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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45화 (45/75)

#45화

“무슨 생각으로 이걸 산 거지. 에휴.”

매장에 나오자마자 드는 현실 자각에 한숨을 내뱉었다. 하린은 손에 있는 쇼핑백을 보았다. 충동구매의 잔여물.

아저씨가 뭐라 할지 모르겠네.

“에휴 모르겠다.”

하린은 그렇게 무작정 길을 걸었다. 집으로 갈 수는 있었으나 당장 집으로 가는 건 아쉬웠다.

그렇게 걷던 하린은 슬슬 다리가 아파졌다. 벌써 집에 들어가는 건 조금 아쉽고, 하린은 앞 건물에 보이는 테라스 카페를 보고는 그곳으로 향해 들어갔다.

그냥 음료라도 마시고 들어갈까.

사실 태형이 퇴근할 때까지 있어 볼까 싶었는데, 그것은 무리였다. 지금 몇 시간 밖에 있는 것도 힘든데 더 있는 건 무리수였다.

메뉴를 살펴보는데 아까 마셨던 음료 때문에 음료가 딱히 댕기지 않았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평소 마시지도 않는 음료를 주문한 건 그냥, 아침마다 커피를 마시는 태형이 생각나서였다.

커피를 주문하고 유리창이 보이는 곳으로 향해 앉았다. 하린의 시선 끝에는 아직도 야한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이따 저녁에 입어 볼까.”

태형의 반응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예측이 가지 않았다.

하린은 카페 주변을 살폈다. 아까는 화려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이 나는 인테리어였다면.

여기는 브라운 색감에 부드러운 느낌이 더 많이 났다. 아까 거기보단, 여기다 더 괜찮은 것 같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틈에 음료가 나왔다. 하린은 커피를 받아 들고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윽.”

커피 한 모금을 마셔 보니 역시나 쓴맛이 밀려왔다. 역시나 왜 마시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하린은 커피 사진을 찍어 태형에게 보냈다.

「다른 커피숍 왔어요! ( •̀ ω •́ )✧」

읽음 표시가 바로 뜨는 데도 답은 오지 않았다.

“봤는데 대답도 안 해 주네.”

하린은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음료를 한 번 더 마셔 봤다. 얼굴을 구기던 하린은 커피를 저 멀리 두었다.

“아까 일 말해 볼까.”

하린은 아까 번호를 물어보던 사람의 일을 카톡으로 쓸까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굳이 그 말까지 적어 가며 하지는 말자…….

하린은 한참 핸드폰을 살피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린은 순간, 대각선 쪽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고 눈을 깜빡거렸다.

“어…….”

하린은 다른 누군가를 보고는 놀라 핸드폰을 내렸다.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구석에 자리해 있었지만, 못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린이 놀란 건 우진화를 봐서가 아니었다.

천천히 걸어갔다.

우진화는 얼굴을 푹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 체구 등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우진화?”

앞에 있는 여성이 얼굴을 들었다.

우진화가 맞았다.

우진화는 하린의 얼굴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더 말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맞은 얼굴이었다.

* * *

“도망갈 땐 언제고 왜 아는 척이야.”

폐쇄적이고 삶을 내려놓은 표정.

우진화는 그런 표정으로 우하린을 바라봤다. 얼굴이 왜 그러니, 그런 말 따위는 뱉지 못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아니까.

“너는 친딸인데도 이렇게…….”

우진화도 안 맞고 자란 건 아니지만 하린과 진화를 나눠서 생각하면 진화보단 하린이 훨씬 많이 맞고 자랐다.

그래서 은연중 생각했다. 내가 사라져도 우진화는 괜찮을 거라도.

“축하해, 나는 지옥에 빠지고 넌, 도망갔네.”

하린은 그 앞에 앉았다.

우기익을 싫어했던 거지, 우진화를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둘은 그저 지옥에 갇혀 허덕이는 불쌍한 중생이었으니까.

“……결혼한다며.”

“그딴 말 할 거면 꺼져.”

저번에 조 대표가 했던 말. 이제는 내 삶이 아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이 모습을 직관한 이상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우진화는 아주 불쾌하다는 눈으로 하린을 바라봤다.

“결혼이 언제야.”

“……네가 안 꺼지면 내가 갈게.”

우진화는 신경질적으로 일어났다. 하린은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내가 도와줄 수 있을까. 정확히는, 아저씨의 도움이겠지만…….

입 주변을 맴도는 말이 있었으나, 하린은 순간적으로 고민했다. 내가 이 말을 내뱉는 것이 맞을까.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그냥 이대로 내 살길이나 찾는 게 맞을 수도 있었다. 괜히 오지랖 넓게 참견할 필요 없이.

“해외로라도 도망, 갈 수 있다면 갈래……?”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다른 말이 나왔다. 저 고통을 너무나도 알았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나 혼자만 살겠다고, 눈을 가릴 수가 없었다.

“내가 많은 도움을 줄 수는 없어도-.”

“도움? 네가 뭔데?”

안다, 뭣도 없는 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내뱉는 거라고.

그렇지만, 자신도 받은 것을 우진화에게 조금은 알려 주고 싶었다.

인생이 죽어 가고 있다고 믿고 있을 때, 하린이 보았던 빛을, 조금이라도 나눠 주고 싶었다.

우진화는 하린의 마음이 못마땅했다.

“강태형 잡으니까 뭐라도 되는 것 같지. 너는 도망갔으니까. 강태형이 너 하나 정도는 계속 지켜 줄 테니까.”

단단한 어조의 말이 허공을 할퀸다.

“나는 누가 지켜 주지도 않아. 어쭙잖게 도망가다 걸리면…….”

걸리면.

하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진화의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자신도 그랬으니까.

“내가 너 맞아 죽을 뻔한 것을 봤는데, 감히 시도라도 하겠어?”

무서웠고, 두려웠으며. 만일의 일까지 고려하게 된다. 더군다나 그것을 눈으로 직면했다.

도망가다 걸렸을 때의 모습을.

“위선 떨지 마.”

하린은 우진화의 모습을 보며 불과 얼마 전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살기를 바라면서도 비관적인 말을 내뱉는.

“착한 척도 하지 마.”

하린은 자신의 공책 하나를 뜯고는 거기에 지금 사는 집의 주소를 적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여기로 와. 네 말대로 같이 사는 집이니까, 네 아버지도 곧 뭔가는 할 수 없을 거야.”

많은 날이 지나간 건 아니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것을 우진화를 보며 더욱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랬듯, 너도 발버둥이라도 쳐 보길 바라.”

아저씨가 나에게 준 것들.

그것은 비단 돈뿐이 아니었다.

하린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진화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영 불편했다.

항상 당당하고 자기 할 말을 내뱉던 우진화가, 저 정도로 기가 죽고 남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오늘 보았던 우진화는 사실, 하린의 미래였을 수도 있었다. 태형이 없었을 때의 미래.

하린은 핸드폰을 살피는데 태형에게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전화를 걸었다.

“전화 온 줄 몰랐어요. 방금 집에 왔어요.”

[꽤 오래 있었네.]

혼잣말인지 대답인지 모르는 투로 태형이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호흡까지 전해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늘 카페에서 우진화를 만났어요.”

[우진화? 아, 만나서 뭐 했습니까.]

“얼굴이 말이 아니더라고요. 그것을 보는데 조금 마음이 그랬어요.”

하린은 태형과 전화를 하며, 겉옷을 벗고 소파에 앉았다.

[시장까지 되었어도 그 손버릇은 못 고치나 봅니다. 뭐, 평생을 그리 살았는데 도리가 있겠나 싶긴 합니다.]

“그렇죠. 마음이 조금 그렇더라고요.”

[괜히 마음 쓸 것 없습니다. 아, 그리고 오늘은 저녁 먼저 드세요.]

“늦으세요?”

[일이 있어서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너무 늦으면 자고 있고. 괜히 나 기다리지 말고.]

“네.”

하린은 받고 있던 핸드폰을 옆에 두고, 자리에 앉아 다시금 한숨을 쉬었다.

분명 다정한데.

선 하나를 넘지 못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 저걸 그냥 오늘 써 볼까.

하린의 눈에 오늘 산 야한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마음을 먹었다.

오늘 그 선 넘어 보자고.

* * *

저녁 시간, 하린은 간단히 저녁을 먹고 마음먹은 것을 행하기로 했다.

미리 그가 올 시간을 다시 물어봤다.

「아저씨 오늘 몇 시에 와요?」

「생각보다 일이 일찍 마무리되어 9시쯤. 왜 물어봅니까?」

「아, 아니에요. 그냥 졸려서요. ╯︿╰」

「일찍 자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마저도 실패하면 이제 진짜 접어야 할지도 몰랐다.

사실상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막으면 더 이상 답도 없었다.

별것은 없지만, 집에 있던 향초들을 주변에 피우고, 보기에도 민망한 슬립을 입었다. 그 안에는 같이 산 속옷도 입었다.

“와…….”

흰색 레이스가 돋보이는 속옷 위로 슬립을 입었다. 불투명한 천에 가까운 것은 몸을 가리나 가려 주지 않고 있었다.

9시 정각.

시간에 맞춰 준비했다. 착실하게 시간에 맞춰서 오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말한 시간에서 한 치의 오차 범위 없이 오는 것조차 그의 성격을 닮아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 심장이 떨려 왔다.

문이 열리고, 그는 평소와 다른 주변 분위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의 얼굴에는 그의 생각이 드러났다.

이게 무슨 짓이야. 라고 써진 얼굴.

“우하린.”

냉랭한 시선 속 하린은 불안한 감각을 깨달았다.

……망한 것 같은데.

“그 꼴은 뭐야.”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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