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say my name or say whatever
최태훈은 다섯 살 때부터 가이드 판정을 받았다.
그건 일반적인 가이드 발현보다 훨씬 더 이른 것이었다.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니었던 최태훈의 부모는 제 아들이 가이드라는 것에 내심 충격받았다. 일반인들에게 에스퍼와 가이드는 군부대 및 경찰에 차출되어서 각종 전투나 범죄수사의 최전선에 서는 이들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밖에서 싸움 한 번 한 적 없는 제 큰아들이 그런 위험천만한 현장에 휩싸이지는 않을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편견에 휩싸인 생각이었다.
에스퍼는 크게는 물리형과 비물리형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비물리형은 데이터 분석, 계산 및 추론 능력과 같은 소위 지능계의 스킬이 극에 달해있는 이들로서, 하루 대부분을 각종 연구소에서 보내는 에스퍼들이다. 그들은 온갖 총탄이 퍼부어지는 전투 현장이나 위험천만한 범죄자 검거 현장과는 거리가 멀다. 일반 회사원들과 별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할 뿐이다.
물론 최태훈의 부모가 상상했던 ‘위험한 현장’에 늘 붙어 있는 에스퍼 역시 존재한다.
그들은 물리형 에스퍼로서, 각기 가지고 있는 물리계 특수능력을 이용하여 온갖 사건 사고 현장의 최전선에 선다. 에스퍼라는 단어 뒤에 떠오르는 살벌한 이미지는 그들의 충돌 현장이 일조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일반인의 유전자와는 그 형질이 다른 특수능력을 갖춘 자>
에스퍼에 대한 정의는 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비물리형의 에스퍼든, 물리형의 에스퍼든 그 어떤 긴 부가 설명을 떠나 그들은 힘 그 자체로 불린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건 그런 최강의 존재들이 머리 위에 둔 절대적인 단 한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최태훈이 발현한 ‘가이드’다.
에스퍼는 인간에게 허락된 이상의 힘을 가진 대가를 치른다. 극도로 발달한 감각이 받아들이는 정보가 한계치에 다다를수록, 마치 과부하에 걸린 기계가 망가지듯 그들의 마음 안쪽이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것이다.
가이드가 필요한 건 바로 그때다.
가이드는 끝을 모를 능력이 준 독으로 서서히 미쳐가는 에스퍼를 다독이고, 끌어안고, 사랑스럽다는 듯 입을 맞추며 수렁으로 빠지던 의식을 붙잡는다.
그 순간만큼은 자랑스레 겨루던 힘의 세기는 중요치 않다.
저 자신이 만든 어둠 속에 빠진 에스퍼는 오로지 그 빛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이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가이드가 에스퍼의 머리 위에 설 수 있는 이유다. 가이드들은 그 이름처럼 에스퍼들의 불안정한 의식을 붙잡고 그들이 제대로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길잡이다.
하지만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가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 사이에는 ‘매칭’이 존재한다. 그 수치가 높으면 높을수록 에스퍼는 더욱 쉽게 안정을 찾을 수 있고, 가이드는 제게 주어진 야수를 더욱 잘 조율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일정 매칭률을 넘은 에스퍼와 가이드 페어는 필수적으로 센터에 등록을 거친 후 국공립 기관에 배치된다. 그건 평범한 사무직으로 발령이 날 때도 있지만, 능력이 뛰어날수록 그와 비례하듯 중요보안시설이나 위험한 현장에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예컨대, 가이드를 잃고 미친 에스퍼 혹은 가이드와 세트로 미친 짓을 하고 다니는 에스퍼, 그것도 아니라면 최태훈의 부모와 마찬가지로 에스퍼도 가이드도 아닌 미들the middle들이 일으킨 범죄 현장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최태훈의 부모는 태훈이 그런 범죄 현장으로 가게 될까 걱정하며 부디 제 아들과 파장이 맞는 에스퍼가 나타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그렇지만 정작 가이드로 발현한 그 당사자인 최태훈은 제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에 별 거부감도, 고민도 없었다. 정확히는 그런 부정적 감정을 가지기에 최태훈은 고작 다섯 살로, 너무 어렸다.
태어나 단 한 번도 바라지 않았던 가이드라는 이름은 마치 원래부터 지니고 있었던 의무처럼, 태훈에게 당연한 것이 되어 갔다.
이후 최태훈은 그럭저럭 깔끔한 외모의 청년으로 잘 성장했다. 밑에 동생 다섯이 주렁주렁 있지 않았다면 더욱 평범했겠지만, 어쨌든 그는 성적은 중상, 운동 실력은 중하, 육아와 집안일은 최상인 어딜 가도 무난하게 어울릴 스물여덟의 청년이 되었다.
물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최태훈은 두 달에 한 번씩 처음 보는 에스퍼와의 매칭 테스트를 받았다. 그건 센터에 등록된, 페어가 없는 가이드라면 누구라도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게 그 자신의 의무에 충실했던 가이드의 이름 옆에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매칭 포인트가 기록되지 못했다. 페어로 활동할 수 있는 기준 미달이 그 이유였다.
최소 30퍼센트.
그건 최태훈에게 너무나 높은 숫자였다. 태훈은 불특정 다수의 에스퍼들과의 매칭 테스트에서 늘 20퍼센트 아래의 매칭률을 찍었다. 심지어 가끔은 한 자리의 수치를 기록하기까지 했다.
다섯 살 때 가이드 판정을 받고 거의 25년 가까이 100여 번이 족히 넘는 매칭 테스트를 받으며 센터 사람들과 안면을 트고 형, 누나 할 정도로 친해질 동안, 최태훈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가이드라는 실질적인 증거를 찾지 못했다.
어설프게 걸어 다니던 시절부터 수많은 테스트를 거치면서도 단 한 번의 제대로 된 동조율을 보이지 않는 최태훈은 어느덧 센터에서도 유명인사가 되었다.
물론 그 유명세만큼 태훈은 지쳐갔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매칭 테스트는 낯선 사람과 몇 시간 동안 꼼짝 않고 마주 앉아서 기계음과 졸음에 시달려야 하는 지루한 시간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매칭 테스트를 받고 당연할 정도로 처참한 매칭률을 남긴 스물여덟의 생일.
가이드 최태훈은 드디어 폭발했다.
“이제 다시는 매칭 테스트 안 받을 겁니다! 이 이상 요구하면, 국민신문고에 민원 넣을 겁니다!”
“저기, 태훈 씨…….”
“센터 창립 60년 동안 저 같은 케이스 한 명도 없었다면서요! 아주 이제, 에스퍼고 가이드고 넌덜머리가 납니다! 이 정도면 그냥 미들이라고요!”
연구원들은 머쓱하게 턱을 긁었다.
태훈의 말은 사실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까지 에스퍼와 끔찍하게 매칭이 안 되는 가이드는 센터 창립 이후 처음이었다. 또, 공무원에게 국민신문고는 무엇보다 무서운 존재다.
결국 태훈은 그날부로 매칭 테스트 보류자 명단에 들어가게 됐다. 그 명단은 질병이나 가정사 등으로 페어 배정을 받아도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만 이름을 올릴 수 있었지만, 최태훈은 어쩔 수 없는 예외로 취급됐다.
가이드는 그날이 자신의 28년 인생 중 가장 행복한 날 중 하나였다고 확신했다.
그 에스퍼를 만나기 전까지는.
* * *
“정민아, 급식비 통장에 넣어뒀다. 민아야, 스타킹 올 나갔다.”
“네.”
“아 씨이, 이거 오늘 새로 뜯은 건데!”
“예쁜 공주님이 씨가 뭐야, 씨가.”
태훈은 한 손으로는 넥타이를 매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식탁 위를 정리했다. 물론 그러면서도 아직 잠이 다 깨지 않은 얼굴로 밥을 먹고 있는 다른 동생 세 명에게 잔소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우진이 너 밥 먹고 또 침대로 기어들어 가지 말고 세수하고 토익학원 가고. 너 땡땡이치라고 학원비 준 거 아니다. 승유는 설거지 좀 부탁할게. 지현이는 이따 알바 가니?”
“응.”
“조심해서 다녀오고. 너희들 다 밥 잘 챙겨 먹고 공부도 열심히 해.”
다섯 명의 동생들은 익숙하다는 듯 동시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확히는 네 명이었다.
최태훈의 동생 중 한 명인 최지현은 오늘 제 큰오빠 최태훈에게 부탁할 것이 있었다. 지현은 슬그머니 제 오빠에게 다가가서 짐짓 다정스러운 손길로 옷맵시를 다듬어 주었다.
그것에 태훈은 눈썹 한쪽을 치켜들었고, 다른 네 명의 남매들도 가방을 챙기거나 밥을 먹는 상황에서도 묘한 얼굴을 했다. 최태훈은 이제야 갓 스무 살이 된 셋째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제법 자상한 듯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용돈 필요하냐?”
“아냐! ……뭐 물론 주면 좋지만, 여하튼 그거 아냐!”
“그럼 뭔데.”
슬쩍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태훈에게 지현보다 먼저 대답한 건 이제 중학교 3학년인 최정민이었다. 정민은 저와 10살도 넘게 차이 나는 큰형에게 존댓말을 썼다.
“형 회사 아래에 있는 ○○문고에서 오늘 사인회 있어요. 열두 시 반이요.”
“……지관영?”
최태훈은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그 꽉 막힌 목소리에 둘째 우진이 잠에 취해 퉁퉁 부은 눈을 한 채로도 낄낄대며 웃었다.
지관영. 그가 누구던가.
그 잘난 사내는 제 여동생이 요새 푹 빠져있는 수목 드라마의 남주인공이자, 삼십 대 배우 중에서 가장 연기가 괜찮은 사람을 꼽으라면 반드시 나오는 이름이었다. 지금 이 자그마한 땅덩어리에서 CF면 CF, 작품이면 작품, 그 무엇도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에 가까운 행보를 이어가는 남자를 모를 이는 없을 거다.
최태훈은 과하게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여동생의 시선을 피해 ‘시간 나면 생각해볼게.’ 하며 후다닥 집을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런 적당한 태도와는 달리, 그는 황금 같은 점심시간에 온갖 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톱스타의 사인을 받기 위해 발버둥 칠 자신의 미래를 잘 알고 있다.
팬 사인회 같은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관심 가진 적 없는 아득한 세계지만, 여동생들에게 유독 약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태훈은 차에 시동을 걸며 출근하자마자 정확한 사인회 장소와 시간을 파악해야겠다는 생각부터 했다. 물론 까칠한 김 과장에게 걸려서는 안 될 일이었다.
* * *
천만다행이었다. 최태훈은 썩 사이가 좋지 않던 제 사수 대리와 지관영에 대한 이야기로 장단이 잘 맞아서 순식간에 가까워진 뒤 점심시간에 나란히 사인을 받으러 나왔다.
태훈은 높다란 힐을 신은 대리가 저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 듯이 걸어가는 모습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덕분에 정신 놓고 있으면 제 동생에게 가져다줄 사인은 없다는 자각 역시 퍼뜩했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뛰어간 사인회장은 줄이 상당했다.
물론, 최태훈은 그 공간에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술렁이는 인파 대부분을 차지한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말쑥한 슈트 차림에 사원증을 건 젊은 남성은 몹시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누가 보면 열혈팬의 전형이나 마찬가지인 태훈에게 여기저기서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이 꽂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개성 강한 동생 다섯을 돌보며 나쁘게 말하면 억척스러워졌고, 좋게 말하면 웬만한 일에 무던해진 최태훈에게 그런 관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자고로 육남매의 장남쯤 되다 보면 타인의 시선보다 사인 한 장으로 어깨 안마와 쓰레기 분리수거를 교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해지는 법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최태훈의 차례가 가까워졌다.
태훈은 시간을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인받고 편의점에서 김밥 한 줄이라도 사 먹고 올라갈 수 있겠다!’
가이드는 제 앞에 있던 여성이 한참을 악수며, 정말로 잘생기셨어요 같은 떨림 가득한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며 초조하게 입맛만 다셨다.
그때였다.
최태훈은 순간적으로 귀가 먹먹해져서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비행기를 탔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건 정말로 뜬금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이럴 만한 별다른 일 같은 건 없었다.
굳이, 정말로 굳이 무언가 이유를 찾자면…… 줄이 가까워지면서 이제껏 제대로 들리지 않던 중저음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린 게 다다.
가이드는 애꿎은 귓불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내저었다.
‘뭐야. 이게. 연예인 본다고 긴장이라도 했어?’
그 자신이 떠올리고도 한심한 생각에 태훈은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심장이 빨리 뛰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차라리 그렇게 애써 여유라도 가장할 수 있을 때가 좋을 때였다. 살짝 인상을 쓰고 있던 최태훈은, 제 앞을 차지하고 있던 여자가 옆으로 몸을 틀어 움직이자마자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
“…….”
최대한 대충, 빨리 사인만 받고 가야지.
가이드의 목표는 테이블 너머 앉아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완전히 흐려지고 말았다. 꾹 닫힌 입에서는 그 어떤 문장도 흘러나오지 않았고, 할 수 있는 건 저도 모르게 가득 고인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게 다였다.
하지만 그렇게 침묵한 건 최태훈뿐만이 아니었다.
시종일관 유려한 말솜씨를 뽐내던 톱스타는 뜻밖의 젊은 남성이 줄을 선 것에 놀란 것인지, 태훈과 마찬가지로 잠시 침묵했다. 그것에 사내의, 지관영의 옆에 서 있던 경호원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고용인을 살폈다.
지관영은 프로다.
너무 비인간적인 느낌이 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자잘한 스캔들이며 나쁜 소리 한 번 나오지 않는, 짠 듯이 완벽한 이미지의 사내가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지관영은 조금 이상했다. 그리고 자신이 왜 이상한지, 지관영 그 자신도 조금은 확신이 없는 듯 보였다.
연예계에서 가장 젠틀하고, 가장 완벽하고, 가장 여유로운 태도로 유명한 사내가 묘하게 흔들리는 모습에 회장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갑자기 건전지가 들어간 싸구려 인형처럼 누가 봐도 어색하게 말을 먼저 건넨 것은 지관영이었다. 그와 마주 선 당사자인 최태훈은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건 지극히 지관영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지금 최태훈은 그런 사실을 깨달을 여유가 없었다.
늘 걸고 있는 근사한 미소와 한 템포 느린 듯 사려 깊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약간은 떨렸다.
“아, 네. 어…… 안녕하세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함이?”
“최태훈…… 아니, 아니. 사인은 최지현으로 해 주십시오.”
“네.”
가이드는 손등으로 하얀 뼈의 윤곽이 잡힐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어느새 미친 듯이 속도가 붙은 제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덕분에 순간 스스로가 미친 건가 싶기도 했다.
최태훈은 아마 제 동생이 옆에서 지관영 찬송가를 불러댄 것 때문에 내심 긴장했던 것이 분명하다며 스스로 이상 반응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제게서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사내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볼 자신은 나지 않아서, 묘하게 눈을 굴려 피했다.
지관영은 사인지 위에 느리게 펜을 움직였다.
그리고 얼른, 다시 제 앞에 서 있는 최태훈을 바라보며 그것을 받아든 당사자만이 눈치챌 수 있을 만한 묘한 머뭇거림과 함께 종이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그 누구라도 사랑할 톱스타의 목소리가 약간은 쉰 듯 들렸다.
지관영은 어느새 완전히 최태훈이 알고 있는, 그리고 사인회장의 다른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 사내가 되어있었다. 태훈은 어설프게 예에, 하고 대답하며 지관영이 내민 사인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지관영의 손은 최태훈을 향해 뻗어져 있었다.
“악수 한 번만 해도 될까요.”
누가 들으면 태훈이 사인회의 주인공처럼 들리는 공손한 요청이었다. 태훈은 약간 머쓱해진 채로 조금은 급하게 사내의 손을 움켜잡았다. 대충 인사하고 자리를 뜨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 가엾은 가이드에게는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사내의 커다란 손과 맞닿는 순간, 최태훈은 제 오른쪽 어깻죽지부터 등 전체가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반사적으로 작게 신음성을 삼켰다. 그건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손을 마주 잡은 사내는 분명 들을 수 있을 법한 것이었다.
최태훈은 그제야 처음으로 자신의 앞에 선 지관영을 제대로 마주 보았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한 새까만 눈동자가 살짝 가늘어졌다. 최태훈은 그 다정스러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불덩이를 삼킨 듯 목이 타고 등 전체가 홧홧했다. 이 순간 가이드의 머릿속에는 ‘도망치자’라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태훈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충실히 따랐다.
지관영은 그렇게 제 눈앞에서 멀어지는 최태훈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저를 향해 온몸 가득 호의를 가지며 다가오는 이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느긋이 웃으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 바로 제가 본, 그리고 만진 사내에 대한 모든 정보였다.
나른한 웃음을 건 사내는 이미 최태훈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키는 180cm 정도. 약간은 그을린 듯한 피부. 속쌍꺼풀의 눈과 짙은 갈색의 눈동자. 왁스로 가볍게 손질한 검은 머리카락. 턱 쪽에 있던 작은 점. 눈가 아래의 흐릿한 흉터 자국. 옅어진 스킨 향. 손을 잡았을 때 짚어진 체온, 심장 박동수, 걸음걸이로 알 수 있는 곧은 평소 습관, 사원증에 쓰여 있던 회사 이름까지.
찾았다.
지관영은 확신했다.
이제껏 에스퍼, 지관영의 확신은 틀린 적이 없었다.
* * *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관영은 필수적으로 에스퍼-가이드 검사를 받아야 하는 십 대를 아슬아슬하게 넘겨 스물한 살에 에스퍼로 각성했다.
아마도 그 느지막한 시기 때문이었을까.
지관영은 보통 하루 이틀로 끝나는 각성열이 일주일 가까이 계속되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부모를 헬기 사고로 모두 잃고 커다란 저택에서 혼자 지내던 그는 어릴 때부터 저를 돌봐 왔던 노집사의 간호로 겨우 그 시간을 버텼다.
한참을 앓다가 이전과는 다른 신체 구조를 가진 채 눈을 떴던 그날은, 대부분의 것을 지루해하는 지관영 그에게도 꽤 신선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관영은 쏟아지는 정보에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눈이 부신 것이라 착각해서 ‘아저씨, 커튼 좀 쳐 주세요.’라고 하며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집사는 그의 말에도 암막 커튼을 움직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집사는 지관영의 방에서 한 층 떨어진 거실 홀에서 고용인들의 입단속을 시키고 있었으니, 제 어린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시선을 바닥에 두는 것만으로도 집사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조금은 낮은 목소리마저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지독한 고열을 앓고 일어난 후 그의 세상은 달라져 있었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잘 보이고, 또 잘 들렸다.
에스퍼는 손을 흔들어 저 멀리 있는 탁자의 화병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거꾸로 뒤집었다. 물은 지극히도 당연한 이치를 따라 쏟아지려 했지만, 관영은 오히려 그것을 허공에 둥둥 떠다니게 할 수 있었다.
다음은 그 투명한 액체를 쪼개는 것이었다.
덩어리로. 작은 알갱이로. 분자로. 원자로.
그러고는 마침내 그 물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니, 분명히 이 세계 어딘가에는 존재하겠지만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단위까지 잘라 낸 것이라고 보는 게 맞았다.
뒤늦게 집사가 지관영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의 방 안에는 지관영 그가 앉아있는 침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빛조차 없었다.
집사는 그런 ‘완벽한 어둠’을 태어나 그때 처음 보았다.
순간적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얼어붙은 집사를 보며 지관영은 제가 쪼갰던 빛을 다시 합쳤다. 방 안에는 빛이 돌아왔다. 완벽한 무의 공간으로 다른 시간대로 흘러갔던 지관영의 방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사실 이제 와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갓 힘을 얻은 뒤 그 적정선을 모르고 과하게 휘두른 것과 다름없었다. 작은 단위로까지 잘라 내 분해하는 건 굉장히 소모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살짝 식은땀에 젖은 지관영은 크게 뜨인 눈으로 자신을 보는 집사를 보며 어깨를 으쓱하고 말했다. ‘에스퍼가 된 것 같네요.’
오랫동안 자신을 돌봐온 집사였지만, 지관영은 그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비밀은 지켜지지 않기에 비밀이었다. 타인과의 공유는 불가능했다. 지관영은 위로와도 같은 상냥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흐린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를 분리했고, 다시 합쳤다.
집사는 그 어떤 사인도 남기지 않은 채 그렇게 사망했다.
지관영은 집사의 장례식 날 직접 그의 영정을 들고 걸었다.
눈물도 흘렸다. 비록 집사, 그가 친척들의 아귀다툼 끝에 제 몫으로 떨어진 부모님의 얼마 남지 않은 유산을 꾸준히 빼돌리고 차곡차곡 제 입지를 지워나가는 데 협력하고 있었다 할지언정, 그는 유일하게 지관영이 진실을 알린 자이기도 했다.
에스퍼는 자신에게 적당히 충성했던 집사에게 그 나름대로 예우를 다했다. 고아한 괴물인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중 하나인 품위를 위해서였다.
이후 완전히 혼자 남은 지관영은 다니던 대학교를 휴학하고 어떻게 보면 그 자신의 품위를 기꺼이 버려야 하는 ‘바닥’으로 곧장 향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관영 씨, 여기 물이요.”
“네에. 감사합니다.”
그는 가장 화려하고 요란한 가죽이 필요했다.
비뚤어지고 흉포한 속내를 감추면서도 각계각층에 퍼져 있는 가이드의 의심을 없애고 접근할 수 있는 가죽이. 그 허물로 배우라는 직업은 꽤 적성에 잘 맞았다.
지관영은 제 본능이 가이드라고 짚어내는 자에게 일부러 접근했고, 가끔 너무나 예민해진 감각들 때문에 한계가 아른거릴 때마다 그들과 뒹굴었다. 오감이 극도로 발달한 에스퍼에게 가이드와의 접촉은 그 어떤 값비싼 약보다 좋은 안정제였다.
제 발로 센터로 걸어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괴물은 자신의 힘이 가진 가치를 알았다. 그 강함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지관영은 제 근처를 지나가는 에스퍼들을 보며 코웃음 쳤다. 저런 어설픈 치들과 제가 같은 꼬리표를 단 채로 센터의 실험용 쥐가 되는 건 사절이었다.
결국 지관영은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매칭 테스트를 받지 못한 채로, 본능적으로 가이드라고 짚어지는 자들과 응급처치와도 같은 섹스를 했다.
그건 지독한 갈증 끝에 간신히 목을 축이듯 어설픈 행위였다.
언제나 계속되는 결핍 덕분에 지관영의 감각은 그 자신이 의도치 않게 날이 갈수록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는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고, 분리하고, 합치고, 터트릴 수 있었다.
그는 점점 그 몸집을 키우는 시한폭탄처럼 사나워졌다. 가끔 오랫동안 묵혀둔 힘이 손끝을 저리게 할 때면 나른한 눈을 한 채 물을 쪼개며 지루함을 달래고는 했다.
지관영은 하루하루 착실하게 괴물이 되어갔다. 대중들은 자신들 사이에 서 있는 괴물을 사랑했다. 지관영은 그게 재미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괴물에게 하나의 문신 같은 흉터가 떠올랐다.
지관영은 제 오른쪽 어깨뼈부터 시작해서 등 전체에 커다랗게 새겨진 검붉은 문양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건 ‘네임’이었다.
누군가의 이름 따위가 제 몸에 새겨질 줄은, 그 완벽에 가까운 두뇌로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그것도 이렇게까지 커다란 네임이라니, 정말 귀찮기 짝이 없었다.
뜨거운 물에 나른하게 몸을 맡기고 있던 관영은 거울에 낀 수증기를 움직여 이미 제 머릿속에서 영영 잊히지 않을 수많은 정보 중 하나가 된 네임을 그려보았다.
네임은 전문 분석가가 따로 있을 정도로 복잡하게 기호화되어 떠오르지만, 에스퍼의 두뇌는 제 등 위에 자리 잡은 검붉은 문양을 우스울 정도로 쉽게 분해했다.
최, 태, 훈.
흔해 빠진 이름이었다.
제 등에 이름이 새겨진 사람이 저와 같은 남성이라는 사실도 썩 반갑지 않았다. 동성의 네임 공유자는 네임을 운명의 상대니 뭐니 떠드는 자들에게 눈에 띄는 소재가 되기에 십상이었다.
지관영은 작게 혀를 찼다.
흔히들 이름이 떠오르면 제 이름의 상대를 찾지 못해 안달이지만 그는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 그의 정보 회로 속에서 최태훈이라는 이름은 무쓸모한 일회성 자료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그건 괴물의 오만이었다.
* * *
최태훈은 온종일 정신이 없었다.
어깨부터 등을 휘감았던 소름 끼치는 열기는 저녁이 되자 모두 가라앉았지만 왠지 심장이 달음박질치는 것이 묘한 초조함을 낳았다. 기어코 상사에게 ‘태훈 씨, 오늘 왠지 집중을 못 하네.’ 하는 핀잔을 듣기까지 했다.
심지어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차 안에서 몇 번이고 넋이 나간 채 있다가 결국 다른 운전자들에게 욕까지 얻어들었다.
그런 태훈이 겨우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건, 집에 도착해 축 늘어진 채로 소파에 앉아있는 제 주변을 눈을 반짝이며 어슬렁거리는 누군가를 눈치챘을 때부터였다.
가이드는 제 여동생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부터야 겨우 현실로 끌어 올려져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최태훈은 제 서류가방 한 편에 고이 넣어 들고 온 빳빳한 사인지를 꺼냈다.
“으악. 형! 진짜 갔어, 지관영 팬싸?”
“응.”
“아! 오빠! 진짜 오빠뿐이야! 안마해줄까?”
평소였다면 곧바로 콜을 외쳤을 달콤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유독 피곤한 하루였던 터라, 최태훈은 제 여동생에게 페트병 분리수거만 해 주라고 말한 뒤 이른 저녁잠이 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최태훈의 부모는 비몽사몽 한 와중에도 ‘아들 왔니, 수고했어.’ 하고 대답했다.
깍듯하고 예의 바른 아들이자 꼼꼼하고 다정한 형, 오빠인 최태훈은 6남매 중 유일하게 개인 방을 가지고 있다. 그건 자신들의 뒤치다꺼리를 단 한 번도 마다한 적 없는 든든한 맏이를 향한 동생들의 작은 배려였다.
태훈은 욕실로 들어가서 거울 안의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거뭇거뭇한 눈 밑은 오늘 하루의 고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가족들 앞에서는 내색하지 못했던 한숨이 푹푹 흘러나왔다. 왠지 모르게 넋을 놓은 채 보낸, 정말이지 이상한 하루였다.
이렇게 하루가 엉망인 것 같을 때마다 최태훈은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속을 달래고는 했다. 욕실에 들어선 가이드는 물 온도를 한껏 높이다가, 문득 오늘 제 어깨부터 등 전체를 뜨겁게 달궜던 열기를 떠올렸다.
분명히 화상을 입은 듯 홧홧하게 아려오는데 그와는 정반대로 등골이 서늘한 그 감각이라니, 절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은 섬뜩한 체험이었다.
태훈은 오늘 머리 드라이고 뭐고 무조건 그냥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충 머리를 감고 몸에 비누칠을 했다. 머릿속은 오로지 푹신한 침대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급하게 씻던 태훈은 뿌옇게 수증기가 낀 거울 너머로 뒤늦게 무언가를 보았다.
검붉은, 거대한 뱀 같은 무언가를.
“이게…… 뭐야?”
저도 모르게 신음과도 같은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다.
태훈은 급하게 거울을 손으로 문지르고 제 등을 비춰보았다. 거울은 순식간에 다시 흐려졌지만 오른쪽 어깨부터 시작해서 등 전체를 덮은 어마어마한 크기의 문신 같은 흔적을 보는 데 지장을 주지는 못했다.
태훈은 놀람을 넘어 황당함을 느꼈다. 최태훈은 이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네임’이다.
이렇게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이름이 몸 위에 갑자기 새겨지는 현상은 아직 과학도, 종교도 밝혀내지 못한 알 수 없는 영역에 속한다. 네임은 100명 중 20명 정도나 떠오른다. 그건 희귀한 건 아니지만 절대적인 수로 보자면 대다수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같은 필체, 같은 색, 같은 위치에 낯선 단 한 사람의 이름이 공유되는 이 현상에 대한 로맨틱한 환상도 꽤나 만연해 있는 편이었다. 물론 최태훈은 그런 환상 같은 건 추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답지 않게 냉소적으로 코웃음 치는 쪽이었다.
스물여덟에 네임이라니.
태훈은 지금 이게 꿈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에게 네임은 성인이 되기 전에나 떠오르는 풋풋한 해프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겨우 에스퍼-가이드 매칭 테스트에서 벗어났나 했더니 이번에는 네임이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네임은 국가 신고 의무도, 이유도 없다는 것뿐이다.
이제 최태훈의 머릿속에는 종일 둥둥 떠다녔던 지관영이나 알 수 없는 후끈한 열기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 아니, 점심시간의 그 타는 듯한 섬뜩한 열기가 네임이 새겨지는 것이었다니. 오히려 어이없음을 느낄 정도다.
곰도 아니고 이 커다란 게 등에 떠오르는데 회사 화장실에서 살필 생각 한번 안 한 것을 보면, 오늘 넋이 빠져도 제대로 빠져있었음이 분명했다.
태훈은 젖은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쉬었다. 네임으로 연결된 운명의 상대니 뭐니 하는 건 태훈에게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실감도 나지 않았다.
가이드는 제 등의 문양을 다시 살폈다. 자음과 모음이 기괴하게 얽혀서 어떤 이름인지 알아볼 수도 없는 그림 문자는, 네임 분석가의 힘이 필요할 것이었다.
오늘은 지관영 사인회더니, 내일은 반차구나.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나오는 탄식과도 같은 신음을 삼켰다.
* * *
“이야. 크기 한 번…….”
“……엄청나죠. 하하.”
아니나 다를까 네임 분석가는 최태훈의 어깨부터 등 전체에 휘갈겨지듯 새겨진 네임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물론 그러면서도 그 뱀 같은 글자를 특수 기계로 사진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덧 장의 사진을 찍고 난 분석가는, 태훈에게 옷을 다시 입어도 좋다고 말했다.
최태훈은 아직도 제 등 위에 네임이 떠올랐다는 자각이 좀 부족했다. 태훈의 그런 상태를 알았는지, 네임 분석가는 히죽 웃으면서 네임 사진 한 장을 뽑아 건네주었다.
난데없이 떠오른 ‘네임’을 똑바로 눈에 담는 첫 순간이었다.
자신의 몸에 새겨진 타인의 이름이 주는 무게감 앞에서 태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제 이름이 같은 위치, 같은 필체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새겨져 있으리라 생각하니 조금은 막막하기도 하고 또 조금은…… 그래, 정말 조금은 설레었다.
“이건 워낙에 네임이 크고 복잡해서 해독하는 데 2~3일 정도 걸려요. 느긋하게 기다리십쇼.”
“예.”
“혹시 누군지 알아보고 싶으면 말하고요. 우리, 찾아 주는 것도 해요. 네임 분석만으로는 돈이 안 되니까.”
누굴까. 누가 내 이름을 가지고 있을까.
어설프게 끄덕여지는 고개가 저도 모르게 손에 쥔 사진을 향했다. 최태훈은 어젯밤 잠을 설쳐 가며 커넥팅 네임에 대해 검색했다. 평생 근처에 갈 일 없다고 생각했던 네임 커뮤니티에도 가입해서 온갖 글을 다 읽었다.
네임의 발동은 지구 반대편에 떨어져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같은 나라, 같은 공간에 있는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다고 했다. 덕분에 운 좋게 금방 발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평생 제 네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발생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네임 커뮤니티가 생각보다 훨씬 더, 정말 엄청나게 활발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국내에서 저와 연결된 사람을 찾지 못한 이들이 네임을 찍어 커뮤니티에 올리고 상대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크기가 커진 것이다.
커넥팅 네임은 아직 의학적으로 완벽하게 분석된 사안도 아니었다. 정신병에서 일종의 특이 현상 비슷한 것으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도 10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태훈은 이게 정신병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종의 질환은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누군지도 모를 이의 이름이 갑자기 몸에 문신처럼 새겨지고 본능적으로 그 상대를 찾아 헤매게 된다니.
상대가 누구일 줄 알고?
최태훈은 터덜터덜 네임 분석소를 빠져나와 제 차에 올라탔다.
이렇게 된 거, 영 껄끄럽기는 하지만 가족에게 털어놓아야 했다. 태훈은 제 부모님은 물론 동생들까지 소란스럽게 놀라 떠들 것을 생각하고 머리가 조금 아파졌다.
그리고 그런 최태훈의 예상은 역시나 틀리지 않았다.
“뭐어어어어?!”
“대애애애박! 형! 형! 옷 벗어 봐!”
“어제? 어제 생겼다고? 대박사건 진짜!”
둘째 최우진은 아예 뭐라고 말하는 것 대신에 제 형의 넥타이를 내던지고 셔츠 단추를 빠르게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태훈은 그 거친 의욕에 힘없이 휘둘리며 ‘그-게-말이지, 나도 이게 무슨 영문인지-.’라고 몸이 흔들리며 저절로 끊어지는 목소리로 제 의사를 표현했다.
맏이 최태훈을 제외한 남매는 완전히 격분 상태였다. 평소에 가장 차분하고 얌전하던 정민까지 태훈의 등 사진을 들고 난리였다.
“우와아, 이 이름이 누구라고요?!”
“내일 모레쯤 나온-다고-몇 번을 말- 야, 야, 천천히! 옷 늘어나!”
“끄아아악! 진짜 있다! 야! 대빵 커!”
최태훈은 반강제로 상의가 모두 벗겨진 채로 뒤돌아섰다. 태훈은 한숨을 푹 쉬었다. 등 뒤로 남매의 시선이 내리꽂혔다. 육 남매 중 가장 입이 걸걸한 승유는 놀란 목소리를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씨발. 존나 커!”
“승유야. 욕!”
“개 커…….”
최태훈의 동생들은 이제 잘 뻗은 등 근육 위에 새겨진 네임을 쿡쿡 찔러보고, 그 위로 더운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대고 살펴보며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다둥이 집안의 맏이 생활에 단련된 태훈은 제 동생들의 호기심이 잠잠해질 때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함을 잘 알고 일찌감치 반항을 포기했다.
그렇게 한참을 제 큰형의 등을 빤히 보던 정민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큰형, 만약에 이거 네임 연결된 사람이 남자면 어떡해요?”
“……음. 글쎄.”
내심 고민했던 것을 훅 치고 들어오는 막내의 말에 태훈은 조금 찔끔했다. 하지만 정민의 말에 더욱 호들갑을 떠는 건 다른 동생들이었다.
“으악, 씨발! 형 게이 되는 거?!”
“야. 아직 이름 안 나왔다니까!”
“오빠, 진짜 남자면 어떡해? 사귈 거야?”
“누군지도 몰라! 무슨 김칫국을 그렇게 마셔. 굳이 네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난다는 법 없어.”
사실 태훈도 걱정이었다.
‘네임이 연결된 사람이 남자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은, 어젯밤에 골백번도 더 한 내용이었다. 커뮤니티를 찾아보니 평생 스트레이트로 살아왔던 사람이 네임이 연결된 동성과 가까워져서 양성애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물론 의형제나 의자매처럼 지내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그 경우는 전자에 비해 적긴 했지만.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임은 정말 생각할수록 이상한 현상이었다. 난데없이 몸에 떠오른 이 세상 단 한 사람의 이름에 머릿속 한구석이 마비되듯 빠져 버리는 것과 그 양상이 비슷했다.
‘만약에 나는 그냥 가까운 친구로 지내고 싶은데 상대가 날 좋다고 하면?’
태훈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다가 미친 생각을 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달랬었다. 헌데 지금 동생들은 그 애써 무시했던 가정을 쿡쿡 찌르고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네임 그 자체는 상대와의 정신적 연대 외에는 불가항력으로 연결되는 강제성 같은 건 없다. 기관에 보고해야 할 의무도 없고, 별거 아닌 해프닝으로 치고 넘어간다고 해도 무방한 일이다.
-단 한 가지의 예외인 최태훈의 ‘특성’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이렇게 신경 쓰여 할 필요가 없다. 가이드는 왠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가정을 떠올렸다.
‘10년 넘도록 발견하지 못했던 파장 맞는 에스퍼’.
이미 이 지구에 없으리라 확신하고 있는 그 존재가 아니고서야 네임 공유만으로는 그…… 같은 남자랑 그렇게 될 일은 절대 없지 않을까.
태훈은 자신을 안심시키듯 다독였다.
* * *
죽이고 싶다.
지관영은 최태훈을 본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는 생각했다고 착각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감각이 들끓듯 확 일어나는 이유가 일종의 적대감이나 불쾌함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역시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눈앞의 사내는 신체 반응도 저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평범하게 발달한 데다 제대로 된 싸움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는, 끽해야 필기구를 꽉 쥐어 생긴 굳은살과 약간의 운동이 만든 근육이 다였다.
몇 번을 다시 살펴봐도 에스퍼로 발현한 이후 단 한 번도 느낀 적 없던 동요를 할 필요가 없는 존재임이 확실했다.
지관영은 저를 향해 시선이 가득 꽂힌 사인회장 한가운데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는 사내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조금은 놀란 눈을 한 남자는 아마 그런 제 생각을 짐작조차 못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어 ‘자신의 이름을 말한 순간’, 지관영은 그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정확히는 이건 죽이고 싶은 게 아니구나, 하고 깨달은 쪽에 가깝다.
에스퍼의 머리 한구석에 먼지 쌓인 채로 처박혀 있던 이름이 둥실 떠올랐다.
‘최태훈’.
지관영은 그 흔해 빠진 이름의 주인공이 제 눈앞에 있는 사내라고 직감했다. 또한 ‘최태훈’이 가이드라는 것 역시 확신했다. 그 자신감은 태훈과 손을 잡았을 때 더욱 분명해졌다.
‘최태훈’은 손을 잡자마자 낮게 앓는 소리를 흘리며 반응했다. 덕분에 태훈은 그때 지관영이 저를 이상하게 여겼으리라 생각했지만, 사실 에스퍼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가이드의 손을 잡는 순간, 시야의 모든 것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와 박혔다. 언제나 하나의 자료로만 보이던 세상이 그 의미와 뜻을 가진 풍경으로 뒤늦은 생명을 가진 채 들끓었다.
그건 스물한 살 때 에스퍼로 각성한 이후 처음으로 다시 보는 보통의 세계였다. 모든 신경이 저에게 숨을 불어 넣은 사람을 향해 쏠렸다.
지관영은 본능적으로 몇 보 떨어진 의자에 앉아있는 제가 짚어낼 수 있는 최태훈의 모든 것에 귀 기울이고 눈을 맞췄다.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훨씬 빠르게 뛰고 있는 가이드의 심장박동 소리가 듣기 좋았다.
사인을 받고 악수를 하자마자 마치 불이 붙은 사람처럼 허둥지둥 제 눈앞에서 사라지는 모습은, 왠지 모르게 제 이름이 그의 몸에도 떠올랐을 것이라는 확신마저 주었다.
에스퍼는 자신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적당히 코트를 던져두고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정보 브로커들을 사기 위해서였다.
‘최태훈’에 대한 모든 것이 필요했다.
그는 필사적일 만큼 절박하게 태훈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에스퍼-가이드 국립연구센터에 있는 태훈의 정보는 연구소의 정보형 에스퍼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데이터 중 하나라 접근이 어려웠지만, 그 외의 것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최태훈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가치관 속에 살아왔을 사람인지 정도는 단 사흘이면 모두 알 수 있었다. 관영은 제가 받아든 자료의 가장 윗줄에 있는 내용을 새기듯 느리게 읽었다.
‘6남매 중 장남. 스물여덟. 다섯 살 때 가이드로 발현. 매칭된 에스퍼는 없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지관영은 최태훈이 다른 이의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면, 기꺼이 그 에스퍼를 죽였을 것이다. 덕분에 고생스러운 시간을 보낸 가이드의 삶이 조금은 그 가치를 발했다.
괴물은 제가 찾아낸 가이드에게 다가갈 때를 노렸다.
곧바로 접근할 수도 있었지만, 최태훈 그가 오랜 시간 가이드 매칭 테스트를 받으며 가이드로서의 삶을 거부했다는 부분이 눈에 걸렸다.
‘쓸데없는 거부 반응을 먼저 일으킬 필요는 없지.’
에스퍼는 제 가이드에게 버림받고 싶지 않은 공포를 그 자신도 자각하지 못한 채 포장하여 그렇게 해석했다. 그 기다림은 마치 야수가 먹잇감이 방심할 때를 노리듯 조심스러운 관찰이었다.
그동안 재미있는 소식도 들었다.
그건 최태훈이 자신의 몸에 새겨진 이름이 제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지관영’이 자신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영 다른 동명이인의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귀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한 일이었다.
분명히 지관영 그가 일렁임을 느꼈듯이, 최태훈 그도 저를 만났을 때 이상한 것을 감지했을 텐데. 아무리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한들, 모를 수 없었을 텐데!
지관영은 ‘최태훈’을 대신할 가이드를 아무나 붙잡아 뒹굴며 더욱 거칠게 섹스했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자신만의 가이드와 접촉했던 에스퍼는 어설픈 매칭률을 가진 상대로는 한참 모자란 갈증을 느꼈다.
그렇게 슬슬 에스퍼, 지관영이 한계에 다가가고 있을 때 사건은 터졌다. 강남 한복판에서 일어난 에스퍼의 폭주였다.
그날 최태훈은 제 친구를 만나러 잠시 놀러 나왔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인 별다를 거 없는 하루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만한 하루였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머지않아 눈앞에서 커다란 건물이 두 동강 나며 무너지고, 콘크리트 덩어리와 휘어진 쇠파이프가 비처럼 쏟아져 내린 순간부터 완전히 박살 났다.
일상이 지옥으로 변하는 건 단 몇 초면 충분했다.
에스퍼가 인위적으로 만든 안개에 시야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곳곳에서 역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와 항복을 종용하는 방송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건 끝도 모를 두려움에 질린 이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폭주한 채 에스퍼를 막을 수 있는 건 같은 에스퍼뿐이다.
테러의 규모로 봐서 적당한 랭크의 에스퍼는 엄두도 못 낼 정도였다. 구조대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에스퍼들도 결국 사람인지라, 가장 가기 싫어하는 사건이 몇 있었는데 그건 바로 가이드를 잃고 정신을 놓은 에스퍼의 폭주현장이었다.
이성과 상식이 먹혀들지 않는, 말 그대로 힘과 힘끼리의 싸움은 많은 위험부담이 있었다. 어지간한 이들은 그 위험한 현장에 투입되는 것을 거절한다고 할 정도니, 더 설명할 것도 없었다.
최태훈은 여태껏 살아오며 처음으로 느낀 공포감에 이를 딱딱 부딪쳤다.
TV에서만 보던 에스퍼의 테러 현장에 제가 있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제 자신이 가이드라는 절망적인 자각도 이어졌다.
가이드면 뭐해. 저 미친 새끼 하나 통제 안 되는데. 태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앞에서 벌벌 떨었다.
이마 부분에서 후끈한 열기와 함께 눈이 따끔거렸다. 콘크리트 조각에 상처가 나 피가 흐르는 듯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울음 섞인 신음이 섞여 들어왔다. 그건 제 자신이 살아있는 건지, 죽어 있는 건지도 헷갈릴 정도의 아수라장이었다.
그때였다.
“눈 감으세요.”
사내의 낮은 목소리는 귓가에서 들려왔다. 그는 짐짓 다정스러운 말투로 덧붙였다. ‘다칠 수도 있으니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커다란 손이 눈을 가려주었다. 최태훈은 저도 모르게 멍한 목소리로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이드를 뒤로 끌어안을 뿐이었다.
최태훈은 그에게 끌려가듯 안겼다. 백팔십에 달하는 장신의 몸인데도 왠지 모르게 힘없는 인형처럼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인지 모를 사내의 품은 따뜻했다. 그리고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건 사내 역시 마찬가지인지, 나른한 한숨과도 같은 말소리가 이어졌다.
“……겁먹지 말아요.”
태훈은 눈이 가려진 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제까지 들려왔던 작은 흐느낌이나 앓는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끔찍할 정도로 처절한 비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귀가 찢기는 것 같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그 괴성에, 가이드는 저도 모르게 자신을 뒤에서 감싸 안은 사내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러자 왠지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그러니까 지관영은 제 품 안에서 벌벌 떨고 있는 최태훈을 보며 작게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다 큰 사내가 떠는 모습이 한심하게 보이기는커녕 꽤 귀엽게 보이는 경험은 그에게 생소한 것이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지금 지관영은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능력을 많이 사용할수록 더욱 목이 마르고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자신의 힘을 사용하는 것을 늘 철저히 조절해왔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 관영은 자신의 힘을 쓰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괴물은 제가 끌어안은 가이드의 귓가에 잘게 입을 맞췄다.
감질나는 악수 이후로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이 이런 상황에서라니, 이 비극 같은 희극이 다시 있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최태훈의 귓가와 머리카락에 키스할 때마다 크고 작은 생채기에서 흐르는 피가 티끌 하나 없던 뺨에 묻었지만, 지관영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탐욕스레 품에 안은 사내에게 고개를 묻은 채로 기분 좋은 체향을 쭉 들이켰다.
그 순간,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누군가의 비명이 멈췄다.
희뿌연 안개 연기 따위는 괴물의 시야를 방해하지 못했다. 지관영은 감히 자신의 가이드를 다치게 한 에스퍼의 사지를 꺾어 비튼 후 건물 외벽에 처박았다.
그의 생명이 다하자 거리를 메웠던 인위적인 안개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비명에 움츠러들었던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하며 눈물에 젖은 얼굴로 주위를 살폈다. 그들은 살아남았음에 환희했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가장 먼저 보게 된 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한 근사한 영웅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들은 높다란 건물 가운데에 처참하게 몸이 꿰뚫려 죽은 채로 검붉은 피를 흘리는 사내를 멍하게 올려다보았다.
에스퍼는 최태훈의 급소를 찔러 그가 잠시 잠에 빠져들게 했다. 자신의 가이드는 저런 광경을 보아서는 안 됐다. 지관영은 여기저기서 시작된 헛구역질과 떨리는 비명을 들으며 힘이 풀린 늘씬한 몸을 안아 들었다.
제 이름을 등에 새기고 있는 사내가 사랑스러웠다.
그래,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사랑스럽게 여겨졌다. ……그건 정말로 이상한 기분이었다.
감긴 눈꺼풀의 얇은 피부가 유독 부드럽게 보여서 작게 입술을 떨구자 쭈뼛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분 좋은 감각이 전해졌다. 지관영은 아직 창백한 태훈의 얼굴을 간지럽히듯 만지작거렸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어도 될 것만 같은 순간이었다. 물론, 방해하는 이들이 없다는 가정하에서다. 괴물은 그제야 문득 떠올랐다는 듯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굳이 그렇게 무섭게 오지 않아도 되는데요.”
지관영의 말에 움찔한 건 온몸을 무장하고 총을 든 채로 그를 포위하듯 다가오던 공수부대였다. 그들은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사람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 참혹한 현장을 만든 테러리스트를 무참한 방법으로 죽인 사람이 정말 ‘저 남자’가 맞는지 몇 번이고 자문해도 답은 하나였다. 그들이 사랑했던 배우는, 감히 다른 에스퍼들이 함부로 진입할 엄두도 못 내며 상황을 지켜보던 참극을 마치 장난처럼 쉽게 끝냈다.
모든 관절이, 심지어는 손가락 끝 하나마저 엉망으로 비틀린 채 죽어 있는 사내가 이 상황을 만든 테러리스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안이었다. 여과 없이 전시된 그 참혹한 시신에 사방에서 토악질하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것으로 다 놀라기에는 부족하다.
만약 이들이 저 죽은 에스퍼를 부검하게 된다면, 그 어떤 장기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엉망으로 찢긴 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 번 경악에 차게 될 것이다.
지관영은 까만 안전 헬멧을 쓴 무장 군인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마치 그 안이 훤히 보인다는 듯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사실이었다.
괴물은 공포가 가득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이 보였다.
[지관영. XXXX년 XX월 XX일. SSS급 위험 에스퍼로 분류, 긴급 체포]
* * *
센터는 물론이고 군부 전체가 시름에 뒤덮였다.
물론 이유는 간단했다. ‘그’ 지관영이 강남에서 있었던 테러의 범인을 처형하듯 매달아 놓은 자라고 공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몇 달간 호감도 조사 1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는 초대형 스타가 사실은 끔찍한 살인현장을 만들어 낸 에스퍼라는 게 알려지면, 그 대상이 범죄자라고 한들 테러로 예민해진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불러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국민 모두가 알고 있는 사람이 실은 국가의 관리 감독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에스퍼라는 사실은 곧 국가의 무능함으로 직결될 것이 뻔했다.
괴물은 순순히 군부대에 구속되어 센터 깊숙한 곳으로 끌려왔다. 아니, 사실 문자 그대로 얌전한 건 아니었다. 그가 제가 품에 안고 있던 사내를 군에게 넘겨줄 때가 그랬다.
지관영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몰라 조금은 거칠게 태훈을 끌어당기자,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였던 에스퍼는 곧바로 불쾌함을 표현했다.
물론 그 방식은 제법 거칠었다.
최태훈을 건네 안은 군인 주위로 순식간에 날카로운 콘크리트 조각이 원 모양으로 둘러싸고, 검고 둔탁한 헬멧 표면을 유독 날카로운 쇳조각 하나가 듣기 싫은 소리를 만들며 살벌한 자국을 남기는 데 필요한 시간은 겨우 1, 2초가 다였다.
군인들은 에스퍼를 향해 황급히 총구를 겨눴지만 지관영의 시선이 가 있는 건 축 늘어진 태훈을 안은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추지 못하는 사내뿐이었다.
‘신경 써서…… 모셔가세요. 이마의 상처도 조심하고.’
하지만 난폭한 상황과는 달리, 지관영이 한 말은 그게 다였다. 관영은 군인이 제 가이드를 조심스럽게 고쳐 안자 다시 흐리게 웃고는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을 듯 에워싸고 있던 콘크리트 조각을 부숴버렸다.
흩날리는 매캐한 가루가 주는 위압감은 더 이상 꽉 억눌린 채가 아니었다. 군인들은 새삼스럽게 건물 외벽의 저 참상을 만들어 낸 자가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사내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지금, 지관영은 취조실에 앉아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떤 구속구로도 묶여 있지 않다. 지관영이 센터로 들어올 때, 출입문에 설치된 에스퍼의 능력 지수를 판별하는 기계가 붉은 오류 창을 띄우는 것을 보고 센터의 사람들은 직감했다.
지금 센터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저자를 구속할 수 없다.
지관영은 센터에 세 번째로 입성한 측정 불가의 에스퍼였다.
관영이 앉아있는 취조실의 문이 열리고 한 젊은 여인과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큰 키의 사내가 들어왔다. 흰 가운 차림의 이들은 둘 다 에스퍼였다.
괴물은 작게 묵례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기운을 가늠해보았다.
아마 여인 쪽이 물리계이고, 사내 쪽이 비물리계일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죠. 지관영 씨.”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얼핏 들으면 참 사람 좋게 건네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앉아있는 에스퍼들은 지관영의 말에 함께 마주 웃을 여유가 없었다. 관영이 저 근사하게 웃는 낯으로 자신들의 힘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 뻔히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에스퍼끼리의 스캔은 힘이 비슷할 경우 충분히 감추고, 방해하고, 때로는 거짓으로 위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최악의 무력감을 삼키는 중이었다. 발가벗겨진 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탐색 되는 느낌은 끔찍했다.
여인은 살짝 떨리는 입꼬리로 말문을 열었다.
“실제로 보니 정말 잘생기셨네요. 드라마도 잘 보고 있어요. 팬이랍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 TV만 켜면 나오는 저 사내가 에스퍼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니.
사실 여인은 실제로도 배우 지관영을 퍽 좋아했었다.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외견에 단단한 몸, 자연스럽게 배인 매너까지. 배우 지관영은 뭇 여성들의 최고의 이상형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퍼 지관영’은 달랐다.
지금 눈앞의 저 완벽한 사내는 느긋한 얼굴을 한 채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가장 위험한 인간 병기다.
“시작할까요. 오연 씨, 준비해 주세요.”
여인의 말에 오연이라고 불린 사내는 제가 들고 온 작은 노트북을 열었다. 지관영은 그걸 지켜보며 목을 스트레칭 하듯 몇 번 꺾으며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늘 흐트러짐 없이 정돈되어 있던 검은 머리카락이 살짝 헝클어졌다.
“그 전에, 끄세요. CCTV. 녹음하고 있는 것도 전부.”
“……네?”
“기계 소리가 들리는데. 그쪽에서 만지고 계시잖습니까?”
지관영은 눈을 휘며 새까만 미러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덧붙였다. ‘직업병이라서요. 몰래 찍는 건 좀.’
덕분에 위장 유리 너머로 취조실 안을 보고 있던 센터 고위 관계자와 수석 연구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들은 서로를 한 번 보더니, 버튼 몇 개를 눌러 관영이 요구한 대로 모든 CCTV와 녹음 기능을 껐다.
여인은, 이미현은 제 귀에 꽂힌 이어폰에서 모든 기계를 껐으니 이제 시작하라는, 긴장감을 채 감추지 못하는 지시를 듣고 본격적으로 취조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무엇이 마음에 안 드는지 한숨 쉬듯 웃었다. 그와 동시에 오연이 올려둔 노트북이 빙글 돌더니 지관영의 앞으로 휙 움직였다. 관영은 제 목 뒤를 주무르며 살짝 삐딱한 얼굴로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거 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요.”
지관영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채로 자그마한 노트북을 찌그러트렸다. 오연은 그다음에야 자신의 노트북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백업을 했던가. 무뚝뚝한 얼굴의 남자는 살짝 턱을 긁었다. 이미현은 순순히 관영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저희도 위에서 지시받은 사항이라서.”
“예. 이해합니다.”
“그럼 구두로 진행하겠습니다. 오연 씨, 부탁해요.”
비물리계, 정확히는 지능형 에스퍼인 오연에게 이런 대화를 기억하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오연은 작게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위기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광경이었다. 미현은 이것이 지관영이 에스퍼임을 들키지 않은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제 앞에서 웃고 있는 에스퍼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미혹하기까지 한다. 가이드도 없이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에 저게 포함되어 있을까. 미현은 생각했다.
“이름과 나이를 말씀해 주세요.”
“지관영. 서른넷.”
“에스퍼로 발현은 언제 시작되었나요.”
“스물하나. 13년 전입니다.”
원체 입이 걸걸한 미현은 저도 모르게 욕을 툭 내뱉을 뻔했다. 13년간 센터의 가이드 매칭을 받지 않고 미치거나 죽지 않은 에스퍼라니, 들은 적도 없다. 관영의 말에 무표정했던 오연도 눈을 살짝 크게 떴다.
하지만 그런 경악에 찬 반응에도 괴물은 별다른 반응 없이 느긋하게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이미현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질문을 계속했다.
“그동안 가이드 없이 어떻게 생활할 수 있었죠?”
“최대한 힘을 사용하는 것을 억제했습니다. 가이드가 필요할 땐 적당히…… 가이드를 찾아 나섰고요.”
우아하게 포장했지만 눈에 띄는 가이드를 붙잡아 뒹굴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인 말이었다.
“그들과 매칭이 됐었다는 겁니까?”
“글쎄요. 잘 되지는 않았었던 것 같네요. 늘 부족한 감이 있었으니까요.”
여유롭게 나온 지관영의 말에 오연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약간은 쇳소리가 섞인 낮은 목소리였다.
“그 정도면 센터의 가이드 배정을 받는 게 나았을 텐데. 왜 센터의 매칭 테스트를 받지 않았습니까?”
“귀찮아서요.”
어찌 보면 가장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관영의 말에 두 연구원은 순간적이나마 어처구니없다는 눈을 했다.
하지만 지관영, 그는 진심이었다.
물리계의 에스퍼가 얼마나 온갖 귀찮은 현장에 투입되는지는 당장 신문 1면만 살펴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관영 그는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누군가에게 명령받는 것도 썩 달갑지 않았다.
지관영 그 역시 인정하는 것도 있다.
페어 에스퍼 없이 지내는 것을 시작한 이래, 단 한 순간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끔찍했고, 눈과 코와 입과 모든 촉감이 두꺼운 리넨으로 감싸진 것 같은 시간은 지독했다.
하지만 높은 매칭률의 가이드를 찾아 마치 실험용 쥐처럼 테스트를 계속하며 제 능력을 그 마지막 한 꺼풀까지 모두 해부하려고 드는 센터의 비위를 맞추는 건, 드높은 프라이드를 가진 괴물에게 더욱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관영은 홀로 버티다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질 제 마지막 의식의 둑이 끊어지는 날을 기다리는 것을 택했다. 물론 그게 햇수로 10년을 훌쩍 넘을 거라는 건, 과거 갓 에스퍼로 눈을 떴던 스물한 살의 지관영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사실이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에스퍼는 제 자신이 미쳐 죽기에도, 그렇다고 홀로 버텨 살아가기에도 버거울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대충 몇 년만 버티다 보면 저는 완전히 미친 채로 날뛰다 어디에선가 죽지 않을까. 그렇게 죽게 된다면 제법 화려한 죽음일 거다, 하며 어설프게 상상했던 제 최후마저 아득해진 것이다.
지관영은 제 앞에 앉은 두 에스퍼가 자신의 말을 그다지 믿지 않는 것 같은 얼굴을 하자 ‘정말입니다, 하하.’ 하고 유쾌하게 웃기까지 했다.
결국 이미현은 그 듣기 좋은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작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가장 중요한 질문이겠네요.”
“네에.”
“그렇게 십 년 넘게 에스퍼인 것을 감추고 살다가 갑자기 강남 현장으로 나온 이유는 가이드 최태훈 씨 때문인가요?”
처음으로 지관영의 눈썹이 꿈틀했다.
미현은 이때다 하는 생각에 말을 이어갔다.
“의료팀에서 최태훈 씨의 상태를 확인하던 중 그분의 등에서 네임을 발견했다더군요.”
“…….”
“‘지관영’이라는 네임이라던데요. 그게 지관영 씨 본인인지도 궁금하군요.”
지관영은 십여 년 넘게 그 누구보다 ‘주목받으며 숨어 지내던’ 에스퍼였다. 그런 위험한 자에게 이름이 연결된 사람이 센터의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고, 또 가깝게 지내던 인물이었다는 건 천만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최태훈은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
저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자와 이름이 얽히기에는.
“두 번째 질문부터 답하자면…… 네, 지관영 본인. 맞습니다.”
“첫 번째는요?”
“엄밀히 따지면 그 사람 때문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에스퍼 때문이었죠.”
어딜, 건방지게 감히.
지관영이 나직하게 덧붙인 말에 취조실 안은 순식간에 싸늘한 공기가 흘렀다. 미현은 기 싸움에서 져선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테러리스트라고 해도 힘을 이용한 일방적인 공격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또, 국가에서 보호받는 가이드에게 공인되지 않은 비허가 에스퍼가 접근하는 것도 금지된 사항이고요. 이것만 해도 지관영 씨는-.”
하지만 이미현은 자신의 말을 다 끝마치지 못했다.
이미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오연의 노트북이 그대로 붕 떠오른 다음에 테이블에 거세게 내리 찍혔기 때문이었다. 미현은 반사적으로 튕기는 부품들을 모두 쳐 냈지만, 만약 저 노트북이 향하는 곳이 제 머리였더라면 잘 막아냈을 자신이 없었다. 시종일관 웃고 있던 괴물은 작은 미소도 걸고 있지 않은 채다.
두 에스퍼의 대화를 묵묵히 방관하듯 듣고 있던 오연은 저 위험천만한 사내가 어떤 부분에서 격렬히 반응했는지 정확히 짚어내었다.
‘국가에서 보호받는 가이드에게 공인되지 않은 비허가 에스퍼가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라는 부분에서, 지관영은 천천히 얼굴의 웃음기를 잃어 갔다.
지관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미러 쪽을 바라보았다.
얇은 유리막 하나로 자신들의 안전을 확신하며 에스퍼를 더 투입해야 한다는 둥, 약을 주입해야 한다는 둥 떠들던 자들은 마치 저들을 보고 있는 듯한 눈을 한 관영의 시선을 눈치채고 이내 조용해졌다.
괴물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센터 사람들이라 똑똑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멍청하시네.”
이미현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녀가 에스퍼로 각성한 뒤, 한 번도 느낄 일 없었던 순수한 공포가 고개를 들려고 하는 것을 무시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이봐. 지금 너희는 나 하나 정도는 우습게 움직일 수 있는 패를 손에 쥐고 있잖아.”
“…….”
“얌전히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겠다고 내 발로 걸어 들어왔는데, 왜 거슬리게 신경을 긁지? 내가 설마 당신들에게까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고 믿어?”
측정 불가 에스퍼를 우습게 움직일 수 있는 패.
오연은 그 말을 곱씹었다. 답은 뻔했다.
“……최태훈.”
“이제야 좀 말이 통하네. 그래. 그 사람.”
가이드의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지관영은 눈에 띄게 한결 나아진 얼굴을 했다. 지관영은 계속해서 태훈을 ‘그 사람’이라는 거리감 있는 단어로 지칭하면서도 그에 대한 호감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 어떤 에스퍼와도 높은 매칭률을 보이지 않았던 태훈이었다.
미현은 설마, 태훈이 저자와 매칭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디 아니길 바랐다.
최태훈처럼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은 저 난폭한 자와 이름이 연결된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힘들 것이다. 미현은 센터에 있으면서 그 단정한 가이드를 오랫동안 봐왔다. 그건 오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태훈의 오랜 술친구이자 오래전 한 번씩은 매칭 테스트를 거쳤던 에스퍼들이었다.
지관영은 다시금 느긋한 태도를 찾았다.
그는 나른하게 턱을 괴고 입을 열었다. 존대와 반말이 섞인 말투는 오만한 포식자의 느낌이 났다.
“지금 당신들이 할 일은, 나를 이런 시시한 방 안에 앉혀두고 뻔한 질문을 늘어놓는 게 아닙니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잡아 둘 생각을 해야죠. 목줄을 씌워서라도.”
에스퍼는 즐거워 보였다.
“자, 그럼 질문. 내 목줄은 누가 쥐고 있을까요?”
* * *
시야에 들어온 천장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검은 풍경과는 달리 뿌옇고, 새하얗다. 최태훈은 정신을 차리고도 곧바로 일어나지 못한 채 한참을 그저 눈만 깜박이다가, 뒤늦게 몰려오는 타는 듯한 갈증에 작게 목소리를 내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가이드의 입 밖으로 나간 것은 제대로 된 목소리가 아닌 갈라진 신음이었다. 태훈은 제가 낸 소리에 그 자신이 조금 놀랐다.
“일어났네요. 의사를 부를까요?”
머리맡에서 들려온 듣기 좋은 저음에 최태훈은 잠시 놀라 움찔했다. 누군가가 저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탓이었다. 잘 보이지 않는 사내는 희미하게 웃으며 허우적대는 가이드를 가볍게 부축했다.
“……저어, 물, 좀.”
“아, 네. 여기요.”
누군지 모를 남자는 태훈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앉힌 뒤, 손수 물을 마시는 것까지 도와주었다. 아직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태훈의 손을 덮은 사내의 손은 굉장히 따뜻했다. 그리고, 또 아주 조금은…… 묘한 느낌이었다.
최태훈은 제 피부 결을 하나하나 그리는 것 같은 손길에서 무의식중에 슬쩍 떨어졌다. 설마하니 저와 동성인 사내가 저를 더듬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한 탓에 그 어떤 의심도 못 한 채로 행동한 거였다.
적당히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는 물을 삼키고 난 뒤에야 겨우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태훈은 조각난 제 기억을 멍하게 따라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래.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다음에…… 테러. 맞아, 건물이 무너졌다. 그러고 나서는…….
“……아.”
최태훈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제 옆에 앉아있는 사내의 모습이 천천히 하나로 겹쳐지며 선명히 보이기 시작해서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보기 좋은 흰 빛의 얼굴, 그린 듯한 이목구비에 걸려 있는 느긋한 웃음기까지.
태훈은 남자의 이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조금은 구겨진 셔츠에 청바지를 걸치고 있는 모습은 언제나 빈틈없는 모습만 보였던 그답지 않은 것이었지만, 사실 그조차도 잘 어울렸다.
“안녕하세요.”
지관영이었다.
태훈은 왠지 등이 따끔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 * *
성행위. 섹스. 떡. 씹. ……씹?
최태훈은 담배를 쭉 빨아들였다가, 다시 뱉어내며 저도 모르게 헛웃음과 한숨 같은 단어를 흘렸다. 그건 늘 동생인 최승유에게 좋은 말만 쓰라며 꾸짖던 큰형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씹소름…….”
살며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 본 적 없던 이 상스러운 단어는 지금 최태훈의 심정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표현이었다.
그는 지금 센터의 병실에서 눈을 뜬 이후로 펼쳐진 상황을 느리게 곱씹고 있다. 태훈은 제 머릿속을 부유하듯 떠다니는 한 사내가 불편하다. 아니, 솔직히 거슬린다.
최태훈은 살며 제 자신이 저와 같은 성별인 사내를 이렇게 열렬히 생각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상상한 적 없었다.
지관영. 지관영.
이 모든 상황의 시작에는 지관영 그가 있다.
가이드는 병실에서 일어나자마자 저를 보고 느슨한 웃음을 거는 사내와 함께 검사실로 밀어 넣어졌다. 사실 센터의 사람들은 웬만하면 다 아는 사람들인지라, 태훈은 그 난데없는 행동을 미루는 걸 부탁하려고 했다. 아직 지끈거리는 두통이 좀 남아 있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최태훈을 볼 때마다 ‘오늘도 고생이 많네’라는 식으로 웃어 보였던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심각하기 짝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태훈은 센터에서 가장 친한 에스퍼 연구원 중 하나인 오연과 마주치고 나서야 ‘저 무슨 일 있습니까?’ 하는 조금은 바보 같은 질문을 슬쩍 건넸다. 정말이지 병실에서 눈을 뜬 이후로 계속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계속됐다.
물론 그중 가장 이상한 건,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매칭 테스트실로 들어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TV나 영화관에서만 보던 ‘그 지관영’과 함께!
가이드의 질문에 오연은 나중에 설명하겠다고 짤막하게 대답하며 정확한 설명을 피했다. 결국 최태훈은 어영부영 검사실에 끌려가 앉고 나서도 제 자신이 여전히 꿈속이 아닌가 하는 멍한 얼굴이 됐다. 그건 나름 설득력도 있었다.
태훈은 제 맞은편에 앉은 사내가 너무나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에 조금은 떨떠름한 얼굴로 눈만 끔벅였다. 곱게 만들어 빚은 듯한 얼굴에는 조금은 곤란하다는 미소가 스며들어 있다.
지관영이 에스퍼라는 말은 메신저로 도는 저급 찌라시는커녕 농담으로도 들은 적 없다. 최태훈은 제게 온갖 기계의 줄을 매다는 연구원들에게 휩쓸리듯 몸을 맡겼다.
에스퍼와의 매칭 테스트는 최소한 다섯 시간 이상이 걸리는 지루한 시간을 자랑한다. 덕분에 언제였던가는 꼬박 스무 시간을 앉아있던 적도 있었다. 그건 기본적인 신체 능력이 뛰어난 에스퍼들이야 눈 하나 깜짝 안 할 시간이겠지만, 가이드라는 사실을 빼고는 미들과 별다를 바 없는 최태훈에게 그런 오랜 검사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오늘, 행운의 여신은 그런 최태훈을 가엾게 여긴 것이 분명했다. 기꺼이 빨리 들어가 쉴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준 거다. 물론 그건 그가 전혀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였다.
매칭 테스트기를 가동하자마자 분석 결과를 알리는 스크린은 빠르게 숫자를 찍어내었다. 그것에 먹을 거라도 부탁할까 생각했던 태훈의 손이 뚝 멈췄다.
98.72 - 99.10 - 121.3 - 97.2 - 99.8 - 100 - ……
최태훈은 눈앞의 커다란 스크린에 떠오른 숫자를 넋 나간 듯 보다가, 제 머리를 조금은 거칠게 흔들었다. 아직 잠이 덜 깬 게 분명하다 확신했기 때문이다.
십 년 넘게 스크린에 저런 숫자가 뜨는 것을 본 적 없던 그였다. 그러니, 저건 꿈이어야 했다. 하지만 몇 번을 세게 눈을 감았다가 뜨고, 고개를 저어 봐도 푸른빛의 숫자는 선명하기만 했다.
저게 가능한 숫자야? 그것도 이렇게 바로?
최태훈은 그제야 제가 있는 곳이 현실임을 자각하고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왠지 뒷골이 확 당기는 기분마저 들었다. 테러 현장에서 겨우 살아남았다고 생각했다. 센터의 천장이 눈에 들어오고 그 지관영이 제게 인사했을 때에는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오락가락했지만, 그래도 분명 살아남아 기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태훈은 눈앞에 보이는 수치를 보고 제가 사실은 이미 죽어 말도 안 되는 악몽을 떠도는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얼이 빠졌다.
거대한 스크린에서 떨어질 줄 모르던 가이드의 시선이 그제야 천천히 제 맞은편의 남자를 향했다. 최태훈과 마찬가지로 검사 기계를 잔뜩 달고 있는 지관영은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숫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저 수치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한 눈이었다.
30퍼센트에서 50퍼센트 사이의 에스퍼-가이드 페어는 간단한 사교적인 스킨십 정도면 충분히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애초에 그다지 높은 난이도의 일이 주어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50퍼센트 이상부터다.
그때부터는 단순한 포옹이나 악수 정도로 예민하고 극도로 발달한 신경을 가진 에스퍼를 진정시킬 수 없다. 매칭률이 올라갈수록 가이드에게는 더욱더 긴밀한 접촉이 요구된다.
적어도 70퍼센트 정도만 됐더라면 페팅 정도로 끝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스크린 속의 숫자는 태훈의 기대를 비웃듯이 하이 스코어를 갱신했다. ‘151.2’.
한편 매칭 테스트실 바깥에 있는 연구원들은 태훈 못지않게 놀라 있었다. 아니, 놀라다 못해 경악에 차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오연은 저도 모르게 테스트실 안에서 조금은 불안한 얼굴로 눈을 굴리고 있는 태훈을 바라보았다.
100을 넘는 매칭률은 말 그대로 전대미문의 수치다. 90대만 해도 손꼽히게 희소해서 연구 대상이 되고는 하는데, 150대라니.
아무리 떨어져 봤자 90퍼센트 중반대인 매칭률은 지관영과 최태훈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페어임을 알리고 있었다. 분명 평소의 센터였다면 이 엄청난 결과에 축하주를 꺼내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저 사내, 지관영과 관련된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어도 그들이 알고 있었던 신사적이고 예의 바른 배우 지관영이었다면 어쨌거나 이런 초상집 같은 분위기는 안 됐을 것이다. 문제는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에스퍼 지관영’이다.
그는 신체 자체에서 모든 기계적, 능력적 스캔을 거부하는 터라 약점은 물론 강점조차 분석할 수 없는 데다 센터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도 않는다. 거기에 살인에 대한 거부 반응도 없고 그 방법도 잔혹하다.
능력은커녕 그 생각 자체를 종잡을 수가 없다.
저 에스퍼의 능력이 센터와 안보를 위해 사용된다면 그건 더할 나위 없는 든든한 아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완벽한 페어의 가이드까지 찾은 그가 테러리스트로 돌변한다면 막을 수 있을 방법이 있을 리 없다.
설령 막는다 한들 그 피해 규모는…… 짐작조차 하기 싫다.
“저기. 이거 수치 잘못된 거 아닙니까?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테스트실의 문을 벌컥 열고 애써 웃으며 말하던 가이드의 목소리가 눈치 보듯 줄어들었다. 최태훈은 제가 보이자마자 마치 물결치듯 깜짝 놀라는 연구원들을 보며 직감했다.
잘못된 수치는 무슨 개뿔!
테러 현장에서 겨우 구조된 가이드를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검사실에 밀어 넣을 때부터 상황 파악을 해야 했다. 태훈은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선택지에 두지도 않았던 가이드로서의 삶이 제 인생의 주요 임무로 떨어진 것 같은 기분에 벼랑 끝에 선 듯 아득해졌다.
자기소개서를 얼마나 많이 썼는데. 어떻게 들어간 회산데. 이제야 좀 적응됐는데. 아니다, 그것보다-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요.”
남자 에스퍼잖아!
최태훈은 잔뜩 붙이고 있던 기계들을 떼어내며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지관영을 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와 눈이 마주치자 상냥하게 웃어 보였지만, 태훈은 그것을 못 본 척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고는 괜히 목소리를 높여 오연에게 물었다.
“연 씨, 저기, 저 수치요. 저 수치 어떻게 된 겁니까? 뭔가 잘못된 것 같아요.”
“…….”
“애초에 기계를 돌리자마자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없었잖습니까. 네?”
“높은 건가요?”
오연 대신 물음으로 태훈의 말에 질문을 더한 것은 지관영이었다. 그 덕에 최태훈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물론, 에스퍼는 그런 가이드의 움직임을 웃는 낯을 한 채 모조리 제 눈에 담아 두는 중이다.
오연은 처음으로 태훈의 뒤에서 제 대신 입을 연 에스퍼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처음 받아 보는 매칭 테스트라고 한들 태훈의 반응을 보고 높은 수치라는 것을 뻔히 눈치챘을 사내가, 모르는 척 놀리고 있었다.
그런 오연의 생각에 쐐기를 박은 건 지관영의 이어진 말이었다.
“……네임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아, 확실히 저 사내는 성격이 나쁘다.
오연은 근 몇 년간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머리가 아파지는 것 같아 살짝 이마를 짚었다. 지관영이고 뭐고, 그 자신도 제 가이드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애써 에스퍼를 모른 척했던 최태훈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지관영은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대며 뒤를 돌아보는 가이드를 마음껏 구경했다.
오연이 생각했듯 이건 지관영 그의 작은 심술이 맞았다. 눈을 뜰 때까지 한참을 옆에서 기다렸는데 제게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가이드를 향한 악취미이기도 했다.
놀라다 못해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을 뿐이다.
“제 등에도 있거든요. ‘최태훈’.”
* * *
둘째부터 막내까지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보는 것에, 기어코 최태훈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매칭 테스트실로 넘어가는 바람에 한참을 더 기다려야 했던 가족들은 혹시라도 자신들의 맏이가 정말 어딘가 크게 다쳐서 늦어지는 줄 알고 한참을 마음 졸였던 터였다.
“흐어허, 혀어, 엉!”
“최우진, 네가 우니까 애들 다 울잖아.”
체대를 다니는 최우진은 180인 태훈과 키는 엇비슷하지만 태훈이 늘 장난삼아 근육 돼지라고 부를 정도로 훨씬 체격이 좋다. 우진은 제 형이 뭐라고 하든 말든 헝헝 소리를 내면서 태훈을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소시지가 딸려오듯 셋째 승유, 넷째 지현, 다섯째 민아, 마지막으로 막내 정민까지 태훈을 겹겹이 끌어안았다.
태훈은 그런 아이들을 보며 눈물을 찍고 있는 부모님에게 살짝 묵례하고는 입모양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심란했던 마음이 가족들을 만나고 나서야 겨우 가라앉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센터의 응접실에서 감동의 재회가 펼쳐지는 동안, 그보다 몇 층 위의 중앙 연구실의 분위기는 한창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태훈 씨가 양성애자였던가요?”
아닌 것을 알면서도 마지막 희망을 품고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오연은 그 질문에 진솔하게 대답했다.
“이성애자입니다. 기존 매칭 테스트 때에도 남성 에스퍼는 거부 의사를 밝혔었습니다.”
오연은 그 역시 최태훈과 매칭 테스트를 거쳤던 에스퍼로서, 태훈의 성향을 잘 알고 있었다. 오연 그가 열일곱의 가이드 최태훈과 매칭 테스트를 받으러 갔을 때, 태훈은 검사실로 발을 내딛다가 저를 보며 놀라 황급히 뒷걸음질 쳤었다. 반사적으로 ‘헐, 남자다!’ 하고 소곤거렸던 목소리도 선하다.
물론 나중에 가서야 ‘내가 뭐 높은 매칭률이 나오겠어’ 하면서 남성 에스퍼와의 테스트도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태훈이었지만, 그건 양성애자여서가 아니라 높은 매칭률이 나올 리 없다는 자포자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미현은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한평생 스트레이트로 살아온 사내에게 가이드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성별인 지관영과 잠자리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건 그녀에게도 가혹한 일이었다. 센터를 밥 먹듯 드나든 태훈이라면 말하기 전부터 이미 그 엄청난 수치를 보고 상황을 파악했을 테지만, 어쨌거나 가이드에게 이 결과를 전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건 이미현, 그녀였다.
미현은 담배를 얼마나 태웠는지 목소리도 슬쩍 갈라져 있던 최태훈을 떠올렸다. 다섯 살부터 센터를 찾았던 태훈이 150을 넘어서는 매칭률이 뜻하는 바를 모를 리 없다. 오히려 너무나 잘 알아서 문제다.
그 눈치 빠른 가이드는 이번만은 거부권이 없으리라는 것마저 이미 알고 있을 거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던 수치다. 몸을 섞고, 에스퍼와의 정신적 교감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 150을 훌쩍 상회하면서 기록에 가까운 매칭률이 나올 수도 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이미현은 제가 자신의 가이드와 150이 넘는 매칭률이 된다면 능력이 어느 정도까지 개방될지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65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게 생활하고 있었다. 능력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도 없었다. 그런데 그 두 배가 넘는 수치라니. 대체 감각 기관이 어떻게 반응하고 움직일지 상상도 어려웠다.
한없이 높은 매칭률이라는 건 에스퍼에게는 마냥 좋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삐끗 잘못하다가는 정신이 무너지기 쉬운 수치에 가깝다. 가이드라고는 하지만, 어쨌거나 타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게 되는 탓이다.
최강의 인간병기에게 턱 끝으로 명령을 내리고, 그의 말마따나 우스울 정도로 쉽게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는 건 이제 가이드의 손에 떨어진 권력이 되었다. 지관영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약하고 평범한 사내가 측정 불가 에스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다.
수치가 주는 충격에 익숙해질수록 지관영이 말한 목줄이라는 단어가 이해 가기 시작하는 미현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연구실 한편의 소파에 앉은 사내에게로 향했다. 지관영은 다리를 꼰 채 눈을 감고 있다.
아마 저 에스퍼는 늘 그랬듯이 그가 주도권을 쥐고 즐기는 게임의 룰을 변경한 것 정도로 알고 있을 테다. 언제든 여유롭게 목줄을 끊을 수 있는 사냥개 놀이라 여길 게 분명하다.
미현은 쓰게 웃었다. 지관영. 저 사내는 이제야 에스퍼로서의 시간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지관영이 눈을 번쩍 떴다. 그답지 않게 조금은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 * *
“근데. 오빠. 무슨 담배 냄새가 이렇게 심해?”
“맞아! 환자가 담배는 무슨 담배야. 겁도 없어!”
“환자까지는 아니었어.”
“머리에 있는 거즈는 뭔데!”
최태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담배를 태운 것에 대해 변명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 전 그에게 담배는, 아득한 현실의 유일한 탈출구나 다름없었다.
151.2.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수치가 슬금슬금 머리를 들었다.
미뤄뒀던 숙제가 마음을 초조하게 하는 듯 심장이 뛰었다. 이제껏 늘 동생들에게 ‘할 일은 미루지 않고 그 즉시’ 하라고 말했던 태훈이었고, 그 자신도 성격대로 맡은 일은 요령 부리지 않고 처리했었지만…….
그래, 사실 이것만큼은 최대한 미루고 도망치고 싶었다.
다섯 살, 아예 기억도 나지 않는 때부터 가이드로 발현했다. 덕분에 최태훈에게 이곳 센터는 기억이 시작되는 지점부터 함께한 너무나 당연한 곳이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이곳을 오가며 제법 많은 페어를 보기도 했다. 당장 오연만 해도 동성의 가이드를 두고 있다. 그들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거나 하는 건 절대 아니다. ……단지, 그 당사자가 자신이 될 줄은 몰랐을 뿐이다.
최태훈은 제 셔츠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도저히 담배 없이는 버티기 힘들었다. 덕분에 동생들은 물론 태훈의 부모까지 그것에 놀라 그를 말리려 들었다. 하지만 태훈은 능글맞게 ‘아, 한 대만. 한 대만.’ 하고 기어코 하얀 대 끝에 불을 붙였다.
이제껏 부모님 앞에서는 담배를 절대 피우지 않던 장남의 이상행동에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리고 머지않아 태훈이 조금은 초조한 듯 손을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이드의 입에서 희뿌연 연기가 나오자마자 센터의 공기청정기가 바로 가동되었다. 최태훈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제 손바닥을 감추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들립니까?”
“형?”
“내려오십쇼. 얘기 좀 합시다.”
영문을 모를 행동에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응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가 이전보다 훨씬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문 앞에 서 있는 톱스타 때문이었다.
최태훈은 슬쩍 떨리는 손과는 달리 제법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상황과 ‘에스퍼 지관영’에 대해서 제 가족에게 설명했다. 가족들은 태훈의 등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이 ‘그 지관영’이었다는 사실에 경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둘의 매칭률이 최소 94퍼센트에서 최대 150퍼센트 가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놀란 얼굴조차 하지 못했다.
가족 중 태훈만이 유일한 가이드였지만, 그 높은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태훈의 부모는 잠시 바람을 쐬고 온다며 응접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최태훈은 그런 제 부모님을 보며 씁쓸히 웃었고, 동생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주눅 들어 고개를 푹 숙였다.
사실 태훈의 등에 떠오른 이름이 지관영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남동생들은 ‘형 완전 게이각 섰음.’이라고 놀렸고 여동생들은 TV에 지관영이 나올 때마다 ‘오빠 그이 나왔다!’며 장난쳤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게 반쯤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최태훈은 그런 제 동생들을 보고 있자니 괜히 속이 일렁여서 그 둥그런 머리들을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왜 너희들이 기가 죽냐.”
“그럼 형 이제…… 가이드로 일해야 하는 거야?”
대표로 물음을 던진 건 최우진이었다. 그건 모두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한 것이면서, 관계 당사자인 지관영 역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답이기도 했다.
우진은 응접실에 들어선 후 ‘안녕하세요. 지관영입니다.’라는 인사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에스퍼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여전히 말끔한 얼굴로 웃고 있는 톱스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지관영인데.
아무리 제 형이라지만 생판 모르는 남자와 몸을 섞어야 하는 상황이라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우진은 왠지 모르게 팔등에 소름이 돋는 것 같은 기분에 팔을 쓸었다. 제 기분의 이유를 모른 채 무의식중에 취한 행동이었다.
최태훈은 담배 하나를 더 빼 물려다가, 텅 빈 담배곽을 보고 이내 그것을 구겨버렸다.
“……몇 가지 좀 센터에 물어보고.”
면회시간이 끝났다는 방송이 응접실 내를 채웠다. 태훈은 아직 며칠간은 센터의 의료진들에게 더 검사를 받아야 했기에, 가족들을 먼저 내보냈다. 지관영에게도 어설픈 인사가 줄지어 건네졌다. 에스퍼는 뭐라 흠잡을 데 없이 예의 바른 태도로 가이드의 가족에게 인사했다.
우르르 몰려왔던 이들이 모두 떠나고 나자, 응접실엔 지관영과 최태훈 단둘만 남았다. 그와 동시에 태훈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최태훈은 터덜터덜 소파에 가서 앉았다.
관영은 그런 태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꽤 침착하게 가이드의 말을 기다렸다. 그는 최태훈의 심장박동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았다.
이윽고, 태훈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지관영 씨.”
“네.”
“그쪽, 그러니까, 관영 씨는.”
관영 씨. 처음으로 태훈의 입에서 제대로 나온 그의 이름이었다. 괴물은 희미하게 눈을 휘었다.
“남자 가이드여도…… 괜찮습니까?”
“…….”
최태훈은 아직 지관영의 눈을 잘 바라보지 못한다. 아직 눈앞에 있는 사내가 저를 위해 태어난 듯한 에스퍼라는 것도, 그 등 위에 제 이름을 새기고 있다는 것도 제대로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다.
지관영은 천천히 제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비척비척 시선을 피하다가 뒤늦게 그 행동을 눈치챈 태훈은 새파랗게 질렸다.
“뭐, 뭐, 뭐, 뭐, 뭐, 뭐 하시는, 거……!”
“보셔야 할 것 같아서.”
“뭐, 뭐, 뭘 말입니까!”
만들어 새긴 듯한 근육으로 단단하게 가득 찬 사내의 몸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태훈은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그것은 흥분의 의미가 아닌 그 머릿속 한 곳에 가득 차 있었던 동성과의 섹스가 주는 위압감 때문이었다.
지관영은 미간을 찌푸리듯 웃으며 제 셔츠를 완전히 벗어내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던 태훈은 이어지는 침묵에 움찔대며 눈을 떴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최태훈의 입에서 작은 탄성 같은 소리가 났다.
에스퍼는 제 등 위로 꽂히는 가이드의 시선을 느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관영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작고, 느린 질문이 떨어졌다.
“이게 제 이름……입니까?”
“네.”
“……어떻게요?”
관영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컵에 조금 남아 있던 물이 움직였다. 태훈은 허공에 둥둥 떠오른 그 액체가 저와 같은 위치에 같은 필체로 새겨진 네임의 모양대로 바뀌는 걸 멍하게 보았다.
지관영은 천천히 그 복잡한 네임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저와 이름을 나눈 사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히, 서두르지 않고.
ㅊ, ㅗ, ㅣ, ㅌ, ㅐ, ㅎ, ㅜ, ㄴ.
최태훈은 말이 없다.
에스퍼는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물을 내버려 둔 채, 셔츠를 다시 챙겨 입은 뒤에야 가이드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최태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스퍼와 가이드는 그렇게 한참을 침묵 속에 있다가, 한참 뒤에야 태훈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나갈까요.’ 하고 묻는 것을 시작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접실 문을 열자마자 복도에서 한참 전부터 기다린 것으로 보이는 연구원들이 휙 고개를 쳐들었다. 최태훈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의 이미현을 보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노크하시지. 기다리셨어요.”
“……저어, 태훈 씨.”
“미현 누나. 가이드는 공무원인가요?”
‘미현 누나’.
그건 태훈이 술자리에서나 부르는 이름이었다. 미현은 태훈의 그 다정스럽고 한편으로는 사무적인 질문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오연도 눈썹을 꿈틀했다.
“네? 네, 그렇죠. 공무원으로 들어가요.”
“몇 급?”
태훈의 질문은 이제 제법 구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작이…… 7급이요.”
“연금은 나오나요?”
“네…….”
“관사 지급은요?”
“가이드의 경우…… 관사는 원하면 무조건 나오는데요…….”
연구원들은 물론이고 지관영의 시선까지 사뭇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 듯한 태훈에게로 쏠렸다. 최태훈은 무언가를 더 생각하는 듯하다가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덧붙였다.
“지관영 씨는 배우 활동 계속합니까?”
“네?”
“계속했으면 좋겠는데요. 안 됩니까?”
이미현은 영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개인 공인 에스퍼로 등록하면 지장은 없긴 한데요…….”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지관영을 향했다. 연구원들의 앞에서 단 한 번도 풀린 표정을 보인 적 없던 에스퍼는, 처음으로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듯 눈만 깜박였다.
최태훈은 턱을 긁적이며 관영의 표정을 살피더니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약간은 민망하다는 듯 시선을 빙빙 돌리면서다.
“……저희 집 넷째가 지관영 씨 보는 낙에 살아서요.”
그 이유로? 겨우 그 이유가 다야?
미현은 그렇게 물으려는 것을 꾹 삼켰다. 대체 저 작은 응접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보아하니 한평생 이성애자로 살아왔던 완고한 최태훈은 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에스퍼를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건 연구원으로서는 기쁜 일이었지만, 태훈의 술친구이자 누나로서는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그것도 지관영의 배우 커리어를 걱정하면서!
묘한 침묵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하.”
지관영의 입에서 작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꾸며 만든 것이 아닌 그 자신의 순수한 웃음이었다. 태훈은 그 웃음에 왠지 귀가 화끈해지는 것 같아서 괜히 혓소리를 내면서 딴짓을 하다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최태훈은 천천히 그의 에스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최태훈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두 번째 악수였다. 이번에는 최태훈이 먼저 뻗은 손이다.
지관영은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흑갈색 눈을 마주 보았다. 입이 마르는 것 같은 묘한 갈증이 일었다.
“지관영입니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Esper : 지관영 Guide : 최태훈
특이사항 : 네임 공유, 매칭률 최대치 151.2%
* * *
TV, 신문, 인터넷…….
소식을 알릴 수 있는 매체라면 모두 한결같이 지관영의 에스퍼 발현에 대해 떠들었다. 그의 발현은 최근에 갑작스레 일어난 것으로 공식 발표되었고, 덕분에 에스퍼의 집 앞은 언제나 기자들이 진을 친 채 관영의 말 한마디를 얻기 위해 난리였다.
톱스타의 에스퍼 발현.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굉장히 구미 당기는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바로 누구나 가지지 못해 안달인 저 사내를 차지하게 된 가이드가 바로 누구인가 하는 거다.
[지관영의 가이드는 센터 소속 가이드이며, 둘은 센터 사상 최고의 매칭률을 보였다. 또한 이름이 서로 묶인 상태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가이드에 대한 정보는 겨우 이 두 줄이 다였다. 하지만 그 빈약한 정보는 사람들을 달래기는커녕 상상력이 더욱 활개 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준 셈이 됐다. ‘엄청 예쁜 여자래’, ‘아니, 남자라던데?’, ‘사실 재벌가 누구래’.
가이드 최태훈에 대한 소문은 그렇게 나날이 온갖 추측을 낳으며 더욱 증폭되어갔다.
한편, 최태훈은 그런 소란과는 한 걸음 떨어져서 회사에 사직서를 내고 제 짐을 정리하여 가이드 관사로 옮겨왔다. 그는 이제 반쯤 해탈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관영이 에스퍼라는 것을 발표하면 꽤 소란스러울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폭발적일 줄은 몰랐던 그였다. 최태훈은 새삼스럽게 제 에스퍼로 살게 된 사내의 엄청난 인기를 다시 깨달았다.
절대로, 절대로 비밀로 해야지.
한평생 민간인의 삶을 살아온 태훈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잖아도 동성의 에스퍼-가이드 페어인데, 그 상대가 지관영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정말이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최태훈은 제 여동생들이 챙겨 준 디퓨저를 테이블 가운데 올려두었다. ‘오빠. 이거 심신 안정에 좋대.’ 하는 말과 함께 아주 조심스럽게 건네준 물건이었다. 오빠 죽으러 가는 거 아니라는 말은 그 시무룩한 얼굴을 보며 차마 내뱉지도 못했었다.
관사로 옮겨 온 이후 태훈의 일상은 이전보다 더욱 단순해졌다. 오전에는 테러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한 멘탈 케어 상담을, 오후에는 에스퍼에 대한 교육을 받는다.
가이드는 저와 페어가 된 사내가 물리계 특화 에스퍼고 살상 쪽에 능력이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는 귀띔을 그제야 듣게 됐다. 으레 가이드들이 제 상대 에스퍼에 대해 받아 보는 리포트는 없었다. 그건 지관영이 기계의 스캔을 허락하지 않는 에스퍼기 때문이었지만, 최태훈은 그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같이 얼굴 보고 지내다 보면 알게 되겠죠. 뭐.’
한 번 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가이드는 사소한 것은 무던하게 넘어가면서 바뀐 생활에 제법 잘 적응하고 있었다.
……에스퍼, 지관영과는 달리!
지관영 그가 처음으로 만난 자신의 가이드와 한 접촉은 침대에서 막 깨어나 늘어지는 몸을 부축해 준 것과 짧은 악수가 전부다. 별것 아닌 사소한 접촉에도 센터의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바닥 쳤던 기분이 순식간에 진정되는 감각이란, 이제껏 가이드에 대한 그 어떤 기대도 없이 살아왔던 그의 인생을 고쳐 새기는 경험이었다.
일부러 막아두었던 제 감각을 열어 두었는데도 세상이 일그러지지 않는 건 그가 에스퍼가 된 이후 처음 겪는 것이었다.
목이 말랐다.
제 앞에서 멋쩍게 웃는 사내를 당장에 끌어안고 뒹굴어도 부족할 터였다. 하지만 지관영은 들끓는 욕구를 눌러 참았다. 긴장으로 빠르게 뛰는 태훈의 심장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이제 시간은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허나 지관영 그는 본인의 생각보다 훨씬 더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사내였다. 언제나 구름 떼 같은 기자들과 사람들, 극성 팬들이 지관영의 뒤를 따랐다. 집과 촬영장을 반복하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가이드에게 찾아가려 해도 도통 그럴 만한 틈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어느 날 새벽.
지관영은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용건은 단순했다. 집 앞에 있는 기자들을 모두 꺼지게 하지 않으면 저택의 담장에 한 명씩 매달겠다고 그 성질대로 한껏 짜증을 낸 것이다.
사실 기껏 만난 페어 가이드와 접촉은커녕 최소한의 교감조차 하지 못하는 에스퍼의 불안정한 상태는 센터에서도 걱정하던 바였다. 그게 이렇게 꼭두새벽에 가장 극단적인 방법으로 발휘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뿐이다.
결국 센터에서는 허겁지겁 지관영의 저택으로 정신계 에스퍼들을 파견했다. 지관영은 여기저기 뻗친 머리를 한 채 졸린 눈을 비벼가며 기자들에게 환영을 심는 연구원들을 흘끗 보며 유유히 제 저택을 빠져나와 진작 머리에 외워 두었던 길을 따라 차를 몰았다.
목적지는 최태훈이 머무는 관사였다.
가이드 관사는 가이드만을 위한 일종의 센터 분원이나 마찬가지다. 철저한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한 층에 가이드 한 명만 배정된 개인 아파트 형식으로, 어느 층에 누가 사는지는 암호화되어 센터의 담당자들만 알 수 있다. 에스퍼의 출입 역시 제 페어 가이드의 공간으로만 제한된다.
이렇게 보안뿐만 아니라 늘 최상의 멘탈 케어가 요구되는 가이드를 위한 복지도 잘 이루어져 있는 관사는, 별다른 사정이 없다면 대부분의 가이드들이 택하는 선택지였다.
관사 출입구의 바리케이드에서는 난데없는 새벽의 방문객에 바짝 긴장했다가, 차 창문을 내리고 가볍게 웃으며 묵례하는 사내의 얼굴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진짜 지관영이구나.
관리인은 지관영의 인사에 가볍게 마주 인사하고 작은 스크린을 띄웠다.
[스크린 보시면서 왼쪽 손바닥을 찍어 주십쇼.]
“네.”
관영은 고분고분 관리인의 말을 따랐다. 곧이어 관영의 홍채와 손바닥 지문을 분석하는 스캐너가 순식간에 지나가더니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
에스퍼는 그 안으로 한참을 들어간 뒤에야 모습을 드러낸 주차장에 차를 댄 후, 출입구에서 다시 한 번 지문을 찍었다. 꽤 삼엄한 보안이었다.
그는 이제 슬슬 제 가이드를 보러 가는 과정이 번거롭고 귀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바뀌게 된다. 거의 방치한다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닌 에스퍼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지극정성인 가이드의 보호는, 사실 에스퍼들이 강력하게 요청한 것이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의 안전에 매우 민감하다. 지관영은 아직 그것에 눈뜨지 못했을 뿐이다.
지관영이 탄 엘리베이터는 층수조차 뜨지 않은 채로 무작정 움직였다. 아래로 내려가는지 위로 올라가는지도 알 수 없이 그저 ‘이동 중’이라는 액정의 표시가 다였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가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도착지는, 지관영 그가 이 건물에서 출입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아직 정리가 덜 끝났는지 거실 여기저기에 박스들이 보였지만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섯 동생을 둔 맏이인 태훈에게 청소는 생활과도 같다. 거기다 저와 같은 사내의 집에서는 나지 않을 것 같은 옅은 향도 났다.
에스퍼는 테이블 위에 있는 디퓨저를 손끝으로 툭, 건드리고는 가이드의 숨소리가 들리는 방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늦은 새벽이라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최태훈은 잠에 빠져있었다. 지관영은 침대에 걸터앉아 세상모르고 잠이 든 가이드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일정하게 들리는 숨소리가 귀에 박혔다.
우스운 일이었다. 저 남자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잔뜩 날카로워졌던 신경이 잠잠해진다는 건. 관영의 손이 천천히 태훈의 얼굴을 향했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이마에 났던 상처였다. 상처는 이미 딱지가 져서 아물고 있었다.
지관영은 그 위를 살살 조심스럽게 문지르다가 보드라운 눈꺼풀, 만졌을 때 그 뼈 모양이 그려지는 오뚝한 코 그리고 약간 벌어진 입술까지 모두 제 손에 그렸다. 시간은 에스퍼 그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흘렀다. 그저 최태훈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갔다.
에스퍼는 마치 자신의 집인 것처럼 가이드의 공간을 휘젓다가, 거기서 커피를 찾아냈다. 꽤 괜찮은 원두였다. 그는 제 페어의 취향이 퍽 만족스러웠다.
한편, 가이드 최태훈은 회사에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맞춰 둔 휴대폰 알람에 잠이 깼다.
“……으, 시끄러.”
아침잠이 많은 자신을 위해 설정한 시끄러운 소리는 얼마 안 가 방 전체를 가득 채웠다. 태훈은 요 며칠간 알람을 지워야지 하면서 이렇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버티는 중이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저걸 끄고 싶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애초에 저렇게 요란스러운 소리를 알람으로 정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데 그때였다.
귀를 때리던 알람 소리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최태훈은 무의식중에 조용해져서 좋다고 생각하며 더 자려고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그 순간 슬그머니 머리를 드는 의문이 있었다.
‘왜 꺼졌지?’
게다가 뒤늦게 코끝에 걸려든 은은한 커피 향은…….
최태훈은 그제야 벌떡 일어났다.
“…….”
“좋은 아침.”
요새 휴대폰만 켜면 온갖 곳에서 제 에스퍼라며 볼 수 있는 사내가 커피 잔을 쥔 채 앉아있는 광경에, 태훈은 제가 아직 잠이 덜 깼나 고민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매우 느긋한 얼굴로 지금의 상황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태훈 씨도 커피 한 잔 마실래요? 막 내렸는데.”
“어, 어, 언제…… 오셨……습니까?”
“새벽에요.”
상냥하게 대답하는 지관영의 머리카락은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빛 때문에 까만 먹에 금빛을 뿌린 것처럼 반짝였다. 가이드는 살짝 눈을 찡그린 채 제 질문을 마저 덧붙였다.
“……무슨……일로…….”
“슬슬 한계여서 왔는데요.”
평소 욕을 정말 잘 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태훈은 이 순간만큼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상소리를 삼켰다. 본격적인 가이드 생활은 사실 꽤 좋았다. 언젠가는 센터에서 일하는 미래를 꿈꾸게 될 정도로 마음에 든 데다가, 제가 나오면서 남는 방에서 동생들이 좀 더 편하게 지내게 된 것도 잘됐다 싶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언제나 속이 얹힌 듯한 묘한 부담감이 있었다. 그 이유는 뻔하다. 가이드로서 맡은 가장 막중한 책무 때문이다. 최태훈은 잠시나마 회피했던 행위 당사자의 등장에 파들파들 떨리는 목소리를 채 감추지 못하고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아. 센터에, 오늘, 그, 멘탈 케어도 있고, 교육도 있고- 그래서…….”
“오늘은 센터 교육 안 가도 괜찮을 겁니다.”
“네?”
두서없는 말조차도 뭇 여성들이 보았으면 가슴 떨려 할 근사한 미소를 띤 채 차분히 들어주던 에스퍼는, 제 가이드의 근심을 덜기는커녕 더해주는 배려를 상냥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제가 여기 왔다는 거, 센터에서도 알고 있거든요.”
……아주 둘이 오늘 하겠다고 광고를 찍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최태훈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지관영의 얼굴에 베개를 집어 던지고 싶다고 생각하며 애꿎은 이불만 꽉 쥐었다. 목부터 확 열이 치미는 것 같아 도로 이불 속으로 숨고 싶어질 정도인데, 저와는 달리 느긋이 웃고 있는 사내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눈앞의 남자가 이제껏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던 페어의 처소에 왔다는 것의 의미는 너무나 뻔했다.
에스퍼는 그런 가이드를 보며 모르는 척 미소를 걸었다.
그는 그저 최태훈의 체온이 올라갔다는 사실이 유쾌할 뿐이었다.
* * *
가이드 관사는 욕실이 두 개다.
최태훈은 그 친절함에 한없이 우울해졌다. 지금 그는 한 시간 넘게 씻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바보가 아닌 이상 피하고 있다는 걸 뻔히 알 수 있을 거다. 머리로는 이러는 게 예의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하지만 그런 이성과는 다르게 마음은 차마 욕실 문을 열고 나갈 엄두를 못 냈다. 그래서 가이드는 이미 뽀득뽀득 거품을 내 씻은 몸을 뜨거운 물에 도로 푹 담갔다. 어찌나 물에 오래 있었는지, 손끝이 쭈글쭈글했다.
오늘 지관영, 그 에스퍼는 온종일 저를 엄청나게 배려했다.
오전에 멘탈 케어 상담을 받고 나서 일부러 한참을 빙글빙글 돌아 느지막이 들어오니, 점심을 다 준비해 놓은 채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봤을 땐 자신의 행동이 좀 부끄럽기까지 했었다.
최태훈은 제 에스퍼에 대해 아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지관영. 서른 넷. 물리계 에스퍼. 출연한 영화는 ○○○, □□□□, 드라마는…….
하지만 이게 다였다. 정말 이게 다였다.
최태훈은 이제껏 스물여덟 해 동안 살아오며 겨우 이 정도 아는 사람과 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아마 제가 안기고 다리를 벌릴 포지션으로는 더더욱! 아니, 아예 그건 머릿속으로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다.
가이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때, 조심스레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훈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다 욕조 안에서 넘어질 뻔했다.
“예, 예엡!”
“혹시 무슨 일 있나 해서 노크한 겁니다. 괜찮아요. 천천히 씻으세요.”
“……예에…….”
너무 안 나오니 기절이라도 했나 싶었을까. 최태훈은 얼굴로 홧홧하게 열이 오르는 것 같아 찬물을 틀었다. ‘게다가 천천히 씻으세요.’라니. 똑같이 욕실로 들어갔었으니 그가 씻는 시간을 제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삼십 분 넘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진짜 이게 무슨 추태냐. 최태훈.
태훈은 찬물로 세수했다. 그러고는 기세 좋게 나가자! 하고 생각했다가, 다시 문손잡이를 잡고 손가락 주름 다 펴질 때까지만 있을래, 하며 다시 움츠러들었다.
사실 확신도 잘 안 섰다.
슬슬 한계여서 왔다는 저 에스퍼는, 전혀 한계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저보다 몇만 배는 여유롭기 짝이 없다. 정말로 굳이 저와 살을 섞어야 안정되는 상황인가 의심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건 최태훈의 착각이자 지관영이 최대한으로 베푼 인내심의 결과였다. 한계라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지금 관영은 문을 부수는 것까지 생각하고 태훈의 집에 있는 의자를 허공에 붕 뜨게 했다가 겨우 다시 내려둔 참이다.
센터 교육이면 몰라도 멘탈 케어 상담은 받아야지 하고 보내뒀더니, 누가 봐도 돌아올 시간을 훌쩍 넘기는 가이드를 기다리며 울컥 짜증이 치밀었던 그였다.
혼자 참을 인을 새기며 기다리기 몇 시간.
현관문을 열고 들어옴과 동시에 슬금슬금 눈치를 보기 시작한 제 가이드를 봤을 때의 기분은 다시 생각해도 황당하다. 최태훈이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차곡차곡 쌓였던 분노가 우스울 정도로 잠잠해지고, 저도 모르게 그저 잘 달래야지 싶어지고 만 거다. 에스퍼는 여태껏 무시하고 살았던 가이드라는 존재가 주는 위력을 그제야 다시 깨달았다.
사실 욕실에서 시위하듯 나오지 않고 있는 가이드가 대체 그 작은 공간에서 뭘 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일부러 꾹 누르고 있는 제 시야를 열기만 하면 되는 된다.
하지만 관영은 그게 영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답지 않게 무작정 최태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이제 정말로 한계에 부딪쳤다. 당장 문을 뜯고 들어가 저 사내를 안고 뒹굴고 싶다는 욕구가 서서히 이성을 짓누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최태훈은, 지관영의 이성이 정욕의 위에 설 수 있을 때 슬그머니 욕실 문을 열고 나왔다.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머뭇거림이 가득한 발걸음으로 침대 가로 걸어오는 모습에 긴장이 역력했다.
최태훈은 관영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묵례했다.
“죄송합니다. ……늦어서.”
떨림이 가득한 표정에 에스퍼는 작게 혀를 찼다.
태훈의 젖은 머리카락이며 채 제대로 닦지 못한 목덜미며 얼굴의 물기가 눈에 밟혔다. 어찌나 더운물에 오래 있었는지 살짝 발갛게 상기된 피부도 따가울 정도로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건 어찌 보면 기다린 보람이 충분한 모습이었다. 에스퍼는 제 가이드에게 남아 있는 ‘물’을 분리해냈다. 덕분에 태훈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보송보송해진 제 머리카락을 만지다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물을 뒤늦게 발견했다.
“와. 이런 것도 할 수 있습니까?”
순간적으로 긴장이 풀린 최태훈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늘 제 가이드의 긴장하고, 인상 쓰고, 한숨 쉬는 얼굴만 보던 에스퍼는 별생각 없이 한 행동에 드러난 천진한 얼굴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뭐. 그냥.”
지관영은 능숙하게 단어를 조합하던 여유로운 반응 대신 어설픈 호응을 택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물을 조심스레 가지고 놀던 가이드는, 그것을 공을 뭉치듯 모아서 협탁 위에 있던 작은 화분 위에 슬쩍 올려놓았다.
“사실 물리계 에스퍼라길래 살벌한 것만 상상했는데……. 뜻밖입니다.”
“물은 제일 처음 다뤘던 거라 꽤 쉽습니다.”
큰 반응을 바라지 않았던 행동에 잔뜩 굳었던 태훈의 긴장이 많이 풀렸다. 아니, 오히려 처음으로 눈을 먼저 마주치고 웃으며 말을 건넨다.
괴물은 그 모습에 왠지 입이 말라서 입술을 혀로 적셨다. 그건 같은 디자인의 가운을 나란히 걸치고 있는 침실에서 이루어지기에는 꽤나 귀여운 대화이기도 했다. 한편 그렇게 초조해진 에스퍼와는 달리, 최태훈은 제 앞에 있는 남자가 조금은 편해졌다.
하지만 침대 가로 가까이 다가가려니 지관영 그 개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인 행위에 대한 거부감과 공포가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훈은 작게 후, 하고 숨을 내쉬고 사뭇 씩씩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관영의 옆에 앉았다. 커다란 킹사이즈의 침대는 사내 둘이 조금은 떨어져 앉기에도 충분했다.
손바닥을 비비고 심호흡을 하는 모습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지관영은 그런 최태훈을 조용히 눈에 담았다. 살랑이는 바디워시의 향이 저와 같았다. 아직 열이 가라앉지 않아 붉은 기가 도는 피부가 달콤하게 보였다. 저 피부에 닿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상상조차 되지 않을 만큼.
가이드는 한참을 그러고 있더니 용기를 낸 듯 에스퍼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그런 행동과는 달리, 말이 얼른 나오지 않는지 문장 대신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 꽉 쥔 주먹이 희미하게 떨렸다.
지관영은 그제야 가이드에 미쳐 사는 에스퍼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잔뜩 떨면서도 저에게 안길 준비를 하는 가이드는, 분명 꽤…… 사랑스럽다. 그것이 장신의 사내라고 한들 말이다.
“후우, 후. 저기, 말입니다.”
“……네.”
지관영은 살짝은 쉰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대답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마른세수한 가이드는 다시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동성……과의 관계는, 처음입니다.”
그건 뒤집어 보면 이성과의 관계는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관영은 그 정도는 기꺼이 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 이성이 에스퍼였다면 말이 달라졌겠지만, 최태훈은 그 어떤 에스퍼와도 몸을 섞은 적 없다.
……제가 아닌 다른 에스퍼에게 저 온기를 나눠준 적 없다.
지관영은 왠지 아랫배가 묵직하게 당겨오는 것 같은 기분에 입맛을 다셨다. 최태훈은 천장을 봤다가, 다시 바닥을 봤다가, 또다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두근. 두근. 두근. 태훈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관영은 그 소리를 마음껏 즐겼다.
“처음인 데다가. 그, 받아들이는 건…… 더더욱 해 본 적 없습니다.”
“네.”
지관영은 살짝 눈을 휘어 웃었다.
그 상냥한 웃음에 태훈은 주먹을 몇 번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손이 떨리지 않는 건 아니었다.
“저, 그러니까. 조금은…… 무섭습니다. 솔직히.”
“…….”
“……그래서, 그러니까……. 저, 혹시. 가능하시다면.”
두려움을 순순히 인정하는 솔직함이 귀엽고, 또 사랑스럽다. 에스퍼는 가이드가 고개를 푹 숙이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 것을 모두 빠짐없이 새겨들었다.
“……그. 좀, 천천히. 안…… 아프게.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스퍼는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것에 태훈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린 듯이 근사한 사내의 얼굴이 누가 봐도 유혹적인 미소를 걸고 있다. 태훈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관영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최태훈, 당신은 약하니까.”
처음이었다. 늘 태훈 씨, 라고 저를 지칭하던 사내의 입에서 오만하고 고압적이지만 상냥하며 달콤한 어조의 말이 나온 것은. 태훈은 저와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사내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에스퍼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옅은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얼마든지 들어드려야지.”
* * *
최태훈은 살며 단 한 번도 ‘약하다’라는 표현으로 지칭된 적 없다. 180의 큰 키에 평균 신체 조건을 상회하는 그에게, 약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태훈은 제 앞의 사내가 저를 향해 사용하는 단어에 대해 그 어떤 이의도 내걸 수 없었다. 사뭇 부드럽게 겹쳐진 입술에 태훈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관영은 태훈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얼굴을 잡고 좀 더 깊게 키스했다.
가이드는 스킨십이 깊어질수록 몸이 경직되는 것을 감추지 못하며 파들대고 떨었다. 지관영은 그것을 모르는 척 느긋하게 혀를 섞으며 최태훈을 침대에 눕혔다.
정말 연인이라도 된 것 같은 입맞춤이었다. 관영은 혹시라도 태훈이 입을 꾹 다물 때면 살짝 통통한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면서 틈을 내게 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혀끝으로 서로를 간질이면서 몇 번이고 상대의 숨을 삼켰다.
그때, 보드라운 천이 가이드의 팔을 스쳤다.
서서히 매달리듯 입맞춤에 빠져들던 태훈은, 뭔가 싶어 슬쩍 눈을 떴다가 깜짝 놀라 몸을 떼어냈다. 빈틈없는 근육으로 꽉꽉 들이찬 단단한 몸과 어깨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운을 벗은 에스퍼의 몸은, 새삼스레 이제 곧 있을 행위를 알리는 신호 같았다. 애꿎은 시트를 움켜쥔 손등의 뼈가 하얗게 올라왔다. 태훈은 희미하게 떨리는 제 몸을 멈출 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은 심정이 됐다.
차라리 딱 눈 감고 이 시간을 즐길 수 있다면 좋겠지만, 가이드는 사내에게 안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됐건 제가 직접 택한 가이드 생활이었다.
사상 최고치의 매칭률을 찍은 이상 눈앞의 남자와 몸을 섞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몇 번이나 그 결심을 다졌다. 하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겁이 날 줄은 몰랐다. 최태훈은 이렇게 벌벌 떠는 스스로가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에스퍼는 제 아래에 깔린 가이드의 가운을 벗기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가운이 서서히 풀리며 살갗을 건드리는 감촉에, 태훈은 팔을 올려 제 눈을 가려버렸다. 그 어떤 특수한 힘도 없지만,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시선이 활짝 열린 가운 안의 나신에 꽂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선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태훈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배 근육의 움푹 들어가며 흉곽의 모양새가 두드러졌다. 지관영은 그것을 모두 제 눈에 담으며 진심으로 욕정했다. 관영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흥분하지 않은 적당한 크기의 성기와 잘 뻗은 다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떨고 있었다.
지관영은 최태훈의 허벅지를 가볍게 쓸더니, 그것을 붙잡아 천천히 벌리게 했다. 에스퍼의 손이 닿자마자 바들거리며 허리를 뒤틀던 태훈은 사내를 반기듯 열리는 제 다리에 순식간에 목이 벌겋게 변했다. 가이드의 숨소리가 살짝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건, 얼마 안 가 느껴진 감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흐으……읏!”
에스퍼는 벌어진 다리 사이로 제 몸을 끼우며 서로의 사타구니가 스치도록 만들었다. 그 덕분에 최태훈은 가렸던 손으로 황급히 제 입을 막았지만, 작게 터져 나온 신음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지관영은 그런 최태훈을 무엇 하나 빼놓지 않고 눈에 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태훈과 몸이 닿으면 닿을수록 입이 바짝 마르면서 답지 않은 흥분이 머리끝까지 날뛰는데, 늘 불협화음을 내며 아귀가 맞지 않은 채로 돌아갔던 제 안의 톱니바퀴는 비로소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 뒤틀린 채 움직이는 바람에 닳고 깨진 제 안의 무언가가 고쳐지고 있다는 감각에 소름마저 돋았다.
에스퍼의 입술이 가이드의 귓가부터 시작해서 턱선을 따라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목으로 향했다. 톡 튀어나온 울대뼈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어깨가 잘게 튀었다. 지관영은 사내에게 안기는 게 무서우니 부디 천천히, 아프지 않게 안아달라 부탁한 제 가이드의 말을 오늘만큼은 충실히 따라 줄 생각이었다. 최태훈이 저를 보며 겁을 먹는 건 왠지…… 싫을 것 같았다.
사내를 모르는 몸이다.
단 한 번도 안기지 않았고, 안길 준비조차 하지 않았던.
관영은 여성의 것처럼 말랑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단단하면서 또 부드러운 가슴께로 입술을 떨어트렸다. 아직은 말랑한 유두를 혀로 톡, 건드리자마자 태훈의 허리가 바짝 튀었다. 태훈은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소리를 입 안으로 삼켰지만 에스퍼의 청력은 그 뭉개진 소리를 듣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관영은 눈앞의 작은 유두를 이를 세워 살살 깨물기도 하고, 가이드의 귓가가 붉게 물들만큼 노골적인 소리를 내며 빨아들이기도 하면서 그가 닿을 때마다 움푹 힘이 들어가 패는 복근을 더듬었다. 최태훈은 제 몸을 마음껏 희롱하듯 만지는 손에 머리끝까지 부끄러움이 밀려들어 당장에라도 도저히 못 하겠다고 약한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 눌렀다. 제가 저를 안는 사내보다 육체적으로 한없이 약하다고 하더라도, 정말로 약한 소리를 하며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지관영은 그런 최태훈의 반응을 기꺼이 즐겼다.
제가 에스퍼로 발현하고 이름이 떠올랐던 스물한 살 때보다 훨씬 전부터 눈앞의 이 사내는 가이드로 피어난 채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제 이름을 품고 살아왔다는 것이 새삼스레 와 닿았다. 저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사내다. 대학을 졸업하고 막 신입사원이 되자마자 사표를 쓰고 같은 사내에게 안기는 게 일이 되었다니, 어찌 보면 조금은 미안한 일이었다.
관영은 입을 틀어막고 눈을 꽉 감고 있는 태훈을 보며 옅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자 덜덜 떨면서도 에스퍼를 밀어내지 않고 있던 가이드의 눈이 살포시 떠졌다. 눈 안에는 약간의 원망이 어려 있다.
“왜…… 웃습니까.”
“미안해서요. 당신한테.”
입을 손으로 가린 채로 작은 목소리로 물어서 잘 들리지 않았을 질문이었는데도, 지관영은 용케도 알아듣고 상냥하게 대답했다. 최태훈은 그것에 조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을 했다.
의문스러운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대답 대신 태훈의 허리선을 따라 움직이는 손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태훈은 차츰 아래로 내려가는 손가락에 바짝 긴장하면서도 기어코 답을 들어야겠다는 듯 떨림을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평범한 사내이면서도 제법 고집이 있다.
지관영은 최태훈의 무릎을 세워 벌리면서 다시 한 번 작게 웃었다. 태훈은 노골적으로 벌려지는 제 다리에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 말았다. 아직 긴장으로 제대로 흥분하지도 못한 태훈의 것을 짐짓 느긋한 태도로 쥔 에스퍼는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원하지 않는 사람을 겁간하는 기분이라서……라고 해야 할까요.”
“……아, 흐으, 자, 잠시만, 요, 지관영 씨!”
“그렇다고 해서 멈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에는 내 멋대로- 할 건데.”
최태훈은 제가 기다렸던 대답에도 뭐라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살며 처음으로 제 성기가 타인의 손에 움직이며 자극받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갔을 뿐이다. 팽팽하게 이어졌던 긴장감이 감각을 더욱 예민하게 만든 상태에서 귀두 끝을 간질이듯 문지르는 것을 이겨 낼 방도가 있을 리 없었다.
가이드는 입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저도 모르게 관영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최태훈은 지관영에게 ‘너무나 약했다’.
“……미안할 수밖에요.”
자극이 주어질 때마다 어떻게 가만히 있지 못하는 허벅지가 에스퍼의 몸을 조여들었다. 발가락 끝이 오므라들고 몸 곳곳에 붉은 열이 피어 올라왔다. 관영은 태훈의 맥이 갈수록 더 빠르게 뛰면서 체온이 올라가는 것을 빠짐없이 확인하며 제 가이드의 사정을 유도했다.
하지만 역시나, 최태훈 이 사내는 이상한 데에서 고집을 부렸다. 태훈은 같은 사내의 손에 의해 단단해져서 꺼덕거리는 제 성기를 보며 절대로 제 것을 쏟아내지 않으려 버텼다.
그러나 최태훈의 고집보다 지관영의 집요함이 더 위에 있었다. 관영은 그런 자신의 페어를 보며 살짝 인상 쓰듯 웃더니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제 고개를 태훈의 사타구니에 처박았다.
갑작스레 따뜻하고 습한 점막에 성기가 감싸지고, 부드러운 입술로 쭉 빨아들이는 감각에 최태훈은 거의 우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정액을 토해냈다.
지관영은 제 입에 사정한 최태훈의 정액을 뱉어내며 작게 ‘진하네요.’ 하고 중얼거렸다. 사내의 성기를 빨며 구음하는 것은 지관영 그로서도 처음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퍽 나쁘지 않았다. 꾹꾹 눌러 참던 태훈의 소리가 천박하리만치 높아지던 순간은, 오히려 하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하지만 에스퍼의 그런 만족과는 반대로, 가이드는 밀려오는 수치심에 숨을 쉬는 것마저 잊었다. 뺨과 목덜미, 관영이 한참을 물고 빨았던 가슴께는 물론이고 허벅지까지 온몸이 발갛게 익은 태훈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버렸다. 정말로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관영은 끈적한 태훈의 정액으로 지저분해진 제 손 위에 젤을 잔뜩 짜내었다. 그건 최태훈이 가이드 관사로 들어오면서 가장 끔찍하게 여긴 물건 중 하나였다.
침대 옆 테이블 구석에 처박아 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낸 에스퍼는, 거침없이 제 손을 움직였다. 태훈은 예고도 없이 제 다리 사이를 지나 깊은 곳으로 쑥 들어오는 불청객에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지관영 씨!”
“네에.”
태평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놀라 몸을 반쯤 일으킨 태훈은 허둥지둥 관영의 어깨를 잡았다. 지관영은 가이드의 뒤에 채 닿지 못한 제 손을 빼내는 척하면서 최태훈의 허벅지 사이에 젤을 잔뜩 묻혔다.
그 질척한 느낌에 태훈은 질색하며 관영을 원망하려다가, 문득 흉흉하게 서 있는 에스퍼의 것에 시선이 닿았다. 불만이며 투정이 쏙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저걸 나한테 넣겠다고? 진짜로? 정말로?
태훈은 저도 모르게 관영의 것을 몇 초간 빤히 보다가 제 행동에 화들짝 놀랐다. 지관영은 혀로 입술을 슬쩍 적시며 입꼬리를 올렸다. 지극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태훈은 이제 부끄러움을 넘어서 딱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지관영 씨.”
“말씀하세요.”
“……그, 사람 몸이라는 게, 막…… 안 될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태훈은 입을 다물었다.
‘당신 것이 나한테 들어올 수 있을 리 없을 것 같다고!’라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무서워졌다. 이건 천천히 안 아프게 하고 말고의 범위가 아닌 것 같았다.
지관영의 것은 정말로 크고, 두껍고, 길었다. 힘줄이 돋기까지 한 저와 같은 사내의 성기를 눈앞에서 보니 정말 식은땀까지 다 나는 것 같아, 조금 전까지 밀려왔던 흥분감이 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관영은 태훈의 어깨에 겨우 걸쳐져 있는 가운을 느긋하게 벗겨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뒤집어엎은 뒤 제 것을 박고 맘대로 흔들고 싶지만, 눈에 띄게 긴장한 가이드에게 오늘만큼은 배려를 베풀기로 마음먹은 그다.
“엎드리세요.”
“…….”
“그쪽이 편할 겁니다.”
최태훈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관영의 말을 따랐다. 분명 거부감이 드는 자세였지만 겁에 질린 채 굳은 얼굴을 보여주는 것보다야, 해야 할 일을 좀 더 편히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에스퍼는 놀려먹을 생각으로 권유했던 것에 파들파들 떨면서도 기어코 따르는 가이드를 보며 즐겁다는 듯 눈을 휘었다. 하지만 지관영의 그런 우위는 얼마 가지 못했다.
……아.
에스퍼는 눈을 크게 떴다.
긴장으로 꿈틀거리는 어깨 근육과 평소의 곧은 자세를 알려주려는 듯 매끈하게 쭉 뻗은 늘씬한 등허리를 가득 채운 문양은, 그 자신의 등에 있는 것과 같은 필체를 하고 있었다.
에스퍼의 눈은 그 복잡하게 얽힌 이름을 어렵지 않게 분해했다.
‘지관영’. 제 이름이었다.
관영의 손이 조심스럽게 등의 이름을 따라 움직였다. 태훈은 사내의 손이 무엇을 만지고 있는지 깨달은 후에는 눈까지 꽉 감아 버렸다. 시야가 차단되자 모든 감각이 제 등을 간질이는 손끝에만 집중되었다.
사실 여태껏 지관영은 네임에 회의적인 사람 중 하나였다.
누군지도 모를 자의 이름이 몸 어딘가에 떠오른다는 현상 자체를 비뚜름하게 봤었다. 그래서 제가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도 어이없다는 듯 혀를 한 번 차고 최태훈이라는 이름을 어렵잖게 머릿속에서 소거했었다. 이름의 연결 같은 건 그의 삶에 조금의 영향도 줄 수 없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지관영은 그 자신의 오만을 조금은 후회하고 있다. 아니, 사실은 꽤 많이. 그건 그에게 몹시도 드문 일이었다.
다섯 살 때 처음 가이드로 발현했다고 했지.
지관영은 제가 만약 에스퍼로 눈 떴던 스물한 살에 최태훈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이미 지나간 상상을 했다.
열다섯 살의 최태훈.
이미 까마득한 이전부터 가이드가 되어 저만을 위해 존재했던 최태훈. 그때 만났더라면, 분명 네임의 발현도 앞당겨졌을 것이다. 에스퍼는 등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움직이는 자신의 이름을 새긴 채 저를 받아들이려 떨고 있는 사내의 뒤로 제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자세가 자세인지라 부끄러울 만큼 적나라하게 드러난 구멍 위를 관영의 손이 덧그릴 때마다, 질척한 젤이 침대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최태훈은 이제껏 그 누구의 손도 닿은 적 없는 은밀한 부위를 만지는 것에 반사적으로 구멍을 바짝 조였다가, 그것이 저를 꿰뚫을 사내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자각하고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몸을 지탱하고 있는 팔이 벌벌 떨렸지만 이렇게 버티고 있는 건 그가 가진 사내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지관영은 젤을 더 가득 짜내어 최태훈의 뒤를 푹 적셨다. 태훈은 제 뒤가 마치 애액을 흘리듯 축축해지는 감각에 몸서리치며 작게 볼멘소리를 냈다.
“꼭, 그렇게 많이 할 필요가……!”
“마르면 아프니까요. 충분히 젖어야죠.”
맙소사. 최태훈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제 뒤로 들어오는 손가락에 급히 숨을 삼켰다. 한 번 사정해서 적당히 열감이 돌고 충분히 젖은 뒤는 관영의 손가락 하나를 어렵지 않게 물어 들었다. 태훈은 그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손가락 하나가 피스톤 질 하듯 움직이다가, 이윽고 두 개가 되었다. 지관영은 본격적으로 최태훈의 뒤를 넓히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찌르듯 들어왔다가 뜨거운 내벽을 더듬으며 빠져나갈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구멍이 벌어졌다.
가이드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이번에는 손으로 입을 막을 수도 없었다.
“……흐, 읏…….”
에스퍼는 참을성 있게 꽉 조여든 뒤를 풀다가, 제 손가락이 몇 마디 들어간 어느 부분을 꾹 눌렀을 때 태훈이 절로 허리를 흔드는 지점을 발견했다. 태훈은 그곳을 누를 때마다 신음조차 토해내지 못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만 냈다.
지관영은 손가락을 빼내고 제가 방금 느낀 감각이 무엇인지 감조차 못 잡은 채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한 시야에 벌벌 떨며 늘어진 사내의 뒤로 제 성기를 꾹, 밀어 넣었다. 예고 없이 삽입되기 시작한 단단하고 뜨거운 살덩이에 놀란 최태훈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꽉 물어 들었다.
“후……. 최태훈. 힘 빼.”
늘 듣던 존대가 아닌 명령조로 말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약간은 쉰 듯이 들렸다. 최태훈은 제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사내의 명령에 따르면서도 손가락과는 차원이 다른 부피감에 숨을 헐떡였다. 몸을 버티듯 지탱하고 있는 팔이 이제는 눈에 띄게 벌벌 떨렸다.
지관영은 힘을 빼려 노력하는 태훈을 칭찬하듯 땀이 송골송골 맺힌 등허리를 쭉 쓰다듬더니, 순식간에 제 성기를 깊게 쳐 넣었다. 젤로 충분히 젖다 못해 끈적해진 태훈의 안은 관영의 것을 뿌리 끝까지 오물오물 받아먹었다.
에스퍼는 본격적으로 거세게 허릿짓을 하기 시작했다. 퍽, 퍽, 젤에 젖은 몸이 부딪히며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흐, 아, 아앗, 지, 관영, 씨, 천천, 히이……!”
태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제 안으로 밀려드는 성기가 깊숙한 곳까지 쭉 처박혀 들어와서 어떤 부분을 내리칠 때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고, 그것이 빠져나갈 때 제 내벽이 딸려가는 감각이 주는 이상한 감각에 절로 흔들리는 허리도 자신의 제어에서 벗어난 것만 같았다. 최태훈 그가 할 수 있는 건 저를 마음껏 범하는 사내에게 그가 그렇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애원뿐이었다.
부디, 제발, 천천히 해 달라는.
지관영은 거칠어진 숨을 삼키며 제 이름이 새겨진 등에 입 맞추며 성기를 깊게 찔러 넣었다. 태훈의 입에서 하악, 하고 날카롭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빈틈없이 몸을 붙이고 삽입한 채 일부러 한 곳을 느릿하게 짓누르며 귓가를 깨물자 겨우겨우 버티던 가이드의 몸이 무너졌다.
하지만 에스퍼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끈질기게 몸을 붙인 채 콱콱 몰아붙이듯 허릿짓을 이어갔다.
“히, 히익, 흐, 아아, 아-.”
“아픈가요?”
“……제발, 제발, 아, 흐으, 앗……!”
태훈은 이제 누구에게 무엇을 부탁하는지도 불분명한 흐느낌을 쏟아내며 제 안으로 삽입된 것에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약했고, 괴물은 목말라 있었다.
지관영은 한계를 넘어선 자극으로 뚝뚝 눈물을 흘리는 태훈의 눈가를 할짝거렸다. 시간은 많았다.
* * *
나 살아있는 게 맞긴 하나.
최태훈은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으로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팔은커녕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눈 뜨자마자 동성의 사내와 발가벗고 맨살을 부딪치고 있는 상황에도 놀랄 기운조차 없었다.
완전히 방전됐다는 게 이런 거구나, 태훈은 꼼짝도 못 한 채 생각했다.
“……일어났어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훈은 고개를 살짝 돌리는 것에 겨우 성공했다. 평소보다 한껏 나른해진 듯한 지관영은, 눈을 휘어 웃더니 태훈의 머리카락에 작게 입술을 떨어트렸다. 최태훈은 뭐라 대답하려고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아서 그렇게 몇 번을 대답에 실패한 뒤 거의 그르릉거리는 동물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예에.”
“목소리 엄청나네요.”
최태훈은 지관영의 말에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누구 때문인데!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기는 했다. 이렇게까지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을 정도로 늘어지게 될 줄은 몰랐다. 간밤의 에스퍼는 집요하기는 했지만 거칠지는 않았다. ……그래, 부탁했던 대로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 최태훈은 어젯밤 천천히 한다고 해서 편한 것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오히려 느리게 움직이며 어떤 지점을 정확하게 누르면 정말로 정신이 나가게 된다는 것을 배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건강 체질이었던 제가, 동성과 섹스 한 번에 이렇게 움직이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될 줄은 몰랐다. 최태훈은 제 의아함을 관영에게 겨우겨우 전달했고, 지관영은 그것에 고개를 작게 갸웃하더니 망설임 없이 센터에 연락했다. 물론 감히 떠올리려야 떠올릴 수 없었던 최악의 방식이었다.
‘최태훈 씨랑 섹스했는데, 태훈 씨가 몸에 이상할 정도로 힘이 전혀 안 들어간다고 하네요. 이거 섹스 후유증입니까?’
……씨발.
최태훈은 진심으로 힘이 돌아오자마자 지관영에게 한 방 먹이고 싶다고 바라게 됐다. 하지만 그런 속내와는 다르게, 가이드는 그날 하루를 꼬박 앓듯이 누워서 에스퍼가 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화장실마저 안긴 채 모셨다가 다시 침대로 이동하는 낯부끄러운 도움을 받으며 늘어져 있어야 했다. 이튿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관영에게 팔짱을 끼듯 기대서 겨우겨우 센터로 갈 수 있는 상태가 될 정도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가이드는 센터에 들어선 후로도 목을 옅게 물들인 채 익숙한 사람들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연구원들의 표정은 꽤 심각한 듯 보였다. 태훈은 찔끔 긴장해서 마른침을 삼켰다. 오연은 그런 최태훈을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리바운드입니다.”
“……예?”
“높은 매칭률과는 따로 노는 정신적 거부 반응에 대한 일종의 반동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랬다.
어쨌든 잔뜩 곤두선 저 에스퍼가 금방이라도 사고를 칠 것 같기에 가이드인 태훈을 붙여두기는 했지만, 사실 이렇게 몸부터 섞게 하는 경우는 없었다. 차근차근 정신적 교감이 쌓인 다음에야 육체적인 접촉이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리바운드로 시달리게 될 것을 걱정해서였다. 최태훈은 그 현실감 없는 표현에 ‘역시 먼저 떡부터 치면 안 되는구나.’ 하는 그다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연구원들은, 사실 한편으로는 서로 시선을 흘끗 나누며 자신들이 떠올렸던 유쾌한 가정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을 조금쯤은 재밌어하고 있었다.
물론 가장 즐거워진 것은 이미현이었다.
“……그런데, 지관영 씨는 멀쩡하신 것 같군요.”
말없이 태훈의 옆에 앉아있던 관영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무슨 의미냐는 거다. 태훈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약간은 웃음이 나는 그녀였다. 이미현은 생긋 눈을 접으며 말을 이었다.
“태훈 씨는 꼼짝도 못 할 정도로 거부 반응에 시달렸는데, 관영 씨는 전혀 리바운드가 없네요? 세상에 이런 경우도 다 있고. 어머. 신, 기, 해, 라.”
몸을 섞은 후 가이드 최태훈은 끔찍한 리바운드에 시달렸다. 하지만 에스퍼 지관영은 그 어떤 리바운드도 겪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 분명했다.
‘에스퍼는 가이드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가이드는-.’
최태훈은 뒤늦게 그 문장을 이해하고 크게 뜬 눈을 끔벅였다. 물론 에스퍼의 입에서도 작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면 약간은 불쾌해진 관영이다. 제 옆에서 말간 표정을 한 가이드의 목을 조르고 싶다는 생각도 한 0.01초 정도는 한 것 같다.
……그렇게 싫었다고, 나랑 자는 게?
손가락 하나 꼼짝 못 할 후유증에 시달릴 정도로?
관영은 태훈과는 달리 ‘너무나’ 멀쩡했던 제 상태를 떠올리고 더욱 기분이 나빠졌다. 살짝 고개를 삐딱하게 튼 관영은 그렇게 묵묵히 있다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 때는 한껏 울며 매달려놓고, 거부 반응이라.”
푸우웁.
물을 들이켜던 태훈이 저도 모르게 그것을 뿜을 뻔했다. 지금 최태훈은 제 옆에 있는 에스퍼가 무슨 말을 지껄인 건지 얼른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라고? 뭐라고, 지금?
“몸이랑 머리가 따로 논다. 이건가?”
“……뭐, 어……!”
“그것도 나름대로 귀엽기는 한데…… 기분은 별로군요.”
연구원들은 머리를 짚었다.
역시, 역시 저 에스퍼는 성격이 나쁘다. 의심할 여지 없이!
세상에 리바운드에 시달리고 있는 제 가이드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에스퍼가 세상천지에 어디에 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지관영은 느긋한 미소를 건 채 턱을 괴고 얼빠진 얼굴의 태훈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최태훈 당신 입에서 먼저 섹스하자는 말이 나오게 만들어야겠습니다.”
가이드의 얼굴이 뒤늦게 새빨갛게 익었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사내에게 안겼다는 사실을 센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도 민망하고 부끄러워 죽겠는데…… 뭐, 울며 매달려? 몸이랑 머리가 따로 놀아?
최태훈은 지난밤 저를 안았던 사내에게서 휙 떨어지며 바득바득 소리를 질렀다. 살짝 갈라져 있는 자신의 목소리에 발갛게 익으면서도 도저히 소리를 안 지르고는 버틸 수 없었다.
“전 말입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게이는 안 될 겁니다!”
“얼마든지 그러세요.”
“우린 필요 때문에 하는 겁니다! 지관영 씨 당신이 에스퍼고! 제가 가이드니까!”
“네에.”
지관영은 근사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최태훈은 빨갛게 익은 채로 이를 악물고 뻔뻔한 웃음을 짓고 있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등이 화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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