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 시각 태형은 비서와 둘이 사무실에 있었다. 김 비서는 그의 전화를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우기익이 만나고 싶어 했다고? 아니 아직 때가 아니니 먼저 나서지 마. 응.”
그의 사무실은 두꺼운 외벽에 유독 소음 차단에 대해서 매우 신경을 썼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 원래 하던 대로 정당 상관없이 계속 돈을 먹여놔. 그리고 이제 우기익 선거 시작했으니 돈 더 달라고 짹짹거릴 거야.”
정보가 절대로 남에게 새어 나가면 안 된다.
남을 잘 믿지 않는 성격인 그였기에 이와 비슷한 대화는 집, 사무실 등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곳에서만 대화했으며. 이것을 알고 있는 인물 또한 몇 명 되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태형은 숨을 돌리며 지끈거리는지 이마 부근을 지분거렸다.
“하.”
우기익에게 정치를 하라고 부추긴 건 정당의 대표였지만, 사실 그 판 자체를 만든 건 ‘재외 교포 리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 ‘리엄’이라는 인물을 만든 건,
“배후가 누구인지 절대 새어 나가게 하지 말고. 그래, 수고했어.”
강태형이었다.
리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에게 몇 년 동안 돈을 풀었다. 글로벌 회사로 여러 재산을 미리 물려받아 일찌감치 불려왔던 태형이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제 손안에 넣었다고 판단이 될 때쯤, 몇몇 정치인을 이용하여 우기익에게 허황된 꿈을 심어 주었다.
서울시장, 더 나아가 대통령까지.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우기익을 잡기 위한 강태형의 배수진이었다.
‘제일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할 것이다.’
태형이 매일같이 하던 말이기도 했다.
그 옆에서 태형의 전화가 끊기기를 기다리던 비서가 준비되어 있던 자료를 준비하여 전달했다.
“조 대표가 우기익에게 준 돈이 적지 않네.”
내용을 살피던 태형이 중얼거리자 앞에 있건 김 비서가 대답했다.
“네, 정확히는 이 여사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입니다.”
“그 집안에서 조 대표는 내놓은 자식이잖아. 조 대표도 아니고 왜 이 여사가 돈을 주지?”
“아마도 조 대표를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 이 여사가 직접 결혼을 주선하는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는 우기익을 묶어 두는 용도로 돈을 준 것 같습니다.”
태형의 계획에는 우하린이 없었기에 당연하게도 이 여사, 조 대표도 없었다.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조약돌인 우하린을 다른 곳으로 빼돌려야 했다.
원래 그의 계획은 그러했다.
우기익에게 정치적 야심을 넣어서 시장선거 혹은 대선까지 말도 안 되는 거품을 키운다.
평소 땅, 건물, 법인 명의에 돈이 묶여 있는 우기익이기에 현금이 마땅치 않은 점을 이용하여 초반부터 ‘리엄’이라는 인물을 우기익의 근방에 심어 두었다.
정치인들을 통해 리엄이 돈을 유통해 주다가, 어느 순간부터 우기익의 담보로 돈을 빌려준다.
현금을 마련할 방도가 없어질 때쯤, 강태형이 나타나 우기익에게 돈을 빌려준다.
리엄의 돈을 갚든, 태형의 돈을 갚든 우기익의 자산은 강태형의 손으로 들어오게 되고.
우기익이 제일 찬란하게 위에 올라가 있다고 느낄 때, 숨통을 조여 죽일 작정이었다.
“역시 우하린을 외국으로 빼돌려야겠어.”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말한 말이긴 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우하린을 빼돌리는 것이 맞았다.
우하린이 만일 조 대표랑 엮인다면, 우기익은 필요할 때마다 조 대표와 이 여사에게 우하린을 이용하여 돈을 요구할 것이다.
우기익에는 돈이 없어야 했다.
그래야 제 손에 쉽게 떨어질 테니까.
“음 찾기 힘들게 여자 외국인 이름 하나 만들어 줘요. 그리고 유럽 몇 군데 다닐 만한 티켓 좀 구해 주고.”
“언제까지 해 드리면 될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탁- 서류를 덮는 소리가 싸늘한 사무실 내부를 울렸다. 깔끔한 정리였다. 어느 면으로 생각해도 우하린을 치우는 게 맞았다.
“네. 아 그리고…….”
“뭡니까.”
눈이 뻐근해져 두 눈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던 그는 손을 내리며 비서를 올려다보았다.
“우진화 양이 회사 인턴 십을 신청했습니다.”
태형은 미소를 지었다.
우기익, 조급한 모양이긴 한가 봐.
“서류는 이미 통과되었고, 면접만 남아 있습니다.”
“누가 통과시켰지?”
태형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올라갔다. 자신은 우기익의 딸이 우리 회사에 지원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 물론, 인턴 십까지 지사장이 관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고도 올라오지 않은 건 이상했다.
“아무래도 불안하게 느낀 우기익이 인사팀장을 매수하여 진행한 것 같습니다…….”
“어지간히 불안한가 보네. 넉넉하지도 않은 형편에 돈 좀 쓰셨군.”
하루라도 빨리 우진화랑 엮고 싶은데 강태형이 뜻처럼 안 움직이니 악수라도 두는 꼴이다.
심지어는 인턴십의 기본 학력은 대졸인데, 이제 갓 대학교 들어간 애가 인턴.
“그 인사팀장 잘라요.”
그것은 그만큼 최근 우기익의 상황이 보기와 다르게 조급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긴 그러니까 우하린도 하루라도 빨리 결혼 보내고 싶어서 안달이지.
“아, 아니지. 그 면접 저도 들어가겠습니다.”
“지사장께서요?”
“우기익이 결혼하고 싶어서 발악하는데, 동조해 줘야지.”
김 비서가 빠르게 수긍하고 사라진 사이. 태형은 체중을 뒤로 기대며 자신의 사무실 천장을 바라봤다.
종일 날 서 있게 올랐던 긴장감이 가라앉는다. 어둑어둑해진 도심의 모습을 보며 두 눈덩이를 손으로 꾹 눌렀다.
“왜 계속 생각나지.”
탁한 음성이 허공에 퍼져 날아갔다. 이상할 정도로 만나면 신경이 쓰이는 여자.
태형은 문득 오전까지도 번호 한번 받아 보겠다고 온갖 말을 가져다 붙이는 하린의 표정이 생각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모습.
주춤거리는 주제에 끝까지 제 할 말은 하는…….
“애지.”
무채색 같은 삶을 살면서 오랜만에 느끼는 오색빛깔의 색이 눈에 그려졌다.
“그래, 눈앞에서 사라지면 괜찮겠지.”
태형은 그렇게 생각하며 하린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했다. 여자라면 쳐다도 보지 않고 살았다. 애당초 하린의 나이는 동생뻘이라고 생각했기에 지금 드는 관심은 죄스럽기까지 했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던 그는 옆에 둔 핸드폰을 확인했다. 온 연락을 확인하던 중, 태형의 짤막한 음성이 튀어나왔다.
“뭐야.”
미간을 좁히던 태형은 이내 기가 차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이런 이모티콘을 써가며 연락하는 상대도 처음이었기에.
『어젯밤 즐거웠어요. 아저씨! φ(゜▽゜*)♪』
평소라면 받아 주지 않을법한 것이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태형은 핸드폰을 내려놨다.
고독감이 깔린 사무실 속 그의 표정은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 * *
섹스어필.
조 대표의 말은 가볍게 날아와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갔다.
하린은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었으나 아무런 대답할 수 없었다.
좋아서 하냐는 말.
이미 하린은 침대에서 잘못했다고 빌어서 도망쳤다. 그리고 좋아서 섹스어필했냐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다.
하린이 대답하지 않자 조 대표는 차분히 하린을 바라보며 한마디 더 얹었다.
“좋아서 한 거, 아니지 않습니까?”
조 대표는 더 이상 웃으며 말하지 않았다.
이 사람의 웃지 않는 얼굴을 하린은 뚫어져라 바라봤다.
“알, 알면서 왜 물어보신 거예요.”
“혹시나?”
조 대표가 대답에 하린의 왈칵 얼굴이 구겨졌다. 치욕스러웠다. 하린의 반응을 보던 조 대표가 바로 말을 이었다.
“이미 다 밝혀진 마당에 그냥 말하자고요.”
다만 이미 다 밝혀졌기에 굳이 속마음을 숨기지는 않았다.
“……어떤걸요.”
“그냥, 다 말하세요.”
다, 라는 말은 너무 넓어서 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
우기익은 조 대표랑 결혼해야 한다고만 말했으니까.
“저는 정말 아버지가 조 대표님 만나라고 해서 그것만…….”
“에이. 그런 거짓말 나랑 안 통해요.”
“……진짠데.”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는 조 대표가 답답했다. 어떤 말을 해야 이 관계를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일단, 다 들킨 마당에 최대한 시간을 벌어야 했다. 태형이 도주를 도와주기까지.
그러니까 당장은 이자의 환심을 사서, 우기익에게 말이 들어가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럼 질문을 조금 바꿔 보죠.”
“……네.”
“우 대표 나랑 만나면서 뭘 하라고 했습니까?”
“그냥 데, 데이트하고. 최대한 잘 보여야 한다고.”
하린의 얼굴이 점차 울상으로 변했다. 뭘 말해도 믿지 않고 아니라고 하니 정답이 없는 것을 맞추는 것만 같았다.
도대체 뭘 말해야 만족하는 거야.
하린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조 대표는 하린을 괴롭히는 것이 즐거운지 더욱 하린을 잡았다.
“내가 묻는 건 그런 것이 아닌데. 아무래도 우 대표한테 말해야 하나.”
“……그냥 최대한 대표님을 꼬, 꼬셔야 한다고!”
우기익에게 말해야 한다고 하니, 하린의 눈이 더욱 커졌다.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표현을 하려니 말을 더욱 더듬었다.
그것만은 절대 말려야 해!
라고 쓴 것 같은 표정을 하는 하린의 표정을 보며 조 대표는 내심 생각했다.
‘완전 애구나.’
이런 어린애로 자신을 속이려고 한 우기익이 대단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그럼, 섹스도 아버지가 시킨 겁니까?”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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