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하린은 멍한 정신 속에서 조 대표의 말을 다시 물었다.
“네……?”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조 대표는 그저 웃으며 하린의 물음에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전화가 끊겼다.
저번과 대비 조금은 말투가 다른 것 같기도 하고. 하린은 조 대표라는 사람의 생각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이 그의 행동을 바꾸게 했는지. 얄팍한 상황 속에서 자신이 이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지식이 부족했다.
“아니, 취향이 조금 독특……하신가?”
이를테면 침대에서 도망가는 여자가 이상형이라던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이해하려 했으나 포기였다.
하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껏 긴장되어 있던 근육이 풀렸다.
폭풍우였다. 눈앞에 폭풍이 치고 있으나 나약한 인간은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저 이 파도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길 바랄 수밖에.
“그래도 최악은 피한 건가.”
어떤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든 조 대표가 자신의 방패를 자처했다.
당장 하린은 우기익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만일 조 대표로 우기익의 시선을 돌리고 안심하게 만든 다음, 태형의 도움을 받아 도망을 간다면.
이보다도 더 좋은 시나리오는 없었다.
만일, 도망에 실패한다면?
순간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 왔다. 정말 외국이라 한들, 우기익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도망이야 태형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지만, 그 이후로부터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만 했다.
하린의 인생에서 악연은 우기익만으로도 벅찬데 이번에 조 대표까지 생기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
평생을 우기익의 그림자 아래에서만 있었던 하린이었기에 홀로서기가 아니, 우기익을 벗어난다는 행위가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만일 다시 잡혀 온다면.
“그때는 정말 끝이겠지.”
우기익은 자신의 손을 맘대로 어긋나는 것을 참지 못한다. 지금도 제 뜻과 반하는 행동을 하면 죽일 듯이 잡는데.
진짜 도망갔다가 잡혀서 돌아온다면, 그때는 우기익의 손에 맞아서 죽을지도 몰랐다.
밖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과연 내가 나가서 혼자 버틸 수 있을까?
세상은 언제나 그녀에게 잔혹했기에, 이런 기회가 와도 겁이 먼저 났다.
“세 번 더 만나 보자는 사람이랑.”
하린의 음성이 조용한 실내에 퍼졌다. 누가 들을까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도망치게 해 준다는 사람이랑…….”
두 가지의 변동이 눈앞에 찾아왔다. 선택은 하린의 몫이었다.
그 두 선택지 무엇이, 정답일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애초에 정답 따위는 없을 수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하린은 이내 핸드폰을 찾았다. 제아무리 고민한다고 하여 당장 결과가 나올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기익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비서한테 말해 둘 테니까 저번처럼 꾸미고 가.]
조 대표가 꽤 우호적이고, 오늘도 자신을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하니 단박에 나온 우기익의 대답이었다.
“조, 조 대표님이 백화점에 가자고 하셔서 적당히 입고 오라고 하셨어요.”
[……?]
저번처럼, 노출이 심한 창녀처럼 입으라는 말이었다.
그것만은 정말 싫었는지 순간 튀어나온 거짓말에 하린은 자신의 입술을 저도 모르게 막았다.
“이, 이번엔 주셨던 명품…… 으로, 입어 볼까요.”
우기익이 침묵으로 대답을 미루자, 하린은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뱉었다.
[그럼 저번에 미리 사다 둔 옷 입고. 화장이랑 장식만 하고 가든가.]
“알겠어요.”
전화기가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짙은 숨을 내뱉으며 천장을 바라봤다. 두려움과 매일같이 직면하는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왜 꾸미는 것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네.”
저번에 보니 조 대표는 사실 말로는 망나니 같이 굴어도 사실 행동을 보고 있자면 화려한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아닌가, 모르겠다.
그날 또한 여러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파악을 잘못했을 수도 있었다.
“정신 차리자.”
하린은 몸을 일으키며 제 뺨을 툭툭 쳤다.
그래도 전보단 희망적이잖아. 하린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속으로 외쳤다.
“도망…….”
갈 수 있다.
조 대표와의 만남이 정해졌으니 외출 준비를 해야 했고, 결국 우기익의 뜻대로 저번에 갔던 가게로 향했다.
물론 저번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고가의 명품 원피스를 입은 모습은 노출이 없다는 것 정도.
그것도 20대 초반이 입기엔 연령층이 높은 브랜드의 옷이라 꼭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아 보였다.
화장과 머리가 끝나자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하린에게 어울릴 만한 액세서리를 들고 왔다.
“저번에 착용하셨던 액세서리는 어디에 계실까요?”
“아……. 그거 집에 두고 왔는데. 죄송해요. 반납해야 하는 건지 몰랐어요.”
“아닙니다. 다음번에 같이 반납해 주세요.”
“네.”
우기익이 아무리 하린에게 아낀다고 하여 보통 대여 제품을 쓰게 한 적은 없었다.
생각보다 비싼 물건이었나……?
라고 생각하던 중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아무래도 연락 올 사람이 딱 한 명뿐이었다.
‘조 대표겠지.’
핸드폰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친구도 없었기에 평소 울릴 일이라고는 우기익 연락밖에 없는 핸드폰이었다.
『저번에 봤던, 그 호텔 라운지에서 봅시다.』
역시였다.
다시금 감정이 침울해졌다. 그래 나에게 올 연락 따위는 이런 것뿐이지.
“아.”
순간, 아까 억지로 받아 왔던 태형의 명함이 생각났다.
연락처도 저장해 놨는데, 연락 한번 보내 볼까.
이상하게 태형을 생각하니, 침울했던 감정이 조금은 풀리는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정함을 보여 주고 행동해 준 사람. 성숙한 어른. 하린은 핸드폰을 들어 그에게 연락하려고 했다.
전화는 귀찮아할 것 같고, 문자라도 보내 보는 거는…….
한참을 고민하던 하린은 핸드폰을 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 대표에게 온 연락은 무시하고 다시 고민했다.
“질척거리면 정말 차단당할 것 같으니까.”
쓰고 지우기를 무수히 반복하기를 여러 번, 하린은 미약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면 차단당하지는 않겠지.”
* * *
조 대표를 만나기로 한 시각이 되었다. 하린은 저번처럼 호텔 라운지로 향했고. 조 대표는 저번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굳이 이 호텔로 부를 건 뭐람.
저번의 기억이 유쾌하지 않은 건 그 역시도 같을 것인데, 왜 여기로 또 부르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안녕하세요.”
“저번보다 더 아름답네요.”
눈을 찡그리며 말하는 조 대표의 말에 얼굴이 찌푸려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름답다는 말이 칭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하린의 귀에는 비꼬는 것에 가깝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벗었던 저번보다 낫다는 말.
하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꾸벅 숙이는 것으로 대신했다. 조 대표는 그런 하린을 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뭐합니까. 손 민망합니다?”
악수하자는 제스처인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아 악수했다.
“……감, 감사합니다.”
하린은 그가 무서웠다.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나, 묘하게 뜻을 알 수 없는 사람.
저번부터 느끼던 거지만 조 대표라는 사람은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기는 것 같았다.
그와 잡은 손을 빼려고 하자, 조 대표의 다른 손이 하린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순간이었기에 놀라 숨이 흡, 소리가 나도록 들이마셨다.
그것을 본 조 대표는 산듯하게 웃었다.
“너무 겁먹지 말아요. 안 잡아먹습니다-.”
“잡, 잡아먹다니요.”
하린은 붉게 물든 얼굴을 당당한 척 들어 올렸으나 무리였다.
부끄러움에 상기된 피부, 자신의 감정을 감추러 오히려 과하게 움직이는 행동. 그 모든 것이 하린의 약점이 되었다.
“아니,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는 것이 꼭.”
그리고 그 모습을 뱀의 눈으로 샅샅이 살피는 남성.
조 대표는 하린을 보며, 자신을 숨길 줄 모르는 것이 세상에 처음으로 나온.
“병아리 같아서요.”
같다고 생각했다.
하린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병……아, 리?
하린이 그런 표정을 짓든 말든, 조 대표는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봤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동공이 한곳에서 멈췄다.
“이번에도 쓸모없는 것을 또 달고 왔고.”
못마땅한지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하린의 손가락.
정확히는 반지에 향해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하린은 두 눈을 깜박일 뿐이었다. 물어봐도 딱히 조 대표가 친절히 설명해 줄 것 같지 않았기에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이번 복장은 자의, 입니까?”
저번과 확연히 달라진 옷. 저번 그 복장보다 나아지긴 했으나, 이 역시 하린과 어울리는 옷은 아니었다.
가슴을 다 가리고, 치마는 무릎 위까지 오는 정숙한 옷. 대신 중년이 입어도 될 정도로 무난하다 못해 올드한 옷이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하린은 그의 대답에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질문했다.
“……제, 제가 왜 다시 보고 싶으셨나요.”
바들바들 떠는 것이 꼭 토끼 같았다. 조 대표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모로 비틀다 이내 웃어 버렸다.
“호기심, 혹은 재미?”
“재……미요?”
하린은 조 대표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와 엮었던 모든 일 중에서 재미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우하린 양에게 재미를 느꼈다고 하면 너무 미친놈 같습니까?”
조 대표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듣는데 울컥하는 감정이 속에서 올라왔다.
나의 수치가 누군가에게는 재미로 느껴진단다. 나의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저는 그다지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니지. 재미가 있고 없고는 내가 판단하는 거지.”
태어나기를 나약하게 태어난 자신은 그에게 따질 힘조차 없었다. 그저 미간을 찌푸리고 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뭐 나쁜 거 아니지 않습니까?”
“…….”
“두 집안 다 우리가 엮이길 바라고. 더군다나 우하린 씨와 내가 둘 다 윈윈할 수도 있을 것 같고.”
하린이 대답하지 못하자, 조 대표는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을 했다.
“그럼 질문을 다르게 하죠.”
조 대표는 산뜻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섹스어필, 좋아서 하는 거였습니까?”
지은이 : 퍼플독
펴낸곳 : 툰플러스
펴낸이 : 이훈영
주소 : 경기도 부천시 부천로 198번길 18, 202동 1302호 (춘의테크노파크 2차 / 경기콘텐츠 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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