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일단 들어가죠.”
들어간 저택은 눈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온 바닥이 대리석이고 천장엔 샹들리에가 있다. 1층에는 큰 거실과 부엌, 안방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태형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린이 쓸 방이라 했다.
안방이 두 개라는 사실에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이내 괜찮았다. 이렇게 좋은 집에서 태형과 보낼 시간이 기대되기도 해서였다.
1층 중간에 계단이 보여 태형에게 시선을 보냈다.
“올라가도 괜찮습니다.”
태형의 허락에 하린은 아이처럼 뛰어 올라갔다.
1층만큼 2층도 매우 멋졌다. 여러 방문이 있어 하나씩 열어 봤다. 하린을 뒤따라온 태형은 미소를 보였다.
과연 돈 쓴 보람이 있는 반응이었다.
하린이 그중 한 방문을 열어 보자 태형이 설명해 줬다.
“거기는 손님방입니다.”
“손님 방이요?”
“이 정도 크기 되는 집은 방이 조금 많은 편입니다. 그 옆에 보면, 테라스도 있습니다.”
“헉, 정말요?”
들떴다.
하린이 좋은 집에 사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우기익의 집도 충분히 좋은 곳이었으니까.
다만 어느 것 하나 제 것이 없는 곳에서 안정 참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물론 이것도 하린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보다는 좋지 않은가.
더군다나 태형이 ‘우리’가 살 집이라고 말했다는 것에 더욱 들떴을지 몰랐다.
태형이 가리키는 곳은 유리문으로 되어 있는, 한눈에 보아도 테라스가 보이는 곳이었다.
바비큐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고, 차를 마실 수도 있게 만들어진 공간은 아늑하면서도 낮에 햇살을 맞으면 좋을 것으로 보이는 곳이었다.
우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위에도 하나 더 있습니다.”
이층집에서 위층이 더 있다니, 하린은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보자 태형이 손을 가리키며 작은 문 하나를 열어 줬다. 그 문 안에는 계단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계단을 타고 올라가니, 옥탑처럼 있는 아늑한 분위기의 방이 하나 더 숨겨져 있었다.
“영화 같은 거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왜…… 있는 거예요?”
의자로 놓여 있는 빈백과 빔프로젝터. 하나하나 태형의 생각이 길들어 있는 장소들에 하린은 즐거우면서도 또한 당황하기도 했다.
“……그냥.”
너무 좋아서였다.
“뒷문 마당에도 뭐가 더 있습니다.”
“마당에도요?”
뒷문으로 나가면 작은 온실도 있었다. 꽃이 자라기엔 추운 겨울이지만 온실 속에서 키워진 꽃밭이 자리했다.
“우아아.”
아름다운 꽃들이 만개하여 있는 모습. 색색이 있는 꽃들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게 다 뭐예요.”
“저번에 상담받았던 의사가 그러더군요. 도심을 벗어나서 풀과 흙을 보며 잠시 사는 것도 회복에 도움이 될 거라고.”
온실 속의 따듯한 공기.
하린은 뒤를 돌아보며 태형을 바라봤다. 순간 들떠있던 감정이 중간을 되찾았다.
“저 때문에 여기…… 하신 거예요?”
이런 사람을 어찌 안 좋아할 수 있을까.
“아마도.”
담백하게 말하는 태형의 대답에,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허공에 눈을 깜빡거리며 눈물을 말렸다.
“뭐, 생각보다 여기서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마침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거짓말. 코끝이 찡했다.
그의 평소 행실을 알고 있었기에 이 말은 거짓말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태형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집도 만들지 않고, 회사 근처 호텔에서 집을 대신했던 거기도 했다.
호텔에서 묵으며 자신은 일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그래서 그는 언제 홀연히 사라져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왔다.
그것을 알았기에 이번 태형의 행동이 더 뜻깊었던 거였다.
이 모든 것들이 그럼 하린을 위해서 만들었다는 것.
휘몰아치던 바람이 참을성을 가졌다.
어째서 이렇게 잘해 주면서도, 매번 거리감을 주는 걸까. 하린은 정의할 수 없는 감정 속 한가운데에 있었다.
“아저씨 여기 너무 좋아요.”
말은 매번 하지 말라면서.
“다행입니다.”
왜 이렇게 잘해 주는 거야.
* * *
집 안 곳곳을 보고 난 후, 하린과 태형은 자리에 앉았다. 마주 볼 수 있게 앉은 둘의 거리는 조금은 멀찍이 거리감이 있었다.
결혼도 하고, 같은 집도 사는데 상당히 거리감이 있는 두 사람.
“이제 돌려주겠습니다.”
원래 하린이 사용하던 핸드폰과 지갑 등등이었다. 하린이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것들.
의사는 하린에게 안 좋은 일을 겪었던 일을 상기 하게 하는 물건을 최대한 배제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중 하나가 핸드폰이었다.
항상 우기익에게 전화가 오던 핸드폰. 태형은 하린과 상의하고 병원에 있는 동안은 핸드폰을 잠시 압수했었다.
“네…….”
“핸드폰을 하나 새로 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사실 핸드폰이 없으면 상당히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없어도 좋았다. 아니 더 괜찮기도 했다.
친구도 없던 하린에게 연락을 할 사람은 우기익뿐이었고.
평소 핸드폰을 자주 사용하던 사람도 아닌지라 엄청나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나마 연락할 사람이라고는 최근 태형 하나뿐인데. 그는 자주 병원에 있었고.
혹여나 연락이 필요한 경우, 간병인과 간호사 등을 통해 할 수 있었기에 어려움은 없었다.
하린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편하게 말해도 됩니다.”
“정말이에요.”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핸드폰. 새롭게 우기익을 잊고 살면 잊힐까?
우리 모두 그것에 대한 대답은 알고 있었다.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니라 잠시 가리는 것뿐이니.
지금 도망가고 시선에서 우기익을 안 보이게 살 수는 있으나 그것은 답이 아닐 거였다.
“조금씩 적응하면서 강인해져야죠……. 그것 또한 제 숙제라고 생각해요.”
태형은 아주 잠시, 하린에게 시선을 응시했다.
내가 무슨 말실수를 했나, 라는 생각이 들 때쯤 태형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더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네.”
“간단하게 설명해 주자면, 입주 고용인은 두지 않고 매일 9-6시까지 내부 집안일을 해 주실 분이 오실 겁니다. 그러니 집안일 같은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태형은 이제 앞으로 살아갈 부분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이 집에서, 새로운 삶을.
“앞으로 글을 써 보고 싶다고 했던가요. 정확히 어떤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기다리던 것이 돌아왔다. 하린은 숙제 검사를 받는 아이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태형이 그날 말해 준 이후 조금씩 생각하고 깊이를 만들어 가던 거였다. 처음으로 그리는 자신의 미래.
“그, 그게…….”
“아직 안정했다면 무리해서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 아니에요.”
뭔가 제 생각을 입으로 뱉는다는 일은 생각보다 부끄러웠다. 괜히 시선이 안으로 곱아드는 것 같지만 의도하여 열심히 태형을 마주 보려고 노력했다.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원래 글 쓰는 거 좋아했습니까.”
“아니요.”
고개를 젓는 하린을 보며 태형이 의문을 표한다. 하린은 민망함이 담긴 웃음을 보였지만, 대답을 멈추지 않았다.
“소설인데…… 자서전을 쓰고 싶어요.”
아저씨가 자신을 위해 이토록 신경 써 주는데 보답하고 싶었다.
“우기익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 있길 바랐어요.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이 우기익이 두려움 건 제가 아닐까 싶었고. 정확히는 제가 받은 학대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거…….”
또한 아저씨에게 듣고 싶었다.
우하린 도와준 보람이 있다고.
“자서전 같은데, 소설인. 엄청 현실 같은 소설. 그곳에는 저도 나오고 우기익도 나올 거예요. 그 책이 베스트셀러에 선정되고, 유명해지고 하다 보면…….”
말이 이상하게 꼬였다.
“제, 제가 말본새가 없어서 말이 꼬이는데 그런 이유도 있고 나중에 출간하면 경제적인 활동도 되고…….”
당황하니 더 꼬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태형은 그런 것에 상관없다는 듯, 하린에게 질문했다.
“우하린 이름으로 책을 출간할 겁니까?”
“아니요. 작가는 밝히고 싶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후우. 많은 말을 내뱉어서 그런지 괜히 숨이 찼다. 그리고 다시 태형에게 시선을 보냈다.
떨려서 그런 건지, 무엇인지 하린은 자신의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벌써 꽤나 긴 손톱이 타닥타닥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 사이로 들려왔다.
오후에 퇴원하고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는지. 노을이 지는 햇볕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주황빛이 닮긴 빛이 비치는 그는 꼭 신 같아 보였다. 고결하고, 아름다운.
“……좋은 생각 같습니다.”
“네?”
하린은 두 눈을 깜박였고.
“잘 써 보세요. 나중에 자신을 지켜 주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선생님이나 장비 등등. 돕겠습니다.”
“어……. 그게.”
귀를 의심했다.
“싫습니까?”
“아,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조금 당황해서…….”
내 생각이 좋다는 대답을 처음 들어 봤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제 의견이 진짜 좋은가요? 정말로…… 그냥 불쌍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자신을 인정해 주는 것이 원래 이토록 좋은 건가.
가슴이 두근거린다는 말 이외로 이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이 그냥 좋았다.
뿌듯하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하고.
하린의 깊은 곳에 굴려지고 맞고, 밟혀서 눌려 있던 것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열심히 고민한 것 같습니다. 잘했어요.”
따듯하게 가슴이 울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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