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왜 아저씨가…….
하린은 자신이 정말이지 헛것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눈을 찌푸려보아도 그대로 보이는 형상에 하린은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저번 모일 때 보았죠.”
물론 하린이 잘못 보는 것은 아니었다.
태형이 능숙하게 조 대표에게 말을 거는 모습과 더불어 그 인사를 받아 주는 조 대표를 보면서 말이다.
조 대표가 태형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태형이 눈치를 채고 통성명을 했다.
“강태형입니다.”
“아, 다시 뵙겠습니다.”
조 대표는 서글서글한 미소를 보이며 태형에게 악수를 권했다. 간단한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하린은 괜히 둘의 눈치를 살폈다.
‘일면식이 있는 사이였구나…….’
남자들의 비즈니스 세계는 작고 깊어서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라고 했다. 더군다나 우기익과 연결된 둘.
하린은 자신이 여기서 태형과 일면식 없는 사이인 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태형과 자신은 원래 알지 못하도록 우기익이 설계해 둔 관계이니까. 그 당연한 사실을 깨닫고 나니 괜한 긴장감이 밀려왔다.
“이번 우 대표 선거 캠프 한다던데 조 대표님도 한자리하시나요?”
“저보단 저희 집안에서 조금 더 관심이 있으셔서 전 조금 빠져 있으려고 합니다. 하하.”
둘의 교접점이 있는 우기익이 대화 소재로 사용되었다. 최근 우기익은 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선거 유세 중이었다.
“……그나저나 제가 끼어들면 안 되는 곳에 끼어든 것은 아닌지요. 숙녀분도 계시는데.”
자연스럽게 대화가 우기익에서 하린으로 넘어왔다. 그 대화의 흐름을 끊고 넘긴 건 태형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하린으로 향했다. 대화에 제외되어 있던 하린은 상황을 보다 꽂히는 시선에 당황했다.
어버버,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보던 조 대표가 하린의 소개를 해 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둘은 초면인가요? 여기는 우 대표 첫째 딸 우하린 양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 안녕하세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태연하게 행동하는 태형을 보니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웠다.
뭐지.
태형이 여기에 찾아와 굳이 아는 척을 할 이유가 없었다.
“우 대표님 따님이시군요.”
태형은 하린을 처음 보는 얼굴을 하면서, 평소에는 자신에게 보이지도 않던 미약한 미소까지 보이고 있었다.
정말 처음 보는 사람처럼 말이다.
혼란스러웠다. 저번의 기억은 혹시 자신이 만들어 낸 망상이 아닌가 싶어서 말이다. 하린은 장난감이라도 뺏긴 아이처럼 태형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정말 하린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 모습에서 연기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이 태연했다.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건 하린이었다. 점차 버석하게 굳어 가는 하린의 표정. 조 대표의 시선이 하린을 향하다 이내 태형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강 지사장도 우 대표 둘째 딸과 약혼한다는 말이 돌던데.”
조 대표 역시도 눈칫밥 먹으며 커 온 세월이 있었다. 태형이 아무리 자신의 모습을 잘 감춘다고 하더라도 하린은 아니었다.
조 대표는 자신도 왜인지 이유를 모르는 질문을 던졌다.
던지고 보니 썩 나쁘지 않은 질문 아니, 나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미리 알아 두면 훨씬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럽니까.”
“에이, 혼자만 아는 겁니까? 가족이 될 수도 있는 건데, 미리 조금 알려 주세요-.”
태형의 모호한 대답에 조 대표가 서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아주 잠시지만 태형의 시선이 하린에게 향했다.
“?”
“네?”
하린은 자신의 동요를 느끼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물론 반사적으로 조 대표의 말을 듣고 반응했다.
커다랗게 커진 동공에서 하린의 당혹스러운 감정이 묻어났다.
“……그런 날이 온다면 재미있겠군요.”
머리 위로 태형의 음성이 지나갔다.
긍정인가.
하린은 시선을 떨구었다. 자신이랑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것을 우진화하고는 긍정적으로 말한다는 사실이, 가슴 뻐근하게 불편했다.
아니 네가 왜 불편해.
하린은 속으로는 불편할 명분도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다그쳤다.
“아니라고는 안 하시는군요. 다음에 한번 제대로 보시죠.”
“예, 알겠습니다.”
잠깐의 대화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나 버렸다. 그 시작도 태형이 잠시 나왔기 때문이기도 했다.
태형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하린도 덩달아 인사했다.
“드, 들어가세요…….”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씁쓸한 기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패배감이었다.
태형이 돌아가고 난 후, 밝아 보이던 하린의 모습이 눈에 보인 게 침울해졌다.
조 대표는 묘하게 태형이 거슬렸으나, 둘이 접점이 있을 리 없었기에 그 생각은 가정에서 빼 버렸다.
왜 이러지. 아까 마저 하지 못했던 대화를 해야 하는데…….
둘 사이에 정적이 가득해지자, 하린은 속상한 마음을 숨기면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물론 티는 다 났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그냥요.”
“세상에는 그냥은 없는데. 다 이유가 있을 텐데요.”
“……저는 조 대표님이 진짜 이해되지 않아요.”
조 대표는 하린의 모습을 보며 아주 약하게 미소를 보였다. 거짓말 못 하면서 그것을 알지도 못하는 것도 신기하고.
뺨도 붉고, 눈도 붉고, 코끝도 붉다.
여자 울리는 것에 취미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묘하게…….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지금껏 조 대표의 삶은 약육강식의 세계였다.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들은 육식 동물이었다면, 하린은 조금 달랐다.
사자무리에 있는 자신이 초식 동물인 줄도 모르는……토끼?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가 있긴 했다.
“뭐가 말입니까.”
“저랑 자, 잔 것도 아니고. 제 대체품도 많을 텐데…….”
철없고 맹랑한 주제에 세상 물정도 모르는 토끼.
“그럼 조 대표님은…… 친절하신 분이신가요?”
“내가?”
처음 듣는다는 말에 조 대표가 아까보다도 크게 웃었다. 조금은 머쓱해졌지만 하린은 그럼에도 그의 의중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최소 하린 양의 아버지보단 제가 나을 겁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재벌가 망나니라고 하지만.”
“……망나니는 아니세요.”
자조적으로 웃는 조 대표를 보며 하린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사실 저번에 봤을 때는 망나니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나, 최소 오늘 본 그 사람은 세상을 막 사는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하린의 말에 조 대표는 말없이 하린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느낀 하린은 괜히 동공을 굴리다 이내 아래로 떨구었다.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아닙니다.”
도피의 수단으로 결혼을 해 준다는 남자와.
결혼은 안 되지만 도망치게 해 준다는 남자.
일생일대의 선택지가 눈앞에 떨어졌다.
애정 따위는 없는 관계. 그저 불쌍함이 기반을 두어 호기심이 작용한 제안들.
“그냥 데이트나 합시다.”
하린은 우기익의 집에 들어간 첫날을 기억한다. 사람은 언제든지 악마의 얼굴을 할 수 있다.
“데이트……요?”
“그 작은 머리로 열심히 굴리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자고요.”
조 대표의 표정이 전보다 조금은 풀어져 보였다. 그것은 보통은 경계심이라고 불리는 가면이었다.
“……네.”
여러 변모하는 상황 속에 하린은 자신을 떨어트리기로 생각했다. 그래, 조 대표의 말이 맞았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뭔가를 생각하려고 해도 아는 게 없었기에 자신 혼자 단정 지어 행동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의 말을 믿고 행동할 변별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 상황에 맞춰 이기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에 낀 반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집에요.”
“흐음.”
하린의 생각이 정리될 때쯤, 조 대표의 음성이 들려왔다.
조 대표의 단호한 말에 하린은 이해되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치아가 보였다.
“반지 좀 줘 볼래요?”
하린은 자신의 손에 낀 반지를 빼, 그에게 건넸다. 그는 다시 그 반지를 살피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이건 압수.”
“네?”
“그리고 집에 있는 반지, 잘 챙기고 있어요. 나중에 달라고 할 거니까.”
“왜요?”
하린이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던 그는, 그냥 일어나더니 제 할 말만 계속 뱉었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죠.”
* * *
그 시각 우기익의 집.
우기익과 우진화는 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내용의 중심은 강태형이었다.
“NP 인턴 자리 잡았으니까 너는 가서 잘 앉아 있기나 하면 돼.”
“정말요?”
“거기 담당자랑은 대충 말 맞춰 놨으니, 적당히 하고 와. 괜한 소리해서 먹칠하지 말고.”
사실 강태형과의 결혼을 주선하기 위해 이 정도로 할 생각은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 공천을 받기 위해 돈을 많이 사용했기에 유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던 현금이 점차 동나고 있었다.
애초 생각을 바꾼 이유는, 그의 앞에 있는 각종 재산과 물려받게 될 회사 경영권 등을 생각하면 이대로 놓치기 아까운 인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강태형과 결혼을 시키기 위해 이까짓 푼돈 쓰는 건 부담도 아니었다.
다만 제일 걸리는 건 우진화.
우하린처럼 빼어난 외모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하여 똑똑하지도 않다.
정말이지 자신의 딸이라고 하지만 어리다는 것 하나 빼고는 밀어붙이려야 장점이 없었다.
우기익은 우하린의 외모를 살피며 미간을 찌푸렸다.
“가서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하지 말고. 강 지사장 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꾀어내. 우하린 그년도 하는 거니 너라고 못하진 않겠지.”
“……네.”
“제 어미라도 닮을 것이지. 하여간 쯧.”
우기익의 반응과 시선을 보고는 우진화는 몸을 사렸다. 매번 반복되는 비교였기에 이제는 화나지도 않았다.
다만 질투심이 점차 비대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보다 이쁜 피 안 섞인 언니.
“언니는 잘, 돼 가고 있어요?”
“오늘도 조 대표랑 만나기로 했다고 하더구나. 연락도 없는 거 보니, 조 대표가 우하린 고년 치마 속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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