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지인분이세요.”
조 대표를 본 하린이 경호원에게 말하자 조 대표는 가까스로 둘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린은 조 대표를 병실 안으로 불렀다.
“제가 병원에 있는 건 어떻게 아시고.”
“이런 거 알아내는 것쯤 어렵지 않습니다.”
조 대표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들어왔다.
생각해 보면 무서운 말을 잘도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렇지만 오랜만에 보는 조 대표의 얼굴만큼은 좋았기에 하린도 그를 웃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와 주셔서 감사해요.”
하린은 옆에 앉는 그를 보며 물었다.
“요즘은 뭐 하고 지내셨어요?”
많은 일이 있었던 직후, 이래저래 경황이 없었던 지라 종종 문자는 주고받았지만 큰 교류는 없었다.
“음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도 하린 양의 모습을 보고 홀로서기를 조금은 시작해 봤습니다.”
“홀로서기요?”
“잇따른 실패를 여러 번 경험하고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겁이 생깁니다. 그전에는 조금 두려웠거든요.”
“그게 왜 저를 보고…….”
하린은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그를 봤다. 문득 그래도 병문안 온 손님인데 마실 것도 주지 않은 것 같아, 옆에 있던 병 음료 하나를 집어 조 대표에게 주었다.
“어찌 되었든 하린 양은 뭔가 도전을 한 것 같아서.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에는 난 그것도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
“조 대표님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 홀로서기라고 하면 이해가 잘 안 되어요.”
“음…….”
조 대표는 하린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였다. 그의 손이 움직여 병 음료 뚜껑을 따고 있었다.
“하린 양이 우 대표의 눈을 피하며 살길을 도모했듯이, 나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회사도 만들고 다 만들고 난 이후인데도 무언가 행동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더라고.”
땅, 명쾌한 소리와 함께 음료가 열렸다.
“음 이를테면 싸움이 나는 것을 피하려 한달까.”
“아…….”
그의 말이 다 이해가 된 것은 아니지만 무슨 말인지 대략은 알아들었다.
자신만 해도 우기익이 이상한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지만 굳이 그것을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또 분란을 만드는 게 싫었으니까. 내가 지금 한마디 거들면 어떤 화살이 날아올지 몰랐으니.
그가 말한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그래서 어떤 홀로서기를 시작하셨어요?”
“회사 운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냥 밝혔습니다. 생각보다 밝히고 나니까 시원하더군요. 그리고 결혼 안 할 겁니다.”
“정말요?”
“전처럼 이상한 추문을 일부러 만들지도 않을 겁니다. 사실 그거 다 회피하고 숨으려고 만들어 낸 거라.”
하린은 그를 보며 웃었다.
처음 그를 보았을 때와 두 번째 그를 보았을 때가 생각났다.
권의 적이고 여성 편력이 심한 척 행동하지만, 묘하게 금욕적인 분위기를 보이던 사람.
탈도 있었고, 많은 일이 있었으나 하린에게 조 대표는 귀인이었다. 태형과는 조금 다른 귀인.
“그건 그렇고, 몸은 조금 어때요?”
“나쁘지 않아요. 입원할 정도는 아닌데…….”
“몸조리해야죠.”
하린이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하니 조 대표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초기였어도, 몸에 무리가 많이 갈 거라 하던데.”
……초기?
하린은 조 대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바로 대답하지 못한 사이에 조 대표가 뒤이어 말을 이었다.
“우 대표도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친딸이 아니라고 하나 생명 무서운 줄 모르고.”
“조 대표님?”
초기, 생명, 우 대표.
세 가지의 단어가 조합되지 않았다.
자신은 그저, 우기익에게 맞아서 입원한 건데 조 대표는 지금 무슨 말을,
“어떻게 임신한 딸을 그렇게…….”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임신이요……?”
하린이 조 대표에게 되묻자, 조 대표는 오히려 몰랐냐는 얼굴로 놀라 자기 입에 손을 올렸다.
“몰랐……습니까?”
* * *
“나는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하린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아귀가 맞아 들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왜, 배가 아팠는지.
왜, 깨어나서도 묘하게 정적이 흐르는 부담스러운 분위기가 지속이 되었는지.
왜…….
정신 차려. 아저씨한테서 직접 들을 때까지는 믿지 말자.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손을 움찔거렸다.
“그래야 해. 그래야…….”
그러나 그를 완전히 믿을 수 있을까. 태형은 종종 하린의 안전을 핑계로 여러 가지를 비밀로 해 왔다.
우기익의 선거, 이번 세무 조사 등등.
분명 자신이 알지 못한 것들도 있을 터.
그녀가 듣고 조금이라도 힘들어할 것 같다는 생각이 판단이 들면 그는 그렇게 행동해 왔다.
하린의 양 귀를 막아 버리고, 두 눈을 가려 버렸다.
그래도 좋았다.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하며 자위했고. 이것이 그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만 유산을 숨기는 건…….”
하린은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
이 험난한 곳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거로 그와의 관계가 깨지는 게 죽도로 싫었다.
“다른 말 듣지 마. 아닐 거야. 설마 내가 임신이라니.”
“조 대표님이 잘못 알았을 거야.”
조 대표가 떠난 후, 하린은 한참을 자신을 다독였다. 이상한 생각을 하는 자신을 말이다.
믿고 싶지 않았다.
태형을 믿고 싶었다.
“……최근에 생리했던가.”
아이를 가질 거라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태형과 관계를 하고, 또 하면서도 말이다.
“모르겠어.”
가슴이 답답하여 저도 모르게 심장을 쳤다.
우기익에게서 맞고, 매일같이 시달리는지라 제대로 생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하면 하는 거고.
하지 않으면 안 하는 거고.
그 이상 이하도 생각해 본 적 없었고 중요하게 여긴 적도 없었다. 하린은 핸드폰 달력을 켜고 날짜를 확인했다. 그나마 비교적 태형의 집에 오고 나서 꽤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안정적으로 생리를 했었다.
그리고 최근 날짜. 하린은 대략 유추하며 날짜를 확인했다.
“안 했어…….”
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하나만을 가리키는 건지.
깊고, 어둡고, 외로운 곳.
하린은 수렁에 빠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가는지도 모르는 사이, 하린의 상태를 확인해야 하는 시간인지 아까 왔었던 간호사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오우, 밖에 경호원분들이 있으시네요.”
“아, 네…….”
“왜 이렇게 시무룩해 보여요?”
“아니에요.”
다가온 간호사는 아까와 같이 하린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혈압과 심박 수와 체온 등. 확인하는 간호사를 하린은 멍하니 바라봤다.
뭐라도 물어볼까. 아니, 하지 마. 괜한 오해가 생기면 어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어디 몸이 안 좋거나 한 곳은 있나요?”
“……배랑 허리가 아파요.”
안 좋은 곳이 있냐고 물어보는 말에 저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물론 거짓말은 없었다.
정말 아팠으니까.
“이상하게 뼈가 시리고. 몸이 계속 지쳐 있는 것 같아요.”
다만 평소라면 말하지 않았을 거다. 태형이 걱정하는 게 싫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이런 말을 했을 때 주변인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땀도 계속 나고. 생리통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생리도 안 하고요. 뭔가 관련이 있을까요?”
“……의사 선생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간호사는 분명 무언가를 더 알 것이다.
“제 아이는 무사한가요?”
하린은 간호사의 표정을 살폈다.
“네-?”
화들짝 놀라는 표정. 순간적으로 관리되지 않는 표정. 하린은 그 얼굴을 보며 급속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설마.
“아실 줄 알았는데…….”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아저씨한테는 비밀이었거든요. 서프라이즈하려고 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려서, 내심 못 여쭤보고 있었어요.”
하린은 간호사를 보며 불안한 감정이 들어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간호사의 표정이 이상했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는 자신 또한 표정 관리가 안 되었다.
“아 그게…….”
제발, 아무것도 모른다고 해 줘.
아이 따위는 없었다고, 무슨 말이냐고 해 줘.
하린은 간호사를 보며 속으로 빌었다.
“강 지사장님이 모르는 척해 달라고 해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아.
외면했던 진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이 이상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뒷말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아이는…….”
그리고 후회했다. 이런 거 물어보지 말걸.
하린은 자신을 탓했고. 들리는 귀를 막아 버리고 싶었다.
“……아이를 잃으셨어요.”
“그, 제, 제가…….”
세상에는 모르는 게 약인 경우도 있다.
제가 정말로 임신했었다.
그리고 유산했다.
그것도 우기익에게 맞아서.
“유산을 했다고요?”
어떡하지? 손이 달달 떨리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간호사는 하린의 손을 붙잡으며 안정을 취하게 했으나 소용없었다.
“내 몸인데.”
하린은 순간적으로 블랙아웃이 온 것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나만…… 그걸 몰, 랐던 거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하린의 눈앞을 덮쳤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 본 전자책은 <툰플러스>가 저작권자와 계약에 따라 발행한 것으로, 무단복제와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이를 위반할 경우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