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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50화 (50/75)

#50화

어제의 행복한 주말은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하린은 아침에 태형이 나가는 것을 마중 나가면서도 중얼중얼했다.

“아저씨가 백수였으면 좋겠어요.”

“내가 백수면, 이런 집에서 호의호식 못할 텐데.”

“저 아저씨 돈 보고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매일같이 라면만 먹고 살아도 좋은데.”

“내가 싫어.”

“그럼 아저씨 따라서 나갈래요.”

저번에 태형이 운전기사를 붙여 준다고 했던 건 하린이 다시 말려서 결국 무로 돌아갔다.

그도 그럴 것이 그건 너무 부끄러운걸.

“안 돼.”

“왜요오…… 심심하단 말이에요.”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최근 태형은 최근 하린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렸는데.

면허를 따고 싶다고 해도, 안 된다.

나가고 싶다고 해도 안 된다.

치…….

“집에서 글 쓰고 있으면 되지. 하린이 심심할까 봐 주말에도 내내 같이 있었잖아, 착하지?”

“아저씨 회사 근처 카페에 사람 많은 곳에 있을게요. 설마 우기익이 그런 곳까지 와서 해코지할 거는 아닐 테니까…….”

태형이 말하는 논리는 그랬다.

최근 우기익의 상황이 더 열악해졌는데, 태형이 돈도 빌려주지 않고, 오히려 차용증을 쓴 돈을 달라고 하니 사이가 많이 틀어졌다.

“우하린.”

“……치.”

물론 태형의 말을 알아들었고, 무슨 말인지도 알았으나 이제는 답답함이 먼저였다.

몇 주를 밖 생활을 최대한 절제하고 이 집안에서만 생활했는지 모른다.

그나마 최근에 밖으로 나갔던 일은 우진화를 만났던 그때가 제일 최근이었다. 쇠창살 없는 감옥도 아니고.

“혼나.”

태형의 단호한 말에 하린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그럼 대신, 집 근처를 걷는 것 정도는 괜찮죠? 요즘 소화도 잘 안 되고 속도 안 좋단 말이에요.”

“……알았어.”

“대신 혹시나 무슨 일 생기면 꼭 연락하고.”

“네!”

“나 진짜 출근할게.”

“다녀오세요!”

인사를 하고 돌아와 하린은 잠깐 누워 있었다. 요즘 들어 몸이 무겁고 한 번씩 졸린 것이 몸이 이상했다.

더군다나 집에만 있으면 몸이 까라지는 것이 태형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요즘 먹는 것도 통 별로였다.

헛구역질을 할 때도 있었고.

툭하면 잠이 들고.

다만 이런 말을 하면 태형이 너무 신경 쓸 게 뻔했기에 하린은 차마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속으로 앓기만 했다.

좀 쉬면 나아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요즘 태형은 무슨 일인지 평소보다 더 바빠 보였으니까. 하린과 있을 때도 자주 전화 받으러 나가고 하는 것을 보면…….

아주 잠깐 누워 있었는데. 그사이에 잠이 들었나 보다. 잠에서 깬 하린은 잠시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밖으로 향했다.

사실 주변에 집이랄 건 그다지 없었는데, 조금 밖으로 나가면 공원이 있었다.

하린은 집 밖으로 나왔다.

흰색 원피스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쳤는데 날씨는 아직 춥긴 했다.

“집에 다시 들어가서 옷을 입고 올까.”

생각하던 하린은 고민하다가 그냥 걷기로 했다. 그래도 한참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조금은 따듯했다.

겨울이 지나고 일이 정리되면 아저씨한테 놀러 가자고 해야지.

하린은 공원까지 걸어갔다.

이윽고 20분쯤 걸었을까, 공원에 도착했다.

“와 좋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며 내뱉었다. 사실 계절이 가는 줄도 몰랐는데, 낮에는 따뜻하고 햇볕도 좋았다.

하린은 요즘 인생의 최대의 삶을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렇게 좋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지금의 삶은 하린이 막연하게 꿈꿔 오던 삶이었다.

두려움에 떨지 않고, 겁을 먹지 않고.

이상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을 부대끼며 사는 삶.

복작거리며 살고, 웃고 울고.

“아저씨랑 오래오래 같이 가고 싶다…….”

하린은 태형과 오래오래 같이 가고 싶었다. 아이도 낳고 싶고.

가능하면 많이 낳고 싶었다.

그를 닮은 남자아이. 그를 닮은 여자아이.

분명 그를 닮은 작은 남자아이는 정말 귀여울 것이다. 하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 머리가 날렸다.

요즘만 같아라.

하린이 요즘 신에게 비는 내용이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

하린은 태형에게 문자를 남겼다. 괜히 걱정할까 싶어서였다.

「잠깐 산책하러 갔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요! 근처 공원 너무 좋아요. 다음에 아저씨랑도 같이 오고 싶어요♪(´▽`)」

「그래, 날씨 풀리면 밤에 산책하자. 집에 들어가면 전화해.」

우기익이라.

서울 시장 되고 한창 뉴스에 나오다가 요즘은 나오지 않았기에, 하린은 머릿속에서 잊고 살았다.

아니, 정확히는 잊으려고 노력했다.

평생을 견디며 살았는데 잊었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그냥 의도적으로 잘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최근 태형은 신경 쓰는 것을 보아하니 뭔가 일이 있긴 한가 보다 싶었다.

태형의 등 뒤에 숨어 있다 보니 하린은 당연히 제대로 된 위험성을 느낄 수 없었다.

사실 최근에도 전화가 왔던 적이 있었으나 하린은 그의 연락을 족족 피해 왔다.

받고 싶지 않았기에.

태형이 걱정하는 건 또 싫었으니까.

한 시간 정도 밖에 있다가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씩 산책하다가 앉아 있기를 반복했다.

아까는 점심시간 때라 사람이 조금 지나다니더니 그마저 시간이 지나니 길에 사람이 없었다.

“점심으로 뭐 먹지.”

입맛이 없던 탓에 하린은 고민하며, 현관으로 들어가는 손을 올리는데.

“하린아.”

뒤에서 아주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순간, 소름이 쭈뼛 섰다.

하린은 몸이 굳어 순간 옴짝달싹도 못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설마, 아니겠지…….

중년의 남성의 거친 음성.

듣기만 해도 누군지 알 것 같은 난폭한 심성이 느껴지는 목소리.

아주 익숙한 음성이, 익숙하지 않은 단어로 부른다. 우하린도 아니고, ‘하린아.’라니.

하린은 순간 현실을 부정하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오른 소름이 아직까지 몸에서 빠지지 않았다.

“여, 여기엔…… 왜 오, 셨어요.”

“네년이, 아니 네가 연락도 안 받고 하니 내가 직접 왔단다.”

하린은 두려움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뒷걸음질 치던 하린의 걸음을 보고 우기익이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도망가지 말고.”

“오, 오지 마세요.”

“그냥 이야기 좀 하자는 거야. 집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여, 기서 하세요.”

경계하는 하린의 모습에 우기익은 초반의 인자함을 내다 버렸다.

평생을 때리고, 짓밟던 사람에게 조금의 비위를 맞춰 보려 했던 것이 미친 짓이었다.

우기익에게 하린은 지나가던 개만도 못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별것 없어, 네 남편한테 말 좀 잘해 봐. 돈도 빌려 달라고 하고.”

그래, 우기익은 항상 이랬다.

“그, 흔히 말하는 베갯머리송사지. 네년이 잘하는 거잖아.”

자기가 생각하고 싶은 데로 생각하고, 자신을 그렇게 깎아내리며 나를 값싸게 팔아 버렸다.

덜떨어진 년으로.

“제 결혼으로 이미 많이 받으셨잖아요.”

“그건 네년이 갑자기 결혼해서잖아! 원래 그건 받을 돈이었다고.”

“아니지, 이런 이야기 하지 말고. 알아들었니? 강태형 그 자식한테 가서 말해. 나한테 돈 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

그래, 항상 이랬단 말이다.

두려움과 분노가 공존하는 감정. 그러나 두려움이 제일 컸다.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를 모욕하고,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모욕한다.

“……저는 할 말 없어요.”

하린은 고개를 떨구고, 조금씩 뒤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리고 저한테 더 이상 이런 일로 찾……아오지 마세요. 저는 할 말도 없고. 이용당하고 싶지도 않아요.”

나름의 용기였다.

엮이기 싫다.

자신 때문에 태형이 계속 우기익에게 돈을 줘야만 했다는 것도 싫었고.

더군다나 돈을 끊으니 자신에게 찾아오는 현실이 싫었다.

이번이 무서워 피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에도 또 이럴 테니까.

지금 조금 맞더라도, 저번처럼 맞을 것도 아니고. 우기익도 이번에 분풀이하면…….

못 찾아올 것이다.

왜 생각이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고, 건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우하린이라는 사람은 우기익 앞에서는 10살 꼬맹이와 같은 존재였다.

사고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과 대비 무서움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리는데 우기익 광인의 눈이 들어왔다.

“뭐? 이년이 오냐오냐하니까.”

광기.

“……악!”

“이년이, 남자한테 다리 잘 벌려 호강하는 주제에 감히, 나한테.”

학습된 폭력.

“이래라저래라…….”

오랜만에 잡힌 머리채, 솥뚜껑 같은 손으로 맞는 뺨. 매서운 바람과 더불어 따갑고 아팠다.

“네년이 안 처맞은 지 너무 오래되었지.”

짜 악, 짜 악. 사람이 없는 한적한 주택가.

하린은 뒤로 조금만 걸어 나가면 현관으로 갈 수 있었으나, 우기익에게 머리채를 잡혀있어 오도 가도 못했다.

걸걸한 목소리 위로 무기력한 폭력이 시작되었다. 결국 하린은 몸에 힘을 풀었다.

피하거나 힘을 주면 더 아팠기 때문이었다.

“오냐 오랜만에 아비로서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우기익의 팔이 허공에서 여러 차례 휘둘러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린이 쥐 죽은 듯 소리도 내지 않고, 잘못했다고 빌지도 않으니 우기익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다.

“네년을 그날같이…….”

“으윽…….”

“짐승보다 못한 년.”

생각보다 더한 분노였다.

하린은 무의식중에 살고자 우기익의 몸통을 밀치고 집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이 이상 맞으면 몸이 잘못될 것만 같았다. 어디서부터 기인한 불안함인지 모르겠으나, 하린은 도망가려 했다.

단박에 머리채가 잡히고 현관으로 도망가던 틈에, 몸이 옆 벽으로 날아갔다.

그 순간, 하린은 소리를 지르며 배를 부여잡았다.

“아……아, 아!”

분명 부딪힌 건 등이었고, 충격을 받은 건 복부가 아닌데.

왜 내장과 창자가 아니, 자궁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아픔이 드는 거지.

하린은 배에 손을 대며 몸을 둥글게 말고는 아픔에 소리를 질렀다. 자궁이 조여,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뭐, 뭐야.”

우기익은 당황했다.

당황해 조금 더 때리긴 했으나 배를 부여잡을 정도로 때리진 않았다.

……더군다나.

하린의 흰색 원피스 아래로 하체에 검붉은 피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으…… 아, 아파.”

우기익은 뒷걸음질 쳤다.

하혈.

“이게 뭐야…….”

유산이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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