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하린의 싱숭생숭한 감정을 극대화하게 한 일도 있었다. 물론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혼인신고서 그리고 계약서.
“조건은 동일합니다. 저번에 말한 것과 같이. 참고로 우 대표랑은 협의 봤습니다.”
“아버지가 허락을…… 해 주셨다고요?”
“네.”
하린은 조금 놀랐다.
먼저 태형이 말하는 것은 대부분 사실로 흘러간다. 하린이 사는 세계와 그가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단편적인 예시와도 같았다.
우기익이 전혀 절대로 안 해 줬을 것 같은데 해 줬다니.
계약서 내용도 살피라는 말에, 하린은 서류에 눈을 돌렸다. 사실 이런 자료를 받아 보는 것도 처음이었기에 어렵게만 느껴졌다.
서류에는 이미 태형의 도장이 찍혀 있었고, 하린도 그것을 살피다 미리 준비된 도장을 찍었다.
어차피 하린에는 선택권이 없었다. 이보다도 더 좋은 도피처는 없다.
“뭐 하고 싶은지 고민은 좀 해 봤습니까.”
서류를 회수해 가던 태형이 물어왔다.
하고 싶은 것.
병원에 들어와 시간이 생기자 하린은 점차 그 생각을 구체화했다. 더불어 이왕 온 기회를 잡고 싶었다.
그게 1년이든 무엇이든 말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아버지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답은 두 가지. 자신을 지켜 줄 누군가를 찾거나 그와 유사한 것이 필요하다.
태형이 우기익의 손아귀로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주는 건 1년. 그 이후로 그가 해외로 떠나 버리면 우기익은 태형이 준 돈까지 갈취하려 할 것이다.
이번에 그랬던 것처럼. 이혼당한 딸년, 다른 놈에게 팔 인간이니까.
그렇다고 해외로 도망을 가서 산다고 가정한다면 생활력이 필요했다. 물론 태형이 일부 도와준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발적인 것.
자신 또한 돈을 벌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상황은 복잡했고, 어려웠으며 시간은 짧았다.
그렇다고 이번의 기회를 헛되게 쓰고 싶지는 않았다. 희망이 주어진 지금, 1년 동안 뭐라도 하고 싶었다.
“있, 있는 게 있긴 한데…….”
“뭡니까?”
하린은 본질에 집중했다.
나는 뭐가 하고 싶은가. 무엇을 원하는가.
좁혀지는 것은 두 개였다. 그중 하나는 자신의 삶을 담은 책을 써 보는 것.
책을 쓰고 싶은 건, 자신을 지켜 주는 용도이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글을 써 보고 싶어요.”
“글?”
“자세한 건 더 구체적으로 된다면 말씀드릴게요.”
박복했던 자신의 삶을 소설책으로 쓴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여론, 그러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했다.
만일 이름을 밝히지 않은 무명의 작가가 쓴 작품이 베스트셀러에 오른다면.
해당 내용이 풍자를 넘어, 지독하게 현실을 닮아 극 중의 인물들이 누구인지도 유추가 가능해진다면.
나중에라도 우기익에게 위협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일 그것이 안 되더라도, 돈이 되어 금전적인 문제라도 해결된다면 그거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태형의 철옹성에 들어가는 거였다.
간호사의 말이 하린의 마음속에 불씨를 지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하린은 이 상황을 백 퍼센트 사용하고 싶었다.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고.
상황이 하린의 편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하린은 허울뿐이지만 결혼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태형은 나름 하린에게 다정하게 행동해 주었다.
남들에게는 그토록 매정한 사람이지만, 묘한 구석이 있기에 용기를 내어 보고자 했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해서 그가 하린을 받아 줄 수 있을지도.
“뭐 알겠습니다……. 그리고 결혼식이나 이런 건 안 할 겁니다. 허울뿐인 건데 굳이 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물론 지금은 저런 말을 내뱉긴 하지만……. 이제는 그저 울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
더 적극적으로 그에게 감정을 표현해 보고 싶었다.
* * *
“아저씨, 저 이제 퇴원하면 안 돼요?”
태형은 하린의 물음에 눈썹 하나를 까닥 올렸다. 잘 버티는 듯하더니 아무래도 이제 한계인 것 같아 보였다.
물론 바로 허락해 줄 마음이 없었다.
“안 됩니다.”
히. 하린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 병원에 와서 제일 큰 변화가 있다면, 이제 하린은 태형에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
자주 얼굴을 더욱 보니 확실히 하린도 그렇고 태형도 그렇고 조금은 더 친해진 것 같았다.
“저 진짜 이제 건강해요. 뛰어도 다닐 수 있어요!”
확실히 밝아지긴 했네.
태형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지금의 관계는 태형이 의도한 바였다.
“오랜 기간 지속된 폭력과 이번의 일이 섞여서 공황 장애가 생긴 것 같습니다.”
하린의 몸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몸이 심한 줄 알았기에 치료를 도왔고. 좋은 차도를 보이고 있을 때,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하린에게 많이는 아니지만, 중년의 남성을 보면 덜덜 떨거나 호흡 곤란 증세가 보인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태형이 저번 하린을 닦달했을 때, 하린의 대답이 조금 이상했었다.
“……무서워서. 돈은 없지. 룸서비스라도 받으려고 전화했는데 아버지 목소리 같아서 무서워서. 말도 안 나오고…… 숨도 안 쉬어지고, 그래서 나름 나아지려고 약도 먹은 건데.”
당시에 말했을 때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정신과 의사의 말을 들으니 그날의 해프닝도 사실은 공황 장애 때문이었던 거였다.
“그럼 계속 마주하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트라우마가 생겼으면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유약한 성정이라면 그 방법은 그다지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나 오랜 기간 학대를 받았을 수도 있다고 하시니…….”
“그럼 방법이 없는 겁니까.”
미안한 감정이 조금은 들었다. 그날 너무 몰아붙였나.
“지사장님께서 더 친근하게 해 주세요. 지금도 의존하고 있으니 그것을 조금 더 받아 주시면 좋아지실 겁니다.”
지금도 꽤나 하린의 관련된 일이라면 개입을 하곤 했으나 친근하게 행동해 주라는 해결책은 조금 더 어려웠다.
친근이라.
태형의 삶에 친근하게 누군가를 대했던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았지만 잘 모르겠다.
“헛소리.”
“아 아저씨…… 아저씨 부하들도 불편할 거예요.”
“부하?”
“아, 직원들이요. 한 번씩 오는 것 같던데…….”
직원들을 가지고 부하라고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쓰는 단어 선택 같아, 태형은 이내 피식 웃었다.
“엇, 아저씨 웃었다.”
물론 하린은 조금만 풀어져도 천성이 밝은 사람이라 곧장 미소를 되찾는 아이였다.
뭐가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다.
당장 하린을 위해서는 친근하게 대해 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장기적으로 보면 무뚝뚝하게 유지하는 게 맞다고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하린의 천진난만함은 태형에게도 새로운 바람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무언가를 찾아 주는 바람.
그래서 하린과 있다 보면 여려 겹 쓰여 있던 껍질이 자연스럽게 벗겨질 때가 있었다.
“저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요. 중년 남자가 와도 안 무서워해요.”
요즘처럼 말이다.
“……입만 열면 아주.”
“진짠데.”
하린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자 태형은 손가락을 튕겨 그녀의 이마를 약하게 때렸다.
“아!”
약하게 친 것 치고 생각보다 명쾌한 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하린의 입에선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엄살은.
“계속 그러면 우 대표한테 보내 버릴 겁니다.”
“허어……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진짜 나빠요!”
“주치의 승인 없으면 퇴원은 안 됩니다.”
결국 듣고 싶은 말까지 끌어낸 하린은 태형의 말을 듣자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배시시 웃었다.
“진짜요?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예요……!”
그 미소를 보자 태형은 눈썹 하나를 까닥거렸다.
“대신 주치의가 아직 아프다고 아직 퇴원 안 된다고 하면 혼낼 겁니다.”
“네에?”
장난기, 웃음. 태형에게 사라졌던 것들이 점차 조금씩 살포시 얼굴을 보이는 나날들.
태형이 짓궂게 웃는 얼굴이 보였다.
“거짓말했으니까 혼나야겠죠.”
지독한 현실에 피폐하게 갈라져 나온 정신적 가뭄, 태형은 자신이 그녀에게 단비 같은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충족되지는 않으나 조금이라도 살아나길.
사실 그 단비를 받는 건 하린 혼자만은 아닐지 몰랐다.
오후 시간.
시간이 되자 하린이 있는 VIP실에 온 주치의를 하린은 붙잡았다. 그리고 득달같이 어필했다.
“퇴원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성인 남성을 보는 것이 조금 두려운 것이 사실이나, 그나마 주치의는 계속 보니 조금 두려움이 줄었다.
“퇴원해도 된다고 하니, 저는 바로 퇴원 밟겠습니다. 갈아입을 옷은 사람에게 시켰으니 좀 있으면 올 겁니다.”
태형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오케이 했다.
“여기는 어디예요?”
서울 도심을 벗어나 비교적 풀을 더 볼 수 있는 곳의 주택가에 차가 멈춰 섰다.
엄청나게 큰 주택으로 온 태형은 능숙하게 주차한 뒤, 내리라고 말했다. 호텔로 올 줄 알았는데 영 이상한 곳에 와 버렸다.
“내려요.”
태형의 말대로 하린은 차에서 내려 문이 있는 곳 앞에서 서성거렸다.
누구 집인가? 뭔가 일이 있어서 잠시 들린 건가 싶어서 하린은 가만히 서 있었다.
“뭐 하고 있습니까. 문 열고 들어가요.”
“문 닫혀 있는 거 아니에요?”
“들어가 보면 알 겁니다.”
태형은 웃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싶어 하린이 눈동자를 굴려도 태형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뒤에 문을 턱짓하며 종용하기만 했을 뿐.
“으음.”
그가 말한 대로 문을 여는 시도를 하니, 문은 열렸다. 그리고 안을 보니 깔끔한 인테리어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베이지 톤의 안정적인 분위기를 주는 집.
되게…… 새집 같다.
새집? 하린은 순간 드는 생각에 태형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 이거 설마…….”
하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가 살 집입니다.”
“와…….”
저도 모르게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아 하린은 제 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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