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몇 주의 시간이 흐른 아침.
하린은 아주 오랜만에 태형이랑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하린은 소파에 반쯤 태형의 몸에 기대며 TV를 보고 있었다.
태형은 대부분 시간을 집에서 보내는 하린을 보고 짠하게 여겼는지 전에는 사 달라고 해도 사 주지 않던 TV를 사 주었다.
아마도 그 전에 두지 않은 건 정말이지 우기익 때문이었던 터.
하린은 그사이에 글도 꽤 쓰고. 태형과도 더욱 친해졌다.
하린은 그의 커다란 손을 들고 와 손깍지를 꼈다. 태형은 갑작스레 잡힌 손에 고개를 틀었다.
자신에게 오는 시선에 하린은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좋아서요.”
TV로는 드라마를 보거나 오락프로그램을 봤는데, 평소 TV를 좋아하지도 않았는데 태형과 보는 건 뭘 봐도 다 재미있었다.
“어, 다 끝났다.”
보고 있던 오락프로그램이 끝났다.
이제 와서 보니 하린은 TV를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때의 삶이 감흥이 없었던 거였다.
그도 그럴 것이 삶이 즐겁지 않은데, 무엇을 본다고 한들 즐겁지 않은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그러게.”
“근데 아저씨는 원래도 TV 잘 안 보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잘 안 봐.”
덤덤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린은 시선을 올리며 태형을 바라봤다. 그가 말할 때면 붙어 있는 몸을 통해 그의 진동이 느껴졌다.
“그럼 요즘은 저 때문에 같이 보는 거예요?”
“응.”
하린은 최대한 웃지 말아야지 생각을 했는데. 태형의 말을 들으니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근데 왜 이런 말을 하는데 건조하게 하는 거냐고……!
얼굴이 붉어져서,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이상한 표정을 보였다. 억울하게도 하린의 표정을 본 태형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왜 웃어요.”
“표정이 귀여워서.”
“진짜요?”
잘 표현하지 않는 태형에게 이 정도로 듣는 것은 희귀했다. 하린이 없는 꼬리까지 흔드는 것처럼 반응했다.
그때 TV에서는 광고가 끝나고 뉴스 같은 것이 틀어졌다.
-“부동산 투기 정치인으로 요즘 문제가 대두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유명 정치인들도 가담했다고 하여 국민의 원성이…….”
뉴스에서는 아나운서들이 각종 증거를 보여 주고 있었다. 미리 선점한 정보를 가지고 미리 투기했다는 내용들이었는데.
하린의 시선이 텔레비전에 향해 있으니, 태형이 하린의 고개를 틀어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이리 와.”
태형의 낮은 음성은 아무리 들어도 좋았다. 들을 때마다 몸에 전율이 이르는 것 같은 느낌.
하린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그의 몸에 올라갔다. 단숨에 하린의 관심이 텔레비전에서 태형으로 옮겨 갔다.
하린은 세상일에 무관심했다.
세상이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았을 듯, 그녀 또한 비슷했다.
지금의 행복, 태형이 더 먼저였다.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타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태형이 하린의 척추 선을 따라 천천히 어루만져준다. 그의 손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름이 돋았다.
몸이 저절로 움찔거렸다.
“이번에 대규모 부동산 투기 사건이 발생하였는데요. 이번 일은 재외 교포 ‘리엄’이라는 인물이 일을 주도하였다고 합니다. 피해액은 수백억 원 혹은 이상으로 되며 대부분 고위 관료가 피해당하여…….”
태형은 TV 소리가 듣고 싶지 않았는지 리모컨을 사용해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는 단번에 하린의 몸을 당겨 키스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키스. 그리고 관계를 했었다.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워졌는지 하린은 입술을 벌리며 그를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하린이 입술을 벌리자 자연스럽게 그의 혀가 들어왔다. 그의 것이 들어와 하린의 입천장을 핥고. 입술을 빨아댔다.
익숙하지 않은 하린이 숨 쉬는 것을 잘하지 못하면 태형이 입술을 떼며 잠시 호흡할 시간을 주었다.
“숨.”
“하아…….”
눈이 풀린다. 호흡을 내뱉으며 단발적으로 몸을 잘게 떨었다. 하린은 그의 목과 쇄골에 입술 자국을 남겼다.
그가 너무 좋았다.
“너무 좋아요. 너무, 너무…….”
한가지의 말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람처럼 하린은 계속해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말했다.
태형의 입술이 하린의 입술에서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입고 있던 잠옷 안으로 그의 손이 들어왔다. 따뜻한 손길이 하린의 몸을 휘젓고 다녔다.
“으응.”
강렬한 자극. 태형이 자기 몸을 만져 줄 때면 하린은 감각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았다.
눈앞이 하얗게 부서지는 듯하다 이내 붉게 물든다. 살결이 질척하게 엉겨 붙어서 야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입술, 깨물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
낮은 음성이 단호하게 경고했다.
태형의 매서운 눈길이 하린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관찰했다. 그는 핥던 가슴 부근을 이를 세워 깨물어 버렸다.
“아앗……!”
척추에서부터 오르는 강렬한 자극은 고통과 쾌감을 동반했다.
“잘못……했어요.”
그가 주는 감각은 항상 황홀하고, 강렬했다. 하린은 그의 아래에서는 백치가 되는 것 같았다.
태형은 입꼬리를 올렸다. 즐거운 장난감을 가진 아이처럼 천진했다.
하린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럼 혼나야겠지.”
짓궂게 웃는 태형의 얼굴을 보자 불안함이 감돌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하린의 제일 깊고 은밀한 곳 그 부근으로 그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닿기만 해도 저릿한 느낌.
하린이 어깨를 떨며 다리를 오므리려고 하자, 태형이 매섭게 하린의 허벅지를 때렸다.
“더 혼나고 싶어서 그러지.”
* * *
하린과 태형은 씻고 침대에 누웠다. 태형은 꽤 과격한 섹스를 하는 취향이었기에 하린은 그와 관계를 하고 나오면 기진맥진이었다.
더불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하린은 태형이 처음이었기에 이런 관계는 다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태형이 덜 마른 하린의 머리카락을 손수 말려줬다. 그의 손길이 기분이 좋은 듯 하린은 눈을 감았다.
나른하게 졸음이 다가왔다.
물기가 얼추 마르고 나니, 태형은 드라이기를 옆으로 치웠다. 하린의 머리를 말려 준 사람치고는 그의 머리는 아직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린은 그런 것 상관없이 그의 허리를 안으며 그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태형은 하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이 기분 좋다.
“어릴 적 기억은 남아 있니.”
이마에 묻은 머리카락을 떼어 주며 그는 물었다. 하린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박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번에 말했던 것처럼 어른들이 했던 말만 기억해요. 저는 엄마 아빠 얼굴도 기억 못 해요.”
같은 자리에서 부모는 즉사하고. 어린아이만 살아남았다.
각박한 현실을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기에 하린과 태형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이후의 삶은 뻔히 보였기에.
대신 태형은 다른 질문을 했다.
“부모님이 궁금하지는 않니.”
“궁금, 해야 할까요. 기억도 안 나는데 핏줄, 근본이라는 게 궁금하기도 하다가도 잘 모르겠어요…….”
이런 질문은 처음 받아 보았기에.
그리고 자신의 못된 생각을 밝히는 것이 나쁜 아이 같아 보일까 봐 하린은 태형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사실 어릴 때는 부모님을 싫어했어요. 저를 버린 줄 알았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말을 듣고는 내심 안심했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싫었다. 진심 그대로를 말하고 싶었다.
최소 그에게만큼은 거짓 한 점 없이 나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나쁜 아이죠?”
그런 생각을 하는 주제에도 괜히 태형의 타박이 두려워 고개를 내리고 회피하며 그에게 안아 달라고 하기를 종용했다.
“아니.”
결핍으로 인한 애착이었다.
누군가와 붙어 있고, 살이 엉겨 있고. 따뜻함이 좋다. 그의 스킨향이 하린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가슴까지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하린은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다행이다.
“그게 나쁜 거면 나는, 몹시 나쁜 사람인걸.”
“아저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태형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린은 정말이지 상관없었다. 이것이 정말로 진심이었으니까.
“전에 말한 동생은 어떻게 생겼었어요? 아저씨랑 비슷했다면 엄청 이뻤을 것 같아요.”
“그 아이는 묘하게 널 닮았었어.”
“저를요?”
“그 아이도 너와 비슷한 눈을 가지고 있었거든.”
하린이 고개를 들어 태형을 바라본다. 태형은 엄지손가락으로 하린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사진 있어요? 궁금해요.”
“잠깐만.”
그가 움직일 수 있도록 잠시 열심히 끌어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는 자기 지갑을 손에 들었다. 그리고 구석에 박혀있던 사진 한 장.
하린은 사진을 받아 시선을 내렸다.
“와, 진짜 이쁘게 생겼었네요.”
사진은 태형의 부모님과 동생까지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태형과 똑 닮은 것 같은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어머니.
어린 시절의 태형.
그리고 그 옆에 그가 말한 동생이 보였다.
아, 이래서 닮았다고…….
하린은 왜 동생이 자신과 닮았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생머리의 화장기 없는 얼굴, 똘망똘망한 눈빛과 표정. 비슷한 것도 많았지만 제일 큰 건.
웃는 표정이었다.
만일 내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더라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진.
행복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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