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외전3화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괜히 떨려서 가슴을 부여잡는다는 게……오해를 사버린 것 같아요.”
그는 진정시켜줄 생각인지 하린의 등을 쓸어주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덕분에 하린의 민망함은 더욱 증폭되었고.
“어떤 마음의 준비.”
“그냥…… 키워준 좋은 분들이기도 하고. 지금 저의 모습을 되게 좋아해 주실지, 너무 모자라게 하고 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고.”
하린이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그는 장난스럽게 웃던 미소를 지우고는 다정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걱정 하지 마.”
“그래도요.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다고요.”
“그래, 그래.”
그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제 아무리 떨리고 무섭고, 혹은 두려움이 가득하더라도 그와 함께한다고 하면 어디 있었는지도 몰랐던 힘을 느끼곤 한다.
원래 나는 이 정도로 강인한 사람인가?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그의 손길이 하린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따듯함을 느끼라는 듯이 검지만을 까닥까닥 움직이며 심장박동수를 맞춰주었다.
문뜩 두꺼운 핏줄이 굵게 솟아오른 것이, 어쩜 핏줄까지 잘생겼을까 생각이 들었다.
짐을 챙기고 공항에 나왔다.
온통 외국, 이국적인 풍경과 향에 도취해 시선을 빼앗겼다. 결국은 그의 손에 붙잡혀 입국 심사를 받았다.
밖으로 나오니 양부모가 사람을 보냈는지 건실한 남성이 서 있었다.
태형은 나오자마자 그를 발견했는지, 작게 손을 올리고 아이컨택했다. 그러자 남자 쪽에게서도 태형과 하린을 발견했는지 눈짓을 하며 이쪽으로 오라는 가리켰다.
“누구예요?”
“아버지 비서. 내가 형처럼 따랐었어.”
“아하.”
가까이 다가가니 확실히 건장한 체격과 키, 태형도 키가 큰 편에 속하는데 이 외국인은 더 컸다.
하린은 어정쩡하게 뭐라고 인사를 보내야 하나 싶어 태형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그는 대답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입꼬리만 올리고 있었다.
형처럼 따랐다면서 뭐 이리 분위기가 싸해.
영어로 인사를 먼저 보내볼까 하고 하린이 입술을 달싹이며 ‘hello…….’라고 말하려는데. 남성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안녕?”
“아? 한국어를 할 줄……아시는구나.”
놀란 하린이 눈앞에 있는 남성과 태형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래도 나 또 놀림당한 것 같은데.
심지어는 꽤나 능숙한 한국어에 놀라기도 했다.
이 금발의 남성에게 익숙한 한국어가 나오는가, 심지어는 발음도 꽤나 정확했기에 더욱 넋을 놓으며 태형을 바라봤다.
곁눈질로 태형을 보며, 그의 팔을 잡아 흔드니 그제야 이야기해줬다.
“내가 한국인이잖아. 부모님이 어릴 때 알려주신다고 많이 하셨고 그 덕에 타일러도 꽤 한국어를 해.”
“미리 말 좀 해주지.”
태형과 하린이 투덕거리고 있으니 타일러는 시계를 보며 시간을 살피고는 나지막한 음성을 내뱉었다.
“가면서 대화해.”
***
차로는 한 시간 반 정도 갔을까, 스위스의 멋진 자연풍경이 아주 멋있게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는 새로운 이국적인 풍경에 하린은 시선을 빼앗겨있었고. 타일러와 태형은 오랜만에 만나는지 종종 대화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둘이 영어로 대화하는 건 꽤 듣기 좋았다.
넓고 커다란 푸른 환경과 산. 호수처럼 깊은 물이 보이고 작은 집들이 앙증맞으면서도 귀여워 보이는 곳.
마치 동화 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처럼 차에서 내려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자,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고민과 상념 모든 것이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진짜 이쁘다.”
그의 양부모가 왜 사업을 정리하고 이곳에 터전을 마련했는지 절로 이해가 되었다.
벌 돈 다 벌고 노후에는 마음 편하게 아름다운 것만 보고 싶지 않았을까.
나중에, 조금 더 먼 미래가 된다면 나도 그와 함께 자식들과 이런 곳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주 먼 미래가 되겠지만.
주변을 바라보며 감탄을 멈추지 못하는 하린을 보며 태형이 장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웃음을 보였다.
“들어가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 어쩜 좋아.”
집 안으로 들어오니 한 백인 여성이, 자연스럽게 영어를 구사하다가 하린을 보며 자연스러운 한국말로 그녀를 반겼다.
아마도 태형과 하린이 오고 있다는 것을 미리 타일러를 통해 알고 있었는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음식 향이 풍겼다.
각종 고기 굽는 냄새, 오일 냄새. 스위스 가정의 풍경과 정겨움이 느껴지는 맛있는 냄새까지. 절로 웃음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하린양 맞죠?”
“네 맞아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자연스럽게 부엌에서 나온 여성은 하린을 보며 진심을 반겨주고 있었다. 가볍게 안으며 볼 뽀뽀를 한 그녀는 천천히 하린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녀가 보는 것처럼 하린도 그녀를 천천히 눈에 담았다.
이분을 통해, 저 사람이 저토록 잘 자랐구나.
“너무 반가워요. 어쩜 좋아. 아 앉아요. 음식도 미리 했는데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테라스 쪽을 향해 영어로 말했다. 대략 들어보니 그녀의 남편, 그러니까 태형의 양아버지를 찾는 것 같았다.
애들 왔으니 얼른 나와보라고, 그러자 테라스 쪽에서도 키 큰 거구의 사내가 나왔다.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에 다부진 체격이 묘하게 태형과 닮아 보이긴 했다.
그는 태형을 잠시 스쳐 지나보더니 다시금 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녕…… 하세요.”
눈빛에서부터 느껴지는 카리스마에 하린이 작게 인사를 하자, 그는 그녀에게 악수를 권했다.
툭 내미는 손에 잡고 악수를 하는데, 힘이 얼마나 강한지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앉아서들 이야기해요.”
핏줄로는 닮지 않았어도 살면서 닮는 것도 있지 않은가, 왜인지 모르게 양부모를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태형의 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좋은 교육과 사랑을 받긴 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금은 따사로워지는 느낌이었다.
“아참, 피곤할 텐데 내가 너무 멋대로 음식을 차렸나?”
“아니에요. 기내에서 그다지 안 먹어서 배고파요.”
사실 기내에서 음식을 다 받아먹긴 했으나…… 성의를 어찌 내다 버리겠는가. 열심히 차려주셨는데 말이다.
의견을 구하듯 태형을 살피니 그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 드디어 앉으니 잠시 숨을 고르던 그의 양아버지가 투덜거리듯 영어로 말했다.
“오라고 할 때는 그렇게 안 오더니, 역시 결혼할 여자가 있어야 오는구나.”
“아버지, 하린이도 영어 대략은 알아들어요.”
“크음, 만나서 반가워요.”
무뚝뚝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묘하게 애정이 기반된 모습들이 보였기에 하린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저도 반갑습니다. 매번 말로 들었을 때 뵙고 싶었어요.”
“어머, 진작 데리고 오지 그랬어. 이렇게 이쁜 아이가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
테이블 위로 음식을 내오던 그녀가 하린의 말을 듣고는 태형에게 핀잔을 주었다.
“더군다나 이제 갓 성인 된 것 같은…… 잠깐, 성인이 맞긴 하죠?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너……설마.”
동양인이 보기엔 하린의 얼굴이 아주 앳되어 보이긴 할거였다. 둘 다 순간적으로 그 생각은 못했다는 듯, 태형을 압박하자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성인 맞아요. 제가 아무리 그래도. 설마하니, 어머니…….”
“저 성인 맞아요. 그리고 제가 먼저 좋다고…… 한걸요.”
하린이 작게 홍조를 내비치며 말하자 두 분 모두 생각하지도 못했다는 듯이 잠시 황당해하고 있다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렇게 작은 소음은 수그러들었다.
“이건 나랑 그이가 좋아하는 와인인데 입에 맞는지 한번 봐봐요.”
양어머니는 음식을 다 내놓았는지 와인 한병을 가져와서는 잔에 따라주며 다정하게 말을 걸어주었다.
“입에 맞는 거 위주로 먹고.”
“감사합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음식 중 칠면조 통구이가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각종 채소도 같이 구워져 있었다.
구운 채소 몇 개와 고기 몇 점을 집어 그릇에 담고는 식사를 시작했다.
“입에는 잘 맞아요?”
“너무 맛있……우윽!”
“어머 체했나요? 비행 때문에 멀미가-.”
“괜찮아?”
갑작스럽게 느끼는 구역감에 하린이 입을 막자, 다들 놀라 하린의 몸을 살폈다.
괜찮다고 말하려고 막고 있던 손을 떼는데, 다시금 음식 냄새에 구역감이 밀려왔다.
아……이렇게 밝힐 생각 없었는데.
급히 화장실로 가 비행기에서 먹었던 것들을 다 비워내고는 다시금 돌아오니 조금 메슥거리던 것들이 줄어들었다.
다들 걱정하는 눈빛, 특히나 양어머니의 내가 괜한 걸 준비했나, 라는 표정에 하린은 사실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태형은 조금 눈치를 챈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는 저번의 일을 상기하는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번에.’ 라며 혼자 말하는 것 같은 입 모양에 하린은 맞는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실 임신했어요.”
“어머나!”
양부모는 놀라움이 가득하지만 이 서프라이즈가 기분이 좋아 보였고.
“내가 널 어쩌면 좋을까. 이 사고뭉치.”
태형은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하린을 왈칵 안아버렸다.
“우리 아이 생긴 건데, 안 기뻐요……?”
“당연히 기쁘지. 고마워.”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