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저는 무서워요.”
진심이었다.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엔 자신은 너무 약한 존재였다.
“거머리처럼 아저씨 옆에 붙어 있으면서도, 당장 내일 우기익이 선거에 당선될까 봐 무서워요. 만일 선거에 당선돼서 아저씨한테 피해라도 주면 어쩌지 싶고.”
말이 끊어지질 않았다. 만약 오늘 조 대표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도, 깨닫지도 못했을 거였다.
“그리고 이 중요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게. 제가 너무 멍청해서 미칠 것 같아요. 왜 이런 걸 잊고 있었지?”
눈물이 났다. 두려움에 벌벌 떨어도 나는 당장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냥 무서워만 할 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폭풍처럼 찾아온다.
“우기익이 아저씨와의 결혼을 허락했다는데, 나는 왜 그 당연한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그 돈 귀신이 뭘 요구했을지 너무나도 당연한데.”
하린은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 어딘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주면서까지 태형이 하린을 감당했다는 사실. 좋아하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던 그의 모습.
어쩌면 아저씨도 나를.
“너무 멍청해서 화가 나요.”
좋아하는 게 아닐까.
입으로는 상황을 걱정하고 우는 주제에 마음으로는 안도한다. 미친 것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아저씨가 저를 동생 그 이상으로 봐주는 것 같아서 기대감을 품는 제가 너무 징그럽고…….”
속의 말이 마구 튀어나온다.
울음을 참고자 입을 다물어도 그 사이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눈물을 닦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세계.
강한 사람 뒤에 숨지 않으면 언제든지 목덜미를 잡혀 죽어 나가고 있었다.
“우기익이 서울 시장이 되고. 저는 1년 후에 이혼하고. 아저씨가 미국으로 가겠죠.”
우진화는 40대와 결혼한다고 했다.
만일 자신이 1년 안에 살길을 도모하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우기익의 손안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자신은 필시 우진화보다 더한 삶을 겪게 될 것.
“아무도 없는 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너무 무서워요.”
최악의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린은 떨리는 음성 뒤로, 단발적인 호흡을 했다. 이미 손등에는 떨어진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온갖 생각이 다 든다고요…….”
차 안에는 하린의 음성과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태형은 우는 하린의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다, 그녀의 울음이 점점 잦아질 때쯤 말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가 말하는 그럴 일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기익의 선거를 말하는 것일까.
1년 후 그가 떠나갈 것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떠난 후, 홀로 짐을 짊어질 하린의 두려움을 말하는 것일까.
궁금한 점은 많았지만, 하린은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태형과 있을 때 대화 없이 조용하게 있던 것은 자주 있던 일이 아니었기에 아주 가시방석이었다.
머리가 울리고 띵하게 울렸다. 멍하게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 아마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양의 눈물을 뽑아서 그럴 것이다.
하린은 집으로 오자마자 방으로 향했고, 태형도 비슷했다. 방문을 닫고, 하린은 그 뒤에 섰다.
“하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이 주르륵 내려왔다.
거기서 그런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었는데.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뱉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감았다.
어쩌지.
멍청하게 감정에 휩쓸렸다.
하린은 자기 얼굴을 쓸어 넘기며 자책했다. 아까의 상황을 다시 머릿속에 그렸다.
아저씨가 화를 내는 모습.
당황하는 모습.
우발적으로 물어본, 좋아하냐는 물음.
아저씨가 정말 나를…….
하린은 혼란스러웠다. 만일 그도 자신과 같은 감정이라면 왜 그토록, 자신을 밀어냈는가.
“겁쟁이.”
왜 매번 내가 좋다고 할 때 피하고. 거리를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라고 했는가.
“바보, 멍청이, 말미잘 하…….”
나이 차이 때문일까.
역시나 나이 차이 때문에 그의 고결한 품위에 흠집이 나서.
하린은 젖은 얼굴을 마른 손으로 문질렀다.
점차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차가운 온도에 강제로 정신을 깨웠다.
토끼처럼 붉은 눈. 상기된 뺨.
하린은 천천히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다 화장실을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이대로 그냥 있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충동적으로 말한 것을 후회하고, 그에게 내뱉었던 말들을 곱씹으면서 말이다.
멀고도 가까운 그의 방.
태형의 방 앞에 다다랐을 때, 하린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똑똑-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짧게 노크하니 방 안에서 태형의 음성이 들렸다.
- “네.”
조심스럽게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태형은 일이 다 끝나지 않았는지 의자에 앉아 아이패드로 업무를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만 돌려 하린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무슨 일입니까.”
하린의 눈동자가 주위를 살핀다. 그의 방은 처음 와 본 거였다.
검은색의 침구류와 의자, 온통 어두웠다.
그의 제일 깊은 곳, 심연은 어두웠다. 마치 그의 속 어두운 곳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그게…….”
하린의 방은 밝고, 화사한 것과 대비되었다.
순간 방에 시선이 뺏겼던 하린은 태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죄송해요.”
작은 목소리가 어두운 내부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작디작아서 잘 들리지 않아 금세 사라졌지만.
“잘 안 들립니다.”
그가 딱딱하게 거리감을 주며 말하는 것은 의도해서 말하는 거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알면서도 그가 거리를 보이고 선을 긋는 것을 보면 마음이 괜히 저렸다.
“죄송해요.”
“뭐가 말입니까.”
시선을 떨구며 말하는 목소리를 작았지만 아까보다는 컸다.
바닥으로 시선이 향했다.
문턱 앞에 가지런히 모인 하린의 발, 꼭 이것이 그의 선 같았다.
“제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죄송해요…….”
그녀는 차마 태형의 방에 들어가지 못한 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할 말 못 할 말 가려서 해야 하는데…… 정신, 돌아왔어요…….”
태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이 없자 하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는 꽤,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하린은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뜯었다. 딱딱거리는 소리가 둘 사이의 공백을 채워 줄 때쯤,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다, 같이 가 보겠습니까.”
“네?”
무슨 의중으로 물어보는지 몰랐다. 하린이 멍청하게 되물어보니, 그는 담백하게 대답했다.
“기분 전환하는데 좋을 겁니다.”
눈동자를 굴렸지만, 하린이 할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네. 좋아요.”
* * *
“여기는 어디예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왔다. 태형은 자주 오는 곳이었는지 내비게이션도 틀지 않고 왔다.
촤악-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아쉽게도 어두워서 바다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적하니 기분 전환만큼은 확실히 되는 것 같았다.
“동해입니다.”
늦은 저녁이어서 인적이 드물었기에 바다가 잘 보이는 곳 탁 트인 곳.
차는 어느 한적한 바다 근처에 멈춰 섰다.
태형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그가 내리자 하린도 따라 내렸다.
“뭐 하세요……?”
조수석에서 내려 태형을 보는데 그는 트렁크 문을 열고는 손수 움직여 물건을 정리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바다를 보고 앉을 수 있게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다.
왜 평소 끌던 세단이 아닌, SUV를 끌고 나오나 했더니 이 이유였다.
“전에 몇 번 올 때 이렇게 했는데 꽤, 괜찮습니다.”
그가 마련해 준 자리에 앉고는 오면서 사 온 따뜻한 음료를 손에 들었다. 태형도 옆에 앉았다.
“좋아요.”
평소보다 가깝게 태형과 같이 앉으니, 그의 향이 느껴졌다. 파도와 함께 바람이 불어올 때면 짠 내음과 함께 그의 향이 더욱 짙게 다가왔다.
머리가 바람에 흩날린다.
따뜻한 음료 덕일까, 아니면 태형이 가까이에 있어서 그런 것일까.
따듯하다…….
그저 확 트인 곳에서 파도 소리를 듣는 것뿐인데, 마음이 침착해지는 것 같았다.
“바다 자주 와 봤습니까.”
“아뇨. 저는 이번 바다가 두 번째예요.”
“첫 번째는 언제였습니까.”
“……아저씨 처음 만난 날이요.”
저번에 보았던 파도는 꼭 오라고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면, 오늘 파도는 아주 마음에 평화를 찾아 주는 것 같았다.
마음 문제일까.
그날은 정말로 죽기를 바랐었고.
오늘은 살기를 바랐으니까.
“그날은 정말이지 미래를 더 이상 꿀 수 없다고 생각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였고……. 아저씨도 만났죠.”
“그렇군요.”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시 봐도 아름답네요. 바다라는 것은 신기한 것 같아요.”
“저도 뭔가 내 마음처럼 안 풀리면 바다를 보곤 합니다.”
아까만 해도 조금 어색했는데 어색함이 풀렸다. 하린의 시선이 바다에서 태형에게로 갔다.
“아저씨도 뭔가 안 풀린다고 생각이 들 때가 있나요?”
온 세상의 사물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와 있는 시간이 값지고 소중했다.
꿈만 같은 시간, 어둡고 찬란했다.
그의 시선과 하린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스킨십 하나 없이 그저 눈빛 하나로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
“나도 인간인데. 당연합니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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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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