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전화를 끊고 30분.
하린은 바로 도착한 태형을 맞이했다. 원래 보기로 한 시각은 저녁이었기에 바로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침울한 감정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를 보며 인사를 건넨 하린의 톤은 이상하도록 차분했다.
평소 태형을 보면 감정의 굴곡을 겪던 그녀였기에 더욱 그 모습이 도드라져 보였다.
“앉아요.”
그는 가볍게 인사를 받으며 하린이 앉아 있는 앞 의자에 앉았다. 하린도 그 모습을 보며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대며 앉았다.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손에 땀이 찼다.
“마음의 준비는 잘했습니까?”
“……네.”
태형의 시선이 굳은 하린의 표정에 한참을 머물렀다. 이제껏 보았던 얼굴 중 처음 보는 표정이었기에 그 또한 의아했다.
이러나 이내 시선을 돌려 마음을 고쳐먹었다.
“3일 후, 항공권과 여권입니다. 이것을 들고 비행기를 타면서부터는 이제 우하린이 아니라 완전 다른 사람으로 살기 바랍니다.”
비행기표와 다른 이름의 여권.
“감사합니다.”
덩그러니 놓여 있는 두 물건이 현 상황을 직시하게 했다.
그래 내 상황에서 이것도 감지덕지하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물건을 보며 하린은 생각했다.
그토록 도망가고 싶던 한국을 떠나게 해 줄 비행기표와 우기익의 눈에서 벗어나 살 수 있게 해 줄 다른 사람의 이름.
하린이 그토록 원하던 것일지 몰랐다.
“도주 준비는 김 비서가 다 해 줄 겁니다. 삼 일 뒤 외국으로 나갈 때는 우 대표에게 최대한 티 내지 말고, 그냥 외출하는 것처럼 나오세요.”
……그런데 왜 행복하지 않지?
하린은 대답하면서도 웃을 수 없었다.
머리로는 도와주는 태형에게 웃으며 진정으로 감사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러나 몰래카메라를 알게 된 순간부터 사고 회로가 움직이지 않았고, 생각이 멈춘 것 같았다.
“……네.”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일까.
왜 이리도 마음이, 울컥하지.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쉬워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몰래카메라를 알게 된 순간부터 하린과 우기익은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걸 알았기에 하린은 한참을 고민하던 두 가지의 선택 중 한 가지를 선택한 거기도 했다.
도망.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형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시무룩해진 하린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썩 즐겁진 않다.
“필리핀으로 우회해서 한국을 벗어날 겁니다. 나중에라도 뒤를 밟히지 않기 위함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궁금한 거 있습니까?”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그저 한국 땅을 떠나는 것이 두려워 저러나 했더니.
“아니요…… 김 비서님 연락 주시면 그것에 맞게 행동할게요.”
수동적인 하린의 태도와 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 아니요…….”
소개를 힘없이 젓는 하린을 보며 태형은 시선을 돌렸다.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생각하며 미리 준비해 둔 물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이거.”
“이건…….”
“당장 외국으로 나가 살려면 돈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통장, 그 안 금액을 살펴보니 자신은 꿈도 꿔 보지도 못한 금액이 눈앞에 펼쳐졌다.
“허.”
절로 숨이 들이켜졌다.
이 돈은 자신이 함부로 받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자신은 이렇게 억 단위의 금액을 갚을 능력도 없다.
십 년을 넘도록 일을 해도 이런 돈을 벌 수 있을까?
“저 이거 못 받아요. 이, 이 정도의 돈은 저 갚을 수도 없는걸요…….”
답은 뻔했다. 갚을 수 없는 돈은 받는 게 아니다. 이미 지금 받은 것들도 과분했다.
“갚으란 말 하지 않습니다.”
하린이 돈을 돌려주니, 태형은 그 모습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못마땅하게 팔짱을 낀 채, 한참을 그녀를 바라볼 뿐.
“……아저씨.”
그의 시선은 시퍼런 냉기가 흐르는 것 같다.그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의 안위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냥 눈 한번 딱 감고 받을까.
이 돈을 받으면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다.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돈일지도 몰랐다.
태형이 도망가게 해 주겠다고 말을 할 때. 마음 한편, 이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가면 뭐 하면서 먹고 살 건데?’
눈앞이 캄캄했던 지점 모두, 태형이 다 해결해 주고 있었다. 자존심 없는 마음을 흔들리고 있었다.
“그냥 받아요.”
하린은 그의 단호한 음성을 들으며 통장을 손에 꼭 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사세요.”
하린은 침울한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래 받자, 그깟 자존심 조금 버리면 어때……. 아저씨는 이 돈 없어도 상관없지만 너는 아니잖아.
비굴해 보여도 어쩔 수 없었다.
방법이 없었으니까. 하린에게 이번 일은 자신의 상황을 확실하게 깨닫게 해 주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아무리 맞고, 구박당하고, 폭력에 시달려도 우기익이 그 정도로 저급해질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었으니까.
그런 파렴치한 짓을.
자신을 포함한 조 대표에게까지 말이다.
그리고 도망가는 것이 맞다고 판단이 들었을 때 하린이 기댈 곳은 태형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비굴함을 자처하며 고개를 숙이고 여러 번 인사를 반복하는데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바닥에 떨어졌다.
차마,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없었다.
“집은 김 비서가 데려다줄 겁니다.”
한 방울 떨어진 눈물은 한두 방울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엄청난 것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그냥 성인이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은 사람 만나고. 남들이 하는 것 정도.
그 이상을 바란 적 없었다.
그러나 하린의 눈앞에 놓인 건 평생을 폭력에서 자라 도망갈 곳조차 막아 버린 양아버지의 비정하고 파렴치한 모습이었고.
좋아한다, 감히 말로 뱉을 수도 없는 이에게 동정받아야만 도망갈 수 있는 현실이었다.
불쌍히 여겨지고 거지에게 적선하는 돈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삶.
“네…….”
울먹이기 싫었기에 차마 얼굴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간신히 대답만 할 수 있었다.
“잘 살길 바랍니다.”
태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가 점차 작아지고.
그제야 죄인처럼 숙였던 고개를 올려 눈물을 닦았다. 하린은 눈앞에 놓인 통장과 비행기표를 보았다. 흐릿한 시야 앞으로도 그것만큼은 뚜렷하게 보였다.
마지막이다.
진짜 떠나면, 오늘이 아저씨를 보는 마지막이었다.
하린은 뒤를 돌아보았다. 태형은 이미 건물 밖으로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마지막을 보내는 게 싫었다.
하린은 급하게 밖으로 향해 뛰어갔다. 마지막 한 번쯤은, 정말 한 번쯤은.
“아저씨!”
밖으로 향하니 아직 차에 타지 않은 태형이 눈에 들어왔다. 하린이 크게 부르니, 그가 뒤를 돌아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하린에게 태형은 처음으로 겪는 구원이었고.
열병이었다.
“아저씨 한 번만…… 안아 주면 안 돼요?”
함부로 입에 담을 수도 없을 정도로 귀한, 감정.
처음으로 겪기에 사랑인 줄조차 몰랐던.
“마, 마지막이니까요.”
마지노선 끝자락까지 올랐던 부푼 감정이 싹을 터고 올라와 그 모습을 자리했다.
거절당해도 괜찮았다.
오늘이 그를 보는 마지막일 테니까.
“……와 보세요.”
그가 첫사랑이었다.
* * *
그 시각 우기익의 집.
“이게 그냥 집에 있었다고?”
우기익은 하린에게 자신이 줬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비서에게 물었다. 옆 가까이에 서 있던 비서가 짧게 대답했다.
“네.”
하린의 방에서 난리를 치고 있던 우진화의 패악질을 본 사용인들은 차마 우기익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고 대신 비서에게 연락했다.
연락을 받고 집에 온 비서는 우진화가 찾은 반지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은 바로 우기익에게 보고되었다.
우기익은 한참을 반지를 보며 생각했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그리고 한참을 생각을 정리하다가 죄인처럼 서 있던 우진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노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우기익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우하린 방에는 왜 들어왔지?”
“그, 그게……”
물론 기분 좋은 목소리는 아니었기에 우진화는 괜히 자신에게 날아오는 질문을 듣고 흠칫 놀랐다.
우진화는 지금 이 상황이 두려웠다.
오늘 행동이 우기익에게 반기로 보일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것은 기우였는지, 우기익은 그저 반지만 바라볼 뿐 우진화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말을 못 하는 우진화를 우기익은 한심하게 바라봤다.
“멍청한 년. 됐어.”
분명 제 성질에 못 이겨서 아무 곳이나 난리를 친 것일 것이다. 우기의 서늘한 시선이 우진화에게서 다시 반지로 돌아갔다.
뒷걸음치다가 쥐 잡은 꼴이군.
“나가 봐.”
우진화는 이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주변 상황에 분위기만을 살피다 나가도 된다는 허락에 빠르게 도망갔다.
우진화야 그렇다 치고. 우하린 이년은 뭔가 알았다는 건가.
이게 뭔지 알지 못하면 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기익은 비서와 둘만 남게 되자 비서에게 시선을 돌리며 손을 내밀었다.
“영상.”
우진화가 나가자,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 둔 영상을 보여 주었다.
그 영상에는 조 대표와 하린이 호텔에 가는 모습. 반강제적으로 눕혀지는 모습.
그리고 도망가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우기익은 그 영상을 똑똑히 바라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년이 지금껏 나를 속여?
올라오는 분노를 내리누르며 영상에 시선을 고정하던 우기익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숨을 들이켰다.
“이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자신이 그토록 공을 들이던 인물. 그러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던 사람.
강태형.
어디서부터 꼬인 거지? 뭔데 우하린이랑 강태형이 붙어 있냐고!
둘의 대화로 보아 둘이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파악-!
우기익은 분노를 주체할 수 없는 듯, 결국엔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우기익은 고개를 들어 비서에게 소리쳤다.
복병. 생각대로 되지 않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우하린. 이, 이년! 그년한테 전화해!”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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