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하린과 헤어지고 태형은 사무실로 복귀했다.
김 비서를 불러 하린을 집에 데려다주라고 하고 모든 상황을 종결시켰다.
이제 긴 복수극의 클라이맥스가 올 것이다.
그 시간이 오고, 복수가 끝날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왜 이리 불편하지.
그런데 이상하게 답답했다. 어디에서 이뤄지는지 모르지만, 태형의 시선을 맴도는 아주 걸리적거리는 느낌이었다.
태형은 자신의 설계를 다시 확인했다. 혹시나 자신이 놓친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런 것이 나올 일이 만무했다. 현 상황에서 태형의 예측에서 벗어난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편한 느낌이 예민한 감각을 톡톡 건드는 것만 같았다.
그는 목까지 단단하게 채운 단추 하나를 풀며 핸들을 고쳐 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왜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예측을 할 수 없었다.
창문을 내려 차가운 바람을 맞았다.
도로는 한적하여 시원하게 달리는 중이지만, 태형이 받는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캄캄한 어둠 속 안개가 내려앉은 길을 홀로이 달리는 것만 같았다. 언제 어디서 무언가가 튀어나올지 한 치 앞도 모르는 그런 곳 말이다.
물론 태형이 느끼는 감정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는 혼자인 게 당연했고. 모든 상황을 대할 때 단 한 번도 두렵다고 여긴 적 없었다.
외롭고 짊어지는 삶은 태형에게 일상이니까.
“그럼 왜.”
태형은 다시 생각했다.
이번 우하린만 내쫓으면 우기익은 완벽히 미끼를 물게 된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저씨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돼요?”
단발적으로 튀어나오는 음성.
태형은 방금까지 느끼던 불편함을 다시금 느꼈다.
그래 이거구나. 허허벌판 어둠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던 태형에게 불편함을 주게 하는 존재.
걱정이었다.
사실 태형은 내내 하린의 존재를 회피해 왔다. 계속 보고 있으면 불편한 감정을 들게 하곤 하니까.
불편했다.
감정에 서툰 태형에게 하린은 감정 그 자체로 작용했다.
“마, 마지막이니까요.”
얼굴을 붉히며, 사정하는 하린의 모습을 보고 어찌 불편한 감정이 안 들 수 있는가.
태형은 두 눈을 감았다 떴다. 더 이상을 휘둘리지 말자. 지금껏 행동한 것으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김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태형은 블루투스로 연결하여 전화를 받았다.
김 비서의 말을 듣기도 전에 태형은 먼저 물었다.
“데려다줬습니까.”
[집 근처까지는 못 가고 근처에 내려 줬습니다. 그런데 우기익 집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
[자세하게는 아니지만, 내부에 심어 둔 고용인 한 명이 연락을 취했는데. 그게 아무래도 우하린 양과 관련된 내용 같아 보입니다.]
우기익의 집에 당연하게도 정보를 얻는 스파이가 따로 있었다.
웬만해서는 따로 연락하지는 말고, 주말이나 사석에서 따로 받아 정보를 얻는 편인데.
이런 식으로 직접 연락이 오는 경우는 특이한 경우였다.
“……더 받은 내용은 없습니까.”
[그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집 안에 무슨 일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하린과 관련된 일이다.
이 짤막한 정보 두 개를 들으며 태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잠시만.”
들킨 건가.
태형은 주행 중이던 자동차를 갓길에 정차했다. 감각이 좋지 않다.
혹여나 오늘 준 것들을 우기익에게 들켰다면.
“우하린 책상 속에서 나왔다는 게 그럼 그년이 뭔가 알아차렸다는 거잖아……! 영상은.”
우기익의 음성. 유추할 수 없는 정보의 흐름 속에서 점차 불편한 감정이 차올랐다.
찝찝했고. 불쾌했다.
“우기익 집으로 다시 돌아가 보세요. 나도 가 볼 테니까.”
태형은 김 비서에게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작게 쯧, 혀를 차며 핸들을 돌렸다.
괜히 신경을 쓰느니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게 마음이 편했다.
바로 도착한 태형은 우기익의 집 앞에 그대로 주차했다.
“잠시 앞에서 대기해.”
이미 김 비서는 도착해 있었기에 태형은 짤막하게 명령하며 집으로 향했다.
끼익-
열린 대문과 시끄러운 음성.
상황은 태형에게 의문을 가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네년 숨통 따위는 내 손에 있다고! 알아들어?!”
비명과 우기익의 폭력적인 음성. 그리고 차랑거리는 물소리.
이 집안 상황은 경악 그 자체였고,
지옥이었다.
* * *
아름답게 꾸며진 조경은 망가진 지 오래였고. 심지어 심미적으로 꾸며 놓은 연못으로 자기 양딸의 숨통을 틀어막는 모습은 지옥도를 연상케 했다.
여린 목을 움켜쥐고 물속으로 얼굴을 처박는다. 하린이 살기 위해 단발적으로 버둥거릴 때마다 우기익은 살벌하게 눈을 붉히는 것이 아귀의 모습 그 자체였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이지.”
그리고 그 모습을 보았을 때 태형은 곧바로 움직여 우기익의 팔을 잡아 저지했다.
극화된 감정의 고조 속에서 아무도 그 사이에 낄 엄두를 내지 못할 때, 외부인의 목소리가 침투했다.
“감히 어떤 새끼가……!”
사용인이 자기 팔을 잡는다고 생각한 우기익이 누구인지도 살피지 않고 욕부터 뱉다가 말을 삼켜 버렸다.
그리고 당황했다.
강태형이 왜 여기에 있지? 이게 뭐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한 우기익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당황이 드러났다.
태형은 그 모습을 상관하지 않고 그대로 하린을 물속에서 건져 올렸다.
온몸이 젖은 상태로 하린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반쯤은 까뒤집힌 두 눈. 손에는 통장을 꼭 쥐고 있었다.
뭐야.
왜, 이딴 상황에도 이걸 손에 들고 있는 거야.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
그 모습을 보자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이 상태가 될 때까지.
대체 얼마나 맞은 것인지 얼굴 전체가 이미 부어 있었으며, 몸 군데군데의 멍과 얼굴에도 벌써 붉게 물들었다.
옷은 반쯤 찢겨 있고, 바닥에는 비행기표와 여권이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아저씨…….”
잠깐 의식이 났는지 하린이 억지로 눈을 뜨며 말했다. 그리고 이내 온몸이 힘이 빠진 듯 축 늘어 틀어졌다.
태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하린을 안아 든 채로 연못을 나왔다.
맞고 사는 거 알고 있었고.
딱한 상황인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 줄은 몰랐다.
전부터 그토록 도와 달라고 했었을 때는 이 정도의 이유가 있었기에 했던 거였다.
그때 도와줬다면.
하린이 결혼해 달라며 태형에게 부탁하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인간이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이런 일을 감행할 수 있냐 말이다.
태형은 부채감에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내 집안일일세. 신경 쓰지 말고. 내가 나중에 다 설명할 테니…….”
태형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서려고 하니 우기익이 그의 팔을 잡았다.
“손 놔.”
방금까지만 해도 하린의 목을 잡았던 축축한 손이 몸에 닿는데 기분이 더러웠다. 태형의 눈빛은 싸늘했으며, 목소리 또한 비슷했다.
태형이 나타나지 않자, 김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지사장님.”
김 비서 또한 하린의 모습을 보고 조금 놀란 듯 표정을 짓다가, 이내 표정을 유지했다.
태형은 김 비서에게 하린을 건네주며 차에 가라는 듯 턱짓했다.
김 비서 또한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향했다. 그 빠른 행동 사이에 우기익만 당황하여 끼지 못했다.
“이건 그저 훈육일 뿐이고. 외부인이 간섭할 것도…….”
들어줄 마음 없다.
“다 큰 딸을 그리 훈육하시는 분도 있으십니까.”
버러지 같은 새끼.
“정치도 하셔서. 걱정도 많아야 할 분이.”
놀랍도록 경멸하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양딸, 그리고 서울 시장 선거 유세 중인 양아버지.
우기익에게 지금의 하린의 모습은 수치이자 아킬레스건이다. 사진을 찍어 올리면 당장에라도 선거를 망칠 수 있다.
마침 다른 정당에서도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좋은 먹잇감이겠지.
“지붕 아래의 일은 내가 관리하는 분야이니, 지사장은 관여하지 말게!”
그럼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우기익은 대화를 하다 말고 조급해졌는지 소리를 높였다. 그러고는 하린을 다시 잡아가려는 듯 몸을 들썩였다.
태형은 우기익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가지 못하도록.
“아니지.”
태형은 최대한 감정을 섞지 않고 말을 내뱉으려고 노력했다.
우기익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는데, 하린이 마지막까지 꽉 쥐고 있던 통장이 눈에 선했다.
최소 도망가려던 것을 알았어도 저렇게 애를 만들진 말았어야지.
몸이 붓도록 맞는 와중에도, 받은 돈 지키겠다고 손에 놓지 않는 애를 죽이겠다며 연못에 얼굴 처박지는 말았어야지.
그러나 감정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참으려 해도 툭툭 튀어나오는 생각들.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려 했던 말들까지도 툭, 튀어나왔다.
“나랑 결혼할 사이면, 내 지붕 아래지.”
“뭐? 이, 이게 무슨…… 분명 나와 약조한 건!”
“선택은 내가 해. 당신이 아니라.”
지극히 충동적이었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었다. 이제 태형은 돕고 싶어도 도울 힘이 없는 아이가 아니다.
생각하면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나이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제는,
“그러니까 다시는. 손대지 마.”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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