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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51화 (51/75)

#51화

눈이 떠졌다.

평소보다 무거운 몸, 흰 천장, 알코올 냄새.

하린은 힘없이 두 눈을 깜빡거렸다. 상황이 판단되지 않았다.

뭐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생각보다 몸이 좋지 않은지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분명 산책을 다녀와서 우기익을 보았고, 험한 일을 당했다.

……아 기절이라도 한 건가.

하린이 생각을 정리하는데,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간호사였다.

“마침 일어나셨구나.”

“저 오래 누워 있었나요?”

말하는 음성 끝이 쩍쩍 갈라졌다. 잠긴 음성 탓에 들리는 목소리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주변은 익숙한 공간이었다. 전에 입원했었던 그 VIP 병실.

그리고 지금 들어온 간호사도 눈에 매우 익은 사람이었다.

“한, 하루 정도요?”

“꽤 오래 누워 있었네요…….”

관절 마디마디가 시리고, 아픔이 밀려온다. 하린은 오한에 몸을 떨었다. 하린이 떨자 간호사는 다가와 하린의 몸을 체크했다.

하린의 체온과 맞고 있는 수액을 확인하고 조정한다.

그녀의 행동을 하나하나 멍하니 지켜봤다. 현실 감각이 없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몸이 이렇게 약해서 어쩌나.”

걱정스러운 간호사의 음성. 조금은 나이 지긋한 중년의 간호사였는데, 하린을 보면 꼭 딸 같다고 말하던 분이었다.

“그러게요. 다시 입원할 줄 몰랐는데…….”

감성적인 대답보단 머리에서 나오는 대답이었다. 그것보다 그것 잠깐 맞았다고 몸이 이렇게 안 좋고, 입원까지 했다니.

그사이에 몸이 약해졌나.

아니면 유약해진 건가.

온갖 생각을 하며 하린은 씁쓸하게 웃었다.

우기익, 대체 그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도 붉은 눈으로 베갯머리송사라도 하라며, 닦달하고 훈육을 핑계로 때리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에요. 몸도 크게 탈도 안 나고. 물론 아이는…….”

간호사의 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하린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잠깐의 공백.

원래도 있던 정적은 하린의 근처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대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거슬리게 들린다.

“아이?”

“아니에요…… 늙어서 그런가, 요즘 말이 헛 나오네. 일어났으니까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네.”

하린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대답했다. 자신을 걱정해 주는 간호사를 보며 억지로 미소를 보였다.

이윽고 간호사가 나가자,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표정이 풀렸다. 흡사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돌덩어리가 된 것만 같은 느낌.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무력해…….

몸은 무겁고 피곤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심장에 뾰족한 것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가웠다.

왜 따가운 것인지도 몰랐다.

그저 힘든데 왜 힘든지 모르는 것처럼 그냥 힘들었다.

“박복한 년.”

자신은 왜 이리 힘도 없고. 박복할까. 괜히 이런 생각만 들었다.

자신은 태형의 앞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심지어 멍청하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바보같이 당할 줄밖에 모른다.

무력감이 온몸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의욕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었는데도, 화가 나지도.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았다.

전에는 두렵거나 억울하거나 여러 감정이 들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힘들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나간 간호사와 의사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

문을 연 것은 태형이었다.

“아저씨.”

지금껏 쩍쩍 갈라져 있던 사막에 물이 떨어진 것처럼, 순간적으로 하린의 얼굴에 감정이 돋았다.

온통 멍하고 무채색으로 덮여 있는 세상 속에서 태형 혼자만 파랑이었다.

바다같이 그녀를 다 품어 주고 안정을 주는. 그런 존재였다.

태형은 가까이 다가와 하린의 뺨을 쓸어 주었다. 하린은 그의 품에 들어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아저씨 미안해요…….”

“뭐가.”

하린의 여린 등을 토닥여 주는 손. 진중한 목소리.

“그냥, 다요.”

“괜찮아. 다 괜찮아.”

전에 우진화가 그렇게 말했었다.

너는 도망가고 자신은 지옥에 빠져 버렸다고.

아니, 아니었다.

자신은 아직 지옥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한번 빠진 이는 돌아오기 힘들다. 그리고 그 지옥에 빠진 이는 다른 이의 발목을 잡아 이끌어 올라온다.

지독했다. 그토록 빠져나오기 위해 바둥거리고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미안해…… 내가 더 신경 써야 했는데.”

평생을 피해받는 약자.

남이 신경을 써 줘야 하는 존재.

눈에 눈물은 맺힐지언정, 흐르지는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태형 앞에서 울고 싶지 않을지 몰랐다.

“아니에요. 아저씨가 왜 미안해요. 그냥 제 문제인걸요…….”

자신이 잡고 있는 건 태형의 발목.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계속 우기익이랑 엮이는 것 같고. 굳이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일들이 계속 생각나고. 나는 짐만 되는 것 같아서…….”

그러나 이것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 험하고 험난한 곳에서 자신 혼자 덩그러니 남았을 때.

이제는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계속 붙잡고 있으면 같이 구렁텅이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미안했다. 이기적이라서.

“괜찮아. 괜찮아.”

그는 계속 말해 주었다.

괜찮다.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 같이 못 있어 줘서 미안하다.

그가 그런 말을 내뱉는 상황이 죄스러웠지만, 좋았다. 그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엄청난 특혜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러나 감정과 대비하도록 머리는 복잡했다.

태형은 우기익과 무슨 대화를 나누고, 무슨 상황이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그건 하린이 깨어나기 전, 이미 다 확인했다는 말.

그는 다 알고 있다.

“몸은 어때.”

“괜찮아요.”

“진짠데…….”

태형이 못 미더운 표정으로 하린을 바라보자 하린은 시선을 돌리며 말대꾸했다.

“그런데 우기익 요즘 상황이 진짜 안 좋아요?”

“그건 왜.”

“저번에 우기익이 아저씨한테 돈을 빌려 달라고 하라고 엄청 뭐라 그러고 했는데. 그런 얼굴은 처음 봤어요. 뭐랄까 압박당하는 얼굴이랄까.”

알고 있는데 하린이 상처받을까 봐 차마 물어보지 않고 있음을.

태형은 세상사에 관심이 전혀 없는 현자의 얼굴을 하면서 대답했다.

“우기익, 사기를 당했어.”

“네?”

“가지고 있던 자산이랑 빌린 돈까지 다 꼬라박아서 날렸다더군.”

그러다가도 종종 표정이 드러나긴 했는데. 지금 표정은, 비웃는 표정이었다.

“물론 우기익은 오보라고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지만.”

“저도 신고…… 할까요?”

“아니.”

하린이 자신이 받은 폭력을 제대로 신고를 할까 고민하는 말을 하니 단박에 대답이 나왔다.

“요즘 우기익에 대해서 이미도 시끄러운데 굳이 그러지 마.”

미간에 주름이 졌다.

“기자들의 관심이 너무 높아져 있어. 폭행으로 신고하면 그 이전부터 있던 일들까지 밝혀지겠지만. 그 과정에서 너도 다쳐.”

진중한 눈빛이 하린에게 직접적으로 들어왔다. 하린은 그의 눈을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네가 다치지 않았으면 해.”

둘이 대화하는 중에 의사가 들어왔다.

태형은 하린을 도닥거려 주다가 옆으로 잠시 피해 줬다.

의사는 다가오며 뒤에 있는 태형을 힐끔 바라봤다. 그는 뒤에서 의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작게 움직이며 인사했다.

하린은 그 모습을 순간적으로 확인하면서도 이상한 점을 못 느꼈다. 그저 어른들의 눈치를 살필 뿐.

의사는 하린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어디 몸이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죠?”

“네……. 혹시 입원은 얼마나 해야 할까요?”

“일단 며칠간은 몸 상태를 봐야 할 것 같고. 한 일주일 정도는 입원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나요?”

하린은 의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주일이나 입원할 줄은 몰랐다. 저번처럼 심하게 맞은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우기익에게 맞은 적은 많았다.

“그 정도로 아프지는 않아요. 저 전에도 이 정도 일은…….”

“우하린.”

태형의 엄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와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에게는 종종 이런 모습이 나왔다.

과보호하고 싶어 하는 모습.

자신은 애가 아니라고, 물가에 내놓은 아이 취급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의 보호도 좋고 관심도 좋았지만, 그저 태형이 지켜야 할 무언가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일주일씩…… 입원하는 건 싫은데.”

물론, 그가 걱정하는 타이밍에 꼭 이렇게 다치고 아프니 할 말은 없었다.

“그런데 저 혹시 타박상이 아니라 다른 곳도 아픈 건가요?”

“……어디 아프신 곳이 있으신가요?”

“몸이 아픈 건 괜찮긴 한데.”

살짝 말을 정리하기 위해 숨을 골랐다. 명확한 기억이 아닌지라 하린은 괜히 뒷머리를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정신을 잃기 전에 배가 엄청 아팠던 것 같아서요.”

하린의 말이 끝날 때쯤, 그녀 혼자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눈을 마주쳤다.

“아…….”

단발적으로 대답이 사라졌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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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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