그 주인공의 이름을 알았지만 차마 그걸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묘한 눈이 됐다.
김권석은 텅 빈 최태훈의 자리 위에 커피를 올려두며 꽤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슬쩍 내뺄 사람으로는 안 보였는데, 싶어서다.
물론 도망치기는커녕 강사의 바로 뒤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최태훈은 방금 언급된 곳이 제 자리임을 직감하며 고개를 떨궜다. 낭랑한 목소리를 한 강사의 말이 이어졌다.
“자. 다들 식사는 맛있게 하고 오셨을 거고……. 잠도 깰 겸 잡담이나 좀 할까요. 혹시 여기서 페어와 교제 중인 분?”
지관영은 끌어안고 있던 최태훈의 손을 살짝 들게 했다. 새빨갛게 익은 가이드는 그런 제 페어를 소리 나지 않게 때렸다.
“생각보다는 적네요. 제가 저번 주에 갔던 저쪽 경기도 분원 쪽은 딱 두 분 빼고 대부분이 사귀거나 결혼하셨더라고요. 자, 그럼 교제 중인 분들에게 한 가지 질문. 혹시 이런 고민해 보신 적 없을까요.”
강의를 듣는 가이드들이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지관영은 그 낯선 이들의 웃음소리와 빠르게 뛰는 제 가이드의 심장박동이 섞이는 게 퍽 듣기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건 그가 완전한 타인의 행복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첫 순간이었다.
“‘아, 저 사람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그냥 내가 가이드라서 좋아하는 게 아닐까?’”
“…….”
이제껏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던져 왔을 것이 분명할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상투적인 질문에 강당 안은 순식간에 숨죽인 듯 조용해졌다.
“휴우. 분위기 살벌해졌네요. 여러분, 저도 가이드예요! 가이드라고요!”
지관영은 강사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제 품에 안긴 최태훈의 얼굴선을 손끝으로 그렸다. 이 공간에 숨어든 유일한 에스퍼인 그는, 저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제 페어가 어떤 눈이 되었는지 분명히 보았다. 감추고 있던 깊숙한 비밀을 들킨 것도 같고, 무언가 철렁 내려앉은 것도 같은 낯선 표정이 최태훈의 얼굴을 확 사로잡았다가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췄다.
“이 싸한 분위기는 다들 어떻게든 한 번쯤 고민해 보신 문제라는 거겠죠. 그쵸?”
‘다들 어떻게든 한 번쯤은.’
지관영은 그 표현을 곱씹었다. 강사의 질문은 에스퍼인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이다. 아니, 애초에 떠올릴 수조차 없는 것이기도 했다.
최태훈이 나를 좋아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내가 그저 에스퍼라서 좋아하는 걸까?
그에게 그런 자문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최태훈은 아귀가 비틀린 채 움직이며 하루하루 그 예리함이 무뎌지던 머릿속 무언가를 정확하게 들어맞게 해 줄 유일한 존재였고, 저는 그것에 기꺼이 제 목숨을 맡겼다.
정말 돌이켜보면 이상할 정도로…… 정말 너무나 기꺼이.
하지만 최태훈은 다를 거다. 최태훈은 강사가 말한 그 ‘한 번’을 지금 겪고 있을까? 지관영은 저를 바라보지 않는 가이드를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자. 여기서 어떤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 드릴게요.”
숨죽인 강당 안에는 강사의 맑은 목소리만이 이어졌다.
“이 사람은 가이드인데요. 어떤 한 에스퍼를 만나서 그와 높은 매칭률을 이루고 페어가 됩니다. 여기 계신 많은 분처럼 그와 연인이 되고요. 결혼까지 했답니다. 아, 그런데 이를 어쩌죠. 결혼한 지 딱 1년 만에 그 페어의 매칭률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뚝뚝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
“센터에서는 말합니다. 아무래도 새 가이드를 매칭해야겠다고요. 물론, 이건 정말 논문에나 실릴 정도로 희귀한 케이스였답니다.”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암막 뒤에 숨어있는 최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관영은 그런 제 가이드의 반응을 무엇 하나 빠지지 않고 샅샅이 눈에 담는 중이다.
“그 페어는, 아니 부부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소위 말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던 콩깍지가 벗겨진 상황 아녜요, 이거.”
밖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가이드들은 지금 제 페어와 연인이든, 아니든 마치 자기 일처럼 동요하는 중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이드인 이상 언제고 겪을지 모를 이야기라는 불안감이 싹텄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자칫 무겁게 변하던 분위기를 완전히 다른 쪽으로 환기한 건 사뭇 진지해졌던 강사의 목소리였다.
“쨘! 사실 이건 저와 제 남편 이야기랍니다!”
최태훈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강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까지 했다.
“제 남편은 자기 가이드 만나러 갈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끔찍한 얼굴을 하고는 센터로 가요. 진짜 누가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은 얼굴인데요.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저처럼 예쁜 부인을 두고 산만한 덩치에 배 나오고 수염 난 아저씨랑 종일 붙어 있는 게 너무 싫대요. 포옹할 때마다 소름까지 돋는다고 그래요.”
“하하하!”
“사실, 이후에 한 매칭 테스트에서 제일 높은 수치는 어떤 여자분이었지만…… 남편이 의리를 지킨다며 그건 죽어도 싫다고 했다네요. 귀엽지 않아요? 뭐 저야 좋지만요. 솔직히 여자는 좀 그렇잖아요. 그쵸!”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웃음이 터졌다. 강사가 물을 몇 모금 삼키는 소리가 났다. 보이지 않는 저쪽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맑게 강당을 울렸다.
“지금 만나는 에스퍼 분을 정말로 사랑하신다면요…… 한 번쯤 믿어보세요.”
“…….”
“우리가 그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된 것처럼, 그 사람들도 우릴 그렇게 사랑하는 중이니까.”
최태훈은 늘 궁금했었다.
대체 내가 왜 지관영, 저 사람을 마음에 담게 됐을까. 언제부터 그 사람을 눈으로 좇게 됐을까. 그런데 암막 너머의 청량한 목소리는 그것에 대한 답을 아주 간단하게 내어주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러고 보니 참 그 말이 맞았다. 가이드가 에스퍼의 목숨줄을 붙잡고 있는 것이 일종의 권력이라고 한다면, 가이드의 마음을 붙잡게 된 에스퍼가 가지게 된 건 언제고 끊어질지 모르는 에스퍼의 애정을 갈구하는 절박함이다.
그건 에스퍼는 절대로 알 수 없는 가이드만의 비밀이다.
가이드는 저도 모르게 간지러운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는 사내를 가장 먼저 눈에 담았다. 그러자 사내는 그 시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눈을 곱게 휘었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얼굴이 조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부드럽게 부딪히는 입술은 마치 아이들의 장난처럼 풋내났지만, 대신 간간이 숨이 떨어질 때마다 서로의 시선을 섞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지관영은 제 가이드의 콧잔등에 작게 입 맞추더니 아직도 붉은 기가 남아 있는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나도 산만한 덩치에 배 나오고 수염 난 아저씨는 사양이니까, 좀 봐 줘. 최태훈.
가이드의 입에서 조금은 큰 웃음이 터졌다.
태훈은 제가 그 소리를 내고도 놀라 얼른 입을 눌렀지만, 자꾸 새어 나오는 작은 키득거림을 막긴 어렵다. 지관영은 그 아슬아슬한 웃음이 못내 반갑다는 양 태훈의 손을 밀어내고 그 위를 살짝 벌어진 제 입으로 덮쳤다.
말랑한 혀가 서로 얽히고 단 한 번의 숨을 놓치기도 아깝다는 듯 깊어졌다. 그건 이제껏 했던 그 어떤 입맞춤보다 더 달았다. 가이드는 제 허리를 끌어안는 에스퍼의 목을 손으로 당기며 모양 좋은 귀의 말랑하고 부드러운 부분을 쓸었다.
그때였다.
‘이 공간에서 존재해선 안 될’ 두 번째 소리가 최태훈의 귀에 들어온 것은.
“…….”
“…….”
“세상에. 휴대폰 어떤 분 거예요?”
정말이지 지관영 그의 성격처럼 지극히도 건조한 벨소리였다.
최태훈은 너무나 익숙한 진동과 울림에 완전히 석상처럼 굳었다. 지관영 역시 그답지 않게 놀라서 몇 초간 모든 행동을 멈췄음은 물론이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안타깝게도 지관영은 그 말들을 무엇 하나 빠짐없이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야?’, ‘저쪽 아냐?’.
에스퍼는 조용히 얇은 카디건 주머니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매니저’. 정갈하게 떠오른 세 글자가 보였다. 그걸 확인함과 동시에 곧바로 전원을 꺼 버린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최태훈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얼어붙어 있고, 강당 여기저기는 여전히 숙덕거림으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소리의 발신지를 찾아 이 암막 근처로 가까이 오는 인기척은…….
지관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꽉 감았다가 떴다.
“……헉.”
누군가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여러 사람의 말소리가 실로 단번에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강당을 완전한 침묵으로 이끈 에스퍼는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에스퍼는 그 근사함으로 익히 잘 알려진 미소를 걸고 가볍게 묵례했다. 하지만 그 인사를 받아줄 만한 상태인 사람은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청산유수처럼 말을 잇던 강사조차 당황한 얼굴로 사내를 멍하게 보고 있을 뿐이다.
살벌할 정도의 침묵 속에서 엊그제 한 드라마에서 방금 뛰쳐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한 대한민국 최고의 톱스타의 입이 열렸다.
“유익한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알음알음 ‘에스퍼 지관영’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을 들은 가이드마저 넋을 놓을 만한 목소리였다. 지관영은 느긋한 웃음을 지은 채 공손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그는 에스퍼 지관영이 아니다.
지금 그 모습처럼 배우 지관영일 뿐이다.
“조금은 부적합한 상황에서 인사드리게 됐습니다. 이럴 의도는 없었는데요. 휴대폰을 끈다는 걸 깜박했습니다.”
“……어, 어어. 지, 관영?”
“하하. 네.”
산전수전 다 겪은 강사의 입에서 더듬더듬 떨어진 질문에 지관영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말씀 방해한 점 정말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후우…… 네. 조용히, 정말 아주 조용히 나가겠습니다.”
“……네에…….”
에스퍼의 팔 한쪽은 묘하게도 여전히 암막 뒤에 있다.
절대로 끌려 나오지 않겠다는 듯 버티며 저를 인정사정없이 때리는 한 사내 때문이다. 지관영은 웃는 낯을 한 채로 최태훈을 질질 끌고 나왔다. 아무리 전력을 다한다고 한들, 에스퍼인 그에게는 별거 아닌 버둥거림일 뿐이다.
암막 뒤에서 ‘그 톱스타 지관영’과 함께 있었던 누군가가 드러나는 순간, 어디선가 ‘커허억’ 하는 소리가 났다. 최태훈은 그게 귀에 들어오자마자 마치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가이드의 얼굴은 지금 붉어지다 못해 완전히 터질 지경으로 새빨갛게 익은 채다.
“아 그리고.”
에스퍼는 생각났다는 듯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뒤에서 듣는데, 정말로 훌륭한 강연이었습니다. 수고하세요.”
* * *
“최태훈.”
“…….”
“최태훈.”
“…….”
“태훈아.”
지관영이 그 누구든 단박에 홀릴 목소리로 부르든 말든, 이불을 뒤집어쓰고 등을 돌려버린 가이드는 대답이 없다. 최태훈은 지금 교육에서 돌아온 후 식사도 거르고 두 시간째 이 상태다.
늘 어른스러운 모습만 보이던 태훈의 행동이라고 하기엔 솔직히 너무 애 같은 반응이라, 사실 처음에는 좀 웃으며 달래면 나오겠거니 생각했던 에스퍼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이드는 이불 위로 둥글게 올라온 몸을 살살 쓰다듬어도 마치 잠든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지관영은 지금 제 연인이 잠들지 않은 상태라는 것쯤은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었다. 제 말이 들릴 때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달라지는 것만 봐도 뻔했다.
“거기 강사가 나중에 뭐라고 했나?”
“…….”
“너 점심도 안 먹었잖아. 저녁은.”
“…….”
정말이지 별 꼴같잖은 다정한 목소리를 내는 스스로가 우스운 관영이다. 하지만 그런 꼬인 생각과는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내용은 무엇 하나 부드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직한 문장들은 누가 들어도 여섯 살이나 어린 연인의 얼어붙은 마음을 달래는 애정이 가득했다.
지관영은 결국 방법을 달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참 별별 짓을 다 한다 싶지만 다른 뾰족한 수가 없었다.
“태훈아, 나 두 시간 잤어.”
아니나 다를까, 처음으로 둥근 이불의 형태가 움찔했다.
이불을 둘러쓰고 있는 가이드는 이 무서울 것 없는 남자의 ‘약한 척’이 통하는 유일한 사람이자, 에스퍼 그가 약한 속내를 드러내는 절대적인 신이다.
지금, 교활한 에스퍼는 그것을 이용하는 중이다.
“같이 촬영하는 노친네 하나가 난동 부려서 목 비틀고 싶은 거 정말 종일 참았고.”
“…….”
“센터장이 나 앉혀두고 ‘세상에 자기밖에 모를 것 같은 남자가 이 듣는 귀 많은 데에서 큰 소리 내며 사랑싸움했다니까 너무 예쁘다’ 같은 헛소리를 해도 아무 말 안 하고 나왔어.”
“……으.”
이불 안에서 몸을 움츠리며 한숨 쉬는 소리가 들렸다. 지관영은 이미 제 품에 떨어진 연인을 향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이제 딱 네 시간 남았는데, 언제쯤 일어날래.”
잔뜩 화가 났다는 걸 알리려고 애쓰듯 거칠게 일어나는 모습마저 반가웠다. 지관영은 드디어 제 눈에 온전히 들어온 페어를 보며 희미하게 눈을 접었다. 팔짱을 낀 채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웃는 모습은 제법 느긋하게도 보여서, 가이드는 울컥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제가 뭐랬습니까!”
“관사로 가라고 했었지.”
“그런데 왜 안 가셨어요!”
“너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재깍재깍 튀어나온 대답은 한없이 달았다.
결국 최태훈은 입만 달싹이다가 ‘아, 씨이…….’ 같은 답지 않은 소릴 내며 고개를 푹 떨구어 버렸다.
솔직히 제 에스퍼에게 꽤 화났던 가이드다.
단상에서 내려가 주춤주춤 제 빈자리에 앉을 때의 기분은, 다시 생각하기도 싫다. 마지막까지 나긋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나가던 에스퍼가 떠나고, 그 거대한 강당에서 약 5초간 흘렀던 정적을 다시 생각할 때면 진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강사는 애써 분위기를 다시 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녀 역시도 약간 멍한 상태였는지, 거의 한 시간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넋이 나가 있다 한참 뒤에야 겨우 분위기가 진정됐다.
“진짜…… 저 오늘 창피해서 온종일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목 아팠겠네. 주물러 줘?”
그 말의 형태는 물음이었지만 지관영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태훈의 곁으로 옮겨 앉아 가이드를 이불째 폭 끌어안고는 말마따나 완전히 딱딱하게 굳은 뒷목을 기분 좋을 정도의 세기로 주물렀다.
최태훈은 속으로 결심했다.
‘절대로 쉽게 넘어가지 않아야지. 이런 걸로 바로 휙 괜찮다고 하면 이 사람은 또 그럴 사람이야!’
하지만 저를 뒤로 안은 채로 간간이 귓가에 입을 맞추며 뭉친 목이며 어깨를 마사지해 주는 손은 솔직히 꽤 좋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숙이지 않는 사내가 제게만 극진하다는 건 참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거였다.
“……저 관영 씨 때문에 이상한 별명도 붙었습니다.”
“별명? 힘 빼고 그냥 기대.”
진작 이렇게 있으면 좀 좋았을 것을.
지관영은 저를 한참을 쩔쩔매게 만든 가이드의 늘씬한 근육을 손으로 덧그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이불 사이사이로 보이는 잘 뻗은 팔과 다리를 볼 때면, 최태훈이 농구공을 다루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왜. 이상한 건가?
“예.”
“가이드끼리 그렇게 별명 붙여서 말하는 걸 센터에서 그냥 내버려 둬?”
“이상하기는 한데, 틀린 말은…… 아니어서요.”
더욱 선문답 같아진 대화에 에스퍼의 눈썹이 휘었다. 최태훈은 그런 지관영을 빤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에스퍼의 머리를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덕분에 콩, 하고 작게 이마가 부딪쳤다.
“……최태훈?”
“지관영 남친.”
“뭐?”
“지관영 남친이 제 별명이랍니다. 어디 창피해서 살겠습니까.”
에스퍼는 마치 이해되지 않은 말을 들은 로봇처럼 제가 들은 다섯 글자를 천천히 곱씹었다. 지관영…… 남친?
태훈은 그런 제 에스퍼를 보며 조금 머쓱한 얼굴이 됐다. 이름마저 흔하지 않은 저 사내의 뒤에 따라올 단어로 ‘남친’은 한없이 가볍기만 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번에 놀랄 차례는 가이드였다. 최태훈은 갑자기 저를 꽉 끌어안은 채 묘하게 들썩이는 사내의 어깨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관영 씨?”
“큭, 하핫, 아, 뭐라고? ‘지관영 남친’? 최태훈 네 별명이 그거라고?”
가이드는 대답 대신 멍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머릿속에서 모든 생각과 단어가 완전히 지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관영이 웃었다.
그것도 평소처럼 옅게 눈을 휘거나 낮게 웃는 게 아니라, 정말로 완전히 ‘웃었다’. 최태훈은 완벽한 사내가 저를 끌어안은 채로 눈을 접고 정말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왠지 입이 마르고 머리가 띵해졌다.
세상에, 저 모습을 하고 이렇게 눈을 휘는 건 진짜 정도를 넘은 거다. 저건, 드라마나 영화에서 봤던 밝은 표정들은 감히 가져다 댈 수도 없었다. 배우 지관영도, 에스퍼 지관영도 아닌 그냥 ‘지관영’은 저렇게 웃는구나.
최태훈은 왠지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 그래. 그러네. ‘남친’. 네가 내 ‘남친’인 거네. 미치겠다, 진짜.”
“이상하지 않습니까? 기분 나빠 하실 줄 알았는데.”
“내가 왜 이걸 기분 나빠 하겠어. 요새 들었던 머저리 같은 말이랑은 비교도 안 돼.”
“……지관영 남친이?”
에스퍼는 태훈의 물음에 다시 한 번 작게 웃음이 터졌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활짝 접히는 미소는 정말로 근사하고 또 한편으로는 참 예뻤다. 최태훈은 이제껏 지관영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던 그 사랑스러운 단어를 떠올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연인을 멍하게 쳐다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처럼, 자꾸 생각이 뚝뚝 끊겼다.
관영은 그런 태훈의 머리칼을 가볍게 쓸어 올렸다.
요새 손질하지 않아 조금 길어진 앞머리가 에스퍼의 손가락을 스치며 동그란 이마가 드러났다. 지관영은 최태훈이 지금처럼 앞머리를 내린 쪽도 좋지만, 아무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보니 이렇게 완전히 얼굴을 드러낸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최태훈 너 그러고 보니까 욕도 하던데.”
“제가 언제 말입니까?”
“‘진짜 망했다. 아, 씨발’.”
거친 단어는 얼핏 들으면 그게 욕인 줄도 모르게 듣기 좋은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태훈은 턱을 긁적였다.
“바른 생활 가이드가 욕도 하는구나 싶었지.”
“저도 지관영 씨가 욕하는 거 방금 처음 들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렸다는 듯 서로의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 달짝지근한 키스였다. 그 덕에 태훈은 조금은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관영 씨, 잠 두 시간밖에 안 주무셨다면서요!”
두 시간 자고 온 건 맞지만, 지관영은 애초에 많은 수면이 필요 없다. ‘힘’을 쓴 것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일상생활이나 다름없는 촬영에 그 정도 휴식이면 충분했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를 구슬리기 위해 댔던 핑계의 등장에 회피하듯 입술을 부딪쳤다. 하지만 최태훈은 지금 굉장히 심각한 얼굴이다.
“괜찮아.”
“안 괜찮습니다!”
“그러는 넌, 식사해야지.”
“저야말로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각자의 고집과 주관이 몹시 뚜렷한 연인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다. 약 1분의 대치 끝에, 결국 지관영과 최태훈은 나란히 씻고 식사를 한 다음에 눈을 붙이기로 합의했다.
지관영은 빨리 씻자며 무작정 저를 잡아끄는 무드 없는 ‘남친’을 보며 잠시 섹스를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작게 웃음을 흘려버렸다.
* * *
최태훈에게 드디어 ‘가이드 친구’가 생겼다.
교육에서 만났던 김권석이다. 그는 서른한 살로, 태훈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장난기 많은 그는 태훈을 센터에서 다시 보자마자 대번에 낄낄대고 웃으면서 놀려댔지만, 늘 연구원들과만 지내던 태훈에게 김권석 같은 존재는 정말 필요한 것이었다.
“권석 형은 센터에서 일하신다고요?”
“어엉. 에스퍼 훈련장 정비.”
“와. 엄청 복잡할 것 같습니다. 대단하시네요. 전 요새 가이드 교육 쪽 훈련받고 있는데 아직은 뭐가 뭔지…….”
“머리 똘똘하나 봐? 센터하고도 친하고. 어휴, 난 그건 도저히 좀이 쑤셔서.”
김권석은 정말로 식사를 맛있게 한다. 태훈은 저와 같은 것을 먹고 있음에도 정말 세상에서 이보다 더 맛있는 게 없다는 듯이 밥을 먹는 권석을 보며 왠지 제가 다 흐뭇한 기분이 됐다.
센터 내 식당에 나란히 앉은 두 가이드는 한동안 조용히 서로의 식사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권석이 입을 열었다.
“야. 나 참고로 A섹션 담당이다.”
“예?”
태훈은 그 문장의 속내를 다 파악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만 갸우뚱했다. 그러자 권석의 입가에 씨익 하고 조금은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그쪽 에스퍼가 A-1 구역 걸레짝으로 만들어 뒀을 때 울면서 야근했었지, 아암?”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세상에, 난 그래서 지관영 진짜 미친 또라인 줄 알았는데, 그때 보니까 제법 깍듯하긴 하더라? 얼굴도 요만~하고.”
최태훈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그때’의 이야기가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등장했다. 태훈은 시선을 제가 시킨 제육덮밥에 집중한 채 김권석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아니다. 세상에 천 쪼가리 하나 너머에 몇백 명 앉혀두고 어둡고, 으슥하고, 은밀~한 곳에서 자기 가이드랑 이렇고 저런 걸 하려면 보통은 아닌…….”
“형!”
“하하핫!”
뻣뻣한 동생을 놀려먹는 것에 재미를 붙인 듯 잠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이어지는 권석의 장난에, 태훈은 결국 얼굴을 벌겋게 붉힌 채로 볼멘소리를 냈다.
김권석은 그런 태훈의 반응이 재밌다는 듯 호탕하게 웃다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여전히 웃음기가 남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야. 그래도 그게 좋은 거다, 인마.”
“뭐가 말입니까.”
“네 페어 에스퍼랑 죽고 못 사는 거. 사이좋은 거 말야.”
“그건 형도 그렇잖습니까.”
“아암. 그렇지. 난 우리 아가씨 없인 못 살지.”
최태훈은 김권석이 오늘도 휴대폰을 꺼내 들고 자랑한 귀여운 인상의 여자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말이다. 알고 보면 생각보다 서로 죽지 못해 같이 붙어 있는 페어들도 있단 거 아니냐.”
“죽지 못해……요?”
갑작스레 등장한 제법 과격한 단어에 태훈은 살짝 자신 없이 되물었다. 김권석은 살짝 한숨 쉬듯 말을 이어갔다.
“그날 너랑 지관영 부러워하는 가이드 꽤 많았어. 넌 쪽팔리다고 고개 한 번 안 들어서 모르겠다만, 말 좀 섞어 보겠다고 네 주변 얼쩡거리던 녀석들도 있었고.”
“……아.”
“그중 내가 아는 몇 명은, 매칭률 때문에 한 달에 두어 번 날짜 정해 두고 만나고 있고. 또 어떤 애들은 혼자 지 에스퍼 좋아해서 목매고 있지. 솔직히 페어란 게 웬만해선 가까울 수밖에 없는 거라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닌 거거든.”
후식으로 나온 작은 요구르트 하나를 뚝딱 비워 내며 덧붙이는 문장은 담담했지만 그 울림이 남달랐다. 관사로 돌아오는 길에 최태훈은 김권석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매칭이 될 정도의 페어라면 기본적으로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호감을 품기 쉬운 상황이 된다. 그건 에스퍼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스퍼는 능력을 사용할수록 극도로 예민해지고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되는 자신의 감각을 가이드를 통해서만 안정시킬 수 있다.
‘완벽한 평온’.
에스퍼가 가이드와 접촉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관련 책자들에서 흔히 이렇게 표현된다. 덕분에 최태훈은 가끔 지관영이 저와 닿았을 때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죽지 못해 붙어있는다’…….”
최태훈은 김권석의 말을 입으로 곱씹었다.
문득 얼마 전 이태원에서 저를 붙잡았던 에스퍼가 떠오른 건, 그가 제 가이드와 같이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창백한 표정이었던 탓이다. 오연의 동생이자 10년 전 가이드 살인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남자는 심지어 자신의 가이드를 직접 해쳤을지도 몰랐다.
그때, 온종일 조금은 꿉꿉했던 하늘에서 한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은 무거운 생각에 잠긴 채 걷던 태훈은 관사 건물로 발걸음을 바삐 했다. 하지만 워낙 갑자기 몰아친 비인 터라 아예 젖지 않는 건 무리였다.
찝찝한 것을 가장 싫어하는 가이드는 지문을 찍고 들어온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습하게 달라붙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다가, 제 관사 문을 완전히 열고 들어가자마자 현관에서부터 웃옷을 벗어 던졌다.
커다란 창문 밖에서는 이제 폭풍우와 함께 천둥소리마저 났다. 태훈은 요란하게 번쩍이는 번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와. 무슨 날씨가 갑자기 이렇게.”
가이드는 곧바로 욕실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이곳은 ‘혼자인 것이 당연한’ 공간이었기에 집에서처럼 제 동생들의 귀가 유무를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최태훈은 성큼성큼 걷던 발을 뚝 멈춘 채다.
그는 방금 제 거실 한가운데 서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센터의 모든 보안기술이 결집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가이드 관사는 철저하게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다.
페어 에스퍼가 아닌 이상 마음대로 드나들 수도 없고, 외부인의 경우 가이드의 직계 가족이 아니라면 센터의 허가 없이 바리케이드조차 넘지 못한다. 직계 가족이라 해도 관사 내에 해당 가이드가 있고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발 디딜 수 없는 곳이 바로 가이드의 이 ‘개인 공간’이다.
지관영마저도 이곳에 올 때마다 홍채 인식과 지문 확인 모두를 거친다. 에스퍼가 언젠가 지나가듯 이곳의 콘크리트는 그 내부마저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멀리 보려고’ 시도하면 눈이 아프다고 말한 적 있을 정도로, 집요하게 대對 에스퍼의 공간으로 설계된 곳이 여기다.
그런데 지금, 그런 최태훈의 관사 안에 누군가 있다.
가이드는 머리털 끝까지 쭈뼛 선 것 같은 소름을 누르며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던 태훈은 제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그렸다.
버튼 하나.
버튼 단 하나면 센터의 핫라인으로 연결된다. 가이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서 있는 ‘누군가’는 그늘 속에 그 얼굴을 감추고 있다.
번개가 내리꽂혔다. 이 섬광의 몇 초 뒤에는 하늘을 찢을 듯한 소리가 따라온다. 잠시 관사 내부가 환해졌던 순간, 가이드는 자신의 관사 안에 서 있는 침입자의 얼굴을 똑똑히 확인했다.
그리고 직감했다. 제가 저 사내보다 먼저 핫라인의 버튼을 누를 방법은 없었다. 귀를 울리는 천둥이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와 뒤섞였다. 태훈과 눈이 마주친 침입자가 천천히 태훈의 쪽으로 걸어 나왔다.
“……실례인 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살짝 갈라진 채 쉬어 있다. 지극히 예의 바른 문장이었지만, 가이드는 그마저도 위협이라는 것처럼 한 걸음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내는 그것을 이해한다는 듯 쓰게 웃으며 제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최태훈은 살짝 풀린 다리를 휘청이기까지 하면서 센터와 연결된 인터폰 쪽으로 달려갔다.
사내는 그런 태훈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그럴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센터 상황실 ○○○입니다. 가이드 최태훈, 무슨 일입니까?]
사내는 겁에 질린 시선을 제게서 떼지 않은 채로 인터폰을 움켜쥔 가이드를 가만히 바라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가 먼저 하고 싶었던 말은 그저 이게 다였다.
“그때는…… 죄송했습니다.”
가이드의 손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 망설임도 잠시, 최태훈은 그 사과에 화답하는 것 대신에 인터폰에 대고 빠르게 문장을 토해내는 걸 택했다.
“관사 내부에 침입자가 있습니다. ‘그 에스퍼’입니다. ……오진우.”
* * *
탁자 하나가 솟구치더니 흠집 하나 없던 연구실 벽에 그대로 내리 찍혔다. 그건 어찌나 살벌한 기세였는지, 제 에스퍼를 말리려던 가이드의 입이 조개처럼 꾹 닫혔을 정도다.
최태훈은 눈만 깜박이며 지관영의 눈치를 봤다.
어두운 셔츠와 비슷한 색감의 면바지를 입은 에스퍼의 모습은 여느 때처럼 드라마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그 표현은 정확했다. 에스퍼는 정말 촬영 도중에 다른 걸 다 내던지고 센터로 곧바로 달려온 차였기 때문이다.
“센터 기술력의 집약.”
“…….”
“최고의 보안?”
“지관영 씨. 저희도 지금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이미현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못하고 끊겼다. 지관영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의 뒤에 있던 거대한 기기들이 마치 얇게 저며지듯이 잘려나갔다. 순간적으로 몸을 튕겨 그것을 피했던 미현은, 마치 섬세한 의사가 수술한 것처럼 완전히 도려낸 쇳덩이들을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괴물의 진화를 보는 건 때로는 굉장한 무력감을 주는 일이기도 했다.
지관영은 힘의 컨트롤 자체가 달라졌다. 몇 달 전 강남 사건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넘치는 힘을 말 그대로 대상을 난도질하고 으스러뜨리는 것으로 사용했던 그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흥분한 상태에도 극한의 정교함을 잃지 않는다. 나날이 힘을 완벽에 가깝게 제어하게 된 거다. 덕분에 미현은 저도 몰래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완전히 분해된 기계가 주는 경고는 단순하지만 그만큼 강력했다.
저것이 아주 조금만 틀어졌더라도 그 대상이 제가 되었으리란 사실을, 그녀는 잘 안다. 연구실 안은 냉랭한 침묵으로 가득 찼다.
한편, 지관영은 무슨 짓을 해도 풀리지 않는 분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대한 기기들의 내부를 눈에 보이는 대로 모두 헤집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완전히 쪼개고, 자르고, 부쉈는데도 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고철덩어리들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을 뿐이다.
‘만약, 최태훈에게.’
그 미완성된 가정 한 줄만으로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기가 가시는 기분인 그다. 지관영은 제 연인의 관사에 처음 갔을 때 그곳의 보안 체계를 조금은 귀찮다고까지 생각했던 자신을 떠올리곤 헛웃음을 쳤다. 본인의 생각이었지만 정말이지 찢어발기고 싶을 정도다.
“관영 씨. 저 정말 멀쩡합니다.”
“…….”
“오진우 그 사람, 저한테 딱 두 문장 말했습니다. ‘실례했다’라는 거랑, ‘미안하다’라는 거요.”
최태훈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런 가이드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스스로 감정이 제어가 안 되어서다. 지금 그는 목까지 벌겋게 변한 채로 마음을 다스리기 바쁘다. 태훈은 그런 연인의 상태가 뻔히 짚어져서, 그를 어떻게 달랠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큰 결심을 했다. 가이드의 손이 천천히 제 페어의 꽉 쥔 주먹을 감싼 거다.
그 행동은 별거 아닌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제껏 다른 이들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먼저 스킨십을 한 적 없는 태훈에게는 정말 엄청난 시도였다. 지관영은 그 따끈한 온기에 긴 한숨을 내쉬나 싶더니, 그 손을 고쳐 잡고는 단단히 힘을 주어 얽히게 했다.
덕분에 태훈은 처음에는 조금 낯부끄러운 기분이 되어 약간은 곤란하게 눈을 굴렸다. 하지만 그건 얼마 가지 않아 작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지금 지관영의 손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다.
맞닿은 손가락이 주는 힘에선 필사적인 느낌마저 든다. 세상에 무서울 것 하나 없는 사내가, 최태훈이 위험할 뻔했다는 이유 하나로 희미하게 떨 정도로 동요하고 있는 거다.
가이드는 그것에 조금 울컥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음을 가라앉히기 전까진 저와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얼어서, 기껏 할 수 있는 거라곤 제 손을 잡는 것뿐이라는 듯 매달리는 온기가 눈을 시리게 했다. 태훈은 작게 입술을 오므렸다가 떼면서 조금은 까칠한 그 위를 혀로 쓸었다.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남자도 이런 기분이었을지 궁금했다.
보는 사람들이며, 지금 서 있는 장소며, 상황이며 모든 걸 다 무시하고…… 당장 키스하고 싶은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최태훈은 뒤늦게 깨닫게 됐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금은 짙은 빛의 무언가가 슬금슬금 자라나 그 크기를 키우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이드는 에스퍼와는 기본 판형이 다른 사람이다.
최태훈은 입맞춤 대신 연인의 손을 저도 힘주어 잡았다. 그러자 에스퍼는 다시 한 번 심호흡하더니 이윽고 겨우 시선만 굴려 제 가이드를 눈에 담았다.
“준비됐습니다. 중앙홀로……. 후우, 오시죠.”
문을 열고 들어왔던 한 연구원의 시선이 엉망이 된 내부에 이르면서 작은 한숨이 더해졌다. 지관영은 그것을 쌩하니 무시하고 제 가이드를 욕심껏 잡은 채로 반 보 정도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뒤는 이미현이었다.
땅값 비싼 서울. 그리고 그 도심 한가운데 세워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에스퍼-가이드 국립연구센터.
최태훈은 가끔 궁금했었다.
에스퍼의 능력이 제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이런 노른자위 땅 한 덩어리 전체를 센터에 투자한다는 게 다른 기관과의 형평성에 맞는 건가? 대체 왜 센터의 ‘중앙홀’은 마치 허허벌판처럼 흰 대리석으로만 가득 차 있을까?
가이드의 이런 물음은 그 역사가 꽤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최태훈은 그 오랜 궁금증을 완전히 해소하고 있다.
지금 언제나 여유롭게 오가는 사람들만 있었던 널찍한 중앙홀에는 수백, 아니 수천 명에 달하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태훈은 직감적으로 그들이 모두 에스퍼임을 확신했다.
이유는 하나다.
그 홀 중앙, 투명한 감옥에 갇혀 있는 침입자 때문이다.
‘두 번째 측정 불가 에스퍼’. ‘1급 범죄자’. 그리고 ‘연구원 오연의 동생’. 몹시도 긴 설명이 따라오는 남자 오진우는 그 안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온갖 족쇄에 묶인 채 서 있다.
널찍한 홀 전체를 가득 채운 긴장감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선연하게 느껴졌다. 태훈은 그제야 이곳을 가득 메운 에스퍼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서 있음을 알게 됐다. 감옥을 중심으로 지그재그로 거대한 원형을 이룬 그들은, 금방이라도 제힘을 발휘할 듯 빈틈없는 얼굴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 익히 잘 알고 있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하지만 최태훈은 그들이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이 사람을 진심으로 해하기 위한 준비가 되어있는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최태훈은 제가 정말로 운 좋게 무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왠지 뒷목이 뻣뻣해졌다. 홀 중앙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사내는, 이 수많은 에스퍼가 전력으로 날을 세우고 언제든 전투에 임할 준비를 해야 할 상대인 거다. 그리고 또, 정말로 새삼스럽게 다시 깨닫게 된 건…….
“필요 없습니다. 치우세요.”
지관영은 제 주변에 보호대를 세우기 시작한 연구원을 향해 짤막하게 말했다. 그건 정말로 오만한 확신에 차 있는 목소리였지만, 그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빽빽한 사람들을 눈으로 훑던 태훈은, 얼마 안 가 저처럼 에스퍼가 아닌 사람을 발견했다. 오연의 가이드인 박승원이었다. 그는 태훈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은 저도 슬쩍 머리를 숙이다가 사내의 옆에 있는 에스퍼를 그제야 눈에 담았다.
오연이었다. 그는 최태훈의 시선을 눈치채고 뒤늦게 시선을 돌렸다. 제법 떨어져 있는 먼 거리라 서로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태훈은 저 무뚝뚝해 보이는 시선에 담긴 의미를 잘 안다. 오연은 최태훈에게 센터의 연구원이자 에스퍼기 전에 열일곱 살 때부터 봐 온 형이다.
왠지 모르게 단호한 느낌의 구두 굽 소리가 났다. 센터장 권다희였다. 그녀는 오진우를 정면으로 볼 수 있는 일렬로 된 자리 중앙에 앉았다. 아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에스퍼의 의미를 모르는 태훈이다.
한편, 오연은 센터장이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하고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
십 년.
십 년 만에 보는 동생은 제 기억 속의 모습보다 훨씬 날카로운 인상으로 변했다. 오연은 저보다 일곱 살이나 적었던 어린 동생을 꽤 끔찍이 아꼈다.
그의 머릿속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동생의 모습은 스무 살의 숫된 느낌이 가득한, 청년이라기보다는 소년에 가까운 느낌의 어린 청년이었다.
하지만 몇천 겹의 강화소재로 만들어진 에스퍼 전용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제 동생은 이제 서른 살이 됐다. 누가 봐도 완연한 사내로 자란 몸은 살짝 야윈 듯해도 완벽하게 다듬어진 근육을 어렵지 않게 덧그리게 했다. 오연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동생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며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오진우입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답이었다. 오연은 묵묵히 질문을 이어갔다.
“십 년 전 센터 소속 가이드 김가하 살해사건의 주요 용의자가 본인 맞습니까?”
“……예.”
최태훈은 센터장을 중심으로 오진우의 정면에 횡으로 줄지어 앉아있는 에스퍼가 시선이 마치 기계처럼 그에게 붙어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그들의 눈은 마치 무언가를 파악하려는 듯 집요하게 보였다.
“가이드 관사 내부 침입, 그것도 특정 가이드의 관사를 어떻게 정확히 찾을 수 있었습니까?”
“조력자가 있습니다. 그가 기계를 조작하여 찾는 방법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게 누굽니까.”
“모릅니다. 단 한 번도 직접 만나 본 적 없습니다. 그저 정보를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오연은 잠시 질문을 멈추고 센터장이 앉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때, 홀의 벽면에 붙어 있는 전광판 위에 검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모두의 눈이 그 벽면으로 쏠렸다.
/ T /
가이드는 그제야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저 안에 갇혀 있는 사내가 센터의 모든 스캐너가 먹통이 되는 사람이라면 방법은 하나다. 그의 신체 언어와 목소리 톤, 고저 등 지능계 에스퍼들이 분석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실시간으로 직접 체크하여 그 진실 여부를 확인하는 거다. 이건 정말이지 저곳에 앉아있는 이들이 에스퍼기에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정보를 전달받는 과정에 대해 말하십시오.”
“……가이드 이한솔이 그 사람과 직접 접촉했습니다. 주로 네트워크의 암거래 시장을, 가끔은 암호화된 메일을 사용했습니다. 몇 번 정도는 직접 만난 것으로 압니다.”
“지금 가이드 이한솔은 어디 있습니까.”
“모릅니다. 저와 이한솔의 페어는 끝났습니다.”
오진우의 대답에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전광판 위에 다시 한 번 푸른 글자가 떠올랐다.
/ T /
오진우는 그 웅성거림을 들으며 묵묵히 말을 이었다.
“이한솔은 새로운 에스퍼를 가지겠다고 말한 후 완전히 자취를 감췄습니다.”
“새로운 에스퍼?
“지관영.”
“…….”
“지금 이한솔은, 지관영을 자신의 에스퍼로 노리고 있습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나른한 얼굴을 한 사내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가이드에게도 역시. 오연은 최태훈의 얼굴이 왠지 창백하게 보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T /
최태훈은 뚜렷하게 떠오른 글자에 저도 모르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말았다. 지관영은 제가 잡은 가이드의 손을 그대로 잡아끌어 꽉 힘이 들어간 손가락에 입 맞췄다.
“에스퍼를 빼앗는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일종의 주도권 싸움입니다.”
시종일관 담담한 얼굴이었던 에스퍼가 처음으로 동요했다.
오진우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가, 빛이 쏟아지고 있는 천장으로 시선을 옮겨 그 삼켰던 감정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의 손목에 감긴 육중한 쇳덩이가 절그럭대는 소리가 났다. 에스퍼는 몇 초간 그렇게 묵묵히 있다가, 아주 낮고 느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일정 매칭률을 넘어 페어로 엮였다는 건, 다시 말해 그 둘 사이에 무형의 유대가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
“이한솔은 페어가 가지고 있는 그 무형의 유대를 빼앗는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페어 가이드가 그 유대를 넘겨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걸 순순히 포기하는 가이드는……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십 년의 시간 동안 하나둘 알게 된 자신의 가이드 ‘이한솔’의 비밀들. 오진우는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게 처음이다. 이제껏 그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래서, 보통 가장 쉬운 방법을 사용합니다. 페어 가이드를 죽이고 그걸 차지하는 겁니다. 일종의 승계의식처럼요.”
가볍게 쓰인 단어 속에 담긴 한없이 거슬리는 내용에 지관영의 눈썹 하나가 꿈틀했다. 하지만 홀 안에 있는 에스퍼들의 동요는 그보다 더 격렬했다.
사실 이한솔이 에스퍼를 가로챌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은 이제껏 가장 마지막에나 꼽혔던 가설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뒤늦은 순서만큼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치부되기도 했다.
불특정 다수의 페어를 불안에 떨게 하는 진실보다야 에스퍼 오진우 개인의 범죄와 일탈로 여기며 그를 비난하는 눈먼 거짓 쪽이 더 마음 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십 년의 세월 동안 극악한 범죄자의 가족이라는 낙인 아래 살아오며 그것에 몇 번이고 생채기를 입었던 오연은 조금은 일렁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십 년 전 사건은 본인의 범행입니까?”
“……아닙니다. 아닌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대답하십시오!”
“모르겠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없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때 가하는…… 그렇게 되어있었고, 이한솔이 그 곁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였다고도 말했고요.”
/ T /
‘측정 불가’ 에스퍼의 입에서 흘러나온 담담한 인정은 진실을 알리는 푸른빛을 띠었다. 오진우의 앞에 일렬로 앉아있는 지능계 에스퍼들은 그들이 내린 결과에 조금은 심란한 표정이었다. 오연은 잠시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진실이 떠오른 전광판을 노려보았다.
이미현이 바톤을 이어받았다.
미현은 오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달랜 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대신 섰다. 오연은 몇 걸음 물러서서 팽팽하게 머리를 당기는 긴장감을 달랬다.
“사건 후 십 년간 가이드 이한솔과 페어를 이룬 이유는 뭐죠?”
“이한솔 외의 가이드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미현은 사내의 대답에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진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한솔이 새 에스퍼를 찾기 전까지는 그 어떤 가이드와도 매칭되지 않습니다.”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그 처절한 종속에 몇몇 이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오진우는 그 소리를 무엇 하나 빠짐없이 귀에 담으며 나직하게 덧붙였다. ‘확인해보셔도 좋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이어진 그 문장은 사실 꽤 위험한 것이었다. 사상 최강의 힘을 가진 측정 불가의 에스퍼로 꼽히는 범죄자와의 매칭 테스트를 허락할 가이드가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았다. 뚜벅뚜벅 걸어 나온 한 청년 때문이었다.
“……박승원.”
“괜찮아. 연아, 한 번 해 보자고. 저 말이 맞는지.”
박승원은 곱게 눈을 접어 웃으며 파리한 안색을 한 제 에스퍼를 다정하게 끌어안았다.
매칭 테스트는 상대 에스퍼와 신체를 가까이에 둔 상태에서 오랜 시간 진행되는 지루한 작업이다. 몇몇 연구원들이 신속하지만 절제된 움직임으로 테스트 기기를 옮기고 자리를 세팅했다. 승원은 처음으로 가까이에서 살피는 제 에스퍼의 동생이자 약점인 사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 자릿수의 매칭률이 나오기라도 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페어를 할 가이드가 없다’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단 1퍼센트라도 매칭이 된다면, 그 효과가 형편없을지언정 가이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박승원은 저와 오진우 사이를 엮는 기계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진을 이루어 포위하듯 서 있는 물리계 에스퍼를 제외한 이들은 본부에서 준비한 의자에 앉아 긴 시간을 보낼 준비를 시작했다. 그중에는 지관영과 최태훈 페어도 있었다.
관영은 딱딱하게 굳다 못해 얼어붙은 제 연인의 손가락 끝 마디마다 입술을 떨어트렸다. 평소 같았으면 밖에서 그런 짓을 한다며 펄쩍 뛰었을 최태훈은, 지금은 그럴 정신조차 없는지 그 부드러운 감촉에 살짝 울컥한 눈이 됐다.
모두가 지루한 시간을 예상했다.
그들이 아는 매칭률 테스트란 그런 거였다. 심지어는 단 한 번도 그런 긴 시간을 가져본 적 없는 지관영과 최태훈마저 뻣뻣하게 굳었던 몸의 긴장을 살짝 푼 채로 서로에게 가볍게 기댔다.
하지만 그런 느슨한 여유는 얼마 가지 못했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들었던 내용을 정리하며 각자 말을 꺼내고 있던 에스퍼의 목소리가 앞쪽부터 천천히 음소거 되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에스퍼 오진우와 가이드 박승원 사이에 있는 거대한 기계가 연결되는 순간, 매칭률을 알리는 패널 위로 곧바로 어떤 한 숫자가 커다랗게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태훈은 그것을 넋 놓은 듯 멍하게 바라보았다.
지관영과 함께 한 이후로 어렵잖게 바로 들을 수 있었던 익숙한 알림 신호음이 났다.
[SCORE ‘0’]
하지만 아직 숫자의 움직임은 끝나지 않았다.
페어 간의 유대를 알리는 화면은 마치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괴한 속도를 내보이며 쉴 새 없이 새로운 숫자들을 찍어나갔다. 회장에 있는 이들은 끝도 없이 변화하는 그 수치 앞에서 잠시 숨 쉬는 것마저 잊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기계는 자신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를 찍은 후에야 깜박, 깜박 검푸른 오류창을 띄웠다.
-999999.
그것이 에스퍼 오진우와 가이드 박승원 사이의 수치였다. 아무리 매칭률이 낮다 하더라도 각자 에스퍼와 가이드인 이상 한 자릿수 아래인 마이너스로 내려가는 건 이제껏 어디서도 들은 적 없는 일이다. 모두 경악에 빠져 할 말을 잃었다. 가장 멍한 얼굴이 된 건 오연이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저 수치의 의미를 모르는 이는 없다.
10프로, 아니 단 1프로라도 매칭되는 가이드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건, 그 끝은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단 하나다. 오진우는 지친 눈으로 그 숫자를 눈에 담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은 권태롭게도 들렸다.
“이한솔은…… 제게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찾아간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선생’이 살아있습니다.”
‘선생’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고 있는 제법 나이가 지긋한 연구원들에게서는 탄식이, 그 일상적인 단어에 담겨있는 이면을 모르는 젊은 축의 연구원들에게서는 의아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그들에게 첫 번째 측정 불가 에스퍼의 존재가 있다는 건 익숙한 것이지만 그의 다른 이름인 ‘선생’은 몹시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미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센터장에게로 돌렸다.
오진우를 향해 직접 질문을 던지지 않고 있는 센터장이지만, 이미현은 그녀의 부릅뜬 눈에 담긴 드문 혼란을 읽을 수 있었다. 미현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한 번 적시고는 대신 입을 열었다.
“‘선생’은 10년 전 사건 때 행방불명된 후 죽은 것으로 알려지지 않았나요? ……그 사람은 자신의 가이드를 직접 죽인 것으로 아는데요.”
최태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세상에, 하는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가이드는 저번 회동 때 자리를 뜨는 센터장에게 황급히 물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 선생이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센터장은 그것에 흐리게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었고, 그러므로 태훈은 그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없는 게 아닐까 희미하게 짐작만 했었다. 저런 뒷이야기가 있었을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자기 가이드를 직접 죽이는 에스퍼라니!
지관영 역시 그 말에는 미간을 찌푸리는 걸 숨기지 않고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이제까지 이어진 말로 미루어 보건대, 오진우 저 에스퍼가 이한솔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는 단 하나다.
이한솔 그가 오진우의 유일무이한 가이드였기 때문이다.
페어가 떨어지자마자 대책 없이 바로 이쪽으로 투항한 성정을 보아하니, 결코 그 관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 그의 지난 시간도 뻔히 그려졌다.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도 떨어지지 못하고 10년간 함께했다는 건, 에스퍼라는 존재가 얼마나 가이드에게 꼼짝할 수 없는 것인가를 증명하는 걸지도 모른다.
지관영은 느슨하게 고개를 젖히며 혀를 찼다.
“몇 번인가 이한솔이 선생과 통화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선생이 살아있는 건 분명합니다. 몇 달 전 강남에서 있었던 테러사건도 그가 실험하던 에스퍼였던 것으로 압니다.”
/ T /
오진우의 말에 맞잡은 태훈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가며 마음속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을 멍을 들게 한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걸 지켜보던 에스퍼 지관영의 입에서 작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제 가이드의 손을 부드럽게 풀면서 그 위를 간지럽게 쓸었다. 마치 안심하라는 듯한 다정한 태도였다. 지관영은 그렇게 근사하게 웃어 보인 뒤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레 자리를 뜨는 지관영의 행동에 태훈은 의아하고 불안한 표정을 하면서도 그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홀 안의 시선이 모두 그린 듯한 모습을 한 사내에게로 쏠렸다.
미현은 갑자기 저 예측 불가의 사내가 움직이는 까닭을 그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저 돌발행동의 의미를 짐작하거나 막을 수 있는 이 역시 존재치 않았다.
에스퍼는 오진우가 있는 홀의 중앙으로 곧장 걸어가다가 센터에서 마련한 투명한 감옥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연구원 몇 명은 그런 지관영에게 몇 걸음 떨어지라며 경고하려 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 말이 입 밖을 빠져나오기도 전에 검지를 튕기듯 까딱했다. 그러자 그 순간, ‘힘’을 차단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사용하여 몇천 겹으로 만들어진 감옥은 순식간에 싸한 소리를 내며 각 입자가 구슬처럼 변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건 마치 아이들이 만든 모래성을 부수듯 가벼운 손동작이었다.
어디에선가 참았던 숨을 내뱉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만들었던 가장 완벽에 가까웠던 감옥이 지관영에게는, 아니 ‘저 두 에스퍼’에게는 얼마나 무력한 것이었는가를 잔인할 정도로 선명하게 깨닫는 중이다. 지관영이 저 감옥을 해체할 수 있다면 오진우 역시 저 감옥을 해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힘과 힘이 나란히 만났다.
지관영은 느슨한 웃음을 건 채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예.”
“저쪽 연구원이 가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땐 솔직히 꽤 놀랐습니다. 대뜸 최태훈 붙잡고 시위할 땐 어디서 온 미친 새낀가 했었거든요.”
한없이 다정하고 온화해 보이는 어조로 쏟아진 문장에 담긴 가시는 퍽 날카로웠다. 센터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거의 지옥도로 몰았던 그날의 피로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고, 형제라는 단어가 낯설어진 이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물론, 최태훈은 제 에스퍼가 일부러 선택했을 게 분명한 그 악랄하기 그지없는 단어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모두를 놀라게 한 그의 행동은 그 뒤에 있었다.
지관영은 성큼성큼 오진우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그것에 어디선가 ‘어!’ 하고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태훈 역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에스퍼는 그런 모두의 반응 따위 모두 무시한 채로 오진우의 손발에 채워진 살벌할 정도로 커다란 족쇄를 가볍게 흔들더니, 살짝 눈썹을 휘며 물었다.
“이 웃긴 꼴이 될 줄 알면서 가이드도 없이 여기 온 이유는 뭡니까.”
웃긴 꼴. 지관영에게 오진우의 지금 모습은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진우는 잠시 말을 고르듯 입을 다물었다가 느리게 그것을 내뱉었다.
“……당신이 이한솔의 에스퍼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섭니다.”
“…….”
두 에스퍼 간의 대화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 따위는 없다.
지관영은 묵묵히 오진우를 바라보다가, 얼마 안 가 그의 뒤에 있는 전광판에 떠오른 글자를 보며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 F /
처음으로 등장한 거짓에 에스퍼가 술렁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지관영은 제가 확인한 결과가 전혀 불쾌하지 않은 듯했다. 아니, 오히려 이제껏 마음에 들지 않던 오진우 그가 조금은 나아졌다는 표정이 됐다.
“여전히 물러 터지셨습니다.”
이곳에서 가이드 최태훈만이 모르고 있는 그날의 진실에 대한 짓궂은 힌트가 흘러나왔다.
“그쪽 목숨줄 잡을 방법이나 고민해야 할 것 같은데요.”
“…….”
“이한솔인가 하는 가이드가 새 에스퍼를 찾기 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겨 죽으면, 이제 잘난 두 번째씨는 꼼짝없이 미쳐 죽는 거 아닙니까?”
오연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걸 눈치챈 건 그의 가이드인 박승원 뿐이다. 홀 안은 이제 완벽한 침묵으로 차 있다. 지관영은 그 적막 속에서 혼자 다시 한 번 흐린 웃음을 흘렸다.
저와 최태훈을 만나게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 가이드의 안쪽에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를 남긴 강남 테러사건마저 그들의 짓이라는 게 놀라울 정도다. 이제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가이드 이한솔’도 ‘선생’이라는 에스퍼도 언제든 제 가이드를 해칠 수 있는 적이다. 오진우 이자의 침입으로 이제껏 자각하지 못했던 위험성을 깨닫게 된 게 고맙기까지 했다. 어떻게 제 손에 떨어진 가이드인데, 아니 ‘최태훈’인데 그걸 머저리처럼 잃을 수 있었단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의 피가 차게 변하는 그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알려준 고마운 대상에게는 조금은 친절할 필요가 있다. 이건 지관영 그 나름의 배려이자 감사인사다. 에스퍼는 눈을 휜 채로 입을 열었다. 소리 없이 느리게 움직이는 입술은, 지관영과 코앞에서 마주 보고 있는 오진우만이 읽을 수 있는 문장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이번엔 ‘그걸’ 살려 둘 생각이 없습니다.
* * *
지금 지관영과 최태훈은 서로 페어로 엮인 이후로는 두 번째, 연인으로서는 첫 번째 싸움을 하고 있다.
“센터 따위 못 믿어, 절대.”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 그냥 차 안에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안 돼.”
최태훈은 한숨 섞인 소릴 내면서 밴의 시트에 머리를 쿵, 하고 찍었다. 허나 지관영은 그런 최태훈을 바라보며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시선을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운전석에 앉아서 백미러로 그걸 지켜보던 지관영의 매니저는 마치 제가 뭔가를 잘못한 사람인 양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제가 담당한 사내가 저런 얼굴과 말투를 하는 걸 처음 봤다.
“관영 씨.”
“…….”
“진짜, 좀. 제발요. 정말 꼼짝 않고 차에만 있겠습니다.”
“안 돼. 무조건 내 근처에 있어.”
“여기도 지관영 씨 근처입니다.”
에스퍼는 그 말엔 이제 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대꾸 대신 이미 끝까지 달달 외우고 있는 대본을 공연히 펼쳐 들었다. 그걸 본 최태훈은 다시 한 번 고개를 푹 숙이고는 거의 신음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그렇다. 지금 최태훈은 온종일 지관영과 붙어 있는 중이다.
그것도, 그의 드라마 촬영 현장까지!
“밖에 스태프분들에, 와, 저기 배우분들에…… 바쁘신 분들 가득인데. 뭣도 아닌 제가 저기 어떻게 끼어서 앉아있습니까?”
“너 모르는 사람 없어.”
“그렇겠죠! 인터넷에 사진 다 떴으니까!”
지금 지관영과 최태훈이 대립하는 이유는 하나다.
지관영은 무조건 최태훈에게 말 그대로 제 옆에 딱 달라붙어 있으라 주장하고 있고, 최태훈은 관사도 아니고 바로 근처의 차 안에 있겠다는데 뭐 어떠냐는 입장인 거다. 하지만 대체로 이런 싸움은 목소리 크고 고집 센 사람이 이기는 법이다.
십여 분 뒤 한 스태프가 밴의 창문을 두드리며 ‘관영 씨, 촬영 시작합니다.’라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가이드는 사내의 손에 이끌려 밴에서 질질 끌려 나왔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질질’.
“놓으십쇼! 아, 좀! 지관영 씨!”
“놓으면 어디 가려고. 차 안?”
현장 모두의 시선이 페어에게 쏠렸다.
지관영과 최태훈은 정말 엄청나게 눈에 띄었다. 187cm의 키에 골격 자체도 좋아서 연예계에서도 손꼽히는 장신으로 꼽히는 지관영과, 180cm에 농구며 각종 운동으로 잘 벌어진 보기 좋은 몸을 한 데다 유독 팔다리가 긴 최태훈은 웬만한 사람들의 시선 저만치 위에 있었다.
거기에 늘 현장에서 희미하게 눈을 접으며 깍듯한 단어만 입에 담던 여유롭기 짝이 없던 남자가 한껏 굳은 얼굴로 엄하게 말하는 모습이라니. 이건 진짜 다시 못 볼 명장면이었다.
설마하니 ‘소문의 그 지관영 가이드’가 촬영 현장에 등장할 줄은 몰랐던 사람들은 침까지 꼴깍 삼키며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에 시선을 고정했다.
최태훈은 그 눈들을 넘칠 듯 자각하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 제발 좀! 지관영 씨! ……지관영!”
최태훈이 처음으로 제 연인을 이름만으로 부르는 순간이었다.
한 글자가 줄어들자 슬쩍 눈썹을 휜 에스퍼는 거침없이 옮기던 발을 딱 멈춰 세우고 조금은 퉁명스러운 얼굴이 됐다. 물론, 주위의 스태프와 배우들은 그것에 혀를 내둘렀다. ‘와. 지관영이 화내면서 반말한다!’
“왜.”
“차에 있을게요. 완전 얌전히. 조용히. 예?”
가이드는 하필 사람들의 한가운데에 멈춰 선 제 에스퍼를 탓하며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소곤거렸다. 물론 그 기어들어갈 것 같은 목소리는 감히 헛기침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진 현장 안에서는 충분히 큰 것이었다.
지금 태훈은 심장이 콩닥콩닥 다 뛰고, 얼굴까지 벌게졌다.
요 근래 본의 아니게 드라마 속에서 뛰쳐나온 것 같은 모습만 보여줬던 관영은, 이제 아예 그 현장으로 저를 데리고 와서 이 난리를 치고 있다. 정말 스물여덟 인생 중 있었던, 시쳇말로 ‘쪽팔림의 역사’를 매일매일 다시 쓰는 것만 같은 요즘이었다.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그런 제 가이드를 비뚜름하게 바라보던 사내는, 제가 꽉 틀어잡았던 태훈의 팔을 놓았다. 가이드는 그것에 ‘아, 이 사람이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태훈의 바람대로 움직여 준다면 그건 절대 지관영이 아니다.
에스퍼는 자유로워진 두 손을 제 가이드의 뺨에 가져다 댔다. 최태훈은 정말 그 0.001초의 찰나의 순간에도 사람이 깊이 좌절할 수 있음을 이때 알게 됐다.
아주 가볍게 닿았다 떨어진 입술이었다. 하지만 그건 몹시 느려서, 현장에 있는 이 수많은 사람 중 못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완전 얌전히, 완전 조용히 내 눈 닿는 곳에 있어.”
……아. 진짜 망했다. 진짜 개망했다.
가이드는 그답지 않게 격렬한 단어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던 욕을 삼켰다.
* * *
이제껏 다른 누구도 앉은 적 없던 지관영의 개인용 의자에 앉아있는 청년을 향하는 시선이 따가웠다. 청년은, 그러니까 다시 말해 최태훈은 간간이 눈이 마주치는 이들에게 깍듯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느라 바빴다.
메이크업 수정을 받으며 대본을 훑던 지관영은 그런 제 가이드를 힐끔 눈에 담았다. 최태훈이 싫어하든 말든 우선 이렇게 제 시야에 들어와야 안심이 되었다.
저 예의 바른 가이드의 문제는 두 가지다.
때로는 남에게 불편을 끼쳐서라도 자기 이익을 챙겨야 한다는 걸 싫어하는 게 첫 번째,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해할 수 있다는 걸 뼛속부터 이해 못 하는 통에 영 경계가 부족하다는 게 그다음이다.
“혹시라도 배고프거나 하면 매니저한테 말해.”
“예.”
“그리고 이건 볼만한 책 몇 권이랑…….”
지금 촬영 현장의 사람들은, 스태프는 물론이고 배우들까지 일제히 귀를 쫑긋한 채 저 페어의 대화에 집중하는 중이다. 당장 급한 다른 일을 준비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저쪽으로 관심이 가는 걸 막기가 어려웠다.
그 소문의 가이드는 정말이지 참 지극정성으로 대접받는 중이다. 지관영 정도 되는 사람이 한두 씬 찍고 가는 단역이나 쓰는 작고 불편한 이동식 의자에 긴 다릴 대충 걸치고 앉아있고, 원래 그가 쓰던 의자는 선선하게 부는 선풍기 바람까지 쐬는 최태훈의 차지다.
지관영은 그렇게 챙기고도 뭐가 모자란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잠시 생각하더니, 근처에 말해서 얼음물 페트병 몇 개까지 제 가이드의 옆에 챙겨 두었다.
“잘 놀고 있어.”
에스퍼의 말에 가이드는 살짝 민망한 듯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관영은 그게 참 착하다는 듯 살짝 헝클어진 태훈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최태훈, 너 이따가 앞머리 넘겨볼래?”
“왭니까?”
“이쪽이 더 마음에 들거든. 이마가 예뻐서.”
솔직히 몇몇 사람들은 이런 생각마저 했다.
세상에, 정말이지 계도 저런 계가 없다. 사실 모두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한 그 키스, 아니 뽀뽀 이후에 지관영과 제법 많은 씬을 찍는 중년 배우 하나는 의자를 가지러 온 그에게 슬쩍 물었더랬다.
‘관영 씨, 혹시 저 청년이랑 만나는 거야?’
사실 그 질문은 정말 모두가 하고 싶었던 것이라, 사람들은 저 잘난 사내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지관영은 흐리게 눈을 휘며 딱 한마디 했다.
‘……가이드잖습니까.’
하지만 이 업계에서 구르고 굴러 노련한 이들은 그 대답에 담긴 이면을 곧바로 눈치챘다. 지관영은 그 질문을 부정하지 않았다. 긍정하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대개 이런 상황에서 저런 모호한 대답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게다가 근래 촬영장에서 답지 않게 휴대폰을 붙들고 있던 남자가 오늘은 그걸 쳐다도 안 보는 것만 봐도 그 상대가 누구였는지 뻔히 그려진다.
“그렇습니까. 아, 머리 잘라야 하는데. 센터 들어간 이후로 신경을 못 썼습니다.”
지관영의 커다란 손이 태훈의 머리카락에서 그의 말처럼 동그랗고 예쁜 이마로, 눈가로, 그리고 말랑하고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귀로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그러자 태훈은 그게 간지럽다는 듯 촬영장에 들어선 이후로 처음으로 긴장을 푼 웃음을 걸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아주 작고 옅은 탄성이 흘렀다.
때로는 긴 문장보다 단 하나의 행동이 모든 것을 설명하고는 한다. 주변의 동향을 살피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저 사내가 어찌 보면 가장 눈에 띌 지관영의 손길에 익숙한 것이 의미하는 바도 참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정말이지 저들은 눈에 안 들어올 수 없는 연인이었다. 스태프 하나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어, 지관영 씨.”
“네. 가겠습니다.”
최태훈은 지관영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눈앞에 있는 남자는 에스퍼가 아닌 배우가 되어야 할 시간이다. 관영은 마지막까지 손끝으로 가이드의 입술을 몰래 훔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스태프를 따랐다.
지관영의 말처럼, 최태훈은 어떻게든 지관영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다. 촬영장 구석이기는 하지만 저 정도면 차 안 보다 훨씬 양호하다. 최태훈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혹시라도 방해될까 숨을 죽인 채 휴대폰을 무음으로 바꿨다.
워낙 바쁜 현장 특성상, 사람들은 지관영이 본격적으로 촬영에 들어가고 난 뒤 낯선 가이드의 존재를 까맣게 잊었다. 주연배우인 지관영이 근래 워낙 들쭉날쭉한 시간대를 자랑했으니 밀린 촬영들이 많았다. 그건 어찌 보면 잔뜩 긴장한 채 눈치를 보고 있던 태훈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본을 달달 꿰다 못해 머릿속에 새기고 있던 지관영도,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도, 심지어는 그걸 지켜보며 눈을 깜박이던 최태훈도 예상치 못한 건 따로 있었다.
지금 배우 지관영이 출연하고 있는 수목 드라마는,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로맨틱 코미디’다. 그 말인즉슨 그는…….
“컷!”
“수고하셨습니다!”
손꼽히는 미녀와 절찬리에 가상 ‘연애’ 중이라는 거다.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상대 배우의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지관영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사실 그건 자연스럽게 팔을 풀었다기보다는, 거의 못 닿을 것에 닿았다는 듯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예쁘기로는 다섯 손가락에 든다는 여배우는 저도 모르게 짧은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물론 기뻐서는 절대 아니다.
사실 촬영 내내 지관영이 타인과의 스킨십을 불편해한다는 것 정도는 진작 눈치챘던 그녀다. 처음에는 그게 참 지극한 매너라고 생각했었는데, 그와 가장 많이 합을 맞추다 보니 그 미묘한 차이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지관영 저 남자는 카메라 불만 꺼지면 아예 패대기 수준으로 저를 밀쳐 낸다. 그녀는 ‘그 이유’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 끝에는 널찍하고 푹신한 접이식 의자에 나른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턱까지 괸 남자가 있다.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곧장 그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단단하고 딱 벌어진 뒷모습도 보인다. 물론, 그 당당한 발걸음은 앉아있는 남자 앞에 가서는 왠지 모르게 조심스러워졌다.
……와. 지관영이 눈치 본다.
사람들의 이목이 그 엄청난 광경에 두 눈 가득 흥미를 담은 채로 반짝였다. 최태훈은 매니저가 가져다준 과일 주스를 빨대로 쭉 빨아 마시며 제 에스퍼를 올려다보았다. 열심히 촬영하고 온 제 페어에게 뭐라 한마디 할 법한데, 꾹 다문 입은 뭐라 말이 없다.
솔직히 지관영 그는 지금 제 자신이 우습다.
이 촬영이 뭐라고, 하고 나서 곧장 달려와 이러고 있는 건지 스스로가 어이없을 뿐이다. 하지만 슬그머니 최태훈의 안색을 먼저 살피게 된다. 이건 진짜 어쩔 도리가 없는 거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전체에서 가장 근사한 사람을 일렬로 세운다면 반드시 그 선두 어딘가에 있을 모습을 한 사내의 입이 문장을 품지 못하고 달싹였다.
지관영은 답지 않게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툭, 말문을 텄다.
“최태훈.”
“예.”
가이드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듣기 좋은 단정한 중저음이다. 이것만 들어서는 기분이 상했다거나 하는 건 전혀 눈치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지관영은 그런 목소리의 고저 하나하나까지 한껏 의식하는 중이다.
에스퍼로 발현한 후부터는 만나는 상대에 대한 예의 같은걸 따질 정도로 제대로 된 깊은 관계를 맺은 적 없던 지관영이지만, 그는 꽤 오래전에는 제법 화목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소위 ‘연애 대상’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정도는 빠릿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란 거다. 물론, 지금은 그 대상의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다른 여자와 포옹하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말을 쏟아내고 있지만, 여하튼 그렇다.
지관영은 참 말갛게도 저를 바라보는 최태훈을 눈에 담으면서 살짝 곤란한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가, 한숨 쉬듯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최태훈은 지관영에게 백기를 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내다.
“……일이야.”
“압니다.”
아예 사귄다고 인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 순간 촬영장에 있는 모든 이들은 같은 생각을 했다. 맡은 일을 하거나 잠시 쉬는 척하며 흘끗흘끗 가이드의 반응을 살피는 눈들이 많았다. 지관영이 저렇게까지 숙이고 들어가는데 어떤 반응일까 싶어서다. 하지만 최태훈은 표정 변화 없이 그냥 주스만 마시고 있을 뿐, 별 리액션이 없다.
‘화났나 보다’.
지관영은 물론이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지금 가이드는 사람들과의 생각과는 퍽 다른 상태다. 그는 지금 저를 살살 달래듯 구슬리는 지관영을 꽤 즐기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맨 처음 촬영이 시작됐을 때 당황하지 않은 건 아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얼굴선을 그리던 남자가 감독의 말 한마디에 다른 이를 보며 눈을 접는 걸 코앞에서 보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얼마 안 가 그 모습을 꽤 느긋하게 웃으며 관찰할 수 있게 된 태훈이다.
달랐다.
저 안에서 만들어진 모습은 정말 아주 조금도 제 에스퍼의 진짜 조각을 품고 있지 않았다. 참 이상했다. 이전에는 저게 보이지 않았었다. 그래서 TV 속에서 상대 배우를 향해 눈웃음 짓고 세상에서 제일 달콤할 것 같은 문장을 말하는 그를 볼 때마다 채널을 돌려버린 적도 많았었다.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은 그 대상이 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지관영은 저를 품에 안으며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뜨면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근사한 미소와 함께 이마에 입술을 떨어트린다.
진짜 지관영의 모습은 사람들이 뻔히 아는 저 황홀한 연기보다 훨씬 더, 정말 훨씬 더 따뜻하다. 최태훈은 그걸 알고 있는 게 자신뿐이라는 걸 깨닫고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오히려 좀 좋아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 자신의 품위를 지독히도 중요하게 여기는 남자가 이렇게 보는 눈도 많은 곳에서 제 기분을 풀어주려 서툴게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이라니. 솔직히 좀 귀여웠다.
애써 표정을 가다듬던 태훈의 입에서 작게 웃음이 터졌다. 지관영은 그것에 살짝 눈썹을 휘었다. 가이드는 한 번 시작된 웃음을 눌러보려고 했지만, 애초에 최태훈은 긍정적인 감정을 숨기는 것에 서툰 편이었다.
에스퍼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 말끔한 얼굴을 한 연인은 저를 다시 한 번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었다. 지관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그대로 최태훈을 일으키곤 그 손을 잡아끌었다. 가이드는 아침과는 다른 의미로 질질 끌려가면서도 계속 옅은 웃음을 참지 못한 채 키득거렸다.
지관영은 그 웃음에 조금 맥이 빠졌다. 어떻게 보면 혼자 신경이란 신경은 다 쓰며 저 얄미운 장난에 속아 넘어간 건데도, 저 웃음소리 하나에 마음이 풀어지는 제가 황당했다.
그래서 아무도 없는 촬영장 구석에 도착했을 때, 괜히 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태훈, 너 진짜…….”
“하핫, 하하, 아, 진짜 기분 상한 줄 알았습니까?”
에스퍼는 저를 향해 눈을 반달로 휘고 웃으며 자연스레 안겨드는 늘씬한 몸을 품으며 찌푸린 미간에 힘을 줬다. 하지만 지관영 그 자신도, 계속해서 웃음을 흘리는 최태훈도 그게 괜한 것이라는 걸 잘 안다.
“가지고 노니까 재밌으신가?”
“음, 재미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니까…… 뭐 조금은.”
자꾸 예쁜 호선이 번지는 입술 위로 부딪히는 숨이 더웠다. 살짝 벌을 주듯 혀를 깊게 섞자 곱게 휜 눈웃음을 흘리는 최태훈이 보였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 화나셨습니까?’ 하고 굳이 묻기까지 하는 모습은, 솔직히 이제껏 저 깍듯하고 말끔한 얼굴에 뭔가 좀 속았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게 했다.
지관영은 대답 대신 연인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 * *
김권석은 요새 센터 내에서 가장 유명한 페어를 보며 소란스럽게 외쳤다.
“우와. 지관영과 그 남친!”
“……권석 형!”
태훈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낯부끄러운 단어에 슬쩍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에스퍼 쪽은 낯선 사내의 조금 무례할 법한 태도를 기꺼이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제 가이드가 민망해하는 저 호칭이 꽤 마음에 들었다.
“저 사인 좀 해 주십쇼.”
“네. 얼마든지. 성함이?”
지관영은 권석이 허겁지겁 내미는 손바닥만 한 노트에 능숙하게 제 사인을 해 보였다.
“저는 김권석…… 아, 그런데 이거 받는 사람은 유진영으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형, 여자 친구분 드리려고요?”
“그렇지 뭐.”
최태훈은 사인 한 장에 마치 세상 다 가진 표정을 하는 권석을 보며 바람 빠진 듯한 웃음소릴 내었다. 김권석은 참 감정표현이 풍부한 사내였다. 형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제 둘째 동생인 최우진을 떠오르게도 했다. 들고 있던 파일첩에 사인을 곱게 끼우던 권석은, 코끝을 슥 문지르며 조금은 별일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너도 이 상담사한테 케어 받냐?”
“주마다 번갈아 가면서요. 두 분 정도 더 계십니다.”
“호오라.”
김권석은 뭔가 생각하듯 턱을 긁적였다.
지금 페어와 김권석은 운 좋게 상담실 앞에서 딱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태훈은 왠지 기묘한 표정이 된 권석을 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게……. 이 사람, 좀 이상하지 않냐?”
센터에는 그 역할이 다른 상담사 수백 명이 상시 대기 중이다. 태훈은 그들 중 꽤 많은 이들을 만나 보았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 중, 이 중년 사내는 그가 꽤 좋아하는 상담사였다.
최태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전 잘 맞는 편입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뭐, 그렇다면야 할 말은 없지만. 아무것도 아냐. 아. 맞다! 너 이거나 한번 잠깐 봐 주라.”
김권석은 제 후드 주머니에서 작은 네모난 박스를 꺼냈다.
“쨔안. 어떠냐!”
우와아, 태훈은 작게 탄성을 흘리며 눈을 반짝였다.
김권석이 꺼내 보인 건 반지였다. 깔끔한 백금색의 반지 가운데에는 작은 다이아가 반짝이는, 과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의 링은 누가 보아도 프러포즈를 위한 것이었다.
“진짜 좋아하실 겁니다. 정말 예쁜데요.”
“으헤헤, 그렇지?”
두 가이드에게서 몇 발짝 떨어져 있던 지관영은 반짝이는 작은 반지에서 쉬이 눈을 떼지 못하는 최태훈을 보며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저번에 싸울 때도 곧바로 결혼 운운했던 제 가이드가 떠올라서였다. 분명 저 반듯한 사내는 참 그린 듯한 가정을 꾸리는 걸 그려왔을 거다.
에스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 그럼 담에 보자고! 성공을 빌어주라, 야!”
태훈은 쾌활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관석에게 웃어 보였다. 뒷모습만으로도 행복이 느껴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은 그였다.
“지관영 씨. 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지루하실 테니까 다른 곳에 가 계십시오.”
“……그래.”
상담실 문 바로 앞의 소파에 앉아있는 에스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은 느리게 대답했다. 가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사내가 대답과는 달리 꼼짝없이 문 앞에 앉아서 저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히 그려져 작게 웃었다.
오늘 최태훈은 지관영의 빈 시간에 맞춰서 상담 스케줄을 겨우 잡았다.
“이번엔 표정이 밝으시네요.”
상담사의 말에 잠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태훈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조금은 멋쩍게 눈을 휘었다. 요사이에 쭉 다른 상담사와 일정이 잡혔었으니, 지관영의 흉을 잔뜩 봤던 이 중년 사내와는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인의 연인을 독차지하게 되셨다고?”
“……그게, 음.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기어갈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가이드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갓 시작한 사랑에 푹 빠진 청년의 모습이었다.
상담사는 그런 최태훈의 모습이 퍽 귀엽다는 듯이 소리 내어 웃으며 머그잔 하나를 내밀었다. 상담실에 들어왔을 때부터 눈을 반짝 뜨게 할 정도로 좋았던 커피 향이었다.
“자. 그럼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 볼까요. 태훈 씨.”
느긋하게 떨어진 상담사의 말에 태훈은 잠시 손바닥을 비비며 눈을 굴리더니 꽤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게 대답한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약간의 들뜸이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요새는 꽤 좋습니다.”
“좋다. 좋다라. 하하, 역시 지관영 씨 덕분인가요?”
에스퍼 이야기가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생각보다 더 빠르게 나온 이름에 태훈은 약간 귓가를 붉히며 입술을 오므렸다.
모두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과 사귄다는 건 이럴 땐 참 민망한 일이었다. 가이드의 입에서 천천히 작지만 또렷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최태훈은 인정이 빠르다.
“……예.”
“오. 꽤 자신이 생기셨군요. 일전에는 영 불안해하지 않으셨습니까. 매칭률 때문에요.”
상담사의 말에 최태훈은 잠시 고민하듯 말을 골랐다.
사실 가이드의 마음에는 여전히 약간의 불안이 남아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다섯 살 때부터 스물여덟이 된 지금까지 최태훈은 단 한 번도 그 자신이 가이드라는 증명을 받은 적 없었다. 최태훈을 가이드라고 부르고 말하는 건 이제 연인이 된 사내, 단 한 명뿐이다.
“아직도 완전히 안심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조금은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생각이요?”
“저 사람은 내가 가이드가 아니어도 지금처럼 봐 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아. 너무 대책 없습니까?”
최태훈이 반대로 던진 질문에 상담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그 당사자만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가이드는 꽤 안락한 상담실의 의자에 살짝 목을 젖힌 채로 앉아 새하얀 천장을 눈에 담았다. 내담자로서는 확실히 일전보다 훨씬 편해진 태도였다. 한참을 커피 향에 취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태훈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들이 있습니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보고 있을까. 아니면 뚫어지도록 문만 쳐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최태훈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말을 이었다.
“지관영 씨, 그 사람은 누가 떨어트린 물건 같은 거 절대 허리 굽혀 안 주워 준다는 거 아십니까?”
“네?”
“무대 인사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게 꾸벅 잘하면서, 누구 가방을 들어준다거나 식사하러 가서 숟가락을 놓는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안 합니다. 처음에는 일부러 그러는 줄 알았는데, 아예 머릿속에 그런 선택지가 없단 걸 요즘에야 알게 됐습니다. 재밌죠.”
왠지 묘하게도 이전 상담과 비슷한 전개였다. 하지만 그 문장은 저번과 같은 토로가 아닌, 오히려 조금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듯 희미한 웃음기마저 섞여 있었다.
“얼마 전에 지관영 씨 드라마 촬영장에 따라간 적이 있습니다.”
“네, 당분간 함께 움직이기로 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상담사는 교묘하게 그 원인이 된 에스퍼, 오진우 이야기는 잘라 낸 채로 태훈의 말을 흘려 받았다. 약간은 즐거운 회상에 잠긴 채인 가이드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지관영 씨는 참…… 뭐라고 할까. 다른 사람 눈 같은 거 하나도 신경 안 쓰는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그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들리는 얘기로는 전혀 아니던데요?”
상담사의 의아하다는 듯한 물음에 태훈은 살짝 웃음이 터져서 뭐 그렇죠, 하며 눈을 접었다.
“솔직히 처음엔 종일 따라다니는 거, 진짜 싫었습니다. 드라마 찍는 곳까지 가서 그 많은 사람 사이에 앉아있는 게 거기 있는 분들께 방해될 것 같기도 하고.”
“하하.”
“여하튼 굉장히 긴장했었습니다. 거기서 좀…… 일도 있었거든요. 사람들은 말없이 다 쳐다보고 있지. 그런데 그 와중에도 주변 분들이 지관영 씨에게 조심스러운 것이 느껴지는 게, 아 이 사람 여기서도 진짜 엄청난 사람이구나 싶어서 숨도 크게 못 쉬었습니다, 처음엔.”
최태훈은 촬영장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조금은 할 수 없다는 듯한 한숨을 삼켰다. 아직도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서 제게 장난치듯 쪽, 하고 입술을 부딪치던 순간을 떠올리면 솜털이 쭈뼛 서는 그다.
하지만 그때만 제외하고서 지관영의 드라마 촬영 현장은 이제껏 그런 세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살아왔던 태훈에게 꽤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지관영의 표정들도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최태훈의 마음을 빠듯하게 채운 건 따로 있다.
“그런데 저, 그런 곳에서 종일 완전히 왕 놀이 하다 왔습니다.”
“왕 놀이요?”
“지관영 씨가 시중들고 제가 왕인, 그런 왕 놀이요.”
정말로 그랬다.
나중에는 오히려 지관영의 매니저가 안절부절못하면서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손을 내저었을 정도로, 제 연인은 저를 챙기지 못해 안달이었다. 살짝 허리가 뻐근해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기라도 하면 촬영에 집중하던 시선이 그대로 가이드를 따라 움직이는 바람에 NG까지 몇 번 났다.
태훈은 그때를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좀 크게 웃음이 터져버렸다. 사실 그때 당시에는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해질 정도로 놀랐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무엇 하나 제 에스퍼가 저를 눈에 담은 증거가 아닌 게 없었다.
“얼마나 극성이었는지 온종일 촬영 다 끝나고 나서 정신 차려보니까 제 주변으로 이렇게 둥글게 원이 있었습니다.”
여기는 책, 여기는 태블릿, 저쪽에는 먹을 것 한가득. 이쪽에는 쿠션. 휴대폰 보조 충전기. 최태훈은 마치 그 순간을 그리듯 텅 빈 허공을 짚으며 작게 말했다. 이상하게 지관영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무엇 하나 흐리지 않고 뚜렷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그 잘난 사람이 저 화장실 갈 때도 문 앞까지 따라와 서서 기다리는데 솔직히 좀 걱정되어서 물어봤습니다. 여기서 이러셔도 괜찮냐고요. 그래도 잘나가는 주연배운데.”
“그랬더니요?”
“……혼만 났습니다.”
짤막하지만 많은 뒷이야기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사실 최태훈은 제 페어와 있었던 이런 사담들은 다른 연구원들에게는 일절 하지 않는다. 연인과의 조각을 드러내는 건 꽤 머쓱하고 부끄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번 시작이 어렵다고, 말을 트기 시작하니 오히려 과묵하게 꾹 눌러 왔던 것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최태훈은 이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담사와 이야기하고 나면 제 마음속 복잡했던 생각들마저 정리되는 것 같았다. 가이드는 딱 마시기 좋은 온도로 식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하지만 오늘 이 중년의 상담사는 최태훈의 친절한 도우미가 되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사내는 태훈의 말에 고개를 기울이고는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더니, 마치 혼잣말하듯 입을 열었다.
“신기하네요. 정말 신기해.”
“예?”
“최태훈 씨. 태훈 씨는, 정말 제가 그리던 가장 이상적인 가이드입니다.”
가이드는 뜬금없는 상담사의 극찬 어린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담사의 표정은 사뭇 진지해서 허투루 장난치거나 빈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태훈은 민망함에 살짝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 그렇대도 이제껏 제대로 매칭된 사람도 없었는데요.”
“지관영 씨를 빼고 말이죠.”
어느 누구도 모르지 않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는 목소리가 조금은 빨라진 듯 들렸다. 가이드는 상담사의 말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 타이밍을 놓친 채 눈을 끔벅였다.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입이 마르는 건 상담사였다. 그는 반짝이며 빛나는 눈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최태훈 씨는 사리분별도 채 못할 나이부터 가이드로 발현했죠.”
“하하, 음. 그렇죠. 다섯 살이면.”
“정말이지 반듯하다 못해 예쁠 정도의 가정환경에서 지극히도 사랑을 주고, 또 받으면서…….”
“…….”
“비뚤어진 것 하나 없이 언제나 옳고, 선한 것들만을 생각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관영’과는 정반대로.”
분명히 무엇 하나 날 선 부분 없이 둥그런데도 묘하게 그 속에 담긴 뼈가 짚어졌다. 최태훈은 어설프게 웃다가 저도 모르게 살짝 눈썹을 휘었다.
순간적으로 김권석이 말한 ‘이상하다’라는 게 이런 서늘함을 설명한 게 아닌가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 위화감 때문에 최태훈은 상담사의 말투 끝에 붙은 제 에스퍼의 이름이 묘한 어조로 불린 것을 놓쳤다.
상담사는 더는 에스퍼를 지관영 씨라고 부르고 있지 않다.
“이렇게 흥미로울 데가 있을까요. 다른 어중이떠중이들과는 절대 매칭되지 않다가, 사상 최강의 능력을 가졌다는 에스퍼와는 최고 수치로 페어가 됐다니.”
“…….”
“그거야말로 제대로 된 가이드의 조건을 갖췄다는 증거가 아닌가요?”
가이드의 조건.
그건 다섯 살 때 가이드로 발현한 이후로 23년간 언제나 에스퍼와의 매칭에 실패하던 이름뿐인 가이드를 수식하기에는 너무나 거창했다. 최태훈은 그 굉장히 낯선 단어들의 조합에 약간 미간을 찌푸린 채로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저는 잘.”
상담사는 그런 태훈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알면서도 무시하는 것만 같은 얼굴로 빙긋 웃었다. 정말로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은 아이처럼 천진하기까지 한 눈을 한 채로 빠르게 말을 이어가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왠지 조금은 낯설게도 느껴졌다.
“사실 전 최태훈 씨가 지관영과의 리바운드-리젝션을 절대 극복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설령 태훈 씨가 리바운드를 이겨내더라도, 지관영 그 사람의 리젝션은 계속될 거라고 예측했거든요.”
“…….”
“그런데 하하, 세상에, 이렇게 완전히 그 사람을 손에 쥐어버릴 줄이야! 전 이제 정말로 궁금해졌습니다.”
최태훈은 이어진 상담사의 말에 입가에 흐릿하게 걸렸던 미소가 딱딱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당신과 그 에스퍼가 숫자놀음에도 지지 않고 페어가 될 수 있을까?”
가이드가 가장 콤플렉스로 여기는 것을 정확하게 내찌르는 말은 신중하고 배려 깊은 상담보다는 연구 과제를 눈앞에 둔 냉엄한 판단처럼 들렸다.
태훈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꾹 눌려졌다.
상담사는 그런 태훈의 반응마저도 반응 결과 중 하나라는 듯한 신중한 눈을 한 채다. 최태훈은 대답 대신 몇 초간 옅게 호흡을 삼키다가, 스산할 정도의 침묵을 깨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선생님, 사실 전 지금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의 입에서 낮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치 무언가 풀리지 않는 질문을 받은 학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태훈은 그 따가운 시선을 피해 천장 한쪽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상담은 그렇게 묘한 어슷함을 남긴 채로 끝났다. 최태훈은 마치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으레 하는 말을 덧붙였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최태훈에게 직접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상담실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발걸음이 급해졌다. 반자동식의 두꺼운 미닫이문이 열리고 시야 한가운데에 앉아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을 때는 솔직히 묘한 안도마저 치밀어 올랐다.
지관영은 무슨 통화를 하고 있었는지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태훈이 눈에 들어오자 그걸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곧바로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루하셨죠.”
“아니. 괜찮았어.”
가이드는 저도 모르게 저를 향해 시선을 마주치는 페어의 손을 곧바로 맞잡으며 매달렸다. 그건 센터에서의 스킨십을 특히 조심하는 태훈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관영은 잠시 의외라는 표정이 되기는 했지만, 맞닿은 손을 피하기는커녕 더 꽉 끌어당겨 잡았다. 연인의 심장박동 소리가 묘하게 빠른 걸 눈치챈 그다.
이건 일종의 스트레스 반응이 분명했다.
“무슨 일 있는 건가?”
“아, 아뇨. 일은요, 무슨.”
최태훈은 거짓말에 서툴다. 지관영은 그 뻔히 보이는 가벼운 말 돌리기에 살짝 눈썹을 휘었지만 당장 채근하지는 않았다. 관사에 가서 저 말끔한 얼굴을 한 남자를 앉혀두고 짚어 물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당장 알고 싶은 것도 하나 생긴 차다.
“그런데 최태훈. 저 상담사 에스퍼인 것 같은데, 에스퍼에게도 상담을 받나?”
“에스퍼요? 아뇨. 가이드십니다.”
지관영은 날을 세워 경계하는 상황도 아닌지라 스캔 대신 그저 평범하게 시선이 스친 정도가 다인 중년의 남성을 다시 떠올렸다.
……가이드라고?
에스퍼는 문이 닫히기 직전 선생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를 분명히 보았다. 그건 아주 잠시간이었지만 순간 치밀었던 그 기묘한 위화감 역시 너무도 생생했다. 지관영은 제 가이드를 향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했다.
그때였다.
페어는 갑자기 요란하게 울리는 경고음에 동시에 살짝 인상을 썼다. 일반적인 수준의 청력을 가진 최태훈에게도 머리를 울릴 정도로 큰 사이렌은, 경고라기보다는 위협처럼 들릴 정도로 요란했다.
사실 이 소리는 극도로 발달한 신경을 가진 에스퍼를 자극하기 위해 의도된 불협화음으로 만들어진 거다.
“그러니까, 이건…….”
최태훈은 언젠가 교육에서 몇 번이고 주지 받았던 내용을 떠올리려 애쓰며 눈썹을 찡그렸다. 센터의 경고 알림음은 몇 가지 종류가 있다.
이건 화재나 수재와 같은 비상 상황에서 들리는 일반적인 경고음과는 다른, 에스퍼의 신경을 집중시키기 위해 고안된 소리라고 했었다. 가이드는 조금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스퍼 폭주 위험 경고?”
“정말이지 가지가지 하는군.”
최태훈의 짐작과 지관영의 빈정거림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문장화 된 인공적인 기계음이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
[센터 내 전체 가이드와 미들에게 알립니다. 현재 에스퍼 훈련장 A, A-1 섹션에서 위험 요소가 감지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해서 가이드와 미들 여러분은 해당 구역의 단독 진입을 삼가고 에스퍼와 동행하여…….]
역시 센터의 보안은 쓰레기라며 이를 가는 에스퍼에게 이보다 더 훌륭한 근거 자료는 없는 셈이었다. 최태훈은 그렇지 않아도 마치 실과 바늘처럼 함께 다녔던 최근보다 더욱 피곤해질 미래가 뻔히 그려져서 살짝 한숨을 쉬면서도, 조금 전 방송에서 나온 경고가 영 마음에 걸렸다.
에스퍼 훈련장 A섹션. 그건 김권석이 일하는 곳이다. 지관영은 걱정이 실린 제 가이드의 눈을 읽고는 목 뒤를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왜. 가 봐?”
“아닙니다. 위험구역인데요.”
“가이드와 미들 여러분은 해당 구역의 단독 진입을 삼가라잖아. ‘단독으로’ 안 가면 그만이지.”
결국 자신과 같이 가는데 뭐가 문제냐는 말이다.
최태훈은 그 뻔뻔할 정도로 당당한 말에 할 수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최태훈은 제 에스퍼의 뒤에 딱 붙어서는 이 모든 소란의 시작점인 곳으로 조심조심 다가가기 시작했다. 훈련장과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인파와 웅성거림은 더욱 커졌다. 태훈은 살벌할 정도로 울리는 알람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긴장감에 목이 마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A섹션은 이미 커다란 바리케이드가 쳐진 지 오래였다.
지관영은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현장을 무심한 눈으로 쭉 훑어봤다. 말마따나, 저 안쪽에서 웬 에스퍼 하나의 기운이 요동치는 것이 짚어졌다. 한편, 최태훈은 몇 명 몰려있는 연구원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고 기울이면서도 눈으로는 김권석을 찾았다.
대체 어디 있지, 위험한데. 가이드는 투명한 바리케이드 너머의 모습을 자세히 보기 위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느슨해 보이지만 일에는 굉장히 까다로웠던 김권석의 성격상, 제가 정비 담당인 곳을 떠나지 않고 근처에 있을 것이 뻔했다.
“무슨 일입니까?”
“자살 사건입니다. 가이드 하나가 갑자기 말릴 새도 없이…….”
“세상에, 이게 무슨……. 외부 공인 가이듭니까?”
“아뇨. 그게 말입니다,”
연구원들의 말은 채 다 이어지지 못했다.
쾅, 하고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가 튕겨 나오면서 벽을 부수고 그 바깥에 있던 바리케이드를 거세게 후려치는 굉음 때문이었다.
태훈은 그 살벌한 소리에 바짝 얼어붙었다. 물론, 그와는 반대로 그 페어 에스퍼인 지관영은 심드렁한 얼굴을 한 채로 살짝 위치가 비틀어진 바리케이드를 원상 복구시키는 여유마저 부렸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런 지관영 역시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안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
귀를 찢는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그걸 끔찍하다고 표현한 까닭은, 그 단어 외에는 차마 입에 담을 단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바람이 찢기는 것만 같은 파열음이 경고 사이렌과 섞여들었다. 투명한 바리케이드 너머로 보이는 박살 난 훈련장의 벽은 그 안을 훤히 드러냈다. 최태훈의 시선이 멍하게 그 처절한 소리가 터져 나오는 쪽으로 향했다.
“오빠, 안 돼애! 어, 아아, 아, 안 돼, 안 돼!”
지관영은 ‘그 중앙’에 있는 누군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것이 시야에 잡히자마자 곧바로 작게 그답지 않은 욕을 작게 중얼거렸다. 에스퍼는 황급히 제 가이드의 앞을 막아서며 이곳으로 최태훈을 데리고 온 그 자신을 탓했다.
“……최태훈, 고개 돌려!”
훈련장 한가운데는 거대한 피웅덩이가 만들어져 있다. 가이드의 눈이 천천히 그 붉은 중심에서 움직여 올라갔다. 그 시선의 끝에는, 마치 잘 만들어진 밀랍처럼 창백하게 변한 채인 한 사내가 걸려 있다.
최태훈은 그게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
순간적으로 가이드의 다리에서 힘이 쭉 풀렸다. 지관영은 그런 제 연인의 넋 놓은 듯한 눈을 가리듯 끌어안았다.
“제발, 제발 눈 떠, 응? 오빠, 제발…… 안 돼! 안 돼애, 이러지 마아, 오빠, 안 돼……!”
김권석이 죽었다.
* * *
센터장 권다희는 아직도 때때로 과거의 악몽을 꾼다.
그 어두운 꿈의 시작은 언제나 이십여 년 전 처음 시작된 선생의 실험장에 갔던 그날이다. 선생의 연구실은 센터의 가장 깊은 지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존재했다.
‘권다희, 너라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 거야.’
당시 그녀는 갓 센터에 들어온 신입 연구원이었다. 권다희는 저를 진지한 얼굴로 이끄는 선배 연구원을 보며 자신이 소위 ‘높은 곳’으로 오를 수 있는 동아줄을 잡았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센터의 비밀, 그건 그녀가 감히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센터는 사람을 만들고, 없애고, 또 만들었다. 그건 마치 균을 배양하는 것처럼 건조하고 또 일상적인 모습으로까지 보였다.
그 끔찍한 가운데 서 있던 것이 ‘선생’이다.
누군지 모를 에스퍼가 자신의 아이를 향해 손을 뻗어 휘젓는 것을 보며 할 수 없다는 듯 웃는 얼굴은 느긋하기만 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우는 소리와 온몸이 땀에 늘어진 채로도 아이를 돌려주라며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가 함께 섞여들었다.
‘다희야. 잘 보렴. 너도 해야 할 일이니까.’
선생은 권다희를 향해 옅게 미소를 흘리고는 붉은 기운조차 가시지 않은 그 작은 생명에게 두꺼운 주삿바늘을 밀어 넣었다.
그때 권다희 그녀는 그것을 막지 못했었다.
“아악, 아, 아아, 아아악!”
마치 목 깊숙한 곳을 긁어내는 것 같은 처절한 울림에 센터장은 제 과거의 어두운 날의 그림자가 확 끄집어내진 것 같아 숨을 삼켰다.
“센터장님! 현재 물리계 에스퍼가 대기 중입니다.”
미친 듯이 울리는 경고 사이렌과 자신의 가이드를 잃고 울부짖는 에스퍼의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그녀는 제 과거가 아닌,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로 눈을 들었다.
숨이 막혔다. 권다희를 향해 물음을 던진 연구원도, 센터장인 그녀도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다.
에스퍼인 그들은 눈앞에 있는 여자의 깊은 절망에 동요하고 있다. 공격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불과 한두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동료였던 이와 목숨을 내걸고 부딪칠 자신이 없다. 그녀가 저렇게 폭주하게 된 이유를 그들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아가씨’.
김권석이 늘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최태훈은 모든 오감이 드문드문 끊기듯 멍한 상태에서도, 김권석이 그녀의 지금 모습을 보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는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좋은 것을 볼 때도 늘 먼저 떠올리며 자랑하기 바빴던 자신의 에스퍼가 저렇게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없을 가이드였다.
흰자위가 완전히 시뻘겋게 변하고 온몸의 혈관이 튀어나와 뒤틀린 채로 비명을 지르는 그녀의 주위로 날 선 바람이 몰아쳤다. 자신과 죽은 연인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다 집어삼키겠다는 듯 시간이 지날수록 더 드세지는 힘의 폭주는, 에스퍼 훈련장을 천천히 으스러트리고 있었다.
그건 이곳의 정비공이었던 그녀의 가이드가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매일같이 손질했던 것들이다.
지관영은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살벌하게 그 기세가 커지는 에스퍼의 기운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여전히 힘이 들어오지 않는지 제 팔을 붙잡고 기댄 채로 서 있는 최태훈의 질린 안색도 마음에 걸렸다.
페어는 지금 에스퍼가 진을 만들어 서 있는 곳과 제법 떨어진 이곳에서 다른 연구원 몇과 함께 대기하는 중이었다. 최태훈이 김권석과 그 에스퍼의 마지막에서 멀어지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미현은 그런 태훈을 안쓰러운 눈으로 챙겼다.
“태훈 씨. 물이라도 좀 마셔요.”
“……예.”
태훈은 무거운 목소리로 미현이 건넨 물병을 받아 들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그조차 제대로 마시지 못하고 작게 떨렸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것이 처음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저를 보고 웃으며 미래를 꿈꾸던 이가 저토록 처참하게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걸 발견한 연인의 고통을 고스란히 살피는 것 역시.
지관영은 뼈가 하얗게 툭 불거질 정도로 힘이 들어간 태훈의 손등을 덮어 쥐었다. 가이드는 그 온기에만 의지할 수 있다는 것처럼 제 페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에스퍼는 한동안 그런 태훈을 살살 달래듯 어루만지더니,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미현.”
“네?”
“제가 저 안의 상황을 정리하면, 최태훈은 센터에서 보호할 수 있나?”
이미현과 다른 연구원들의 시선이 나른한 얼굴을 한 사내에게로 꽂혔다. 조금은 힘없이 기대던 최태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관영은 마치 공간을 갈기갈기 찢어 내는 것 같은 파열음이 나는 훈련장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상황이 될지 확신하진 못해. 단순 제압은 간단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거든.”
“……네. 준비하겠습니다.”
연구원들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어떤 이들은 지관영의 제안을 센터장에게 보고하기도 하고,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던 이들에게 달려가기도 했다. 한편, 최태훈은 왠지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 약간 메인 목소리로 제 에스퍼를 불렀다.
“관영 씨……!”
“걱정하지 마. 안 위험해.”
“어떻게 안 위험합니까!”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어떻게 해야 저쪽 페어를 사지 멀쩡한 채로 데리고 나올까, 그것뿐이야. 믿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게 내는 목소리는, 이제 누가 들어도 연인을 달래는 사내의 것이다. 최태훈 역시 머리로는 알고 있다. 지금 아무도 섣불리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상황을 가장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건 제 에스퍼다. 하지만 마음이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다.
지관영은 최태훈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제가 이마를 드러내는 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 지나가듯 말한 이후로, 최태훈은 머리를 예쁘게 정리했다. 언제나 사랑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하는 연인인 거다.
가이드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내키지 않는 일조차 타인을 위해 허락하는 게 참 그다웠다. 관영은 그런 제 페어를 보며 살짝 눈을 접어 웃고는, 훈련장 내부로 눈을 돌렸다.
칼날 같은 바람에 골조까지 드러나기 시작한 내부는, 이제 서로 긁히고 부딪히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에스퍼는 살짝 느슨하게 목 뒤를 주무르며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모든 굉음을 만들어 내는 중심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혼자 남은 태훈의 주변으로는 온갖 에스퍼의 능력이 더해진 보호진이 쳐졌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지관영이 다치거나 그에 준하는 정신적 영향을 받는다면, 그를 붙잡을 수 있는 건 그 페어인 최태훈뿐이었기에 멀리 떨어져 있을 수는 없었다.
지관영은 거대한 태풍처럼도 느껴지는 바람의 한가운데 서 있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를 보면서 혀를 찼다. 에스퍼는 그녀의 이름을 안다. ‘유진영’. 지금 그녀의 뒤에 마치 창백하게 잠든 사람처럼 누워있는 사내가 제게 알려준 거다.
여자는 지관영을 발견하고 마치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소릴 내질렀다. 온몸과 흰자위까지 시뻘겋게 변하고 두꺼운 혈관들이 얇은 피부 위로 툭 튀어나온 모습은 왠지 모르게 마음까지 서늘하게 만들었다.
‘단순 제압’.
다시 말해, 김권석의 연인을 죽이는 건 간단하다. 이렇게 고민할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만약 그녀를 살리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완전히 이성을 잃고 미쳐버린 에스퍼가 전력으로 반항하는 것을 최대한 온전히, 그것도 다치지 않게 붙잡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관영은 저를 향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지듯 다가오는 힘의 덩어리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콰아앙, 쾅!
현장에서 한참을 떨어진 곳에서 에스퍼들의 호위를 받고 있던 태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그 엄청난 굉음은 사이렌 소리 따위 우습게 묻어 버릴 만큼 컸다.
“태훈 씨, 걱정 말아요. 응? 괜찮을 거야.”
“예…….”
하지만 가이드가 대답하는 중간에도 저쪽 훈련장에서는 마치 뼈를 긁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그걸 듣는 최태훈의 주먹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때, 수많은 에스퍼의 포위진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있었다. 조금은 파리한 인상을 한 오진우였다.
지관영이 그가 갇혀 있던 감옥을 우스울 정도로 쉽게 분해해 버린 뒤, 오진우는 센터 훈련장 하나를 통으로 감옥으로 바꾼 곳에 갇혀 있었다. 지금은 그곳까지 영향이 미칠 것을 우려해 어쩔 수 없이 꺼내온 거다.
다소 거친 이동에도 반항할 의지조차 보이지 않던 그는, 창백한 표정을 한 태훈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크게 뜨더니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서 떨어진 태평한 인사에, 최태훈은 그제야 처음으로 저 남자가 제 연인과 같은 ‘측정불가’의 사내임을 실감했다. 이 심각하고 무거운 상황에서도 혼자 아무런 긴장감이 없는 얼굴은, 지관영에게서 볼 수 있던 거다.
최태훈의 입에서는 누가 들어도 안녕 못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예. 안녕하십니까.”
“무슨 소리가 들린다 했더니. 지관영 씨네요.”
“보, 보이십니까? 어떻습니까, 지금?”
가이드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오진우에게 확 다가갔다.
물론 다른 연구원들이 그를 잔뜩 포위하고 있어서 완전히 닿을 수는 없었지만, 그건 태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가까운 거리였다. 지관영이 힘을 쓰기 시작하자 투시 능력을 가진 에스퍼마저 저 안을 보기 어려워진 터라, 최태훈은 내부 상황을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오진우의 말이 너무나 일상적인 어조로 흘러나오자, 다른 연구원들조차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한 얼굴을 했다. 오진우는 그 반응들에 고개를 작게 갸웃하더니, 조금은 감탄하는 어조로 대답했다.
“컨트롤이 대단하네요. 훈련장 전체를 완전히 분리 분해해서 그걸 통째로 감옥으로 만들 생각이신가 봅니다.”
“그거 말고! 지금 지관영 씨요!”
“…….”
“그러니까 혹시, 다쳤다거나. 그런…….”
짙은 침묵이 깔렸다.
오진우는 거의 필사적인 얼굴이 된 태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것에 다른 연구원들도 설마 싶어져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윽고, 이제껏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표정의 변화가 없던 오진우의 얼굴에 흐릿하지만 분명한 미소가 걸렸다. 태훈은 그 웃음의 의미를 채 파악하지 못하고 바짝바짝 피가 마르는 몇 초를 버텼다.
“다칠 리가 없잖습니까.”
불안한 얼굴의 가이드를 달래듯 다정한 기운이 어린 목소리였다. 누군가의 입에서 헛웃음 같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좀 기가 차는 일이긴 했다. 자신들은 이렇게 바짝 굳은 채로 대기하고 있는데, 소위 측정 불가라는 저 두 사내는 하나같이 긴장감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순간이었다.
크고 작은 소리가 찢기듯 들리던 훈련장에서, 귀가 아플 정도의 충돌음이 났다. 얼마 안 가 놀라 휘둥그레진 표정이 된 사람들 뒤로 무언가 쩍 벌어지는 소리 역시 나기 시작했다. 훈련장의 벽이 마치 단위 단위로 쪼개지듯 금이 가기 시작한 거다.
“어, 어어!”
금방이라도 사람들에게 쏟아질 듯이 휘청거리는 거대한 돌덩이에 사방에서 놀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에스퍼라면 그 정도야 눈 깜박할 사이에 피할 수 있지만, 가이드는 다르다. 그들은 제 페어를 지탱하는 무형의 힘을 제외하고는, 그저 평범한 미들과 다를 바 없다.
몇몇 연구원들이 급히 가이드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지만, 벽의 붕괴 속도가 더 빨랐다. 최태훈은 거대한 철근이 휘어지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시야가 까맣게 변하고, 또 거기서 몇 초가 지나도 그가 예상했던 끔찍한 충돌음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사방이 고요해졌다. 훈련장 중앙에서 들리던 파열음도 사라지고, 어느 순간 사이렌 소리조차 멎은 채다. 가이드는 질린 얼굴로 주춤주춤 눈을 떴다.
최태훈의 시선 끝에는 특수 소재의 족쇄를 찬 오진우가 있다. 검푸른 색의 쇳덩이에 구속당한 채로도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은 그는, 마치 지휘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반쯤 무너졌던 벽이 반대로 끼긱대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 쿠웅, 하고 육중한 벽이 반대 방향으로 곱게 떨어져 내렸다. 최태훈은 너무도 쉽게 상황을 정리한 오진우를 멍하게 바라보았다.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오진우는 빠르게 입을 열었다.
“반대쪽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먼저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숨을 죽였다. 하지만 그 침묵을 단박에 깨부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뭐야?”
“관영 씨!”
근사한 얼굴 가득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지관영이었다. 한쪽만 치켜 올라간 눈썹은 그가 꽤 열 받았다는 걸 여과 없이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는 들어가기 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옷에 먼지 하나 묻은 게 없었다.
“최태훈은 ‘센터에서’ 보호하라고 했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잠깐 나온다는 게.”
오진우는 다른 연구원들 대신 제가 먼저 사과했다.
허나 에스퍼는 그마저도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곧바로 제 페어에게 직행해서 늘씬하게 뻗은 몸을 무작정 끌어당겨 안았다. 최태훈은 놀라 심장이 쿵쾅대고 뛰는 와중에도 연인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했다.
“여자는 기절했고, ……가이드 쪽은 그 옆에 있습니다.”
“큰 신세를 졌습니다. 지관영 씨.”
센터장 권다희의 말에 지관영은 귀찮다는 듯 대충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눈이 다음으로 머문 건 오진우였다.
물론, 앞선 감사 인사와는 다른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선생과 이한솔이 벌인 각종 사건에 간접적이라도 연관이 되어있는 그는 아직 범죄자의 낙인을 채 벗지 못한 상태다. 오진우는 그 말 없는 눈짓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이 쭉 풀린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훈련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잠잠해진 저 안쪽에, 김권석이 있다. 당장 물리적인 위협이 사라지고 나자 그제야 머릿속에 하나둘 이성적인 질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왠지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해서, 입술도 꽉 힘주어 깨물었다.
자살이라니. 권석 형이 대체 왜?
태훈은 제게 프러포즈 반지를 자랑하며 웃던 사내를 떠올리고 울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에스퍼는 그런 제 가이드의 등을 작게 도닥였다.
“이제 상황은…… 정리된 건가요.”
센터장의 입에서 낮은 토로 같은 문장이 흘러나왔다.
연구원들은 조를 이루어 조심스럽게 훈련장 내부로 진입하고 있고, 부서진 건물 잔해들 역시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허나 아직 과거의 기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약간 창백하게 보였다.
“아뇨, 센터장님.”
부정의 말을 담기에는 너무도 느긋하고 따뜻한 색을 띤 목소리였다. 권다희는 제게 대답한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빙긋이 눈을 접고 웃고 있는 중년의 사내가 있었다.
“어느 쪽 소속의 분이죠?”
“가이드 멘탈 케어 부서입니다. 자살한 김권석 씨의 담당이기도 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참고인이었다. 센터장은 선생에게 성큼 다가가서 조금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상담받을 때 뭔가 특이사항 같은 건 없었나요? 전조증상이라든지.”
“아뇨. 그런 건 전혀 짚어지지 않았습니다. 약혼 계획을 말하기까지 했었으니까요.”
“……아. 세상에.”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탄식에 선생은 눈썹을 팔자로 휜 채로 연민인지 동정인지 모를 얼굴을 했다. 상황을 정리하던 이미현은 눈에 익은 사내를 보고 저도 얼른 이쪽으로 다가왔다. 선생은 그녀의 가이드를 케어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미현은 이 사내를 최태훈의 멘탈 케어 담당으로 믿고 추천했었다.
“센터장님, 무슨 일인가요?”
“이분께서 지금 그 가이드 분의 멘탈 케어를 진행하셨다는군요. 이전에 특이징후는 없었고요.”
미현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김권석은 태훈과 어울리는 걸 먼발치에서나마 보았던 사내다. 가이드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매칭되는 상대가 없어서, 매칭되고 나서는 페어의 유명세 때문에 늘 겉돌던 최태훈에게 처음으로 생긴 동류의 친구가 권석이었다. 그래서 이미현은 이제껏 말 한마디 붙인 적 없는 그에게 내심 고마워했었다. ‘앞으로도 저렇게 지내면 정말 좋겠다’ 하며 이루어지지 않을 미래를 상상한 적도 있다.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울음이 터졌다.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는 연구원들과 직원들이었다. 김권석도, 그의 연인인 유진영도 모두 센터의 일원이었다. 고작 몇 시간 전만 해도 함께하던 사람들인 거다.
선생은 그 애도의 현장을 느긋하게 눈에 담더니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안경을 꺼내 부드러운 천으로 문질러 닦으며 입을 열었다.
“왜 사람은 한 치 앞도 제대로 못 보고 사는 걸까요.”
현장을 정리하는 분주한 기운과 옅은 울음소리가 함께 섞여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묘하게 귀에 꽂히는 낮은 목소리였다. 센터장 권다희와 이미현의 시선이 중년의 사내에게로 향했다. 얼핏 듣기 좋을지도 몰랐을 선생의 목소리가 유독 이질적으로 느껴진 건, 그 누구도 느긋하거나 여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들리는 평온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상담실을 빠져나가자마자 곧장 자살하게 될 것도 모른 채 결혼반지를 자랑하고…….”
선생은 제 안경을 빛에 비추며 손자국이 남은 것이 있나 꼼꼼히 살핀 후 그것을 걸어 썼다. 묘하게 빛나는 안경렌즈는 사내의 눈에 담긴 감정을 감춰버렸다.
“당장 자기 가이드를 걱정하기 바쁜 상황이 될 텐데 다른 가이드 따위가 죽은 걸 슬퍼하질 않나. 참 이상합니다, 역시.”
이미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왠지 모르게 눈가가 부들거렸다. 그녀는 지금 제 앞에 있는 익숙한 중년 사내에게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미현은 열네 살 때 에스퍼로 발현한 이후로 참 수많은 일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이상한 감각이 치민 적은 없었다. 뒷목이 싸늘해지는 불안감이라니, 이건 공포와도 그 색이 달랐다.
한편 센터장 권다희는 그녀답지 않게 조금은 얼이 빠졌다. 센터장은 저 노랫소리 같은 말투를 알고 있다. 그 무엇도 평생 잊지 못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기묘한 음률을 탄 어조는 가장 어두운 곳에 눌러 감춰둔 것 중 하나다.
“미현 씨 가이드, 아직 대학 졸업도 못 했잖아요. 이제 군 제대하고 4학년이던가.”
사내의 입에서 쯧쯧 혀를 차는 소리가 났다.
“연상 누나랑 사귀면서 취업 준비한다고 꽤 고민이 많은 것 같던데, 우리 친구.”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건가요, ‘선생님’.”
센터장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이미현이 조금 전 입에 담은 끔찍할 만큼 익숙한 단어와 눈앞에 있는 낯선 얼굴을 연상하는 데 성공했다.
“아직 피지도 못한 청년, 이대로 꺾이게 하긴 좀 아쉽거든요, 나도.”
“……무슨 소리냐고요!”
이미현의 목소리가 커졌다.
각자의 일을 하느라 바쁘던 이들의 이목이 모두 그녀에게로 쏠렸다. 창백한 얼굴을 한 태훈의 손을 주무르고 그 끝에 입 맞추며 달래던 에스퍼의 시선 역시 그제야 그쪽으로 향했다.
지관영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고 소란이 일어난 곳에 감각을 집중했다. 거기엔 센터장과 이미현, 그리고…… 제 가이드의 상담사라는 사내가 있다.
막 힘을 사용한지라 예민한 눈이 그 중년의 사내를 빠르게 훑었다. 신체의 발달 정도를 미루어 봤을 때 사내는 에스퍼가 분명했다. 눈이 멀지 않는 이상, 저건 평범한 가이드라고는 볼 수 없다. 기묘하게 활성화된 근육들은 돌발 상황에서도 언제나 튀어 움직일 수 있는 에스퍼의 그것이다.
만약 물리계처럼 극한으로 발달하였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지능계인 오연과 비슷하거나 그 아래인 정도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최태훈이 왜 저 사내를 ‘가이드로’ 알고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저 사내는…… 이상했다. 분명히 에스퍼인데, 에스퍼로 보이지 않는다. 마치 옅은 장막을 친 느낌이었다.
선생은 저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이미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답지 않게 얼빠진 얼굴을 한 센터장을 바라보았다. 그는 센터장 권다희의 혼란을 어렵잖게 읽을 수 있다. 권다희는 그가 햇병아리 연구원 시절 때부터 가르친 에스퍼다.
“다희야. 내가 늘 말했잖아?”
“뭐……?”
“눈앞에 보이는 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센터장은 늘 자신을 따라오던 악몽에서 들리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꿈속에서는 다른 얼굴과 다른 목소리였지만, 그 음성은 지금처럼 일순 다정하게 들리는 말투로 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늘 저를 이렇게 상냥하게 이름으로 불렀다.
“넌 그 머리는 꽤 쓸 만한데, 영 독하질 못해서…….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종종 했지.”
“……말도, 안, 돼…….”
“하하. 그래도 벌써 센터장이라니. 우리 신입이 많이 컸네.”
선생이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건 혼란한 정신을 이끄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다운, 정말이지 따뜻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 웃음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힌 훈련장 입구의 문이 열렸다. 힘을 사용한 후유증으로 약간 나른하게 서 있던 오진우는 들어온 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튕기듯 몸을 굳히고 서늘하게 얼어붙은 얼굴을 했다.
지관영의 눈에도 순간 이채가 흘렀다. 잠시 바깥에서 쏟아지는 빛 때문에 잠시 인상을 찌푸렸던 태훈은, 제 페어가 뚫어져라 보고 있는 방문객을 향해 저도 고개를 돌렸다가 마치 석상처럼 얼어붙었다.
느슨하게 풀어졌던 마음속 긴장감이 순식간에 한계까지 당겨져 팽팽해졌다. 센터장은 이번에는 제 수족들을 향해 지시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끝이 조금은 떨리기는 했지만, 분명하고 단호한 어조였다.
“-전체 에스퍼!”
지관영은 최태훈의 이마에 작게 입 맞추고는 연인에게서 떨어져 몸을 돌렸다. 태훈은 그것이 빠르지 않은 움직임인데도 왠지 붙잡을 수가 없어서, 뒤늦게 어깨를 흠칫했다.
“당장 ‘선생’과 ‘이한솔’을 제압한다!”
센터장의 목소리에도 아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봤다. 첫 번째 이유는 갑작스레 센터의 한가운데에 나타난 이한솔의 모습에 너무도 놀란 탓이고, 그다음은 그녀가 지칭한 ‘선생’이라는 극악무도한 에스퍼가 누구인지 그 갈피를 잡지 못한 탓이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건 이미현뿐이었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으로 센터장의 말을 곧바로 따랐다.
“하, 하하하, 하하, 하하하!”
미현에게 팔을 꺾여 붙잡힌 선생의 입에서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봐, 이렇게 눈앞에 두고서도 모른다니까. 하하!”
사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몇몇 에스퍼의 입에서 경악에 찬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센터 내에서 비밀리에 움직이던 조력자이자 온갖 악랄한 범죄행위의 중심에 있다던 ‘선생’이라는 에스퍼가 자신의 가이드와 시간을 보내던 자임을 알게 되어서다.
최태훈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채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훈은 지금 제가 지독한 악몽에 갇힌 것만 같을 뿐이다. 김권석은 죽었고, 그가 관리하던 훈련장은 페어의 폭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리고 지금은 조금 전까지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상담사가 수많은 악행의 중심에 서 있는 ‘선생’이라고 한다. 혼란한 머릿속이 한계치 이상의 충격으로 더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 채 검게 깜박였다.
선생은 에스퍼의 온갖 힘에 순식간에 구속되었다. 이미현의 불꽃을 시작으로 해서 살벌할 정도의 냉기를 품은 얼음과 염력 등이 선생 단 한 명을 포박하는 데 사용되었다.
최태훈은 그것을 두려움 섞인 시선으로 멀찍이서 눈에 담았다. 제가 알고 있는 상담사는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걸고 있는 중년 사내였다. 저렇게 경박할 정도로 낄낄대며 웃는 남자가 아니었다.
한편, 에스퍼 지관영이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향한 곳은 단 하나다. 그는 제가 일전에 죽이지 않고 ‘놓아준’ 가이드의 숨통을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끊어버릴 작정이었다.
지관영은 순식간에 이한솔의 코앞까지 향했다. 유전형질부터 변형된 가이드라면, 아주 약간의 의심조차 남지 않게 만들어 버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거의 간발의 차이로 지관영을 뒤따라온 사람이 있었다.
지관영은 제 팔을 붙잡은 에스퍼를 향해 눈썹 하나를 휘더니,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언제는 잡아서 끌고 오든, 두들겨 패 죽이든 하라면서?”
“…….”
지관영의 팔을 붙잡은 오연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건 공포 때문이 아니다. 지능계 에스퍼인 그로서는 지관영의 힘을 이기기엔 턱없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괴물은 저를 있는 힘껏 막고 있는 미약한 힘이 골치 아프다는 듯 살짝 고개를 젖히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만치 뒤에 제 가이드가 있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오연을 당장에 벽에 내던졌을 거다. 저번과는 달리 최태훈이 깨어 있으니, 이게 참 문제였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이한솔은 한참 만에 보는 지관영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붙임성 있게 물었다. 관영은 대답 대신 저를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사내를 작은 한숨과 함께 밀어내는 것을 택했다.
버티고 섰던 오연의 몸은 단 한 번에 바닥에 내리꽂혔다.
“……형!”
쇳덩이가 절그럭대며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오진우는 당장에라도 제 형이 쓰러진 쪽으로 달려갈 듯 흉흉한 목소리를 내며 저를 붙잡고 있는 사슬을 끊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오진우를 포박하고 있는 에스퍼가 그 살벌한 이를 드러내었다.
선생과 이한솔, 그리고 오진우까지. 지금 센터를 계엄 상태로 만들었던 모든 사람이 한 곳에 모여 있다.
“오연 연구원.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놓으세요.”
지관영의 목소리가 제 발목을 붙잡고 있는 사내에게로 나직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오연은 아직 거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도 끝까지 관영을 막으려 들었다.
센터의 두뇌. 언제나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냉엄한 심판관.
지관영은 저를 붙들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그 별명을 되짚었다. 잡힌 채로도 이한솔을 죽일 방법은 많다. 지관영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지관영이 저를 바라본 것만으로도 좋다는 양, 한솔은 뺨에 옅게 상기된 미소를 걸었다. 사내치고는 고운 이목구비를 한 이한솔은 누가 봐도 열이 오른 사랑에 빠진 청년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괴물이 사랑에 빠진 유일한 이의 목소리였다.
“괜찮으십니까? 정신 차려요, 오연 씨!”
“…….”
“지관영 씨. 물러서십시오.”
에스퍼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이지 단 1초면 죽일 수 있는 이한솔을 눈앞에 두고, 지금 그는 연인의 말 한마디에 휘둘리고 있다.
“저 사람은 내버려두시고요. 빨리.”
“……최태훈.”
“저 사람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오진우 씨가 곤란해지시는 거 아니었습니까.”
이런 상황에서도 절대로 죽는다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 애쓰며 상황을 표현하는 최태훈이다. 괴물은 제 다리를 꽉 붙들고 있는 오연을 부축하는 연인을 내려다보며 단정 짓듯 말했다.
“죽여야 해.”
“안 됩니다.”
“저건 위험해. 안 돼.”
“저 가이드가 죽으면 어떤 상황이 되는지 아시잖습니까. 마음은 알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지관영은 울컥한 눈으로 제 연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최태훈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용납할 수 없다. 헌데 흐리게 눈을 뜬 연구원 하나는 이 와중에도 저를 필사적으로 막지 못해 안달이고, 하나뿐인 페어는 그것을 돕는 기막힌 상황이라니!
이건 어디에다 토로할 수도 없다.
괴물은 자신은 흔들림 없이 바라보는 연인의 눈에 작게 욕을 삼키며 신경질적으로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스퍼가 이한솔을 향해 일제히 몰려들어 살벌한 기세로 포박하기 시작했다.
최태훈은 눈으로는 제 에스퍼를 좇으며 오연을 부축해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키는 엇비슷하지만 언제나 훨씬 더 강인했던 사내는, 제대로 땅을 짚고 서지도 못한 채 휘청거렸다. 살짝 놀란 태훈은 급히 물었다.
“오연 씨, 괜찮으십니까?”
오연의 고개가 느리게 움직였다. 퉁퉁 부은 얼굴은 정확히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가이드는 살짝 혀를 차며 오연을 다른 연구원에게 넘긴 후, 쓰러지듯 벽에 기대앉았다.
등에 새겨진 사내의 이름이 따끔거리고 아팠다.
저만치에서 주먹을 꽉 쥔 채로 속을 가라앉히고 있는 연인이 보였다. 말은 기세 좋게 했지만, 사실 지관영과의 관계를 잃는 걸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건 최태훈 그 자신이다.
최태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몸을 움츠렸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한 행동이 옳은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제야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연구원들에게 제압당한 선생의 입에서 끅끅대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아야야, 왜 이리 살벌하게 구시나! 나처럼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사람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하, 하하, 나 같은 거보다. 저길 좀 봐요!”
선생은 완전히 바닥에 눌린 채로도 고개를 틀어 목소리를 높였다. 가이드는 한때는 듣기 좋다고 생각했던 그 목소리가 싫어서 귀를 막았다. 하지만 그건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귀를 막아도 옅어지기는커녕, 문장의 하나하나가 모두 최면처럼 머릿속에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아들이 가이드 살해범이라는 충격으로 쓰러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천애 고아가 되어 쌓인 증오보다 더 위에 있는 우애라, 눈물이 다 날 것 같지 않습니까? 하하!”
현실을 후벼 파는 말에 치료를 받는 제 형에게서 움직이지 않던 오진우의 시선이 바닥으로 푹 꺼졌다. 형제의 과거에서 제 자신의 그림자를 읽은 지관영의 얼굴 역시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역시 제일 재밌는 건 지관영이죠! 하하! 하하하! 왜 죽이지 못하죠, 이한솔 씨를?”
“…….”
“가이드가 막아서? 최태훈 씨에게 미움받고 싶진 않나 봐요? 하하, 하하핫!”
선생의 입에서 ‘최태훈’의 이름이 담기는 순간 에스퍼의 표정이 달라졌다. 지관영의 입에서 정말로 짜증 난다는 듯한 헛웃음이 흘렀다. 그는 다른 연구원들의 힘을 대번에 ‘뜯어내고는’ 선생을 그대로 벽 위쪽에 처박았다.
쾅, 하고 엄청난 굉음이 났다.
제아무리 에스퍼라고 한들 뼈 몇 개는 박살 나고도 충분한 타격일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엉망이 된 선생의 가운 위로 희미하게 피가 비쳐 보였다.
허나 괴물은 그걸 보고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곧바로 선생의 머리로 옆에 있던 철근을 찔러 넣으려고 했다. 최태훈은 그걸 보면서도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설 엄두조차 못 냈다.
“어, 어어, 잠깐! 잠깐! 하아, 지관영 씨, 잠깐!”
다급하게 높아진 선생의 목소리였다.
지관영은 죽기 전 마지막 유언을 듣겠다는 듯이 눈썹을 휜 채 그 쇳덩이를 선생의 머리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아슬아슬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그런 지관영의 행동이 마냥 즐겁다는 듯, 거칠게 쿨럭이고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클클대는 웃음을 흘렸다.
그는 지관영의 이런 변화가 재미있었다. 지관영은 강남 테러 현장 때만 해도 폭주한 에스퍼의 안의 장기까지 찢어발기던 괴물이다. 사람의 마음 같은 건 감히 흉내 내지도 못할, 일그러지고 흉한 비인간의 존재다.
헌데 그런 지관영이 변했다. 미쳐 날뛰는 에스퍼를 티끌 하나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배는 쓸데없는 힘을 쓰고, 최태훈의 말을 따라 이한솔을 놓아주기까지 한다.
역시 가이드는 놀라운 존재다.
제가 아무리 수없이 많은 가이드를 만든다고 한들 저렇게 ‘완벽한’ 가이드를 만들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선생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큭, 크큭, 오연 연구원? 당신처럼 꼼꼼하고 뭐…… 그럭저럭 쓸 만한 머리를 가진 에스퍼라면 잘 알 겁니다.”
“…….”
“내가 ‘카운슬링’ 했던 가이드의 숫자는 몇입니까?”
난데없는 물음이었다. 사람들의 모든 시선, 심지어는 에스퍼에게 완전히 짓눌린 채인 이한솔의 눈마저 오연을 향했다. 지관영에게 막혔던 근육의 힘이 천천히 돌아오는 걸 느끼며 손을 움직이고 있던 오연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저 위에 처박혀 피를 흘리는 선생을 올려다보았다.
‘선생이 카운슬링 했던 가이드의 숫자’.
낯선 얼굴을 걸고 있는 ‘선생’은 센터에 거의 3년 전부터 들어와 있었다. 로테이션으로 돌아가며 상담하는 구조 특성상, 못해도 센터 소속 가이드의 절반은 저 선생을 만났을 거다.
선생은 오연의 생각이 뻔히 그려지는지 피를 쿨럭이면서도 낄낄대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손끝에서 초조하게 불꽃을 만들고 있는 이미현은 그 웃음소리가 싫었다. 검은 불안이 마음속에서 일렁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그런 짐작은 정확히 적중했다.
“그리고 거기서 내가 저기 저쪽에 있는 김권석처럼 ‘자살’을 카운슬링한 가이드는 또 몇 명일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이미현이 거의 울부짖듯이 외쳤다.
여기저기서 급하게 숨을 들이켜거나 말도 안 된다는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터졌다. 에스퍼들의 힘이 마치 거친 파도가 치듯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지관영은 눈을 부릅뜬 채로 제가 천장에 매다 박은 사내를 노려보았다.
“경고합니다. 나에게 손끝이라도 까딱하면, 그때마다 날 만난 가이드 중 한 명씩 무작위로 죽어 나갈 겁니다.”
선생은 낄낄대며 덧붙였다. ‘프러포즈를 준비하던 김권석 씨처럼!’
괴물은 자신이 제압한 사내를 보며 멍하게 물었다.
“……뭐?”
“하하하,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가이드가 목매다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날 잘 지키는 게 좋을 거예요. 저어쪽 에스퍼 친구들은 자기 페어가 날 안 거쳤다고 아주 거리낄 게 없어 보이잖아, 무섭게시리.”
연구원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조금 전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모두 똑똑히 보았다. 아니, 사실 그런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의 페어가 제 눈앞에서 죽는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지관영은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느리게, 최태훈을 향해 제 고개를 돌렸다. 연인은 넋 나간 듯 벽에 기대앉아있다. 언제나 꼿꼿한 자세로 걷던 에스퍼는 조금은 휘청거리면서도 제 본능이 찾는 이를 따라갔다.
“그렇다고 해서 저쪽의 이한솔 씨를 건드리면?”
선생은 연구원들을 내려다보며 킬킬대고 웃었다.
이제 이 판의 주도권은 선생의 손에 쥐어졌다. 에스퍼의 목숨줄을 쥔 것이 가이드라면, 그런 가이드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건 ‘선생’이다.
“한솔 씨가 ‘오연 연구원 동생’의 주도권을 놓고 죽겠어요, 설마. 잘 알고 있겠지만 그러면 오진우 씨도 죽는 겁니다.”
선생은 어느 순간 자유로워진 제 손가락 끝을 움찔거리다가, 처박혔던 벽에서 휙 뛰어내렸다. 온갖 흉악 사건의 중심에 있다고 점쳐지는 테러리스트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이곳에서 저 사내를 막을 수 있는 이는 없다.
최태훈의 앞에 무릎 꿇듯 앉아 고개 숙인 지관영조차도.
“‘당신이 이한솔의 에스퍼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하, 하하하, 하핫! 맘에도 없는 소리는!”
뼈가 붙기 시작했는지 문장 중간마다 약간 고통이 섞인 신음을 섞으면서도, 오진우를 흉내 내는 목소리는 한없이 즐거워 보였다. 선생은 족쇄에 감긴 오진우의 앞에서 낄낄대며 눈을 휘어 웃었다.
“실은 지관영이, 드디어 저 세 번째가 나타나서…….”
“…….”
“기뻤지?”
마치 폐에 대못이 박힌 사람처럼 오진우의 숨이 거칠어졌다. 에스퍼의 손에서 풀려나 자유로워진 이한솔이 쭉 기지개를 켜며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10년간 꿈도 못 꿨던, 이 지긋지긋한 생활에서 벗어날 기회가 드디어 눈앞에 있는걸? 아, 하지만 우리 착한 진우는 거짓말을 하지, 그냥 내가 안고 가겠다고 말이야! 이 악몽에서 사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하다고!”
새하얗게 질린 제 동생을 지켜보는 오연의 눈시울이 점점 붉어졌다. 그에게 오진우는, 어떤 모습을 했고 어떤 짓을 했든 여전히 갓 스무 살이 되었던 10년 전의 어린 동생일 뿐이다.
마치 제가 모든 것의 죄인인 양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하더라도 단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인 거다.
“사실은 너도 이제 정말 살고 싶은 거잖아. 진우야.”
“…….”
“그렇게나 따르고 좋아했던 형이랑, 장례식 때도 못 갔던 부모님 성묘도 가고 말야. 이제는 제발 사람들도 만나서 숨도 쉬고. 응? 으응? 하, 하하하, 하하!”
‘F’.
오진우의 거짓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고개조차 못 든 채로 울고 있는 오진우의 모습처럼 엄청난 비밀이 아니다. 그는 사실 이한솔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지관영은 그 거짓말을 눈치챈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아. 협상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선생은 새로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제 몸의 근육들을 주무르더니, 살짝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 썼다.
“빨리 하고 싶은 실험이 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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