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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68화 (68/75)

#외전2화 강태형(2)

저는 아주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평생을 올려 두던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심지어는 평생을 원하던, 염원하던 것을 말입니다.

당시에는 인지하지 못하였으나, 저는 그녀를 겪으며 내 안의 다른 자아를 느꼈습니다.

평생을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던.

아니 정확히는 있었는지도 몰랐던, 자아 그 무언가를 말입니다.

저는 그녀를 통해 감각을 감정을 조금씩 알았습니다. 무언가를 알게 되고 그것이 저를 두드리게 되고.

그 순간, 저는 완전히 열려 버렸습니다.

한순간에 평생을 쌓아 왔던 것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바람이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뜨거울 정도로 밝은 빛. 생동적인 바람. 촉각. 냄새. 행복 고통.

말로만 들었던 모든 감각을 처음으로, 내가 느낄 수도 있겠구나.

나도 그런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구나. 희망? 이라고 보통 말하는 그 무언가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 기묘한 경험을, 상황을 저는 차마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이건 신이 주는 선물 같은 것이니까요.

기묘한 일이었습니다.

아주 낯설고, 이상하고 처음 겪는. 그래서 무료한 일상의 처음으로 지루하지 않다고 느끼게 되는 것들을 말입니다.

저는 아주 무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겁도 없고 당장 내일 죽어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모든 일에 비관하며 살았을지 몰랐습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더 살아도 덜 살아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수를 끝마치고 그다음의 삶은 기대되지 않았습니다. 우기익을 죽이면 나는 무엇을 하게 될까.

또 계속해서 죽지 못해 살까.

아니면, 죽을까.

저는 당시 성벽에 둘러싸여 고립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인간도 신도 그렇다고 하여 동물도 아닌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저에게는 생각보다 크게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가야 하는 삶.

명예이니, 돈이니 이 모든 것들에서 떠나 관망하기에 두려움이 없었던 거였고. 그래서 저는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무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는 저를 나약하게 만들기에 아주 충분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습니다.

연민 혹은 불쌍하다는 감정으로 포장하기엔 늦어 버린 때였습니다. 한순간에 다가온 그녀는, 제게 다가와 죽기를 바랐으며.

한편으로는 지독하게 살고자 했습니다.

반쯤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나타나 제 눈앞에 아른거리며 재잘거릴 때, 저는 마침내 처음으로 나약한 인간이 되어 버렸음을 깨달았습니다.

고통이라는 비극을 깨달을 수 있는 인간으로 말입니다. 나는 나의 삶을 미래를, 감정을 그리고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자 하는 사람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녀를 소유하고 싶어졌습니다.

치기 어리게도 고통에 무감하였던 저는 마침내 도래하였습니다. 평생을 가져 본 적 없는 감정과 감각 그리고 끊이지 않는 생각들.

원래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였습니까?

저는 감정과 감각이라는 목줄로 목이 조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매일 밤을 두려움으로 떨어야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토록 변화를 원하고 또한 자극을 찾아 나섰는데.

변화의 지점에서 저는 나약하고, 고뇌하였습니다.

처음으로 무서워하였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관망하며 바람과 비를 뿌리는 전지전능한 것, 혹은 이방인에서.

비를 맞고, 모래사장 한가운데 위에서 무너지는 모래에 비틀거리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한없이 흔들리고, 부서지고. 그러면서도 갈망했습니다.

저는 고통이 무엇인지.

감정, 감각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갈망 그 한가운데에서, 저는 제 감정에 제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습니다.

두려움과 무서움을 느끼는 한 인간으로 말이죠.

그것에게서 도망가려고도 해 보고 멀어지려고도 해 보고. 갈망을 찢고, 부숴 보려고도 했습니다.

이내 그 모든 것을 행하려 해도 제 맘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저의 감정을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저는 멀어지려 할수록 더 큰 갈증이 밀어닥쳤습니다.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녀로 인해 저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

웃을 수 있는 인간이.

저열하고 음습한 욕구를 가진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녀를 통해, 비틀리고 욕망에 눈이 멀어 버린 한 마리의 수컷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녀가 있는 한 그저 관망자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쾌락의 고통을 갈망의 쾌감을 아는 이가 되었습니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녀와 함께 가기 위해서라면 그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음을 밝힙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빌겠습니다.

그녀를 알게 되며 세상을 알게 되었음을.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서라면 제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음을.

그리고 그녀에게 더 이상의 고통이 깊든지 않기를, 진심으로 자비를 구합니다.

평생을 그녀의 곁에서. 그녀의 행복을 함께하고자 합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 * *

어제까지는 날씨가 매우 좋았는데 오늘은 조금은 우중충했다.

“무슨 생각해.”

“아, 그냥 조금 밖에 보고 있었어요.”

햇볕이 잘 드는 시간에 밖에 나와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고 있으면 생각이 환기되는 것 같아서 좋은데.

오늘은 조금 아쉬운 날씨였다.

“무슨 생각에 이러고 있는 건데.”

“그냥…….”

밖이 잘 보이는 테라스에서 앉아 있을 때는 보통 한가지였다.

하린이 생각이 많다는 것.

태형은 자연스럽게 하린의 옆에 앉고는 하린과 두 눈을 마주 보도록 했다.

“하린아.”

하린의 얼굴이 붉어져 옆으로 시선을 회피하니 그녀의 시야 속으로 그의 얼굴이 졸졸 따라왔다.

프러포즈 이후 묘하게 더 적극적으로 변한 그를 보면 감정이 먼저 반응한다.

좋고, 또 좋고. 그냥 좋다.

적극적으로 행동해 주니 더 좋다.

지금도 봐도 너무 잘생기고, 보기만 해도 좋은 감정은 어째서인지 줄어들지 않았다.

“프러포즈도 안 받고. 나 말려서 죽이려고 그러나. 응?”

사실 요즘 하린의 고민이 바로 이거였다. 프러포즈.

1년으로 잡았던 그와의 얄팍한 관계는 끝났다. 그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하린은 아직 제 마음조차 추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 과정에서 좋다고 덜컥 프러포즈를 받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문뜩 들어서. 하린은 프러포즈를 받고 그 이후, 번복했다.

“저…… 일단 그날 받았던 청혼은 조금만 더 생각해 볼래요.”

그가 아니면, 당장 아무것도 못 하는 주제이지만 그래도…….

백 미터 달리기만 해 오던 사람이 갑자기, 목적지를 잃은 느낌이라고 하면 감이 올까.

하린은 불투명하게라도 가지고 있던 목표가 사라졌다. 평생을 우기익의 집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고.

그것을 달성한 후에는 우기익의 힘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그것은 태형을 만난 후에도 진행형이었다. 태형은 결혼해 준 이후에도 매번 말하곤 했다.

홀로서기를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를 알게 된 후에도 하린은 우기익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 쳤다.

그리고…….

그 목적이 허무하게 사라진 지금.

만일 강태형이라는 나무가 없다면 나는, ‘잘 살 수 있을까?’라고 자문자답해 본다면 그건 굳이 미래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못산다.

평생을 배운 것이 도망가는 것, 숨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기에 지금의 상황을 그저 강태형이라는 방패막이 뒤로 숨을 수는 없었다.

또 도망가는 건 싫었다.

“하린아.”

자신과 있을 때 잠깐의 회피도 허락하지 못한다는 듯, 그는 하린의 곁에 와 그녀의 목덜미를 코끝으로 간질였다.

“네, 네에…… 으읏.”

“나 언제 받아 주려고.”

간지러움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는 하린의 몸을 살짝 들어 자기 허벅지 위로 하린의 몸을 올렸다.

그의 손가락이 하린의 몸 위를 건반을 치듯, 하린을 연주했다. 그의 손길이 지나가면 열꽃이 피어오르고. 소름이 잘게 돋았다.

“받……받아 주다니, 요.”

“내가 너의 허락만을 기다리고 있잖아. 언제까지 이렇게 애태우게 할 거야.”

그의 몸 위에 올라타니 아래쪽에서 뭉뚝하고 딱딱한 것이 닿았다. 하린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는 놀라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하린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하루에도 열두 번도 네 생각만 하면 이래.”

저런 표정으로 저런 말을 어찌도 잘 내뱉는지. 얼굴만 보면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말에 하린은 순간 정신이 혼미했다.

머리에 있던 상념이고 무엇이고 그냥 태형이라는 인물 하나만 머릿속이 가득 찬다.

뭐, 그래 이것이 태형의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네가 길들였으면. 책임을 져야지. 응?”

“읏. 싫다는 말이…… 아니라, 그저.”

다정한 말이 뱀처럼 하린의 몸을 조금씩 맴돌며 몸을 점점 옥죄어오는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이 허리 뒤에 닿아 강제적으로 그의 하복부와 몸이 맞닿았다.

틈 없이 꽉 닿은 몸, 하린은 시선을 어디로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저.”

“으, 생각을 해 보고 싶다는, 거, 거였는데……으앙!”

태형은 하린의 말을 잘 들어주고 있다는 듯 그녀의 말에 사근사근 대답하며 그녀의 허벅지를 지분거렸다. 잠옷으로 입고 있던 실크로 된 잠옷이 어느새 몸 위로 말려 올라가 새하얀 허벅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손결이 허벅지, 그리고 그 안쪽으로 점차 긴밀해졌다.

“아, 아…….”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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