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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32화 (32/75)

#32화

밥을 다 먹이고, 약까지 먹였을 때가 되니 하린은 풀려날 수 있었다. 그가 조금 멀찍이 떨어져 있으니, 심장이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웃기긴 하네.

자기가 생각해도 기가 찼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맞아 죽어 가던 애가 이렇게 누가 좋아서 심장이 뛴다는 사실이.

잔혹한 상황에도 이 호르몬의 농간에 빠져서는 허우적거리는 것이 꼴사납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엄청난 순애보는 아니라고, 하린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린에게 폭력이란 일상에 가까웠다.

물론 이번에는 대들었기에 더 과하게 맞았으나 고작 이걸로 눈물로만 밤을 지새우며 울기엔 하린에게 이번 일은 엄청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태형이 자신의 병간호를 해 주는 게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일반적인 시선에서 본다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아저씨는 화 안나셨어요?”

“뭐가 말입니까.”

차분히 하린의 살피던 그의 고개가 하린을 향했다.

“제가 들켜서요. 돈도 많이 쓰시고 신경도 써 주셨는데 제가 다 망친 것 같아서.”

소심하게 흰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전혀 예측되지 않아서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하린은 초조했다.

“가서 조용히 살라고 말하자마자, 안 조용하게 다 걸리고 문제만 일으켜서…….”

“어른들의 이유로 피해를 받아 놓고 왜 죄인처럼 고개를 숙입니까.”

“…….”

“우하린 씨가 잘못한 건 없습니다.”

“그래도요…….”

네 잘못은 없다. 다 어른들의 잘못일 뿐.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인데 어찌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을까.

하린이 삶을 걸쳐 듣고 싶던 답일지 몰랐다. 세상은, 어른들은 힘없는 어린아이에게 탓하고 돌리기 일쑤였으니까.

너는 죄가 없다고. 너를 탓하지 말라고.

듣고 싶었다.

‘부모들 다 죽고 애만 남았다고 하던가…….’

‘어린애 혼자 두고?’

‘애만 딱하지.’

책임감 없는 동정과 연민.

혹은 불합리함.

‘네년 때문에! 검은 머리 짐승, 키워 줘도 은혜도 모르는 년.’

‘네년이 지금 맞는 건, 네가 잘못 태어났기 때문이야.’

하린이 살아남기 위해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야만 했다. 내가 잘못해서 맞는 거고, 내가 잘못해서 이런 상황에 온 거고.

내가 잘못 태어나서…….

“하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까? 꿈이라든가.”

생각의 저편에서 현실로 돌아온 하린은 태형과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전혀 없었습니까?”

“사치였으니까요.”

꿈, 따위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내가 잘하는 게 있을까?

공부도 맞지 않으려고 했기에 재능이 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저 하린의 인생은.

“막연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성인이 되면 양아버지…… 우기익의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도망가는 것 하나 정도뿐 그 이상은 바라는 것이 없었다.

“도망가는 날이 온다면.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럼 이제부터 생각해 보세요.”

“네?”

하린은 이해되지 않았다.

도망. 머릿속에서 한 단어가 둥둥 공기 중을 부유했다. 나는 도망에서 실패했다.

그런데?

“결혼하고자 합니다.”

하린은 두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아저씨는 우진화랑 결혼할 것이고. 자신은 조 대표와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우기익이 자신을 잡아가 이상한 사람에게만 팔아 버리지 않는다면.

그러나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구……랑요?”

우진화 말고 다른 이랑 결혼?

설마.

하린의 입술이 점점 벌어졌다.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을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도 없는 질문이었다.

“우진화 대신 우하린 당신과.”

애초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현실감이 더욱 사라졌다. 공중을 떠다니는 것 같이, 지금이 현실이 아닌가 싶은 말.

하린은 자신이 지금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토록 원할 때 꼿꼿이 안 된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무엇, 이요?”

하린은 질문을 하며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꿈같은 장면이 현실이 맞았다.

“기간 1년. 쉽게 말해서 쇼윈도 부부라고 생각하세요. 내조 이런 거 필요 없습니다. 계약이 끝나면 바로 이혼입니다.”

“……네?”

공중을 떠다니던 감각이 곧바로 바닥에 곤두박질쳐졌다. 인생에서 청혼을 바란 적 없다.

그러나 결혼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혼 고지라니. 그것도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말이다.

하린은 허망하게 태형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관련 조건에 협의는 없습니다.”

“왜 결혼하시는 거예요? 그보다도 아버지랑 협의가 된 부분인가요……?”

본질에 대한 의문. 태형은 이 결혼으로 얻을 것이 없었다.

“협의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태형은 하린을 구함으로써 우기익이랑 틀어졌다.

심지어 1년 후에는 이혼.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태형은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주 간략한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는 마지막 할 말이 있는 듯 고개를 틀어 하린을 보았다.

“이기적으로 생각하세요. 무엇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인지.”

태형의 내리깐 시선에 자기 얼굴이 비춰 보였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의 표정.

“이해되지 않아요.”

태형은 항상, 대답을 직설적으로 해 주지 않았다. 힌트를 알려 주고, 여지를 남겨 준다. 그리고 희망을 보여 준다.

보통 그가 말하는 방식은 그러했다. 하린의 말에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기 전에 하린의 침구를 정리해 줬다.

“이만 자는 게 좋겠습니다.”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불이 꺼졌다.

“잘 자요, 아저씨.”

어둠에 미약한 불빛으로 그의 넓은 등을 보며 하린은 작게 속삭였다.

태형은 하린의 목소리를 듣고 문을 닫아 주는 거로 인사를 대체했다. 무뚝뚝한 그의 성정을 보면서도 묘하게 두근거림이 커졌다.

우기익에게 명령을 받는 것이 더 익숙한 하린이기에 그의 말하는 방법은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선택지가 있었다.

“이제 나도…….”

약 기운이 점차 퍼지고 시야가 어두워지자 점차 졸음이 몰려왔다. 사고가 점차 느려지고 어지러움이 들었다.

몸에 점차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하린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나도 다른 삶을 살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린을 중심으로 모든 일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 * *

“난 반대일세.”

태형은 오전 일찍부터 우기익을 만났다. 어제의 일들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하려던 결혼, 둘째 딸 대신 첫째와 하겠다는데 무엇이 그리 문제이시죠.”

하린을 집에 데리고 온 건 단발적인 해결 방법에 가까웠다. 미성년자를 벗어났다고 하지만 보호자는 우기익이었다.

혹여나 문제가 생긴다면, 생판 남남인 태형이 하린을 도와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동의 없이 결혼한다면?

당장은 쉬울지 모르나 그건 단발적인 요행일 뿐 해결 방법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태형의 계획을 전면 수정하였다고 해도 완전 척지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자네가 외국에서 오래 있었기에 이것의 심각성에 대해서 모를 수도 있지만……! 둘째와 만나던 약혼하려던 남자와 첫째가 결혼을 한다니 이게 무슨 콩가루 집안도 아니고.”

콩가루 집안 맞는데.

그러나 태형은 동요하지 않고 계속 말해 보라는 듯 시선을 끄덕였다.

“그러니까. 물론 단발적으로 그날의 상황이 과해 보일 수 있지만. 상황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이미 당장도 조 대표 쪽에서도 결혼하는 줄 알고 있고.”

“전달하세요, 결혼 못 시킨다고.”

“이보게 강 지사장!”

태형의 기세가 줄지 않자 우기익은 초조했다. 생각보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래, 똥줄 타겠지.

이미 이 여사와 조 대표 쪽으로 돈을 받기로 약조했을 것이다. 그 돈은 태형이 ‘리엄’이라는 투자자로 만들어 둔 덫에 들어왔다.

그래 이미 우하린을 빌미로 돈도 받아서 투자까지 했는데, 결혼이 무산된다?

우기익은 이것을 감당할 현금이 없었다.

“그게 문제가 아니네. 우하린 그, 아이가 사고를 친 게 있어서…… 내 면이 말이 아니네만.”

“사고?”

“조 대표랑 결혼을 전제로 만나긴 하나 그, 영상을 찍은 게 있네. 흠집이 생긴 여자를 어떻게 태연하게 결혼을 시키냐는 말일세…….”

그런 걸 들은 적은 없었는데.

오늘도 우기익은 제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것도 거하게.

아, 그날인가.

“근데 모습은 왜 그럽니까.”

“그게…… 도망, 나왔어요.”

고아원 앞에서 만난 날.

그러니까 하린과 태형이 세 번째로 만난 인연의 날, 하린은 도망왔다고 말했었다.

그리고 그맘때가 하린이 조 대표를 만나던 시쯤이었다. 태형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도망이 그 도망이었나.

영상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기익에게 우하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용을 위한 인물.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우하린의 사지를 도륙하고, 그것을 전시할 수 있는 극악한 자였다.

바퀴벌레 같은 새끼.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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