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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31화 (31/75)

#31화

하린은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옆에서 태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갈비뼈에 금이 가고, 족히 전치 6주는 될 거라고 합니다. 성인 남성에게 발로 차여서 뼈가 금이 간 것 같다고……. 그리고 전에도 폭력이 있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멍이나 타박상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군요.”

주치의가 찾아와 하린의 진료를 보았고 그 내용을 김 비서가 태형에게 전달했다.

맞아서 전치 6주.

“물에 빠져서 호흡이 힘들었을 거라고 하니, 뇌나 폐 쪽에도 이상이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더 정밀한 검사는 병원에 와서 진찰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뇌나 폐에도 이상이 있을 수 있다. 김 비서가 정리한 하린의 상태는 가히 심각했다.

태형은 하린의 누워 있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눈꺼풀을 깜빡였다.

……만일 조금만 늦었다면, 죽었으려나.

생각이 많아졌다. 예측하고 미리 계산하여 행동한 것이 아니었기에 상황도 복잡해졌다.

하린을 구한 건 지극히도 충동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아니, 모르겠다. 충동이었나?

하린에게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갔다. 영 모르고 갔다고 하기엔 그건 변명일 뿐이었다.

나는 왜 우하린을 구했는가.

태형은 그것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세워 둔 원리 원칙으로만 사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복수 하나를 보며 살아왔던 태형이었기에 이번 일은 더욱이 말도 안 됐다.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러게.”

김 비서 역시도 당황스러운 건 매한가지.

태형을 옆에서 제일 오랜 시간 보좌해 오고, 태형의 손과 발이 되기를 자처한 이였다.

그 역시도, 이런 태형의 면모는 매우 오랜만이었다.

“요즘 좀 지사장님 같지 않습니다.”

“이상한 소리.”

그렇다고 하여 우하린을 구한 것을 후회하냐고 생각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최소 우기익의 손아귀에 있을 때보단 마음이 편했으니까.

그래, 이건 단순히 부채감 혹은 연민이겠지.

태형은 감정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이런 변수가 많으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

자신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건 큰 변수였다. 이번 같은 일이 또 발생하면 지금껏 잘 쌓아온 공든 탑이 무너질 것이다.

그가 생각하고 있을 때, 김 비서는 참을성 있게 그가 생각을 마치기를 기다렸다.

조용한 호텔 룸 안, 하린에게 넣은 수액이 떨어지는 소리만 났다.

그렇게 잠시,

“계획을 전면.”

생각을 끝마친 태형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김 비서를 바라봤다.

“수정해야겠어.”

* * *

눈을 떴을 때 주변 시야가 어두컴컴했다. 저녁이었다.

하린은 차마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뜨고 한참을 주변을 살폈다. 푹신한 매트리스와 따뜻한 이불.

그리고 아주 좋은 향. 고급스러운 향이 짙게 났다.

여긴 어디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좋은 곳에서 눈을 떴기에 하린은 순간 여기가 천국이라도 되는 곳인 줄 알았다.

자신이 이런 좋은 곳에서 눈을 뜰 일이 없으니깐 말이다. 다만 통증은 하린이 아직 살아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으니까.

하, 뭐지.

하린은 움직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기억이 끊기기 전까지의 상황을 상기했다. 우기익에게 다 걸리고, 잡히고, 뺏기고. 맞고, 도망가다 또 맞고.

그래도 죽지는 않았나 보네.

끈질겨. 이 목숨은 생명력이 짙었다. 그 죽을 듯이 맞아도 살았고. 죽으려 바다에 뛰어 들어가도 살아났으니까.

아…… 또 살아남았구나.

이상한 삶이었다. 죽기를 자처하면 살았고, 살기를 자처하면 사지로 몰아가는 인생.

진짜로 죽기를 자처하고 우기익에게 대들었는데, 살아 버렸다. 그것도 애매하게.

하린은 어두운 지금의 시야가 곧 자신의 미래 같았다.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우기익에게 걸렸으니 몰래 도망가려고 했던 것도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니? 오히려 사태를 더 안 좋게 만든 꼴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이 몸으로 삼 일 후에 도주도 못 한다.

아저씨가 준비해 준 건데. 마음이 저릿했다.

그런데 아저씨를 본 것 같은데. 아닌가.

하린은 기절하기 직전 태형의 얼굴을 보았던 것을 상기했다.

“으윽.”

그 생각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니, 아픔이 밀려왔다. 제대로 기억을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과거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도 아저씨가 구해 줬으니까. 혹시나 그때의 상황을 혼동해서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까지 들었다.

그때였다.

“과하게 움직이지 마.”

태형의 목소리에 몸이 저절로 반응했다.

꿈이 아니었어…….

하린이 목소리가 나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고작 고개를 움직이는 것에도 통증이 밀려왔다.

미약하게 인상을 쓰며 바라보니, 태형은 모르겠으나 옆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언제부터 앉아 있던 거지.

“아저씨.”

태형은 보고 있던 아이패드를 옆 테이블에 두고는 일어나 하린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주변 근처에 짙어질 때쯤, 태형은 하린의 이마에 손등을 대며 체온을 쟀다.

“열이 올랐었습니다.”

그에게서는 독한 스킨향이 난다. 또한 그의 음성 또한 매우 그를 닮아 있어, 낮은 저음의 쌀쌀한 기운이 풍겨 왔다.

그래도 좋았다.

말 행동 표정 무엇 하나 온기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상하도록 다정한 사람이었으니까. 하린은 그 짧은 몇 마디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했다.

“열은 좀 떨어졌군.”

하린은 그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봤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현실 같지 않았다. 지독하게 아파서 몸은 비명을 지르고 있으면서도 감각만큼은 한편의 꿈인 것 같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린의 눈물에 태형이 인상을 찌푸리고는 다시 온도를 체크했다.

‘분명 진통제 투여해서 덜 아플 거라고 했는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뭐라도 먹이고 약을 먹여야 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저씨…….”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하린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별안간 자리를 뜨는 그를 보자 불안했다.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그의 시선이 한참 하린의 손등에 머물렀다. 손등까지도 상처가 남아 있었다.

“나가는 거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린의 손 위로 태형의 큰 손이 겹쳤다. 잡고 있던 손마디의 힘이 서서히 풀렸다.

몽롱한 정신 속 하린은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태형은 그의 말대로 바로 들어왔다. 그리고 손에는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쟁반 위에는 흰죽과 약봉지가 올려져 있었다.

김 비서가 전달한 말에는 일어나면 꼭 약을 먹이라는 말과 함께 공복에 먹이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미리 죽을 사다 놨었다.

하린은 그가 들어온 것을 보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니 태형이 말렸다. 대신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먹어요.”

태형이 바로 옆에 쟁반을 두었다. 하린은 쟁반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먹으면 체할 것 같았다. 입 안이 까슬하여 뭔가 넣는 행위가 달갑지 않기도 했다.

“손이 많이 가는 아이네.”

태형은 혼잣말하듯 말을 뱉었다. 흰죽을 숟가락으로 조금 떠 하린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하린이 당황하여 시선을 올려 그의 눈을 봤다. 그는 하린에게 먹으라는 듯이 시선을 보냈다.

먹기 힘들다고 받아들였나……?

먹고 싶지 않을 뿐이지, 음식을 먹을 힘은 있었다. 다만 태형은 하린을 더욱 중환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힘듭니다.”

“아……네, 네!”

결국 태형이 말을 덧붙이자 하린은 태형이 떠 준 죽을 받아먹었다. 나름 신경을 써서 이렇게까지 해 주는데 어찌 받아먹지 않을 수 있을까.

영 먹지 못할 것 같던 음식도 입에 들어가니 먹을 만했다. 정확히는 태형이 줘서일 수도.

하린은 태형이 주는 음식을 새끼 새처럼 받아먹었다. 누가 이렇게 음식을 떠 먹여 주는 것이 처음인지라 부끄럽기도 하고, 되게 사치를 부리는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그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지금.

태형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하린은 이상하게 심장이 이상한 반응을 느껴야만 했다.

콩닥콩닥 뛰다가도, 죽을 듯이 벅차오르고, 이내 현실을 자각하면 무겁게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잠깐만 너무 가까워.

태형은 시선을 내리깔고 하나에만 집중했다.

지금은 음식을 먹이는 것에 집중한 것인지 태형의 몸이 아까보다 더 하린의 몸 쪽으로 다가와 있었다.

하린이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그의 숨결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하린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입 벌려야죠.”

소리에 눈동자를 보내자 순간 시선이 맞닿았다. 하린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이렇게 먹여 주는데, 말 잘 들어야지 않겠습니까.”

“……죄송해요.”

태형은 하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릇에 담긴 죽을 다 먹을 때까지 이 행위를 반복했다.

열이 올라 죽을 지경이었다.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질 즘, 배가 불러 그만 먹고 싶으면서도 태형이 먹여 주는 행위가 좋아 계속 받아먹었다.

벅차면서도 아쉬움이 오를 때, 홍조도 짙어졌다. 그런 하린을 태형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하린의 뺨에 태형의 손이 닿는다. 그리고 그는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왜 열이 다시 오르지.”

태형만 모르는 비밀이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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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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