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저씨도 인간이 맞았구나.
그도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항상 전지전능할 것 같고 다른 세계를 살 것만 같던 그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전, 한 번씩 불안해요.”
손에 만지작거리는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단 한 번도 삶을 살면서 행복했던 적이 없는데. 요즘은 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행복한 거면 행복한 거지 왜 불안합니까.”
그도 따듯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아까는 당장이라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찬바람에 얼굴은 시렸지만, 손과 마음은 따뜻했다.
“제가 어렸을 때, 저는 부모님을 한날한시 같은 장소에서 잃었대요. 아무도 그런 말을 해 주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육원 어른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어요.”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다.
조용한 바닷가.
“트럭 사고라고 했던가……. 저만 살았다고 하더라구요.”
인간, 생명 따위 없고 그저 바다의 파도 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이상한 감각이었다.
태형과 자신만이 세상에 남은 느낌.
현실이 아니라 마치 꿈처럼 감각이 무뎌졌다.
“제 인생에서 저는 행복한 적이 없었거든요. 그저 저에게는 불행만이 있었어요.”
허허벌판에 지금껏 차마 내뱉지도 못해, 마음 어딘가에 단단하게 맺혀 있던 것을 처음으로 꺼냈다.
마음 한편이 속 시원하면서도, 추웠다.
세상에 버려졌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자신을 불쌍한 아이라고 모두가 연민했다.
“그래서 불안해요.”
그러나 태형을 만나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하린은 세상이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혹시나 그 반대이면.
“제 불행이, 아저씨에게도 갈까 봐 불안해요.”
내 불행이, 그에게도 가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낮고 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목소리. 태형은 하린의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자신이 그를 좋아해서 이런 것은 아닐 거였다.
“나도 그다지 행복한 사람은 아니라.”
그는 작게 조소했다.
태형의 음성에는 씁쓸한 맛이 났다. 소리에는 맛을 느낄 수 없었으나, 그의 말을 듣는 데 입이 썼다.
행복해질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었으나 할 수 없었다. 그건 자신이 어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으니까.
“우기익이 당선될까요?”
“……당선이 되든 안 되든,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선되어서 아저씨 더 괴롭히면 어떡해요.”
하린은 입을 삐죽거렸다. 만일 정말로 태형을 괴롭힌다면 자신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의 그늘 뒤에서 숨어 덜덜 떠는 짓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자신은 그다지 도움이 될 것이 없었다. 분하고 원통해도 어쩔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려면…… 글 열심히 써야겠다.
그냥 이 정도일 뿐.
“안 될 확률도 높고.”
태형은 하린을 안정시켜 주었다.
“만일 된다고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리깔았던 고개를 올려 태형을 바라봤다. 진지한 눈빛. 냉철하고 차가운 눈 속의 따듯함.
태형의 말에는 이상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말을 믿게 하는 능력. 혹은 안심되게 하는 능력. 그가 괜찮다고 하면 이상하게 괜찮아졌다.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내리며 그에게 아주 살짝 얼굴을 기댔다.
“나중에 이혼하더라도, 우기익이 두렵다면 그 부분은 알아서 해 줄 겁니다.”
괜찮다고 다독이고, 멋진 곳을 데려다주면서도. 선을 긋는 건 멈추지 않는다.
찬 바람이 불었다. 몸을 뒤로 숨기며 바람을 피했다.
추웠다. 마음이 시리고 두렵고.
다가올 미래를 눈앞이 깜깜하였으나 태형과 함께라 두렵지 않았다. 아니 무서우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감정이, 저 안에서부터 존재했던 무언가가 벅차오른다.
날것 그대로의 무엇. 벅차올라 넘쳐흘러 더 이상 막을 수 없는 것.
“……아저씨 좋아해요.”
추운 겨울.
그곳에서도 싹트는 꽃이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렸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바다가 아름다워서, 저녁 달빛이 즐거워서. 오늘 같은 날이 다시금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온갖 핑계를 다 끌어와서라도 하고 싶었다.
하린은 태형에게 다가가 그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태형의 눈동자가 커졌다. 하린은 눈을 꾹 감고 있었다. 숨이 멎는 것 같았다.
태형의 입술은 부드러운 우유의 맛이 났다. 씁쓸한 커피 향과 우유의 부드러움. 아주 잠깐, 부딪힌 입술은 태형의 힘으로 떨어졌다.
“안 됩니다.”
단호한 눈빛과 달리 흔들리는 눈동자. 다행히도 그의 시선에는 불쾌감은 엿보이지 않았다.
그의 손은 하린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다. 잘게 떨리는 그의 손길. 그도 꽤나 놀랐는지 하린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픔이 밀려왔지만 이 정도는 괜찮았다.
참을 수 있었다.
다만 슬픈 건…… 자신을 계속 부정하는 태형의 생각이었다.
“왜……. 왜, 안 되는데요.”
분명 아저씨도 자신을 좋아한다.
그런데 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건데.
하린은 답답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미 다 했습니다.”
“그놈의 1년 후 이혼…….”
그의 고결한 인내심에도 한계는 있을 터. 부정당한 지금, 더 이상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더불어 괜찮은 척 하고 있으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귓가에까지 심장 소리가 거세게 뛰고 있었다.
거절당해서 창피한 것보단, 민망함이 들었다.
하린은 얼굴이 벌게진 상태로 음료를 홀짝거렸다.
“키스해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
그들 사이에 그나마 있던 대화마저 단절되고, 파도 소리만이 들려올 때 하린의 작은 음성이 들려왔다.
“대신 말이라도 편하게 해 주세요…….”
* * *
“조금 걸을까요.”
“네”
잠깐의 침묵에서 나온 대답에 하린은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나와 모래사장을 걸었다. 신발을 신어 걷기가 힘든 탓에, 하린은 신발을 벗고 걸었다.
소복소복한 모래사장을 밟는 소리.
하린은 양손에 신발을 쥐고는 그의 등 뒤를 쫄래쫄래 걸어갔다. 발이 조금은 시렸지만, 밟는 감촉이 좋았다.
“어릴 적 동생이 있었습니다. 여동생이었죠.”
휘청휘청 걷던 하린의 걸음이 멈췄다.
태형이 말을 하면서 걸음을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 아이와 저는 같이 해외로 입양을 갔고, 난 두 번의 입양을. 그리고 그 아이는 세 번의 입양을 갔었습니다.”
하린은 감각적으로 알았다.
그가 이 말을 꺼내는 이유를 말이다. 그는 평소 매우 자신을 숨기는 사람이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자 하는 사람.
그게 어느 누가 되었던 자신을 알리지 않고, 흡사 언제든 사라질 준비를 하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저는 비교적 좋은 집으로 갔으나, 그 아이는 매일같이 폭력에 시달리며 살았습니다.”
하린을 밀어내는 이유를 설명하는 거였다.
아무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을 과거.
그의 고통, 아픔이 담긴 무언가.
“저 또한 지금 양부모님께는 맞은 적은 없으나, 첫 번째 때는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었습니다.”
이 말을 내뱉을 때도 그는 아직,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린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정확히는 그의 앞으로.
“그 아이가 도와 달라고 해도, 심각성을 잘 몰랐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심각성을 알아도, 그때의 저는 도와줄 힘이 없었습니다.”
앞으로 왔을 때의 그의 표정.
“……궁금하지 않아요.”
“그 아이는 그대로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그의 표정은 하린도 매우 잘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내려놓는 표정.
하린은 눈을 붉혔다. 그가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밝히고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공유하는 건 좋으나.
“듣기…… 싫어요.”
이건 아니었다.
“……우하린.”
“아저씨이.”
이런 걸 듣고 싶었던 거가 아니었다.
뭐가 그리 어려워. 내가 좋아하고. 상대도 좋아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뭐 그리 복잡한 건데.
하린은 울먹였지만 울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돕느냐고 물었지.”
그가 거절할 때, 울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찬 바람이 불었다.
분명 아까는 따듯하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고개를 들어 올려 그와 시선을 마주 봤다.
어두운 밤바다와 그의 눈동자는 되게 비슷한 느낌이 든다. 심연의 무언가.
그의 눈동자에는 그가 말하지 않은 그 이상의 많은 것이 숨어 있었다.
바다 같았다.
“그게 내가 널 돕는 이유야.”
“……몰라요.”
그는 내가 불쌍하고, 죽은 여동생 같아서 돕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멍청해서 그런 거 모른다고요.”
하린은 그대로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태형이 다가와 하린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다 넘어질라.”
이런 와중에도 친절한 태형이 못마땅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친절하지만, 착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느 누가, 죽은 동생을 닮은 사람을 결혼까지 시켜 주면서 도와주냔 말이다.
그래 최소한 처음엔 동생 같아서 잘해 줬겠지.
그렇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도 나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의 고귀한 성품에 나이 차이 나는 동생뻘을 좋아한다 말을 못 할 뿐이었다.
더 세월을 산, 어른으로서.
나의 미래를 진정으로 응원하는 거로.
“아저씨가 나를 연민하고, 그저 동생으로만 본다고 해도, 난 아저씨가 좋아요”
하린은 똑똑히 그를 바라봤다.
“그러니 밀어내지만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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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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