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잖아?
몸정. 우기익이 말하는 단어 중, 이 단어가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우기익은 현재 어제의 외박을 조 대표와 했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아마도, 조 대표가 줬을 것이다.
하린은 괴상하게 웃었다.
이 상황에 부단히 적응하려고 했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앞에도 없는 우기익을 위해 경직된 표정 위로 미소를 보였다.
[오늘도 조 대표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해.]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한 우기익은 하린의 의견 따위는 듣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역할은 조 대표를 엮는 우기익의 장기 말이었으니깐 말이다.
하린은 우기익의 불호령을 알면서도 그에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려 했다.
아니 하고 싶었다.
“아버지 오늘은 좀 다, 다음에.”
[이년이…….]
거친 욕설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네년이 하는 것이 뭐 있다고 토를 달아. 반반한 얼굴 하나랑 젊은 몸뚱이밖에 내세울 것 없는 년이.]
고작 말을 듣는 것뿐인데 어깨가 저절로 굽어들었다. 꼭 눈앞에서 우기익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기익이 회사에 있어서 당장 얻어맞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조 대표 오늘 시간이 되신다고 하면…… 만날게요. 연락 해, 해 볼게요.”
[다시 말하지만, 네년이 내 그늘을 벗어나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해.]
하린이 급히 말을 정정하며 우기익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행동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우기익은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불순한 태도를 보이면 싹을 자르고, 밟고 다신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우기익은 경고하고 있었다.
그나마 인간의 삶을 유지하고 싶으면, 내 그늘을 벗어나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라면서 말이다.
하린은 붉게 물든 눈을 하고는 머릿속으로 한 가지 문장만 되새겼다.
우기익을 자극하지 말자.
희망이 찾아왔다. 도망갈 수도 있는 빛. 괜히 우기익을 자극하여 필요 없는 변수를 만들지 말자.
그런 생각을 하며 두려움, 분노 등의 감정을 내리려고 했다.
[조 대표 바짓가랑이라도 열심히 잡아야 할 거야. 더 늙은 놈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끼던 하린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부단히 애썼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우기익의 폭언에 버티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조 대표 아래서 다리 벌리는 게 나았다는 생각이 들게 할 수도 있어.]
참았던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졌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행동해.]
“네……. 연, 연락해 볼게요. 죄, 죄송해요.”
하린은 결국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는 죄를 빈다. 그러면 우기익은 화가 풀리고 자비로운 어른인 척 그런 하린을 용서한다.
이것이 오랜 시간 학습된 행위였다. 머리가 아찔했다.
[그때 준 반지는.]
하린이 조 대표와 밤을 보내고 아침에 먼저 도망치듯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이 정도인데. 심장이 빠르게 뛰어 숨쉬기가 힘들었다.
그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고 도망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식으로 나올지…….
하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네. 착용하고 있었어요.”
[오늘도 착용하고 가. 조 대표가 좋아하더군.]
뚝. 우기익은 제 할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 화면을 보고 나서야 안도한 듯 하린은 깊은숨을 내뱉었다.
전화가 끊긴 것을 눈으로 확인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나서 당장 버텨야 하는 무게를 느끼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조 대표가 단순 선의로 자신을 위해 거짓말할 것 같진 않다.
무슨 꿍꿍이이길래.
아니 애초에 자신에게 꿍꿍이를 할 것이 아니었다. 이 관계의 갑은 조 대표이니까.
도저히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다.
침대에서 도망간 여자가 뭐가 다시 보고 싶어서…….
하린은 불안함에 괜히 태형에게 받은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연락처를 받기 위해 온갖 말을 해대니 귀찮게 하지 말라며 준 그의 연락처.
검정 종이에 흰색으로 깔끔하게 적혀 있는 그의 명함은 네모반듯한 것이 괜히 그를 생각나게 했다.
연락……하고 싶다.
의지하고 싶었다.
생각나는 문장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하린은 고개를 저으며 품어서는 안 되는 감정을 내리눌렀다.
고작 나 따위가 바라볼 사람은 아니다.
대신 그냥, 핸드폰에 이름 저장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그의 고결한 이름에 흠집을 내는 것도 아닌데 뭐.
이상하게 그 사람을 생각하면 불안하던 감정이 안정감을 찾곤 했다. 오늘 역시도 그랬다. 이 불안한 감정 속에서도 이상하게…….
그래서 더 마음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살피던 하린은 태형의 번호를 저장했다.
- 강태형 지사장님.
이라고 쓰다가 이내 지웠다.
“아니지. 내가 직원도 아니고.”
그가 했던 말을 상기하며 하린은 혼자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도 괜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괜히 손에 들고 있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누가 볼까 싶었기에 태형의 이름을 함부로 적을 수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하린은 생각이 끝난 것인지 자판을 두드렸다.
- 잔소리 아저씨.
그렇게 쓴 이름을 보며 하린은 괜스레 즐거워했다. 그를 생각하면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늘을 둥둥 떠다닌다면 이런 비슷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벌게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이이잉- 한참 하린이 태형의 생각으로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문자 한 통이 왔다.
어제 도망쳐 나왔던 조 대표의 연락이었다.
「우리 오늘 다시 볼까요.」
이 연락을 다시 보니 괜스레 가벼워졌던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왜 다시 보자는 거지.”
잠시 뜸을 들이며 고민하던 하린은 조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통화음 사이로 저번에 들었던 조 대표의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오래 걸렸군요. 밖에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조 대표님…….”
[지금 들어온 거면 외박입니까? 나한테서는 도망가더니 조금은 서운한데.]
“……왜 이렇게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에이. 그게 먼저가 아닐 텐데요.]
장난스럽게 가벼운 음성이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하린은 알았다. 이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이미지였다는 것을.
그는 결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도통 무슨 생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나 좀 멋있지 않습니까?]
“네?”
[하린 양을 위해 우 대표에게 손수 거짓말까지 했는데. 멋있다고 느껴야 내가 좀 거짓말한 보람이 있지 않습니까.]
상황은 조 대표의 손을 들어 주고 있었다.
하린은 그의 뜻조차 이해하기 힘든 자리였으나, 조 대표는 아니었다. 나약한 하린과 다르게 지금 나온 몇 가지의 상황만으로 그녀를 휘두르기 충분했다.
[우 대표에게는 비밀로 해 주겠습니다. 우리의 비밀이랄까?]
“어, 어떤 것을요.”
이 남자가 무슨 말을 할지 너무나도 뻔하게 알았기에 하린의 음성은 벌써 떨려왔다.
하린이라는 존재는 기득권의 남성들이 다루기에 너무 연약한 존재였다. 조 대표 또한 그것을 바로 알아봤다.
우하린의 역할은 우기익의 아름다운 인형. 언제든지 누구에게 주고 싶을 때면 주고, 뺏어오고, 잡아 가둘 수 있었다.
물론 다른 기득권의 남성들과 조 대표가 다른 점이 있었다면 조 대표는 사용하는 사람보단 사용당하는 사람에 가까웠다는 거였다.
[하린 양이 내 침대 위에서 도망갔다는 사실?]
조 대표는 하린을 보며 자신에 투영했다. 물론 상황은 다르지만, 입장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처음에는 하린을 곡해해서 바라보았고, 마지막까지 겪고 나서야 자신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판 속에서 힘없이 누군가가 하라는 대로 행동해야 하는 사람들.
우하린에서 우 대표가 있어서 움직였다면.
조 대표에게는 집안 권력을 잡아 휘두르는 새어머니가 있었던 거였다. 그녀는 우기익의 지시를 받아 억지로 맞선 장소에 왔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자신의 손가락에 끼워진 것이 몰래카메라인 것도 몰랐겠지.
어떤 여자가 자신의 비디오를 만들기 바라면서 관계 직전에 도망을 갈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생각하면 우하린이라는 사람은 앞뒤가 맞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싼 티 나게 구는 옷과 대비되는 숫기 없는 말투. 순박한 말투 그러나 한 번씩 티가 나는 거짓말.
[비밀로 해 주겠습니다. 대신 거래할까 합니다.]
조 대표는 자신을 장난스러운 사람으로 포장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이야기 하는 거로 하죠. 저녁 오늘 저녁 괜찮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하시는지, 여쭤봐도……되나요.”
하린의 음성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조 대표는 하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금 더 따뜻한 느낌이 들도록 낮게 내리깔았다.
[걱정할 것 같아서 본론을 미리 말하자면.]
“……네.”
타이밍이 좋았다.
이 여사가 자신을 견제하기 위해 이 여자를 붙여 놓는 거니까 자신도 이것을 이용할 것이다.
더군다나 우하린이라는 이 여자를 보고 있다면, 호기심이 들게 했다.
그녀의 지독한 불행이 궁금했다.
평생을 자신이 제일 불행하다고 살아온 조 대표가 본 다른 불행. 조 대표에게 있어 우하린은 그러한 존재였다.
평생을 약탈당하며 살아왔어도, 살겠다는 이상한 눈을 가진 여자.
[우리 3번 더 만나봅시다.]
자신은 그런 눈을 해 보지 못했기에. 기나긴 어둠 속에서 자신과 유사한 빛을 보았을 때 조 대표는 동질감을 느끼며 동시에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삶에서 호기심이라는 건 독과 같다. 작은 틈에서도 무너지기 쉬우니까.
그래도 우하린 정도면.
잠깐의 호기심 정도는 괜찮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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