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하린이 말했던 것처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우중충한 날씨와 빗소리.
“이제 좀 그쳤네.”
한참을 내리던 비가 잦아들고 구름이 낀 하늘을 바라보던 하린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조 대표와 만나기로 했다.
물론 어제도 보고 최근 계속 보고 있긴 하지만…….
조 대표가 좋은 반응을 보일수록 우기익이 성화였다. 원래도 욕심이 그득그득하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 심했다.
어딘지 조급하고, 돈에 쫓기는 사람처럼 말이다. 최근 선거를 위해 돈을 많이 써서 그런가.
하린은 하늘을 보며 멍하니 생각하다 시간을 보고 이내 자리를 떴다. 좀 있으면 조 대표가 올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린은 평범하게 청바지에 블라우스, 그 위로 코트를 입고 현관으로 나서니 거실에서 우기익이 전화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 그쪽 반응은? 응 좀 있으면 나갈 거야. 그러니까, 그쪽도 최대한 홍보하고 다녀 봐. 어.”
텔레비전도 틀어져 있었는데, 보니 선거 방송이었다. 방송에서는 이번 선거의 국민 지표 및 예상 표본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말 나오지 않게 조심하게 하고…….”
텔레비전에는 평소 우기익이 전혀 짓지 않는 웃음을 지으며 ‘기호 1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기익은 하린을 힐끔 보았다. 그러고는 전화를 하다 말고 작은 목소리로, 하린에게 명령했다.
-끝나면 전화해.
하린이 말없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다시 전화에 집중했다.
밖으로 나오니, 처음 보는 노란색 차가 눈에 보였다.
와. 이게 뭐람.
조 대표는 자신의 부를 자랑이라도 하듯 한눈에 보아도 고가로 보이는 차량을 몰고 왔다. 차에서 내리는 조 대표는 조수석 문을 열고는 하린을 보며 안녕, 손을 흔들었다.
그…… 문이 옆으로 열리네?
하린은 그 광경을 보며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와, 나지막한 탄성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많이 기다렸죠? 죄송해요.”
“기다리는 거 재미있었는걸요?”
“네?”
“일단 타기나 해요.”
하린이 뻘쭘하게 조수석에 앉으니, 조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문을 닫아 주었다. 이런 호화스러움이 처음인지라 얼떨떨하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했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조금? 재미있었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말하는 조 대표의 모습을 보며 하린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히 나오라고 한 시간에 나온 건데 억울하기도 하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도 몰라 그저 눈앞에 보이는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힐끔, 하린의 그런 모습을 본 조 대표는 시동을 켜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습니까~?”
차는 부드럽게 출발하여 우기익의 집 근처를 벗어났다. 대로변 큰길로 나오니 조 대표는 하린에게 물어봤다.
“그냥 저는 어디든 좋아요.”
“에이. 어디든 좋은 게 뭐예요.”
“저는 정말 다 좋아요.”
“그럼 하린 양이 특정한 곳이 나올 때까지 한번 드라이브나 합시다.”
의견에 대해 말을 못 하네. 조 대표는 속으로 생각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평생 양아버지에 눌려 살아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조 대표가 버튼 하나를 누르니, 저절로 차 천장이 오픈되어 열렸다. 오픈카는 처음 타 보는 하린은 천장을 두리번거리며 탄성을 질렀다.
“오아! 뚜껑이 열려요.”
“뚜껑이 열립니까-?”
아침의 내리던 비와 먹구름은 다 지나가고 햇빛이 보이는 하늘이 깨끗하게 보였다.
주위 풍경이 주르륵 바뀌는 모습과 햇살이 점차 보이는 하늘. 그리고 바람을 맞는 감각이 너무 좋았다.
“하늘이 너무 이뻐요…….”
머리카락이 바람을 맞아 펄럭거렸다.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린은 창문 밖으로 가져다 대며 더욱 강한 바람을 느꼈다.
“네? 잘 안 들립니다!”
바람 소리에 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혹은 하린의 목소리가 작아서였는지 조 대표는 큰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며 하린에게 말했다.
“하늘이 너무 이뻐요!”
드라마를 보며 하린은 궁금했었다. 왜 여주인공은 매번 이런 오픈카를 타면 일어서서 바람을 맞으며, 소리를 지르는지.
조금은 이해가 될 것만 같았다.
“하늘이 뭐라고요-?”
“너무! 이뻐요! 으악!”
하린이 크게 소리치자 조 대표는 속력을 내어 더욱 달리기 시작했다. 하린이 겁먹어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묘한 쾌감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아드레날린이 풍기는 것만 같은 감각에 사로잡히는 느낌.
신호에 걸리자 자동차는 속력을 줄이고,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였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네! 재미있었어요.”
하린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어이구, 감기 걸리겠네.”
조 대표 주변에 정차된 차량을 보다 이내 하린의 모습을 보고는 버튼을 눌러 차 천장을 다시 닫았다. 이상한 기계음이 나오며 천장이 생겼다.
추운 겨울인데도 추위보단 시원한 감각이 들이었기에 하린은 아쉬운 듯 천장을 만지작거렸다.
“더 해 주고 싶지만, 이차는 너무 눈에 띄어서. 그러다 우리 사진 찍힙니다.”
“……사진이요?”
“하린 양 아버지가 서울 시장 선거 출마자인데, 그 딸도 그다지 자유롭진 않겠죠?”
하린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가정이었다.
자신이, 우기익의 평판에 문제를 줄 수 있다고?
“이해가 안 돼요.”
“무엇이?”
“저는 이미 조 대표님이랑 결혼하기로 양가 말이 나온 상태인데, 그거랑 선거랑 무슨…….”
“음 그러니까.”
조 대표는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운전을 지속했다. 하린이 어디까지 정보를 필터링 당하며 키워졌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 대표 선거가 곧인 건 알고 있죠?”
“네.”
“선거가 끝날 때까지, 우리의 관계는 비밀리에 될 겁니다.”
정치와 기업의 관계는 먹잇감이 되기 좋은 소스였다. 그리고 우기익도 그렇고 이 여사도 그렇고 그런 것을 모를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기익은 바른 경영인, 자수성가의 표본으로 이미지를 메이킹하였고 심지어는 성공한 사례였다.
그리고 그 이미지에 흠집을 내기 위해 다른 정당에서도 움직였다.
“그, 그게 가능해요……?”
“권력과 함께라면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죠.”
물론 우기익 입장에서는 돈도 필요했으나, 명예를 지키는 것도 중요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끌고 들어온 게 조 대표 아니 그 뒤에 있는 이 여사와 강태형, 이 둘이었다.
그러나 돈을 보고 딸과 결혼시키는 파렴치한은 선거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그와 관련된 안 좋은 여론은 이 여사가 막아 주기로 협의를 보았다.
“왜요?”
“선거는 보통 진흙탕 싸움으로 넘어가는데, 괜히 정략결혼이다. 뭐나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피곤해지니까. 그건 우리 집안에서 막을 겁니다.”
재벌가 안주인 행세를 하며 재벌로 살아온 이 여사의 힘은 생각보다 강했다.
하린은 그제야 이해되었다는 듯 시선을 떨구었다. 방금까지 되게 좋았는데, 현실로 돌아와 질척이는 바닥을 뒹구는 것 같았다.
“그, 그럼 저는…… 대표님이랑 결혼을 해도 세상에는 비밀로 해야 하는 거네요.”
“아무래도, 잠잠해질 때까지는 그래야겠죠.”
담담한 조 대표의 말이 귓가에 들어왔다. 그와 결혼할 마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결국 자신은 평생 이용만 당하는 거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우기익. 그런 사람들이 제일 경계하는 것은 돈도, 힘도 아닌 일반인들의 여론이다.
하린은 그 사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아까 사진 찍히는 거 말씀하시는 건 그럼, 일반인들에게 찍히는 걸 고려하신 말씀이겠네요…….”
“똑똑하네요. 괜히 SNS 같은 곳이나 커뮤니티에 퍼지면 그건 피곤하니까.”
“그렇구나…….”
하린은 그렇게 말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방금 느꼈던 해방감은 어디로 간 것인지,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우울하거나 침울하지는 않았다.
이게 일상이었기에.
“평소에 아버지 눈치 보느라 가고 싶었던 곳도 못 갔을 텐데, 가고 싶은 곳 정말 없습니까?”
금세 조용해진 하린을 보던 조 대표가 물어왔다. 눈치 보느라 못 간 곳이라.
하린은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을 늘어트렸다.
우기익이 막아서 하지 못한 것들은 많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었다.
습관적으로 원하는 것을 생각하지도, 있어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
하린은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작은 소리를 내었다.
“저, 한곳 생각났어요.”
“어딘데요? 말해 봐요.”
“놀이 공원이요.”
“응?”
굳이 사람 많은 곳을 말하는 하린을 보며, 순간 조 대표는 당황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고는 하린의 말을 이해했는지, 한참을 웃었다.
“눈치 보지 않고, 내 뒤로 숨겠다는 거죠.”
“그, 그건 아닌데……!”
조 대표와 함께 있다면, 우하린은 뭘 해도 상관없었다. 우기익 난리를 쳐도 피해 나갈 구실이 생겼으니까.
“좋아요. 해 보죠.”
그 말과 동시에 자동차의 속력이 강해졌다. 뭔가 말을 하면 바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신기했다.
오랜 시간 내려앉은 무기력함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이를테면 변화였다.
* * *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놀이 공원에서 온 하린은 차에서 내리면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얼마나 신나게 놀고 소리를 질렀는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피곤할 텐데 쉬어요. 연락할게요.”
조 대표는 친근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자 하린 또한 손을 흔들었다.
그 역시도 하린과 놀아 주느라 피곤했었는지, 아까보다 조금은 더 초췌한 얼굴이었다.
하린은 들어가며 우기익에게 전화를 걸었다. 굳이 끝나고 연락하라던 말을 남겼기에 하기 싫은 마음을 뒤로하고는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뭐야 벌써 집에 온 거야?]
“네, 그게…….”
[잠이라도 자고 올 줄 알았더니. 쯧. 다음번에는 언제 만날 거니. 조 대표는 뭐라던.]
못마땅한 음성과 함께 여러 질문이 날아들었다. 하린은 저절로 몸이 경직되었다.
“딱히 그런 말은 없었어요. 그냥 연락해 주신다고만…….”
[3번이니 뭐니, 이상한 말 내뱉는 거 다 듣지 말고 그냥 애라도 배 버려. 임신을 했다는데 그놈이 뭐라 말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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