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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40화 (40/75)

#40화

몇 시간 전.

출근한 태형이 업무를 보고 있는데 하린에게 연락이 왔다.

「3시에 청담에서 보기로 했어요.」

기어코 보나 보군.

쯧, 태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괜히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김 비서를 불러 하린을 데리러 가라고 지시했다.

신혼집은 그간 답답하게 살아왔던 하린을 위해 부지가 큰 곳으로 고른지라, 넓고 공기가 좋은 대신 교통권은 좋지 못했다.

그나마 당장 이사가 가능한 마땅한 매물이 없어서 고민하던 때 나온 곳이었다.

기사를 붙여 줄까 고민을 하긴 했었으나, 하린이 낯선 사람을 무서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그나마 자주 본 김 비서를 시키는 거였다.

뭐, 문제 될 것은 없겠지.

핸드폰을 내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우하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툭 건드리면 당장 죽을 것 같다가도 잡초처럼 살아난다. 이번에도 책을 써 본다고 하여 무슨 생각이나 했더니 나름 고민한 흔적이 엿보였다.

그 작은 머리로 살아 보겠다고.

태형은 피식 웃었다.

“잠깐.”

그러다 문득 단순히 넘어가 놓치고 있던 부분 하나를 깨달았다.

“우기익 선거.”

태형은 우기익의 선거를 의도적으로 하린에게 알리지 않았다.

간신히 회복해 가는 정신력에 우기익의 ‘선거’라는 변수는 우하린에게 상당히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린 근처에 있는 인물들에게는 태형이 지시를 내렸다.

“우하린 근처에서는 절대로 선거 관련, 정치 관련 말하지 마세요.”

이 지시는 하린이 병원에 있을 때부터였다. 그래서 하린이 있는 VIP룸에도 당연히 있어야할 TV도 없었던 거였다.

물론 핸드폰으로도 알 수는 있었으나, 그녀의 평소 핸드폰을 사용하는 범위를 알았기에 비교적 깊게 고려하지 않아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조 대표는 달랐다.

하린이게 많은 정보를 줄 수 있는 인물이었고, 그녀를 뒤흔들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 생각이 닿자, 태형은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발적인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김 비서는 전화를 받았다.

태형은 앞뒤 자르고 본론만을 말했다.

“우하린, 데려다줬습니까?”

[네, 방금 가셨습니다.]

왜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지.

태형은 어제 조 대표를 만나는 것을 잠시 미루라고 해야 했었다. 최소 우기익의 선거가 끝날 때까지라도.

후회해 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태형은 그 말을 듣고 바로 겉옷을 챙겨, 하린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익히 아는 공간이었기에 도착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태형이 도착하고, 주위를 살피는데 하린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뭐야.

태형은 순간적으로 나오는 욕지거리를 참지 못했다. 이 상황이 그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하린이 조 대표 따위를 만나기 위해 평소보다 신경 써 꾸민 것도. 조 대표가 하는 말도 다 맘에 들지 않았다.

저 새끼가.

그리고 순간 폐부를 꽉 잡아 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혼하면 나는 어떻습니까?”

아주 말로 표현할 수 없게 기분이 더러웠다.

* * *

“어, 아저…….”

선거의 충격도 잠시.

하린은 순간 태형이 왔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좋아 그를 부르려다 아차 했다.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 괜히 조 대표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닌가, 상관없나.

하린은 눈동자를 괜히 굴렸다. 그전까지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못 받았는데.

원래 결혼한 사이에…… 아저씨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건가?

라고 생각하던 틈에 조 대표의 표정을 보고 은연중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닌 게 맞았다.

왜냐하면 조 대표가 하린의 절반만 나온 말을 듣고 다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

“어, 어떻게 왔어요……?”

태형은 하린과 조 대표 둘을 번갈아 보더니, 하린을 끌고 와 어깨에 손을 둘렀다.

어……?

강한 힘이 태형의 품 쪽으로 끌어당겼다.

“결혼 전에 둘의 관계를 아는데, 괜히 좀 걸려서.”

“누가 보면 제가 불륜이라도 저지르다 걸린 것도 아니고, 강 지사장 눈빛으로 사람 죽겠습니다.”

“제 아내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 조금 불쾌하군요.”

대화가 왜 이런 거지.

하린이 둘의 대화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조금 늦은 후였다.

둘의 견제에 가운데에서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웃고 있지만 웃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 저…… 그게 아니라.”

“물론 두 분 사이가 아주 돈독하다면 제가 끼어들 공간은 없겠죠. 진정하세요.”

하린이 만류하려고 하자 조 대표가 적당히 마무리 지었다.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말이다. 조 대표는 웃으며, 진정하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아까의 진지해 보였던 얼굴은 다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제 아내를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하나, 다음에는 이런 일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군요. 불쾌합니다.”

물론 아저씨는 그 모습을 보고 더 감정이 상하는 듯 보였지만…….

“아내와 갈 곳이 있는데 대화는 다 끝나셨나요?”

태형은 말을 이어 바로 말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하린에게 시선이 향했다. 하린은 순간 몸이 경직되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이 아직 자신의 어깨에 둘러져 있는 것도 있지만.

눈빛이 꼭…… 혼나는 것 같았다.

“말은 다 했습니까?”

“네…….”

아니 사실 정확하게는 질투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아니겠지.

둘은 장소에서 벗어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자동차에 타는 태형을 바라보며, 하린 또한 조수석에 탔다.

“왜 그런 말을 듣고 있습니까.”

신경질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나랑 1년 후 이혼하면, 바로 조 대표와 결혼이라도 하려고 하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그런 말을 왜 들으면서 앞에 앉아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린은 순간 의문이 들었다.

내가 왜 혼나고 있는 거지.

분명 태형은 1년 후 이혼이라는 명목을 걸었다. 물론 내조니 뭐니 아내로서의 의무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거기에 다른 사람을 만나도 된다는 말은 없었으나.

평소 태형이 보이는 태도상 왜 화를 내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이 1년 후에 조 대표와 결혼을 해도 상관없는 지점이었다.

……물론 그럴 생각은 없지만.

“누누이 말하지 않습니까. 이혼하고 적당히 내가 적당히 챙겨 주면 자기 삶 살아 보라고.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문득 억울함이 밀려왔다.

그 말을 듣고 일어서지 못한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잘못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저씨…….”

“내가 당신을 돕는다고 한 건 당신이 잘되기를 바라서였지 나나 조 대표같이 늙고 추악한 사람들에게 돌려지라고 돕는 게 아니야.”

“왜 말을…… 그렇게까지 하세요.”

입술이 저절로 떨렸다. 이런 말까지 들어가며 혼나는 이유도 모르겠다.

“저는 아저씨가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물론 이런 관심이라도 받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과는 반대로 태형의 논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막말로 제가 이혼하고 조 대표랑 결혼. 할 수도 있겠죠. 그렇게라도 살고는 싶으니까요…….”

그의 말뜻은 이해가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는다.

하린에게 태형은 귀인, 좋으신 분, 좋아하는 사람으로 점차 감정이 발전했다. 만날수록 알게 될수록 그가 좋았다.

그러나 태형에게 하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쌍한 애였다.

딱 그 정도까지.

그는 항상 그렇게 말해 왔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신경질적인 음성이 허공에서 울렸다.

도와주는 이유도 ‘딱해서’라고 말하는 그.

딱한 아이 도와주기 위해 그 많은 돈을 쓰고, 집을 사고, 일하다 와서 화를 내고.

말이 되지 않았다.

하린은 매번 그가 피해 오던 지점에 의문을 가졌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말을 내뱉을 이유가 없었다.

고조되어 휘몰아치는 감정, 의문 속에서 무언가가 형상화되어 튀어나온다.

아니겠지.

설마,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것이 아니고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저 좋아하세요?”

딱딱해진 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우하린.”

“그런 표정으로 보는 거 싫어요. 그게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아요.”

“뭐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의 대화가 그 역시도 이상함을 깨닫는 듯했다.

“왜, 우기익한테 돈 줬다고 말하지 않으셨어요.”

“조 대표가 그런 말까지 했습니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이 짜증 나던가.

“조 대표가 말한 건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제가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즐거웠지만, 누군가에게 기생해 살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이럴 거였으면…….”

“우하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우기익은 이런 것을 그냥 둘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은 세 번이 되어 끝없이 반복된다.

그것을 제일 많이 경험하고 본 인물이 자신이었다.

나 때문에, 아저씨가 그런 취급 받는 게 싫어.

약점을 보면 이빨을 드러내 목덜미를 물고 놔주지 않는다. 살고자 발버둥 치면 더더욱 잔인해지는 것이 우기익이었다.

“우기익의 집으로 갈래요. 돈 돌려받게…….”

하린이 시선을 떨구고 말하니, 태형은 그 말을 듣고는 미간을 사납게 구겼다.

“네가 그날 무슨 꼴을 당했는지 알면서.”

그러고는 하린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돌려 자신에게 시선을 보게 했다.

거센 손아귀의 힘에 아픔이 밀려왔다.

“처음에 너 스스로 죽겠다고 물에 빠진 거 살린 것도 나였고. 우기익의 손에 죽어 가던 거 살린 것도 나였어.”

거친 호흡.

태형의 숨결이 가까이에서 닿는다.

“그런데 내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을 해.”

태형이 화를 내고 있었다.

하린은 태형과 강제적으로 시선이 맞닿았다. 하린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가서 네 양아비한테 말해. 강태형이 돈 돌려 달라고 했다고.”

감정의 깊이. 처음으로 화를 내고, 감정을 보이는 태형을 보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우기익이 그런 너를 잘도 그냥 두겠어. 어쩜 그렇게 생각이 짧아.”

무서웠다.

“어쩜 그렇게 멍청하게 생각해.”

여린 어깨가 저절로 떨린다.

태형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도 무섭고, 자신 때문에 우익에게 큰돈을 주었던 현실도 싫었다.

“……맞아요. 저, 멍청해요.”

아니 미래가 무서웠다.

“그래서 우기익 선거도 부러 숨기고 계신 거잖아요. 나는 말 안 하면 모르고 단순하고 멍청한 애니까.”

그중 제일 무서운 건 나였다.

‘아저씨도 나를 좋아해.’

이 상황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

“아니, 사실 다 괜찮아요. 다 상관없어요. 그냥 저는.”

저 때문에 우기익에게 끌려다닐 태형의 상황을 뻔히 걱정하면서도 위선적으로 걱정하는 나.

“아저씨가 좋아요, 좋은데 무섭고, 걱정돼서…….”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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