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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위반-21화 (21/75)

#21화

우진화가 아무리 어리다고 한들, 지금 우기익이 하는 말을 못 알아먹을 정도로 어린 것은 아니었다.

더불어 외국에 도망가 있었다고 해도 친구들은 한국에 있었기에 조 대표가 국내에서 어떤 소문이 있는 사람인지도 알고 있었다.

사업에도 관심 없고 그저 물려받은 돈으로 술과 여자를 밝히는 데만 관심 있는 호색한.

이혼했다는 말도 돌 정도로 여자 문제가 심하다 했다. 오죽하면 정말로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도 조 대표의 여성 편력에 질려 도망갔다고 했다.

“……언니가 엄청 맘에 들었나 보네요.”

그런 사람이 하린이 맘에 들었다……라.

꼴좋다.

우진화는 속으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며 하린을 깎아내렸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니까. 우진화의 속은 더럽고 추악했다.

그런데 오늘은 왜, 기분이 별로지?

우진화는 아주 눈치가 빨랐다. 자신이 싫어하는 핏줄에게 배운 것이 그런 것뿐이니 말이다.

우하린이 남자 하나 물어서 사라지면 나는 이제 어쩌지.

이런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당장만 해도 조 대표와 자신을 비교하고 질책하는 우기익을 보고 있었으니까. 불안했다.

자신은 언니처럼 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우진화는 자신이 오를 수 있는 나무와 오르지 못할 나무를 잘 알아보는 아이였다.

그날 강태형을 보았을 때, 우진화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린 것이 무기가 되지 못한다면 자신은 절대 그에게 이성적 흥미를 주지 못할 것이다.

어쩌지. 우하린도 한 것을 내가 못 하면…….

“다녀왔습니다.”

그때 돌아온 하린의 음성이 들렸다. 우기익은 하린을 기다린 것인지 오자마자 시선을 돌려 현관을 바라봤다.

“너는 방으로 돌아가.”

우진화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고 돌아가라는 말에 그녀는 순간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몰랐다.

“……네.”

하린과 할 말이 궁금하지만, 손을 휘적거리며 올라가라고 말하는 우기익을 보고는 우진화는 2층으로 사라졌다.

“옷이 바뀐 걸 보니 조 대표 눈깔이 어지간히 뒤집혔나 보구나.”

“아, 이건…… 네.”

우기익은 상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단편적인 것만 보고 웃음을 보였다. 하린은 그 모습을 보며 억지로 미소 지었다.

“조 대표님이 3번 더 만나 보고 괜찮으면 결혼하자고 하셨어요.”

“그래 다음은 또 언제 만나기로 했고?”

하린이 말하기를 조금 망설이며 말했으나 우기익은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

“조만간이요.”

“그래. 다음번 조 대표 만나는 날 미리 말해 두면 내가 이번처럼 준비해 두마.”

“아, 그게…… 지금 입은 옷이 취향이라고 앞으로는 이런 옷으로 입고 오라고 하셨어요.”

“지금 이 꼴이 취향이라고?”

우기익은 이상한 헛소리를 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표독스러운 눈빛이 진해졌다.

하린의 말을 못 믿는 것이다.

“너 이년 괜한 헛된 생각하는 거 아니야? 조 대표 놓쳐 봤자 네년이 이득 볼 건 없어.”

“아니에요……! 정말 그, 그렇게 말씀 하셨어요. 의심되시면 전화해, 해 보셔도…….”

“오늘은 무엇을 했지?”

“백, 백화점…… 가서 지금 입은 옷도 사 주셨어요. 커, 커피도 마시고.”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우기익은 계속 캐물었다.

“그리고 호텔은?”

그런데도 다 안심이 안 되는지, 기어코 잠자리 여부까지 확인했다.

“……갔어요.”

맘에 들 때까지 헤집어 놓고서 드디어 마음에 찼는지 우기익은 마지막 말을 듣고 나서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리고 제일 중요한 마지막까지 챙기는 것을 잊지도 않았다.

“갈 때 해 준 반지는 어디 갔지?”

“그, 그게…… 조 대표님이 세 번 만날 때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으시겠다고…….”

“뭐?”

순식간에 성난 얼굴을 한 우기익의 표정이 보였다.

“너 그게 뭔 줄 알고……!”

우기익의 솥뚜껑 같은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가는 순간 하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럽게 바뀐 우기익의 행동은 이해되지 않았으나 학습된 무기력함이었다.

고통이 이어지지 않는다. 슬쩍 눈꺼풀을 들어 올려보니 우기익은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하린 근처를 서성였다.

“비, 비싼 거였나요……?”

“조 대표가 뭐라 하면서 들고 가던.”

“그냥 저, 저랑 안 어울린다고 하면서…… 들고 가셨어요.”

반지가 고가의 물건 같아 보이지도 않았으며, 조 대표가 들고 갔다는 말에 저렇게 초조해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처음에 준 건.”

“……그것도 같, 같이.”

그래서였을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오늘 조 대표님이 들고 가셨어요……. 중, 중요한 물건이면 되돌려 달라고 말, 말할까요?”

처음에 준 반지라면 들고 있었다. 지금 당장에라도 줄려면 줄 수 있었으나, 이상하게 주면 안 될 것 같았다.

우기익의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려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고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됐어, 올라가 봐.”

“……네.”

하린은 최대한 태연한 척을 하기 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위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걷는 하린에게 우기익의 시선이 날카롭게 따라붙었다.

집 안은 언제든지 제 살을 파먹을 살얼음판이었다.

하린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오자마자, 굳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우기익에게 거짓말을 한 반지를 찾아 숨기기 시작했다.

“어디다 숨기지.”

물론 하린의 방에 들어올 사람은 없었다. 우기익이라고 해도 하린을 보통 불러내지, 찾아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그나마 청소를 위해 사용인만 들어오는 정도였다. 그렇기에 굳이 꽁꽁 숨겨 둘 필요까지는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안했다.

저 정도로 날카롭게 구는 우기익에게 혹여나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들키는 순간, 얻어맞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 거짓말을 해서는…….”

하린은 아직까지도 심장이 두근거리는지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는 자신의 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하린은 한참을 생각하다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손수건으로 반지와 다른 액세서리들을 감싸 책상 서랍에 넣어 눈에 보이지 않게 했다.

굳이…… 방에 들어와 책상 서랍을 뒤지며 손수건까지 파헤치지는 않을 테니까.

“하.”

하린은 서랍 구석에 반지를 박아 넣고 몇 번 확인을 하고 나서야 긴장이 풀린다는 듯 침대에 앉았다.

하루 종일 날 서 있던 감각들이 허공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이 짓도 조만간 끝이겠지. 결혼하든 도망을 가든…….

생각해 보면 많은 일이 있던 하루였다. 조 대표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 보고, 태형도 보았다.

아저씨.

하린에게 태형은 열병 같은 사람이었다. 처음 겪는 느낌이었고. 그를 생각하면 몽글몽글한 감각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오르면 안 되는 나무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지만 우진화랑은 그가 잘 안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더 멋있는 여자랑 만났으면 좋겠어.

나 같은 것도 아니고, 우진화처럼 철없이 욕심만 많은 애도 말고. 정말로 아저씨와 견주어도 옆에서 멋진 사람…….

그런 생각을 하니 괜히 속이 울렁거렸다.

“하.”

하린은 나지막이 작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이전에 보낸 문자를 확인하니 역시나 그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어젯밤 즐거웠어요. 아저씨! φ(゜▽゜*)♪」

아까 보낸 문자를 괜히 노려봤다.

괜히 보냈나.

회의적인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태형에게 괜히 연락해 보고 싶었다.

한참을 죄 없는 핸드폰을 노려보며 뭐라고 고민하던 때, 그냥 핸드폰을 내렸다.

보내지 말자.

괜히 자신의 행동이 태형에게 귀찮음으로 보이는 것이 싫었다. 하린의 작은 머리통이 힘없이 축 처져 있을 때, 하린의 방문이 열렸다.

끼익. 기름칠 되어 있지 않은 문에서는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하린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았다. 불청객이었다.

“언니는 능력도 참 좋아.”

이 공간에서 하린에게 언니라고 말할 사람은 단 한 명. 문을 닫으며 우진화는 하린을 자극했다.

오늘은 뭐가 또 그리 불만이어서 여기까지 굳이 행차하셨을까.

“뭐야.”

“남자 꼬시는 데에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다고. 이번엔 뭐로 꼬셨어?”

하린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진화를 노려보자, 우진화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 아이와는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친한 언니 동생 사이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남 같은 관계도 힘든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쯤 우진화는 하린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말을 내뱉었다.

“조 대표 어때, 언니.”

“뭐?”

“소문처럼 잘해?”

지금 하는 말이 제대로 된 말인지 의심이 들었다. 하린은 이게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우진화에게 소리쳤다.

“너……!”

“왜, 그냥 궁금해서.”

허,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싸늘하게 굳어 가는 감각을 느끼며 하린은 일어나 우진화를 밀며 문을 열었다.

“그딴 말 할 거면 당장 나가.”

“조 대표 주변에 그렇게 여자 연예인들이 많다던데. 괜히 언니가 걱정되기도 하고.”

하린의 기세에도 우진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말로는 언니를 위하는 척하고 있으나 우진화의 눈에는 적개심이 보였다.

하린은 순간 우진화가 왜 와서 이러는지 알아챘다.

“너 지금 분풀이하니?”

단박에 싱글싱글 조소하던 우진화의 미소가 구겨졌다.

분명한 자격지심이었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전자우편 : [email protected]

ISBN : 979115773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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