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태형은 요즘 정신이 없었다.
단발적으로 튀어나오는 하린의 겁도 없는 어필도 있었으나, 우기익의 발악이 제일 영향이 컸다.
우기익은 우하린을 핑계로 돈을 요구했다. 물론 이것은 예측할 수 있던 부분인지라 상관은 없었으나, 이후의 행보에서 조금씩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태형은 현금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자산을 담보해 돈을 빌려줬다. 물론 그 돈은 다시 태형에게 돌아왔다.
그 사이에 태형은 돈을 빌려주며 차용증을 썼다. 그러나 그것도 몇 번이지.
태형은 이 이상할 돈을 더 빌려줘야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우기익에게 더는 돈을 줄 수 없다고 하니 점차 우기익은 태형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서울 시장이 된, 그 권력으로 말이다.
“이렇게 하셔도, 더 못 드립니다. 이미도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이게 내 의지는 아니고, 이미 되어 있던 건이라 내가 뭘 할 수가 없네,”
이를테면, 서울 지부로 이미 서울 시청에서 인허가가 났던 것을 번복하던가.
신규로 개업한 지도 얼마 안 된 회사에 노동 조사가 나온다던가.
말도 안 되는 건을 붙여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노동부에서 온 걸 내가 뭐 어찌하나.”
우하린의 약발이 잘 들어먹지 않으니, 회사를 볼모로 삼아서 이러는 거였다.
정치적으로 기반 하나 없는 인간이 서울 시장 그거 하나 달아 놓고, 말이다.
누가 그걸 만들어 줬는데.
태형은 우기익의 날개를 부러트릴 시기를 보고 있었다.
“근로 복지 공단에서 조사가 나와도 문제가 없도록 서류 같은 것도 누락 없이 해 주세요.”
태형은 관리자 직급을 불러 따로 지시를 내렸다.
“1년에 한 번씩 본사서도 감사가 나옵니다. 워낙 깐깐하게 보기로 유명하니, 미리들 관리하시길 바랍니다. 지금 당장 세무 조사가 나와도 털어서 나올 것 없을 만큼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들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썩 좋지 못했기에 최대한 문제없이 만들어야 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태형은 한국에 온 이유는 표면상 이유는 한국 지부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거였다.
더불어 이 프로젝트가 잘돼야 잡음 없이 후계를 받을 수 있다.
지이이잉-
태형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보고 시선을 찌푸렸다. 유명 속옷 브랜드에서 구매한 문자였다.
“뭐야 이게.”
카드 번호를 보니 하린에게 준, 카드였다.
“……?”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태형은 그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어린 게 겁도 없어서는.
태형은 하린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하린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부러 안 받는 건지 혹은 다른 이상한 꿍꿍이 중인지 신경 쓰였다.
대신 조금 있다가 전화가 와 통화를 했다.
[오늘 카페에서 우진화를 만났어요.]
“우진화? 아, 만나서 뭐 했습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고요. 그것을 보는데 조금 마음이 그랬어요.]
우진화가 결혼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큰돈은 리엄의 투자 건으로 돈은 묶여 있는데 단발적으로 돈이 필요했으니 우기익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용할 패였다.
태형에게 받기로 한 돈은 우기익에게는 일부분이었다. 이 여사 쪽에서 지원이 끊긴 마당이었고, 심지어는 받은 돈도 다시 돌려줘야 했다.
우하린과의 결혼이 깨졌으니.
대신 그것에 대한 피해 보상에 대한 심리로, 태형에게 계속해서 돈을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태형이 그것에 호구처럼 응해 주지 않았던 거였고.
이러한 흐름으로 보아, 우진화를 사용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서 일하는 사용인의 말을 들어 보니, 우진화의 반항이 있었다고 했다.
원래 태형과 결혼할 줄 알았던 우진화였기에, 40대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은 곧 죽어도 싫은 거였다.
태형은 이미 우기익에게 돈이 들어올 곳은 다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원래 우하린은 죽도로 때려도, 우진화는 그 정도로 때리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점차 불안함에 우진화마저도 반항하면 정도가 심하게 때린다고 했다.
우기익의 심리가 극한으로 점차 몰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울 시장이 되고 그 권력으로 리베이트를 조금씩 받고 있으나, 그 금액은 아직 적었다.
자기 친딸까지 그렇게 패는 짐승보다 못한 놈.
아무래도 슬슬 우기익의 목줄을 콱 쥐어 잡을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태형은 일을 정리했다.
「아저씨 오늘 몇 시에 와요?」
아무래도 우하린이 오늘도 이상한 꾀를 부리는 것 같았기에.
그렇게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퇴근했다.
저녁 이후의 시간인지라 차가 막히지 않아서, 태형에 예상한 대로 막히지 않고 정각에 도착했다.
도착한 집.
이상하게 집이 조용했다.
“우하린.”
그리고 역시나 무언가가 있었다. 그 수위가 평소보다 강해서 태형 역시 당황했다.
“그 꼴은 뭐야.”
“그런 시선 이제는 싫어요…….”
하린의 시선과 함께 주변에 피워 둔 촛불이 애처롭게 흔들린다.
졸린다고, 일찍 잔다고 하던 애가 집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니.
“꼴이 뭐, 뭐요.”
태형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었다.
어린애가 정말이지 겁도 없지.
레이스가 달린 가슴이 반쯤은 보이는 속옷에, 몸을 가리지도 않는 슬립에.
“우하린.”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밀어내는지 안다면 이 아이는 과연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무서운 생각을 할 줄 알고. 어떻게 망가질 줄도 모르는 게.
“추워, 감기 들어.”
자신을 봐 달라고 까불고 있었다.
태형은 자신이 입고 있던 검정 외투를 벗어 하린의 어깨 위에 걸쳐 줬다.
여린 어깨가 잘게 떨렸다. 태형의 눈치를 보며 숙였던 고개가, 다시금 시선이 올라왔다.
“저도 여자예요. 다 큰, 여자.”
안 된다.
“전에도 말했지.”
단호한 음성이 집 내부를 울렸다.
태형은 하린의 얕은수를 알면서도 흔들리는 감정에 인상을 찌푸렸다.
넘어가서는 안 된다 말이다.
“일 년 후 이혼하면, 그때 네 또래 만나라고…….”
“또 그 소리. 아저씨…….”
토끼처럼 붉어진 눈이 태형의 감정을 헤집어 놨다. 그래,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우하린을 이성적으로 좋아했다.
세상에 버려져 홀로 죽어 가던 이 아이가,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제가 정말 다른 남자 만나도 괜찮아요? 정말 다른 놈…….”
싫다.
우하린이 다른 새끼 만나는 것도 싫고.
그렇다고 우는 것도 싫었다.
나는 그저, 아이가 행복하길 바란 것뿐인데.
“하린아.”
왜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태형은 하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젖은 눈가를 쓸어 주었다.
“요즘 사람들이 나를 파렴치한 놈으로 부른다고 하더군.”
회사이고 병원이고 다 소문이 났다.
강태형이 우기익의 딸에게 눈이 돌아서 결혼을 했다.
“새파란 어린애랑 갑자기 결혼했으니, 속도위반이라는 둥, 도둑놈 새끼라는 둥.”
어린 여자를 돈 주고 샀다. 혹은 임신시켜서 결혼했다. 온갖 말들이 소문으로 흘러 다니고 있었다.
“저들끼리 말도 안 되는 말을 지껄이면서 까분다지, 그러니 하린아.”
짙은 음성이 하린을 부른다. 하린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울먹거렸다.
“날 더는 파렴치한 놈으로 만들지 마.”
그런 눈으로 더 보지 마.
점차 인내심이 헤지고 헤져, 마모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을, 진실로 만들지 말라고.”
“정말로, 진짜 제가 다른 놈 만나서 사는 거 보길 원해요?”
“상관없어.”
감정의 끝은 알 수 없는 곳까지 향해 갔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기차 속 어딘가.
처음 품는 감정은 태형조차도 핸들을 함부로 꺾을 수 없었다.
어렵고 두렵다. 감정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하린은 태형이 거절에 울며 그의 옷자락을 꽉 쥐며 빌었다.
“난, 싫어요. 아저씨가 다른 여자랑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보기 싫고, 상상도 하기 싫고…….”
자신을 봐 달라고, 사랑해 달라고.
여자로 보지 않는 자신을 여자로 봐 달라고, 하린은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한 번이라도 여자로 봐주면 안 돼요? 저 뭐든지 잘 배우고, 잘할 자신 있어요.”
마지노선이었다.
“뭐든. 저 습득력도 빨라요. 그러니까…….”
넘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선 그 가까이. 태형은 그 선이 지금 코앞에 와 있음을 느꼈다.
안 된다. 그저 내 역할은…….
“내가 널 여자로 봐주면, 어떤 일이 생길 줄 알고.”
성대를 긁으며 튀어나오는 목소리가 묘하게 날이 서 있었다. 깊어진 음성이 그가 동요하고 있음을 여과 없이 보여 줬다.
“어떤 일이 생겨도 상관없어요.”
“우하린.”
하린의 확고한 눈빛.
태형은 미간을 사납게 찌푸렸다. 흔들린다. 당장에라도 말로 꺼내지 못한 욕망이 속에서 들끓었다.
목까지 열감이 타오른 느낌.
무언가가 태형의 신념을 불태우는 것 같았다.
그것은 열망이었고, 탐닉이었고.
“지금 선을 넘으면 영영 못 돌아와.”
또한 소유였다.
“괜찮아요, 저는…… 읍!”
둘 사이에 있던 임계점을 넘어가듯 팽팽하게 당겨지던 무언가가 뚝, 끊겨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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