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그게 내 말을 제대로 못 알아들어서 그런 것 같은데…….”
태형에게 원하는 반응이 나오지 않자 하린을 흠집 냈다. 정답이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좋아하게 된 사이입니다.”
태형은 진심인 척 웃었다.
거짓된 말로 현혹하려고 한다면, 똑같이 해 줘야지.
“그 정도는 제가 감수해야죠. 어린 신부 아닙니까. 더 좋아하는 사람이 약자죠.”
약자를 자처하는 척.
태형의 말에, 우기익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내가 이미…… 결혼 지참금으로 받은 돈이 있네만…….”
그럴 줄 알았지.
태형의 말에 우기익은 태형이 생각보다 우하린에게 깊게 빠져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새끼 생각보다 사랑놀이에 빠져 눈깔이 뒤집혀 있잖아?
이런 생각.
“그것 때문에 그러셨습니까? 그 돈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실실 웃으면서, 듣고자 하는 말을 해 줬다. 우기익의 표정도 점차 밝아졌다.
“그것도 그렇고. 이미 그…….”
“두 배로 드리겠습니다.”
태형은 우기익 같은 인간이 어떤 사고로 돌아가는지 알고 있었기에 다루기 쉬웠다.
“예비 장인어른.”
우기익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정확히는 추악하게 웃었다. 더러울 만큼.
“내가 얼마나 부를 줄 알고 그렇게 두 배라고 말하나!”
“마침 최근에 처분한 자산이 있어서 현금이 됩니다. 이러려고 그 자산을 처분하게 되었나 봅니다.”
“내가 아주 보는 눈이 있어. 사내가 통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그래 좋아해라. 마음껏 좋아해.
돈을 주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얼마를 주든 다 태형에게 회수 될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경고 정도는 해 둬야겠지.
“이제 서울 시장이 되실 분 아니십니까. 저도 지저분한 방법 쓰지 않고 같이 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저분한 방법. 우기익이 우려를 했던 방법이었다.
우진화나 우하린의 고백은 두렵지 않았다. 충분히 깔아뭉갤 수 있으니까. 그러나 태형과 같은 충분히 대척이 가능한 인물의 출현은 매우 부담스럽다.
그러니 태형은 웃으며 우기익에게 말하고 있는 거였다.
허허실실 웃으며 돈 줄 때 받아. 괜한 싸움 하고 싶지 않으면.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나도 같이 갈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즐겁네. 예비 사위.”
“결혼식은 조금 지난 후에 하도록 하고, 일단 서류상으로만 먼저 하려고 합니다.”
“왜 굳이. 바로 하는 게 좋지 않겠나.”
“우 시장님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조용해질 때 하고 싶습니다. 이목이 쏠리는 건 유쾌하지 않아서.”
“알겠네.”
하고자 하는 말은 다 했으니,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은 빠른 시일 안에 드리겠습니다.”
태형은 우기익과 헤어지고, 자신의 차로 왔다. 운전석에 앉은 그는 몸을 뒤로 젖히며 욕지거리를 뱉어 냈다.
“……더러운 새끼.”
우기익을 보면 창자가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더러운 시궁창을 볼 때 느끼는 감각.
고작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대화를 나눈 것뿐인데.
같이 말을 섞고 나면, 그 냄새가 자신에게도 배는 것 같았다. 소름이 돋는다.
“흠집이 생긴 여자라고.”
태형은 다시 한번 우기익과의 대화를 상기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우하린은 저런 취급을 당하며 평생을 살았겠지.
핸들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태형은 아까의 상황을 상기했다. 평생을 조종하며 인형으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입맛대로 다룬다.
말을 듣지 않으면, 다치더라도 제 손아귀에 넣는다.
“……나도 썩 다른 인간은 아니려나.”
괴물을 잡으려면 자신도 괴물이 되어야 했다.
태형은 단 한 번도 자신이 괴물이 된 것에 후회한 적 없었다. 오히려 기꺼워했다.
그러나 괴물의 본 추악한 모습을 마주할 때, 더러운 생각을 볼 때면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았다.
특히나 우하린.
우하린과 함께 있으면, 더욱 자신이 더러운 인간이라는 것을 인지한다.
맑고 깨끗한 우하린의 옆에 나 같은 게.
우기익은 사람을 조종할 때, 강태형은 상황을 조종한다. 그 사람이 그럴 행동을 할 수밖에 없게끔 말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하린과 같이 있을 때면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도 그녀처럼 조금은 맑았던 때로 돌아가는 느낌.
죄를 씻는 느낌.
그렇지만 나 같은 인간이 계속 옆에 있는 것은 우하린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기익의 그림자에서 지옥을 보던 우하린이었기에 강태형의 그림자 속에서도 그럴 여지는 충분했다.
더러운 것은 고립되어, 사라지는 것이 맞다.
회사에 도착한 태형은 곧장 사무실로 올라왔다. 코트를 벗는데 김 비서가 쫓아서 들어왔다.
“마침 잘 왔어.”
“네.”
“우하린과 결혼하기로 우기익과 협의 봤고. 리엄 대타에게 전달해. 그리고 아무리 우기익이 보고 싶다고 러브콜을 보내도 절대 보지 못하게 하고.”
“네”
태형은 오늘 우기익과 거래를 했던 내용을 상세하게 김 비서에게 전달했다. 생각지 못하게 자금 출혈이 생기자 김 비서는 내용을 듣다 태형에게 물었다.
“우기익에게 그럼 얼마가 들어가게 되는 겁니까?”
“이 여사에게 받기로 한 금액의 두 배.”
“네?”
“뭐 어때, 어차피 내 주머니로 나가서 내 주머니로 들어오는 건데. 그러니까 돈이 생기면 직접적으로 더 리엄을 보고 싶어 할 거야.”
우기익은 지금까지 리엄을 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태형이 그것을 절대로 막았기 때문.
투자 들어가는 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만나자고 요청이 들어와도 무시했다.
그래도 상관이 없던 것은 우기익이 제일 교류를 많이 하는 의원들을 통해서 투자가 운용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기익은 태형에게 돈을 받으면, 그 돈의 대부분이 투자에 들어올 것이다.
투자금이 커지면 우기익은 당당히 리엄에게 보자며 요청해 올 것이다.
그래서 못 하도록 말리는 거였다. 리엄은 태형이 나중에 사용할 수 있는 카드였으니까.
더불어 투자 사기를 칠 건데, 굳이 얼굴 보여 줄 필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말입니다. 우기익이 우하린 씨를 핑계로 돈을 계속 빌리려고 할 텐데 받아 주실 겁니까?”
“이번까지는 결혼 지참금 개념으로. 그다음부터는 차용증을 쓰게 해야지.”
애초의 계획이 틀어졌다고 하나, 이 모든 일을 만든 건 자신.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멈출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김 비서는 아직 우하린과 결혼을 결심한 태형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궁금한 것이 많은 표정이나 태형은 설명하지 않았다.
“나가 봐.”
태형은 나가라는 듯 손을 휘적거리며 자리로 가 앉았다. 김 비서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이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 *
“아 참.”
업무를 보던 태형은 순간 손목에 걸린 시계를 봤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나.
오전부터 우기익 미팅을 시작으로 어제 못했던 미팅과 결재 업무를 마치고 나니 벌써 시간이 4시에 가까워졌다.
태형은 업무를 하며 핸드폰을 힐끔거렸다. 딱히 핸드폰에는 이렇다 할 연락은 오지 않았다.
잘 있는 건가.
누군가를 보살펴 본 적이 없다. 사람을 시켜 도와주든가 혹은 돈을 주며 해 준 적은 있어도.
우하린의 짐은 사람을 시켜 방으로 가져다 두라고 지시해 놨다. 지금껏 연락이 없는 건 잘 있다는 뜻이겠지.
태형은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확인하다 이내 내려놓았다. 애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시선을 서류로 돌렸다. 최근에는 우하린과 우기익 쪽을 신경 쓰느라 회사 일에는 많이 할애하지 못했기에 업무가 비교적 밀려 있었다.
다시 일을 시작한 태형은 곧바로 집중력을 잃었다.
……밥은 먹은 건가.
길에서 주워 온 고양이를 키우면 이런 기분일까. 태형은 잠시 고민을 했다. 룸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
“음식이야 뭐, 룸서비스 시켜 먹겠지.”
이내 다시 핸드폰에 시선을 돌리던 태형은 고민했다.
“많이 아픈가.”
어제 김 비서가 전한 말 중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에 한 번 내원해 달라는 말이 기억났다. 어제 이미 상시약도 먹고, 주사와 수액 등 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했지만.
“안녕하세요. 강태형입니다.”
[지사장님이시군요. 어제는 못 뵈어 아쉬웠습니다.]
태형은 곧바로 주치의에게 연락했다.
“제가 아쉽죠. 연락드렸을 때 바로 와 주시고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제가 연말 전에 병원에 기부를 좀 하고 싶기도 하고, 오늘 방문할까 싶은데.”
[오늘 말입니까?]
“예, 마침 어제 진료 봤던 분 정밀 검사도 필요하다고 하셨고…….”
주치의의 목소리 톤이 달라졌다. 안 그래도 최근 한국에 오며 이미 큰 금액을 기부했는데 또 한다니 그럴 만한 대답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동행해서 가려고 합니다.”
[준비해 두고 있겠습니다.]
“네.”
그렇게 주치의와의 통화를 끊고, 태형은 연락이 없는 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은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아직 자고 있을 건 아니고.
“음…….”
결국 외투를 챙기며 자리서 일어났다. 그래 병원에 검진받게 하고 다시 돌아와서 밀린 일을 처리해야겠다.
이미 가겠다고 말도 했고.
사무실과 태형이 묵고 있는 호텔은 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더군다나 차도 안 막히는 시간대라, 바로 도착한 그는 곧바로 룸으로 향했다.
가면서도 우하린이 크게 아플 거라는 생각보단,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그냥, 도리니까. 걱정보단 지금은 자신이 이 아이의 보호자 개념이니까.
그리고 키로 문을 열어 들어가는데, 태형은 내부를 보고 놀라 뛰어 들어갔다.
하린은 바닥에 쓰러져 있고.
“우하린!”
그녀의 주변에는 태형이 놓고 간 약이 한 움큼 뿌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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