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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39화 (39/75)

#39화

태형이 출근하고, 하린은 조 대표에게 연락했다.

껄끄럽기보다는 마음이 불편한 상대인지라, 그가 전화를 안 받거나 혹은 자신에게 화를 내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린의 생각은 기우였다는 것을 말해 주듯, 조 대표는 굉장히 예의 있게 하린과 통화를 했다.

「3시에 청담에서 보기로 했어요.」

전화를 끊고, 태형에게 연락을 남겼다. 대답은 오지 않았으나, 약속 시간에 출발하려고 준비를 끝냈을 때쯤 김 비서가 도착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김 비서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하린도 똑같이 인사했다. 인사를 하며 눈을 마주쳤는데 순간 김 비서의 시선이 꽤 길게 달라붙었다.

이런 옷을 입는 게 역시나 좀 별로인가.

“이, 이상한가요……?”

“아, 아닙니다.”

하린은 차에 타면서 괜히 옷을 만지작거렸다. 입으면서 미리 떼지 않은 가격표를 보았는데, 가격을 보고 하린도 다시금 놀랐었다.

비싼 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비싼 건 줄은 몰랐으니까.

전반적으로 격식 없는 느낌의 옷은 없는지라 네이비색의 몸에 딱 맞게 달라붙는 원피스에 롱부츠를 신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두꺼운 모직 코트를 입었다.

그나마 있는 옷 중에 무난해 보이는 거로.

“지난 번 뵀을 때와 느낌이 달라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 아저씨가 준비해 주신 옷이 대부분 좀 비싼 옷이 많더라고요. 잘 안 어울리죠?”

엔진 소음. 분명 좋은 차라 소리가 많이 안 나는 데에도 불구하고 잠깐의 정적에 엔진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잘 어울리십니다.”

“감사해요. 김 비서님 덕분에 자신감이 조금은 더 생기는 것 같아요.”

김 비서는 그 이후 대답이 없었다. 물론 이전에 몇 번 봤을 때는 인사만 했었기에 오히려 오늘이 조금 이상한 거기도 했다.

아저씨와 김 비서.

둘은 묘하게 비슷한 분위기가 난다. 태형이 종종 말할 때 제일 많이 언급하는 사람이 김 비서인 것을 보면, 둘은 꽤나 오래된 사이 같아 보였다.

아저씨에 대한 걸 조금 물어볼까.

하린은 순간 태형에 관해 관한 것을 물어볼까 했지만, 마음을 달리했다.

아니다. 괜한 짓 하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덧 풀이 우거진 풍경에서 딱딱한 도심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하린은 창밖을 보며 어제 그와의 대화를 상기했다.

강태형.

그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차에서 내려 김 비서에게 인사한 뒤 하린은 장소로 향했다.

장소는 호텔에 딸려 있는 카페.

하린은 약속한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으나 발걸음을 빨리했다. 조 대표는 보통 약속된 시간보다 일찍 도착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예요.”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조 대표가 더 일찍 와 있었다. 하린은 그에게 다가가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 잠깐 빠르게 뛰었다고 숨이 찬다.

“뛰어왔나요? 안 그래도 되는데.”

“먼저 와 있으실 것 같아서. 제가 먼저 오려고 했는데…….”

“일단 앉아요.”

“네.”

하린은 그의 앞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하린이 잠시 쉬는 동안 사람을 불러 하린이 마실 음료를 시켜 주었다.

“요즘은 뭐 하고 지냈나요?”

음료가 나오고 조 대표는 잔을 하린 쪽으로 가져다주며 물었다. 하린은 그의 상냥함에 고개를 잠시 꾸벅 숙였다.

“그냥…… 병원에서 치료받고. 그 이후에는 조금씩 이것저것 해 보려고 하고 있어요.”

“이것저것?”

“아직 구체화한 건 아니라……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말씀드릴게요.”

하린은 그가 시켜 준 딸기 라테에 꽂힌 빨대에 입을 대었다. 쭉 빨아서 마시니 달콤한 딸기향이 풍겼다.

저번에 커피를 못 마시는 것을 보고는 조 대표는 하린이 마실 수 있는 음료를 종종 시켜 주었는데.

말하지 않아도 세세하게 기억하고, 행동해 주는 것이 그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그건 그렇고, 저번이랑은 또 스타일이 달라졌네요. 느낌이 또 달라진 것 같아요. 강 지사장이 잘해 줘요?”

“그, 그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미안한 감정이 크지만 그렇다고 말하지 않고 넘어갈 것도 아니었기에 하린은 두 눈을 꾹 감았다.

“죄송해요. 조 대표님 정말 감사하고, 그때 대표님이 말해 주신 말들 다정하게 행동해 주신 것들도 다, 알고 있어요.”

평소 생각하던 것을 내뱉었다. 그러나 해소되지 않는 무언가 있는 것처럼 찜찜함이 들었다.

“……진심이에요.”

“결혼하기로 양가 협의까지 보았던 여자가 갑자기 증발하니 저도 물론 놀라긴 했었습니다. 초반엔 당황스러웠고, 이후에는 썩 유쾌하지는 않더라고요.”

평소 음성의 톤이 아닌 조금 더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평소 그의 목소리. 그는 진솔하게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늘 조금은 가벼워 보이던 사람이 오늘은 달랐다.

“이후에는 궁금해졌습니다. 원래 우 대표는 둘째인 우진화 양과 결혼을 시킬 작정으로 강 지사장을 엮었는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하린은 그 말을 들으며 할 말이 없었다. 말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또한 그 많은 일은 조 대표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아, 우진화 양은 다른 대표랑 결혼하게 되었다는 거 들었나요?”

“네? 아뇨, 처음 들어요.”

“누구더라. 이제 겨우 스물이 된 아가씨를 40도 넘은 사람이랑 결혼을 시킨다던데. 보면 우 대표도 정말 잔인한 사람이야, 친딸을.”

“40대요?”

“원래 결혼하기로 말이 나왔던 강태형이 하린 양과 결혼한다고 하니 우 대표 마음이 급했던 것 같죠?”

아…….

우기익이 평소에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보다 더한 놈이랑 결혼을 시켜 버릴 거라고 했던 말.

그랬던 말들은 한 치의 거짓 없이 진심이었다.

“하긴 선거가 코앞이니 마음이 급하긴 했겠죠. 뭐 그것도 당장 내일이면 결과가 나오지만…….”

선거가 내일.

하린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 우기익은 선거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우진화와 자신은 우기익의 정치 자금이 되기 위해 이리저리 팔려 다녔다.

왜 이걸 잊고 있었던 거지?

하린은 머리를 무언가로 맞은 것처럼 순간 강한 파장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현실에 대한 자각이 현저히 떨어졌다.

우기익이라는 인물에 떨어져서 나와서일까 혹은 지금껏 폐쇄된 공간에서만 있어서일까.

그렇지만 이렇게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다고.

어느 순간부터 하린의 삶에 선거라는 건 없는 일처럼 되어 있었다.

병원에서도 집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특히나 병원이나 집에서도 TV가 없었기에 외부 정보가 차단되었고. 핸드폰도 병원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잖아.

앞에서 조 대표가 하린을 불렀다. 다만 하린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 순간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린 양?”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뭔, 가요?”

“소문에는 강 지사장이 하린 양에게 눈이 돌아 도둑 결혼이라도 했다는 등의 소문이 도는데. 나는 우리 세 명이 보지 않았습니까? 분명 그날은 처음 보는 것처럼 굴었고.”

“네…… 그랬었죠.”

“심지어는 강 지사장이 하린 양과 결혼을 하려고 우 대표에게 지원한 자금이 꽤 크더라고요. 저는 도저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아요.”

세상엔 비밀은 없었다. 아무리 비밀로 하고자 해도 결국에는 다 티 나기 마련이었다.

이를테면 태형과의 관계도 그러했고.

“우 대표가 중간에서 낀 것이 아니라면, 강 지사장이 사랑놀이에 눈이 뒤집혔다는 건데. 그런 스타일은 아니고.”

“……그, 그게.”

태형이 우기익에게 돈을 주었다는 것도 그러했다. 하린은 태형이 돈을 주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래서 그냥 생각했습니다. 내가 맨 처음 하린 양에게 제의했던 것처럼 둘 사이에도 모종의 무언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합리적인 의심. 조 대표는 태형과 하린의 관계를 의심했다.

분명 저번만 해도 알지 못했던 두 남녀가 갑자기 결혼했다. 심지어 둘은 각기 다른 결혼을 할 사람을 두고 있었다.

“하린 양은 나보단 강태형이 낫다고 판단을 했을 것이고?”

그러니까 그냥 하린과 태형이 쇼윈도 부부가 아니냐는 말. 그의 말이 맞았다. 그래서 더욱 대답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만일 그게 맞았다면…….”

조 대표는 웃었다.

하린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자기 생각이 대략은 맞았다고 생각한 거였다.

“이혼하면 나는 어떻습니까?”

“네?”

왜 대화가 이렇게 이어지는 거지. 하린은 자신이 제대로 대화를 이해한 건지 의문스러웠다. 표정에서 드러난 하린의 얼굴에 조 대표는 더욱 친절하게 설명했다.

“저는 이혼녀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하린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손을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오늘 조 대표와의 대화는 너무 버거웠다.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잔혹했고, 조 대표의 의문은 취조에 가까웠으니까.

하린이 당황할 때, 앞에 있던 조 대표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 갔다. 느릿하게 걷는 발걸음 소리.

구두 소리.

자신을 보던 시선이 어깨 뒤 무언가로 향할 때 하린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뭐지?

익숙한 향기.

짙은 스킨향이 밴 머스크 향.

“지금 제 아내에게 무슨 말을 내뱉는 거죠?”

태형이 뒤에 있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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