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태형과의 대화를 나누고 하린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내 방.”
물론 자신의 방이 아니라 1년 잠시 묵는 곳이 되겠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고,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
하린은 아까 태형이 준 핸드폰을 들고 와 침대에 앉았다. 오랜 시간 쓰지 않아 핸드폰은 방전되어 있었기에 충전기에 꽂아 놓고 방을 살펴보았다.
하린의 방은 깔끔한 화이트 톤으로 맞춰져 침대, 화장대, 옷장 등 있을 것만 있는 아주 깔끔한 모습이었다.
하린은 아까 미처 살피지 못한 자신의 방을 살폈다.
화장대에는 여러 기초 화장품부터 색조까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누가 준비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아주 세심한 분의 손길인 듯했다.
“옷장에 뭐가 있나.”
옷장을 열어 보니, 드레스 룸이 작게 연결되어 방이 하나 더 보였다.
와, 하린은 작게 음성을 뱉었다.
“이게 다 뭐야.”
눈이 휘둥그레질 만한 드레스 룸.
오른쪽에는 가방이 왼쪽에는 계절별로 옷이.
중간에는 액세서리가 맨 끝에는 신발들이 줄지어 정리되어 있었다.
천천히 다가가 옷을 살피고 가방을 살피니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는 물품들이었다.
“아저씨 진짜…… 돈 많은 사람이었구나.”
이렇게 돈도 많고 부족함 없는 사람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좋아해야 하는데.
자신의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는 품으면 안 되는 마음을 품는 게 문제였다.
나와 다른 사람이라 붙잡았고.
나와 다른 사람이라 좋아했다.
그러나 그 격차가 지금에 와서는 걸림돌이 되었다.
“명품이라…….”
화려한 물건들과 집, 명품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터덜터덜 드레스 룸을 벗어나 침대에 다시 앉았다. 핸드폰을 확인해 충전 단자에서 뺐다.
그리고 핸드폰 전원을 켰다.
징- 징, 몇 번의 진동이 느껴지고 핸드폰이 켜지자 기존에 와 있었던 연락들의 알림이 울렸다.
그중 하나는 우기익이었다.
「전화 받아.」
「연락해.」
「이렇게 피한다고 해서 네년이 내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전화 받아.」
우기익은 전화와 문자를 골고루 했으며, 하린이 의도적으로 전화를 안 받는다고 생각했는지 하린을 계속해서 겁박하는 문자를 보냈다.
하, 저절로 나오는 한숨에 하린은 다른 연락을 봤다.
「하린 양 무슨 일 있나요?」
「내용 들었습니다. 걱정돼서 그러니 연락 좀 받아 줘요.」
「우 대표와의 일은 들었습니다……. 나중에라도 괜찮으니 마음이 조금 좋아지면 연락 바랍니다. 건강하길 바라요.」
조 대표였다.
하린은 부채감이 들었다. 그와 결혼을 목적으로 만나고 있었고, 마지막의 순간까지 저울질했다.
우기익에게 도주 계획을 걸린 후, 태형과 결혼을 하기까지 그를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으나 회피했다.
마음이 무거워서. 미안해서.
자신도 살고자 했던 행위지만, 어찌 되었든 누군가의 진심을 이용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이 맞았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언가 행동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물론 핸드폰이 그때 당시 손에 없었기에 그가 어떤 말을 내뱉으며 걱정을 했을지는 몰랐다.
그러나 이제라도 연락을 본 지금…….
“미안하다고 말해야지.”
부채감에 마음이 불편했고, 그와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우기익이 위험함을 제일 먼저 알고는 하린에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
그는 계속 자신에게 진심이었다.
* * *
아침이 밝았다.
새집에서 맞이하는 아침. 눈을 뜨니 창문으로 비춰오는 햇살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는 아침이었다.
아니 그냥 환경이 바뀌어서일 수도 있고.
침대에서 꼼지락거리다 순간 태형이 생각나 하린은 벌떡 일어났다.
시계를 바라보며 시간을 확인해 보니 7시.
방문을 열어 힐끔 내다보니 태형이 자고 있을 안방에 아주 조심스럽게 귀를 대었다.
물소리 같은 것이 나는 게, 씻는 것 같은데.
하린도 후다닥 들어가 얼굴만 간단히 씻고 밖으로 나왔다. 냉장고를 살펴보니 달걀이랑 식빵이 보였다.
부엌에서 서성거리며 이것저것 만져 보니 뭐가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달걀을 그릇에 풀고, 식빵을 먹기 좋게 잘라 묻힌 후, 팬에 굽는다.
태형에게 간단한 아침을 만들어 줄 요량이었다.
자고로 ‘먹정’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비록 요리 솜씨가 매우 좋은 것은 아니라 해도, 자주 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보면 지금보다 더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린은 그렇게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좋아하는 마음과 별개로 어찌 되었든 하린은 지금 태형과 최대한 친해져야 했다.
살고자 한다면 살 방법을 마련해야 했으니까.
주제넘은 생각이어도 어쩌겠는가. 조금씩 가랑비 젖듯 스며든다면 그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그가 그것을 이성적으로 받아 준다면 제일 최선이지만…….
태형이 조금만 날을 세워 혼내면, 덜덜 떠는 주제에 아주 앙큼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불에 달군 팬에 버터를 올려 녹인 후, 달걀에 묻힌 식빵을 올렸다.
부엌에 고소한 냄새와 지글지글한 소리가 들리자, 태형이 밖으로 나왔다.
“뭐 합니까?”
“아, 나오셨어요?”
하린은 커피 추출기로 그에게 줄 커피를 내렸다. 위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피가 내려온다.
하린은 그사이에 굽고 있던 빵을 그릇에 담아 그 위로 설탕을 솔솔 뿌렸다.
“아침이에요! 따로 잼이 없어서 설탕 뿌렸는데.”
“저 아침 안 먹습니다.”
하린의 밝은 미소가 태형의 한마디에 콰직 무너졌다.
“아, 아…… 진짜요?”
미소는 어디로 갔는지 울상 짓는 얼굴만 남았다.
“제가 여쭤봤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이건 제가 먹을게요. 그럼 커피라도.”
“내가 이런 거 하라고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낮은 음성이 하린의 행동을 꼬집는다. 그의 차가운 눈빛과 말에 하린은 침울해졌다.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태형의 시선에 덜덜 떨던 하린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하고 싶어서 했어요…….”
* * *
하린은 입술을 오리 주둥이처럼 내밀었다. 축 어깨를 늘어트린 하린의 모습을 보며 태형이 손짓했다.
“……오늘은 먹고 가겠습니다.”
“정말요?”
말 한마디에 뭐 이리 표정이 변해서야.
태형은 하린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주 저 작은 머릿속에서 열심히도 생각했군.
환심을 사려는 행동인 것을 모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하린은 기본적으로 누구를 속일 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천성이 누굴 속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만일 그녀가 남을 잘 속일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하린은 지금처럼 순수하게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도 양아비가 우기익인데.
태형은 식탁에 앉아 손짓했다. 그러자 하린이 접시를 가운데 두고, 포크를 준비해 태형의 앞에 놓았다.
아침부터 발걸음 소리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뭘 하나 했더니.
“맛이…… 괜찮아요?”
태형이 먹기를 기다리다 하린이 물어왔다. 기대감이 담긴 얼굴.
흡사 칭찬을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 같았다.
“먹을 만합니다.”
“후우…… 다행이다.”
그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하는 표정.
하린의 얼굴을 보며 시선을 회피했다.
이 관계는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니다. 태형이 시선을 회피하는 이유였고, 혹여나 생길지도 모를 감정을 대비하는 이유기도 했다.
물론 하린을 볼 때 친동생을 대하는 마음일 때도 혹은 연민하여 잘해 줄 때도 있었다.
기특할 때도 있고 귀엽다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것은 그것일 뿐.
이성적인 감정을 갖는 데에 필요한 면죄부는 아니었다.
우하린이야 어리다고 치고.
자신은 어른이 돼서 그러면 안 되지 않는가. 심지어 한국에 놀러 온 것도 아니고.
그래서 보고 있자면 두려울 때도 있었다.
충동적으로 행동을 하게 하는 우하린.
특히 한 번씩 세상에 처음 나온 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일 때면.
흰 도화지같이 해맑고 티 없이 굴 때면.
젖먹이 아이처럼 짹짹거리며 울고. 또 언제 울었느냐는 듯 두 눈을 반짝거리며 쫄래쫄래 따라다닐 때.
이상한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었다.
망가트리고 싶고, 울리고 싶고.
……울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애초에 태형은 그다지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음습하고 위험한 구석이 그의 깊은 곳 어딘가에 숨죽여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것을 알기에, 지금껏 절제하고 자신을 단속해 왔다.
‘미친 생각 하지 마.’
속이 뒤틀릴 것 같아, 먹던 빵을 내려놓고 커피를 마셨다. 입 안이 쓰다.
“저…… 아저씨.”
“뭡니까.”
“저 오늘 조 대표님 만나도 돼요?”
“조 대표?”
갑자기 하린의 입에서 나오는 조 대표라는 단어에 태형은 사색에서 빠져나왔다.
왜 갑자기, 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 관계는 자신이 구속하려고 만든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 거 일일이 허락 안 받아도 됩니다.”
“네에.”
왜 내내 가만히 있다가 조 대표를 만난다는 거지. 태형은 가만히 앞에 있는 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린은 볼이 빵빵하게 자신이 만든 빵을 입 안에 넣고 있었다.
“어디서 보기로 했습니까?”
“아직 정하지는 않았는데…….”
맘에 들지 않는다.
“이곳은 차가 안 다니는 곳이라, 목적지랑 시간 알려 주면 김 비서를 보내겠습니다.”
지은이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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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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