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위반-43화 (43/75)

#43화

집으로 돌아왔다.

의도치 않게 많은 일이 있었는데, 그중 최고는 고백이 아닐까 싶다.

방에 들어와 간단히 씻고 침대에 누웠다. 일이 많아 피곤하기도 한데 생각도 많은 밤이었다.

금방이라도 침대에 파묻힐 것 같은 느낌.

그런데도 하나하나 오늘 있던 일을 정리했다.

“하나, 조 대표님은 아저씨와 나 사이의 관계를 의심한다. 이혼하고 와도 된다고 했다.”

손가락질을 하나 접었다.

확실히 조 대표는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알아봤다는 것이 조 대표의 눈초리가 날카롭긴 했다.

자신은 아저씨를 좋아하니까 거짓말로만 구성된 관계는 아니지만.

“물론 이혼해도 갈 생각은 없지만.”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우진화가 다른 늙은 아저씨와 결혼을 하게 된다.”

말을 내뱉는 것도 힘든지 이후에는 혼자 속닥거리던 것도 하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세 번째, 아저씨는 어릴 적에 입양되었었고, 여동생이 있었었다.

네 번째, 아저씨도 폭력 가정에서 자랐다.

다섯 번째, 나와의 결혼을 위해 아저씨가 우기익에게 돈을 줬다.

여섯 번째, 우기익의 선거가 코앞이다.

“하…….”

하린은 고이 접던 손가락을 펴, 그대로 얼굴을 가렸다.

태형은 결국, 하린에게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나마 희망은 그의 표정이 꽤나 고민이 짙어 보였다는 것.

흠. 그건 희망이 될 수는 없나.

하린은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흰 천장에 초점을 두고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복잡하디 복잡한 관계 속에 자신은 어찌 이 정글 같은 곳을 버텨야 할지 머리가 아파졌지만. 그럼에도 두렵지는 않았다.

어디에 기반을 둔 생각인가 하고 돌이켜보니, 태형 덕분이었다.

무엇이든 아저씨는 말한 대로 해 줄 거라는 믿음.

더군다나 오늘 태형의 행동을 돌이켜 보니, 하린은 한 가지는 내심 확신했다.

아저씨는 나를 좋아한다.

그것만으로도 꽤나 큰 수확일 듯싶었다.

* * *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평소와 같이 일어났는데 평소보다 뭔가 달랐다.

뭐지.

거실에 나와서 주변을 살피는데 하린은 그것이 뭔지 깨달았다.

“아저씨 출근했구나.”

원래는 더 늦게 출근했었으면서…….

아무래도 하린과의 아침이 꺼려졌는지, 일찍 출근하는 것을 자처한 것 같았다.

에휴.

사실 하린이 아침 일찍 매번 일어나던 이유도, 태형을 보고자 함이었기에 일찍 일어난 의미가 없어졌다.

하린은 다시 침대로 가서 더 잠들까 고민을 하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냥 자는 것보단 다른 일을 하는 게 더 유익할 것 같았다.

“딱히 연락도 없네.”

핸드폰을 살펴봐도 딱히 태형에게 연락이 온 것도 없었다.

하린은 노트북을 켰다.

원래는 집에서 소설 쓰는 거라도 할까 싶은데 작업실은 싱숭생숭하여 괜히 딴짓을 하게 될 것 같아서 부엌으로 나와서 아일랜드 식탁에 자리를 폈다.

“음…….”

물론, 장소를 바꾼다고 하여 딴짓을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린은 자연스럽게 우기익에 관련한 이야기들을 찾았다.

우기익의 인터뷰 영상, 뉴스 영상. 국민의 의견이 담긴 영상. 등등

정치 관련된 방송들을 보며 하린은 어지러웠다. 여러 내용과 사견이 담긴 말들.

지지율 표 등등, 말들은 어려웠지만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다 거짓말인데…….”

우기익은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태형은 우기익이 당선되어도 상관없다 괜찮다 말하고 있었으나. 어찌 되었든 자신의 결혼으로도 지참금을 뜯던 사람이었다.

나중에라도 돈이 떨어지면,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용해서라도 자신과 혹은 태형을 위협할 사람이었다.

시선을 돌려 다시 바라봤다.

아이들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위선답게 아이들과 함께 웃는 표정. 평소에도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시장에서 바글바글한 사람들 사이에서 밥을 먹는 모습. 그는 깨어 있는 사업가인 양, 자신을 포장했다.

말도 안 돼.

기가 찼다. 말도 안 되는 말들로 이뤄진 것들을 보며 하린은 두 눈을 의심했다.

어느 방송을 다 보아도 우기익의 칭찬뿐.

미친 것이 틀림없어…….

모두가 미친 사람들처럼 우기익을 찬양하고 있었다.

이런 것들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였나.

도대체 얼마나 돈을 뿌리면 저런 것이 가능한 거지. 악귀가 따로 없는 사람이 선량한 시민인 양 사람을 위한 정치라는 말을 떠드는 것이 화가 났다.

하린은 신경질적으로 노트북을 닫았다. 지지율 표 등을 보아도 사실상 의미가 없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조이는 아픔이 들었다.

내가 우기익한태 어떤 꼴을 당하며, 자라왔는데.

내가 우기익한테. 내가…….

- 자수성가한, 서민을 위한 정치인.

- 청렴하고 결백한, 사업인.

우기익의 여러 프레임이 담긴 수식어들이 머릿속을 흔들었다.

하린은 두 눈을 감고, 한숨을 내뱉었다.

이건 더 이상 돌이킬 수도 없었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답은 정해져 있었다.

우기익이 될 판이었다.

* * *

우기익의 선거 개표 전.

하린은 거실에서 홀로이 있었다. 밖 날씨는 춥긴 하나 실내 날씨는 춥지 않았으나, 하린은 두꺼운 담요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태형은 퇴근하고 돌아와 하린을 보고 물었다.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앉아 있다가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켰다.

“왜 그러고 있지.”

“……그냥 좀 추워서요.”

“저녁은.”

하린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어제는 불안했더라면 오늘은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 같았다.

평생을 사람 하나를 병신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은 사람 좋은 척 위선을 떠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뭐라도 만들어 주겠습니다.”

“저는 괜찮아요. 입맛이 없어서…….”

하린의 대답이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하린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말을 끌고 제 할 말을 내뱉었다.

“일단 씻고 올 테니 쉬고 있어요.”

하린은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그를 보며 한참을 보았다.

종일 우기익의 얼굴이 생각이 난다고 하면 과연 어떤 감정일지 알까.

자신을 때리던 짐승보다 못한 얼굴과 온갖 사진에서 보이는 위선적인 우기익의 얼굴이 교차하여 보였다.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해서 나는 생각에 담요도 덮어 보고 별짓을 했지만 그다지 소용이 있지는 않았다.

하린이 생각하던 틈에, 태형은 씻고 나왔다. 비교적 편안한 차림의 검정 실크 잠옷을 입고 나온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하린이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으니 뭐라도 만들어 주려는 것 같았다.

마음이 못마땅해졌다.

매번 아니다, 뭐다 말은 그러면서도 행동은 또 다정한 것이 좋으면서도 못내 싫었다.

하린은 태형 근처로 다가갔다. 태형 가까이 다가가자 힐끔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태형은 사용인이 미리 손질해 얼려 둔 채소를 꺼냈다. 불에 달군 팬에 기름을 두르고 채소를 볶는다.

별것 하지 않은 데에도 꽤 맛있는 향이 났다.

“아저씨 모해요?”

“리소토를 만들어 보려고 합니다.”

“…….”

힘없는 목소리. 기운을 내어 말하고 싶었으나 잔열까지 점화되어 버린 듯 재만 남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하린은 마르게 미소를 보였다.

“안 만든 지 좀 돼서 잘 만들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말을 하며 생각보다 빠르게 음식을 만들어 냈다. 밥을 넣고 소스를 넣는다, 그가 만드는 모습을 하린은 멍하니 바라봤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나요.”

눈앞에 흰색의 리소토가 만들어져 나올 때까지.

태형은 먹기 좋은 접시에 음식을 담았다.

“……아저씨는 누가 될 것 같아요?”

무엇을 지칭하지 않는 물음. 하린은 음식을 보며 뜬금없이 물었다.

그가 준 음식을 보고 있으나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다.

“아무래도 이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거지.

하린은 시선을 내리며 입꼬리를 같이 내렸다. 제 생각이 다르길 바랐다.

“그렇구나.”

“아마도.”

하린이 먹을 생각 없이 다른 생각에 잠겨 있으니, 그녀의 앞에 접시가 더 들어왔다.

시선을 올려 그를 바라봤다.

“다 먹어야 할 겁니다.”

“아저씨는 저녁 드셨어요?”

“잔머리 쓰지 말고.”

“진짜 괜찮은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하린은 숟가락을 들어 그가 만들어 준 음식을 만들었다. 요리라고는 해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사람이 만드는 음식.

생각보다 맛이 좋은 건, 저번의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태형은 커피를 내려 아예 하린의 앞에 앉았다.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하린이 먹는 모습을 조용히 봤다.

조용한 저녁.

한입, 두 입, 꼭 부모가 아이를 챙겨 주듯 태형은 하린을 살폈다.

이것이 보살핌이라는 걸까.

사실 입에 가득 든 음식의 맛은 잘 느껴지지 않으나 하린은 입 안에 음식을 꾸역꾸역 넣었다.

성년이 되도록 받아 본 적 없는 보살핌.

그것이 고마워서, 아니 계속 받고 싶어서일지 몰랐다.

[서울 시장 우기익.]

예정된 일에 이변은 없었다.

저녁을 먹다 결국 체한 하린은, 핸드폰 속의 결과를 보니 속이 다시금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잠이 안 올 것 같아요.”

태형도 우기익이 당선된 것을 보았기에, 더 이상의 말은 하지는 않았다.

심장이 답답했다. 태형이 챙겨 줘서 소화제도 먹고 별짓을 다 했는데 아직 체기가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로 인식하는 것과 눈으로 보는 건 매우 다른 일이다.

하린은 현실로 다가온 일이 매우, 현실같지 않게 느껴졌다. 대신 머리가 아득했다.

“밤이 늦었습니다.”

결국 꾸역꾸역 먹다 체한 하린이 가여운 것인지 태형은 하린의 손을 만지며 그녀의 상태를 점검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태형을 조금 높은 시선에서 하린이 바라봤다.

“아저씨.”

“뭡니까.”

하린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태형의 손 위로 다른 속을 포개며 잡았다.

따뜻하다.

“오늘 하루만 같이 있어 주면 안 돼요?”

태형의 손을 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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