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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26화 (26/75)

#26화

예견된 사달이었다.

면접에서 떨어진 우진화를 맞이하는 건 여느 때와 같은 폭력의 굴레였다. 자신을 때리는 아버지의 손을 보면서도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도 변한 것은 없었다. 깊은 곳에서 쌓이는 증오심에 우진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쓸모없는 년. 고작 그것도 못 해서.”

이건 나의 탓이 아니었다.

“우하린 그 덜떨어진 것도 최소한 하라는 것은 해 오는데. 내 핏줄을 받았다는 것이 고작 이런 거라니.”

그 핏줄 받고 싶었던 적 없었다.

면접이 끝나고, 우진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태형을 쫓아가 그를 붙잡았고, 거지처럼 구걸하고 빌었다.

자신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것밖에 없었으니까.

우진화는 태형에게 애원했다.

자신이 부족한 것은 많지만 잘 적응할 수 있다고.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그가 자신을 받아 주길 바랐다. 이성적이든 연민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이 지옥을 벗어나게 해 줄 사람이 자신에게도 나타났으면.

내 인생에도.

“좋, 좋아해요……!”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성급한 마음은 일을 그르친다. 그러나 우진화가 그것을 알기엔 상황이 그녀를 사지로 몰았고, 경험이 부족했다.

“저, 저 나이도 어리고 잘할 수 있어요”

그렇지만 사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태형의 손을 애타게 잡으면서 저를 보는 그의 표정을 보며 우진화는 뼈저린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이 사람에게 자신은 평생 여자로 다가갈 수 없다. 치욕스러운 감정과 함께 질투 혹은 시기심이 들끓었다.

우하린도 하는 일을 왜 나는 못하는 거야.

그년도 남자를 꾀는데 왜 나는.

우하린보다 내가 뭐 그렇게 부족해서!

우기익이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비교는 우진화에게 평생의 족쇄가 되었다.

폭력에 시달려서 나오는 무기력함과 혼란한 감정의 혼동 속에서 우진화는 버둥거리고 있었다.

자격지심.

몸이 털썩 뒤로 자빠졌다. 눈앞이 점멸하고 하얗게 부서지다 못해 모든 것이 허망했다.

“아, 아빠……. 아무리 해 봐도 강태형 그 사람은 안 될 것 같아요. 눈, 눈빛만 봐도…….”

죽은 붕어처럼 맞던 우진화가 첫 마디를 뱉었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 그마저도 우기익의 서늘한 눈초리를 느끼며 차마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난폭한 분위기 속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띵-동.

우기익과 우진화 그리고 그 상황을 숨죽여 지켜보던 사용인들까지. 일제히 현관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리고 사용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터폰을 확인했다.

조 대표였다.

우기익은 씩씩거리다 초인종을 누른 이가 조 대표라는 걸 전해 듣고는 조금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그러고는 우하린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조 대표가 이 사실 모르게 입 조심해.”

2층에서 서 있던 하린을 찾은 우기익이 하린에게 경고했다. 하린이 대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얼어 있자 우기익의 짧은 성미가 튀어나왔다.

“조 대표 기다리고 있잖아, 안 나가고 뭐 해! 이년이고 저년이고 하여간 3일에 한 번씩 처맞아야 저따위로 굼뜨지 않지.”

“나, 나갈게요…….”

하린이 헐레벌떡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우진화는 매서운 눈으로 살폈다. 하린이 밖으로 나가서 사라질 때까지 보던 우진화는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끄읍…….”

아까 맞은 뺨에 얼굴이 부어올라,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속에서 나뒹굴던 말들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대신 울분을 참는 소리가 흡사 짐승같이 나오고 있었다.

“저년은 반반한 낯짝이라도 쓸모가 있지.”

머리 위에서 비수가 쏟아져 내렸다.

우진화는 앞날이 깜깜했다. 우하린마저 사라지면 나는 어쩌지.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 눈 사이로 흐른 눈물을 닦아내며 우진화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나 쇠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우하린에 대한 질투심을 참아야 했으니까.

감정 따위는 폭력의 무력함 앞에서는 나약했다.

얼마나 맞았을지 모르겠다. 우기익의 분노가 가실 때까지 폭력에 노출돼 있던 시간은 죽은 시간처럼 느껴졌다.

우기익은 제 딸의 뺨을 치고, 머리채를 잡고 분풀이하다가, 이내 누군가에게 온 전화를 받고 급하게 사라졌다.

잠시 우기익의 비서가 왔다 가고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우진화는 가만히 그 자리에서 숨죽여 있을 뿐이었다.

하, 눈앞이 눈물에 번져 흐릿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천장을 바라봤다.

우진화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향했다. 자신의 방이 아닌, 우하린의 방이었다.

이유는 없었다. 그저 분풀이 상대가 필요했을 뿐. 자신보다 나은 것 하나 없이 얼굴만 예쁜 언니.

평생의 족쇄처럼 따라붙어 자기 삶을 괴롭히는 인간.

우진화는 한 번씩 생각하곤 했다. 어릴 때 아버지가 언니를 이 집으로 데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삶이 조금은 좋아졌을까?

편했을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정갈하게 정리된 방을 눈에 보이는 대로 밀고, 던지고 망가트렸다.

“너만 없었으면.”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잡아 바닥에 내동댕이쳤고. 눈에 뵈는 것 없이 던지며 제 분풀이를 했다.

와장창-

책상 위에 있던 액자 하나가 마찰음을 내며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사용인들이 놀라 위로 뛰쳐나올 때까지 우진화는 멈추지 않았다.

“다 너 때문이야! 너! 너!”

책상 서랍이 빠지며 물건들이 쏟아졌다. 그리고…….

그리고 손수건에 싸여 있는 물건 하나를 보았다. 중요한 물건인지 손수건으로 고이 모셔 놓은 물건을 우진화는 제 손 위에 올려놓고 보았다.

“이건 뭐야.”

중요한 물건이니 이렇게 숨겨 놨겠지. 우진화는 그것을 손에 들어 올리며 천천히 살폈다.

“반지잖아.”

* * *

하린이 밖으로 나오니 조 대표 또한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정신이 없는 틈 사이로 조 대표가 훌쩍 가까이 와 눈을 마주 보았다.

“괜찮아요?”

“네…… 괜, 괜찮아요.”

그의 시선이 얼굴에서 귀, 목 등을 확인하는 것이 느껴졌다. 혹여나 어디라도 맞았을까 싶어서 살피는 행위였다.

손이 떨렸다. 영 겪지 않았던 일도 아닌데 왜 이리도 몸이 떨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괜찮긴, 손이 이리 얼음장인데.”

그는 그런 하린의 모습을 보며 하린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 손이 따뜻해서 하린은 뿌리치지 않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일단 들어가요. 여기 말고.”

조 대표는 능숙하게 행동했다. 하린을 다독여 주고, 차에 태워 히터를 틀어 긴장되어 차가워진 몸을 따듯하게 녹여 주었다.

이상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토록 안정감을 주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고통과 힘듦 아픔은 오로지 혼자만이 들고 가야 하는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정말 괜찮아졌어요. 감사해요.”

“원래 자주 이랬나요?”

“……그게.”

“우리 결혼할 사이로 만나고 있는 겁니다.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죠.”

하린은 조수석에 앉아 운전석에 앉아 있는 조 대표를 바라보았다.

원래 자주 이랬냐고.

일상이었고, 맞는 것이 억울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면 이 사람은 뭐라 말할까.

그러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와 밝히는 게 창피하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목에서 탁 걸린 것 같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건넸다.

“대표님은 왜 이렇게 자연스러우세요?”

조 대표는 이런 일에 능숙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린의 상황에 놀라지도 않고 그렇다고 연민의 표정으로 보지도 않았다.

그래서 의아했다.

“음……. 비슷한 경험이 있으니까.”

“네?”

“제 어머니는 제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습니다. 이유는 화병이셨죠. 지금 어머니는 새어머니예요.”

조 대표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가정사를 가볍게 풀어냈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확히는 첩. 아버지의 환심을 산 새어머니는 배 속에 지금의 둘째를 품고 본가에 들어왔어요. 어머니와 첩이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살다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

사람이 자신의 어두운 이면을 이렇게 손쉽게 풀어내기까지 얼마나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까.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아……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다 그러고 살지 않습니까? 그냥 삼류소설 같은 이야기예요. 어미 잃은 아이는 새어머니가 생겼고 알게 모르게 새어머니께 구박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는 아이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 사람처럼 다정한 음색이었다. 말을 이으면서도 구김 없는 표정을 유지하던 조 대표는 오히려 하린을 보며 웃어 보였다.

“뭐 그런 흔한 이야기? 물론 다 크고 나서는 당한 건 없었어요.”

“……원래였다면. 그, 그러니까 조 대표님이 아니었다면 오늘같이 맞았을 수도 있어요. 이 집에 들어온 후로, 아버지의 기분이 안 좋은 날이면 얻어맞는 일이 허다했으니까요.”

그의 미소를 바라보던 하린은 조 대표를 응시했다. 따뜻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메꿔 준다.

분위기가 따뜻해져서일까, 응어리져 나오지 않았던 말들이 녹아 자연스럽게 새어 나왔다.

“아, 그런데 제가 입양된 거는 혹시 알고 계셨나요……. 아, 아버지가 먼저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당연히 말 안 했죠.”

“네…….”

“그런데 알고는 있었습니다. 왜 모르겠어요. 첫 만남이 그런 거였는데. 일단 자리를 바꿔서 따뜻한 거라도 마시죠.”

“네.”

“자, 마셔요.”

카페에 들어가자 그는 하린이 마시면 좋아할 법한 음료를 사서 들고 와 주었다. 오늘은 따듯한 핫초코였다.

진한 갈색의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에 오늘따라 핫초코와 어울리는 옷을 입고 온 것 같았다.

“감사해요. 대표님.”

“그런데 내 이름은 알고 있어요? 매번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영 수상한데.”

“알고 있어요.”

“뭔데요?”

“……조상욱 대표님”

“잘 아네. 그럼 대표님이라는 단어 말고 다른 이름으로 불러 봐요. 뭐가 좋으려나.”

“아저씨……?”

“……핫초코 뺏어 버릴까.”

나지막이 혼잣말하는 조 대표의 말에 하린이 핫초코를 빨아 마시다 말고 픽,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러고는 슬쩍 잔을 들어 올려 몸으로 숨기려 들었다. 상욱은 웃음을 터트렸다. 꾸준히 이어지던 무거운 분위기가 한순간에 풀어졌다.

“이제 좀 웃네. 하린 양.”

“네?”

갑작스럽게 부르는 음성에 하린은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봤다. 그는 방금의 웃음기를 내려두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그 집에 하린 양을 더 이상 두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그 집에 더 두는 것은 맞지 않는 것 같아요.”

하린은 그 말을 듣는데, 위기감을 느꼈다.

깊게 고려하기 싫어서 혹은 상욱에게 가지는 죄책감에 생각을 회피해 오던 것.

상욱은 그 말을 꺼낼 것 같았다.

“우리 결혼합시다.”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 퍼플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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