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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37화 (37/75)

#37화

처음 받는 칭찬에 하린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었다. 너무 즐거운데 반대로 마냥 좋지는 못했다.

“왜 그런 표정입니까.”

“칭찬…… 처음 받아 봐요.”

부끄러웠다.

귀와 뺨, 목까지. 푹 숙인 하린의 얼굴 위로 붉게 달아오른 피부가 보였다.

태형이 자신의 모습에 웃자, 하린은 더 붉어진 얼굴로 태형을 올려다봤다.

속이 울렁거려, 누군가가 인정해 준다는 것이 원래 즐거운 건가.

“웃, 웃지 마세요…….”

“아까까지만 해도 말 잘해 놓고, 왜 갑자기 부끄러워합니까.”

“……몰, 라요.”

하린은 열 오른 뺨을 손으로 만지며 열감을 내리려 애썼다. 그러고 나서는 말을 돌리려고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왜 1년이라는 기간인 건지 궁금했다.

“그…… 기한을 1년이라고 하셨는데 왜 1년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지사장으로 왔지만 저는 이번 사업 본부에서 성과를 만들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그 기간이 1년입니다.”

“그럼 1년 후에 아저씨는 한국에 없을 수도 있겠네요……?”

“예.”

어찌 보면 1년짜리 계약 결혼.

하린의 인생에서 보면 시한부일지 몰랐다.

“그러니까, 1년 동안 잘 홀로서기를 준비해 보세요. 내가 없이도, 잘살아 볼 수 있도록.”

그와의 거리, 아무리 해도 가까워지지 않는 틈새. 그는 항상 그래왔다.

“이번이야 어쩔 수 없었지만, 이혼 후 비슷한 나이 또래와 만나세요. 그런 면에서 아까 말한 그런 목표 좋습니다. 우하린, 당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을 만들고자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하린을 위한 말을 내뱉을수록, 하린은 아까와 달리 행복하지 않았다.

너와 나는 가는 길이 다르다. 네가 가야 하는 길에는 내가 없다. 그러니 이상한 기대 하지 말고 살길이나 모색하라.

그 와중에도 태형의 말이 하린을 위한 말이기에 반박도 할 수 없었다.

하린은 가슴이 찌르르 울리는 것 같았다.

“대답.”

하린이 대답하지 않고 있자 태형은 하린에게 대답을 강요했다.

하린은 물어보고 싶었다.

만일, 누군가가 마음이 생겨 버리면요?

이미 좋아진 마음은 어떡하죠?

그렇지만 물어볼 수 없었다. 그에게 받는 거절은 이미 몇 번이나 받았다.

“네…….”

그가 주는 상처는 아프다.

“그게 이치에 맞는 겁니다.”

둘은 그렇게 대화를 다 나눴을 때쯤. 벌써 식사 시간에 가까워졌다. 태형은 밖의 해가 지는 것을 보며 말했다.

“저녁 시간이 다 된 것 같네요. 나가서 사 먹겠습니까, 아니면 간단히 집에서 해 먹을까요.”

챙겨 주는 건 잘하면서 거리감을 주는 것도 참 잘한다. 시무룩한 하린은 부엌 쪽을 힐끔거리며 대답했다.

“저…… 요리 못하는데…….”

우기익이 신부 수업을 제대로 해 줬을 리 만무했고. 평소 그렇다고 그 집에서 마음 편히 요리해서 먹지도 못했다.

그냥 사용인들이 만들어 둔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 게 더 많았다.

“내가 해 주겠습니다.”

“아저씨 음식도 할 줄 아세요?”

“잘은 아니고. 그런데 한국 음식은 못 합니다.”

태형이 일어나서 부엌으로 향하자, 하린도 그의 뒤를 쫄래쫄래 걸어갔다.

“파스타 좋아합니까?”

“네……!”

“기다려 봐요.”

긴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하린은 태형의 모습을 구경했다. 그가 냉장고를 열자 음식 재료는 또 언제 사다 뒀는지, 당장 필요할 만한 재료들은 다 있었다.

후추, 소금, 고춧가루, 설탕과 같이 실온 재료부터 고기 쌀 해산물 등등. 없는 게 딱히 없을 정도였다.

“와, 재료가 다 있네요.”

“미리 김 비서한테 부탁 좀 했습니다.”

그는 능숙하게 올리브 오일과 파스타 면을 꺼내고, 냄비에 물을 받아 올렸다.

“이 집에 들어오시려고 생각했던 건 언제이셨어요?”

“음, 입원하고 나서.”

부엌을 정리하던 그는 움직이다가 잠시 행동을 멈추고 하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만드는 동안 씻거나 해도 됩니다.”

“아니에요. 그냥 보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한동안 하린은 태형이 부엌에서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능숙하게 면을 데치고, 마늘을 넣고. 순서에 맞게 서투르지 않은 손길을 보니 정말 하루 이틀 해 본 솜씨는 아니었다.

그렇게 멋스럽게 담긴 파스타가 눈앞에 놓였다. 넓적하게 넓은 흰 접시에 새우가 들어간 오일 파스타.

조명에 비춰 윤기가 흘렀다.

“먹어 봐요.”

태형이 그릇과 함께 물컵을 옆에 놓으며 말했다. 하린은 그가 앞에 앉기를 보며 포크를 들고 기다렸다.

“오, 맛있어요.”

“맛이 괜찮습니까?”

오. 큰 기대하지 않고 먹었는데 생각보다 더 맛있었다.

“네, 진짜 맛있어요!”

“다행이네요. 냉동실을 보니까 새우가 있어서 마침 만들었습니다.”

“근데 보통 재벌은 요리 같은 거 잘 안 하지 않나요? 우기익은 그러던데…….”

하린은 다시 포크에 파스타 면을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저도 재벌이 아닌 시절이 있었습니다.”

“네?”

움찔거리며 먹던 입이 멈추었다. 미국 기업은 하루아침에 벼락 재벌이 가능한 일도 있다고 했다.

“뭐 10대 때 지금 부모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꽤 오랜 시간을 재벌로 보내긴 했겠군요.”

뭐 어릴 때는 평범한 집안에서 자랐을 수도.

“그렇지만 대학교 다닐 때까지는 아르바이트도 하고, 제 돈으로 학교에 다녔습니다. 양부모님의 교육 철학이어서.”

켁. 결국 먹다가 목에 걸렸다.

양부모님이라니 이게 무슨 말이지. 생각해 보니 하린은 태형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단순히 우기익이 우진화랑 결혼을 시키려고 하니 재벌이라고 생각했었다.

우기익이 어쭙잖은 인물과 결혼시킬 일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외의 이야기는 들어 본 적도 그렇다고 태형에게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양부모님이요?”

“네, 저도 입양되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이어서 말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그냥 지사장이 버는 돈으로 그런 호텔에서 살고 이런 집을 구매하겠습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놀란 토끼 같은 표정으로 음식도 못 먹는 하린을 위해 태형은 차분하게 설명했다.

“저희 양부모님은 제가 있는 그룹 NP의 창업주이십니다.”

“네……?!”

“그렇게 놀랐습니까? 제 부모님은 아이를 낳을 수 없으셔서 저를 입양하셨습니다.”

내가 너무 세상 물정 몰랐구나.

생각해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우기익이 왜 그렇게 눈치를 봤는지. 우진화랑 엮으려 했는지.

그리고 태형이 하린에게 손쉽게 준 큰돈.

병원 기부금 등등. 단순히 지사장이 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너무 당연하게 넘기고 있었다는 사실에, 하린은 자신이 우기익의 세상에 너무 녹아 있었다고 생각했다.

급격히 침울해졌다.

우기익의 족쇄는 생각보다 여러 곳에 있었다.

“몰랐어요. 그저 그냥……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어요.”

나 나름 로또 된 것일 수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였다. 하루아침의 신데렐라.

“물론 제가 양자인 건 공공연한 사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번 서울 지사를 오게 된 것도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한 행위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편리할 겁니다.”

“아……네.”

전혀 다른 사람.

사실 우기익보다도 더 높은 곳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이었다.

왜 이런 사람이 나에게 연민해 주는 거지.

“먹어요.”

달그락거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영롱했다. 물론 둘 사이의 어색한 적막감을 채워주기엔 부족했지만 말이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과 결혼했다는 사실도.

결혼한 사람이 글로벌 회사의 후계자라는 것도. 그 후계자는 사실 양자라는 것도.

내가 1년 후에는 이 삶을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도.

삶의 무게가 무겁고 버거웠다.

“아저씨는…… 부모님 얼굴 기억하세요?”

“…….”

다시금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대답하고 있는 거였다.

그들 사이의 암묵적인 선.

“아 죄송해요. 제가 눈치 없이.”

넘지 말라고.

집안이 커서 그런가 공기까지 싸늘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허허벌판 속에서 그는 유일한 나침반이었고. 구원이었다.

그러나 그 무엇도 답을 알려 주지는 않았다. 길을 제시해 줄 뿐.

하린은 후회했다.

괜히 이런 말을 해서.

그 또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일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그에게 더 궁금증을 가졌을지 몰랐다.

그는 뭐가 그리 달랐기에 저렇게 확신에 찬 눈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가.

또한, 어떤 고통에서 살았기에 자신을 밝히는 것을 극도로 피하는가.

하린은 발을 꼼지락거렸다.

어려운 사람이었고, 평생을 가도 자신은 그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드는 상대였다.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몇 가지들의 대화로 방금까지 되게 친밀감을 느꼈다가 다시금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생각했다.

그가 과연 탈피하는 날이 오긴 할까.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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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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