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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58화 (58/75)

#58화

“이제는 네년까지 나를 무시해.”

“아, 아니에요……. 저, 저는.”

아무리 우기익이 걸핏하면 때린다지만 보통 손에 무언가를 들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랬다면 자신이든 우하린이든 이미 누구 하나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저, 저는 아버지를 무시한 적이…….”

“입 처닫아.”

채앵-! 하는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라는 결혼이나 할 것이지 네년도 감히 내 판단에 토를 달고, 감히! 이년이고 저놈이고!”

정확히는 우기익의 골프채가 거울을 쳐, 깨지는 소리였다.

거울 파편이 달빛을 받아 빛을 내며, 떨어지는 것을 보며 우진화는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다.

“으악……!”

거울이 아니라, 저 조각들이 자신의 인생 같았다.

삶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미 진탕 술을 마신 우기익은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 같지 않았다.

우진화는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엉덩방아를 찧었다.

몸, 몸이 잘 안 움직여.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려는데 몸이 고장이 난 것처럼 삐걱거렸다. 그래서 대신 기어라도 나가고자 했다.

휘청휘청 우기익이 천천히 다가온다.

바닥에는 와인병과 양주병이 깨져 있었고, 방금 깨진 거울 파편이 뒹굴었다.

“으……으윽…….”

우기익은 지금 흡사 광인이었다.

몇 걸음 걸었을 때, 우기익이 성질을 못 이기고 그대로 우진화가 있는 곳을 후려쳤다.

“쓸모없는 년!”

“어윽……!”

“네년도 네 어미처럼 결국 도망가겠지. 이년이고, 저년이고. 다.”

몇 번의 매질. 손으로 맞는 것이 아닌, 다른 물건으로 맞는 경우 악 하는 소리조차도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에 깨달았다.

우진화는 그저 머리를 보호한 채 달달 떨 수밖에 없었다. 등 어깨 어디고 가릴 것 없이 얻어맞았다.

우기익은 우진화를 골프채로 때리다 종국엔 그것도 분에 안 풀렸는지, 골프채를 바닥에 몇 번이나 때려 박았다.

바닥에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왔다.

골프채가 다 망가져 사용할 수 없자 우기익은 우진화의 머리채를 잡아 거실 안쪽으로 그대로 끌고 갔다.

유리 조각과 거울 조각이 날카롭게 널려 있었으나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다. 질질 끌려가며 온몸에 생채기가 났다.

“아…… 아흑. 제, 발요.”

감당 가능한 통증을 그 이상으로 받으니 통증이 그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몸 어디 구석이고 이상했다.

“네년은 우하린 그년처럼 다른 새끼한테 다리 벌리는 재주도 없으니…….”

우기익이 중얼중얼했다.

머리채가 잡혀 억지로 고개가 들어 올려졌다.

짜악. 짜악. 얼굴과 머리, 어디 할 곳 없이 사정없이 맞았다.

그 와중에 파편 하나가 몸 안으로 파고든 것 같았다.

“하는 수가 있나. 평생 이렇고 살아야지.”

눈앞으로 우기익의 손이 날아든다. 우진화는 두 눈을 감을 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 * *

한참을 우진화를 패던 우기익은 양주를 병째로 마시다 그대로 블랙아웃되었다.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아니 그 이상의 단어가 있다면 사용해야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분노도 되지 않는 좌절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이 우진화에게 다가왔다가 이내 떠났다.

“하아…….”

우기익의 잠자는 숨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만 들어도 우진화는 잘게 몸을 떨었다.

어쩌지.

어떻게 하지…….

오늘은 자신의 미래를 엿본 것일 수 있었다. 우기익이 마지막에 한 말은 단순히 술에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닐 거였다.

더불어 우기익의 난폭한 성정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 시점.

이러다가는 정말 맞아 죽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죽든 혹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든.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와. 네 말대로 같이 사는 집이니까, 네 아버지도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야.”

사지로 몰렸을 때, 우하린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우하린…….

그토록 이기고 싶고, 그래서 온갖 성정을 부리며 못되게 굴었는데.

결국 필요할 때 의지하게 되는 이 상황이 눈물이 났다. 자신은 살겠다고 도망가고, 우하린은 미끼로 사용했었다.

우하린조차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우진화는 힘없이 눈을 꾹 감았다. 옆으로 누워 있어 눈을 감는데 맺혀 있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우하린…… 언니는 이런 상황까지 예측했었을까.

했으니까, 그때 그런 말을 했겠지.

“그렇지만 내가 그랬듯, 너도 발버둥이라도 쳐 보길 바라.”

우진화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맞은 직후여서 그런지 생각보다 몸은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몸이 점차 부어올라 움직이기 힘들 거였다.

도망가려면 지금, 도망가야 한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우기익에게 걸리지 않게 우기익의 지갑 하나를 훔쳐 달아나려던 진화는 순간 우기익의 서재로 시선이 돌아갔다.

이왕 도망가는 거. 뭔가 들고 도망가는 게 났겠지.

저 방에는 우기익이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물건을 넣어 두는 금고가 있었다.

어릴 때 우기익이 종종 금고를 여닫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비밀번호가 뭔지 알고 있었다.

물론 바꾸지 않았다면.

오늘이 마지막일 거야. 안 돌아올 거니까.

다시 한번 우기익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며 우진화는 천천히…… 서재로 들어갔다.

그리고 알고 있던 번호를 천천히 입력했다.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삐비비빅-

숫자 누르는 숫자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열렸다.

두꺼운 금고의 문이 열린다. 우진화는 그 문을 열어 적당히 서류로 보이는 뭉텅이를 손에 짚었다.

힐끔. 밖을 바라본다.

조용했다. 천천히 금고의 문을 닫고 아주 조용히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걸었다.

몸이 아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지만 입을 틀어막으며 나왔다.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었다. 그저 현관문을 열고, 소리 나지 않게 닫고.

그대로 뛰었다.

최대한 우기익이 보이지 않을 곳으로.

“태, 택시……!”

* * *

“너 얼굴이…… 그리고 몸은 왜 이래…….”

우진화의 모습을 살피는 하린의 시선이 흔들렸다. 이건 단순한 폭행의 수준을 넘어선 모습이었기에.

우진화는 하린의 얼굴을 살핀 후에 마지막까지 버티던 힘을 풀어 버렸다.

기절하는 우진화를 보며 옆에 있던 경호원에게 말했다.

“119……! 뭐든 의사 좀 불러 줘요!”

경호원은, 아마도 태형에게 보고를 올린 것 같았다. 왜냐하면 119가 아닌 원래 하린의 주치의가 불렀다고 했으니까.

생각해 보니 우진화 역시 우기익의 딸.

여론 혹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기에, 이 방법이 맞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번 일을 크게 키울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진화를 자신의 침대에 눕혀 두고 그 옆에 앉았다.

“하아…….”

온몸이 무슨 칼에 베인 것 같은 상처 투성이었다, 옷에는 핏자국이. 얼굴에는 푸른 멍과 손이고 어깨고 할 것 없이 기다란 몽둥이로 맞은 것 같은 자국.

하린의 표정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표정이었다.

너와 나의 삶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박복하구나.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차마 빠져나올 수도 없는 개미지옥 같은.

아마도 하린은 진화가 왜 이토록 두들겨 맞았는지 알 것 같았다.

“결혼이었겠지.”

맞다, 맞다 포기하여 장소에 나가고.

젊고 어린 여자들에게 눈이 뒤집힌 하이에나에게 잡아먹힐 뻔하고. 도망쳐 오면 아비라는 작자는 또 팬다.

그것이 무서워 나가면, 밖에는 또 다른 고통과 두려움이 있고. 종국에는 맞는 것이 편한 삶이 도래했다.

그리고 이것이 마지막에서 더 마지막의 모습.

폭력은 학습된다. 더불어 세상을 그리고 때리는 사람을 탓하는 걸 넘어 결국 자신을 탓하게 된다.

내가 못나서.

내가 멍청해서.

내가…… 맞을 만해서.

아이러니하게도 결국,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면 맞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하린은 마른 얼굴을 손으로 문댔다. 정신이 아찔했다.

똑똑-

단발적으로 울리는 노크 소리에 일어났다. 일어나 하린도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전 밖에 나가 있을게요…….”

하린은 밖으로 나와 문 근처를 서성거렸다. 할 일 없는 사람처럼 그 주변을 배회하니 경호원 하나가 근처에 와서 섰다.

하린은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저씨도, 진화 온 거 알아요……?”

“알고 있으십니다. 그래서 주치의도 부르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다른 건 딱히 안 물어보셨죠?”

“……네.”

단호하고 종결의 대답에 하린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경호원은 하린을 지켜야 할 대상으로 둘 뿐 그 이상의 친밀도를 쌓지 않았다.

뭐, 이 역시도 아저씨의 지시일 수도 있지만.

“네.”

하린은 시무룩하게 대답하며 다시 진화가 있는 쪽을 보았다. 괜히 마음이 이상했다.

“죽 같은 거라도 사 오겠습니다. 밖에 다른 경호원 한 명 더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감사해요.”

다 커서 진화와 다시 사이가 좋아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우기익의 딸 따위, 관심도 안 주고 없는 척 살 거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삶이 편해지고 나니, 진화에 대한 딱한 감정이 살아나기도 했었다.

“이건 뭐지.”

거실에 탁 놓여 있는, 서류와 책……?

생각해 보니 아까 우진화가 올 때 손에 들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하린은 거실 소파에 엉덩이를 대며 앉았다.

우진화가 치료받는 사이, 남는 시간에 자연스럽게 안의 내용을 보았다.

“뭐야…….”

이것은 우기익의 일기장이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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