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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60화 (60/75)

#60화

다음 날, 해가 뜨는 것을 보며 하린은 태형이 마시던 커피를 마셨다.

밤을 꼴딱 새웠다.

아직도 맛이 없는 건 매한가지였으나, 이 향을 맡으면 꼭 그가 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종종 내려서 마시던 것이 습관이 되어 남아 있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조 대표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오늘 저녁?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자료 뽑아서 전달해 줄게요. 근데 갑자기 이런 거 왜 원하는지 물어봐도 되나요?」

하린은 조 대표에게 온 문자를 보며 한참을 말없이 핸드폰만을 바라봤다.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남들에게 얼마나 말해도 되는 것일까.

아니 말해도 되는가.

처음 겪는 일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마음이 닿는 대로.

다시 한번 손에 들고 있던 따듯한 커피를 입에 담았다.

첫맛부터 끝 맛까지 온전히 쓰기만 한 것을 왜 아저씨는 매일같이 마셨을지.

성인의 삶은 원래 이토록 어렵고 쓴 게 맞겠지.

“어른이라는 거 너무 어렵다.”

짙은 한숨이 묻어나는 음성. 홀로이 남은 공간에서 하린은 지독한 공백을 느껴야 했다.

점심까지 이 집의 내부는 조용했다.

그나마 우진화가 깨어나서 사람이 사는 집 같아 보였다.

하린은 진화의 옆에 붙어서 그녀의 간호를 했다. 간단히 있는 재료로 달걀죽을 해서 옆에 두었다. 일어나면 먹으라고.

아마도 며칠은 활동하기 어려울 만큼 아플 거였다. 대신 병원은 보내야 할 것 같았으니 하린은 보통 태형과 제일 많이 교류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경호원에게 대화를 걸었다.

“혹시 아저씨한테 말하고, 진화 병원 좀 보내도 될까요?”

“보고하겠습니다.”

“제가 직접 가면 좋을 텐데. 좀 그럴 것 같아서요. 다른 경호원분이 도와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우진화는 몸을 움직이는 그것조차 힘들어했기에 어쩔 수 없이, 경호원 중 한 명에게 부탁하여 진화의 병원 내원을 부탁했다.

우진화는 하루 종일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통증 때문에 긴 잠을 자지 못하고 눈을 뜰 때마다 고통을 호소했기에, 진통제를 계속 요구했지만 너무 과도한 복용은 안 되기에 달라는 대로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너무 아파하는 진화의 모습에 하린은 진통제를 주며 먹게 했다.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얼굴이 부어 말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진화를 두고 방에서 나왔다.

한바탕 전쟁을 하는 것 같았다.

* * *

“이 집에 내가 이렇게 놀러 와도 되는 건가?”

조 대표가 집에 왔다. 그는 집으로 들어오면서 그렇게 말했다. 하린이 문 앞에서 그를 맞이하며 물었다.

“왜요?”

“아니 강 지사장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으니까. 나 나중에 혹시 칼이라도 맞으면~.”

“에이 이상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아무래도 이쯤 되면, 친구 같은 관계가 된 것 같기도 했다. 하린은 조 대표와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요즘 최대한 외부 활동 잘 안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집으로 초대하는 거니 이상한 생각 하지 마시고요.”

“우 대표 때문입니까?”

“네. 그렇죠. 그날도 원래 나가지 말라는 거 너무 답답해서 나갔다가 집 앞에서 그렇게 된 거였거든요.”

거실로 안내했다. 조 대표를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하고는 하린은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도 처음 오는 손님이니 음료라도 대접해야지.

조 대표는 가지고 온 소지품을 옆에다가 내려두며 소파 안 가운데에 앉았다.

“커피 드시죠?”

“부탁합니다.”

“네.”

조 대표의 커피 취향까지는 반영해 줄 수 없었기에 그냥 보통 태형이 먹던 스타일로 커피를 내려서 가져다주었다.

하린은 이전에 사다 두었던 병 음료를 따며 조 대표 앞자리에 앉았다.

“드세요.”

“고마워요.”

조 대표는 커피를 입에 대며, 한번 주변을 살피다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런데 괜찮아요? 안 그래도 그날 내가 괜한 말실수를 한 것 같아서 괜히 마음이 그랬거든.”

“안 괜찮을 게 뭐 있겠어요. 어찌 되었든 간에 저도 알아야 할 내용은 맞긴 했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한참 힘들 때는 그냥 모르는 게 편했었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태형과 거리를 두고, 만나지 못하고 언쟁이 생기고.

하루하루 말라가는 느낌이었으니깐.

그나마 진화가 오고 신경이 분산되니까, 전보다 잡생각은 줄었다.

생각이 분산되니까 조금 더 건강한 생각이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지금과 같이.

“그러면 다행입니다. 그리고 이건 선물.”

“감사해요.”

조 대표는 하린의 말을 듣고 정말 안심한 듯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그 역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을 거였다.

우하린의 몸을 그녀 빼고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에게 정말 감사했다.

조 대표가 아니었다면, 하린은 지금까지도 몰랐을 테니까. 이런 생각을 하면 당연히도 태형이 미워져야 하는 게 맞는데.

그가 두려움과 동시에 좋아하는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없을 때면 가슴이 비어 있는 것 같이 허했다.

“근데 사고 관련해서는 자료가 남은 게 그다지 없었습니다. 10년은 더 된 사고이기도 하고, 그냥 단순 사고로 처리되었더군요.”

“……감사해요.”

하린이 받은 서류를 꼭 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결국 기다리던 조 대표가 먼저 물었다.

“근데 왜 필요한 건지 정말 말 안 해 줄 건가.”

“음, 우기익과 관련된 일 같아서요. 뭐 저를 지킬 수 있는 방패 정도로 생각해 주세요. 정확한 것도 아니라 확실해지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빙그레 웃는 조 대표의 얼굴. 하린을 보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 혹은 장하다는 얼굴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위험한 일은 하지 마세요.”

이제는 우하린도 이런 생각을 하고 말을 할 수 있었다.

“감사해요. 앞으로도 종종 잘 부탁드립니다.”

“다음번에도 필요하면 계속 날 써먹겠다는 소리로 들립니다?”

“헤헤…… 이제는 안 해 주실 거예요?”

하린이 눈꼬리를 접어 웃어가며 물으니 조 대표가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조 대표가 이제는 제법 친해져서 그런지 전에는 보이지 않던 표정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생각 좀 해 보겠습니다.”

* * *

조 대표를 보내고, 우진화도 경호원과 병원을 보냈다. 홀로 남은 집에서 하린은 아까 조 대표에게서 받은 서류를 뜯어보았다.

연구소장이라는 사람의 이름, 나이, 학벌 등과 함께 일했던 부인의 인적 사항들.

……딸이 하나 있었네.

그날 사건에 관련한 내용은 그다지 많이 남은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사고에 관한 내용은 딱히 남는 게 없었다.

하린은 아쉬움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래서는 조사를 부탁한 이유가 사라졌다.

서류 몇 개를 더 뒤적거리니, 연구원 부부의 가족 관계가 나왔다.

여기는 첫째가 아들, 둘째가 딸이었다. 나이 등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데 아주 오래된 사진이지만 사진도 몇 장 첨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린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건 아저씨가 보여 준 사진이잖아.”

전에 태형이 보여 줬던 가족사진이랑 유사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뭐야 이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왜 여기서 아저씨가 나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기익이 낸 사고 희생자에 왜.

하린은 복잡해진 머리로 계속해서 생각했다.

만일 태형이, 무언가를 알고 한국에 왔던 거라면. 그것을 위해 우진화와 결혼을 하려고 했던 거라면.

뭐가 뭔지 모르겠는 카오스 속에서, 한가지의 결론에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정답인지는 모르겠으나,

“너를 사랑한다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너는 내 유일한 약점이었어. 그걸 알면서도 인정했었다고.”

“내가 너 하나 살리고자 했던 짓들을 알면, 너는 내게 이런 말 못 해.”

그날 태형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그가 무엇을 포기했었을지, 하린은 그날 이후로 종종 궁금증을 가지곤 했었다.

“복수.”

설마.

추론이고 물증이 없는 상태이기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우연으로만 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지이이이잉-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하린은 조금 아까 나간 조 대표라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핸드폰을 보니, 전화를 건건 조 대표가 아니라.

[여보세요.]

“아, 저씨?”

태형이었다. 갑작스럽게 온 태형의 전화에 당황했다.

[나 안 보고 싶습니까.]

사고가 정지되는 듯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우기익과 태형의 관계도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날 직후 연락도 안 하고.]

“보고…… 싶죠. 당연히.”

정말, 복수 때문에 한국에 왔던 걸까.

나 하나 살리고자 방향을 틀어 가며 했던 것이 맞을까.

“보, 보기 싫어서 연락 안 한 건 아니에요.”

정말 맞을까. 하린은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왜 한국에 왔냐고. 정말 회사 일 때문에 들어온 거 맞냐고.

그러나 차마 묻지 못했다. 그는 말을 해 주지 않을 테니까.

“……보고 싶어요.”

묻지 못 하는 말들이 허공에 부유했다. 그리고 모든 문장이 떠나가고 남은 자리, 유일한 문장 하나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보고 싶어요. 아저씨.”

그는 과연 무슨 생각이었을까.

심장과 가슴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하린이 감당하기엔 강태형이라는 남자는 어렵고 복잡했지만.

또한 안정감과 두근거림을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도 보고 싶어.]

지금처럼 말이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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