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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29화 (29/75)

#29화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다 잊고 살길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울적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깨달은 날이, 그와의 마지막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린에게 진심이었다. 언제나 하린을 위한 말을 내뱉었으며, 그런 다정함은 연민에 기반을 둔 감정이었다.

그저 어린아이가 애잔해서.

그렇기에 하린이 그에게 감정을 품는 것조차도 비참한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좋아했구나.”

언제부터 이런 마음을 품었는지 모르게, 마음속에 그 사람이 들어와 있었다.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 주는 그를, 좋아한다.

그의 돈, 명예 이런 것이 아닌 그저 그 사람이 좋았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지금껏 그 사람을 마음에 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자신은 그에게 좋아한다는 것을 티를 낼 수도 입 밖으로 꺼낼 수도 없었다.

그의 도움으로 한국을 떠나는 주제에.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 앞길 하나도 아무것도 못 하는데 사랑이라니. 아주 지극히도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오는 길 내내, 싱숭생숭한 감정을 정돈하고자 부단히 애를 써야만 했다.

그럼에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 마음. 감정. 그래서 하린은 우기익에게서 온 전화를 알지 못했다.

김 비서는 집 근처까지 데려다주었다.

대신, 누군가 볼까 싶어서 집까지 가지 않고 근처에서 내려 걸어 올라갔다.

짝- 하린은 제 뺨을 쳤다.

정신 차려.

날이 추워 얼굴이 언 상태로 타격을 가하자, 따끔함이 올라왔다. 태형이 이 정도로 해 줬는데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단 한 가지였다.

문제 일으키지 않고 도망가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것.

“……집 가는 길이 멀다.”

고개를 들어 올려 집을 향해 시선을 올리니 평소 매일같이 드나들던 우기익의 집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 멀고, 높아 보이는 집. 하린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오는데 싸늘한 공기가 폐부를 뚫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간혹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한기가 느껴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식은땀이 나는.

하린은 집 안으로 들어가며 이상하게 살벌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뭐지.

현관 안으로 들어가는데 제일 먼저 하린의 눈에 들어온 건 가정부 아주머니였다.

‘도망가. 얼른.’

저를 향해 뻥긋이는 아주머니의 입 모양에 하린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박였다. 바로 이해되지 않았다.

왜, 도망?

하린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사용인이 있는 부엌으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사용인이 급히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았다.

하린은 순간 인지했다.

무언가 들켰구나.

상황은 순식간이었다. 하린이 도망가는 것도 그렇다고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말이다.

짜 악-

“아악!”

강한 통증과 함께 몸이 현관 쪽으로 튕겼다. 등에 벽이 닿으며 강하게 부딪혔다. 어윽, 부딪힘과 동시에 하린의 입에서는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신이 없는 사이 우기익이 다가와 하린의 머리채를 잡았다. 우악스럽게 잡은 손길 사이로 머리카락은 빠져나갈 것 같이 아파왔다.

“왜, 왜 갑자기 이러시는 거예요…….”

하린은 두 손으로 우기익 손을 붙잡으며 질질 끌려 들어갔다.

신발을 벗을 틈도 없이 거실 안쪽으로 끌려 들어온 터라 신발 한 짝은 거실 한복판에 나뒹굴고 있었다.

“왜? 네년이 이유를 모르지 않을 텐데.”

광기 어린 우기익의 시선이, 하린의 몸을 절단하듯 날카롭게 지나간다. 하린은 우기익이 왜 이런지 은연중 깨달았다.

반지. 그리고 몰래카메라.

반항 어린 감정이 속 안을 휘젓고 다녔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야. 당신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거지.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하린은 심장 깊숙이 집어넣었다.

삼 일만 참아. 아저씨가 도와준 건데 망칠 순 없어.

……아저씨가 조용히 사라져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태형의 말을 상기하며 하린은 뜨거운 숨을 삼켰다.

“잘, 잘못했어요…… 아악!”

“동생 약혼자로 점찍어 둔 남자 중간에서 장난치니까 어떻든. 왜, 강태형이도 네년 치마폭에서 못 나오더냐?”

“잘못했어요.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아, 아버지.”

추위에 얼어 있던 피부 위로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짜악-짝, 매섭게 울리는 난폭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린은 버릇처럼 빌었다.

그러나 그런 하린에게 날아온 건 무정한 언사와 폭력일 뿐.

“내가 아버지로 보였으면 네년은 그렇게 행동 못 해.”

머리카락이 잡힌 채로 연달아 뺨을 맞았다.

“두 사내놈 중 저울질해서 더 호구 같은 새끼 잡으려고 했겠지. 이 우기익의 눈을 피해서.”

“아니에요. 저는 정말 조, 조 대표님이랑 결혼하려고…….”

“입 다물어.”

눈앞이 붉었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다. 두꺼운 우기익의 손으로 얼굴이고 몸이고 할 것 없이 얻어맞았으니까.

점차 얼굴이 부어감에 따라 시야가 보이지도 않았다. 우기익에게 맞은 부위가 다 뜨겁게 불타오르듯이 아팠다.

“그래 그래서 누가 네년 도망이라도 도와준다고 하던? 그래, 네년이 누구 가랑이에 제일 잘 파고들었는지 확인을 해 봐야겠구나.”

한참을 때리던 우기익은 하린을 내려놓고, 현관 주변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하린의 가방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우기익은 그저 핸드폰이나 물건들을 확인해 볼 참에 가는 거였겠지만. 그곳엔 오늘 태형에게 받은 비행기표와 통장. 여권이 들어 있었다.

저건 안 돼.

하린은 잘 뜨여지지 않는 눈으로 그 모습을 보고는 몸을 황급히 움직였다.

“어윽.”

몸의 뼈 마디마디가 비틀어진 것만 같았다. 몸을 움직이는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린은 그런데도 몸을 일으켜 가방이 있는 현관으로 뛰었다.

그것만큼은 들키면 안 돼.

말이 나올 틈도 없이 몸이 먼저 향했다. 우기익이 당도하기 전에 하린이 가방을 잡아 들었다.

반쪽만 신고 있던 신발을 내동댕이치고, 그저 앞을 보고 뛰었다.

현관 밖으로 나와 큰 마당이 있는 쪽으로 뛰었다. 아예 대문 밖으로 도망갈 생각이었다.

“네년이 뭔가 받아먹긴 했구나.”

물론 제대로 뛰기엔 하린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었고, 성인 남성을 상대로 이기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히려 우기익의 분노만 샀을 뿐.

조경에 함께 있는 연못을 지나고, 이내 나무 문으로 되어 있는 대문을 열었을 때.

“아악!”

우기익에게 잡혔다.

다시금 머리채를 잡혀서 질질 끌려갈 때 하린은 감정을 형용할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구나.

이제는 도망을 가려다 걸린 거였기에, 아예 도망은 꿈도 못 꾼다.

그냥 죽어 버릴까.

하린은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며 몸을 버둥거렸다. 어떠한 감정이 터져 나오는데 도저히 손으로 막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슬픔, 좌절 그리고 분노.

몸을 버둥거리며 격렬하게 반응하니 우기익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분노한 우기익이 연못 근처에 있는 돌덩이 쪽으로 하린을 던졌다.

등 뒤로 돌이 배겼는지, 악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우기익이 하린의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쏟았다.

“검은 머리 짐승, 키워 준 은혜도 모르는 년.”

눈앞에서 태형이 준 물건들이 쏟아져 내렸다.

“조 대표 그 새끼는 이런 거 할 힘도 없고, 강태형 그 작자군. 그 꼬장꼬장한 새끼를 뭐로 꾀었길래 이런…….”

우기익의 머릿속에서 조 대표는 이 여사의 꼭두각시였다. 그렇기에 이런 짓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인물은 태형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하린에게 준 통장과 그 안에 들어간 금액을 보고는 우기익은 입맛을 다셨다.

“화대 한번 거하군. 다리 한번 벌리고 이 값이면. 이럴 줄 알았으면 내 너를 일찌감치 돌렸을 것을.”

“흐……으윽.”

하린은 그 광경을 보며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환경과 상황. 모든 것이 참혹 그 자체였다.

더불어 죄도 없는 태형이 자신 때문에 욕을 먹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이렇게 모독을 당해선 안 되었다.

그 고결한 사람이, 자신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듣는 이 광경 또한 모든 것이 죄스러웠고, 한탄스러웠다.

“그런 거 아니야…….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은혜도 모르는 창녀. 하다 하다 동생 약혼자까지 꼬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나를 도와주던 사람이다.

무엇을 원하냐 물었을 때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던 사람이다 말이다.

하린은 눈물을 흘리며 도끼눈을 뜨고 우기익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도 우기익은 태형이 준 통장을 들고 있었다.

매번 막혀 있던 감정의 댐이 흔들리고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쌓이고 쌓여 막혀 있던 단단한 댐. 그것을 막고 있던 무언가가 무너지고 있었다.

“분풀이용으로 때리고, 욕하고. 결혼을 빌미로 팔아먹고.”

점점 금이 가고 물이 새 나가고, 점차 틈이 커진다. 하린은 그 틈이 커질수록 감정을 토해 냈다.

“이제 하다 하다 양 딸년 관계 영상까지 찍는 인간이 부모? 당신이 어떻게 내 부모야! 당신은 내 부모 아니야!”

그리고 그 댐이 무너질 때.

처음으로 울부짖었다.

“이럴 거면 왜 나를 입양했어. 왜. 왜!”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죽고 싶었다.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 참고 참다 보면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강태형을 만나고, 희망을 얻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들로 어느덧 바뀌어 있었다.

실로 엄청난 변화일지 몰랐다.

“멍청한 년.”

우기익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하린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하린의 말에 우기익의 폭력은 거세졌다. 우기익은 분노 그 자체였다.

“네년이 드디어 미쳤지.”

하린도 그리고 우기익도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둘 다 미쳐 있었다.

하린은 그 맞는 와중에도 태형이 준 통장을 우기익에게서 뺏으려고 했다. 그 사람의 것이 우기익의 손에 들어가는 건 곧 죽어도 싫었다.

“당신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야!”

“이년이 정신 못 차리고.”

우기익은 하린의 뺨을 몇 대 더 치다가, 그래도 소용이 없는 것을 느끼고는 하린의 멱살을 잡고 그대로 연못으로 향해 들어갔다.

그러고는 물속으로 하린의 얼굴을 그대로 처박았다.

하린의 버둥거림이 심해질수록 우기익은 더 깊게 박아 넣었다.

“억…….”

단발적인 숨을 간신히 쉴 때쯤, 코이고 입이고 물이 계속 들어왔다.

살을 에는 것 같은 추위가 피부 깊숙이 들어왔다.

괴롭고 추웠다.

“네년 숨통 따위는 내 손에 있다고! 알아들어?!”

“으……끄윽.”

정신이 혼미하고 눈을 뜰 수 없었다. 하린은 진정으로 살기를 느꼈다.

자신을 죽일 거라는 감정. 분노. 이것은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

점차 생과 삶이 하린을 떠나갈 때쯤. 하린은 점차 몸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끝이구나.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은연중 생각이 들 때, 물 위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남성의 목소리.

타인의 힘을 통해 물속에서 건져졌다. 하린을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며 상대를 살폈다.

아주 익숙한 상대가 보였다.

눈물인지 물인지 모르는 것이 눈에서 흐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팠다.

“아저씨…….”

또, 강태형이었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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