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위반-48화 (48/75)

#48화

아침에 눈을 떴다.

평소와 다르게 검정의 인테리어. 하린은 주변을 살폈다. 눈동자를 두 번 정도 굴리니 그제야 상황을 다시금 인식했다.

아저씨 침실……!

그리고 시선을 위에 올리니 태형이 잠자고 있었다. 허, 호흡이 저절로 먹혔다.

남몰래 하린은 자기 뺨을 꼬집었다. 이것이 혹여 꿈인가 싶어서. 어젯밤의 일들이 모두 신기루처럼 없어질 것만 같았다. 모두 다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아야.”

꿈은 아닌지, 통증이 밀려왔다.

다행이다…….

일어나기 싫었다. 눈을 감기도 싫었다. 눈꺼풀을 닫으면 어둠이 잠식당할 것 같았고, 모든 것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하린은 태형을 지긋이 보다가 이내 다시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단단한 그의 가슴팍이 느껴지고, 익숙한 체향이 풍겼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으니, 그곳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불안하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감각이 사라질 때쯤.

하린은 갑자기 눈을 떴다.

눈꺼풀이 들어 올리니 아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보였다. 아까보다 밝아지고. 또한 태형이 없었다.

어……?

하린은 어미 잃은 동물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로는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자신이 왜 그의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겠는가.

아니야.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심장이 요동쳤다. 하룻밤의 신기루일까 봐, 손에 쥐기도 전에 사라질까 봐. 허망한 감정이 하린의 심장을 건드렸다.

거실로 나가고자 그대로 일어났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는 느낌이 생경하다.

두 발이 땅바닥에 닿았을 때 자연스럽게 한쪽 발을 떼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어머……!”

옆에 있던 벽에 손을 짚으니, 하린은 당황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첫 경험은 몸에 무리를 준다. 지식적으로는 들은 적은 있으나 몸소 겪은 건 처음. 어젯밤의 일이 저절로 상기되었다.

처음인 하린이 감당하기에는 태형은 너무 거대했었기에 버거웠다. 그럼에도…….

그냥 생각만 하는데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몸이 제 맘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하린의 비명에 태형이 방으로 왔다.

“아저씨 몸이 잘 안 움직여요…….”

“어제 무리해서 그런 겁니다.”

하린은 그런 태형을 보며, 멋쩍게 웃었다.

“침대에 다시 올려 줄까요.”

“아니요. 저도 밖으로 나갈래요.”

태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오자 하린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았다.

“맛있는 냄새가 나요.”

“점심을 조금 만들고 있었습니다.”

태형의 도움으로 식탁에 앉은 하린은 자연스럽게 팔꿈치를 식탁에 기대며 태형에게 시선을 올려 보냈다.

오늘은 고기를 굽고 있었다.

“저 이러다가 돼지 될 것 같아요. 너무 잘 먹어서요.”

“쪄도 됩니다.”

“헤헤.”

태형은 묘하게 갈라진 하린의 음성을 듣고는 물을 떠서 줬다. 강한 불에 소고기를 굽고, 먹을 채소를 불에 볶듯이 굽다가 소스를 만든다.

확실히 외국에서 산 기간을 증명하듯 그는 양식은 비교적 손쉽게 만들었다.

“오늘 집으로 선생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내일로 미뤄 줄까요.”

“아니요. 오늘부터 배우고 싶어요.”

“그래요 그럼.”

“그런데 아저씨이…….”

식탁을 가운데 두고 대화했다. 하린이 말끝을 묘하게 끌며 말하는 것은 무언가 부탁을 하거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였다.

태형이 그것을 캐치하고 하린을 보았다.

“뭡니까.”

“저는 말 편하게 해 주시는 게 더 좋은데…….”

투명한 물잔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존댓말을 쓰는 이유를 알았기에 그가 정중하게 말하는 투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이제 그 선 넘은 거니까.

“반말하는 게 더 좋습니까?”

“네에.”

하린이 그의 말에 배시시 웃으며 눈꼬리를 접었다. 눈이 마주쳤다.

멋쩍은 하린은 웃다가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회피했다. 하린이 먼저 시선을 피할 때도 태형은 하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 봤지만, 태형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넓은 도마에 스테이크를 올리고 자르며 대답하기를 미뤘다.

적당히 익은 소고기의 단면이 보였다.

“먹어요. 아니…….”

잘 썰어 놓은 음식을 접시에 담아 하린에게 줬다.

“아니야.”

“와! 너무 좋아요.”

“……하여간.”

하린이 평소보다도 더 반응을 크게 하니, 태형은 피식 웃으면서도 하린의 이마를 검지로 툭, 쳤다.

강하게 때린 건 아니기에 당연히 아프진 않았다. 하린도 머리를 긁적이며 웃으니, 태형도 같이 웃었다.

태형은 아침 출근 준비를 했고, 하린은 간단히 부엌에 남아 정리를 했다.

물론 설거지를 하려고 하니 태형이 극구 말렸다. 몸이 성하지 않을 테니 그냥 놔두라고.

어차피 조금 있으면 사용인이 올 거라고.

괜히 움직이다가 다치지 말고 가만히 있으란 말에 하린은 잠자코 있었다.

“조심히 있고. 이따가 선생님 올 거야.”

현관에서 태형에게 인사를 하니, 그는 왼 손목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며 말했다.

“몇 시예요?”

“12시.”

“알겠어요. 그럼 오늘 몇 시에 퇴근해요?”

“봐서, 연락해 줄게.”

하린은 평소보다 확실히 친절한 태형의 말투와 행동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네!”

허리가 조금 욱신거렸지만, 괜찮았다. 마음만큼은 날아갈 만큼 즐거웠으니까.

* * *

시간에 맞춰 글쓰기 선생님이 오셨다.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하린은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선생님을 맞이했다.

“오늘은 시놉시스 짜는 것을 알려 줄까 해요. 쓰고 싶은 내용이 있나요?”

“제가 미리 짜 둔 것이 있는데…….”

“한번 볼까요?”

공부는 하린의 작업실에서 하기로 했다.

저번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질문들을 정리해서 보여 주고. 미리 써 보았던 원고도 보여 줬다.

“상당히 잘 준비했는걸요? 인물 캐릭터도 명확하고 내용이니 하고 싶은 내용도 그렇고요. 여기서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나중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요?”

선생님은 상당히 꼼꼼하고 설명을 잘해 주시는 분이었는데. 하린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도 잘 알아챘다.

“나중에요?”

“서울 시장이 된 양아버지에게 학대받고, 도망친 이후의 이야기요.”

“그 아이는 그것을 시나리오로 써서 영화를 만들어요. 그 사람의 잔혹한 인간성을 만인에게 알리고 싶어 하거든요.”

모든 걸 현실로 반영을 할 수는 없었기에, 일부는 나름대로 각색을 거쳤다. 물론 책으로 만인에게 알리나, 영화로 알리나 큰 차이는 없었으나.

“여주인공이 원하는 건 복수이겠죠?”

“네, 여주인공은 그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해요.”

“그러고 나서 여주는 복수에 성공하나요?”

“네.”

“그러면 그것이 이야기의 끝인가요?”

쉼 없이 나오는 대화 속에서 처음으로 하린의 대답이 머뭇거렸다.

소설이라는 틀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사실상 자서전의 형태를 보이는 글.

이것은 하린이 겪어 온 것보단 겪을 내용, 혹은 겪고 싶은 내용을 더 담아야 할지도 몰랐다.

이 이야기의 끝. 결말.

“복수가, 여주 인생의 전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어떤 거가 되었으면 좋겠나요.”

“저는…….”

내 인생이 복수가 끝이 되지 않기를.

하린은 복수하고자 이것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살고자 하는 거였고.

하린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가지였다.

“여주인공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복수 이런 거 너무 좋지만, 복수만을 위해 살지는 않았으면 해요.”

“되게 멋있는 생각이네요.”

“그냥 더 이상 슬퍼하지 말고, 행복했으면 해요. 그게 사실 최고의 복수이지 않을까 생각해 봤어요.”

* * *

수업이 끝나고 하린은 테라스에 나와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었다.

수업이 끝난 것을 아는지 태형에게 전화가 왔다. 그에게 전화가 온 것뿐인데 사탕을 받는 아이처럼 하린은 밝게 웃고 있었다.

“아저씨!”

[어때, 오늘 수업은.]

“되게 재미있었어요. 음…….”

말을 고르며 몸을 비틀며 오른발을 땅에 쿵쿵 쳤다.

태형과 이런 내용으로 통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하면서도 괜히 마음이 들떠서였다.

“글을 쓴다는 게 생각보다 신기한 것 같아요. 특이나 이건 제 자서전 같은 거니까…….”

[바람 소리가 들리네.]

“아…….”

그의 말과 동시에 차가운 바람이 하린을 스치고 지나갔다.

“밖이어서요. 테라스 잠시 나와 있어요.”

겨울의 바람은 날카롭지만, 조만간 봄이 올 것 같은 기대감을 준다. 이제는 전처럼 엄청 춥지도 않았다.

[감기 들어.]

다정한 듯 아닌 듯 하린을 걱정하는 말.

그의 음성을 들으니, 안정감에서 오는 충족감을 받았다.

사실 행복이라는 건 이런 것이 아닐까.

별것 하지 않아도 즐겁고, 실실 웃음이 나오고. 하루 종일 그 사람의 생각이 나는 것.

하린은 벅차오르는 감정의 끝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기에 더욱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아저씨.”

[왜.]

겨울의 땅속에서 싹이 튼 씨앗 하나가 추위를 이기고 자라나려고 있었다.

억세고 차가운 바람과 환경, 척박한 땅에서 홀로이 피어나는 새싹.

어느 누가 이렇게 추운 겨울에 꽃이, 생명이 피어오르리라 생각했겠는가.

“저는 아저씨가 너무 좋아요.”

사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게, 현실에서 이뤄지는 중일지도 몰랐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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