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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71화 (71/75)

#외전5화 도둑맞은 이름

하린은 그대로 태형에게 달려갔다. 달려가 그의 목에 매달리며 까치발을 들었다.

그리고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그를 느끼고자 했다 태형은 그런 그녀를 넓은 품으로 안아 주고, 달래 주었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대며 키스했다. 하린은 아기 새처럼 그에게 매달리며 애정을 갈구했다.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고 태형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보고 싶었어.”

“최소 며칠은 더 있어야 할 것 같다면서요. 길면 몇 주 더 있고.”

“그랬지. 그런데 우리 하린이가 보고 싶어서 더 못 버티겠는걸. 어떡해.”

“뭐에요. 진짜! 미리 알려 줬으면 준비도 하고 하는 건데…….”

하린이 자신이 입고 있던 옷차림을 살피며 한탄하자 태형은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껏 많이 보아 왔던 실크 소재의 잠옷은 보기 좋았으며, 괜히 앙탈 부리는 하린의 모습은 귀여웠다.

“지금도 너무 예뻐.”

“……치. 일단 앉아서 이야기해요.”

그의 얼굴이 엄청 피곤해 보였기에 하린은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하려고 했다. 방금 미국에서 온 거라면 시차 적응도 그렇고, 오랜 비행으로 힘들 거였다.

하린이 그의 손목을 잡아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오히려 태형이 잡힌 손을 힘을 주며 하린을 당겼다. 그에 반동으로 태형 쪽으로 몸이 기운 하린의 몸을 태형이 받았다.

“뭐해요?”

“잠깐 나가자.”

“지금 되게 피곤해 보여요. 꼭 지금 해야 해요?”

“응 지금 해야 해. 이거 하려고 일찍 온 거란 말이야. 나가자.”

굳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꼭 지금 가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린은 태형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를요?”

“갈 곳이 있어.”

* * *

태형과 함께 온 곳은 멀지 않은 묘지였다.

차를 타고 20분 정도면 해서 왔기에 먼 거리는 아니었으나, 하린은 차에서 내리면서 괜히 주변을 살폈다.

묘지에 올 일이 없었고, 하린은 이런 곳에 온 것이 처음이었다. 올 일도 없었고 우기익은 이런 것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린은 태형을 보며 이곳에 왜 온 것인지 살폈다. 피곤함을 이기면서까지 급하게 올 일은 없었기에.

물론 태형 혹은 하린의 부모님의 묘지라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설마 여기…….”

하린이 뭔가 눈치를 채며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보니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인사는 드려야지.”

하린은 말없이 그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한적한 땅에 관리 잘된 묘 5개가 눈에 들어왔다.

둥글게 고른 모양의 묘 위에는 묘석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아도 태형의 친부모와 동생, 그리고 하린의 친부모였다.

하린은 그의 앞에 천천히 걸어가 발걸음을 멈췄다.

“아버지랑 어머니, 기억 안 난다고 했지?”

태형이 묻는 목소리에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전혀,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고 어린 시절의 기억하나 나지 않는다.

“그래도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하면 털어놓을 곳이 있다는 건 상당히 좋을 거야.”

태형은 조금을 멀찍이 떨어져 있는 하린의 손을 잡아 더 당겨 왔다.

“내가 찾고, 다시 안장하느라 조금 시간이 걸렸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더라고. 이제 네 성도 되찾아야지.”

“그……러니까. 여기가.”

나란히 보이는 두 개의 묘. 하린은 천천히 두 눈을 깜박였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 무슨 감정이라고 말을 해야 할지도.

태형은 그런 하린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의 눈은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트럭 사고 이후에 먼 친척이었던 분이 장례를 치러 주셨더라고. 그래도 잘 가셨을 거야.”

“다……행이네요. 저는 그런 생각까지는 못 했는데. 제가 나쁜 거죠, 제가…….”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사람이었고. 무엇을 좋아했었는지, 어떤 생활 습관을 지니고 있던 사람인지도 몰랐기에.

같이 공유하고 있는 추억도 없었기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저는 나쁜 아이인가 봐요. 부모님…….”

하린은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왜 감정이 복받치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시작되는 울림인지도, 왜 이러는 건지 모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심장 어딘가 있었는지도 몰랐던 무언가가, 울컥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부모님이라는 것.

평생을 가지고 싶고, 원했지만 평생 가질 수 없다고 포기했던 것.

자신도 있었었다. 나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나도 없던 것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를 싫어서 버린 게 아니었다.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원망했어요. 제 기억의 시작은 보육원에서 시작되어요. 부모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 흔한 사진도 없었어요.”

원망했었다. 태어나게 한 것을.

하린은 뜨겁게 나오는 무언가를 토해 내며 얼굴을 가렸다. 자신의 표정이 추할 것 같아서였다. 이런 거 태형에게 보여 주기 싫었다.

“부모라는 사람들 얼굴도 모르고 살아가는 제가 너무 괴물같이 느껴지고. 하자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평생을 원망했어요.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이럴 거면 태어나게 하지 말지, 왜 나를 버렸어. 하면서요.”

그래, 가족에 대해서 유도 피하고자 했던 이유는 이거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고. 그에게 자신의 이런 생각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눈꼬리에 맺힌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하며 그녀의 얼굴 위를 적셨다. 태형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안았다.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내가 충분히 아는걸.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것이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그의 심장 소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의 심장 소리 같았다.

“묘지를 다시 이쪽으로 안장한 것도. 너에게 보여 주는 것도 너의 죄의식이나 불안함을 고조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야. 그저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였어. 나는 네가 평생 여기를 다시는 들르지 않아도 너를 이해해.”

그의 커다란 손이 하린의 등을 쓸어내렸다.

“너의 행동을 존중해.”

힘없이 안겨 있던 하린은 그의 등을 끌어안으며 얼굴을 파묻었다. 천애 고아처럼 살아온 세월 하린은 가족애라는 것 따위 모르고 살아왔고 배우지도 못했다.

“억울해요. 하나씩 알게 되면 너무 억울한데…… 억울할 대상은 죽어 버리고, 저만 그냥 남겨졌어요. 이따금 그냥 살다가, 제 유년 시절이 불쌍하고, 우기익 밑에서 커 온 지난 세월이, 사랑받지 못한 어린 삶이 애잔해요. 불쌍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하린은 자신이 불행 속에서 태어난 사람인 줄 알았었다.

그래서 버려졌다고.

그러나 우기익의 일기장 속에서 보였던 간접적이나 자신이 알 수 없는 가족의 모습들이 행복해 보였었다.

연구를 다 하고 나면 가족들과 함께 한적한 외국이나 어딘가에서 삶을 보내길 바랐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도우며 금술이 좋았다는 어머니.

그들은 아마도, 하린을 사랑으로 낳았을 거였다.

“하나씩 천천히 해 나가면 돼. 서두를 것 없어.”

하린을 다독거리던 태형은 한참을 그녀를 안아 주다가 천천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평소와 같이 울거나 웃지는 않았다.

부모님 묘를 보여 주면 오열하거나 되게 우기익에 대한 분노를 보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하린의 모습은 예상과 사뭇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표정과 얼굴을 살피는데 태형은 평소와 다른 무언가 하나를 발견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지만,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표정도 평소보다 편안해 보이고.

성숙해진 분위기였다. 무언가를 깨닫거나 내려놓은 표정.

아마도 고민되던 것이 뭔가 해결이 된 것 같았다.

* * *

“그나저나 이제 대답을 해 줘야지.”

집으로 돌아온 그와 하린은 안방에서 씻고 나온 그를 바라봤다. 습기 가득한 뿌연 안개가 아직 그를 쫓아 따라와 묘하게 그의 곁에 자리했다.

하린은 말없이 웃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화장대에 있던 반지 케이스를 꺼내 왔다.

전에 그가 청혼하며 끼워 줬던 반지, 평소에 낄 수 없는 보석의 크기와 값 때문에 들고만 있었던 물건이었다.

다시 자리에 돌아와 하린은 태형을 바라보며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반지를 손에 끼웠다.

그리고 태형에게 손을 보여 주며 환하게 웃었다. 봉우리에서 피어난 환한 꽃 같은 얼굴로.

“생각 정리는 다 된 거야?”

태형은 가까이 다가가 하린의 손을 잡고 반지 위에 키스를 남겼다.

손등에 한 번, 그리고 반지 위에도 한 번.

“……네. 저 하고 싶은 것도 생겼고.”

“응. 그리고.”

태형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하린의 다른 대답을 종용했다. 손깍지가 끼어 왔다. 틈 없이 맞닿은 손가락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진짜 결혼, 하고 싶어요.”

“누구랑.”

“……아저씨랑.”

그는 미소 지으면서도 눈썹 하나를 까닥거렸다.

“아저씨라고 하면 혼낼 거라고 말했었는데.”

“아, 자기.”

하린이 빠르게 말을 정정했으나 그는 아주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표정이 장난스러워 보이기도 야릇해 보이기도 했다.

“늦었어.”

“이쁜 짓도 했는데…….”

침대 위로 밀쳐진 하린이 작게 꿍얼거렸다.

“그럼 상도 주고 벌도 줘야지.”

태형은 하린을 그대로 침대에 눕히고는 허벅지 안쪽을 입술로 지분거렸다. 그리고는 애를 태우듯 예민한 곳을 제외하고는 아주 느릿하게 자극했다.

하린의 몸이 점차 딸기우유와 같이 붉은 피부 결로 변할 때쯤 하린은 그의 자극에 결국 버티지 못하고 몸을 비틀며 다리를 움찔거렸다.

그때였다.

찰싹- 매서운 손길이 예민한 아래 어딘가를 때려왔다. 저도 모르게 음란한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 상 주고 있잖아.”

“자, 자기…… 으응.”

“쯧, 상을 주고 있는 데에도 이렇게 칠칠치 못하게 굴면 내가 혼을 낼 수밖에 없지 않겠어.”

말하는 것을 보면 흥분하지 않은 성직자 같은 느낌이지만 눈으로 그를 보면 아주 배덕한 느낌이 달아올랐다.

욕구 따위는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음탕하게 젖은 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그리고는 그는 하린의 허벅지를 지분거리던 손을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트렸다.

“아, 아흐.”

몸을 주체할 수 없는 쾌락, 이것은 느끼고 또 느껴도 매번 주체할 수 없었다. 속이 뜨겁고 얼얼하다.

그러다가도 이내 손발이 차가워질 정도의 짜릿한 감각이 뒤이어 찾아온다.

커다란 무언가가 오기를 바라면서도 감당하기 힘든 쾌락이 버거웠다.

몸이 저절로 떨었다.

다시 한번 매서운 손길이 이번엔 허벅지에 닿았다. 찰싹. 습기 가득한 손으로 살결이 닿으니 더욱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또 정숙하지 못하게.”

“하고 싶어요. 해 주세요. 자기야…….”

“옳지.”

그는 그제야 맘에 든다는 듯 혼을 내던 손길을 거둬들였다. 하린은 이윽고 그가 제대로 된 상을 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 아흐!”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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