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어제는 눈을 뜨니, 호텔이었는데 오늘은 병원이었다.
아…… 뭐지 왜 쓰러진 거지.
기억에 남는 특이사항은 없었다.
그냥 점심쯤 일어났고. 태형을 찾았으나 그는 없었다. 그가 없는 호텔 큰방을 괜히 서성거리며 돌아다녔다.
엄청나게 크고 좋은 방도, 그가 없이 혼자 있으려니 춥고 쓸쓸했다.
그냥…… 있었다.
정신을 조금 차리고 나서는, 어제 태형이 한 말들을 상기했다. 결혼과 이혼. 1년이라는 기간.
그리고 꿈.
사실 하린이 생각하기에 그녀의 꿈을 이미 이룬 것일지도 몰랐다. 우기익에게서 벗어났으니까.
한참을 창밖을 봤다. 저 많은 차와 건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는 없었기에. 태형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막연하게 알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렵다.’
받아 본 적 없는 질문에 답을 찾아보려니 모든 것이 다 낯설고, 두려웠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하고 싶은 게 있니?
본질에 대한 대화를 가졌으며. 처음 갖는 시간이었다. 사치스러운 시간이 지나고.
막연하게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차마 하겠다는 생각조차도 품지 못했던 무언가를 깨달았을 때쯤.
하린은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하고.
호텔에 있는 건 순 술뿐이었고. 하린은 더 이상 우기익의 카드를 쓸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멍이 든 얼굴로 나갈 수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룸서비스라도 시키려고 했다.
자연스럽게 전화를 걸어 시키는데 그때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무엇을 찾으시는지 설명을 해 주시면 저희가…….”
“……그, 그게.
전화기를 그냥 끊어 버렸다.
“죄, 죄송해요…… 잘, 잘못했어요.”
중년의 남성 목소리가 우기익의 목소리처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하린은 말문이 막혀 말을 하지도 못했다.
정신이 아찔했고, 식은땀이 났다.
이상해.
전화기를 끊고 하린은 구석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몸을 최대한 숨었다.
여기에는 우기익은 없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머리로는 충분히 생각하는 것을, 왜 몸은 따라 주지 않는가. 하린은 바닥에 얼굴을 대고 애원했다.
제발 가. 가라고.
금방이라도 우기익이 찾아와 머리채를 잡힐 것 같았다. 욕을 내뱉고 때리고 발로 차고.
이 정도의 폭력은 평소에도 있었기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아무리 우기익이 감정 컨트롤을 못해 하린을 때리는 날이 허다했다고 해도 정말 죽일 듯, 아니 죽일 생각으로 몰아붙인 건 처음이었다.
이상해, 이상하다고.
블랙아웃이었다. 머릿속은 이미 잠식당했고, 고통에 몸부림쳤으며.
하린은 없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외쳤다.
살려 주세요. 잘못했어요…….
숨이 막혔다. 당장에라도 물이 코로 입으로 들어올 것 같았다.
하린은 덜덜 떠는 몸으로 거실과 침실을 기어 다녔다.
어제 아저씨가 준 약이라도 먹으면 나아질까.
아무 생각이 안 나고 그저 어제 태형이 준 약만 생각났다. 그거라도 먹으면.
아저씨가 준 거니까. 도움이 될 거야.
한참을 찾던 중, 거실 쪽에 놓인 약을 들고 그대로 입 안에 넣었다.
입 안에 털어놓고 물을 들이마시며 살고자 몸부림쳤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 *
하린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 시선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았다. 두어 번 더 눈꺼풀을 움직이자 그제야 조금 초점이 맞았다.
“윽.”
병원 침대에서 일어나는데, 저절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어제보단 조금은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아픈 건 여전했다.
몸을 살짝 일으켜 주위를 살펴보니 여기는 1인실 병실로 보였다. 멍하게 주위를 살피던 하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 되게 좋다.”
침대도 널찍하고, 주위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웠다.
아저씨가 데려다주신 건가…….
하린은 자기 몸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이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신이 조금 몽롱했다.
“어, 아저씨…….”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들렸다. 태형이 들어오는 소리에 하린이 반갑게 맞이하려는데.
“우하린, 너……!”
태형의 굳은 표정과, 화내는 음성이 먼저였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네……?”
태형의 이런 어조는 처음이었다. 그는 한결같이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빈속에 약을 털어 넣었습니까? 내가 어제 했던 말들이 싫었으면 싫다고 말을 하세요. 애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그게 무슨…….”
“그렇게 삶에 의지가 없으면 그렇게 사세요. 나는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은 딱 질색입니다. 더는 도와줄 생각도 없습니다.”
이제 막 깨어난 하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슨 말을 내뱉어야 하지.
더불어 내용을 듣지 않고 자신을 밀어붙이는 태형이 조금은 미웠다.
“지금도 나가고 싶으면 안 말립니다. 이제 더는 구해 주는 일도 없을 겁니다. 다신 보지 않았으면…….”
이제 막 아저씨 덕분에 살아 보려고 했는데. 뭘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생각도 해 보고 하고 싶은 것도 찾았는데.
공복에 먹으면 안 되는 약인 줄 몰랐다. 더불어 그 과정 내에서는 너무 두려웠기에 사고의 흐름이 정확하지도 않았다.
나는…… 나는 그저.
그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왜 그렇게 말을 심하게 하세요…….”
억울함이 담긴 하린의 음성이 태형의 입을 막았다.
“저는 그냥, 아저씨한테 짐이 되기 싫어서 최대한 조용히 있으려고 한 건데…….”
“뭐?”
“죽으려고 했던 적 없어요……. 진짜예요.”
괜히 눈물이 났다. 마음을 알아 달라고 감히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그냥…… 무서웠다.
“왜 그럼 약을 그렇게 많이 털어먹었습니까? 저혈당 쇼크 온 건 압니까? 그것도 빈속에.”
“……무서워서. 돈은 없지. 룸서비스라도 받으려고 전화했는데 우기익 목소리 같아서 무서워서. 말도 안 나오고…… 숨도 안 쉬어지고, 그래서 나름 나아지려고 약도 먹은 건데.”
하린은 시선을 내리깔고, 꾸역꾸역 말하다가 이내 눈물을 보였다. 굵직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하…….”
태형의 한숨 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차마 머리를 들어 올릴 자신이 없었다.
끅끅 딸꾹질같이 툭툭 호흡에 올랐다.
“……살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고요. 흑.”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하린의 앞에 태형이 앉았다. 침대가 그가 앉음과 동시에 흔들렸다.
“미안합니다. 일단 나 좀 봐봐요.”
고개를 내리깔고 있는 하린의 시선 사이로 태형의 얼굴이 빼꼼 나왔다.
“싫어요. 아저씨 나빠……요.”
고개를 피하다 시선을 강제적으로 마주친 하린은 어깨를 잘게 떨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올렸다.
뭐라고 해서 미운데, 완전 밉지는 않았다.
“물 마시고.”
딸꾹질이 좀처럼 멈추지 않자, 태형은 옆에 있던 물을 잔에 따라서 하린의 손에 주며 말했다.
“나는 위험한 생각이라도 하는 줄 알았습니다. 미안합니다. 경솔했어요.”
하린은 그가 준 물을 조금씩 마셔 넘겼다. 호흡이 불안정하게 오르던 것이, 차츰 가라앉았다.
그리고 내심 놀랐다.
어른이 이렇게 자신의 실수를 바로 인정하고 사과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일련의 예로 우기익은 자신이 실수해도, 불같이 화냈다.
하린은 생각하느라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하린이 다 마신 잔을 뺏어 옆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다시금 하린의 시선 속으로 들어 왔다.
작게 미소 짓는 얼굴.
“내 얼굴 영영 안 볼 건가.”
그의 잘생긴 얼굴이 다시금 하린의 눈앞에 들어왔을 때 하린의 억울함과 서운함이 내려왔다.
이렇게 시선을 마주 보며 호흡이 닿는 거리에서 저런 말을 내뱉는 건.
“……아, 니요.”
반칙이다.
* * *
하린은 이날 이후로 다시 호텔로 들어가지 못했다. 이번의 경험을 통해 태형은 하린이 다시 호텔로 가서 생활하는 것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물론 하린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태형을 붙들고 사정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같이 검진을 받고, 여러 의사 선생님들을 만나며 진찰과 약을 먹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 덕에 일주일도 안 돼서 몸은 빠르게 회복했다.
더불어 그사이에 많은 일도 있었다. 그중 제일은 태형도 자주 병원에 왔다는 점.
심지어는 하린이 잠잘 때도 옆에서 있어 주는 경우가 있었고, 아침 출근 후 점심 이후에는 바로 병원으로 와 업무를 병실에서 볼 때도 있었다.
하린과 조금은 친해진 간호사들은 하린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지사장님, 이번에 병원에 기부금도 더 내셨다고 하더라구요. 아마도 하린 씨 병원에 입원하면서 걱정되셔서 더 그러신 것 같아요.”
“에이 설마요…….”
“굳이 저번에도 하셨던 기부를 왜 또 하겠어요~ 그것도 그렇고 자주 찾아오시는 것도 그렇고. 되게 무뚝뚝하신데 로맨틱하세요.”
그냥 저번에 오해해서 말한 것이 미안해서 저러는 것일 텐데.
“다정하신 분이긴 해요. 겉으로는 티는 안 나긴 하지만…….”
하린은 차마 더 말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태형을 자주 보니 심적으로 안정되는 것도 있었고.
그의 얼굴을 더 많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기에, 하린은 그런 말들을 들어도 웃어넘겼다.
“그만큼 하린 씨가 특별하다는 거겠죠. 아 참, 저번에 입원하시는 날, 지사장님이 하린 씨를 업어서 데리고 오셨어요. 되게 급박한 얼굴로요.”
“네? 아저씨가요?”
“네, 그럼요~ 얼마나 무시무시한 분위기였는지 완전 비상이었어요.”
그가 그런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데리고 왔다는 사실을 처음 들었다. 아주 묘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하린을 구해 줬던 첫 만남에도 그는 아주 묘한 분위기와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하린이 일어나서도 매몰차게 몰아붙이던 얼굴도. 간호사는 하린에게 부럽다는 듯 말했다.
태형은 하린을 되게 좋아하는 것 같다고.
하린은 그녀의 말이 정말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태형이 하린에게 가지는 감정은
부채감 혹은 연민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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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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