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아, 무래도 MRI나 CT에서도 딱히 이상 증상은 없었습니다만.”
이사의 대답은 이상적이었다.
“혹, 단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아, 그런가요.”
“이상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해 주세요.”
“네.”
그다지 도움은 안 되지만, 하린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입원일을 조정하자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입원할 건 아닌데…….
하린은 못마땅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의사는 마지막으로 할 말을 마치고 돌아갔다. 하린은 그가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보았다.
“잠깐만.”
전화가 와 태형은 잠시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다 떠나간 병실.
하린만이 혼자 남았다. 적막감 사이 바쁜 사람들. 이 정신없는 공간 속에서 제일 시간 흐르지 않았다.
세상에서 제일 할 일 없는 자신.
조금은 가셨던, 무력함이 돌았다.
전화를 다 받고 난 태형은 병실로 돌아왔다.
“음식 잘 챙겨 먹고. 혹시라도 이상한 일 있으면 연락하고.”
“가셔야 해요……?”
“안 갔으면 하니.”
기분 좋게 공기를 울리는 낮은 저음.
하린은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하린의 모습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태형은 작게 웃으며,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그가 옆에 있으면 좋겠으나, 그의 걸림돌이 되는 건 싫었으니까.
“이쁘네.”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를 만질 때면 좋았다.
“밖에 양복 있는 사람들이 있어도 놀라지 마.”
“누군데요?”
“경호원.”
“경호……원이요?”
하린이 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토끼처럼 주변을 살피며 물어보자, 태형이 조금은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저번에 그런 일이 다시 안 생긴다는 보장 없으니까.”
“아…… 네.”
“진작에 이렇게 해야 했는데. 미안해.”
“아니에요.”
“이 이상 자리를 더 못 비워서. 이따가 퇴근할 때 전화할게.”
태형은 순간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떠나기 싫은 발걸음을 옮길 준비를 했다.
“네.”
하린은 앉아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하린의 이마에 짧게 키스했다. 순간적으로 그가 꽤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기에 하린은 단발적으로 미소를 보였다.
그 행동에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가 걱정하는 게 싫다.
* * *
그가 떠나고, 하린은 멍하니 병실에 앉아 있다가 이내 잠들기를 반복했다.
무료한 시간을 서서히 죽이던 시간.
1인 실에 VIP실이니 사람이 드나들 수도, 손목에 꽂힌 링거 바늘 때문에 밖을 돌아다니는 것도 없었다.
결국 앞에 보이는 TV를 틀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저번에는 TV도 없었는데, 하린은 텅 빈 동공을 정처 없이 움직이며 생각했다.
TV를 틀어 보니 아까 태형이 말한 주제가 방송의 화젯거리인 주제였다.
[“저는 억울합니다. 이건 정치적인 음모이고! 저는 정말 저의 모든 것을 걸고 결백합니다. 제가 왜 그런 사기 부동산에 돈을 투자합니까! 이것은 저를 음해하려는 세력들의 작당입니다!”]
우기익이 영상에서 열심히 자신의 무고를 밝히는 모습이 TV를 통해 전파되었다.
하린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누가 봐도 거짓말의 모습.
방송은 우기익이 억울해하며 회견을 하는 장면에서 어느 한 패널이 이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그 방송인은 우기익의 재산 상태를 유추해 냈다. 원래 살던 본가 집을 제외하고,
제주도에 있던 땅과 경기도에 있는 몇백 평의 땅, 주식 등 투자 사기에 들어간 우기익의 재산이 일부 밝혀졌다.
그중에서는 개인 차용으로 빌린 돈도 다수 있다고 했다.
[“그중에 최근 NP의 한국 지사, 강태형 지사장에게도 상당한 돈을 차용했다는 말이 돕니다만.”
“정치인도 아니고, 강태형 지사장이요?”
“우기익 서울 시장의 첫째 사위가 강태형 지사장이라고 하는데요.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럼 최근에 있던 NP 세무 조사는 어떻게 된 것일까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서울 지부인데 노동 감찰과 세무 조사를 받아서 무언의 압박이 아니냐는 말도 굉장히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세무 조사.
하린은 멍하니 듣고 있다가 망치로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렇죠. 처음에는 사위의 회사인 NP에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돌긴 하였으나…… 오히려 전혀 다른 행보에 다들 궁금해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최근 우 시장의 자금난 때문에 둘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개인 차용으로 빌린 사람 중 강태형 지사장도 포함일 수 있겠군요.”
“일부의 시각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 빌린 돈을 갚는 과정에서 압박을 주기 위해 우 시장이 일부러 세무 조사도 한 것이 아니냐는…….”]
방송에서 하는 말은 결국 그거였다.
우기익이 당한 투자 사기에는 많은 돈이 들어갔다. 여러 자산과 부동산 등이 들어갔는데, 그 과정에서 개인 채무도 들어갔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태형의 돈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 돈을 갚는 과정에서 태형과 우기익은 사이가 틀어졌고.
우기익이 빌린 돈을 갚지 않기 위해 태형을 협박. 그 협박의 도구로 세무 조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무 조사 전에는 노동부 감사가 있었는데. 생긴 지 얼마 안 된 법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 했다.
하린은 그 내용까지 다 살피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은 더 심했을지 몰랐다.
“아저씨는 세무 조사 받는다고도 말도 안 하고…….”
태형이 말하지 않을 성격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알고 있었다.
책임감이 크고 그는 평소 하린이 별것 아닌 일에 관여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더불어 우기익과 관여되는 일이니 더욱 그랬을지도. 아까부터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시금 끓어올랐다.
나는 아저씨의 걸림돌이 맞나 보다.
“쓸모없는 짐 덩어리.”
그의 개인뿐만 아니라, 회사에도 피해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하린에게 자괴감을 들었다.
마음이 힘들거나 아프다고 감히 말할 수도 없었다. 이 어마어마한 일들은 현실로 다가오지도 않았고. 더불어 하린에게는 이것을 해결할 능력도 없었다.
그러나 머리 한쪽 편에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 모든 일이 진정 나 때문이라고?
어찌 보면 잘난 거 하나 없는 자신 때문이라는 것이 말도 안 되는 말일지 몰랐다.
하린은 결국 보던 TV를 꺼 버렸다.
더 보고 싶지 않았다.
나가고 싶어서 VIP실 룸을 괜히 어슬렁어슬렁 다니다가 슬쩍 문을 열고 머리만 빼꼼 밖을 바라봤다. 룸 앞에는 태형이 말한 남자 한 명과 여성 한 명이 서 있었다.
검정 양복을 입은 사내.
엄청나게 큰 거구의 짧게 밀어 버린 머리. 선글라스까지 누가 보아도 경호원이라고 쓰여 있는 얼굴이었다.
다른 여성은 남성과 비슷한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바지. 긴 머리카락은 묶어서 깔끔하게 올린 편이었다.
“불편하신 것 있으십니까?”
하린이 문을 빼꼼 열고 밖을 살피자, 경호원 중 한 여성이 먼저 물어보았다.
“아뇨…… 그건 아니고. 혹시 밖을 조금 걸을 수 있을까요?”
“허락을 받고 나가셔야 합니다.”
단호한 음성에 하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으음, 밖으로 나가려면 허락을 받아야 하는 신세구나.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구분되지는 않았다.
* * *
결국 하린은 허락받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말하고 나갈 수 있는데 앞에 있는 경호원 중 한 명은 무조건 데리고 나가야 갈 수 있다고 했다.
에휴.
팔꿈치 안쪽에 맞고 있는 두꺼운 바늘도 거슬린 것도 있었지만, 괜히 자신의 산책에 다른 사람을 끌고 다녀야 하는 사실이 조금은 껄끄러웠다.
대신 원래 집에 있던 노트북이 필요하다고만 말했다. 그냥 남는 시간에, 글이라도 써 보고자 했다.
하린이 부탁하니, 그것은 여자 경호원이 자신이 들고 오겠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노트북을 들고 왔다.
“벌써…….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하린은 받은 노트북으로 침대에 앉아 원래 쓰고 있던 소설 원고를 썼다. 생각보다 머리가 복잡할 때는 생각보다 글을 쓰는 행위가 도움이 되었다.
최소 글을 쓸 때는 다른 곳에 집중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리고 더군다나 자존감이 떨어진 하린에게 ‘쓸모’를 주는 건 생각보다 더 값진 일이었다.
자신이 무언가에 도움이 될 수 있고. 혹은 최소 내 몸 하나는 지킬 무언가.
하린에게 그것이 소설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것에 몰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설을 쓰던 중, 밖이 시끄러워서 시선을 돌렸다. 순간적으로 시선이 바뀌어 시야가 환기됨을 느꼈다.
밖에서 사람들의 언쟁이 들렸다. 자세히 들어 보니 하린의 병문안을 오는 사람 같았는데.
“내 병문안?”
하린에게는 친구가 없었기에 올 사람도 없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하린은 자리에서 벗어나 걸어갔다.
“마침 잘 왔어요! 이 사람들이 나를 안으로 안 들여보내 줘!”
생각하지 못한 주인공,
조 대표가 밖에 경호원들에게 막혀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었다.
“조 대표님……?”
지은이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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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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