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4화 남겨진 사람들
[아, 이제 들어가야겠네. 전화 끊어야겠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응, 너도.]
“기다릴게요.”
전화가 끊어짐과 동시에 하린의 입꼬리도 점차 아래로 떨어졌다. 달콤하고 달콤한 전화가 끊긴 후 씁쓸함은 배로 커진다.
하린의 이런 상태가 언제부터냐고 한다면 아무래도 우기익의 죽음을 기점으로부터였다.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생겼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소화할 시간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받아들이고 견뎌야 할 지독한 사실만 남았을 뿐.
하린은 혼란스러웠다. 그럼에도 그의 앞에서는 이러한 감정들을 모두 드러낼 수 없었다.
언젠가, 모든 일이 끝나고 태형이 나지막이 물어본 적이 있었다.
“너는 정말 괜찮니.”
“뭐가요?”
“부모님 이야기”
태형과 하린 사이에서 부모님의 이야기는 금기어였다. 누가 먼저 꺼내어 말하지 않고 그저 넘어가는 그런 것.
그들이 이제 와서 파헤쳐 꺼내기엔 너무 무겁고 풀 수 없는 것들이었다.
더군다나 모든 일이 끝나고 하린은 자신이 보았던 우기익의 일기장을 태형에게 보여 주었었다. 그는 일기장을 받아 들고는 한참을 보았지만, 그는 그와 관련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린 또한 그가 말하지 않으니 굳이 그것들을 꺼내어 말한 적 없었다.
강태형의 친부모가 우하린의 친부모를 죽이고. 은폐하려 했다. 그 모든 전말에 우기익이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지 모른다고 현실을 회피하며 살기도 몇 번.
하린은 그냥 꺼내지 않기로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부모보단 지금 제 곁을 지키는 태형이 더 중요했고.
부모의 일을 끌고 와 안 그래도 깊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싶지 않았다.
그도 자신도 상처를 후벼 파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현실을 살아나가기에 급급했다.
그냥, 행복하고 싶었다.
이제는 복수이니 뭐니 그딴 건 생각하지 말고 나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하린이 먼저 꺼내지 않으니 태형도 그 이후로 꺼내지 않았다.
하린 역시도 알고 있었다.
이것이 회피라는 사실을 말이다.
굳이 그 이야기가 아니고서도 하린은 충분히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자신은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단순히 태형만을 바라보며 그에게 의지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강태형이라는 인물과 동반자로서 옆에 서고 싶었지 절대 그의 등 위에 올라타는 짐이 되고 싶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껏 누군가의 소유물로만 살았기에 하린은 그것의 진심이었다.
누군가의 인형이 아닌, 자기 삶을 살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도 미루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하고 싶은가.
평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철학적이고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의문이었다.
행복한 적도, 그렇다고 행복한 가정 환경을 겪어 본 적도 없는 하린이 ‘행복’을 꿈꾸고 찾는다는 건 상당히 허망한 일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자신의 불행이 반복되지 않기를 하린은 진심으로 바랐다.
평생을 그와 함께 그의 옆에서 당당하게 있고 싶다. 그렇기에 그가 그토록 하린을 닦달하며 성화를 부려도 이상하도록 하린이 묵묵부답이었던 거였다.
성급하게 결혼하면 당장이야 좋을 수 있으나 결국 누군가의 ‘아내’로 살고. 결국엔 누군가의 ‘엄마’로 사는 것이 행복을 위한 길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우기익의 ‘딸’ 혹은 인형으로만 살았듯이 말이다.
우하린 내 인생. 이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나면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뭘 하고 살아야, 즐거울까.”
하린이 한숨을 내쉬며, 아까 내렸던 커피를 마셨다. 그사이에 다 식어 버린 커피는 신맛이 나고 아까와 맛이 달라졌다.
식어서 맛이 없는 커피로 입을 축이며 하린은 버릇처럼 TV를 켰다.
[재벌 3세였다는 것을 절대 비밀로 하고 7년을 넘게 회사를 운영하셨다고 이번에 밝히셨는데요. 지금껏 왜 숨기셨는지, 그리고 지금 와서 이것을 밝히게 된 이유는 뭔지 궁금한데요.]
티브이 속에서는 아주 눈에 익은 사람이 먼저 보였는데, 하린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려 화면에 고정했다.
조 대표였다.
[예, 저는 꽤 오랜 시간 IT 회사를 운영했습니다. 얼굴이 없는 소유주라고 하여 많은 분이 궁금해하시는 것은 알았으나 아무래도 집안의 배경이 먼저 밝혀지는 것은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었습니다.]
[그럼 지금에 와서 밝히게 되신 건 어떤 연유여서일까요?]
[이제는 솔직해지고 싶어서입니다.]
환하게 웃고 있는 표정. 항상 권태롭던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생기가 넘치는 표정과 당당한 모습이 가득했다.
“얼굴이 밝아졌네.”
하린은 그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도 지금껏 찾지 못했던 길을 찾은 얼굴이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저의 가정사와 집안 배경을 알리는 것이 제 약점을 보이는 거라고 생각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두려움도 많았죠. 사업이 망가질까 봐 걱정하던 시절도 있었고요.
그러나 걱정은 지금까지 했던 거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제 이름을 당당하게 걸고, 세상에 인정받고.
당당하게 사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죄짓고 살아서 밝히면 안 되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하하.]
조 대표는 아주 자연스럽게 웃으며 인터뷰에 응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사실, 조 대표가 사업을 숨긴 건 그의 새어머니인 이 여사 때문이었다.
내부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며 자신을 견제하는 이 여사 때문에 사업을 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비밀로 했고, 그녀의 앞에서는 최대한 꼬리까지 내리며 다 죽어 가던 개 시늉을 했던 그였다.
“멋지다.”
하린은 그의 모든 것을 알지 못했으나, 어느 순간 그가 변했고. 용기를 내었다는 사실만을 알았다.
망나니로 불리며 재벌 3세의 수치를 자처하던 그는 이제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있었다.
하린은 최근 조 대표와의 만남을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그날도 평소보다 뭔가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던 기억이 있었다.
“이제 괜한 가면 뒤로 숨지 않으려고 합니다.”
“심경의 변화가 생겼나요?”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서.”
하린은 시선을 TV에 고정하면서도 아예 소파에 있었다. 그리고 다시금 조 대표와 했던 대화를 상기했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하린 양을 보고 배웠습니다.”
“저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꺼내, 사람들에게 보이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닌 걸 아니까. 나는 내가 하린 양의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못했을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핍박받던 삶을 책으로 옮겨 적고, 심지어는 그것을 얼굴을 공개하며 세상에 밝히는 일.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일입니다.”
“뭐, 결국 그 일은 진화가 다 한걸요.”
“그날 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그대가 했겠지.”
그 만남을 뒤로하고 조 대표가 급격히 바빠져 만나지 못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조 대표는 저 일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이 여사의 눈에서 벗어나 그냥 떳떳해지는 길. 이제는 더 이상 숨지 않는 길.
“우하린 양, 당신은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하린은 다 식은 커피를 다시금 입 안에 머금으며 조 대표가 마지막까지 하던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따라 내뱉었다.
“당당하게 밝히고 싶었다. 죄짓고 산 것도 아니니까.”
한참 생각하는 동안 조 대표의 인터뷰 내용은 지나가고, 다른 연예인의 인터뷰가 나오기 시작했다.
하린은 그 내용이 시끄러워 결국 TV의 소리를 줄였다.
그의 인터뷰 내용을 듣고 있자니 지금껏 하린이 은연중 생각하던 것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았다.
정답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항상 근처에 있을 수 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 뿐.
하고 싶은 것이 없지는 않았다.
* * *
몇 주 후.
하린은 평소와 다르게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딱히 태형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알리고 알리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태형은 아직 집에 오지 않았고, 오려면 멀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는 것일 뿐.
“그러게, 누가 한 달씩이나 더 있으라고 했나 뭐.”
하린은 집 안에 틀어박혀서 온종일을 보냈다. 잠시 고개를 돌려 시계를 힐끔 바라봤다.
미국과의 시차를 생각하니 지금은 연락하면 안 되는 시간이라 하린은 그저 그가 올 몇 주 후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삭막하고 커다란 집은 춥지도 않은데 괜히 냉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노트북으로 하린이 일을 하고 있는데 괜히 핸드폰이 울렸다.
“잘 시간 아니에요?”
[응, 잘 시간이지. 근데 누가 너무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오네.]
“누구요? 저요? 헤헤.”
[그럼 누구겠어. 보고 싶다.]
피곤함이 묻은 목소리이지만 그래도 그의 음성을 듣고 있으니 하린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도 보고 싶어요 ……자, 기.”
[이제 말도 잘하네. 더 보고 싶게.]
“치, 오지도 못할 거면서.”
[보러 갈까.]
그가 앞에 없는 걸 알면서도 괜히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나 괜히 피곤한 그에게 짐이 되기 싫어 태연한 척했다.
“괜히 기대하게 하지 말고요. 빨리 자요 피곤하겠어요.”
[하린아, 보고 싶다.]
“……저도요.”
진득하면서도 질척한 목소리가 진하게 울리니 그 척도 못 했지만. 그럼에도 저런 목소리로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어찌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는 중 갑자기 현관 쪽에서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삐삐삐삑-
누가 올 사람도. 더군다나 비밀번호를 누를 사람도 없다.
그러나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뭐, 뭐야. 헛것인가.”
“뭐긴, 그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보고 싶다고 하는데, 보러 와야지.”
태형이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 본 전자책은 <툰플러스>가 저작권자와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무단복제와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