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분풀이한다고. 아저……. 왜 지사장님이 너를 여자로 안 봐주나 봐.”
이러면 안 된다. 여기 나가기 전에 굳이 싸워서 우기익이 의심하게 하면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쌓여 있던 것이 폭발하는지, 혹은 도망칠 곳이 생겼다는 것 때문인지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우진화가 반박하지 못하게 쏟아 냈다.
“지금 너는 약혼도 물 건너가게 생겼는데 나는 결혼한다고 하니까 불안하고 초조해서 이러는 거잖아.”
“아니거든? 나 조만간 NP도 입사할 거야!”
“그래. 입사하든 말든 신경 안 쓰고 싶으니까 너는 네 인생 살아. 난 내 인생 살 테니까. 제발 관심 꺼.”
하린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문을 열며 우진화에게 나가라고 손짓했다.
우진화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대로 끝낼 생각이 없는 듯, 하린의 속을 긁는 말을 내뱉었다.
“조 대표, 어떻게 꼬신 건지 너무 궁금해서. 나도 좀 알려 주라 언니.”
“나가.”
하린의 단호한 말과 행동에도 우진화는 막무가내였다.
“언니 기술이 괜찮았나 봐. 나도 언니한테 배워서 하루빨리 결정돼서 같이 약혼식 하자.”
실실 웃으며 말하는 말은 현실감을 잃었다.
이게 지금 제가 하는 말뜻을 하고 하는 말이지?
더군다나 아저씨가 너랑 결혼 아니 약혼식이라도 하는 모습을 나보고 보라고?
가슴에서부터 막힌 무언가가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은 나이 많고 소문 안 좋은 조 대표에게 팔려 가고. 우진화 저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동화 속 공주님인 것처럼, 백마 탄 왕자님과 결혼한다.
“넌 어쩜 안 변해. 너라는 애 정말 지긋지긋하게 네 아비를 닮았어.”
“뭐? 이게?!”
우진화는 하린의 뺨이라도 때리려는 듯 허공에 손을 올렸다. 이 모습까지도 진절머리 칠 만큼 우기익을 닮아 있었다.
그리고 평소라면 몇 대 맞아 주고 끝내겠으나, 이미 아까의 언행으로 무언가의 버튼이 눌린 것만 같았다.
누구는 도망가는 것도 두려워서 덜덜 떠는데. 왜 너희들은 이 모든 상황이 동화 같은 건데!
하린은 우진화의 손을 붙잡았다.
“뭐 해, 야! 너 안 놓아?! 이거 놓으라고!”
그리고 소음이 나가지 않도록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하. 조 대표에게 다리 벌려 주고 눈에 뵈는 게 없나 봐. 왜 벌써 결혼이라도 한 것 같아? 때리면 때리는 대로 가만히 있던 게!”
우진화의 표독스러움이 극에 달아 있었고, 그녀는 나이를 논할 수 없을 정도의 언사를 입에 담았다.
사실 이 말들은 대부분 우기익의 입에서 나오던 말들이었다.
하린은 결국 그들이 뱉는 어조로 말했다. 더러운 것과 싸울 땐, 더러워야 했다.
“그래. 조 대표 나한테 빠졌더라. 내 얼굴에 흠집 하나라도 내 봐. 그 사람이 어떻게 나오나.”
“씨…….”
하린의 말에 잠시 주춤한 우진화는 분한 듯 숨을 헐떡였다. 그러면서도 하린에게 잡힌 손을 버둥거리며 거칠게 행동하다가 이내 포기한 듯 힘을 뺐다.
대신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과거에 언니, 우리 예쁜 언니라고 부르며 따르던 어린 진화의 모습이 눈에 겹쳐 보였다.
“그렇게 의기양양하게 굴지 마. 그래 봤자 너는 늙은이한테 팔려 가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그래도 나는 너한테 고마워, 아빠의 정치자금이 되는 거잖아. 그게 곧 내 날개인 거고.”
어쩌다 네가 이렇게 변했을까.
제 아비와 닮는 것이 싫다던 작은 아이는, 커서 제일 싫어하던 이를 닮아 가고 있었다.
“제발 너도 현실을 직시해.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동화가 아니야.”
“그건 너나 지옥인 거지. 난 그럴 일 없어.”
인생에서 단언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런 것을 하나하나 설명하기엔 하린도 어렸다. 더군다나 잘못된 믿음이 낀 생각은 바꾸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하린은 자신은 그럴 일 없다 자신하는 우진화를 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싸울 힘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조금 서글펐다.
“그래…… 내 지옥이 너와는 별개일 거야.”
사실은 같은 지옥이겠지만.
우진화를 보내고, 하린은 힘없이 침대 아래 땅바닥에 앉았다. 침울한 감정이 들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더불어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둑어둑해지고 방이 어둠에 사로잡힐 때까지 한참을 적막감 속에서 있었다.
그냥, 아저씨한테 연락해 볼까.
하린은 문득 아까 하려다가 참았던 것을 상기했다. 하린은 원래 아까 보내고 싶던 문장을 간단하게 보내며 생각했다. 자신은 우울하지만, 그는 보고 조금이지만 웃었으면 좋겠다.
「내일 비 온다고 해요. ……우산 챙겨야 해요!(. ❛ ᴗ ❛.)」
지이잉- 침대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이 적막감을 헤치며 소리를 냈다.
“어?”
하린은 그 생각이 닿자마자 빠르게 몸을 움직여 핸드폰을 열었다. 방금까지의 감정은 어디론가 날려 버리고 하린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별것 아닌 대답이겠으나, 태형에게 받은 첫 연락이었다.
* * *
태형이 쉬고 있는 호텔에 김 비서가 찾아왔다. 오늘 내내 외근으로 전화로만 상황을 보고했었기에 퇴근 직전 말로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태형은 아일랜드 식탁에 앉아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삶이 무료한 얼굴이었다. 재미도 흥미도 없이 죽지 못해서 사는 삶.
“너도 와서 마실래?”
“……왜 그러고 있습니까.”
이미 술이 조금 오른 태형은, 김 비서를 보자 가볍게 그를 맞이했다. 지금의 태형은 예전부터 알던 형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냥, 조금.”
“조 대표랑 우하린 쪽은 어때요.”
“……그러게.”
김 비서는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따라 상태가 별로였다. 심지어는 술도 강한 태형이 양주 한 병 마셨다고 이렇게 풀어질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 무슨 일 있던 사람처럼…….”
“요즘 계속 떠올라.”
오늘 조 대표 만나고 나서, 아니 정확히는 우하린과 엮이고 나서부터 내내 감정이 묘했다.
태형은 자신의 감정을 정의하지 못했다.
괴로운가? 아니, 그건 아니었다.
그럼 화가 나는가? 아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럼 왜 기분이 나쁘지? 왜 해소되지 않는 것 같지, 탁하고 심장 부근 어딘가가 불편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우하린 그 여자 때문입니까?”
“뭐? 무슨.”
김 비서는 지금껏 행동해 오던 것과 유일하게 다르게 행동하는 태형의 태도에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른이 된 태형은 그리 친절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유일하게 예전에 잃어버린 과거의 태형의 모습을 끌어내는 것은 우하린이라는 여자와 엮일 때뿐이었다. 김 비서는 태형의 반응을 보며 드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수상해. 빨리 우하린을 외국으로 돌려야 할 것 같아.”
“안 그래도 2, 3일이면 준비가 다 끝날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보내자고.”
고개를 끄덕이며 잔에 남은 술잔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입 안에 감돌며, 가슴을 무겁게 누르던 무언가를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 걸리적거리는 건 눈앞에서 다 지워 버리면 되지.’
그렇게 생각하던 태형은 술잔을 입에 다시 털어 넣었다. 그 모습을 보던 김 비서는 한숨을 쉬며 태형의 앞에 앉으며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형,”
태형은 김 비서인 진우의 잔에 얼음을 담아 주며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내일 회의 있는 건 알고 이렇게 마시는 거지?”
“알아.”
“……우진화는 어떻게 하려고.”
“우진화 면접 일정이 언제였지?”
“이틀 뒤.”
“뭐, 회사 방침에 안 맞는 지원자니까 손수 떨어트려야지.”
생각보다 조급하게 구는 우기익을 태형은 통 안에 넣어 둔 쥐처럼 괴롭히려고 했다.
마지노선 죽음의 끝까지 몰아넣고 발버둥 치는 것을 보다가 구원자인 척 손을 내밀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태형의 생각을 공유받지 못한 김 비서가 물어보자 태형은 씁쓸하게 웃었다.
“우진화랑 빨리 결혼할까.”
“……?”
김 비서는 마시던 술잔을 마시다 말고 테이블에 올려놨다.
“그냥, 하루빨리 증거 잡아서 정리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더 느긋하게 일을 처리하려던 것을 생각을 바꾼 것이다.
“정리라.”
정리하는 날. 김 비서와 태형이 염원하던 거였다. 그리도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준비했던, 과연 그런 날이 찾아올까 싶은 날.
“다 끝내고 나면 형은 뭘 하고 싶어?”
김 비서는 태형이 걱정되었다. 평생을 복수하겠다고 분노로 살던 사람이 과연 복수가 끝나면 살 수 있을까.
아니 살 의지가 남아 있을까.
“그냥 살겠지.”
“아니 뭐 더 좋은 다른 사람 만나서 애도 낳고 그런 것도 할 수 있잖아.”
김 비서의 말에도 태형은 반응 없이 그저 술만 마실 뿐이었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호텔의 내부는 깔끔하고, 고급스럽지만 정감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이 꼭 태형의 삶 같다고 김 비서는 생각했다.
연고도 없이, 언제 어디서든 사라질 준비를 하는 삶. 내 집이 아닌 누군가의 집, 타인을 위한 삶.
사실 태형의 안은 텅 비어 있을지 몰랐다. 화려한 호텔처럼 말이다.
“……그러게.”
술 한 병을 끝내고 나니, 김 비서는 집으로 돌아갔다. 김 비서는 가는 길에도, 이제 자라고 한참을 태형을 설득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물론 태형은 다른 술 하나를 더 마시고 있었다. 김 비서의 물음은 크게는 아니나 태형에게 잔잔한 파동을 주고 사라졌다.
“그러게.”
태형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우기익을 끝내고 나면 나는…….”
생각하고 고민을 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는가 하면 없는 문제도 있었다. 이것은 후자의 문제였다.
자신이 고민하여 나올 수 있는 답이 아니다. 태형은 이것을 그렇게 정의했다.
그냥 죽지 못해 살겠지.
아니면…….
술잔으로 입을 축이던 중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보통 올 연락이 없는데 울리는 핸드폰에 의아해하며 확인했다.
「내일 비 온다고 해요. ……우산 챙겨야 해요!(. ❛ ᴗ ❛.)」
하린의 연락이었다.
태형은 소리가 나게 코웃음을 쳤다. 눈앞에 알짱알짱하는 게 귀엽기도 하고, 꿋꿋하기도 했다.
“하.”
술 때문인지 머리가 살짝 아파져 와 태형은 눈썹을 움직였다. 저번처럼 연락을 보고 무시하려다가 마음이 바뀌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다시 잡아 답장했다.
평소 생각하던 대로만 행동하던 태형에게 최근에 생긴 유일한 변덕이었다.
「응. 너도 비 조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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