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시간을 돌려,
병원에서 하린과 다툰 이후.
“기술 탐내지 않았는가……? 내가 내 기술과 또, 또 무엇이 필요한가, 필요한 걸 말해 보게. 내, 내가 다 준비하겠네.”
태형의 사무실로 우기익이 찾아와 다짜고짜 거래를 제시했다. 미리 만나자고 말도 없이 찾아온 것을 보면 적당히 압박을 받고 있나 본데.
태형에게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속에서 분노가 찼다.
이 새끼 때문에 내 새끼가 죽었다.
원래 쥐를 잡아, 천천히 자신이 끓어 죽는지도 모르게 죽이려고 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오만이었음을 이번 일로 알았다.
처음부터, 지금처럼 시간을 주지 않고 그냥 죽였어야 했다.
“하린이 걱정은 한 번도 하지 않으십니다.”
“아! 그날 우하린…… 하린이는 괜, 괜찮나? 내가 찾아가 봤어야 했는데 상황이 힘든 거 알잖아 자네.”
우기익이 우하린의 유산을 몰랐을 리 없다.
“……유산한 거 다 알고 있으실 거 압니다. 저는 그날 제 아이를 잃었고요. 저는 시장님과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내가 하린이에게 가서 죄를 빌면 용서해 주겠나. 뭐든 말만 하게. 제발 나, 나 좀 도와주게.”
“가세요.”
“강 서방. 우리 사이좋았잖아. 왜 그러는 거야 대체. 강 서방 채무만이라도 덜면 파산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아. 조만간 나 이러다 탄핵당하겠어.”
가라고 하는 데에도 어지간히 바퀴벌레처럼 들러붙는다.
“그, 그래 내가 하린이에게 가서 죄를 빌겠네.”
“다신, 그 아이 볼 생각 하지 마세요.”
우기익은 더욱 초조했다.
“더 이상의 경고는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평소에는 절대 뱉지 않을 말들까지 말하며 머리를 숙이는데, 오히려 악수를 두는 짓을 반복했다.
“강 서방…… 내가 사과를 한다는 데에도…….”
“저는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돌아가세요. 그리고 다음 수금 일은 다음 주입니다.”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인간의 면상을 볼 이유도 없었고, 오래 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때까지 입금하지 않으시면, 저도 답이 없습니다. 경매 넘길 수밖에요.”
“그, 그럼 그냥 원래 가지고 있던 기술을 헐값에 넘기겠네. 그거라도 받고 채무 탕감해 주게. 더 이상 돈 나올 구멍도 없어.”
“기술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더군다나 시장님의 재정 상태는 더더욱 알 필요 없습니다.”
“강 지사장! 가족끼리 왜 이렇게 각박하……!”
“각박이라고 하셨습니까?”
태형의 신경질적인 음성에, 우기익은 말하다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건 제가 말할 이야기이죠. 이 이상 걸고넘어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여기세요.”
태형은 그대로 일어나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우기익을 바라보며 턱짓했다.
“나가는 길은 제 김 비서가 안내해 줄 겁니다.”
“강 지사장!”
“먼 길 안 나갑니다.”
우기익은 결국, 씩씩거리며 비서진들의 손이 이끌려 밖으로 나가야 했다.
처음으로 면 다 죽이고 빌었던 거지만 소용없었다. 태형은 나가는 우기익을 빤히 바라보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비서들에게 끌려가듯 나가는 우기익을 보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욕을 읊조렸다.
자리로 돌아와 창밖을 보다가, 다른 곳에 전화했다.
“뭐 하면서 있습니까.”
주어 없는 말에도 전화 상대는 착실하게 대답했다.
[그냥 하루 종일 울거나……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십니다.]
“몸은 좀 괜찮아진 것 같습니까.”
[다행히도 음식도 전보다 잘 드십니다. 아니 정확히는 먹으려고 노력하시는 것 같습니다.]
“노력?”
[먹고 종종 체해서 약을 처방받거나, 게워내는 경우가 있으십니다. 물론 그런 것을 보면 의사에게 전달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계속 부탁해요. 이상한 거 있으면 연락해 주고.”
[알겠습니다.]
짤막하게 끊긴 전화. 태형은 핸드폰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러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는 않았다.
* * *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압니다. 현 서울 시장님이시죠.”
태형이 사라지고 김 비서가 다시 돌아가지려는 우기익을 붙잡으며 거의 연행하듯이 가자 우기익이 버둥거렸다.
“이거 놔!”
“어우 놔 드려야죠 시장님. 밖까지만 나가면 놔 드리겠습니다.”
“이 새끼가. 내가 누군지 알면서 감히 이따위로 굴어?!”
“위대하신 서울의 권력자 아니십니까. 제가 감히 귀한 신 용체에 더러운 손을 대 죄송합니다. 이 실례를 크나큰 아량으로 넘어가 주시길 바랍니다.”
“너 이 새끼 강 지사장 뒷배 믿고 이따위로 구는 거면…….”
“이만 들어가 봐야 해서. 죄송합니다.”
김 비서는 바로 우기익을 차에 태우고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 옆에 같이 우기익을 끌고 나갔던 다른 남자 비서도 김 비서를 보고 똑같이 인사했다.
우기익은 결국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수확 없이 돌아가야만 했다.
완벽히 무시당한 처사였다.
우기익이 사라지고 옆에 있던 비서 한 명이 김 비서에게 물었다.
“그래도 서울 시장인데 이렇게까지 해도 되는 건가요……?”
“뭐, 조만간 서울 시장 자리도 내려놔야 할 텐데요.”
“뭐 하긴. 더 이상 지사장님께 이상한 일만 안 생기셨으면 합니다. 회사도요.”
잇따른 노동부 조사와 세무 조사까지.
회사는 여러 조사를 대응하기 위해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더불어 태형도 어느 순간부터 퇴근도 하지 않고 회사에서 철야를 하고 있으니 아래에 있는 직원들은 살얼음판 걷듯 눈치를 봤다.
“근데 요즘 지사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한동안은 웃기도 하시고. 퇴근도 빠르시더니 요즘은 찬바람만 부는 게……. 아주 살얼음판이 따로 없습니다.”
김 비서는 최근 태형의 걱정을 걱정할 정도로 일만 했다.
차라리 술을 마셔서 스트레스를 푸는 그런 사람이면 술이라도 진탕 마시고 잠이라도 잤으면 했는데.
태형은 그 조금도 흐트러지는 것이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그러지도 않았다.
김 비서도 답답할 지경이었다.
집에도 안 들어가고, 한 번씩 호텔에서 씻기기만 하는 것이 분명히 우하린과 관련된 것인데.
김 비서에게도 말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이전에 이미 태형의 건강을 걱정한 김 비서가 몇 번이나 집으로 들어가라고 해도 듣지 않았다.
대신 최대한 빠르게 우기익의 일을 끝내겠다는 사람처럼 일에만 몰두했다. 그 덕에 생각보다도 더 빠르게 우기익이 절벽 언저리까지 밀려난 상태였다.
“김 비서님도 그럼 모르시는 겁니까? 아 요즘 다른 직원들도 지사장님 언제 주무시는 거냐고 걱정이 말이 아닙니다.”
아마도 우기익을 사지로 몰아넣어야만 태형도 자신을 밀어붙이는 것을 멈출 것 같았다.
딱히 김 비서라 해도 뾰족한 수가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 * *
집으로 돌아온 우기익은 씩씩거리며 화를 분출하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어린놈의 새끼들이……! 감히 이 우기익을!”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이 여사 쪽은 이미 등 돌린 지 오래였고. 그나마 믿고 지내던 의원들도 우기익을 슬금슬금 피하고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리엄 그 새끼는 아직도 안 잡혔데?”
우기익의 신경질적인 음성이 오 비서에게 향했다. 분노와 짜증 그리고 불안한 감정이 뒤섞인 음성.
정치인들의 부동산 투기가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럽게 국민에게 논란이 되었고.
국민감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리엄의 부동산 사기가 터졌다.
리엄 이 새끼는 사기를 칠 거면 혼자 조용히 치고 갈 것이지.
하필이면 언론에 밝혀진 것이 문제였다.
“예……그게 이쯤 되면 해외로 도주했을 거라는데, 행적이 묘연하다고 합니다…….”
“시대가 어느 때인데! 이놈이고 저놈이고 맘에 들게 일하는 새끼들이 없어. 하여간.”
매일같이 국민의 농성, 탄핵.
그리고 영혼까지 끌어모으고 빚을 내 부동산 투자했던 것이 날아갔다.
그것도 하루아침에.
우기익이 가지고 있던 현금은 물론이고 건물과 땅을 담보로 대출을 얻어 투자했었다.
더불어 태형에게 차용증까지 써서…….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이토록 돈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돈을 깔고 앉아 있지 않으면 불안한 사람이 수중에 돈 한 푼 없다니.
우기익은 하루에도 12번씩 불안함에 손을 떨었다.
오 비서는 불안한 눈으로 우기익을 바라봤다.
이 상태에서 당장 태형의 돈을 갚을 수 있을 일이 없었다. 물론 금괴와 현금 등을 숨겨 둔 것이 있었으나 그것은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
혹여나 나중에 도망이라도 가야 한다면, 그거라도 사용해야 했다.
그래서 면을 구기면서도 강태형을 찾아간 거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강태형 이 새끼도 이상하단 말이지.”
“그, 그럼 그냥 원래 가지고 있던 기술을 헐값에 넘기겠네. 그거라도 채무 탕감해 줘. 더 이상 돈 나올 구멍도 없다네.”
“필요 없습니다.”
우기익은 손톱을 뜯으며 아까의 대화를 상기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이상하다.
분명, 기술 때문에 한국에 온 것처럼 초반에는 말했는데 왜…….
“느낌이 다르지.”
오히려 기술을 신경도 안 쓰고. 우하린만 끼고 돌았다.
그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인간이 사랑놀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전에…… 강태형 조사한 거 있지?”
“네.”
“들고 와 봐.”
우기익은 무언가 기이함을 느끼고는 태형을 조사했던 과거 자료를 살폈다.
뭔가 느낌이 왔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으나, 우기익은 이런 감이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대화에서 살길이 눈에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말고. 강태형이 입양아라고 했지. 입양되기 전 과정 좀 조사해 봐.”
비서가 들고 온 자료를 살피던 그는, 인상을 쓰며 오 비서를 바라봤다.
“분명 한국인이니. 한국에서 강태형을 낳아 준 부모, 그리고 형제가 있는지 좀 알아와 봐.”
뱀 같은 우기익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아무래도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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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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