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당장은 괜, 괜찮아요. 아버지도 대표님과 만난 후로부터는 때리지도 않고…….”
당장에라도 결혼하자는 듯한 상욱의 말에 하린은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혼란스러웠고 미안했고 고마웠다.
도망보다 차라리 결혼이 나을까……?
겁을 먹은 마음 사이로 나약함이 비집고 올라왔다. 누군가의 등 뒤에 숨어서 편하게 살 수 있다면.
사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살 수 있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내 힘, 내 의지로 기반을 만들어 뿌리를 내려야 모진 풍파에도 견딜 수 있다.
누군가의 뒤에 또 숨어 있으면, 당장은 편하겠으나 풍파가 다가올 때 또다시 지옥을 겪을 것이다.
“결혼을 당장 하지 않더라도, 먼저 우리 집에 오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 집은 너무 위험해요.”
그러나 이런 말로, 진심 어리게 걱정해 주면 반칙이잖아…….
하린은 흔들렸다. 이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냥 편안하게 안위를 생각해서.
머리는 도망가서 네 인생을 제대로 살아 보라고 말한다.
가슴은 그냥 편하게 누구의 뒤에 숨으라고 말한다. 하린은 아직 그 속에서 선택하지 못했다.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이왕 찾아온 희망, 행복해지고 싶었다.
“하린 양은 거기에 오랜 시간 매몰되어 있어서 지금 상황이 얼마나 시한폭탄 같은지 모를 겁니다.”
하린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상욱은 결국 꺼내지 않으려 했던 말을 꺼냈다.
“저번에 낀 반지, 그거 우 대표가 하라고 한 거죠?”
“반지 착용……이요?”
“네.”
“알고 착용한 겁니까?”
“무엇이요?”
하린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대답했다.
“이상하지 않았나, 그걸 계속 끼라고 종용한 것도.”
상욱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하린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가 말하는 지점은 하린도 의아하게 여기던 부분이었으니까.
“그 반지 안 보석, 몰래카메라인 거 알고 있었습니까?”
몰래, 카메라.
하린은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인하려는 듯 단어를 끊어서 생각했다.
뉴스에서나 들어 보던 그런 단어.
두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다가 이내 단어를 인지했다.
“몰래…… 카메라라고요?”
물어보는 음성 끝이 갈라졌다.
* * *
우진화의 면접이 끝나고, 태형은 우기익과 시간 약속을 잡았다.
‘어지간히도 애를 잡았더군.’
우진화의 행동을 보니, 우기익이 얼마나 그 아이를 닦달했을지 눈에 선했다. 매달릴 때의 표정은 무언가에 쫓기는 표정이었다.
그 느낌은 우하린과도 조금은 달랐다. 우하린은 대부분을 포기하고 매달린다면, 우진화는 욕심을 부리며 매달리는 형태였다.
우진화의 행동을 보니 우기익의 심리 상태를 엿볼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우기익에게 전화를 하니 이 멍청한 인간은 당장에라도 태형과 만남을 원했다.
저번 이후로 의도적으로 우기익과의 만남을 피하고 있었으니 계획한 대로 오늘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태형의 사무실.
“오랜만입니다. 대표님. 아니죠. 이제 시장 선거가 끝나면 시장님이시겠군요.”
“어이구 아주 세상에 쉬운 것이 없습니다. 정치가 이렇게 힘들 줄 알았으면 시도도 안 하는 건데…….”
입발림 소리는.
속에도 없는 말을 잘도 말했다. 그 선거 당선되고 싶어서 온갖 행위를 다 하는 주제에.
태형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표정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우기익이 듣고 싶어 할 만한 이야기를 골라서 뱉어 주었다.
오늘은 적당히…….
“반응도가 엄청 좋으시던걸요. 자수성가한 사업가 이미지 때문인지 20~30대 연령층에게까지도 인기가 좋으시고.”
환심을 사 둬야 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우 대표님.”
태형은 목소리 톤을 죽이며,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처럼 태도를 보였다.
우기익도 저번보다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고 들어오는 태형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한 터였다.
우진화의 면접도 그렇게 끝장났고, 강태형과 엮을 수 있는 고리가 사라졌기에 반쯤은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저번 제안 건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어……어?”
“그때 기술을 제게 넘기는 대신, 결혼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 하겠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할렐루야.
우기익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태형은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까지 웃을 수 있는지 지켜보자고.
금맥을 찾은 사냥꾼은 거기에 범이 있는지, 곰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금을 찾겠다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제야 말이 통하는 것 같네! 강 지사장.”
거기가 제 죽을 묫자리인 것도 모르고.
“하하. 나는 오늘 우리 딸내미 면접을 떨어트렸다고 해서 지사장이 그걸 받을 생각이 없을 거라고 예상했네만.”
“저도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만…… 이제 와서 말씀드리자면 나중에 결혼이니 해서 말이 나오면 괜히 취업 비리니 물어뜯길 구실이지 않습니까.”
“하긴.”
“그리고 저는 제 내조에만 신경 쓰는 게 좋습니다. 웬만하면 안주인이 밖에 나돌아 다니는 건, 보기 좋지 않아서.”
“암 그렇지. 여자는 모름지기 남자 내조를 잘해야지. 지사장이랑 이리 말이 통하니 너무 즐겁네.”
우기익이 좋아할 만한 대답 몇 개를 툭툭 던져주니 우기익은 입이 찢어질 듯이 헤벌쭉하게 웃었다.
지이잉- 지이잉-
대화 도중에 우기익의 핸드폰이 울렸다.
“잠시만, 비서한테 전화가 왔는데.”
“받으세요.”
우기익은 대화가 잘 되는 중 온 방해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가며 전화를 받았다.
“쓸데없이 왜 전화질을. 지금 미팅 중인 거 안 보여?”
신경질적인 음성.
우기익은 멀리 가지 않고 문 근처에서 받으며 목소리를 죽였다.
“그게 왜 거기에 있는데…… 잠시만.”
태형은 우기익의 전화 소리를 듣기 위해 문을 아주 작게 열어 대화 내용을 살폈다. 뚜렷하게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단어들은 들려왔다.
“우하린 책상 속에서 나왔다는 건, 그럼 그년이 뭔가 알아차렸다는 거잖아……! 영상은?”
우하린?
우기익의 말에 태형은 반응했다. 무슨 영상인데 저리 대답하는 거지.
알아차린다고?
“바로 들어갈 테니까. 영상 확보해 놔.”
전화를 끊는 우기익의 동작에 태형은 조금 열어 놨던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 곧바로 자리로 돌아와 착석했다.
좀 있자 우기익이 어색하게 웃으며 돌아왔다.
“미안합니다. 중요한 전화라.”
“괜찮습니다. 한창 바쁘실 때지 않습니까? 급한 일이 있으시면 다음에 이 이야기 나눠도 좋습니다.”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는 대표님께 우호적이니, 필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아주, 지사장을 보니 내 마음이 든든해.”
“저도 아주, 좋습니다.”
* * *
“그게 몰, 몰래카메라였다니. 몰랐어요. 저는 그저 그냥 조 대표님이 좋아하신다고 해서. 그래서…….”
“……내가 도와줄게요”
하린은 조 대표와 헤어지고 그 자리에 남아 한참을 생각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향후를 위해 생각을 정리해야만 했다. 하린은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이상했었다.
몇 번이나 물어보던 우기익의 행동들.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왜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는지.
하린은 자기 손을 바라보았다. 당시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것이, 몰래카메라였다.
소름이 끼쳤다.
내 손으로, 내가 범해지는 영상을 찍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사실. 하린은 한참을 제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손을 바라보며 하린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도 두려움도 그 무엇도 아닌, 안도감이었다.
정확히는, 찍지 않았다.
영상을 남기지 않았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들.
그리고 이후 든 생각은 두려움이었다.
나중에 걸리면 어쩌지?
우기익은 그날 하린이 조 대표와 관계를 맺은 줄 알고 있다. 그러나 하린은 그날에 태형과 만나고 있었다.
그 사실이 우기익에게 밝혀지게 된다면…….
하린은 눈을 꾹 감았다.
피부 안쪽 자리까지 남은 좌절은 하린을 굴복하게 했으며 분노해야 할 지점조차 눈을 가리고, 생각을 막아 버렸다.
하린은 매번 겪은 고통에 아픔 대신 패배를 느꼈으며, 당장 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이게 무슨 짐승 같은 삶인가.
먹이 주는 이에게 꼬리를 흔들고, 매를 맞지 않는 삶에 안주하는 삶.
분명 그전에는 원하지도 않는 결혼에 죽겠다며 행동하던 사람이 잠깐의 안식에 안도하고 약해졌다.
그래, 조금의 단상에 나약해졌고, 멍청했다.
평소에 받지 못하던 다정함을 받고. 관심을 받았다는 것 하나로…….
고뇌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그 집에 하린 양을 더 이상 두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 집에 더 두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조 대표의 음성과,
“도망가게 해 주겠습니다.”
태형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더 이상 생각은 사치였던 거였다. 그것을 모두가 알았는데 하린, 자기 자신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다들 이런 말을 했던 거였어…….”
우기익의 악랄함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이제 선택지는 하린이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코앞까지 와 있었던 거였다.
선택해야 했다.
이 이상 시간을 더 지체할수록 다치는 사람은 하린이었다.
멍청해.
하린은 생각을 정리했는지 멍하니 바라보던 핸드폰을 잡아 누군가에게 연락했다.
핸드폰 너머로 통화 연결음이 연이어 울렸다.
그래, 다 벗어던지고 다시 시작하자. 우기익과 관련 없는 삶을 살면서 새로운 곳에서.
폭력도 폭언도 없이, 몸을 팔아 가며 자신을 죽이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아 보자.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저음의 남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뭡니까.]
“조금…… 일찍 봐도 돼요?”
지은이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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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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