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태형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그 역시도, 상상도 못 한 말이었다.
“날 단순히 여동생의 대체품으로 보고 있는 건 아니냐고요.”
순간 태형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지만,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무표정한 그의 표정.
“어떤 새끼가, 여동생으로 생각하는 여자의 배 속에 애를 배게 해.”
차갑게 내려앉은 시선.
“네가 또 우기익의 손에 맞아서 기절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배 속의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내 기분은 어땠을 것 같아.”
하린과 태형이 오고 가는 대화는 아주 날카로워서 둘의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둘에게 상처 되는 말들.
하린은 그의 말을 들으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그 역시도 이번 일로 상처받았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가와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그의 냉랭한 표정을 보는데, 나쁜 말을 내뱉은 건 자신인데 왜 이토록 상처받는 것인지.
“너를 사랑한다고 인정하는 순간부터 너는 내 유일한 약점이었어. 그걸 알면서도 인정했었다고.”
아, 동생 이야기만큼은 꺼내지 말걸.
“내가 너 하나 살리고자 했던 짓들을 알면, 너는 내게 이런 말 못 해.”
“저는 그런 말이 아니었어요. 그저…….”
“성정이 유약한 너는, 작은 일에도 지금처럼 힘들어할 테니까. 이것이 내가 널 지키는 방법이었어.”
가족의 죽음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모른다.
“내 온실 속에서 너를 두는 것.”
차마 알지도 못할 정도의 아픔을 버티며 살아온 사람에게 그런 모진 말까지는 뱉지 말아야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이게 내가 널 사랑하는 방식이야.”
하린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형의 눈이 오만한 눈동자가 살이 에이도록 날카롭게 느껴졌다.
그는 한참을 하린을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떨궜다.
“나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저…….”
“이 일이 다 끝나고, 그때 다시 보는 게 좋겠어.”
그는 시간을 갖자는 말을 내뱉으며 서서히 멀어졌다. 이윽고 그가 등을 보이며 멀어질 때 하린은 버티기 힘든 정도의 허망함을 느꼈다.
아, 아니야.
이대로 그를 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별, 지금 그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린은 자기 몸에 꽂혀 있던 링거 바늘을 뽑아내며 맨발로 뛰어갔다.
신발을 신을 겨를도 없었다.
“아, 아저씨…….”
그에게 모든 잘못을 넘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 애초의 우기익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되었을 일.
모든 일을 당장 힘들다고, 태형에게 덮어 그에게 탓을 돌렸다. 비겁하게도.
방문 앞, 복도에 보이는 그를 붙잡고자 뛰었다. 호흡이 뜀박질에 억눌려 가슴이 헐떡거렸다.
그가 하린이 뛰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가지 말아요, 제가 잘못했어요…….”
얼음처럼 냉랭한 시선, 평소 애정이 어린 시선이 아니었다.
“아저씨…….”
억지로 뺀 링거 바늘 자국에서는 피가 흘렀다. 태형은 그것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머릿속이 중간에 편집된 것처럼 잘려 나갔다. 그 이후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돌아가.”
그저 그의 마지막 말만 제대로 기억날 뿐이었다.
그래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달콤함에 오래 취해 있어서, 망각하고 있었다.
하린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는 어디에도 없이 사라진 상태이었다. 대신 주변에는 경호원과 간호사만이 자리해 있었고.
하린은 방금의 일은 있지 않았던 것처럼 병실에 돌아와 누워 있었다.
그는 원래 없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 *
에밀리 디킨슨은 말했다. 희망은 영혼에 걸터앉은 한 마리 새다.
시에서 나온 문구였다.
하린은 문득 이 문장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문장에 들어간 뜻을 절절하게 이해했다.
왜냐하면 영혼이 없는 지금의 자신은, 희망도 그 무엇도 없었으니까.
하린은 창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 나무에 걸터앉은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그 모습을 빤히 그리고 멍하니 바라봤다. 그 일이 있었던 직후 며칠이 흘렀다.
그 공백 기간에 태형은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결국 하린은 홀로이 집으로 퇴원했다.
그가 없는 집으로.
“저만 돌아가게 되나요?”
“지사장님께서는 그저 집으로 돌아가서 최대한 요양하시라는 전언만 남기셨습니다.”
“아…… 그렇군요.”
“치료는 전처럼 주치의께서 집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일상은 평온했다.
아니, 정확히는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매일같이 오는 사용인이 음식과 관련된 집안일을 했고. 거기서 하린은 홀로이 말라가고 있었다.
태형과는 그 이후 아무것도 없었다.
연락이 오지도 않았고, 하린도 엄두가 나지 않아 연락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은연중, 그가 먼저 연락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기적이지만 그랬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오지도 않을 연락을 놓칠까 핸드폰 충전을 항상 백 프로씩 해 두고 있었다.
“아저씨 보고 싶다…….”
하린은 이 큰 집에서 고립되어 가고 있었다. 죽어가고 있었고 홀로이 말라가고 있었다.
종일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근처에 두고 TV만을 바라보며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하루에 몇 번씩 경호원이 와서 필요한 걸 묻고, 하린을 지켜 주었다.
종종 아무것도 안 먹는 것 같으면 하린에게 먹고 싶은 것을 물어보거나 뭐 필요 없는 것은 없냐고 물어봤다.
“아저씨가 혹시 그런 거 물어봐요?”
“저는 내용만 전달할 수 있을 뿐 대답은 못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아……그렇구나. 죄송해요.”
“아닙니다.”
“딱히 필요한 건 없고. 그냥 잘 먹고 지낸다고 말해 주세요.”
그나마 그들이 태형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으로 삼으며 살고 있었다.
나름 집에서도 원래 하려던 글도 쓰고. 현재에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노력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에게 더 이상 짐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더 먹고 열심히 건강을 챙기려고 했다.
습관적으로 틀어 놓은 TV에서 우기익에 관한 내용이 나왔다.
[현 우기익 서울 시장의 불법 부동산 투기 관련으로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데요. 광화문에서는 서울시장 탄핵 건으로 국민이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하린은 조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TV를 바라봤다.
태형이 저번에 우기익에 관한 여론이 뜨거워지고 있어 최대한 엮이지 말라고 했던 말이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을까.
[특히나 이번 ‘리엄 부동산 투자 사기’ 명단에 우기익 서울 시장도 포함되어 있다는 건을 입수하여 더욱 과열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더불어 이러한 민심을 우려를 해서인지, 우기익 서울 시장의 개인 세무 조사를 진행하기로 하여…….]
하린은 TV를 보며 생각했다.
과연 그는 어디까지 앞을 내다보고 그런 말을 하고. 지금껏 행동해 왔을까.
“내가 너 하나 살리고자 했던 짓들을 알면, 너는 내게 이런 말 못 해.”
“성정이 유약한 너는, 작은 일에도 지금처럼 힘들어할 테니까. 이것이 내가 널 지키는 방법이었어.”
하린은 멍하니 사람들이 시위하는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하루에 넋 놓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는 과연 무엇을 포기했었을까.
* * *
해가 쨍쨍하게 떠 있다가 이내 저물었다.
하린은 밤이 싫었다.
밤에는 우울감을 정돈할 수 없다. 감정 통제가 정말로 하기 힘들 때면 하린은 화장실에서 물을 틀어 놓고 울기를 반복했었다.
한 번은 태형이 생각나서.
또 다른 한 번은 배 속에 본 적도 없는 아이에게 미안해서.
또 한 번은 이유는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누가 왜 물을 틀어 놓고 우냐고 물어본다면 사용인 중 누가 어떻게 해서 들을지 몰라서였다.
여기 있는 인물들 모두다, 태형의 다른 눈이었으니까.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건강해 보이고 싶은 발악 아닌 발악이었다.
오늘도 역시 비슷했다.
어두운 화장실, 물소리만 가득한 지금 하린은 이유 없이 울었다.
그날 아저씨에게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더라면, 이런 후회가 남아 있었다.
그날 그렇게 그를 보내지 않았다면, 지금 그와 웃으면서 보고 있었을까?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유약해.
작은 일에도 힘들어하고, 결국은 태형을 찾는다. 그에게서 안정을 찾고, 그의 온실로 기어들어 간다.
그런 주제에 그가 자신을 온실에 가둬 놓는다고 화를 내고 그에게 상처를 냈다.
밖은 무서웠다.
“무서워…….”
머리를 손으로 감싸 안고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누가 때리는 것도 아닌데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띵-동.
걸어 잠근 집안, 갑자기 들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하린은 몸을 떨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시간에 초인종을 누를 사람은 없었다.
누구지.
태형이라면 알아서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고. 다른 사용인은 알아서 들어오지만, 사실 이 시간에 올 사람은 없었다.
띵-동.
“뭐, 뭐야…….”
홀로 있는 집 안, 무서움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린은 물을 걸어 잠그고, 현관으로 향해 걸어갔다.
설마 우기익은 아니겠지.
인터폰 화면을 확인해 보니 남성의 뒤통수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하린의 경호를 맞고 있는 남성의 모습이었다.
이 시간에도 있나 보다.
아마도, 밤에 초인종을 누르는 외부인을 보고 밖으로 나온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인터폰을 자세히 보니 초인종을 누른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아주 흐릿하게 보였다.
대신 “저, 동생이라고요!”라고 소리치는 우진화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우진화?”
상대를 알아보고 하린은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인터폰의 흐릿한 화면, 하린은 나가면서 자기 눈을 의심했다.
의아해하며 아무거나 구겨 신고 둘이 있는 밖으로 나왔다.
난감한 경호원의 얼굴이 보이고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만…….”
그리고 하린의 시선이 우진화에게 돌아갔을 때 하린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화야!”
심각하게 맞아,
“언니…… 나 좀 살려 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우진화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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