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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44화 (44/75)

#44화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세상은 생각보다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서울 시장 한 명쯤 바뀌어도 말이다.

하린은 천지가 개벽하고, 하루아침에라도 어떠한 일이 생길 줄 알았었다.

그러니까 꽤 썩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졌다.

아, 그나마 달라진 건 태형의 행동이랄까?

“오늘 하루만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잠들 때까지만 있어 주겠습니다.”

하린이 부탁하자 그는 매정하게 내치지도 그렇다고 하여 다 들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기점으로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태형의 행동 속에 변화가 찾아왔다.

뭐랄까, 잔잔한 파도 뒤에 거센 파도가 오듯 어떠한 진동이 오는 느낌이랄까.

팽팽한 줄다리기 속 언젠간 끊겨 나가기 마련이니 그 역시도 무언가가 동요 중이라고 하린은 생각했다.

변화라고 한다면.

태형은 평소보다 늦게 출근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던 것보다 하린이 오전에 깨서 활동하는 것까지 보고 출근을 한다던가.

이것에도 단점은 존재했는데, 늦어진 출근 시간만큼 퇴근도 늦어졌다.

처음에는 8시 퇴근하더니, 그 이후에는 기본 저녁 10시에 퇴근했다.

아무래도 일이 많은 것 같았다.

하린은 태형이 없는 사이에 조금씩 새로운 걸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구체화해서 써 보기 시작했고. 조 대표와 종종 연락했다.

태형과 이따금 집에서 영화도 보고, 밥도 같이 먹었다. 하린이 괜히 태형에게 접근하면 칼같이 벽을 쳤지만.

하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만 더하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6시 반 아침. 하린은 눈을 뜨자마자 대충 씻고는 거실로 후다닥 나왔다.

태형은 씻는지 물소리가 났다.

부엌으로 나와서 태형이 먹을 만한 간단한 블랙 퍼스트를 준비했다.

“이런 거 준비하지 말라니까.”

느긋하게 넥타이를 매만지며 다가온 그는 가볍게 하린을 타박했다.

“더 생산적인 일을 하라고 했더니.”

하린은 태형이 타박하는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나는 이것도 매우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하면서 태형이랑 더 친해지려고 하린도 노력하고 있는 거였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래도 준비하면 다 먹어 준다.

“그냥 저 먹으면서, 하는 거거든요…….”

“별로 먹지도 못하는 거 압니다.”

하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태형은 하린이 밥 먹는 것을 자주 못마땅했었다.

그러나 그나마 지금 하린은 꽤 잘 먹는 편에 속했다. 결혼 전 우기익의 집에서 눈칫밥 먹을 때를 생각하면 말이다.

만든 음식을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놨다.

따뜻하게 빵까지 데우고, 커피를 내리니 집안에 커피 내음과 빵 굽는 고소한 향이 가득 풍겼다.

태형도 자연스럽게 착석했다.

“아저씨, 저 듣고 싶은 수업이 있어요.”

“어떤.”

“글쓰기 수업이요.”

“조금씩 써 보고 있는데 영 쉽지 않아서요.”

이래저래 써 보고는 있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내용은 어느 정치인의 이면이 담긴 이야기, 주인공은 그의 딸.

뭐 딱 봐도 하린의 이야기, 우기익의 이야기였다.

“외부 활동 하나쯤 있는 게 좋겠지. 듣고 싶은 수업 있습니까.”

“들어도 돼요? 안 그래도 가고 싶은 학원이 있어요.”

“학원…… 개인 레슨이 좋겠습니다. 책 내용이 다른 곳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되니까.”

태형은 하린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 주고 있었다. 집 안에 빈방 하나를 하린이 쓸 수 있는 작업실로 만들어 줬으며, 노트북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학원은 안 돼요?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한데. 개인 레슨은 집으로 올 거 아니에요…….”

문제는 점차 좋았던 이 집도, 창살 없는 감옥같이 느껴졌다는 점.

하루 종일 남는 시간에 글도 쓰고, 요리도 해 보고 별짓을 다 해 봤다. 그러나 점차 주인 기다리는 강아지가 되는 것 같았다.

태형이 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수업은 집에서 듣고, 최대한 빨리 붙여 주겠습니다. 대신 수행 기사 겸 비서 붙여 주겠습니다.”

“에? 제가 뭐라고…….”

수행 기사 같은걸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외부 활동 하나 정도.

거창한 걸 원하는 게 아닌데.

“그냥 당장 답답한 건데…….”

이 집의 문제는 자기 차가 없으면 활동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대중교통을 사용하기엔 기본적으로 택시나 버스가 없는 곳이었다.

“그냥 오늘은 아저씨랑 같이 나가면 안 돼요?”

“들어올 땐 어떻게 하려고.”

“택시 타고 들어오던든, 아니면 늦게까지 밖에 있다면 아저씨가 데리러 와 주시면 되잖아요.”

“내가 언제까지 일할 줄 알고.”

태형이 손가락을 튕겨 하린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바람이 불어 하린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움직였다.

“아!”

“엄살은.”

“치…….”

하린이 두 손으로 이마를 비비자 태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나갈 때 회사 근처 카페에라도 내려 주겠습니다.”

“좋아요.”

“외출 준비하고 오세요.”

태형은 이미 외출 준비를 끝냈기 때문에, 하린만 준비하면 되었다.

하린은 그가 혹여나 다른 말을 할까 싶어서 그대로 일어나 방으로 후다닥 들어갔다.

* * *

태형은 회사 근방 큰 카페가 있는 곳에서 내려줬다.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고.”

“네. 출근 잘하세요!”

차에서 간단히 인사를 나눈 둘은 그대로 나뉘었다. 태형은 출근하고, 하린은 그 근방에 보이는 커다란 카페에 들어갔다.

손에는 그가 사 준 노트북을 들고나왔다.

학원이 가고 싶었으나 그것도 안 된다고 했으니, 조만간 선생님을 붙여 줄 터.

하린은 카페로 들어와 음료 한 잔을 시키고 자리에 앉았다.

의자도 그렇고 책상도 그렇고 사실 집에서 쓰는 것이 환경은 더 좋았으나, 이상하게 기분은 조금 더 들뜨는 것 같았다.

하린은 카페 내부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통유리창에 보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오랜만에 젊은 층이 많이 오는 곳에 있으니 조금은 들떴다.

노트북을 켰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되는 이 행위는 아직 할 때마다 조금은 민망함이 들었다. 그리고 글이라는 건 생각보다도 더 어려웠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각들을 가지런하게 옮기는 행위는 말이다.

하린은 미리 사 둔 작법서 등을 읽어 보았고. 써 보면서 생겼던 궁금증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나중에 선생님이 생기면 여쭤봐야지.”

질문 리스트도 만들고, 글도 조금 써 보니 주변에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졌다.

시간을 보니 벌써 이곳에서 3시간이나 있었다.

“오늘은 그만할까.”

하린은 노트북을 닫으며 이미 다 녹아 버린 음료를 잡아들어 쭉 들이켰다. 그리고 노트북을 정리하고, 기지개를 쭉 켰다.

“하아.”

유리창으로 보이는 밖을 다시 바라봤다. 밖을 조금 다녀볼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 간사했다.

예전에는 그저 우기익의 손에서 도망가는 것이 목표였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도 행복할 것 같았는데.

자유라는 것을 경험해 보니 생각보다 어려웠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했던가.

평생을 갇혀 있던 하린에게 ‘시간’이라는 자유를 주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태형을 만난 이후로 계속 그래 왔고, 오늘도 또한 그랬다.

“이제 뭐 하지.”

그도 그럴 것이 하린에게 친구도 없고 같이 즐길 사람이 없어서 더욱 그랬다.

“일단 일어나서 돌아다녀 볼까.”

하린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옆에 앉아 있던 남자 중 한 명이 다가왔다.

“아까부터 봤는데 정말 제 이상형이셔서요. 혹시 남자친구 없으시면-.”

“네?”

하린은 순간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누가 봐도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성.

키도 훤칠하고,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이 잘생긴 남자였다.

아마도 아저씨가 말한, 네 나이 또래의 남자에 적합한 사람일 거였다.

“제가 남편이 있어서요.”

“네?”

“결혼해서…… 죄송합니다.”

“아…… 예.”

남성은 하린의 말을 믿지 않는 표정으로 다시 자기 자리로 갔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도 안 한 풋풋한 얼굴. 누가 봐도 자기 나이 또래이거나 자신보다 어릴 거라고 생각했던 여성이, 결혼이라니.

그냥 싫다는 의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가 더 잘생겼는데…….

하린은 민망함에 그 자리에서 빨리 벗어났다. 그리고는 길을 돌아다녔다.

과연 내가 아저씨가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즐거울까?

멍하니 걸으며 하린은 자문했다.

그러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잘 모르겠다.

생각에 빠져 길거리를 걸었다. 낮의 강남은 사람도 많고 가게도 많다.

솔직히, 좋지 않을 것 같다.

아까 번호를 물어봤던 남성도 객관적으로 꽤 잘생긴 얼굴에 속했다. 그러나 전혀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이미 나는 아저씨한테만 감정이 동요되는걸.

“와.”

시선을 내리깔면서 다니는 와중에 순간 걸음이 멈췄다. 잠깐 본 것으로도 걸음이 멈췄다.

화려한 레이스. 빨간 망사.

고급스러우면서도 외설적인 속옷 가게.

아름답지만 자신이 입는다고 생각하면 조금은 민망할 것 같긴 하지만.

저걸 입으면 아저씨는…….

“뭐라 하려나.”

장난기가 돋았다. 하린은 그대로 그 매장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그…….”

우물쭈물한 하린 앞에 가게 직원이 다가왔다.

“어떤 제품 보고 들어오셨나요?”

“저 제품이요.”

하린은 들어올 때 봤던 마네킹을 손으로 가리켰다.

“아 남자 친구분 이벤트용인가요?”

“그게…… 네. 그런데 취향을 잘 몰라서 뭐가 좋을지는.”

“보통 제일 많이 나가는 건 핑크 색상의 이 제품이고요.”

제품을 알아들은 직원은 하린에게 다른 제품들과 다른 색상도 보여 줬다. 너무 화려하고 몸을 가릴 수 없는 디자인에 하린은 눈을 둘 곳을 못 찾았다.

“와…….”

“조금 야하죠? 이건 보통 오래된 커플분들이나 부부분들이 많이 사용하세요.”

하린의 반응에 직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면서 옆에 다른 디자인도 가리키며 설명했다.

흰색에 상하이 세트와 슬립까지.

불투명하면서도 진짜 이쁜데 야했다.

“부부요?”

“네. 그런데 아직 남자 친구분 취향을 모르신다고 하시니…….”

하린은 직원이 말한 단어 하나에 확 꽂혔다.

“아니에요. 저, 이거 주세요.”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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