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delicate
지관영과 최태훈에게 엄명이 떨어졌다.
‘반드시 친해질 것’.
서로 싸운 초등학생들에게나 내려질 것 같은 명령은, 사실 첫 섹스를 하고 관사를 나오는 길에야 연락처를 교환한 이 삭막한 페어에게 굉장히 필요한 것이었다. 최태훈은 지관영과 휴대폰 번호를 주고받으며 제 자신이 연락처조차 모르는 사내와 뒹굴었다는 것에 충격받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친해진다고 하는 그 추상적인 표현은 ‘오늘부터 너랑 나는 친해지는 거야, 땅땅!’ 하고 못 박는다고 해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즉, 지관영이 잠시 중단되었던 영화 촬영 현장으로 돌아가고, 최태훈이 센터의 교육과 적성검사를 받으며 어색하게나마 근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고 해서 곧바로 가까워지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늘은 뭐 했어요?
-음……. 똑같은데. 오전에는 멘탈 케어 상담, 오후에는 센터 교육이랑 적성검사. 아. 전 가이드 교육 쪽에 잘 맞는답니다.
-어울리네요. 동생들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물론 서로에 대해 조금은 더 알게 되기도 했다.
지관영은 최태훈이 제 동생들을 끔찍하게 챙기면서 심지어는 그들을 귀찮아하지도 않는다는 것에 살짝 놀랐고, 최태훈은 지관영이 이상하리만치 사람에 대한 신뢰와 기대가 없다는 것을 알고 내심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에스퍼 지관영과 가이드 최태훈은 마치 양 극단에 선 듯한 성정을 가졌다. 어찌나 공통점을 찾기 힘든지, 페어로서의 관계를 차치하고서라도 왜 네임을 공유하게 되었는지 의문일 정도다.
태훈은 침대에 누워 멍한 얼굴로 꺼진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지관영은 기본적으로 꽤 친절하고 상냥하다. 평소 행동만 보면 정말 언제나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다 못해 ‘아 이 사람은 정말 나를 어린아이쯤으로 보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배려했다. 물론, 일전에 센터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끔 말도 안 되는 방향의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고, 가끔은 이렇게 저를 깜짝 놀라게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자려고요?”
“으왁, 깜짝이야!”
지관영은 하하, 웃으며 발소리도 없이 침실로 들어섰다.
조금 전까지 제가 메시지를 했던 사내가 눈앞에 나타난 것에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을 했던 가이드는, 얼마 안 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렇지 않아도 매일같이 북적이고 시끄러운 집에서 살다가 난데없는 독립생활을 하게 된 이후로 언제나 라디오나 TV를 틀며 사람 소리가 나도록 하던 태훈이다. 에스퍼는 테이블의 의자를 침대 가로 당겨 앉아 느긋하게 다리를 꼰 채 어깨를 으쓱했다.
“촬영은?”
“제 씬은 다 찍고 왔어요.”
“늦게까지 고생입니다. 배우도 편한 직업은 아니네요.”
인터넷에서는 촬영장에 복귀한 ‘에스퍼 지관영’의 일상에 대한 기사가 하루에 한두 개씩은 꼭 뜬다. 지관영은 미들에게도, 가이드에게도, 심지어는 같은 에스퍼에게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다. 보통 에스퍼에 대한 인식이 일종의 기묘한 초능력자에 가까웠던 것을 단번에 상쇄하는 배우라는 타이틀 덕분이었다.
그는 벌써 에스퍼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소재의 영화와 드라마 시나리오도 몇 개 받았다고 했다. 최태훈은 가끔 제 앞의 사내가 자신의 부탁 때문에 괜히 배우 일을 계속하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쁘진 않아요.”
“……드라마도, 영화도 싫어하면서?”
“하하.”
그도 그럴 것이, 지관영은 배우라는 직업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들이 나오는 모든 것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그 자신이 출연하는 것마저 제대로 챙겨 보지 않을 정도였다. 가이드는 지관영의 전작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그가 ‘안 봐서 모르겠는데요. 대본과는 다르네요?’라고 말하는 것에 눈을 크게 뜬 것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관영은, 저 에스퍼는 정말 지독하게도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마음속 인간애라는 부분이 깔끔하게 도려내진 느낌이 들 정도다.
……왜?
최태훈은 처음으로 지관영이라는 사내에 대한 순수한 궁금함이 생겼다. 관영은 어느새 태훈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손끝으로 제 가이드의 귓가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이건 최태훈이 그나마 익숙해진 사내의 낯선 행동 중 하나다.
이렇게 같이 있을 때면 지관영은 최태훈의 얼굴이나 머리카락, 어깨선을 따라 손을 움직인다. 처음에는 그것에 빳빳하게 굳었던 가이드는, 에스퍼의 그런 행동이 굳이 섹스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딱 그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긴장을 풀게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섹스보다야 이쪽이 마음 편했다.
“지관영 씨.”
“네.”
“내일은 스케줄 있습니까?”
“아뇨. 오프.”
지관영은 제 손을 가이드의 귀에서부터 턱선을 따라 쭉 미끄러트리다가 모양 좋은 입술을 톡 건드렸다. 최태훈은 그것에 저도 모르게 작게 푸흐, 하고 옅은 웃음을 흘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미소에 에스퍼는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그럼 내일 좀 친해지는 건 어떻습니까.”
“섹스?”
“……지관영 씨.”
“장난이었어요. 그래, 뭘 하는 게 좋을까요.”
나이가 들면 능청이 느는 걸까.
최태훈은 저보다 여섯 살 많은 연상의 사내의 나른한 웃음을 보며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뭐든지요. 음. 우선 센터나 관사는 좀 나가고 싶습니다.”
“동감. 질리네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지관영은 센터 사람들을 몹시 귀찮아한다. 늘 완벽하리만치 정중한 태도를 구사할 수 있는 그가 묘하게 비뚜름해지는 것도 언제나 늘 센터에서다. 태훈은 곰곰이 눈을 굴렸다. 페어가 이제껏 센터 혹은 관사만 오갔던 것도 사실 다 이유가 있다.
아직 세상 사람들은 지관영의 가이드가 동성의 사내라는 것을 모른다. 태훈에 대한 정보는 센터 소속인, 서로 이름이 묶인 상대라는 게 다다. 그렇기에 태훈은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지관영의 유명세 때문에 사람이 많은 곳에 가기 어려운 것도 한몫했다.
“……지관영 씨 집?”
관영이 살짝 찌푸리듯 웃었다. 그러고는 작게 물었다.
“거긴 왜?”
“갈 곳이 마땅치 않잖습니까. 그리고 왜, 보통 연예인들은 스캔들 나면 집에서 논다고들 하지 않나요.”
“스캔들이라.”
“이것도 일종의 스캔들이지 않습니까.”
지관영은 가끔 이렇게 묘한 어투가 되곤 한다. 늘 걸고 있는 존대가 아닌 약간은 오만한 듯한 반말 어조다. 최태훈은 지관영과 대화하며 어렴풋이, 이것이 그의 원래 말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의 말에 어쩔 수 없다는 듯 희미하게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나직이 덧붙였다.
“가시고 싶으시다면야.”
* * *
대한민국에서 자영그룹을 모르는 이는 없다.
헬기 사고로 세상을 떠난 지영훈 전 회장 부부의 유일한 외동아들의 이름 역시 거의 대부분 아는 사실이다. 최태훈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널찍한 저택의 응접실에 앉아서 다과를 준비하는 관영을 지켜보았다. 배우 지관영은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배우이기도 했지만 호사가들이 즐겨 떠드는 비극적 가정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재벌 총수의 외아들이었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친척들의 아귀다툼에 철저히 외면받다가 결국 자영그룹을 제 아버지가 끔찍하게 증오했던 숙부에게 빼앗기듯 넘긴 후, 그 자신은 광대가 된 사내.
최태훈은 부모의 유산의 절반에서 그 반 토막, 또다시 그것의 반절을 겨우 물려받았다던 지관영이 마지막까지 단호하게 요구했던 단 한 가지 조건 역시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지금 에스퍼와 가이드가 함께 마주 보고 앉아있는 이 저택이었다.
지관영이 제 에스퍼라는 걸 알게 된 후에야 한 박자 늦게 뒤져본 인터넷과 각종 언론에서는 비극 속 주연배우의 개인사를 한껏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건 찾아봤다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로 노골적이어서 태훈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지만, 지관영은 그것에 전혀 대응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홍차가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그, 여름마다 홍차 티백으로 냉침은 자주 해 마십니다. 여동생이 좋아해서.”
“잘됐네요.”
가이드는 상대를 잘 꿰뚫어 보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둔하지도 않다. 그는 지금 저택에 들어선 이후 아주 묘하게 태도가 달라진 지관영을 짚어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어떤 종류의 변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태훈이다.
“차는 있는데, 같이 들 간식 같은 게 없네요.”
“이것만 있어도 충분합니다.”
“미안해요. 손님이 온 건 굉장히 오랜만이라.”
가이드는 그 순간 제가 느끼는 위화감 중 한 가지를 분명하게 깨달았다. 이 커다란 저택 어디에도 보통 한 명쯤 있을 법한 고용인이 없다.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을 유지하려면 입주 가정부 몇은 있을 것도 같은데, 제가 느낀 삭막함의 무게처럼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고운 잔에 홍차를 따르는 에스퍼에게 태훈의 시선이 꽂혔다. 가이드의 관찰을 느낀 지관영은 살짝 눈을 마주쳐 웃었다. 무표정하게 있을 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기분인지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사내가 저렇게 웃을 때만큼은 굉장히 따뜻한 인상이 됐다.
최태훈은 지관영이 제 앞으로 밀어준 찻잔을 들어 그 안의 홍차를 홀짝였다. 아직 그는 눈앞에 있는 남자와의 침묵이 편하지 않다. 서로를 알기 이전에 몸부터 섞었던 탓인지, 가이드는 제 에스퍼와의 어색한 분위기를 못 견뎌 했다.
“……어. 뭐, 일하시는 분은 없나 봅니다. 집이 되게 큰데.”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집안을 돌봐주시는 분들이 계세요.”
“그럼 식사나 그런 건 직접 해 먹는 겁니까?”
“뭐. 그때그때, 되는대로 대충.”
그 완벽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슨한 대답에 가이드의 얼굴에 흐린 미소가 걸렸다. 최태훈은 이제 지관영의 앞에서 이렇게 간간이 웃는다. 에스퍼는 그런 제 가이드의 모습을 단 한 순간도 놓친 적 없다.
“대단하네요. 왠지 손에 물 하나 안 묻힐 것 같았는데.”
“떠드는 만큼 대단한 집안은 아니어서요.”
갑작스레 머리 한구석에 있던 지관영에 대한 생각을 훅 내찌르는 대답에 태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에스퍼의 눈이 희미하게 가늘어졌다. 가이드는 저를 보며 웃고 있는 사내의 속내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손에 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최태훈은 지금 제 등 뒤가 불에 덴 듯 뜨겁게 열이 오르는 건지, 아니면 홍차가 너무 뜨거운 것인지도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에스퍼는 낮고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사람들 피해서 온 거니까 이쪽이 더 편하지 않나?”
“……예에. 뭐.”
또 저 말투다.
최태훈은 머리가 아득할 정도로 열이 몰렸었던 그때도 들었던 것 같은 조금은 삐딱한 어조에 어설프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나 저에게 상냥히 말을 건네는 에스퍼이지만, 최태훈은 왠지 모르게 저 낯선 말투가 지관영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인공적일 만치 흠잡을 데 없는 근사한 모습을 보이는 사내에게 저런 오만한 하대에 가까운 말투가 잘 어울린다고 느끼는 건 조금은 모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이드는 제가 느낀 바를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쪽이 더 잘 어울립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양, 에스퍼는 살짝 고개를 기울고 눈썹 하나를 휘었다.
“저한테 말을 높여 주시는 것도 감사하지만…… 어째, 그렇게 편하게 말하는 쪽이 더 잘 어울리신다고요.”
“……아하.”
“아무래도 저보다 연상이시다 보니까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냥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최태훈은 제가 말해 놓고도 왠지 민망해져서 코끝을 쓸었다.
이제껏 먼저 살갑게 다가온 것은 늘 에스퍼 쪽이었다. 최태훈이 먼저 이렇게 저 남자에게 무언가를 주장하거나 요구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지관영은 가이드의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무표정하게 태훈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이드는 그런 에스퍼의 반응에 조금 머쓱해져서 괜한 말을 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태훈은 눈앞의 남자와의 사이에 흐르는 정적이 못내 버겁다. 그 순간, 제가 에스퍼의 집에 오게 된 이유가 툭 떠올랐다. ‘반드시 친해질 것’.
“어, 음. 지관영 씨는, 어, 왜…… 배우를 하시게 된 겁니까?”
태훈은 떠오르는 질문을 두서없이 내뱉었다. 관영이 뭐라 생각할지 자신이 없어서, 괜히 그 뒤에 ‘음, 이건…… 친해지는 것의 일환입니다. 제가 지관영 씨를 잘 모르니까요.’라고 길게 횡설수설하기도 했다.
에스퍼는 그런 제 가이드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보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요란하니까.”
“예?”
“가만히만 있어도 사람들이 몰리고, 시끄럽게 이름이 오르내리니까. 그쪽이 숨기 편해서.”
“뭘…… 숨기는데요?”
가이드는 제 목소리가 조금은 멍청하게 흘러나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태훈은, 지금 제가 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내의 진솔한 대답을 듣는 중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건 센터의 연구원들이었다면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을 에스퍼의 깊숙한 생각이었다.
“나를.”
에스퍼라는 걸 감췄다는 걸까.
가이드는 그 모호한 표현을 최대한 이해하려 애쓰며 생각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생각의 시작점부터 최태훈은 쭉 가이드로 살아왔었다.
감히 28년 평생 상상도 하지 못했던 동성과의 섹스를 떨면서도 받아들였던 것도 그래서다. 가이드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낯선 남자와 몸을 섞는 것마저도 제 거부감 위에 둘 수 있었다. 그것에 단 한 순간도 의심을 가진 적 없다. 여태껏 자신이 가이드이기 때문에 누군가를 살릴 수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왜 숨겨야 합니까?”
그렇기에 최태훈은 그 자신을 숨기기 위해 요란한 껍질을 뒤집어썼다는 지관영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에스퍼는 가이드의 두 번째 질문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제 앞의 홍차만을 묵묵히 삼켰다. 그건 지관영 그 역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관영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고동색 눈동자가 이제껏 그 자신이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 빗장을 치고 눌러 왔던 것들을 간질이는 것 같다 생각했다. 사실 얼마든지 느긋한 대답으로 말을 돌릴 수 있는 일이다. 늘 그래 왔듯 상냥한 어조로 거짓을 말하면 된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 익숙한 단어들을 쉽게 토해내지 못하고 자신에게 자문했다. ‘난 왜 숨어왔을까?’
최태훈이 그 자신이 가이드임을 의심한 적 없듯, 그도 제 자신을 깊숙이 숨겨야만 ‘살 수 있다고’ 확신했었다.
최태훈은 답을 다그치지 않고 그저 제 맞은편의 에스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괴물은 조금은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뭔가 말을 해야 한다. 최태훈 저 가이드가 나를 의심하지 않도록.
나를…… 하지 않도록.
결국 관영은 제 가이드의 말간 얼굴을 보며 무작정 입을 열었다.
“……글쎄.”
지관영은 짐짓 여유롭게 대답하면서도, 그 시선만은 마치 제 앞의 사내를 탐색하듯 잠시도 떼지 않고 있다. 최태훈은 지관영의 묘한 변화에 붙일 이름을 드디어 찾아냈다.
지금 제 앞의 에스퍼는,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
저것은 ‘경계’다. 하지만 지금 최태훈은 지관영이 저에게 거리를 두는 이유가 짐작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조금은 얄궂기까지 하다. 겨우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다가갔더니, 저렇게 멀찌감치 바라보는 시선이라니.
에스퍼는 제 가이드의 표정이 묘하게 경직되는 것을 빠르게 짚어내고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걸었다. 최태훈은 그제야 지관영이 저에게 말을 놓기 시작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자각했다.
……가까워진 게 아니라, 왠지 좀 더 멀어진 것 같은데.
최태훈은 턱을 긁적였다.
* * *
“오. 이제 좀 친해진 거예요?”
최태훈은 이미현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미현은 그 뜻을 알 수 없는 웃음에 고개를 작게 갸웃하며 페어를 다시 뜯어 살폈다. 그 관찰과도 같은 눈에 지관영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이미현이 두 사내 사이에 흐르는 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지관영이 가이드에게 말을 놓기 시작했기에 사이가 호전된 건가 했는데,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 반대인 듯했다. 이미현은 분명 그 이유가 저 성격 나쁘고 심사가 배배 꼬인 에스퍼 때문이라 확신했다. 물론 그 생각은 거의 적중했다.
에스퍼는 지금 제 가이드가 껄끄러웠다.
지관영이 최태훈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은 아주 단순했다.
괴물인 제 목줄을 쥐고 있는, 얄팍한 애정을 쏟고 귀여워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애완용도의 주인’. 그게 최태훈이었다. 그는 태훈을 퍽 어여쁘게 여기며 아낄 마음도 충분했다. 하지만 에스퍼의 허용 수위는 딱 거기까지였다.
지관영 그는, 예쁜 주인과 괴물의 위치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는 엄격한 훈육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약해빠진 주인이 제 두꺼운 가죽을 벗기고 들어와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건 엄연한 규칙 위반이었다.
헌데 최태훈, 저 사내는 제가 오랫동안 견고히 쌓아온 흉하고 딱딱한 외피를 너무나 쉽게 찢으려 들었다. 지관영은 그걸 참을 수 없었다. 작은 손짓만으로도 바스러지게 할 수 있는 약하디약한 사내가 이제껏 제가 잘 지켜온 규칙들을 뛰어넘어 들어오는 것이 꺼림칙했다. 불쾌감마저 느꼈다.
깊숙한 곳 숨겨져 있던 생각들을 너무도 쉽게 끄집어내는 말간 얼굴에, 사실 처음에는 그 어떤 방어기제조차 세우지 못하고 고스란히 저를 헤집어 보일 뻔했다.
에스퍼의 시선이 느긋하게 제 가이드를 향했다. 태훈은 관영과 눈이 마주치자 자연스럽게 시선을 굴리더니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척했다.
“……검사 시작하겠습니다.”
이미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관영과 최태훈의 공식 기록은 센터의 극비 중 극비로 취급된다. 공식적으로는 151.2로 마감하고 그 이후의 기록은 기밀로 취급하며 국가 특별 연구자료로 다룬다.
이날, 페어는 최대 매칭률 기록을 갈아치웠다.
‘171.8’. 하지만 이건 절대 마냥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170대라는 어마어마한 스코어와는 정반대로, 로우 스코어 역시 새롭게 갱신되었기 때문이었다. ‘65.7’. 이전의 검사들에서 로우 스코어가 90대 중반이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수치였다. 사실 60대의 수치도 일반적인 페어라면 딱 보통의 결과다. 하지만 지관영과 최태훈의 경우라면 다르다.
나쁜 의미로 갱신된 로우 스코어가 말해주는 현재 상황은 명백했다. 정말이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두 분, 싸우셨어요?”
“……아뇨.”
“전혀.”
“기계는 사이 안 좋다고 말하는데요.”
미현의 말에 지관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최태훈. 나랑 싸운 적 있어?”
“……없죠.”
“없다는군. 내 기억에도 없어.”
제대로 된 접촉을 하기 시작하자 하이 스코어는 갱신됐지만, 정신적인 감응이 뒷받침되기는커녕 오히려 삐걱대면서 로우 스코어와의 갭이 터무니없이 커지고 말았던 것이다.
미현은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머리를 짚었다. 몇 걸음 뒤에서 문제의 페어를 묵묵히 지켜보던 오연은 그 특유의 신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이대로 가면 힘들어지는 건 가이드입니다.”
오연의 말에 에스퍼의 눈썹이 꿈틀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지관영은 저에게 꽂힌 주변의 시선을 유유히 받아낸 후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마치 에스코트하듯 태훈의 겉옷을 챙겨주었다. 덕분에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오려던 것을 가까스로 삼키고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날, 지관영과 최태훈은 몸을 섞었다.
가이드는 머뭇거림이 선연하게 드러나는 얼굴로도 제 에스퍼를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리지 못했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하다. 지관영의 가이드로 있는 이상, 이 섹스는 그가 해야 할 일 중 가장 주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가이드의 ‘주 임무’에 반발하지 않았던 최태훈은, 그날 처음으로 관계 중간에 몇 번이고 상대를 밀어낼 뻔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이 심장을 꽉 얽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나 그보다 에스퍼의 매서운 몰아붙임이 먼저였다.
“흐, 아, 아앗, 아, 파요, 지관영, 씨!”
에스퍼의 목에 팔을 감은 가이드의 입에서 조금은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훈은 제 다리를 활짝 벌려 누르고 삽입한 성기를 쳐올리는 낯선 감각보다, 그가 저와 같은 사내에게 이렇게 애원하게 된 것을 더욱 힘들어했다.
눈앞이 번쩍. 잠시 세상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초점이 맞지 않아 희뿌연 인영이 보일 때면, 태훈은 거의 본능적으로 그 몸에 매달렸다.
땀이 어린 단단한 몸은 태훈의 손이 닿을 때마다 끌어안기 편하도록 몸을 기울여 주었다. 그러고는 열이 가득한 한숨과 함께 떨고 있는 가이드의 얼굴이며 몸 곳곳에 입술을 떨어트렸다. 그 간지러운 입맞춤만이 최태훈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다정하지만 정중하지 않은 행위는 여전히 태훈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가이드는 헐떡이며 몸을 움츠렸다.
“……괜찮아. 심호흡해.”
지관영은 땀에 젖어 엉킨 태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발갛게 열이 오른 뺨, 고통과 뒤섞인 쾌감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눈가와 제가 하는 말을 따르기 위해 노력하는 거친 숨소리, 단단히 이어진 하반신을 반사적으로 다리로 휘어 감는 탄탄한 피부의 감촉, 성기를 꽉 조여 무는 따뜻한 내벽까지.
최태훈과의 섹스는 정말 기분 좋았다.
자신만을 위한 가이드가 주는 충족감과는 별개로, 이제껏 남자를 받아들인 적 없는 장신의 사내가 제 밑에 다리를 벌린 채 흐느끼며 매달리는 것을 보는 정복감은 또 다른 종류의 쾌감이었다.
이래서야 리바운드가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겠어.
에스퍼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답지 않게 마음속 한구석에서 계속 불편하게 자리 잡은 건, 저와는 달리 섹스 후에 끔찍한 후유증에 시달릴 가이드였다.
그래도 이번에는 좀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합리화인지 위안인지 모르게 떠올렸던 생각은 정사가 끝난 뒤 기분 좋게 잠들고 일어난 다음 날 아침 완벽하게 그 기대를 배반했음을 알려왔다.
에스퍼는 그제야 듣는 둥 마는 둥 흘려 넘겼던 오연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그것도, 굉장히 절박하게.
* * *
지관영은 최태훈에게서 몇 미터 떨어져 앉아 있다.
늘 말끔하고 흠 잡을 데 하나 없던 에스퍼는 그답지 않게 약간은 헝클어진 머리와 옷을 입고 있다. 느긋한 웃음 역시 온데간데없다.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런 지관영과 최태훈을 센터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심박수 정상, 호흡 정상, 체온 정상.”
“…….”
“매칭률도 엄청나더니, 리바운드도 엄청나네요. 쇼크가 올 줄이야.”
센터의 의료진 하나는 겨우 걱정을 돌렸다는 듯 한숨 쉬며 말했다. 하지만 에스퍼는 그 말에 미동조차 하지 않고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있는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섹스가 끝나고 잠들었을 때만 해도 최태훈은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아직 채 정사열이 식지 않아 발갛게 물이 든 채로 제게 늘어져 안겼다. 그걸 보며 퍽 만족스럽게 잠들었던 관영이었다. 뻣뻣하게 굳었던 목 뒷덜미가 느슨하게 풀어지고 묘하게 그 엇박을 이루던 무언가가 정확하게 들어맞는 기분은, 언제나 깊게 잠들지 못하던 그가 상대의 온기에 취해 눈을 감게 만들었다.
물론 그 기분은 몇 시간 뒤 눈을 떴을 때 완전히 나락에 처박혀 사라졌다. 가이드는 희미하게 눈을 뜬 채 입술만 가까스로 달싹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말인지 알 수도 없었을 것이다. 에스퍼여서 다행이었다.
‘숨이, 안, 쉬어져요.’
가이드가 마치 꺼지듯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에스퍼는 깨달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마치 화상을 입은 듯 뜨겁게 불타는 감각이 모든 세포를 따갑게 깨웠다. 제 등 위에 새겨진 그의 이름이 요동쳤다. 최태훈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관영은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잠시 제 숨을 멈췄다.
그 뒤로 에스퍼의 기억은 마치 뿌연 증기가 찬 것처럼 희미하다. 순식간에 너무나 많은 정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최태훈의 온도, 감은 눈꺼풀의 옅은 주름, 그를 살리는 방법, 센터와의 거리, 흘러가는 초 단위의 모든 것.
“잠시 나가주시겠어요.”
이미현은 진료실 내에 깔린 무거운 침묵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의료진들에게 한숨 쉬듯 말했다. 오연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문을 걸어 잠갔다. 이제 진료실 안에 남은 것은 에스퍼와 가이드, 그리고 센터의 주요 연구진들뿐이었다.
“지관영 씨.”
에스퍼는 미현의 부름에도 대답 없이 있을 뿐이다.
그저 퉁퉁 부은 눈을 감고 있는 가이드만을 바라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만 있었다.
“지관영 씨!”
“목소리 줄여.”
“…….”
“묻는 말에 대답만 해.”
나직한 목소리에 미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연은 벽에 기대 그런 지관영을 묵묵히 지켜보았고, 다른 연구원들은 혹시라도 저 에스퍼의 심기를 거스를까 숨을 죽였다.
“리바운드라는 게 정확히 어디까지 올 수 있는 거지?”
이제야 좀 진지하게 고민할 마음이 들었나 보네.
이미현은 덩달아 태훈에게로 시선을 흘끗 돌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입맛이 썼다.
“이 정도로 심한 리바운드는 정말 드물어요.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특수한 상황이 뭔데.”
“…….”
“뭐냐고 묻고 있어.”
에스퍼의 시선이 처음으로 미현을 향했다.
그 눈은 이제껏 적당히 꾸며 갖추기라도 했던, 무언가의 껍질이 완전히 벗겨진 것처럼 서늘하게 빛났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감각은 에스퍼인 이미현 그녀에게 몹시 낯선 것이었다. 다음에는 꼭, 연 씨나 다른 사람 시켜야지. 미현은 담담하게 말하려 애쓰며 피하고 싶던 말을 꺼냈다.
“원하지 않은 관계 정도라고 할까요.”
“빌어먹을 매칭으로 교배하는 걸 원하는 사람도 있다니 놀랍군.”
센터의 에스퍼-가이드 매칭을 가장 천박한 형태로 표현하는 지관영의 말에 그녀의 입이 잠시 막혔다. 미현은 뭐라 돌려 말하려다 작게 고개를 저으며 그녀 역시 좀 더 직접적인 단어를 사용하는 쪽을 택했다.
“이해가 잘 안 가시나 본데, 강간이 아니고서야 이런 리바운드가 오기 어렵죠.”
그건 빈정대던 에스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게 하기 충분했다. 컵 안의 물을 길고 날카로운 바늘 형태로 만드는 것 역시.
“이제 아주 멋대로 떠들고 있는데 영영 그 입 다물게 해주지.”
“호오라, 네에, 아무리 그쪽이라도 순순히는 안 될 텐데요!”
“……리젝션.”
미현이 움켜쥔 의자의 손잡이 부분이 쭉 일그러짐과 동시에 무언가를 긁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두 에스퍼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역시 에스퍼인 오연이었다. 금방이라도 부딪힐 듯 가까워지던 관영과 미현의 시선이 동시에 무표정한 사내를 향했다.
“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리바운드-리젝션rejection입니다.”
오연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이미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네임과 페어 매칭이 함께 있는 경우가 워낙 드물다 보니 떠올리지 못했던 증상이었다. 이미현뿐만 아니라 주변의 연구원들 역시 함께 술렁였다.
그것에 지관영은 묘하게 속이 불편해지는 것 같아 희미하게 눈썹을 휘었다. 하지만 관영이 의문을 더하기 전, 오연은 먼저 말을 이었다.
“최태훈 씨가 가지고 있던 리바운드에, 지관영 씨 당신의 리젝션이 더해진 겁니다.”
“내 리젝션?”
“네임 공유자에 대한 의심, 배제, 거부.”
“…….”
“이름이 엮인 이상 독이죠.”
무뚝뚝하게 내뱉어진 오연의 말에 에스퍼는 처음으로 그의 감정의 일부를 드러냈다. 살짝 찌푸려진 미간은 조금은 망설이는 듯도 했다. 그것에 오연, 그 역시 진료실로 들어선 이후 최초의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지극히도 건조한 냉소였다.
“당신은 태훈 씨를 가이드로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스퍼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오연과 눈을 마주했다. 미현은 이제야 확실히 궤가 맞는다는 듯 작게 탄식하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지관영, 저 오만한 에스퍼가 리바운드에 전혀 시달리지 않는 것이 조금은 석연치 않기는 했었지만, 그래도 겨우 만난 가이드에 대한 충족감이 태훈을 받아들이게 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건 어떻게 보면 태훈보다 더 나쁜 상황이나 다름없었다. 실로 절망적이기까지 했다.
지관영, 저 에스퍼는 ‘가이드’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 관계에 거부감도 없다. 오히려 기꺼이 반긴다. 그렇기에 짊어질 리바운드도 없다. 제 비틀린 시간을 맞춰줄 가이드를 찾은 이상, 그를 누구보다 잘 활용할 준비가 된 것이다.
가이드의 앞에서만큼은 견고하게 유지해온 일상의 거리를 얼마든지 양보하며 맞춰주는 것만 봐도 그로서는 엄청난 호의를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최태훈이 가이드여서다.
자신을 위한 가이드이기 때문에 퍽 어여삐 여기는 것에 불과하다. 그건 마치 예쁘고 귀한 조화에 쏟는 가볍고 옅은 애착의 색과 별다를 바 없다. 중요한 건 ‘가이드’이지, ‘최태훈’이 아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리젝션이 시작됐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조금은 의아해진 미현이었다. 분명 처음으로 동침했을 때에는 이렇게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다. 의식도 분명했고, 의사소통에도 문제가 없었다.
그렇다면 힌트는 하나다.
갑자기 뚝 떨어진 로우 스코어. 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에스퍼-가이드 사이에 뭔가 일이 있어도 분명히 있었고, 그게 모든 것의 시작인 것이 분명했다. 이미현은 가이드의 상태를 알려주는 모니터를 슬쩍 살피고는 여전히 지관영과 흉흉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오연을 내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오연은 그녀의 시도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이미현의 자극적인 단어보다 지관영을 도발하기에 더욱 충분한 문장이었다.
“-최태훈 씨의 상태가 악화된 건 온전히 지관영 당신 때문입니다. 태훈 씨의 리바운드를 문제 삼을 생각 따윈 마십시오.”
담담히 사실을 전하는 평이한 어조였지만 진료실에 있는 에스퍼는 모두 동시에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사이가 삐걱거린다고 한들, 사상 초유의 스코어로 엮인 페어다. 그 수치는 두 사람 사이의 호응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의존도를 뜻한다. 매칭을 확인하기 전부터 태훈에게 손 하나 까딱 잘못 대도 사고를 칠 것 같던 사내다.
그런 자의 화를 돋우는 말이라니, 연구원들은 일제히 일찌감치 병실을 빠져나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미현은 그제야 오연이 그녀의 생각 이상으로 화가 나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것이, 오연은 태훈을 고등학교 때부터 지켜봤다. 한평생 맏이로 지낸 가이드는 오연을 형인 양 잘 따랐고, 오연은 그런 최태훈을 곧잘 챙겨왔다.
미현은 두 에스퍼 사이에 흐르는 살벌한 기운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미들보다야 훨씬 더 신체적 능력이 발달했다지만 오연은 지능계 에스퍼다. 물리계 에스퍼 중 압도적이라 표현해도 부족함이 없는 지관영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하여튼 저 인간도 보통은 아냐.
미현은 금세 침착함을 찾았다. 평소에 늘 중재하는 건 오연의 담당이었는데 정작 그 당사자가 조종간을 놓자 정신이 퍼뜩 든 그녀였다.
지관영은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다 지껄였습니까?”
근사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어조로 유려하게 흘러나온 날 선 문장은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가시처럼 보였던 물은 순식간에 나뉘어 짧고 날카로운 바늘 같은 형태가 됐다. 이미현은 그제야 눈앞에서 제 가이드의 숨이 잠시 멈추는 것을 본 에스퍼가 정상일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수를 저질렀다. ‘지관영’이기에 괜찮으리라 지레짐작하고, 상태를 확인하는 것을 놓쳤다.
물리계 에스퍼가 형상화하는 공격은 그 심리를 보여주는 조각이다. 날 선 바늘. 그것이 지금 지관영의 상태다.
이미현은 지관영이 공격하는 것과 동시에 의료 베드 하나를 집어 던지려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때였다.
“……우와.”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놓치기 쉬울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건 에스퍼들에게 아무런 불편도 주지 못했다. 연구원 중 에스퍼인 이들의 고개가 동시에 움직였다. 그것에 미들이나 가이드인 자들 역시 덩달아 당황하며 시선을 옮겼다. 물로 만들어진 바늘 조각들이 마치 쇠구슬 같은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함께였다.
“……지관영 씨…… 진짜…….”
“…….”
“성격…….”
간신히 눈을 뜬 가이드는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목소리로도 꿋꿋하게 제 의견을 피력했다.
“엄청, 완전, 나쁘시네요……. 깜짝이야.”
“눈 뜨자마자 그런 말이 나와?”
지관영의 입에서 처음으로 황당함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태훈은 그것에 눈만 작게 끔벅였다.
* * *
어떤 에스퍼와도 맞는, 최고의 매칭률을 낼 수 있는 가이드의 ‘생산’. 그건 힘을 상징하는 에스퍼를 가지고 있는 모든 기업, 더 크게는 국가의 최우선 목표나 마찬가지다.
한때는 모든 연구와 지원을 에스퍼의 능력 향상에만 집중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에스퍼-가이드 페어에 관한 연구가 체계적이지 않았던 몇십 년 전의 일이다. 연구의 초점이 에스퍼에서 가이드로 옮겨온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순서였다.
에스퍼는 쏟아지는 무형의 정보에 무너지기 직전의 정신과 금방이라도 폭주하여 모든 혈관을 짓누르는 능력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약했다’. 그 누구보다 강한 존재들이 그 무엇보다 약해질 수 있다는 건 어찌 보면 비극이었다.
물론, 에스퍼는 그렇게 약해졌을 때가 가장 위험했다.
최강의 존재가 피아식별하지 못하는 고장 난 살인 병기로 전락했을 때의 위험성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중요함을 간과했던 평범한 이들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맞춰진 건 그때부터다.
가이드의 힘은 오랜 시간 그 누구의 집중도 받지 못했다. 그건 가이드에게 기대는 에스퍼 그 자신들조차 마찬가지였다. 에스퍼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고, 저를 이끌어줄 존재의 필요를 부정했었다.
당연히 그 결과는 처참했다.
정신병원의 어느 구석이나 대테러현장의 어떤 현장에서 끔찍한 최후. 그것이 당시 평균수명이 40대 초반에 그치는 에스퍼들의 유일한 미래였다.
그제야 에스퍼는 약하디약한, 하지만 그들을 숨 쉴 수 있게 하는 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홀로 설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힘을 지녔다는 자만으로 똘똘 뭉쳤던 아집을 내려놓자 상황은 빠르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에스퍼-가이드 인권단체의 윤곽이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에스퍼는 가이드의 필요성을 인식한 뒤부터 본인들의 능력을 이용하여 직접 에스퍼-가이드 페어를 직접 연구하기 시작했다. 유명무실한 기관이었던 센터가 극도의 발전을 이룬 시기도 이때다. 가이드 역시 그들이 가진 보이지 않는 힘을 기꺼이 협력했다.
하지만 모든 밝음 뒤에는 그늘이 있듯이, 에스퍼-가이드의 만남으로 평화만이 찾아온 건 아니다. 음지에서는 또 다른 연구가 시작됐다.
힘을 지닌 에스퍼에게 완벽하게 들어맞는 가이드의 배양이 그것이었다. 가이드가 에스퍼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가이드는 에스퍼보다 더욱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 에스퍼가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이딩할 수 있는 ‘것’을 만들 수만 있다면, 막강한 힘은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 연구에는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곳에서 많은 이들이 실험체로 만들어지고 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어둠 끝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가이드 이한솔’이다.
한솔은 사람이면서 사람이 아닌 것으로 취급되었다. 연구실의 구석에서 태어나 눈을 뜨고 기고, 걷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한솔은 그저 가이드로 취급받았다. 그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을 이룰 수 있는 완벽한 ‘가이드’.
그것이 이한솔이었다.
“진아. 나 되게 재밌는 기사를 봤어.”
오진우는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가이드를 무표정하게 흘끗 바라본 것이 전부였다. 한솔은 그것이 익숙한지 작게 웃으며 오진우의 다리에 기대 누웠다. 짐짓 애정 어린 몸짓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에스퍼의 표정은 서늘할 뿐이었다.
“봐봐. 이거. 사상 최고의 매칭률에, 이름까지 나눠 가졌대.”
“…….”
“매칭률이 얼마나 나올까?”
마치 로봇이 사는 곳처럼 강박적으로 깔끔하게 꾸며진 방 안에서 가장 이질적인 것은 그 방의 주인인 한솔이었다. 한솔은 느슨한 티와 바지를 걸친 채였는데, 그건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름 하나 없는 빳빳한 수트 차림인 에스퍼와는 사뭇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한솔은 패드를 손끝으로 대충 넘기며 작게 웃었다. 액정 위에 떠오른 잘 다듬어진 사내를 눈에 담으면서다.
“너보다 강할까?”
“관심 없어.”
“그렇겠지. 그런데 말이야, 진우야.”
오진우는 제 무릎에 누워 그를 올려다보는 가이드와 눈을 마주했다. 에스퍼는 자신의 가이드와 있을 때 그 무엇보다 강한 충족감을 느낀다. 그건 오진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그는 제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끔찍하다. 뒤틀렸던 모든 것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온전함은 에스퍼인 그에게 더 큰 혐오감을 남길 뿐이다.
“넌 날 싫어하잖아?”
한솔은 제 에스퍼의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 냈다.
오진우의 손은 한솔의 머리카락 끝을 건드렸다. 제 가이드의 거부를 부인하고 싶은 본능과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깊은 혐오 사이에서, 에스퍼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약속할게. 이쪽이 너보다 더 강하면, 난 이 사람의 가이드가 될게.”
“……헛소리 마.”
“정말이라니까?”
“똑바로 말하지그래!”
오진우의 절규와도 같은 외침에 한솔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휘었다.
아. 내 강하고, 멋진, 사랑스러운 에스퍼.
이한솔은 제 에스퍼의 가벼운 투정 따윈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었다. 기억이 시작되는 때부터 한솔은 늘 그것을 배워왔다. 그것만이 이한솔의 존재 이유였다.
“‘이번에도’ 가이드를 죽이고 빼앗을 생각이라고!”
“당연하지.”
이한솔은 웃었다.
“난 가장 강한 에스퍼의 가이드가 되어야 하거든.”
* * *
정말로 안 친해지면 죽을 수도 있겠구먼.
최태훈은 자신의 상황을 담배 반 갑과 함께 깔끔하게 이해했다. 페어 에스퍼가 생긴 후, 기껏해야 하루에 한두 개비 피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담배가 늘어 버린 그다. 진료실 침대에서 눈을 뜬 태훈은 거의 일주일을 왕족처럼 보냈다. 사나흘 후에야 제대로 몸을 가눌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먼저 요구하기 전부터 주변에서 챙겨주지 못해 안달인 상황은 밑으로 동생을 다섯이나 둔 맏이에게는 굉장히 낯선 것이었다.
“태훈 씨. 컨디션 별로면 그냥 다음으로 미뤄도 돼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너무 누워 있었더니 허리 아프던데요.”
능청스러운 가이드의 말에 이미현이 작게 한숨 쉬듯 웃었다.
지금 이 문제의 페어는 매칭 이후 처음으로 훈련장을 향하고 있다. 이 훈련은 보통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반드시 진행해야 했지만, 두 사람은 그 특수함이 워낙 커서 한참을 미뤄졌었다. 측정 불가 에스퍼를 훈련할 방법이 고안되지 않았던 것도 한몫했다.
최태훈은 저보다 반보 정도 앞에서 걷고 있는 에스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훈이 쇼크로 의식을 잃었던 그날 이후 지관영의 태도는 묘하게 달라졌다. 장난스러운 스킨십 대신 희미한 웃음을 건 신중한 손끝만이 스칠 뿐으로, 가끔은 ‘이렇게까지 접촉을 줄여도 괜찮은 건가?’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자. 마음에 안 차실 수도 있지만.”
잠시 다른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거대한 문 앞이었다. 이미현은 씩 웃으며 거대한 문 옆의 버튼을 빠르게 몇 번 눌렀다. 제 에스퍼에 대한 걱정으로 한눈을 팔았던 가이드는 갑자기 확 현실로 끌려오는 기분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센터의 모든 기술이 이곳에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우워…….”
“에스퍼가 안에서 날뛰어도 멀쩡할 수 있는 곳이니까요.”
지관영과 최태훈이 갑작스레 이 훈련장을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뚝 떨어진 매칭률의 로우 스코어 때문이었다. 보통 에스퍼-가이드 페어는 함께 훈련을 거치며 그 수치가 오른다. 센터의 사람들은 그것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최태훈은 훈련장에 발을 딛자마자 제법 소란스러웠던 내부가 신속하게 고요해지는 것을 느끼며 뒷목이 뻣뻣해졌다. 내심 몇 번이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온 건데도 상상과 실제는 달랐다.
지금 그는 사람들 앞에 처음으로 지관영과 나란히 섰다.
센터 훈련소 출입이 허가된 페어들만이 앞에 있다는 사실은 큰 위안이 되지 못했다. 그래 봤자 생판 남인 것이다. 최태훈은 왠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아 눈만 뒤룩뒤룩 굴렸다. 축구장 크기만 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인 훈련장 이곳저곳에 있는 이들 모두의 시선을 받아내는 일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득한 일이었다.
“최태훈.”
“예, 예엡?!”
“신경 쓰지 마.”
……차라리 신경 쓰지 않아 주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최태훈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애타게 되뇌었다. 타인의 시선이 그 무엇보다 익숙한 에스퍼의 나직한 목소리는, 질린 얼굴의 사내 최태훈이 그 소문만 무성했던 가이드라는 것에 확인 도장을 찍어 준 셈이었다.
“태훈 씨. 이쪽으로.”
오연이었다.
태훈의 얼굴은 마치 구세주를 만난 듯 순식간에 확 밝아졌다. 덕분에 제 페어의 변화를 짚어낸 에스퍼의 눈썹이 동시에 희미하게 꿈틀댔다. 제 딴에는 위로라고 건넸던 말에 더욱 질리기만 했던 가이드의 반응을 알고 있어서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 이상으로는 언짢은 반응을 내보이지 않았다. 저야 에스퍼라는 것이 알려진 뒤 이미 여기저기서 시달릴 만큼 시달린 터라 이런 관찰 대상 취급이 불쾌할지언정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한없이 평범한 삶을 살아온 최태훈의 경우는 다를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오. 이쪽이 그 베일에 싸인 가이드?”
“……박승원.”
“아, 왜. 연이 너는 너무 꽉 막혔어 사람이. 그쵸?”
오연의 입에서 기어이 얕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박승원은 오연의 가이드이자 연인이었다.
최태훈은 먼발치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박승원에게 꾸벅 인사했다. 승원은 다소 엄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철저하고 보수적인 느낌의 오연과는 정반대의 느낌의 사내였다. 아니, 청년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남자가 가이드 박승원이었다.
최태훈은 언제였던가 오연이 자신의 가이드가 군인이라는 말을 해서, 오연 그와 똑 닮은 사람을 상상하고 있다가 승원을 보고 퍽 놀랐었다. 밝은 색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기르고 느긋하게 눈을 접어 웃는 청년은 군대보다는 대학 캠퍼스나 카페가 잘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그런 최태훈과는 달리, 지관영은 오연의 곁에 서 있는 가이드가 제법 보통의 인물이 아님을 눈치채고 그 꿍꿍이를 가늠하고 있었다.
느슨하게 서서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 가이드는, 사실 그 품새에는 빈틈이 없다. 신체적 능력도 일반적인 수치를 훨씬 웃도는, 객관적으로 최상급의 가이드일 것이 분명하다. 발달한 근육이며 묘하게 각이 잡힌 옷차림으로 봐서 높은 확률로…… 군인.
지관영은 누군가 먼저 말해주기도 전에 박승원의 신분을 짐작하고는 작게 혀를 찼다. 센터의 연구원 다음으로 귀찮은 자들이 군 소속의 이들이었다.
“하하. 표정 되게 무섭네요. 팬입니다, 지관영 씨.”
“감사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우리 연이 노트북을 작살 내셨다고? 제가 그거 2주년 기념으로 사 줬던 건데. 하핫!”
오연은 작게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를 짚었다.
훈련장에 있는 페어들은 이제 훔쳐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이 흥미로운 상황을 구경하기 바빴다. 무려 ‘그 지관영’에게 웃는 낯으로 시비를 거는 가이드라니, 이렇게 재밌는 상황이 또 있나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런 박승원의 말에 표정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에스퍼는 그 알맹이가 어떻든, 외관만큼은 완벽한 사내다.
“소중한 노트북으로 몰래 촬영을 하시다니. 참 부주의하셨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연이에게 또 노트북을…….”
“승원아.”
뭐라 더 말을 이으려던 박승원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승원은 제 무뚝뚝한 돌덩이 같은 에스퍼가 저를 이름만으로 부르는 것에 약하다.
“당분간 훈련은 저 안쪽 개별실에서 진행할 계획입니다. 두 분 다 그쪽이 편하시겠죠.”
“……아무렴요.”
최태훈은 훈련장에 들어선 이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나마 처음으로 제대로 대답했다. 그렇게 도망치듯 발을 옮겨 들어선 개별 훈련장은 절대 좁다고는 할 수 없는 널찍한 크기였다. 태훈은 그제야 뻣뻣해진 뒷목을 주무르며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에서 힘을 풀었다.
말없이 가이드를 지켜보던 에스퍼의 입이 나직하게 열렸다.
“괜찮아?”
“예에. 뭐. 언젠간 적응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바깥의 사람들도.”
뭔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지관영은, 긴 문장 대신 ‘그런가’ 하는 작은 수긍만을 내뱉었다. 그건 최태훈이 알던 저 오만한 에스퍼답지 않게 한없이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늘 그랬듯 조금은 능글맞고 뻔뻔하게 대해 주면 더 마음이 편하련만, 에스퍼는 가이드의 혼절 이후 늘 저런 태도였다. 최태훈은 등 뒤에 새겨진 사내의 이름이 조금 따끔거리는 것 같아,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두 분 다 준비됐나요?]
개별실 훈련장 바깥의 조정실에서 훈련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는 미현의 목소리였다. 태훈은 영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준비라고 하심은 어떤 걸까요. 이런 거 해 본 적이 없어서요.”
최태훈은 다섯 살 때부터 센터를 들락거리며 센터의 거의 모든 곳을 다 가 봤다고 해도 무방했다. 심지어 매칭률 테스트를 안 받겠다고 강짜를 부리며 센터장의 집무실까지 간 적 있었다. 하지만 이곳, 페어 훈련장만은 처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최태훈은 이제껏 그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지 않았다. ……지금 그의 옆에 서 있는 지관영을 제외하고는.
[으음, 그러니까. 태훈 씨는 우선 마음의 준비만 하세요.]
“마음의 준비요?”
태훈은 천장의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미현의 목소리에 의아한 듯 물었다.
[나머지는 관영 씨가 알아서 할 거예요.]
“뭐?”
페어 훈련을 해 본 적 없는 것은 지관영 역시 마찬가지라, 에스퍼는 그 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삐딱하게 했다.
하지만 에스퍼 지관영도, 가이드 최태훈도 그것을 마지막으로 한가하게 조정실에 앉아있는 센터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 * *
“-이미현!”
“어머. 내 이름 알고 있긴 했네요. 저 사람.”
이미현은 특수 유리문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지관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태평하게 말했다. 이제껏 저 남자는 단 한 번도 미현을 제대로 된 이름으로 지칭해 부른 적 없었다. 늘 오만한 턱짓과 슬쩍 눈썹을 휘며 정중한 척 빈정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오연은 퍽 즐거운 표정의 이미현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고는, 조정실 바깥으로 보이는 훈련장에 시선을 고정했다.
지관영은 강하다.
그의 압도적인 능력은 감히 의문을 제기할 여지도 없이 온전하다. 하지만 그가 그런 넘칠 듯한 힘을 사용하는 방법에 완전히 능숙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쪽에 가깝다. 지관영은 에스퍼로 각성한 이래 늘 자신의 힘을 억누르고 지내면서 미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빠듯했을 것이다.
그가 처음으로 힘을 개방한 강남의 테러 현장의 잔해는, 그것을 증명하듯 사방이 엉망으로 휘어지고 으깨진 채였다. 성정의 잔혹함 역시 엿보였다. 거칠게 잘려나간 건물과 사지가 온 방향으로 기괴하게 꺾인 채 죽어 있는 테러범에게서는 그 어떤 망설임의 흔적도 없었다.
“생각보다 잘하는데?”
“기본적인 능력치 자체가 다른 에스퍼니까.”
“호오. 과연 세 번째 측정 불가?”
이제 완전히 관전자의 모습이 된 박승원은 제 에스퍼를 뒤로 끌어안은 채 빙글빙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오연은 저를 끌어안은 가이드의 팔을 그대로 들어 밀어내면서 대답했다.
“떨어져. 데이터 살펴야 해.”
오연은 매정하다느니, 이 정도는 괜찮다느니 하며 투덜대는 승원의 말을 뒷등으로 넘기며 널찍한 훈련실 전체를 둘러싼 프로그램을 살폈다.
지금 지관영이 상대하고 있는 건 대對 에스퍼 전용 훈련 프로그램이었다. 오연이 개발한 이 프로그램은 웬만한 물리계 에스퍼는 고개를 저으며 꺼리는 대표적인 훈련 시스템 중 하나로, 말이 프로그램이지 에스퍼 사이에서는 거의 바이러스 수준의 것으로 악명 높다. 흔쾌히 웃으며 베타 테스트에 참가해 주겠노라 말했던 이미현이 훈련장을 빠져나오자마자 오연의 멱살을 잡았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연은 미간을 구긴 채 프로그램의 이동을 노려다 보고 있는 에스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지관영 그의 거친 힘 사용은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를 막을 방법조차 까마득한데 좋고 나쁨을 판단할 기준을 세울 수 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저, ‘어쩌면’ 치명적일 수도 있는 약점이 있을 뿐이다. 지관영 그는 자신의 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젠장!”
제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그것을 사용할 줄 모른다.
에스퍼의 입에서 작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는 조정실에 앉아있는 미현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시야를 가리는 매직미러 같은 건 그에게 조금의 불편도 주지 못했다. 덕분에 그는 제 말을 듣고도 여유롭게 웃으며 저와 가이드를 구경하는 그 시선들을 신경질이 날 정도로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힘과 힘이 맞부딪혀 나는 파열음은 마치 쇠판 위를 긁는 듯 날카로웠다.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꽉 감고 몸을 움츠렸다. 가이드는 지금 제가 서 있는 훈련장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그의 시야와 감각으로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 수 있는 건 미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 에스퍼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고, 귀가 멍할 정도의 엄청난 굉음이 났다는 것뿐이었다.
태훈은 반쯤은 넋이 나간 채로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다. 가이드의 눈에 들어오는 건, 요 며칠 저에게 꼬박꼬박 몇 걸음 정도의 거리를 뒀던 에스퍼의 얼굴뿐이었다. 어찌나 눈꺼풀을 꽉 닫고 있었는지, 눈앞의 사내가 약간은 흐리게 보였다.
새까만 머리카락. 저를 바라보는 까만 눈동자. ……그리고 너무나 따뜻한 온기. 가이드는 그제야 에스퍼의 팔이 자신을 끌어안아 감싸고 있음을 깨달았다.
“최태훈. 원래 훈련이라는 게 이런 방식인가?”
지관영은 조금 날카롭게 물으며 팔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훈련실 바깥을 빙 두르고 있던 철근이 순식간에 우그러지며 무언가와 요란하게 부딪쳤다. 그것은 태훈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관영에게는 선명한 것이다.
지금 에스퍼는 제법 짜증이 난 상태였다. 앞뒤 설명도 없이 무작정 공격을 막아야 하는 훈련이라니, 역시 센터의 사람들은 단 한 순간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관영은 저를 공격하는 하얀 덩어리 중 하나를 다소 신경질적으로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그것’은 자르고, 쪼개고, 뭉갤수록 그 수를 늘리는 병균처럼 더욱 빠르게 수를 늘려갔다. 그건 에스퍼의 대응이 오답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이드를 끌어안은 지관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물리 피해가 없는 단순한 홀로그램인 줄 알았다. 에스퍼는 제 시야에나 잡힐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빛 뭉치를 보며 시시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여전히 무슨 일이 시작된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는 가이드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지관영 역시 그랬다.
‘그것’이 제가 아닌 가이드를 향해 돌진하기 전까지는.
이 훈련의 타깃은 제가 아니라 최태훈이다.
에스퍼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아주 불쾌해졌다. 참을 수 없을 만큼.
콰앙, 쾅. 끼이익. 가이드는 귓가를 때리는 굉음에 몸을 굳혔다.
똑바로 버티고 서야 하는데. 깜박깜박 빨간 불이 들어온 머리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저를 감추듯 품에 안고 있는 사내의 어깨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태훈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관영의 옷깃을 꽉 잡은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마치 물 안을 부유하듯 멍해진 머릿속은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의 조각이 떠다녔다.
왜 이러지. 대답해야 하는데. 훈련은 나도 처음이라 잘 모른다고.
눈을 질끈 감아 시야에는 검은 어둠만이 깔린 태훈에게로 낮은 물음이 걸렸다.
“……최태훈?”
나직하게 귓가에 떨어지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이드는 그제야 제 마음을 좀먹은 것의 이름을 가까스로 깨달았다.
그날의 기억은 흐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무슨 일을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퍽 즐거웠던 것 같다. 서류에서만 몇 번을 떨어졌던 구직 활동의 마침표를 찍고 가지는 제대로 된 첫 외출이었다. 오랜만에 비싼 밥도 먹어보고, 왁자지껄 술도 마시고. 태훈은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늘 만나는 큰 어학원 건물 근처에서 느긋하게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어?!
그날은 쌀쌀했다.
‘이 녀석, 왜 안 와.’ 태훈은 태평한 생각을 하며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저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의 구경거리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태훈의 생각은 완벽하게 엇나갔다.
평범한 일상에서 벌어지는 지극히도 끔찍한 비일상적인 광경은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이 다가왔다. 눈앞에서 몇 층은 되어 보이는 건물이 비스듬히 갈라져 나가는 모습은, 마치 영화를 관람하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끼, 이, 이, 익.
최태훈은 잠시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것이 제 쪽을 향해 느리게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볼 때야 겁에 질려 나오지도 못하는 비명을 지르며 인파에 섞여 달렸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티끌 하나 없었던 눈앞에 희뿌연 연기가 낀 것처럼, 거리에는 회색의 안개가 차오르기 시작한 탓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콰앙. 끼익. 급정거하는 차들이 일제히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고 있었다. 무언가 머리를 치고 지나갔지만 태훈은 그것에 고통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이가 딱딱 부딪쳤다. 절규에 가까운 울음소리 속에서 누군가가 낄낄대는 소리가 안개를 타고 들려왔다.
죽는 걸까?
태훈은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살며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죽음에 대한 공포였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 시야에 잡히는 건 안개와 피 흘리며 바닥에서 나뒹구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때.
그때였다. 굉음 속에서 단단한 팔이, 따뜻한 온기가 다가온 건. 최태훈은 저를 끌어안는 누군가의 체온에 자신도 모르게 매달렸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렸다. 그는 누구인지 묻는 말에 대답 대신 겁먹지 말라고 말하며 작게 웃었다. 시야가 가려진 채라,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최태훈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저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내의 얼굴이 또렷이 담겼다. 늘 여유롭기만 했던 얼굴이 조금은 당혹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신을 흔들림 없이 지탱하고 있는 팔과 그 체온이 낯설지 않았다. 크지 않은 톤으로 나직하게 말하는 목소리가 그 지옥 같던 날의 기억과 천천히 겹쳐 들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그제야 에스퍼의 이름을 처음으로 온전히 깨달았다.
괴물이 잠시 태훈에게 시선을 빼앗긴 사이, 빛 뭉치는 에스퍼의 말끔한 뺨을 곧바로 스쳤다. 그 위로 몇 방울의 피가 맺혔지만, 에스퍼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저를 바라보는 가이드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서 있었다.
오히려 깜짝 놀란 건 조정실에 앉아있던 연구원들이었다.
“지관영 씨 다친 거 아니에요?!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래? 오연 씨!”
“정확한 스캔은 안 되지만, 큰 외상은 없습니다.”
지관영의 신체는 센터의 기계로 살펴볼 수 없다.
오연은 훈련실 내부의 CCTV 화면을 확대해 석상처럼 굳어있는 에스퍼를 살피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뜯어본다고 한들, 프로그램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던 관영이 갑자기 멈춰 선 이유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다. 오연은 빠르게 손을 움직여 두 사람을 향한 공격을 일부러 엇나가게 틀었다. 지관영이 방어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이상, 조금이라도 다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연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페어 중 가이드만을 공격하게 짜여 있다. 물론 방어능력이 없는 가이드를 진짜 공격하는 건 아니다. 그저 그런 시늉만 할 뿐이다. 에스퍼를 진심으로 만드는 건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물리계 에스퍼들이 같은 에스퍼인 오연의 프로그램을 이를 갈며 싫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젠장, 저 에스퍼……!”
대화를 나누는 통에 잠시 훈련실에서 시선을 뗐던 두 에스퍼 대신, 가이드 박승원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오연과 이미현은 그것에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게 있었다.
-콰앙!
오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특수 강화 소재로 만들어진 5cm 두께의 매직미러는 웬만한 물리적 충격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건 훈련실 안에 있는 지지대 몇 개가 날아 들어오는 것에는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만약 훈련실 내부의 모든 지지대를 떼어내 한데 모은 뒤 강도 이상의 힘으로 내리치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씨발, 저 미친 새끼가! 왜 저러는데?!”
털털할지언정 쉽게 상소리를 입에 담지 않는 이미현의 입에서 기어코 외마디 욕이 터져 나왔다.
오연은 흥분 대신 버튼 몇 개를 조작했다. 그건 센터 전체를 울리는 비상 경고였다. 훈련실이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쇠뭉치는 다시 한 번 거세게 조정실의 미러를 후려쳤다. 미현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여기는 C-21구역, A-1 훈련실의 이상을 감지했다.]
“에스퍼 지관영이 훈련에 불응하고 조정실을 공격 중입니다. 지원이 필요합니다.”
[……바로 준비하겠다. 벌 수 있는 시간은?]
쾅, 콰앙. 쾅. 훈련장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기괴하고 거대한 굉음이 울리는 숫자만큼 미러에는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지관영 저자는 지금 단순한 경고나 시위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 조정실에 있는 모두를 죽일 셈이다. 오연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현 연구원이 버티는 만큼.”
이미현의 힘은 발화發火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가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울 수 있다. 미현은 미러 가장 가까운 곳에 섰다. 그 뒤는 오연이었고, 가장 뒤 혹시 모를 피해가 작을 곳에는 가이드 박승원이 자리했다.
“하하. 연이랑 한날한시에 죽는 게 내 꿈이었는데.”
“……오연 씨, 그쪽 가이드 재수 없는 말 좀 닥치게 할 수 없나요?”
“박승원. 조용히 해.”
승원은 제 에스퍼의 말에 작게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가 자신의 연인을 지키고 설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아무리 오연이 지능계 에스퍼라 한들, 보통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미현은 작게 성호를 그었다. 하늘에 맡겨야지.
미러 밖으로 보이는 커다란 쇠뭉치가 마지막 한 방을 내리치려는 듯 저 뒤로 물러섰다가 빠른 속도로 밀려왔다. 미현은 꽉 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하나, 둘, 셋.
훈련실과 조정실을 분리하던 매직미러가 박살 나며 조정실 안에 있던 기계 중 절반은 순식간에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뭉개졌다. 이미현의 손도 그와 동시에 움직였다. 그녀가 지관영의 힘을 불붙이는 데에는 발화점 따윈 필요 없었다.
지관영은 강하다. 그 힘은 가치 판단 따위 불필요할 정도다. 하지만 괴물은 아직 이미현 그녀처럼 극도로 섬세하게 힘을 다루지는 못한다. 그녀는 능력을 다루는 데 있어서 천재적일 만큼 뛰어난 유연성을 가졌다.
이미현은 지관영의 쇳덩이가 다시 한 번 반동을 얻기 위해 뒤로 끌려가는 것에 불로 만든 채찍으로 매달려 함께 튀어 나갔다.
적당한 공격 같은 건 사치다.
지관영을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공격해야 겨우 시간을 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독한 결심을 한 그녀의 걱정은 단 한 가지였다. 최태훈. 저 난폭한 에스퍼의 가이드가 다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껏 쇳덩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훈련실 가운데에는 오로지 한 사내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는 다행히도 제 가이드는 미리 내보낸 것 같았다. 불행 중 잘된 일이었다.
이미현은 지관영을 향해 거침없이 불화살을 쏟아내었다. 관영은 그 날선 공격을 작은 턱짓으로 제 발치에 있던 철판을 휘둘러 손쉽게 막고는, 불에 벌겋게 익은 쇳덩이 그대로 그녀를 향해 내던졌다.
미현은 재빨리 그것을 몸을 튕겨 피했다. 하지만 발이 1초라도 닿는 곳마다 분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난도질 되는 통에,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를 시간도 없었다. 이를 악물고 관영이 서 있는 타일 한 면을 그대로 불태웠지만, 압도적인 힘을 지닌 사내는 시야에 제대로 잡히기도 전에 옆으로 슬쩍 움직이는 것만으로 회심의 공격을 피해 버렸다.
“역시 지관영 당신은,”
“…….”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좆같았어.”
“……그렇습니까?”
이제 완전히 존대조차 내버리고 저급한 욕을 씨근거리는 미현의 말에 관영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역시 말하는 품새도 우아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여자다. 관영은 살짝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그 그린 듯한 모습은 만인이 사랑하는 배우 지관영처럼 보였지만, 이제 이미현은 그것에 속지 않는다.
“처음으로 센터의 머저리와 생각이 통했네요.”
“미친 새끼, 너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도 무사할 것 같아?!”
관영은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여기서 오래 굴러먹었으면 잘 알 것 아닙니까.”
“…….”
“에스퍼 이미현과 에스퍼 지관영. 이 중에 센터는 누굴 더 신경 쓸까요?”
이미현은 이를 으득 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좋으니 저 흠잡을 데 없는 얼굴에 한 대 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가 자신 다음으로는 오연과 박승원 페어를 공격할 것을 잘 알기에, 그 기분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
적어도 그 둘이 이곳을 몰래 빠져나갈 여유를, 그리고 지원부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어야 했다. 이미현은 일부러 저를 도발하는 관영의 말에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공격한 건지 들어나 보자고. 지관영.”
“그냥 기분이 더러워서.”
“……기분? 기분 따위로 이런 짓을 한다고? 대체 왜!”
결국 그녀의 침착함은 몇 초도 가지 못했다. 지관영 저 에스퍼는 정말 황당할 정도로 미쳤다. 완전히 사이코라고밖에 볼 수 없다.
괴물은 미현의 말에 대답 대신 작게 눈썹을 휜 채로 날카로운 철근을 조금 전까지 그녀의 머리가 있던 쪽으로 내던졌다. 방법이 없었다. 이미현은 마지막에나 선택하려 했던 것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훈련실 천장 전체에 불을 붙이고 까딱하면 그걸 지관영에게 쏟아지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건 그녀 역시 다칠 수 있는 일이었지만, 저 에스퍼를 잠시라도 막을 방법으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미현은 벽에 손을 대고 빠르게 훈련실 안을 회전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실수이자, 지관영에게 승기를 꽂는 아주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다. 이미현의 불꽃은 순식간에 벽을 타고 높다란 훈련실 천장을 향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퀴퀴한 연기와 벽을 불태우는 기세는 금방이라도 훈련실 전체를 불태울 듯 타올랐다. 이미현은 슬쩍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이제 여기서 그녀가 손만 휘두르면 저 한계까지 달아오른 쇠붙이들이 지관영을 향해 쏟아질 것이었다.
천장 전체가 떨어지는데 피할 곳 따위 있을 리 없을 거다. 저것을 부숴버린대도 괜찮다. 지관영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 따윈 꿈도 꾸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제 앞의 흉포한 에스퍼를 조금이나마 붙잡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에스퍼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미현이 내지른 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높다란 천장을 향해 시한폭탄처럼 달려가는 그녀의 힘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에스퍼의 모습에서는 그 어디에서도 초조함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할 뿐이다.
……뭔가 잘못된 건가?
이미현은 섬뜩한 직감에 저도 관영이 올려다보고 있는 천장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녀는 욕을 삼키며 자신의 힘을 멈추려 했다. 하지만 이미 불길은 저 끝까지 미친 듯이 타오른 뒤였다.
지관영의 눈이 느슨하게 접혔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이미현처럼 극도로 섬세하게 다루지 못한다. 단 한 번도 그런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오연의 프로그램도 무작정 힘으로 억누르고 베어내려고 했지, 그것을 가지고 놀 만한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지관영도 몹시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 하나 있다. 에스퍼로 각성한 이후부터 그가 버릇처럼 움직였던 것으로, 지관영에게 그게 주어진다면 이미현에게 있던 희미한 승산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커버가 몇 명이 온들 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잘려나갈 것이다.
그건 바로 물이다.
미현은 한숨을 삼켰다. 그녀는 천장에서부터 스프링클러를 타고 떨어지는 물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았다. 제 실수였다. 한계까지 온도가 올랐던 쇳덩이에 물이 떨어지면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잔뜩 일었다.
지관영은 자신을 위한 지원군을 눈을 감고 한껏 즐겼다.
머리칼이며 옷이 모두 완전히 젖는데도,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미현은 그런 에스퍼를 기습할 의지조차 갖지 못한 채 그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시선을 떨군 미현에게 느긋한 에스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유는 충분해.”
이유?
이미현은 난데없는 관영의 말을 이해하려 애쓰며 평정을 가장했다. 저도 모르게 이가 부딪히려 하는 것을 참는 것만도 벅찼다. 덜덜 떨리려는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미현은 그 이유가 제가 몇 분간 얼음장 같은 물을 맞아서이길 바랐다.
저를 향해 젖은 머리카락을 넘기며 희미한 미소를 건 채 걸어오는 에스퍼 때문에 자신이 겁에 질렸다고 하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녀 역시 에스퍼였다. 미현은 작게 심호흡하며 지관영의 말을 곱씹었다. ‘이유’.
얼마 안 가 그녀는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은 저 사내에게 대체 ‘왜’ 공격하냐고 물었었다. 이미현은 지관영의 불친절한 대답을 드디어 이해했다. 지금 지관영 저 에스퍼는 자신의 공격에 이유가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훈련실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에스퍼 둘과 가이드 하나를 쇳덩이로 짓이겨 죽이려 들었던 ‘이유’ 따위가.
이미현은 저와 한 보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에스퍼를 노려보았다. ‘씨발. 죽을 땐 죽더라도, 이 새끼한테 살려달라고 빌까 봐?’ 그녀의 눈 안에는 그런 고집스러운 태도가 가득했다. 괴물은 그런 그녀의 태도가 재밌다는 듯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고 웃었다.
어느새 스프링클러에서 떨어지는 물은 그녀에게 전혀 닿지 않고 있었다. 공기 안에 남아 있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이 공간에 있는 모든 물은 지관영의 뒤에서 거대하고 날카로운 창 모양을 이루며 그 몸집을 키워가고 있었다. 미현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라 말할 수 있는 모습에 작게 숨을 들이켰다.
지관영은 제법 다정스러운 손길로 이미현의 젖은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미현은 그것에 숨을 참았다가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빌어먹을 이유인데.”
에스퍼는 그 말에 눈썹을 꿈틀했다. 미현과 마찬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젖은 모습인 그의 몸에서 물이 방울져 뚝뚝 떨어졌다. 이미현은 제게 닿는 그 감촉에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원초적인 공포를 다 억누를 수는 없었다.
마치 먹잇감을 살피는 듯한 눈으로 미현을 내려다보던 사내는, 이윽고 그 직업다운 뚜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최태훈이 울잖아.”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잠시 황당한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던 미현은,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 지금 그따위 이유로 사람을 죽이려 든 거냐 따지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생각처럼 곧바로 열리지 않았다.
괴물의 표정이 이전의 느긋함은 찾아볼 수 없게 싸늘하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 끈적~하게 붙어 있는 두 에스퍼?!”
이미현은 순간 깨달았다.
우습지만 지관영이 저를 대한 태도는 정말 그의 말대로 순수한 불쾌에 기인한 것이었다. 단지 그 정도의 이유로 공격했냐 묻는다면, 제 앞의 에스퍼는 그러겠노라 흔쾌히 말할 게 분명하다. 눈앞의 남자는 죽일 각오로 날을 세울지언정 저에게 살의를 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현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고, 살기 위해 그녀의 입을 꽉 다물었다. 괴물은 고장 난 기계가 움직이듯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저와 이름을 나눈 이의 기척을 깨닫는 순간부터 제 안의 무언가가 완전히 멈춘 것을 느낀 채다.
“미현 씨 안 놔주면요, 소중한 왕자님 머리에-.”
“…….”
“빵빵-한다?”
오연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 대책 없는 가이드는 한 번 열 받은 이상 지관영의 신경을 긁지 않고는 저 밉살스러운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지관영은 훈련실 문 앞에 가득 서 있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딱 고만고만한 힘을 가진 녀석들이 겁에 질린 얼굴을 채 감추지도 못한 상태로 서 있는 꼴은, 제 앞에서 오기를 부리는 입이 거친 연구원만도 못해 보였다. 저런 것들을 지원이랍시고 보냈다는 게 우스울 정도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의 심기를 거스른 건 따로 있다.
“응? 왕자님. 말 좀 해 봐.”
“예, 예엡? 저 말입니까? 무슨 말을……. 근데 이거 진짜 총 아니죠?”
“하하. 글쎄. 어이. 지관영?”
지관영은 박승원에게 붙잡혀 머리에 총구가 들이대진 상태로도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제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가이드는 아직 운 자국이 채 가시지 않아 눈가가 빨갰다.
제 에스퍼가 갑자기 밀어내는 통에 훈련실 밖으로 쫓겨나듯 나갔던 태훈은 지금의 상황이 조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다급한 표정으로 뒷문을 통해 뛰어나오던 오연과 박승원이 저를 보자마자 석상처럼 굳고, 센터 전체에 요란한 경고음이 울려 퍼질 때부터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을 뿐이었다.
“그, 근데 여기 조금 전까지는 멀쩡했는데, 대체 왜…… 어.”
“…….”
“저거 뭡니까, 지관영 씨?”
제가 만든 거대한 창을 가리키며 묻는 가이드의 말에 꾹 입을 다물고 있던 지관영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몸집을 불려가던 창은 갑자기 무언가가 팡, 터진 것처럼 훈련실의 망가진 잔해 위로 방울져 떨어져 내렸다.
이미현의 어깨에 뻣뻣하게 들어가 있던 힘은 그제야 쭉 풀렸다. 하지만 에스퍼는 그런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제 가이드의 곁으로 걸어갔다. 박승원은 씨익 웃으며 제가 붙잡고 있던 ‘왕자님’을 풀어주었다. 협상은 성공이다.
“옷 준비해.”
지관영은 조금 나른한 목소리로 퉁명스레 말하고는 여전히 얼굴 가득 의문을 띄우고 있는 최태훈을 질질 끌고 나갔다.
* * *
지금 최태훈은 황당함 반, 미안함 반으로 센터 내 응접실에 혼자 앉아있다. 그의 페어인 지관영은 지금 연구원들에게 특별 조사를 받는 중이라 함께할 수 없다.
가이드는 제 에스퍼가 조금은 퉁명스러운 얼굴로 옷을 갈아입는 것을 볼 때까지만 해도 훈련실에서 뭔가 사고가 났던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지관영이 그날 테러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줬던 사람이었는지, 대체 제가 있는 곳은 어떻게 알고 찾아왔던 건지. 혹시 이전부터 저를 알고 있었는지…….
하지만 에스퍼는 차림새를 가다듬기가 무섭게 살벌한 표정을 한 연구원들에게 거의 끌려 나가다시피 응접실을 나서야 했던 터라, 태훈은 질문은커녕 시선 한 번 제대로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이드는 지친 얼굴을 한 이미현에게 먼저 물었다.
‘지관영 씨 무슨 사고 쳤습니까?’
최태훈은 센터 내에서 저와 가장 가까운 연구원이자, 가까운 누나나 마찬가지인 이미현이 그렇게 묘한 표정을 하는 걸 그때 처음 봤다. 동생들이 크고 작은 일을 벌일 때마다 가장 먼저 수습하러 뛰어다닌 탓인지, 가이드는 그 표정에서 왠지 모르게 엄청나게 피곤한 뒷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건 정확하게 적중했다.
이미현은 지관영이 정말 진심으로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것만 쏙 빼고, 그가 저지른 만행을 모두 털어놓았다. 최태훈은 훈련실 하나가 완전히 작살 난 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에 넘칠 만큼 충격받을 평범한 상식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황을 전해 들은 가이드는 벌어진 입을 다무는 것도 잊은 채 몇 초간 얼어 있었다.
테러 후유증에 눈물 한 번 찔끔한 것에 제 에스퍼가 그 시설 좋고 널찍한 훈련실을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관영에게 팔이 잡혀 오는 길에 본 센터의 연구원들은 꽤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이제껏 크고 작은 훈련에도 사소한 훼손이 있을지언정 이렇게 재기 불능으로 박살 난 일은 없었던 센터의 자랑이 에스퍼 하나의 심술에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으니, 골백번이라도 이해되는 일이었다.
최태훈은 얼굴은 물론 사소한 가족관계까지 꿰고 있는 센터 연구원들에게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대신 사과했다. 하지만 이미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오연 씨 팀이 고생하겠지, 뭐.’ 하고 호쾌하게 웃어넘겼다.
오히려 그녀는 태훈이 왜 저도 모르게 울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들은 후에는 놀란 표정으로 가이드를 한 번 꽉 끌어안더니 멘탈케어 전문 상담사를 불러오겠다며 허겁지겁 뛰어나가기까지 했다. 이미현은 그런 사람이었다.
응접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은 최태훈의 입에서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지관영 그 에스퍼는 정말 속을 다 알 수 없는 사내다.
하지만 가이드는 다른 건 몰라도 딱 하나, 이제는 거의 확신에 가깝게 깨닫게 된 것이 있다. 태훈은 훈련실에서 팔이 아플 정도로 저를 세게 끌어안고 있던 남자를 떠올렸다. 정말이지 대책 없는 사람이다. 상상 이상으로 성격도 나쁘다.
아니, 최태훈은 제가 스물여덟 해를 살아오며 만났던 사람 중 지관영 그의 성격이 가장 꼬여 있다고 확신한다. 세상에 그렇게 근사하고 완벽한 모습을 한 채로 그러는 건 정말 너무하다.
태훈은 뻣뻣해진 뒷목을 주물렀다.
아무도 없는 응접실 안에서 가이드의 입이 작게 열렸다.
“관영 씨, 지금 많이 바쁩니까?”
에스퍼는 오지 않는다. 하지만 가이드는 왠지 모를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센터 어딘가에 있을 제 페어는, 자신의 말을 빠짐없이 듣고 있을 것이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봤는데요.”
태훈은 작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는 결심했다는 듯 씩씩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지관영 씨는 약합니다.”
‘약하다’.
그건 지관영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 중 하나다.
그리고 이 탈도 많고 말도 많은 페어의 첫 섹스에서 에스퍼가 가이드에게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가이드는 제가 들었던 말을 에스퍼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있었다.
최태훈은 텅 빈 방에서 기세 좋게 한 말에도 왠지 무언가 잘못한 사람처럼 심장이 쿵쿵 뛰어서 괜히 애꿎은 구두 앞코를 긁었다. 귀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워진 소리에, 최태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몇 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또 몇 분도 아닌 시간이 흐른 뒤였다. 가이드는 제 뺨을 건드리는 누군가의 손끝에 천천히 눈을 떴다.
에스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일견 다정해 보이는 얼굴은 이렇게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을 때면 이렇게 그 생각을 읽기가 어려웠다. 언제나 어느 정도는 꼭 다듬어져 있던 사내의 검은 머리카락이 전혀 손을 타지 않은 모습으로 눈을 가릴 듯 흘러내린 채여서 더 그렇게 보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말없이 바라만 보는 침묵이 깨진 건, 역시 이번에도 최태훈 때문이었다.
“이쪽이, 약합니다.”
가이드는 제 에스퍼의 가슴께를 손으로 쿡 찔렀다. 그것에 이미현의 녹을 듯한 화염에도 꿈쩍하지 않았던 지관영이 작게 움찔했다. 또, 처음으로 사내의 얼굴에 약간의 감정이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하고 있냐는 거다.
“유리멘탈이 따로 없습니다, 아주.”
“내가?”
“네.”
“어째서?”
에스퍼는 가이드의 쇼크 발작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태훈은 사실 그게 퍽 기뻤다. 하지만 지금부터 최태훈이 이어 할 말들은 속이 한 백 번은 꼬인 저 사내의 귀에 제법 거슬릴 것들뿐이었다.
가이드는 느리지만 또박또박, 마치 제 어린 동생을 타이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는 저랑 가까워지는 걸 무서워하고 있지 않습니까.”
에스퍼는 제 가이드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은 오랫동안 켜켜이 쌓아온 괴물의 외피다.
최태훈은 제 에스퍼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며 그것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힘 같은 건 없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는 보지 못하는 저 깊숙한 곳 안에 있는 에스퍼를 볼 수 있다. 거기에는 흉하게 엉겨 붙은 가면 뒤의 지관영이 있다.
“왜요. 저도 부모님처럼 관영 씨 두고 갑자기 죽을 것 같습니까.”
“…….”
“돈 보고 달려들었던, 왜, 그 나쁜 어른들처럼 잔뜩 이용만 할 것 같고?”
“……거기까지 해.”
“그래서 그 궁전 같은 집에서 혼자 사는 거 아닙니까. 무서워서.”
“최태훈!”
가이드는 아플 정도로 세게 주먹 쥔 에스퍼의 손을 발견했다. 태훈은 조심스럽게 그 위로 제 손을 덮었다. 그건 이제껏 늘 지관영과의 스킨십을 어려워하기 바빴던 최태훈의 제대로 된 첫걸음이었다.
에스퍼는 손등을 통해 전해오는 온기에 제 손을 빼내려 했지만 오히려 태훈은 그것을 꽉 움켜쥐었다. 관영이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제 손을 잡은 그 미약한 힘을 내치지 않았다.
“지관영 씨. 저는 당신을 배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맹세와도 같은 말이었다. 에스퍼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또렷이 바라보며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말하는 가이드를 바라보았다.
“제 등에는 당신 이름이 새겨져 있고,”
“…….”
“관영 씨는 제가 살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에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제껏 최태훈은 그 어떤 에스퍼와도 매칭되지 않았다. 제 자신이 가이드라는 사실이 희미해질 정도로.
“지관영 씨의 약함은 제가 지킵니다. 그게 당신의 가이드인 제가 할 일이고요. 그러니…….”
태훈의 눈가는 살짝 붉어져 있다. 에스퍼는 그런 ‘자신의 가이드’를 멍하게 눈에 담았다.
“지관영 씨는 저를 지켜주세요.”
“…….”
“그때, 관영 씨였죠. 강남에서.”
지관영은 최태훈이 꼭 다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는 것에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뻔했다. 이 표정이 싫었다. 순간 눈이 뒤집혀 조정실에서 한가하게 앉아있는 연구원들을 죽이겠다 마음먹었던 것도, 최태훈이 저렇게 눈썹을 일그러트리고 맺히는 눈물을 억지로 누르다 떨어트려서였다.
하지만 가이드는 이번에는 그것을 참는 것에 성공했다.
“감사했습니다. 정말로.”
오히려 태훈은 드디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는 듯 개운하게 웃었다. 살짝 물기가 어린 눈으로 웃는 모습에 관영은 반쯤 올라갔던 팔을 내렸다.
늘 유려한 단어를 벼르고 골라 보기 좋게 조합하던 혀가 굳어버린 것 같은 그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 제 가이드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고 싶은데 입 밖으로는 그 어떤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음, 센터 분들한테 조금만 친절해지시면 좋겠지만 내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죠. 별수 있습니까.”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고. 태훈은 멋쩍게 덧붙였다. 그러고는 기대어 앉아있던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에스퍼에게 닿아 있던 가이드의 손도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갔다. 최태훈은 그 어떤 대꾸도 없는 지관영의 반응을, 저 사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겠거니 하며 융통성 있게 넘기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히 해야 할 감사 인사였지만 그래도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최태훈은 지관영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복도 저쪽에서 멘탈 케어 상담사와 함께 급하게 뛰어오는 이미현이 보였다.
“미현 누나. 저 괜찮아요.”
“그래도! 아, 이 정도 훈련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우리가 생각이 짧았어.”
굳이 술자리에서나 부르는 누나라는 단어를 써 주는 태훈의 배려에 미현은 더욱 울컥한 얼굴이 되어 느긋한 걸음으로 뒤따르는 상담사를 채근했다. 그녀는 최태훈이 오늘의 훈련으로 트라우마가 되살아난 것이 아닌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미현은 조금 전까지 저를 향해 웃어주던 최태훈을 향해 도로 고개를 돌렸을 때, 뛰듯이 옮기던 발을 거의 반사적으로 뚝 멈추고 말았다. 그건 취조실에서 갑자기 휙 사라진 에스퍼를 쫓아 미현의 맞은편 복도에서 이를 갈며 뛰어오던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읍, 잠, 깐만……!”
도망칠 겨를 같은 건 없었다.
집요하게 따라오는 혀를 피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더 요란하게 질척이는 소리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태훈은 자연스레 고개를 꺾고 제게 깊게 입 맞추는 사내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렸지만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가이드는 이런 부분에서는 제 에스퍼를 이길 수 없이 ‘약할 뿐이다’.
입천장의 까슬한 부분을 건드리다 잠시 틈이 났을 때 혀 아래의 한없이 부드러운 쪽으로 미끄러지는 살덩이에 막힌 입에서 작게 뭉개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스퍼는 어느새 제 가이드를 벽까지 밀어붙인 채 게걸스러울 정도로 조급히 혀를 섞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제 앞에 있는 사내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소중하다는 듯이, 무엇 하나 놓치기 아깝다는 듯이 저를 피하려는 얼굴을 빈틈없이 끌어당겨 입을 맞추느라 정신없을 뿐이다.
이미현의 입에서 짜증 섞인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재수 없어 진짜. 지만 가이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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